김성수 목사/사도신경강해

사도신경 강해(3)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11:13

사도신경 강해(3)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예수)

 

(20:31)

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지난주까지 전능하사 무()에서 천지를 만드신 창조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며, 그 분의 그 전지전능한 권능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전지전능하신 창조의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의 능력을 힘입어 새롭게 창조되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우리의 삶에 아버지의 마음으로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손길을 섭리라고 한다고 했지요? 그리고 그 섭리는 방향도 목적도 없이 럭비공 튀듯 진행되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새 창조의 완성이라는 뚜렷한 목표지점을 향하고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섭리가 정확하게 어떤 목표지점을 향하여 흘러가고 있는 것을 가리켜 경륜(oiconomia)이라 합니다. 기억이 나십니까?

 

그런데 그러한 섭리와 경륜에 의한 새 창조는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유효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만드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투입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서도 그 아버지라는 호칭 바로 뒤에, 우리로 하여금 그 아버지라는 호칭을 쓸 수 있게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설명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가 오늘의 본론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권능으로 친히 이 천지를 만드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그건 원리적인 측면에서만 그러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 특별한 은총을 입은 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예수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진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것을 신학에서는 유효한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부르심에는 보편적 부르심과 유효한 부르심이 있다고 했지요? 원리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을 당신의 나라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들에게는 그 하나님의 부르심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도 빠짐없이 사망으로 던져져 멸해질 운명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선택된 무리들에게 당신의 은혜를 부으셔서 그 분의 초대의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유효한 부르심이라 합니다. 그 유효한 부르심에 대한 반응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믿음은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절대 우리 안에서 생산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2:8-9)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 이니라

그런데 우리는 그 선물로 거저 주어진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1:12~13)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 들이니라

그렇지요?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에서 격발이 된 유효한 부르심, 즉 믿음에 의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권능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무조건 죄를 용서하시면 안 됩니다.

그건 거룩과 공의라는 하나님의 속성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인간들의 죄를 벌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죄에 대한 벌을 직접 내리시면 인간은 모두 다 사망으로 멸해 지게 됩니다. 따라서 공의의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사망이라는 벌로 벌하시고도, 그들을 살려 내시기 위해서는 누군가 자격이 있는 자가 그들을 대표하고, 대신하여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모든 백성들의 죄를 전부 짊어질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자이신 예수님에게 그 임무를 맡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성자는 인간을 대신할 수는 있지만 대표할 수는 없잖아요?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할 자격은 있으시지만 그들을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원숭이를 대표할 수 있는 존재는 원숭이밖에 없고, 호랑이를 대표할 수 있는 존재는 호랑이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원숭이의 대표로 개미가 나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을 대표하기 위해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인간으로 내려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대신해서 벌을 받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라면 그냥 하늘에서 벌을 받고 끝내셔도 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을 대표하셔야 했기 때문에 반드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학적 용어로 내포적 대신(inclusive representative, inclusive substitution)이라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어린 아이로 오셔서 난지 8일 만에 받아야 하는 할례를 시작으로 모든 율법을 다 지켜내셔야 했습니다. 구원은 무죄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으로 상징되었던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지켜낸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는 우리를 대표하고 대신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하신 것이고, 삶에서는 율법을 모두 지켜 선악과를 안 먹은 자의 의로운 삶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 문제와 의의 문제가 모두 해결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왕 그렇게 구원하실 거, 왜 하나님은 모두 다 구원하지 않으시나?’ 이런 질문이 안 드십니까? 그러한 질문에서 비롯된 이단이 보편구원론(universalism)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결국 모든 인간을 다 구원하실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지옥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들의 주장에서 아주 고결한 휴머니즘이 묻어나지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그 의견에 동의하세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 성경 여러 곳에서, 모든 세상이 아니라 그 세상 중에서 당신이 선택한 자들만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악의 세력들은 불과 유황 못에 쳐 넣어 버리실 것이라고 확언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허황된 기대는 어서 거두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요한복음 강해 때 여러 차례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렸으므로 오늘은 구체적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간단하게 몇 구절만 찾아보고 가지요.

(17:6,9)

6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9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그렇지요?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를 보내신 것은 창세전에 당신의 마음속에 선택되어진 자들만을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당신이 선택하신 당신의 백성들만을 위해 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이 역사의 주인공이며 영원속의 주인공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시는 타락할 수 없고, 다시는 죄 속에 빠질 수없는 당신의 나라를 선물해 주시기 위해, 설명용 교보재로서의, 선택 밖의 인간들과 사건들과 상황들을 역사라는 시간 속에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 이외의 모든 인간은 전부 하나님의 백성들의 완성을 위해 창조된 엑스트라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모두 동등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인본주의자들이 들으면 펄쩍 뛸 이야기이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만을 위해 이 우주를 경륜하고 계신 것이고, 그 백성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인본주의자들의 항의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9:22~23)

22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 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잘 보시면 하나님이 진노를 퍼 부으시기 위해 창조하신 진노의 자식들이 있는 반면 영광을 주시기 위해 창조하신 긍휼의 자식들이 대조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능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데 너희들이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으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배제된 인간은 그저 하나님 앞에서 티끌일 뿐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기독교 신앙은 모든 인간은 존귀하다를 증명하고 규명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티끌에 불과한데 그 티끌들 중에 어떤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임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면목 없는 영광을 허락하셨음을 배우고 그 분 앞에 납작 엎드려 부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사활을 걸만큼 중요한 기독교 핵심 교리인 것입니다.

(40:15,17)

15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17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

보시다시피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밖에 있는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들일 뿐입니다. 그렇게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들이 지금 재벌 회장도 되고, 일국의 대통령도 되고, 유명한 인기 연예인도 되고 하면서 멸망을 향하여 열심히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지옥으로 들어가서 하나님 백성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영원히 타게 되는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나사로가 지옥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우리는 영원동안 그 불타는 지옥을 보면서, 똑같은 운명에 처할 뻔한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함을 반추하게 되는 것이고, 다시는 아담처럼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자리를 차고앉으려 하는 반란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여러분이 죽고 못 사는 여러분의 가족들이 들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17:12)

12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여기보시면 분명 멸망의 자식들이 멸망의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임이 명확히 기록이 되어 있지요? 성경은 그렇게 멸망되기로 작정된 멸망의 자식들이 있으며 그들이 가게 될 지옥이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녀삼기 위해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하나님이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 되심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신경의 신앙고백 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바로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부분인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 차 뒤에 물고기 표시를 붙이고 다니시는 분계십니까? 그게 뭔 줄 알고 붙이고 다니시는 거예요?

초대교회 시절에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곧 죽음과 직결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자신의 신분을 표시할 때에 암호처럼 쓰던 것이 물고기 그림이었습니다.

분명 같은 예수를 믿는 사람 같은데 그래도 미심쩍을 때에, 곁에 다가가 슬쩍 물고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을 보고 반색을 하는 이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그 물고기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물고기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익뚜스 ivcqu,j’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의 첫 글자를 연결시키면 바로 ‘익뚜스 ivcqu,j’ 물고기가 되기 때문에 초대 교회 교인들은 물고기를 자신들의 암호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수렴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신경 중에서도 성자 예수님에 관한 내용이 제일 많습니다. 오늘은 그 많은 성자에 관한 내용 중에 가장 처음에 나오는 ‘예수’라는 그분의 이름에 대해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영화 타이타닉의 감독이었던 제임스 카메룬 감독이 만든 ‘예수의 무덤’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세계적으로 이슈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제임스 카메룬 감독과 캐나다의 다큐멘터리 제작자인 심차 야코보비치에 의하면 그 무덤에서 발견된 열 개의 석관 중 몇 개에 ‘요셉의 아들 예수’ ‘마리아’ ‘예수의 아들 유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는 죽은 것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을 해서 유다라는 아들까지 낳고 오래 오래 살다가 죽어 그 무덤에 묻힌 것이 맞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건 그냥 추측일 뿐입니다. 그 당시는 다빈치 코드나 유다복음 같은 영지주의 문서들이 워낙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던 때라 잠시 그 소동에 얹혀가는 듯 했으나 곧 사그라들고 말았지요.

여러분, 예수님 당시에 가장 흔한 남자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아세요? 예수였습니다.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이 자녀의 이름으로 가장 선호했던 이름 또한 예수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흔한 여자이름이 마리아였습니다. 그 무덤은 당시 그런 흔한 이름을 가진 어떤 가족의 무덤일 뿐인 것입니다. 그렇게 흔하디흔한 이름이었던 예수라는 이름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 거의 쓰이지 않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라는 이름이 악명 높은 이름이 되는 바람에 예수라는 이름을 자녀들에게 주는 것을 꺼렸고,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그 이름이 너무나 고귀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그 자녀들에게 차마 예수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잘 안 쓰는 이름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아주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성경에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이 많이 나옵니다. 구약의 여호수아나, 느헤미야 7:7 의 예수아, 호세아 등도 신약의 예수라는 이름과 정확히 같은 이름입니다. 신약에도 몇 명이 나오지요?

(4:11)

11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 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13:6)

6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 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여기서 바 예수라는 것은 예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렇듯 예수라는 이름은 1세기 중반 때까지 아주 흔한 이름이었고 유대인들이 무척 선호하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 흔한 예수라는 이름을 당신의 아들에게 직접 지어주셨을까요? 사람들이 좀 안 쓰는 이름을 붙여 주셨으면 더 신비롭지 않았을까요? 한 동네에서도 ‘예수야’하고 부르면 적어도 수십 명이 돌아보는 그런 흔한 이름 ‘예수’, 그 이유를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21)

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보시다시피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 아들에게 붙여주신 이름이었고, 그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당시 민속 메시아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자기 자식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즐겨 붙였던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구원관에 의한 기대와 희망의 표출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반드시 정치적 군사적으로 구원을 하셔서 하루 속히 다윗 왕국의 회복을 이루어 내실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담아서 그리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기대를 엎어버리고 수정하는 것이 바로 성자의 이름 예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아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주신 것은, 그 아들이 당신의 백성들을 정치적, 군사적, 물리적 구원을 위해 보내어진 이가 아니라, 그들을 죄에서 건져낼 자로 보내어졌음을 확인시켜 주시는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기대가 듬뿍 담긴 ‘예수’라는 이름을 당신의 아들의 이름으로 택하신 것이고, 그 ‘예수’가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수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을 보여줌으로 해서 이 세상 사람들의 구원관과 메시아 관을 뒤집어엎어 버리신 것입니다. 구원자라는 이름을 가진 내 아들 예수가 너희들을 구원할 이가 맞지만 너희들이 기대하는 그런 정치적 군사적 구원이 아닌 죄에서의 구원을 이룰 자라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세 가지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이름을 흔하디흔한 예수라고 붙이신 것은 그 아들이 바로 ‘유일한’ 구원자라는 것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다른 예수 기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아주 포괄적인 용어입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이 세상의 모든 잘못된 것으로부터의 회복과 온전하게 함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물리적, 정신적, 도덕적, 영적 회복과 온전하게 됨’ 이것이 구원이라는 말의 포괄적인 뜻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물리적, 정신적, 도덕적 피폐는 모두 영적인 뒤틀림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지게 되자 물리적, 정신적, 도덕적인 손상이 인간에게 닥쳐오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모든 것에서의 구원은 영적인 면, 즉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의 회복에서만 비롯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죄에서의 구원’이라고 못을 박는 것입니다.

(130:7-8)

7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 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8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

이렇게 구원은 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단어인 것이지, 이 땅에서의 세상 적 행복과 풍요에 관한 언어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의 자유와 평안과 행복과 풍요를 얻는 것이 자신들의 구원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추측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구원의 개념은 자신들이 원하는 행복의 절정 정도인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하나님은 지금 당신의 백성들을 죄에서, 악에서 구원하고 계신데 자기들의 소원이나 비전이나 야망을 이루어 달라고 거기에만 착념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주면 구원은 알아서 챙기겠다는 심사지요.

하나님은 그들의 그 잘못된 생각을 깨고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정치적, 군사적, 물리적 구원자를 기각하시고, 그들의 죄와 악에서 그들을 건져낼 진짜 구원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여러분의 소원을 그렇게 잘 안 들어 주시는지 아세요? 여러분을 죄에서 건지시려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때때로 여러분에게 질병을 주시는지 아세요? 여러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그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소원이 들어지고 병이 치유가 되는 것을 구원이라 생각하고 있잖아요? 아닙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에게 독사의 새끼라는 욕을 먹은 유대인들의 민속 메시아사상입니다. 그걸 한 마디로 유대주의라 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구원은 죄에서의 해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죄는 하나님 백성들을 사망으로 끌고 내려가는 무서운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그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가난과 질병과 사건과 사고 등을 때때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복이거든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의 무서움과 파괴력을 올바로 깨닫고 거기에서 영원히 벗어나도록 만드는 것이 진짜 복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 그들을 당신의 치밀한 계획과 위대한 능력으로 섭리해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게 진짜 복입니다.

그래서 때로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러분의 죄에 치를 떠는 일이 생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세상에게 여러분의 죄를 폭로시켜 버리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는 ‘내가 이러고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맞나?’하고 자괴감에 몸부림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런 일을 허락하실까요? 왜 우리의 허물을 안 가려 주시고 우리가 죄 짓는 것을 안 말려 주시지요? 우리 아버지잖아요? 아버지는 자식이 죄 짓는 것을 말려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 맞습니다. 그러나 강제로 그렇게 만드시지 않으시고 자발적으로 죄에서 떠나도록 만드시기 위해 그런 일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시간 속에서 죄에 대한 선명한 자각과 인식을 가지게 만들어서 영원 속에서는 절대 그런 부끄러운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뭐 대단한 일 하는 것 아닙니다.

그렇게 예수는 유대인들과 유대주의에 빠져있는 오늘날의 교회가 원하는 이 세상의 힘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 당신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그토록 오매불망 구원자를 기다리며 애용했던 ‘예수’라는 이름을 당신의 아들의 이름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사도행전4장으로 가면 그 예수라는 이름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4:12)

12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주신 이유가 나오지요? 천하 인간에게, 하늘 아래 모든 인간들에게 구원자는 예수 하나라는 것을 극명하게 천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이외에 인간의 구원자로 자처하는 그 어떤 것도 다 가짜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막강한 국가권력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나 솔로몬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자신들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 명예, 자식, 인기 등이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 줄 것으로, 다른 말로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딱 잘라서 말씀하십니다. 천하 인간에게 예수 이외에 다른 구원자를 주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자 예수를 좇아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예수와 똑같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길을 가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8:34~36)

34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 이니라

3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여기에서 ‘제 목숨을 구원코자’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자들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교회에서 회중들에게 약속하는 것이 뭡니까? 전부 이 세상에서의 문제 해결이요, 이 세상에서의 만사형통입니다. 그들이 바로 제 목숨을 잃을 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가짜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우리는 물질적, 정신적, 도덕적 피폐와 공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천하 인간에게 예수 이외의 행복의 원인이나 동기가 될 만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 예수가 아닌, 예수가 주시는 떡고물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도 민속메시아 사상에 젖어 진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유대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도 그런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 많이 있지요? 만일 예수님이 이 시대에 그들 앞에 나타났다면 십자가가 아니라 청산가리를 먹여 죽였을지도 모릅니다. 그걸 성도라 합니까?

심지어 어떤 이들은 종교 행위도 복을 받기 위한 도구 정도로만 여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선교사님이 쓰신 ‘내려놓음’이라는 책이 한국 서점가를 강타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지요? 그 책에 보면 이런 예화가 나옵니다.

어떤 아이가 장난감 가게에 들어가서 자기가 원하는 장난감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 장난감이 그 아이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산대에 그 장난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손에 꼭 쥐고 있으면 자기 것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혹시 오해하실 분들이 계실까봐 노파심에서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 말씀드린 예화에서처럼 여러분이 원하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해 잠시 손해보고, 섬겨주고, 예배당에 나와 주고, 헌금해 주고 하는 것은 절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내 것을 챙기기 위해 그 ‘내 것’을 계속 주시하며 계산대에 잠시 내려놓는 것은 진짜 내려놓음이 아닌 것입니다. 진짜 내려놓는 것은 자신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말합니다. 진짜 내려놓는 것은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빼앗김과 버림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빼앗길 때에는 여전히 그 마음에 그 강탈당한 것에 대한 미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버리는 것은 그 마음속에서도 지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이 세상을 그렇게 미련 없이 내려놓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아까워 죽겠는데 복 받기 위해 억지로 잠시 내려놓는 것, 그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날마다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시체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반대급부나 떡고물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자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은 날마다 죽노라고 말씀을 하신 것은 매 순간 자신의 욕망과 욕구와 욕심과 소원과 비전과 야망을 죽여 갔다는 말인 것입니다. 루터는 ‘나는 날마다 세례를 받는다’고 했지요? 역시 죽는다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매달린 시체가 되어져 가야 하는 것이지 절대 가짜 내려놓음을 통하여 자기 것을 챙기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흥회에 가서 록펠러 이야기 많이들 들어 보셨지요? 석유 왕 록펠러가 십일조를 꼬박 꼬박 해서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으니 우리도 십일조 떼먹지 말고 열심히 하자는 소리를 아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셨을 겁니다. 여러분, 록펠러가 십일조를 계산하는 사람만 수십 명을 고용하여 십일조를 꼬박꼬박했다는 그런 소리에 너무 감격하지 마세요.

록펠러의 스탠더드 석유회사는 미국인들이 가장 증오하는 기업이었습니다. 록펠러는 매수와 뇌물과 사보타지 등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사들을 무력화시키고 거대 독점 기업을 일구어 낸 사람입니다. 그는 거대 독점 기업가로서 근로자들의 임금을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착취하고, 정유 가격을 인위적으로 올릴 수 있는 막강한 독점 기업가가 되어 그 많은 재산을 끌어 모은 것입니다. 심지어 형편없는 작업환경을 견디다 못해 파업을 한 노동자들의 천막촌을 민병대를 시켜 기습을 해 50여명이나 사살했던 사람입니다. 미국의 의료보험이 왜 지금까지 이렇게 비싼 민영화에 머물러 있는지 아세요? 록펠러 재단이 미국의 의학기술 발전과 의료계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주무르기 위해 막대한 동력을 제공해 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쿠바에서 몇 센트면 살 수 있는 약이 미국에서는 100불이 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십일조를 그렇게 열심히 했다면 그 이유는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십일조 해야 하나님이 재산을 더 많이 불려 주신다는 신념하에 한 것입니다. 그건 십일조도 아니고 신다도 아도 아니고투자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자신의 원하는 거 아어내기 위해 종교행위를 징검다리 삼아 넘어가는 기회주의자여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예수를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히려 당신의 백성들의 삶 속에서 그들이 예수 이외에 행복의 근거로 삼고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빼앗아 가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내 아들이 자기 자식에게 너무 목매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그 자식을 빼앗기도 하시고, 내 딸이 돈에 너무 목매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돈을 빼앗아 가시기도 하시며, 내 자식이 너무 건강에 착념하고 있는 것이 안쓰러워 질병을 허락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천하 인간에게 예수 이외에 구원을 얻을 만한 이름을 준 것이 없는데 너희는 어떻게 돈, 명예, 건강, 자식 등의 또 다른 구원자의 이름을 대고 있느냐? 내 아들아, 내 딸아 내게로 돌아오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이름을 구원자, 예수라 붙이신 것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당신의 친 백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1 21절을 다시 한 번 보세요.

(1:21)

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은 누구를 구원하러 오시는 이의 이름입니까? 자기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러 오시는 분의 이름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시면서 잘 구별해서 읽으셔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라오스, 백성’이라는 단어의 용례입니다. 성경에서 ‘백성, 라오스’라는 단어는 두 가지로 쓰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구속사를 설명하시기 위해 잠깐 선택하셨던 민족적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1:10-13)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 들이니라

여기보시면 자기 땅이라는 말이 나오고 자기 백성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서의 자기 땅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말하는 것이고, 자기 백성은 그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는 민족적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영접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하나님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아무도 영접하지 않는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노력이나 눈썰미나 지식이나 열심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만이 예수를 영접하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자 예수에 의해 구원을 받게 되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은 결국 하나님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창세전에 이미 결정이 된 그들을 위해 당신의 아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주어 이 땅에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가리켜 당신의 친 백성이라 부르십니다.

(18:9~10)

9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데 그 곳 사람들이 많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바울을 독려하시는 대목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그러나 당신이 창세전에 택해 놓으신 당신의 백성들이 많이 있으니 그들 모두에게 복음을 전하고 다른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곳에서의 ‘백성, 라오스’는 민족적 이스라엘을 총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창세전에 선택이 된 하나님의 독특한 백성들을 제한적으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말씀을 듣고, 그 후로 고린도 교회에 1 6개월을 더 유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 때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인지가 같은 사도행전 13 48절에 나옵니다.

(13:48)

48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은 모두 어떤 이들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믿지 않는 이들이 있었지요?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빠져있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똑똑하고 유식하고 많이 배운 사람도 창세전에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 있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는다 해도 엉뚱하게 믿습니다.

 

지난주에 산호세에 있는 우리 노회 목사님께서, 얼마 전에 한국에 있는 모 대형교회의 목사님 설교가 인터넷 youtube라는 곳에 떴다고 한 번 보라는 연락을 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설교를 들으면서 정말 아연실색했습니다. 5만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교인들이 앉아 있는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는 목사님이 UFO에 대해서 가르치시는 그런 장면이었습니다.

아담은 에덴을 떠날 때에 자신의 전용기인 UFO를 타고 이 땅에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타나고 있는 UFO들도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운송수단으로 하나님이 쓰고 계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UFO를 타고 천군천사들과 함께 재림을 하실 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올바른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는 자기 교회의 수련회에 하나님께서 UFO의 운행 방식과 같은 공간 이동으로 잠자리들을 보내셔서 모기를 다 잡아먹게 해서 자신들은 몇 년 동안 모기가 없는 수련회를 했다는 그런 코미디 같은 설교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5 만 명의 교인들이 아멘으로 화답하며 그 설교를 열심히 듣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환호와 박수까지도 치면서 그 목사의 설교에 호응을 해 주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들으시고 어떤 기분이 드세요? 정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의심스러우시지요?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볼까요? 통일교의 원리강론에 보면 문선명이라는 사람이 재림 예수로 등장합니다. 통일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 문선명이라는 사람은 첫 번째 예수가 실패한 일을 완성하러 온 참 메시아입니다.

그들은 하와가 뱀에게 유혹을 당한 것을 강간을 당한 것으로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인류는 더러운 피가 흐르는 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더러운 피가 흐르는 죄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깨끗한 피를 수혈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깨끗한 피는 메시아인 문선명한테만 흐릅니다. 따라서 여자들은 문선명과 잠자리를 함께 하여 자신들의 피를 깨끗하게 한 뒤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해서 그 깨끗한 피를 전수해 주어야 합니다.

 

그 곳에 현직 대학 총장과 교수들, 장군들과 국회의원들이 부지기수로 앉아있다면 여러분이 믿으시겠어요? ‘어떻게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에 속아 넘어갈까?’하고 생각하시지요? 아닙니다. 인간의 우매함이라는 것이 그 정도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은혜로 붙들어 주시지 않았다면 그런 소리에 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은 창세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연고로 이렇게 믿음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기복주의, 신비주의, 세속주의 모두 창세전에 택함을 받지 못한,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벗어난 이들의 엉터리 작품이라는 것 잊지 마세요.

 

여러분,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간단하게 예를 들어드릴게요. 나침반을 잃어버린 오지 탐험가들이 어떻게 방향을 잡는지 아시지요? 그들은 하늘에서 북극성을 찾아 방향을 잡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그 북극성의 빛이 언제 출발한 것인지 아세요? 정확하게 680년 전에 출발한 빛입니다.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1338년이니까 그 북극성의 빛은 고려시대에 출발한 빛인 것입니다. 그것이 2009년 어떤 t그들눈에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타의 현실을 시간 속에서 이해잡습니눤눤눤지 마시고 영원 속에서 이해잡습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680년 전에 출발한 북극성의 빛이 오늘 현실로 나타난 것이 과학인 것처럼 수만 년 전, 아니 수천억년 전에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과 예정 속에 들어 있던 사람들과 사건들이 공간 속에서 현실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역사인 것입니다.

영원 속에서 그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그림은 하나의 평면이었습니다. 그것이 공간 속에 차례대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시간이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원 속에서 아브라함과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도 친구입니다. 여러분의 자식과도 친구입니다. 천국에 가면 여러분의 자식은 여러분 것이 아닙니다. 그냥 동지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속에서 공간 속에서 부자의 관계로 잠시 사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가족을 자꾸 객관화 하여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해서 너무 거기에 집착하다 보면 진짜 여러분이 집착해야 할 하나님을 놓치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자식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어떡할 거예요? 여러분은 영원히 그 자식이 지옥에서 불타는 걸 지켜보셔야 합니다.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9번을 보겠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9번 질문이 이러합니다.

29. 왜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 즉 구원자라고 불립니까? 그 답이 이러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를 우리의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다른 데서 구원을 추구하거나 찾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는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유일하신 구원자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는 절대 다른 것에서 구원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로만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 사상이나 성자들의 공로를 의지하는 그런 행위는 참된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구원은 마리아나 다른 성인들의 공로를 의지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모든 믿는 자를 ‘성도’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모든 믿는 자들은 다 ‘성인’인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 성 베드로, 성 요한 그런 것 없단 말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다 성인입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의 공로를 빌어서 구원에 이른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0번 질문이 이러합니다.

30. 그렇다면 그들의 구원과 지복을 성인들과 자신들이나 다른 것에서 찾는 이들은 유일하신 구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까? 그 답이 이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심지어 자랑할지라도, 그들은 사실상 유일하신 구주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참된 신앙으로 구세주를 받아들여서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예수 안에서 찾아야 하는 기독교 신앙에서 벗어난 사람들인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예수님을 완전한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모두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기억하셔서 어떤 예수를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열심히 배우세요.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마치겠습니다.

(20:31)

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 기록이 된 것입니다. 로마의 황제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 함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가 진짜 구원자임을 믿게 하려 함이라는 말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 그 예수를 좇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역사와 인생을 통과하는 자만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 잊지 마시고

이 세상의 힘을 약속하는 짝퉁 예수를 제시하는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에 속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