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신경강해

사도신경 강해(4)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11:13

사도신경 강해(4)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죽임 당한 그리스도)

 

(9:18~22)

18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9대답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

20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21경계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22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오늘은 사도신경 강해 네 번째 시간으로 예수님의 이름에 늘 붙어 다니는 ‘그리스도’라는 호칭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우리가 입버릇처럼 예수님의 이름 뒤에 붙여서 부르는 ‘그리스도’라는 그 호칭에는 어떤 메시지가 들어있는지 지금부터 출발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 칭합니다. 맞습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이끄시는 대로, 그 분과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삶을 답습하며 사는 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삶은 이미 예수 안에서 확정이 되고, 보장이 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들조차 자신들의 삶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불안에 시달리곤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 불안은 두려움과 조바심을 낳고 경쟁과 전쟁과 분열을 낳습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요? 왜 확정되고 보장이 된 인생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있는 교회 안에서도 그러한 경쟁과 분열과 두려움과 외로움과 조바심이 난무할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타락을 한 인간은 그 후로부터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제한된 능력으로 자신을 보호해야 했으며,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력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에 그 때부터 스스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들은 누구나 사회적 지위를 얻어 강자로 행세하고 싶어 하고, 나아가 그것을 유지하고자 자신의 인생을 올인 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이 느끼는 모든 종류의 불안은 근원적으로 바로 이러한 개개인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위란, 좁은 의미로는 한 집단 내의 법적 또는 직업적 신분이고, 보다 넓은 의미로는 세상의 눈으로 본 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 상대적 지위 상승이나 가치 상승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한 늘 불안 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늘 조바심을 내며 살 수밖에 없으며, 늘 전쟁과 같은 경쟁 속에서 고단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타인에 의해서 나의 존재감을 자리매김해놓고서는, 정작 스스로는 자신의 낯선 모습에 당황하곤 합니다. 진짜 ‘나’는 ‘나’만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타인들은 그 진짜 ‘나’를 잘 모르고, 겉으로 드러난 피상적 ‘나’를 나의 존재로 인식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타인에 의해 규정이 되어버린 나의 피상적 사회적 위치가 그 자체로 나를 규정해버림으로써, 실제의 나의 모습은 사라지고, 지위가 곧 나를 대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상적 ‘나’가 나 자신에게도 진짜 ‘나’로 규정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높은 지위를 차지한 사람은 돈, 명성뿐만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배려와 존경을 받으며, 무엇보다도 늘 다른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그 사람은 자신이 세상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에 반해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하며, 결국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자신의 존엄성마저도 위협받게 됩니다. 사람의 존재 가치가 그 사람의 소유와 지위로 평가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보다 작아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사회 속에서 나의 존재감을 알리려고 늘 고군분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을 떠난 타락한 모든 인간들의 고단함입니다. 결국 우리의 불안은 다른 사람들과의 부대낌 속에서 그들보다 비교 상대적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싶고, 남들보다 더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불안은 인간이 타락을 하고 난 뒤 타인들과 더불어 살지 못하고 나 이외의 모든 이들을 경쟁자로 삼아 살기 시작한 그 오랜 인류의 역사와 늘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경쟁자로 여겨 때려죽이고 난 뒤 하나님 앞에서 처음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누가 저를 때려 죽일까봐 불안해서 못 견디겠습니다.(4:14)’였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모든 역사는 불안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타락의 역사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낮은 지위에 속하는 것은 곧 불행으로 이어진 ‘누가르쳐 왔습니다. 우리는 이 쓰라린 배움 속에서 참으로 무던히도 높은 지위를 향해 내달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안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만 갑니다. 인간들이 여전히 최후의 승자를 가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빠져 나가버린 공허에서 기인한 인간의 욕망은 한없이 높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우리 큰 아이가 학교 대표로 마라톤 시합에 출전을 했습니다. 워낙 뜀박질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라 그 전날부터 호기가 대단했습니다. 반드시 1등을 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면서 가족들이 모두 와서 자신을 응원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1등을 하는 자신을 자랑하고 싶었겠지요. 그 때 제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 아이가 무조건 남을 이기는 삶이 자랑스러운 삶이라는 것을 진리처럼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제가 넌지시 물었습니다. ‘왜 꼭 이기려고 그래?’ 아이가 말했습니다. ‘경기에 나가는 선수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니에요?’ 제가 그 때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빠는 지는 삶이 이기는 삶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우리 아들이 이유도 명확히 모른 채 무조건 승리를 저렇게 꿈꾸고 있으니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하나님, 저 기고만장함을 좀 꺾어 주세요.’ 다음 날 저와 식구들이 큰 아이의 경주를 보러 갔습니다. 아주 많은 아이들이 참가를 했는데 그 중에서 우리 아이가 제일 나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경기 중반 즈음에 아이가 다리를 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뒤로 뒤로 밀려서 중위권 밖으로 밀려 났습니다. 나중에 이유를 알고 보니, 적어도 3마일 이상이 되는 장거리 경기에는 거기에 맞는 신발을 사서 신어야 한답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만 혼자 walking shoes를 신고 뛴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발뒤꿈치가 다 까지고 다리까지 절뚝거리며 엉금엉금 걷는 꼴로 골인을 했습니다. 아이가 풀이 푹 죽어서 엄마 아빠 얼굴도 못 쳐다보았습니다. 차라리 가족들을 오라고 하지나 말걸, 식구들이 다 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했으니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

제가 풀이 죽어 있는 아이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영민아, 다른 사람들한테 지니까 기분이 안 좋지? 만일 네가 이기고 다른 사람이 너에게 졌을 때는 어떨까? 그 사람도 너만큼 분하고 기분이 안 좋을 거야. 그런데 네가 경기에 져서, 분하고 기분이 안 좋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누군가에게 져 줌으로 말미암아 나를 밟고 올라선 이가 기뻐하는 것을 함께 기뻐해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하자 아이가 갸우뚱합니다. ‘물론 힘이 들 거야.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 자리로 성숙시켜 가고 계신다는 것을 절대 잊으면 안 돼, 하나님이 오늘 너한테 바로 그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네 발을 다치게 놔 두신거야, 꼭 이기는 것이 강한 것이 아니야, 진짜 강한 것은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해 내가 지는 것을 감수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말아라’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우리 아이가 경기에서 1등을 한 것보다 우리 아이가 패배의 미학을 깨달은 것이 훨씬 기뻤습니다.

여러분, 누가 이기는 자가 강한자라고 정의를 내려놓았습니까? 누가 부자가 승리자라고 손을 들어 주었나요? 세상이 자기들끼리 합의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그런 공식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절대 이기는 것이 강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세상에게 맞아 죽었더니 승리의 오른 손을 높이 들어준 사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도 비교 상대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벌어집니다. 나는 너희와 뭔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키가 아주 작은 사람이라고 해도, 고만고만한 사람들 틈바구니에 있으면, 자신의 키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집단에 조금이라도 키가 큰 사람이 등장하는 순간, 모두는 갑자기 불안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처럼 불안의 원천은 내가 남과 다르다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사람이 절대적으로 평등할 수 없다는 쓰라린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의 평등을 외치고, 일상에서 마주치는 자그마한 불평등조차도 참을 수 없어하면서도, 모순적으로 남들과 다르게 살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을 수 없다면, 차라리 내가 그들보다 우위에 서야지만 비로소 편안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타락한 인간의 실존입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지요? 이것은 나보다 성공한 사람에 대한 불쾌감을 잘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남보다 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고,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일생을 소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조건 튀어야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남들보다 '튀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오늘날 현대인을 점점 더 불안으로 병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일등을 향한 일등‘병’이 오히려 인간들을 불안하고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일등 ‘병’이 인류의 문명을 진보시키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기실 과학기술의 발전과 경제적 성장은 인간에게 물질적 진보를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기회를 넓혀주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는 이제 더 이상 전통 사회에서처럼, 혈통이나 가문 또는 신분 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에 따라 다양하게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 때 경제적 능력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능력 위주의 사회가 사람들에게 높은 지위를 실현할 기회를 제공해준 반면,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능력, 사회적 박탈감, 수치심 등을 안겨다주었다는데 있습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에게 가난은 곧 자신의 무능력과 직결되고, 그는 더 이상 사회에 쓸모없는 사람처럼 취급이 되고 있습니다.

서양 중세 때 까지만 해도, 가난은 전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부자와 빈자는 신이 구분한 것에 불과하며, 이들은 각자 사회 속에서 나름의 중요한 역할이 있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가난한 농민의 삶은, 한가한 귀족들과 비교하여 육체적으로는 힘들지는 몰라도, 정신적인 박탈감이나 수치심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가난한 자에게는 물질적 궁핍에 정신적인 고통까지 더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사회적 지위나 신분을 그 사람의 가문이나 됨됨이가 아닌 외적 힘의 소유가 규정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무능력에 수치심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고, 사회는 그들에게 실패자라는 꼬리표를 달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가난한 이들은 늘 불안한 것입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경제적 부()가 인간의 불안에 끼친 영향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급속한 경제 성장은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지위 상승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서로 더 나은 지위를 얻고자 하는 경쟁심 또한 그만큼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위 지배 계층은 자신들이 가진 사회적 지위를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늘 전전긍긍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많은 재산을 소유한 이가 언제 치고 들어와 지배계층에 있는 자신을 몰아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부유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가득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언제나 확고하게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불안감은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날 똑똑한 놀부나 멍청한 흥부나 불안에 떨긴 매한가지인 것입니다. 한쪽은 자기가 가진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하고, 다른 한쪽은 자기가 가질 수 없는 것을 한탄하고 괴로워합니다. 그게 다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자기 스스로 이 세상의 힘을 쌓아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겠다는 인간의 타락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적어도 자기 주변에 있는 이들보다는 비교 상대적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인간들의 끝없고 야비한 욕망이 모든 인간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모든 인간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이라는 젊은 철학자는 "불안은 욕망의 하녀" 라고 말을 합니다. 결국 인간이 욕망하는 한, 불안은 늘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욕망의 성격을 '구멍 난 술통'에 비유한 바 있지요?

현대의 자본주의식의 경제적 성장은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도록 요구합니다. 욕망은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동력이며, 이러한 사회구조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욕망을 창출하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현대인은 자신의 욕망에 대한 조절 능력을 상실한 채, 끊임없이 욕망을 만들고, 그것의 충족을 위해서 내달리는 욕망의 기계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왜 우리가 타인에 의해 규정이 되는, 그 가짜 ‘나’를 만드는 데에 나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합니까? 왜 자족이 안 되지요? 왜 내 안의 이성의 외침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타인들에게 ‘나’를 어떻게 부각을 시킬까만을 고민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거기에 초연한 자들로 성숙이 되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그 삶을 살아내었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시선에 꿋꿋했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모욕이나 비난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말씀 속에서 터득을 했습니다. 그들 안에 인격으로 들어와 계신 하나님께서 타인의 말과 시선이 실제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타인의 말보다 자신의 이성을 통해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더 신뢰했으며, 이러한 이유로, 남의 생각이나 판단을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남에게 강하게 보이기 위해, 혹은 남에게 인기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들의 에너지를 허비하지 않을 수 있었고 진정한 삶의 핵심 가치를 추구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단순히 경제력이나 물질적 성공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참 가치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렇게 불안에 당당했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바로 세상이 알지 못한 참 가치인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불안감의 정도는 자신이 생각하는 준거집단, 바꿔 말하면 세상의 울타리에 한정이 됩니다. 각자가 규정하고 있는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비교 상대적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인간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 모든 인간은 세상에 나름의 울타리를 치고서는 적어도 이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우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그 울타리 치는 일을 그만 두었던 사람들입니다. 학교, 직장, 동창, 친척 이러한 울타리에서 벗어나 일탈을 즐겼던 것입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자기만의 울타리를 마련하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을 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그 울타리가 어떤 울타리였을까요?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울타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다른 세상의 울타리에서와는 다르게 십자가를 지고 죽어 주는 것이 최고의 선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의 울타리에서는 자유로운 자유자의 삶을 살아내었던 반면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울타리 속에서는 섬겨주고, 손해보고, 사랑해 주고, 상함을 감수하며, 타인을 위해 나를 비워주는, 다른 말로 죽어주는, 최고의 선을 추구하며 살았기 때문에 약함이 상실감이나 박탈감이나 자괴감으로 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고, 세상적 강함이 자랑이나 교만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준거집단 규명을 명확하게 하고 있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이 속해 있는 세상 속의 준거집단에서는 자유로우셔야 합니다.

(11:25~26)

25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성경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제자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들로 일컬음을 받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세상 밖 울타리가 생겨난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에 예루살렘 교회가 흩어지면서 초대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그들이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무엇을 챙겨 갔을 것 같으세요? , 가구, 토지, 직업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몸만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세상의 힘과 가치들은 모조리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안디옥에 모인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로만 기뻐하며, 그리스도로만 행복해 하며,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것을 그 곳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급기야 그 안디옥 교회의 제자들이 사람들로부터 ‘저들은 그리스도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며 그리스도로만 행복의 근거를 삼는 이들’이라는 평가를 들어내게 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의 준거집단인 ‘교회’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준거집단의 이름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예수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장시간 공부를 했습니다. 다 기억나세요? 그럼 그 예수라는 이름 뒤에 항상 붙어 다니는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것인지 한 번 보지요.

먼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1번 질문을 보겠습니다.

31. 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칭해집니까? 답이 이러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임명을 받고, 성령으로 기름 부으심을 받아서 우리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비밀스런 경륜과 뜻을 우리에게 완전히 계시하시는 우리의 대 선지자요 선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당신의 몸을 단번에 희생 제물로 아버지께 드리시고,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계속적인 중보기도를 드림으로서, 그리고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통치하시는 영원한 왕이 되시고, 우리의 구원을 보호하시고 보존하시는 대 제사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보시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칭해지는 이유가 첫 번째로, 그 분이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이시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주님은 선지자이시기 때문이시며, 세 번째로, 주님은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통치하시는 왕이시기 때문이고, 네 번째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보존하시는 대 제사장이시기 때문에 그 분을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이라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 자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므로, 기름으로 상징이 되는 성령을 부어 받으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왕으로,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며 그 그리스도의 직분은 태초에 아담이 소유했다가 상실한 직분을 다시 회복시키시기 위해 가지고 오신 직분들이라는 말입니다.

(10:38)

38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그렇지요? 주님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그리스도(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십니다.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제가 이해하기 쉽게 잘 설명을 해 드릴게요.

 

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어입니다. 그 그리스도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바꾸면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구약에 보면 그 ‘메시아’라는 단어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게할더스 보스가 그의 책 ‘예수의 자기 계시’에서 잘 지적한 것처럼 구약에는 ‘메시아’라는 호칭이 단독적으로 쓰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구약 속에서의 ‘메시아’라는 단어는 항상 자격을 나타내는 속격이나 접미사와 같이 사용됩니다. 여호와의 메시아, 나의 메시아, 이런 식으로 사용이 됩니다.

아무튼 구약시대에는 그렇게 기름 부음을 받은 자와, 그런 칭호의 적용을 받던 이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제사장을 세울 때 관유를 가져다가 그 머리에 부어 바르는 일이 그 위임식의 절정이었습니다.(28:41, 8:10-13) 그렇게 기름부음을 받는 제사장들과 대 제사장을 수동태 분사 형으로 ‘마슈아흐’ 혹은 형용사형 명사로 ‘마쉬아흐’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가운데 왕을 세울 때에도 기름을 부어 왕을 삼는 것이 규례였습니다.(89:20)

그것은 이스라엘 가운데 왕 제도가 있기 전에도 있었던 관례였습니다. 사사기 9장에 보면 요담의 우화에 나무들이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려 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그렇게 이스라엘 중의 왕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아’로 지칭이 되었던 사람들입니다.(삼상24:6, 2:2, 20:6)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선지자를 세울 때에도 기름을 부었습니다. 엘리사를 선지자로 세우실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엘리사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선지자로 세우라고 하시지요?(왕상 19:16) 한군데만 확인하고 갈까요?

(105:15)

15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여기에서 나의 기름 부은 자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마쉬아흐’입니다.

이렇게 구약에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메시아’가 허다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직분을 추려보면 모두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들입니다.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을 하면 뭐라고 했지요?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그렇게 많은 메시아, 그리스도가 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왕들, 선지자들, 제사장들은 모두 장차 오실 진정한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그리스도로서 왕으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오실 것임을 미리 예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모두 모형 메시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전체에 ‘메시아’라는 단어가 단독으로 쓰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진짜 메시아는 그들이 모형하고 있는 단 한분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2:11)

11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이르는 말입니다. 예수가 바로 구약에서 여러 모양으로 예시가 되었던 진짜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분은 ‘주’이십니다. 거기에서 ‘주’‘큐리오스’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기 위해 히브리 사람들이 자음을 붙여서 만든 ‘아도나이’의 헬라어 표기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라는 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라 표기를 하고 있지요?

(9:20)

20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진짜 원형으로서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화려하고 강한 모습으로 오지 않고, 구유로 와서 십자가로 떠나가 버렸습니다. 세상에게 실컷 두들겨 맞다가 결국 세상에게 피살되고 만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로 상징되었던 메시아, 그리스도일 수 있겠는가?’가 유대인들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 그렇게 약한 모습으로 와서 십자가에서 살해된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강력한 민속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3:35)

35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보세요.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하며, 그들의 구원관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구원관은 이 세상의 힘을 소유하고 자신을 위해 자신의 힘을 발휘하여 십자가에서 뛰어내려와 로마를 무찔러 버리는 정치적, 군사적, 세속적 구원관이었던 것입니다. 자기들은 바로 그런 그리스도를 기다려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처럼 이 세상의 유익은 하나도 주지 않은 채,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어 버리는 그런 메시아가 무슨 그리스도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없이 죽어 버리는 십자가의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정확하게 알아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16:16~17)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리셔서 믿음을 준 자들은 그렇게 이 세상의 유익과는 전혀 무관한 십자가의 예수를 진짜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로 알아보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고백위에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나를 이 세상의 화려한 것들로 도와주러 오는 그런 그리스도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그래서 예수를 믿고도 이렇게 불안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를 믿고도 이렇게 세상 꼭대기로 올라가려고 안간힘들을 쓰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그리스도로서의 예수가 어떻게 선지자와 왕과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셨는지 한 번 보겠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고 이해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땅에다 내리꽂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그대로 이 땅에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삶으로, 가르침으로, 사역으로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죄는 무엇이며, 구원이란 무엇이며, 그로 말미암게 되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1:1-2)

1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야기했던 모든 말씀들을 종합하여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지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유익이 될 만한 교훈이나 가르침을 내어 놓고 가신 것이 아니라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고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선지자적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자들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인들만 예수님의 선지자적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4:26)

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선지자 직분을 열심히 수행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분의 선지자적 계시인 복음은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나지 못한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난과 하나님 나라와 구원을 곡해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도 잘 되고, 인기 있는 사람이 되며,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으로 연결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가난할 수 있고, 병 들 수 있으며, 무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난과 질병과 무지 같은 사망의 증상들이 영원히 소멸되어 사라진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약속이 되어 있음을 믿고 그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할 수 있는 사람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지금도 천상에서 그리스도의 영을 통하여 말씀으로, 성경으로 우리를 가르치시고 계시는 참 선지자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지자 사역은 구약 시대에도 계속되던 것이었습니다.

(벧전1:10~11)

10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을 누가 가르쳤다는 것이니까? 그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에게 증거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선지자이십니다. 그래서 그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참 제사장이십니다.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자기의 어깨에 짊어지고 그 백성들 대신에 제사를 드려 하나님께 속죄를 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9:24~26)

24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영단번에 드리신 참 제사장이십니다. 그런데 그 제사는 우리의 죄를 위한 제사였습니다. 우리의 소원이나 비전을 이루어 주는 제사가 아니라 죄에서 건져내는 제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비로소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제사인 십자가 이외의 다른 것으로 하나님과 화목을 시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입니다공로, 여러입니다희생, 여러입니다착한 일이 여러입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은 십자가를 붙든 사람니다삶 속에서가 매로 맺히는 것이지 그것이 구원니다조건이나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입t십자배를 드리거나, 새벽기도를 하거나 할 때에, 제단을 쌓는람니다말씀을 하시는 것은 옳의 희생제표현입니다. 심지어 강대상 위를 제단이라니다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예수님의 희생 제사 이외에 또 다른 제사를 인정하는 몰지각한 언행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희생제사는 십자가에서 이미 끝이 났습니다. 무슨 제단이 또 필요합니까?

그런데 그 그리스도의 중보적 제사장 직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것을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의 현재성이라 합니다.

(7:24~25)

24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25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무엇을 위해 간구하고 계실까요? 제사장이 한 일이 뭡니까? 죄에서 우리를 건져낸 것이잖아요? 지금도 예수님은 바로 그 제사장의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위해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며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여러분의 소유를 치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여러분의 건강을 치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여러분의 자식들을 손보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제사장적 간섭에 의해 죄에서 벗어나는 구원의 여정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간섭을 섭리요 경륜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거기에 여러분의 소원이 웬 말이며, 여러분의 야망이 웬 말입니까?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은 그 분의 통치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예수를 알기 전까지 모든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면 우리 삶의 운전대가 예수님께로 넘어갑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우리의 소원과 비전을 이루어 내는 삶이 아닌, 거룩이라는 목표지점을 향해 하나님에 의해 통치되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길에 그 어떤 방해물도 있을 수 없습니다. 마귀도 우리의 거룩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우리의 목숨까지도 손을 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의 완성은 절대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요일5:18)

18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 하느니라

잘 보세요. 이 말씀은 마귀가 우리에게 가난이나, 사고나, 질병 같은 것으로 해꼬지를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은 마귀의 힘으로도 방해할 수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오히려 마귀가 이 세상에 착념하도록 만사형통으로 여러분의 삶을 미혹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고나, 질병이나, 가난으로 여러분을 그 세상사랑에서 건져내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게 지키심입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들은 선지자 되시고, 제사장 되시며, 왕 되신, 기름부음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받았고, 지금도 그의 다스림과 간섭하심의 섭리와 경륜에 의해 하나님 나라로 이끌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웬 야망이 그렇게 많으며, 웬 욕망이 그렇게 많으며, 웬 불안이 그렇게 많습니까? 어차피 우리네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손 안에서 통치되어져 갈 것이고, 그 분의 손 안에서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그 목적지를 향해 가는 동안 우리를 철통같이 지키고 계십니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불안하세요? 뭐가 그렇게 외로우십니까? 내가 가장 외로울 때 그 때가 우리 주님과 가장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을 때입니다.

그 때 TV나 인터넷으로 여러분의 손을 가져가지 마시고 예수님을 인식하시고 예수님과 교제를 하세요. 외로울 새가 없어요. 오히려 다른 이들이 그 사귐을 방해할까봐 그게 더 염려가 되지요. 홀로 있는 시간을 즐기세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께서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로, 기름부음 받은 자,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것은 태초의 아담에게 주어졌던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의 직분을 회복하러 오신 것입니다. 태초의 아담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버금 왕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습니다. 그것은 아담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만물을 다스려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 역할을 맡아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사장 역할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모든 직분에서 실패를 했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두 번째 아담을 보내셔서 그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의 직분을 회복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 안에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직분을 회복 받았고, 우리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처럼 선지자로, 왕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며, 하나님의 뜻에 오로지 순종하여 자신을 부인하는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여러분 맹구를 아십니까? 80년대와 90년대, 강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고, 힘센 자가 곧 진리로 추앙받던 시대에 웬 바보 하나가 나와서 우리를 실컷 웃게 해 주었습니다.

맹구는 자타가 공인하는 바보입니다. 그는 아이큐도 떨어지고, 생활력도 강하지 못합니다. 임기응변, 권모술수 이런 것들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런 사람입니다. 모든 학우들이 다 맹구를 우습게 여깁니다. 그런데 그 맹구가 가는 곳에는 항상 웃음꽃이 핍니다. 강함의 미학에 중독이 된 이들 사이에 약하디 약한 바보가 하나 등장하니까, 다른 이들이 그 바보를 위안삼아 쉼을 얻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맹구를 좋아합니다. 맹구의 연약함이 다수를 즐겁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맹구의 약함에는 힘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게 내가 제일 바보이며, 내가 제일 약하며, 내가 제일 못난 사람임을 인정하는 어떤 이들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여야 합니다. 그곳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성도의 준거집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곳을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내가 제일 바보라고 인정하는,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것을 인정하는 맹구들이 모여서 진심으로 자신의 티끌 됨을 인정하고 서로 서로 다른 이들의 종이 되어주는 그러한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첫 번째 맹구입니다. 때리면 맞고, 모함을 하면 당하고, 배신을 하면 용서했습니다. 그리고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위해 기도를 하고 죽었습니다. 그런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 바보 같은 맹구가 하나님 백성들 모두를 구원해 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맹구가 되어가는 길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사를 한다고 결정을 했을 무렵 우리 교회 설교를 CD로 열심히 들으시는 집사님 한 분께서 제 사무실 마루 공사를 해 주시겠다는 연락을 해 오셨습니다. 본인의 직업이 마루를 까는 일인데 마루를 깔다보면 남는 것들이 있어 그것들을 사용하여 꼭 마루를 깔아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의 성함이 맹구입니다. 성이 맹 씨이고 이름이 ‘구’입니다.

지금 그 분은 그 ‘맹구’라는 이름을 명함에 새겨서 갖고 다니십니다.

교회가 이사를 한 뒤 드디어 맹구 집사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날부터 꼬박 일주일을 제 사무실에 붙어 계셨습니다. 사비를 들여 화장실도 만들어 주시고 샤워 실도 만들어 주시고 마루도 깔아주셨습니다. 그 맹구 집사님께서 낮에 제가 혼자 있는 것을 아시고, 인부들 점심을 준비하실 때 늘 제 것도 사가지고 오셨습니다. 제가 며칠 맹구 집사님의 햄버거를 점심으로 얻어먹으면서 그 분의 간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맹구 집사님은 원래 조폭 출신입니다. 늘 순하디 순한 양처럼 웃기만 하시는 그 분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습니다. 심지어 맹구 집사님은 마약까지도 하셔서 헬기까지 뜨는 위급한 상황도 여러 차례 당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를 인격적으로 믿게 되셨습니다.

그 때부터 맹구 집사님은 우리 교회 선교부장처럼 우리 교회 설교 CD를 사람들에게 사다 나르기 시작했고 하루에도 몇 시간씩 설교를 들으시며 공부를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회심을 한 후 맹구 집사님이 제대로 된 직업을 선택해야 했는데, 그 때 그 분은 서슴없이 목수의 일을 택했다고 하셨습니다. 이유인즉슨 보잘것없고 추악한 당신을 그토록 사랑해 주신, 목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싶다는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이름도 맹구로 바꾸셨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고, 인기 있고, 부자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나의 쾌락과 나의 행복을 위해 살았다면 이제 부터는 다른 사람들보다 바보처럼, 겸손하고, 당해주고, 섬겨주고, 용서해 주고,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손해를 보는 맹구로 살겠다는 마음으로 이름을 맹구로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사람들이 그 분의 변화되어지는 모습에 감동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웃들이, 친구들이, 동료들이 그 분을 그렇게 바꾸어 놓은 예수를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지금 그 분이 살고 계신 곳은 예전에 자신이 마약으로 처참하게 무너졌던 바로 그 집입니다.

왜 이사를 안 가시냐고 했더니, 자기가 그렇게 무너졌던 곳에서 그 이웃들에게, 똑같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변하게 되었는지 궁금해 하게끔 살아내기 위함이라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손해만 보고, 당해주기만 하고, 희생하고, 섬겨주는 그 맹구 집사님을 바보라고 손가락질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집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맹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꼭 이길 필요 없습니다. 조금 가난하고, 조금 못 배우고, 조금 연약해도 불안해 하지마세요. 남들에게 자랑스러운 사람 되려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세요. 그게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