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신경강해

사도신경 강해(2)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11:12

사도신경 강해(2)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와 경륜

 

(1:3)

3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독일의 사회과학자 M.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의 특징인, 합리성과 시민정신을 결여한 낡은 자본주의를 '천민자본주의'(Pariakapitalismus)라고 명명했었습니다. 'paria' '천민'이라는 의미의 'pariavolk'에서 따온 것입니다. 베버는 자신들을 'pariavolk' 천민으로 비하하면서까지 제도권에 기생해온 유대인들이 오로지 돈벌이에만 매달려 열등감을 씻으려했던 것에 착안하여 그런 용어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자아 숭배에 빠진 죄인들이 만들어 놓은 자본주의는 결국 통전적 천민자본주의일 수밖에 없다는 것에 저도 동의합니다. 그렇게 오늘날 'Pariakapitalismus'는 물질적 가치관을 우선하여 정신적 가치관을 짓밟는 금전만능주의를 비웃는 용도로 쓰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바로 그 천민자본주의화 되어버리지 않았나 생각하면 괜히 기분이 씁쓸해 집니다.

저는 그 막스베버의 책을 읽다가 ‘천하다’라는 단어의 정의를 다시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천하다는 게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천민(賤民)' '천박한 사람' 쯤으로 알고 있지요? 천민하면 언뜻 생각나는 무리들이 누구입니까? 반상의 구별이 있을 때의 상놈, 혹은 오늘 날 인도의 불 가촉 천민들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진짜 '천민'(賤民)은 하늘의 가치를 알지 못한 채 이 세상의 힘만을 추구하여 '가진 게 돈밖에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천할 ()자를 한 번 보세요. 돈을 상징하는 조개 패()창 과() 두 개가 겹친 쌓일 전()이 붙은 천할 천()의 본래 의미는 '작은 토막' 또는 '값이 싸다' ‘신분이 낮다’입니다. 전쟁이 끝나 쓸모없어진 창들을 쌓아놓고 팔아봤자 제값 못 받는 건 당연하여 그런 의미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값이 싼, 신분이 낮은’등의 뜻으로 쓰인 것이지요. 그런데 전() '남은 것'이라는 의미로도 쓰이므로 천한 천()자는 '()밖에 남은() 게 없다'는 뜻도 됩니다. 그러니까 천민(賤民)은 ‘가진 게 돈밖에 없다’고 폼 잡는 사람들, 이 세상의 힘을 쌓는 것이 유일한 행복의 조건이라 착각하며 사는 이들을 총칭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이야말로 값싼 자들이며, 신분이 낮은 자들이라는 말이, 훨씬 더 적합하고 어울리는 ‘천민(賤民)’의 정의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요즈음은 모두가 천민(賤民)이 되고 싶어 안달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아요.

모든 인간들이 ‘돈=행복, 명예=기쁨, 인기=만족’ 등의 세상이 짜놓은 거짓 등가 공식에 현혹되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세상의 힘들을 좇아서만 달려가고 있습니다.

분명 주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약속하셨고, 기쁨을 약속하셨고, 안식을 약속하셨고, 행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첨언하신 것이 ‘세상이 줄 수 없는, 내 안에 있는’등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힘들이 주는 그런 평안, 그런 기쁨, 그런 행복, 그런 안식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에는 성도라는 사람들조차 하늘의 평안과 하늘의 기쁨, 하늘의 행복, 하늘의 안식 등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 있는 기쁨을 주려 할 때, 인간은 돈을 달라고 합니다. 돈을 주면 당연히 기쁨이 따라 올 텐데 뭐 하러 일을 어렵게 하냐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세상이 줄 수없는 평안과 행복을 주려 할 때, 인간은 명예와 인기를 달라고 합니다. 명예와 인기를 얻으면 평안과 행복은 따라 온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주위에서 이 세상의 힘의 상징인, 돈과 명예와 상관없는 그런 하늘의 행복과 하늘의 평안을 부르짖어 구하는 사람을 몇 명이나 보셨습니까? 그런데 정말 그들이 그러한 이 세상의 힘과 가치를 얻어낸 후 만족하며 살던가요? 여전히 뭔가 불안해하고, 여전히 뭔가 부족해 합니다. 이 세상의 힘으로는 인간들의 가슴 속에 뚫려있는, 하나님이 빠져나간 그 공허의 자리를 메울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성도라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늘의 기쁨과 하늘의 행복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냥 이 세상의 기쁨과 이 세상의 행복과 이 세상의 편안함을 위해 돈과 명예와 인기와 잘남과 잘됨을 달라고 하나님께 조를 뿐입니다.

그러면 행복과 기쁨은 자기들이 알아서 챙기겠다는 것이지요.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왜 수 천억 원의 재산을 가진 이가 자살을 하고, 왜 인기인들이 목을 매답니까? 그것은 그러한 세상의 것들로 온전한 기쁨이나 평안이나 행복이 얻어지지 않더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의 상황이나 상태, 여건 등과 상관없이 하늘에 대한 소망과 믿음에 의한, 행복과 기쁨과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이 현실이 우리의 삶의 결론이 아니라, 결론으로 가는 잠깐의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하늘의 백성 하늘 천, 백성 민 천민(天民)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그러한 하늘의 백성들을 돈밖에 모르는 비천한 천민(賤民)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획책과 궤계로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간 이들이, 하나님이 진짜 행복과 진짜 기쁨을 주시기 위해 잠시 허락하시는 시험이나 고난이나 역경 등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힘이, 잘됨이나 잘남이 자신의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라 철썩 같이 믿고 있는데 역경이 웬 말이며 고난이 웬 말입니까? 세상의 힘의 원리라는 안경을 쓰고 보았을 때 그건 저주받은 자의 삶 아닙니까?

그건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탄과 그 세력이 만들어 놓은 거짓 공식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기적적인 현실 개입을 간절히 원하고, 해결사로서의 하나님의 신속한 해결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례한 기독교의 저자 리차드 마우는 ‘느린 하나님 믿기’를 연습하라고 충고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한 순간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루하루 걸어가는, 여정 전체를 즐기고 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즐기고, 소망으로 행복해 하는, 성도의 삶에는 관심도 없고 자신의 뜻과 계획과 야망을 성취하는 데에만 착념하여, 정작 누려야 하고 누릴 수 있는 하늘의 것들을 대부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예배당 안에 앉아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꿈과 비전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어르고 달래는 수준에 있기 때문에, 설교자들은 그들의 비위를 맞춰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소망 대신에 이 땅에서의 풍요를 약속해야 하고,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용사의 신앙을 가르치기보다는, 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비결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명의 본질에 천착(穿鑿)해야 할 설교자들이 복음을 노골적으로 거인문화와 맘모니즘과 소유지향성 세태와 성공주의와 일치시켜 청중의 비위를 맞춘다는 것은 참 생명의 가치를 전혀 알지 못하는 행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설교자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바알 숭배 사상과 성공 신화 이데올로기로 청중의 비위를 맞추며, 자신의 인식론적 정직성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인식론적 부정직함이란 자신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알면서도 바로 가르치지 않는 범죄행위를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세력을 키워봤자 결국 빈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을 왜 알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절대로 하나님 백성들의 목적지는 이 세상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라는 목적지를 향하여 우리 성도들을 이끌고 계신 것이지, 이 세상을 목적지로 삼아 이 세상에서의 부귀 영화를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성도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는 가난할 수 있고, 병들 수 있으며, 연약한 자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은 그렇게 하늘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지난주와 이번 주, 두 주간에 걸쳐서 창조의 하나님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창조의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렇게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며, 가시적으로도 결국 그렇게 완성이 될 것입니다.(21:7)

그렇다면 지금 그 아버지는 당신 자녀들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요?

이신론자들이나 자연신론자들의 주장처럼 그냥 그 나름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게 만들어 놓고 멀찌감치 에서 쉬고 계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능력과 동일하신 능력을 발휘하셔서, 침 삼킬 동안도 놓치지 않으시고 이 세상과 역사의 과정, 그리고 우리 인간의 인생에 관여하셨고, 지금도 관여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세상과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간섭과 관여하심을 전통적으로 섭리(providence)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섭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 계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창조적 관계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섭리의 측면에서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과학의 발전, 문명의 진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일환인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7번에 ‘섭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 대답이 이러합니다.

전능하시고 편재하신 하나님의 능력이시며, 하나님의 손으로 하늘과 땅과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붙드시고, 나뭇잎과 , 비와 가뭄, 풍년과 흉년, 음식물과 마시는 것들,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 이러한 모든 것들이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다스리심을 섭리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섭리입니다. 모든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섭리 아래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무엇에 의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라는 사람들 중에도 마치 이신론을 믿는 이슬람 교인들처럼 창조는 믿되 섭리는 믿지 않는 이들이 아주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드라이든(Dryden)의 말처럼 가슴속에 종교에 대한 깊은 갈망을 지닌 합리주의자들일 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은 이들을 실천적 무신론자(practical atheist)라고도 부릅니다. 그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너는 내 아들이고 내가 네 아버지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씀의 진의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바라보며 감격에 찬 목소리로 ‘아가야 내가 네 아빠야’하고 아이를 부르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 때 그 아버지는 단순히 자신의 신분을 밝히거나, 자신이 그 아이의 아버지라는 정보를 아이에게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너의 아버지이므로 앞으로 너의 삶을 지켜 줄 거야’라는 의지를 함께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수시로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라는 약속을 반복 하십니다. 그 약속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지키심에 대한 굳은 의지인 것입니다. 그러한 아버지로서의 지키심과 붙드심을 섭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섭리 교리에 대한 또 하나의 큰 오해는 헤겔의 사상에서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은 범신론입니다. 이는 이신론과는 달리 섭리를 받아들이는 것 같으나,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그 섭리를 이해하지 않고, 섭리의 과정이 하나님의 존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만유재신론(pannentheism)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버드의 철학자 화이트 헤드로 대표되는 과정신학과, 몰트만과 융엘의 새로운 십자가의 신학, 큐피트 등의 비실재론적 신학, 칼 바르트의 신학 등에 상당히 편만히 퍼져 있는 아주 무서운 이론입니다. 기독교 신학과 범신론은 물과 기름입니다. 그럼에도 유수의 신학자들의 신학과 사상에 범신론이 스며 들어와 버렸습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이 세상 역사의 과정이 하나님 자신에게도 매우 형성적인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창조와 섭리 사이의 구별을 모호하게 하며 역사의 과정도 하나님 자신의 과정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부정하는 아주 불경한 주장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숙해 가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계획도 없고 목적도 없이 철이 들어가면서 우주와 함께 공동으로 성숙해 가는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아니지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본유적이며 항존 적인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사용하신 그 능력은 완전하신 능력이며, 그 능력은 영원히 항존 하여 모든 것에 개입하시는 능력입니다.

지금 그 본유적이며 항존 적인 창조의 하나님의 전능이 우리의 삶을 이끌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섭리입니다.

그러한 섭리의 내용을 굳이 구체적인 세목으로 나누어 보면 유지, 보존, 통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이 한 단어로 ‘붙드심’이라 표현을 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세요.

(1:2-3)

2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기에서 ‘붙드신다’라는 표현이 나오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를 가리키는 단어인 것입니다. 아들을 통하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그 아들을 통하여 만물을 붙드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 하나하나를 간섭하시며 이끌고 계시며 통치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의 책을 보면 그가 이 히브리서 대목을 주석하는 부분에서 ‘성자의 유지시키시고 통치하시는 활동의 범위에서 배제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맞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대상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존재도 그 하나하나의 움직임도 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는 손길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님과 관련을 가지지 않고 있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104:27~29)

27이것들(만물)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28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 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29주께서 낯을 숨기신 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9:6)

6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 하나이다

그렇지요?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장중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따라서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여러분이 처해 있는 상태와 상황은 모두, 지금도 항존 적인 전능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것입니다. 창조의 하나님의 전지전능이 최고로 발휘되는 상태에서 여러분의 현실이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태와 현실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평과 불만에 헛된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섭리가 무엇인지 잘 아시겠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세상을 그저 유지해 나가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가지고 계셨던 어떤 목적과 계획을 향하여 세상이 진행해 나갈 수 있도록 세상을 운영해 가십니다. 그렇게 어떤 정해진 목적을 향하여 계획을 가지고 유지하고 통치하는 것을 경륜(oiconomia)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우발적이며 우연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며 통제되고, 다스려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방향이요?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성도들의 거룩을 향하여.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의 역사와 민족들의 흥망성쇠에서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국가의 생성과 멸망, 제왕의 즉위와 폐위 등 모든 것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2:21)

21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 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 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그렇지요? 왕들을 폐하시고 세우시는 것도 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도 똑같은 고백을 하지요?

(4:32~35)

32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니

33그 동시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었느니라

34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35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본유적이며 항존 적인 능력으로 우리의 인생과 우주와 역사를 섭리하시며 경륜해 가고 계십니다. 모든 일을 그 분의 마음의 원하시는 대로 이끌어 가십니다. 절대로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야망과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1:11)

11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그 섭리는 아주 사소한 것도 다 아우릅니다.

(10:29~31)

29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 하니라

두 마리에 한 앗사리온하는 그 보잘것없는 참새도 하나님이 돌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평균 삼 만개 정도 심겨 있는 우리의 머리카락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빠진다는 것입니다. 다 세고 계시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조종에 의해서 놀아나는 꼭두각시입니까? 그것이야말로 섭리 교리에 대한 심각한 오해인 것입니다. 1 원인으로서의 하나님의 섭리는 제 2 원인, 즉 우리의 작용과 의지에 강요와 억압을 부여하여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제 1 원인이신 하나님은 제 2 원인들을 무시하고서 사역하시는 것이 아니라, 2 원인들을 사용하셔서 사역하시되 그 제 2 원인들의 성격을 잘 활용하셔서 그리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는 제 2의 원인의, 원인으로서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방식으로 섭리하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의 의지를 사용하셔서 어떤 일을 하도록 하실 때에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주관하심이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의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의 선배들은 동시발생(concurrence) 혹은 협력(cooperation)이라 표현을 했습니다.

(2:13)

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여기 보시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 하지요? 그런데 그 분이 우리에게 소원을 두게 하심으로 우리 자신의 행함을 이끌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소원을 두심에 제 1 원인의 강제나 억압이 배제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명령 바로 뒤에 붙어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라’는 명령을 하신 뒤 ‘하나님이 행 하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분명히 우리의 행할 바가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제 1원인으로서 우리를 강제하시거나 억압하시지 않으시면서 당신의 전능으로 우리를 당신의 목적에 맞게 완성시켜 가신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것은 신비입니다. 어떻게 제 2원인을 강제하지 않고 섭리와 경륜이 가능한지 우리는 모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할 것이라 미루어 추측을 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집요하게 우리를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에 안도할 뿐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섭리와 경륜의 교리에 비추어 보았을 때에 이 세상에 우연히 일어나거나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착착 진행 되어져 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 또한 하나님의 손아귀에서 단 한 걸음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그 분의 섭리와 경륜 하에 발생하고, 보존되며, 영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믿는 성도라면 도박이나 복권 같은 요행을 바라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우리가 노력도 하지 않은 일확천금을 우리에게 거저 주실까요? 여러분은 여러분 자녀를 그렇게 키우고 싶으세요? 땀 한방을 흘리지 않은 자식들이 게으름과 불성실함과 요령으로 큰돈을 벌게 되었을 때, 그것을 함께 기뻐하는 이들은 정말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식은 반드시 그 돈으로 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우연과 우발에서 시작 되어 우연과 우발로 진행되어지는 진화론 또한 무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창조의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섭리와 경륜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아버지다운 손길에서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존재론 적으로는 모든 것들과 모든 이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나 인식론 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그 섭리를 인정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도라면 인식론 적으로 그 섭리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어야 하며, 그 하나님의 섭리를 구체적으로 따라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늘 고백을 하면서, 나에게 일어난 일 중에 나의 선에 기여할 것과 기여하지 못할 것을 스스로 구별을 하여,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일들은 하나님의 실수로 치부를 해 버린다면 우리는 섭리와 경륜을 믿고 있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의 태도에 한탄을 하십니다.

(40:27~28)(표준 새 번역)

27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불평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불만을 토로하느냐? 어찌하여 "주께서는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 주시지 않는다" 하느냐?

28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는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 줄을 모르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게으르지도 않으십니다. 그 분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당신의 백성들을 지키고 계십니다. 그 지키심은 상황과 상태와 여건을 당신의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바꾸어주는 지키심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분께 자신을 의뢰하는 믿음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걸 성숙이라고 하며, 거룩이라고 하며. 순종이라고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때때로 우리에게 믿음을 발휘해야 할 그러한 사건들과 상황들이 닥쳐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섭리, 그분의 경륜, 그분의 지키심을 경험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창조의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그 분의 섭리와 경륜을 인정했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어떻게 살아갔나 보세요.

(11:36~38)

36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중 어떤 무리를 택하여 희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옥에 갇히게 하셨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과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게 하셨고,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서 평생을 지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믿음으로 견뎌내더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이 믿음 장이라는 것은 다 아시지요? 그래서 얻어진 유익이 뭡니까?

38절의 말씀처럼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어떤 이들이 진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게 자랑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 믿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신앙의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8:34-37)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하나님은 바로 이 고백을 듣고 싶으신 것입니다. 환난과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위험 속에서도 ‘세상아 그 어떤 것으로 나를 괴롭혀봐라, 내가 흔들리나, 난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선택하셔서, 지금 이 순간도 나를 이끌고 계시므로 나는 이까짓 고난들 넉넉히 이길 수 있다.’ 이러한 성도들의 고백이 하나님 보좌에 울려 퍼져야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 성도의 새 창조를 향하여 경륜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한 치의 오차도 한 치의 실수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창조의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듯이, 죽음으로 무()가 되어버린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새롭게 창조해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를 그렇게 죽음에서 건져 새롭게 창조해 내실 것임을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게 살아나신 예수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완성을 위해창조의 하나님께 친히 간구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이 세상 그 무엇도 그 새 창조의 완성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창조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는 여러분, 우리가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의 전능함을 믿는 것입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뜻과 계획대로 움직여 주기를 바라지 마세요. 그건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이성과 한계 안에 가두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인 것입니다. 왜 내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시냐고, 왜 내 계획대로 이루어주시지 않느냐고 힘 빼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들으시고 당신의 전능을 포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섭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생각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거기에 여러분의 의견을 내 놓고, 왜 내 의견을 들어주지 않느냐고 항의를 하실 겁니까?

 

그런 의미에서 성도에게는 한()이라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민족을 한 많은 민족이라고들 하지요? 그래서 그 한을 풀어볼 양으로 가계에 흐르는 저주니 뭐니 하며 열심히들

쫓아다니시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하에 일어난 것임을 아는 이들에게 무슨 한이 있으며 무슨 상처가 그렇게 많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 속에서 필요하셔서 허락하신 것들이, 우리의 일상이며 현실이라는 것을 온전히 믿는다면 자기에게 피해를 주고, 고통을 준 것들이 한으로, 상처로 남겠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간섭이요, 배려로 받아들여져야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한이나 상처를 준 이들을 그런 면에서 용서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이 자기를 판 형 들을 생각하며 한을 품었나요? 그것을 평생 상처로 생각하며 살았나요?

(45:5,8)

5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8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 자를 삼으셨나이다

(50:20)

20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아니지요? 요셉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아래에서 최고의 선을 향하여 발생한 것임을 인정을 했습니다. 그러자 자기의 원수들이 용서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용서할 뿐 아니라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까지 돌보아 주지요? 오히려 제 2원인이 되어 거기에 쓰임을 받은 이들을 안쓰럽게 여길 수 있더라는 것 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인정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업적이나 됨됨이를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어차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자랑을 하려면 그렇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고후10:17)

17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 할지니라

여기에서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은 주님이 해 주신 것을 자랑하라는 말입니다.

(고전4:7)

7누가 너를 구별 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 하느뇨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하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인류의 역사도 우주의 운행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여러분의 야망과 계획과 소원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성취하느냐 아니냐로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에게 허락되는 현실과 상태와 상황과 사건 속에서 자족하며 순응하며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힘을 얻어내는 데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올인 하라고, 그게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속삭이는 마귀의 속삭임에 속지 마세요. 그건 마귀가 귀하디귀한 하나님의 백성들, 하늘의 천민(天民)들을, 천하디 천한 천민(賤民)들로 만들기 위해 궤계로 만들어 놓은 가짜 공식들인 것입니다.

(4:13~16)

13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 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어떠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선명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계획, 여러분의 야망, 여러분의 소원 다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배우세요. 거기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하늘의 행복과, 하늘의 기쁨과, 하늘의 안식과, 하늘의 평안과, 하늘의 만족을 경험하십시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의 운전대는 하나님이 붙들고 계십니다. 얌전히 그 분께 여러분의 인생을 맡기세요. 그리고 쉬십시오. 어차피 하나님이 이끌고 계신 인생이라면 내가 아등바등 안달을 부리고 조바심을 내어도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유하세요. 오히려 쉬십시오.

대학 시절에 인도차이나 3국 중 하나인 캄보디아에 선교를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캄보디아 오지로 들어가면 아직도 전기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부족 마을들이 허다합니다. 저는 그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주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 신을 믿으며 문명과 아무 상관없이 살 때에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기독교 선교사님들이 그들에게 찾아와 그들의 삶을 문명화 시켜준답시고 문명의 이기들을 소개해 주고, 저축을 가르쳐 주고 하면서부터 자신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전에는 밀림에서 모든 것을 얻어내며 아주 평화롭게 살았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나뭇잎으로 비누까지 만들어 쓰며 부족함 없이 다툼 없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좋은 것들이 들어오면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것들이 상대적으로 보잘것없어 보여 지고 그 좋은 것들을 가지기 위해 경쟁하고, 다투고, 조바심 내느라 그 후부터 단 한 순간도 행복한 적이 없었고, 쉴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충격을 받은 말은 ‘우리가 섬기던 신을 믿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왜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을 데리고 들어와서 우리를 이렇게 불행하게 만들었느냐?’는 어떤 청년의 일갈이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고 이 세상에서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기독교는 그렇게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 뿐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를 새롭게 창조해 가고 계시는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 성도입니다. 성도는 새로운 창조의 완성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추구하고 기대하고 소망하며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제발 정신을 차리시고 똑바로 예수를 믿으십시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의 한 구절을 결론으로 보고 마치겠습니다.

(17:28)

28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living) 기동하며(moving) 있느니라(being)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