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신경강해

(사도신경 강해 I)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창1:1)

은바리라이프 2013. 10. 7. 12:44

(사도신경 강해 I)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창1:1)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우리는 오늘부터 몇 주간에 걸쳐 사도신경을 공부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신경 강해가 다 끝나면 매주 우리 서머나 교회 공 예배 시간에 신앙고백 순서를 넣어서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믿는 바가 무엇인가를 재확인하고 공포하고 고백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원래 개혁교회의 예배의 모범에는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을 하는 순서가 모두 들어가 있습니다. 루터와 칼빈, 쯔빙글리 모두 예배의 모범에 사도신경 고백 순서를 공히 넣었습니다.

그것은 사도신경이 우리 기독교가 믿는 바를 가장 잘 요약하고 있고, 사도들의 가르침 위에 선 하나님의 ‘교회’가 마땅히 동의하고 숙지해야 할 사도들의 가르침의 핵심이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로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크게 열두 개 항목으로 헤드라인화 한 것이 사도신경입니다.

사도신경의 신경이라는 단어는 ‘creed’입니다. 그 단어는 ‘크레도’라는 라틴어에서 파생이 된 단어입니다. 그 라틴어 크레도는 ‘내가 믿는다’ 혹은 ‘내가 마음을 주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사도신경이라 함은 ‘사도들이 믿었던 바, 사도들이 마음을 모두 내 주었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신경이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열두 사도들이 교회의 믿어야 할 바를 한 가지씩 꺼내 놓아 열두 항목이 된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성경의 내용이 그러하다는 의미에서 사도신경인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사도신경을 아주 강조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솔라 스크립투라, 오직 성경은 바로 이 사도신경으로 요약되는 성경의 교리와 신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이렇게 우리의 믿는 바를 올바로 정리를 해 놓는 것이 그 어느 시대보다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은 이론, 이념, 교리 같은 것에 대한 신임을 말할 수 없이 약화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상대적인 것으로 밀려나고, 그 어느 것도 영원할 수 없으며 절대적일 수 없다는 사상이 포스트모던 사회에 편만하게 퍼져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의 절대성과 진리 됨을 올바로 배우고 깨닫고 숙지하여 이단 사설이나 거짓 사상에 현혹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이 사도신경에 대한 내용이 아주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각 항목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내용을 인용하여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질문 답변식의 디스푸타치오(disputatio)방식으로 기록이 된 기독교 교리집입니다. 우리 청년들은 개척 초기부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열심히 공부를 해서 이미 잘 알고 있지요? 우리 CRC 교단에서는 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의무적으로 공부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매주 반복하여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만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담겨있는 기독교 교리는 반드시 숙지해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라는 책으로 편집이 된 교리 강해를 할 때 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내용보다 더 자세하게 교리에 대해 설교를 했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라는 책을 구역 예배 시간에 공부하도록 한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 교회는 CRC 교단이 지정한 지역교회의 의무를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차치하고 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2번에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22.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필수적으로 믿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답이 이러합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것 전부를 믿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도신경 안에 잘 요약이 되어 있는데 사도신경은 일반적이고 의심할 수없는 기독교 신앙을 요약한 조항들입니다.’

이렇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도 기독교의 핵심교리로 사도신경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사도신경의 열 두 항목을 반드시 열심히 공부해 놓으셔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사도신경의 역사와 생성 과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도신경은 사도시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도신경이 아니라, 사도들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사도신경이 된 것입니다. 현존하는 문서 중에 사도신경과 가장 흡사한 신앙 고백이 2세기 카르타고의 터툴리안의 기록에 등장합니다.


‘전능하사 만물을 지으신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그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육체의 부활을 위해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어떠세요? 지금의 사도신경과 비교해서 몇 가지가 빠져 있지만 그 뼈대는 아주 흡사하지요?

이것이 2세기 터툴리안의 시대에 성도들이 고백했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후 215년의 히폴리투스(Hippolytus) 신앙고백이나 주후 404년의 루피누스(Rufinus)의 신앙 고백, 그리고 비슷한 시기의 아프리카 교회의 신앙 고백 등이 지금의 사도신경과 거의 흡사합니다. 그러나 이미 그 전에 순교자 저스틴의 신앙고백이나 네오투스(Neotus)를 치리한 서머나 교회의 장로들이 그 회의 자리에서 고백하여 회의 기록에 남아 있는 그 신앙고백도 지금의 사도신경과 대동소이합니다. 

이렇게 지금의 사도신경과 대동소이한 여러 종류의 신앙 고백들이 교회 안에서 다양하게 사용되다가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남부 프랑스에서 지금의 사도신경으로 확정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주후 710-724년에 정식으로 널리 보급된 ‘공인된 문서’ ‘텍스투스 리셉투스(Textus Receptus)'에 의해 교회 안에 편만하게 퍼지게 되었고, 9세기경에 로마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져 정식으로 교회에 정착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신경은 초대교회 때부터 뼈대가 만들어져서 교회 안에서 여러모로 고백되어지다가 정착이 된 교회가 믿는 바, 핵심 교리인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사도신경이라는 신앙고백을 예배의 모범에 사용을 하고, 혹 예배 순서에는 들어가 있지 않더라도 교회의 합의된 신앙고백으로 자주 암송을 하고, 고백을 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교회가 신자라고 자처하는 이에게 세례를 줄때, 그가 과연 세례를 받을만한 사람인가에 대한 표준으로서 사도신경이라는 신앙고백이 필요했습니다.

교회가 세례를 받겠다고 나서는 사람이라고 해서 아무에게나 세례를 줄 수는 없습니다. 그 때 필요한 것이 그가 믿는 바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새 가족 성경공부를 마친 후에 신앙 고백서를 받지요? 그리고 그 신앙 고백서에 근거하여 교회의 멤버십을 허락합니다. 우리와 믿는 바가 다른 사람을 교회의 멤버로 받아서 함께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 고백서를 받아서 사도신경의 내용에서 벗어난 신앙을 고백하는 이, 즉 기독교의 핵심 교리에서 벗어난 신앙을 가진 이는 다시 개인적으로 복음을 가르치거나 해서 올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고 진화론에 젖어 있는 이는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대목에 걸리지요? 그런 이는 교회의 멤버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과 성자되심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 이들은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며’에 걸립니다. 그런 사람들 역시 교회의 멤버로 받아 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다시 오심에 관한 약속을 믿지 않는 이도 사도신경의 고백에 걸려 넘어지지요? 그런 사람들도 교회의 멤버가 될 수 없습니다. 아울러 그런 이들에게는 교회가 세례 또한 베풀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교회가 교회의 멤버십 결정이나 세례 등에 앞서 사도신경과 같은 신앙 고백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는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시킬 때 사도신경의 내용에 근거하여 가르쳤습니다. 자녀들에게 부모의 신앙을 물려주려면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알려 주어야 하지요? 그 때 신앙의 가장 기본적이며 근본적인 핵심 교리로 이루어진 사도신경이 자녀들의 신앙교육의 뼈대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교회에 사도신경이 필요했던 이유는 이단들의 사상을 물리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물론이고 2,000년 교회 역사상 이단과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가 없던 시대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지 않은 펠라기우스, 알미니우스, 영지주의, 신비주의, 세속주의, 기복주의 등등 이단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해 왔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이 올바른 성경 교리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도신경에 비추어 그 테두리에서 어긋난 사람들이나 집단들을 이단으로 규정을 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한 믿음, 한 신앙 고백 안에 존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절대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신앙고백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엡4:4-6)

4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렇게 교회는 한 하나님을 믿는, 한 믿음, 한 신앙 고백 속에서 한 목적지를 향해 가야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의 교회가 믿는 믿음은 너무나 여러 종류입니다.


아닙니다. 믿음과 소망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기독교의 한 믿음과 한 소망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로 수렴되고 지향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교회는 소망의 대상을 이 세상 것으로 변질시켜 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그 달콤한 미혹에 빠지면 안 됩니다. 그래서 더더욱 사도신경에 요약되어 있는 기독교 교리 공부가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4세기 말의 루피누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왜 사도신경의 공부가 꼭 필요한 지가 더욱 실감이 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 하나님께서 강림하시고 이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전하여지는 시대가 임하게 되어 주님의 명하신 대로 교회는 세상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그들이 선포해야할 복음 설교가 각 사람마다 다르게 전하여 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함께, 한 자리에 모여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사도의 가르침에 근거하는 짧은 형태의 신경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사도신경의 시작입니다. 특히 개신(改信)자들이 처음 교회의 멤버로 들어올 때에 신앙고백을 위한 표준으로 이 사도신경을 올바로 알고 고백하도록 하게 한 것입니다.’


이제 왜 교회가 사도신경을 그토록 소중하게 간직하고 전승해 왔는지 아시겠지요?

의외로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내용을 물으면 머뭇거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믿는바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것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신앙은 반드시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꼭 알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믿는 대상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그가 자신을 위하여 행하신 일의 진의도 파악하지 못하며 무조건 믿는다고 하는 것처럼 우스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기독교 신앙은 ‘나는 믿는다’라는 결단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는 것까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믿는 바의 내용을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하며 그 신앙의 내용이 내 안에서 그저 잠자는 것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불가항력적으로 고백이 되고 전파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0장9절로 갑니다.


(롬10:9~10)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여기에서 마음으로 믿는다는 말은 지식을 포함한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어에서는 머리(head)와 마음(heart)를 구분하지요? 다른 말로 아는 것과 믿는 것을 구분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마음이라고 할 때에는 지식을 제외한 마음이 아니라 지식을 포함한 마음입니다.                                                   따라서 마음으로 믿는다는 말은 지식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아울러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무조건 결단을 해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논리적인 결론이나 인과관계의 결과가 아니라 한 인격체가 결과에 대해서 전적으로 책임질 수 있도록 결정하는 것을 실존의 핵으로 보았습니다. 반면에 그들은 상대적으로 결단의 내용을 무시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단의 내용(믿음의 결단)을 매우 중요시합니다.

누군가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 하고 물으면 ‘예수를 믿는다’고 대답을 해야 함과 동시에 그 예수가 누구인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런데 그 예수가 무엇을 했는데?’ 하고 물었을 때에도 여러분은 그 내용을 대답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냥 ‘그런 건 몰라도 돼, 그냥 믿기만 하면 돼’하시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믿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몇 주간에 걸쳐 우리가 믿는 바에 관한 아주 간결하고 핵심적인 지침인 사도신경을 강해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니 잘 공부하셔서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당신이 믿는 바에 대해 나에게 이야기 해 주시오’ 했을 때에 당황하지 않고 설명해 줄 수 있는 준비를 해 두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이 사도 신경으로 요약되어 있는 성경, 즉 우리 성도들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 힘들고 어려운 신앙의 여정 동안에 위로와 격려와 용기를 얻으실 수 있기를 바라고 거짓 선지자들이나 거짓 교사들의 현혹에 절대 흔들리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의 항목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사실은 이 첫 번째 항목을 공부하기 전에 삼위일체에 관해 먼저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이 사도신경의 구조를 보면, 사도신경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0번 문항을 보면 사도신경을 이렇게 나눕니다.


1. 성부 하나님과 우리의 창조

2. 성자 하나님과 우리의 구원

3. 성령 하나님과 우리를 거룩하게 하심


사도 신경을 머릿속에 잘 떠올려 놓고 설교를 들으셔야 합니다.


어떠세요? 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구분이 맞는 것 같습니까? 예, 정확하게 잘 구분해 놓은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사도신경에도 삼위일체의 사상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지요? 따라서 사도 신경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먼저 삼위일체에 관해 공부를 하고 그 뒤에 열 두 항목에 관해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삼위일체에 관해서는 제가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라는 책과 요한복음 강해 때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렸으므로 사도신경 강해에서는 생략하도록 하고 바로 본 문장의 해석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좀 더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은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성령 편과 요한복음 강해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1,2편을 모두 들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사도신경에서 제일 먼저 고백하는 것은 우주와 인간 존재 자체에 관한 것입니다.                                        ‘왜 무엇이 존재하며 왜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왜 천지와 만물이 존재 하는가’에 관한 이 질문은 철학자 라이프니츠(Leibniz)에 의해 제기된 후 많은 철학자들이 반복하여 물었던 질문입니다. 

사실 모든 신비 가운데 가장 큰 신비는 만물과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해서 인간과, 태양과, 달, 별, 바다, 산, 짐승, 식물 같은 것들이 존재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입니다. 일단 그 존재에 관한 질문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의미나 의의나 목적, 가치 등에 대한 모든 논의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는 다른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그런 식의 존재가 아니라 영원 전부터 계시는 영원한 존재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모든 다른 것들을 존재케 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게 이미 존재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의해 모든 것이 창조가 되었다는 것에서부터 역사는 시작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인류와 우주의 역사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 인간들은 천문학자 라플라스(Laplace)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라는 가정 없이도 모든 원리를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쳐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가설은 진화론입니다. 우주의 모든 것이 진화론적으로 형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물질이라는 것이 우연히, 이렇게 결합이 되고 저렇게 연결이 되어서 결국 오늘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진화론에 의하면 인류의 역사는 우연이며 우발적인 것입니다. 기실 저도 이해가 가긴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내릴 수 있는 역사의 시작과 과정과 결론은 진화론적으로 설명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를 믿고, 인류와 우주의 역사의 실체와 그 존재 목적을 명확히 알게 된 우리 성도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까?

예전에 제가 다니던 대학에서 제 지도교수님이셨던 손봉호 교수님께서 진화론에 대해 이런 예화를 들어주신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바닷가에서 시계를 하나 주웠습니다. 줄이 달려 있고 시계 침이 정확하게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 시계를 주운 사람이 그 시계를 보고 ‘이 시계가 이렇게 시계가 된 것은 저 바위 속에 있는 철분이 오랜 세월 동안 파도에 밀려 서로 뭉치고 깎여서 여러 가지 모양이 된 것에서 시작이 된 거야. 어떤 것은 동그랗게 깎여서 시계의 글자판이 되었고, 또 다른 것들은 뾰족하게 깎여서 우연히 시계 바늘 모양이 되었고, 어떤 것들은 울퉁불퉁하게 깎여서 시계의 톱니바퀴들이 되었고, 바위와 모래 속의 유리 성분은 서로 합쳐지고 깎여서 시계 유리가 된 것일 거야.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시계부품들이 우연히 자기 자리를 잡아서 이렇게 완성된 시계가 된 거야’라고 주장을 했다고 해 보세요. 여러분은 모두 배꼽을 잡고 웃으실 겁니다. 왜 그렇지요? 시계라는 것은 초정밀 기술이 필요한 아주 복잡한 기계이거든요. 그런데 그러한 시계가 우연에 의해, 진화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지요.

그런데 그 시계와는 비교도 할 수없이 복잡하고 정밀하며 상상을 초월할 만큼 섬세한 인간과 짐승, 식물 등의 존재가 우연히 그렇게 생겨났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침묵을 하십니까?

여러분, 이 우주의 모든 생물체는 아미노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아미노산이 우연히 합쳐져서 단백질을 구성할 확률은 10의 130승 분의 1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미노산과 단백질이 모두 합쳐서 가장 원시적인 생명체인 아메바가 될 확률은 10의 1,676,260승 분의 1입니다. 이 우주의 물질들이 수십 억 년 동안 움직이다가 우연히 만나 결합을 하여 생명체가 될 확률이 10의 1,676,260 승 분의 1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불가능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진화론을 주장하는 미국 진화론의 대부 카플란 박사조차 ‘아미노산과 단백질이 우연히 조합하여 생명을 형성할 수 있는 확률이 10의 1,676,260 승 분의 1이라는 것이 확실한 만큼 생명체를 제공하는 자, 즉 창조자가 없이 생명이 생길 수 있는 확률은 0(zero)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자바 원인이나, 베이징 원인, 네안데르탈인 등의 인류 진화의 과정 속에 나타났다고 하는 그러한 원인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고작 송곳니 두 개를 발견한 과학자들이 그 송곳니로부터 상상해서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송곳니 두 개에서 시작된 상상의 산물들이 버젓이 과학 교과서에 실려 있습니다. 그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를 거부하려는 것이 본능으로 잠재해 있는 것이 죄인들의 실존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그러한 가설들을 확인 작업조차 하지 않고 서둘러 인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무엇을 믿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거기에는 혼돈과 공허뿐이었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라는 것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카오스’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혼돈, 카오스는 ‘무질서한 원 물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질서가 없이 혼돈스럽기는 하지만 어떤 존재가 이미 생겨나 있는 상태가 ‘카오스’입니다. 거기에 창조신이라고 하는 데미우르고스가 신적인 형식(form)을 불어 넣어 이 우주가 생겨났다고 믿는 것이 그리스의 창조신화입니다. 그러한 내용은 플라톤의 글에 아주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내용, 원물질이 있었다는 것은 알미니우스, 팰라기우스의 주장하는 바, 뭔가 선행된 은총이 있었다는 사상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혼돈과 공허는 무(無)를 말하는 것입니다. 혼돈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토후’는 ‘formlessness', 즉 틀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공허라고 번역이 된 ’보후‘는 ’emptiness' 완전히 비어있어 내용물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틀이라는 그릇도 없고, 내용물도 없습니다. 그릇도 없고 내용물도 없다는 것은 무(無)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無)인 상태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습니다. 말씀이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존재라는 것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든 창조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혼돈과 공허로 죽어 있은 상태였는데, 하나님이 유로, 완성품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만들어 내신다는 것이 첫 창조에 담긴 의미입니다.


(히11:3)

3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눈에 보이는 어떤 물질)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우리 성도는 이렇게 믿음으로, 온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무에서 유(有)로, 존재화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창조의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우리의 아버지로 고백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이게 오늘의 주제입니다. 우리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말을 우리의 신앙으로 고백할 때 우리는 그 고백 안에 어떤 내용을 담아 내야 하는지를 알고 있어야 주문 외우듯 신앙고백을 하지 않을 수 있을 것 아닙니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6번 질문이 이러합니다.


26.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당신이 말할 때에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이 이러합니다.

‘영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믿습니다. 그는 무(無)로부터 하늘과 땅과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고 그의 영원하신 뜻과 섭리로 만물을 붙드시고 섭리하시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로 믿습니다. 그리고 나의 영혼과 육체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실 것을 아무 의심 없이 믿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눈물의 고통 속에서 그가 나에게 보내는 무슨 악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능력이 있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신실하시며 그렇게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를 믿고 그 분을 하나님이라 부르며,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이들은 크게 세 가지를 믿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위해 무(無)에서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며, 그 창조는 그의 말씀의 권능에서 기인한 것이고, 그분의 영원하신 경륜과 섭리로써 지금도 우주를 다스리고 간섭하고 지키신다는 것이고

두 번째가, ‘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다’라는 것이며

세 번째가, 그 분은 예수를 통해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까지를 믿는 것입니다.

전능하셔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불리게 된 그 과정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이니까요. 따라서 창조의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 창조의 완성까지 믿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존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혼돈과 공허의 상태인 우리 죄인들을 반드시 새롭게 창조해 내실 것이라는 것까지 믿는 그 믿음이 바로 창조신앙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성도의 존재론적 기초입니다. 티끌에 불과한 저주받을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자 그들이 창조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의 존재의 근원이지요? 그래서 창조의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새롭게 창조가 된 것이고, 새롭게 창조가 되어져 가고 있는 것이고, 결국에는 새롭게 완성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우리의 인생이 우발적이며 우연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거나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이 자기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고 절망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인생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적지로 우리를 당도케 하는 것은 우리의 계획과 노력과 목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이끌림을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우리의 계획이나, 우리의 뜻, 우리의 야망, 그리고 거기에 소용되는 우리의 필요 등을 우리가 걱정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창조의 하나님은 당신의 새 창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시고, 준비하고 계시며, 공급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혼돈스럽고 공허한 것 같고 흑암에 휩싸여 있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창조의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깊이 간섭하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아시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6:31~34)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 하니라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새 창조에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다 알고 계시고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입니다. 여기에서 ‘먼저’라는 단어는 시간의 우선순위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관계의 우선순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나중에 필요한 것을 모두 공급하시겠다는 그런 공식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에 우선순위를 두게 되면 그 관계의 회복에 필요한, 다른 말로 새 창조에 필요한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공급이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새 창조에 관심을 가지고 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의 인생에, 상태의 결핍이 사라진다는 말이 아니라 인생의 목적이 새 창조의 완성, 즉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는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태나 환경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자족이라 합니다. 그건 상태가 만족스러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다르니까요.



(빌4:11-13)

11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쓴 글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감금이라는 상태를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그 감금의 상태가 불편했습니다. 절대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창조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완성하시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기에 자신을 그 상태에 던지셨다는 것을 인정하자 그에게 불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게 자족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자족이라는 것은 상태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만족, 즉 순종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성에는 차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섭리와 경륜 속에서 우리의 삶에 허락하신 것이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그 상태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일들의 결과는 최고 선으로 결론지어질 것을 우리는 아니까요. 그걸 자족이라 합니다.

기독교의 딜레마는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들의 기대하는 바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바라는 바는, 순종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완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려놓은 자신의 계획과 야망이라는 그림에 하나님을 조력자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가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 대해 실망을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실망하시고, 성도들은 하나님께 실망하는 것입니다. 그게 현대 기독교의 딜레마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한 방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강함을 자랑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 안에서 네 강함이 될거야." 우리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부자가 되어 떵떵거리는 모습으로 세상에게 성도의 신분을 자랑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가난함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당당한, 당신의 백성들을 세상에 자랑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전자가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는 것이고 후자가 바로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강함을 자랑하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훨씬 많은 경우에 후자의 경우를 택하십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통치의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피조물들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주실 때 그걸 받아들이는 것- 그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하나님 (그걸 이해하도록)저 좀 도와 주세요"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구하라’는 단어의 시제가 현재 시제입니다. 그 말은 구하는 일의 반복성과 지속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고 완성되어지기를 지속적으로 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의’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라는 것 역시 관계의 언어입니다. ‘의’는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가, 상대방이 요구하는 책임과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해 내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 절대의존적 존재가 되라!"는 겁니다.그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걸 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소원이 잘 안 들어지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다 들어 주겠다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입니다. 안수하면 병이 낫고, 헌금하면 100배로 튀겨주겠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게 맞다면 세상에서 목사가 가장 부자여야 됩니다.

성도가 구해야 하는 하나님 나라와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에 관한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나와 화해를 하시고 나를 당신의 자녀로 완성시켜 가고 계시는 과정에서 허락하시는 상태와 환경과 사건이라면 순종하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가 처한 모든 상태에 순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는다고 하는 신앙고백 속에 담긴 내용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요즘 많이 힘들고 어려운 거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누구와 동행하고 있는가를 절대 잊지 마세요.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깊이 개입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상태와 환경을 그렇게 허락하고 계실 때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 창조의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상태와 환경을 겸허히 받아들이십시다. 여러분의 뜻대로 여러분의 인생이 움직여 주지 않는다고 분내지 마세요. 그리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창조의 하나님의 아들, 딸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인도해 가시겠습니까?

잘 참으시고 이겨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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