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신경강해

사도신경 강해 (5)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11:14

사도신경 강해 (5)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우리 주)

 

(14:7~9)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 이로라

9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헤밍웨이의 ‘칼리만자로의 눈’을 읽고 난 직후 갑자기 칼리만자로가 너무나 보고 싶어서 친구 두 명과 함께 무작정 아프리카 케냐로 떠났던 적이 있습니다. 양인자씨가 글을 쓰고 조용필씨가 노래를 불렀던 ‘칼리만자로의 표범’은 바로 그 헤밍웨이의 ‘칼리만자로의 눈’에 등장하는, 칼리만자로 정상에서 얼어 죽은 표범을 소재로 한 것이었습니다. 열대의 나라 케냐에 만년설이 덮인 하얀 산이 어우러져 칼리만자로는 그야말로 신비로운 장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친구 둘과 함께 ‘오를 수없는 신비의 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해발 5900미터 가량 되는 칼리만자로를 오르다 중도에 탈진을 하여 내려오는 길에, 저는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 청년은 온 몸에 부스럼이 가득한 게, 한 눈에 봐도 에이즈 말기 환자임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영어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크리스천이라고 말을 하자 그 청년이 묻지도 않은 말에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 알고 싶어서 오래전부터 이렇게 성경을 읽고 있어요. 그런데 이제 나는 고통도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믿어요. 나는 하나님이 이런 고통 중에 있는 나를 무척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도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사람 말을 들으면서 마음에 알 수없는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찾기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 힘이 든 아프리카 케냐에서 어렵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그런 청년은 하나님이 좀 특별히 지켜주시거나, 고쳐주시거나 하면 안 되나요? 그러면 선교나 전도가 훨씬 수월해지지 않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런 청년을 그렇게 비참한 몰골로 죽게 내 버려두실까요? 저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그 청년을 향한 하나님의 처사가 불만스러웠습니다.

바람의 딸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한국 국제 구호팀장 한비야의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생후 6개월 된 아기는 우리가 운영하는 치료소로 오는 도중에 죽고 말았다. 죽은 아기의 집에 가 보았다. 방금 만든 네모난 흙무덤 위에는 조그만 십자가가 놓여 있었다. 젊은 엄마는 거의 넋이 나가 있었다. 2년 전 둘째 아들이 병으로 죽고, 몇 달 전에는 남편도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막내가 아플 때, 마을사람들은 이 집에 저주가 내린 게 분명하다며 그녀를 찾아와 주술사에게 액땜의식을 하라고 강권했지만, 이 엄마는 남편이 죽은 직후 크리스천이 되었기 때문에 막내의 목숨은 하나님께 맡기고 싶었단다. 그래서 하나님께 열심히, 정말 열심히 살려 달라고 기도했지만 기어이 아기를 빼앗아갔다며, 굵은 눈물방울을 떨구었다. 슬픔으로 떨고 있는 엄마의 손을 잡으니 위로의 기도 대신 불경한 원망의 기도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하나님, 왜 그러셨어요, 하나님, 왜 이 아이를 살려주지 않으셨나요? 미신과 주술이 판치는 이 마을에 유일한 크리스천인 이 엄마의 아기를 왜 죽게 내버려두셨나요? 왜 마을사람들이 당신을 의심하며 마음껏 크리스천을 조롱하게 만드셨나요? 10시간만 빨리 우리를 만났어도 살 수 있었다는데, 고작 열 시간인데, 하나님은 고작 그 열 시간도 앞당겨 주실 수 없는 분이신가요? 이 아기의 죽음이 도대체 하나님께 무슨 영광이 되는 건가요?"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 하나님이 너무 무력해 보이지 않으세요? 아님 다른 이들의 문제에는 아주 무관심한, 표독스러운 이기주의자 같지 않으십니까? 그도 저도 아니면, 참 일 할 줄 모르는, 지혜도 없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양반 같아 보이지는 않으세요?

지금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 우리의 머릿속에는, 전지전능한 분이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일을 하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이라는 게 너무나 자명하게 그려지지요?

가뭄에 콩 나듯 가끔 발견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서 다른 신을 섬기는 이들보다 잘나고, 건강하며, 부자로 잘살게 만들어 주시면, 더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좇게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왜 당신의 백성들을 그렇게 처참한 지경에 놔두시며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실까요? 그들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다는 건 그들이 믿는 하나님도 역시 그런 취급을 받게 되는 거잖아요?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런 처지에서 구해주지 않으셨을까요? 참 일할 줄 모르는 하나님이시지요?

 

이렇게 우리가 기독교에 대한 올바른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무지와 지혜 없음과 무관심과 이기심을 욕하다가 결국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자기 이외의 모든 외부 존재들을 자신의 종삼아 살고 싶어 하던 죄인들이, 하나님의 종의 자리로 내려와,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목숨 걸고 해내는 자로 완성이 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종처럼 부리며,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공급해 주고, 해결해 달라고 협박을 하거나 졸라대는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공부할 사도신경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우리 주’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 ‘주’라는 칭호는 Cf Stauffer가 ‘가장 풍성한 기독론 적 칭호’라고 부를 만큼 아주 중요한 칭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의 주’라는 사실을 고백할 때, 우리는 그 안에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 지금부터 차근차근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 이외에도 ‘주님’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여러 명 등장을 합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부를 때 ‘주여’라고 부릅니다. 또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로 잘못알고 부를 때도 ‘주’라는 호칭을 씁니다. 베드로 전서에 보면 아내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을 부를 때 ‘주’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지요? 뿐만 아니라 로마의 황제들을 부를 때나, 제자들이 선생님을 부를 때, 그리고 종들이 주인을 부를 때에도 ‘주’라는 호칭을 썼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붙여진 ‘주’라는 호칭도 모두 동일한 의미로서의 ‘주’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그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13:13)’라고 하셨을 때에 쓰인 그 ‘주’라는 호칭은 ‘랍비’라는 뜻과 거의 흡사하게 쓰인 것입니다. 랍비(Rabbi)라는 말은 ‘크다’라는 의미의 ‘Rab'에서 나온 단어로서 ’나의 크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 단어가 주전 2세기 때부터 ’나의 선생님‘이라는 의미로 쓰였고, 나중에는 ’나의‘라는 의미가 퇴색이 되며 그냥 ’선생님‘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선생님‘이라는 의미를 담은 단어로 ’주‘라는 단어가 호환되어 쓰이기도 했는데 그 단어가 지금 예수님에게 쓰여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귀신들려 말 못하고 간질병의 질환을 나타내던 아이를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그 아버지가 예수님을 부를 때 ‘주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 9장에서는 그 아버지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에게 쓰인 ‘주’라는 호칭도 역시 ‘선생님’의 수준에서 쓰인 호칭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고 말을 할 때 그 ‘주’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단어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할 때 그 ‘주’는 부활로 말미암아 최고의 자리로 높아진,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되는 단어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십계명 중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에 충실 하느라 성경을 읽을 때에나, 필사를 할 때, 혹은 이야기 중에도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얼른 목욕을 하고, 붓을 빨아 ‘여호와, YHWH’라는 이름에 자음을 붙여 ‘아도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쳐서 쓰거나 읽었습니다.

그 ‘아도나이’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옮길 때 ‘큐리오스’ ‘주’라고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70인 경에서는 ‘주’라는 단어가 ‘YHWH, 여호와’라는 이름의 대치어로 무려 6,000번이나 등장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을 함의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선생이나, 집 주인이나, 왕이나, 남편 정도를 가리키는 그런 ‘주’가 아닌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도마가 부활하여 나타나신 예수님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을 했지요? 바로 그 단어 ‘큐리오스’가 부활하심으로 만물의 머리가 되신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호칭인 것입니다. 제자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주와 그리스도’(2:36)라고 불렀습니다. 그 때에도 ‘주’라는 호칭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서의 주님을 가리키는 호칭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로마서 14 9절에도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부활하신 그는 참으로 ‘죽은 자와 산 자의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1:20~22)

20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이렇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을 한다는 것은 그 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심지어 하나님이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만물을 다스리는 왕으로 등극을 하셨다는 것을 모두 아울러 고백을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게할더스 보스는 ‘주’라는 호칭을 이렇게 정의를 했습니다. ‘주님이라는 명칭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셔서 들어가신 새로운 수준의 메시아적 주권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썼던 ‘주’라는 호칭과 비교하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인 ‘주’라는 호칭은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존재론 적으로 동일시되는 성자로서의 예수님을 인정하고, 한 발 더 나아가 피조 계와 교회의 주권자이신 그 분 앞에서의 복종의 고백까지 아우르는 엄청난 고백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되시며(7:59, 고전16:22), 믿음의 대상이 되십니다.(9:42, 11:24) 뿐만 아니라 그 분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이시며(19:16) 특히 교회의 주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그 분의 종의 신분임을 확인하는 것이며,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이들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가타부타 원망이나 불평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따로 있거든요. 어떠세요? 그래도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시겠습니까? 오늘부터 그 호칭은 잊어버리기로 할까요?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수시로 ‘주님’이라 부르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이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존재론 적으로 하나이신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그 분이 모든 피조 계와 교회의 주권적 존재이심을 인정하십니까?

이 둘을 다 인정하신다면, 우리 주님께서 피조 계에, 아니 교회에 속해 있는 여러분의 삶에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까? 아니면 부당합니까?

여러분이 ‘주’라고 부르시는 그 분이 여러분에게 에이즈를 걸리게 했다고 해서 그것이 부당하다고 항의 할 수 있나요? 여러분이 ‘주’라고 부르시는 그 분이 여러분의 자녀를 어린 나이에 일찍 데려 가셨다고 해서 그것이 옳지 않은 이기적 처사라고 삿대질을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인생의 주인께서 여러분에게 맡긴 인생이 가난하고 병들고 연약한 인생이라고 해서 그 주인에게 ‘왜 나에게 이런 걸 맡겨요?’ 하고 불평할 수 있어요? 아닙니다. 우리가 잘 쓰는 엿장수 마음이라는 관용구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엿판 위에서 우리가 공정성이나 공평성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께서 뭉툭한 엿 가위로 이런 저런 모양으로 잘라내어 우리에게 던져주시는 우리 인생을 받아들고 우리가 그것을 주신 주인께 가타부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뿐 아니라, 모든 피조 계의 주인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분을 ‘주님’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말 당신의 아들을 ‘큐리오스, 주님’이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인지를 수시로 시험을 하십니다. 서두에 말씀을 드린 두 사람, 청년 시절에 아무런 잘못 없이 수혈로 말미암아 에이즈에 걸려 죽어가던 그 젊은이, 아들과 남편을 일찍 여의고, 그나마 남아 있던 어린 막내 아이를 영양실조로 보내야 했던 그 여인, 하나님께서 그 두 사람의 상황 속에서 확인하시고 싶으셨던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내 아들아, 내 딸아, 너희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종으로 기꺼이 남을 수 있겠니?’하고 그들의 종 됨을 확인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은 바로 그것입니다. ‘내 종들이 정말 나를 주인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그것이 확인이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선악과를 따먹지 않을 수 있는 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로 입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김동길 교수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일제시대 때 함경도의 한 도시에 미친 여자가 하나있었답니다. 옷이 다 헤져 속살이 다 보이고, 너무나 더럽고 지저분하고 냄새가 나서, 사람들이 먼발치에서도 그녀의 불쾌한 냄새를 맡고는 열심히 그녀를 피해 다녔다고 합니다. 그 여자는 그 불쾌한 냄새를 풍기며,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당하면서도 부지런히 매일 아침 그 도시를 돌며 구걸을 했습니다. 나중에 소련군이 그곳에 진군해 들어왔을 때, 그 도시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지저분하고 더럽고 추했던 그 미친 여자가 근사한 소련군 장교복을 입고 그들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녀는 소련에 의해 파견된 여 간첩이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국가의 부름을 받고 여자로서 가장 치욕스러운 모습을 하고 그 도시에 숨어있는 친일파들과 내통자들을 색출해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자는 나이가 팔십이 넘어도 남들에게 예뻐 보이고 싶은 것이 본능입니다. 그런데 새파란 청춘의 여인이 젖가슴을 다 내어놓고 수시로 부랑자들에게 겁탈을 당하면서, 세수는 물론 목욕도 못하고 수년간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악몽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국가의 부름을 받고 주인의 명령에 순종을 한 것입니다. 일개 국가가 나를 불러도 그렇게 미친 짓까지 해가며,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내야 하는 것이 주인 앞에서의 종의 의무인 것입니다. 멀쩡하게 맨 정신인 여자가 수개월간 세수는 물론이요, 목욕도 못하고, 더러운 냄새까지 풍기며, 수시로 부랑자들에게 겁탈을 당하면서도 조국이 자신에게 맡긴 임무를 다 해내느라 인내하고 참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파견된 하나님 나라의 종들입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여러 모양, 여러 색깔의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그 중에는 가난한 역할도 있고, 못생긴 역할도 있고, 부자의 역할도 있고, 잘생기고 예쁜 역할도 있습니다. 그 중에는 단명 하는 역할도 있으며, 장수의 역할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냥 주인이 우리에게 맡긴 그 역할에 충실하게 순종하며 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사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고전6:19~20)

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렇게 이제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값을 주고 사신바 되었기 때문에 주님이 시키는 삶을 종으로서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4번 질문을 볼까요?

34. 왜 당신은 그리스도를 주라 부릅니까?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금이나 은으로가 아니라, 그의 보배로운 피로써 우리를 죄와 마귀의 모든 세력에서 구속하시고 사주셔서 그분 자신의 것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스스로 주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12:11)

11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우리는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지, 주님을 불러 우리를 좀 섬겨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으로, 사명자로 보내진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 의도하시는 그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분별하며,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열심히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 공부가 중요한 것이고, 기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에 전혀 힘쓰지 않고는 절대 자신의 이해 할 수 없는 처지를 하나님의 뜻으로 수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라 자처하는 이들의 행태를 잘 지켜보세요. 교회가 주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그 분의 뜻에 순종하며 복종하는 자를 양육하는 것에 힘을 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들의 비전과 야망과 소원에 주님이 합의하시고, 자신들의 종이 되어 열심히 수발을 들어주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신약의 마태복음으로 가서, 예수를 주라 부르는 주의 종들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간단하게 짚어보겠습니다.

(10:16)

16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세상으로 파송하시면서 전대나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지팡이를 빼앗아 버리시지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건 주님의 종들은 이 세상의 힘을 의지하여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으로 파송당하여 나가는 그 자리에서 세상의 힘들을 빼앗아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그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16절 이하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양이라 칭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을 가리켜 이리라 칭하시지요?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조금 의아스럽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 왜 주님께서 하필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말씀을 하셨을까요?

뱀이 그의 지혜로 일구어낸 최고의 성과가 무엇입니까? 인간에게서 에덴을 빼앗아버린 일입니다. 어떻게 해서 뱀이 인간에게서 에덴을 빼앗을 수 있었습니까? 인간이 머물러야 할 제 자리를 벗어나게 함으로 해서 에덴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뱀의 지혜는 피조물로 하여금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피조물, 즉 종들을 부추겨 주인의 자리를 찬탈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뱀의 지혜가, 이 세상의 모든 힘을 다 빼앗기고 완전히 무장해제가 된 양의 모습으로 이리들의 세상으로 파송되어 나가고 있는, 제자들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제자들에게 요구된 뱀의 지혜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그 제자들이 양의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할 때, 세상의 이리들이 허연 이를 드러내고 그들을 공격할 것이 자명한데, 그 때 양의 자리를 이탈하여 늑대나 승냥이로 변신하여 응전(應戰)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 밑 구절부터 기술되는 것이 성도의 고난에 관한 내용인 것입니다.

(10:17-25)

17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18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20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21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24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 하도다

바로 예수를 주라 부르는 우리 성도가 양의 모습으로 이리의 세상에 파송되어 있는 주의 종들인 것입니다. 당연히 이리들이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종들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그들을 이길 수 있는 호랑이의 힘이나, 곰의 힘이나, 사자의 힘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냥 양으로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기시는 방법은 세상을 공격하여 그들을 초토화 시키고, 그들의 무릎을 꿇림으로 말미암아 승자의 포효를 지르는 그런 식의 승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기시는 방법은 세상의 공격이 전혀 무력하게 작용하는 어떤 무리가 실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세상이 예수를 공격하여 십자가에 매달아 버렸습니다. 이리인 세상이 기대한 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갑자기 호랑이나 곰이 되어 십자가에서 내려와 분노를 뿜어내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게 세상 방식이거든요. 그런데 그러한 세상의 공격에 어린양이 그냥 양처럼 죽어 버린 것입니다. 세상이 기대했던 그런 반응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공격이 무력해지는 순간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세상의 힘의 원리를 비웃으시는 것입니다. ‘힘으로 모든 게 다 될 줄 알았니? 너희가 세상의 힘으로 공격하면 내 백성이 반드시 힘으로 응전 할 줄 알았지? 내 백성이 너희들의 공격에 전혀 응전을 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당해주니 네 기분이 어떠니? 너희들의 힘이 어떤 이들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는 무력한 것이라는 것을 이제 알겠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기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힘이라는 것이 전혀 무가치하며, 무력할 뿐 아니라, 보잘 것 없는 것임을 그들의 삶 속에서 폭로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상의 공격에 하릴없이 무너져, ‘돈 주세요, 소원 들어 주세요, 문제 해결해 주세요, 병 고쳐 주세요.’하고 호들갑을 떤다면 하나님께서 세상에게 면목이 없으시겠지요? ‘내 백성도 어쩔 수 없구나, 너희들의 공격에 단 하루를 못 버티는 구나, 내가졌다.’ 이게 말이 됩니까?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무수한 시험과 고난들을 허락하시고 우리의 힘을 빼 버리시는 것입니다. 양처럼 지라고, 이리가 문다고 늑대로 변신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우리주님이 어린양으로 살았는데 그 종들이 어떻게 늑대로 승냥이로 살 수 있겠습니까? 종은 상전의 삶을 그대로 답습하며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종이 상전 같으면 그것으로 족하니라’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죽임당하는 어린양의 삶이 정말 자유 한 삶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 삶이 진짜 풍성한 삶이라는 것을 아세요?

(23:1-2)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시는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지금 자신의 삶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체격, 기름부음을 받은 후 십여 년 간의 도피 생활, 심지어 블레셋으로까지 도망을 하여 미친 척을 해야만 했던 일, 딸의 강간, 자기 아내들을 아들 압살롬이 백주 대낮에 왕궁 위에서 겁탈을 했던 일, 밧세바를 취한 것, 우리아를 죽인 것, 밧세바와의 통간을 통해 낳은 첫 아이의 죽음,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맨발로 도망하던 일, 아들 압살롬의 죽음 등등 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다윗은 그렇게 자신의 연약함이 폭로가 되고, 이리 같은 세상의 공격에 양처럼 쫓길 때에도 그냥 양으로 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그 자리에서 양처럼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양의 모습으로 순종을 해 버렸던 것입니다. 십년 이상 자신을 죽이려 거머리처럼 쫓아다니던 이리 같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왔을 때에 그가 늑대나 호랑이로 변신을 하여 사울을 물어뜯지 않았습니다. 그냥 양으로 남아 이리를 피해 도망을 간 것입니다. 밧세바를 겁탈하고 자신이 아끼던 장수를 살해하기까지 한 자신의 추악함과 연약함이 드러났을 때, 그것을 합리화하거나 감추려울을 물어았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서 ‘잘못했습니다. 제가 원래 이 모양입니다. 그러니 저에게 정결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옵소서,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말아 주시옵소서(51)’하고 양으로 서 있었습니다. 다윗의 눈에는 문제나 사건이 보인 것이 아니라, 자기를 이끌고 계신 목자만이 오롯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나 사건이 그의 삶을 ‘부족한 삶이며, 모자란 삶’이라고 여기게 만들지 못한 것은 그가 그 문제나 사건 너머에서 그를 지키고 보호하고 계신 ‘주’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23:4)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 나이다

그렇지요? 그는 분명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도 그는 자기를 이끌고 계신 목자이신 ‘주’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자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알았습니다. 따라서 그 목자이신 주가 자신을 이끌고 가시는 과정 중에 일어난 모든 일은 결국 자신에게 유익으로 결론이 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무서운 상황 속에서도 부족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게 비결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다윗처럼, 우리의 주인이신 목자를 따라가는 양처럼, 우리의 모든 문제와 상태와 상황들을 우리의 주님께 맡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우리의 힘과 지혜를 발휘하여, 다른 말로 양에서 늑대나 호랑이나 곰으로 변신하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후자 쪽이 훨씬 많지요? 생각해 보세요. 양들이 목자를 의지하여 순종하며 좇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자꾸 목자를 불러대며 ‘우리도 다 생각이 있으니 우리의 계획을 잘 듣고 도와 달라’고 하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그런 안락함을 위해 수시로 금식하며 데모를 하며, 자기들의 의견을 무시했다고 걸핏하면 목자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무리를 이탈한다면 그 목자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런 양들은 곧 늑대나 이리에게 잡혀 먹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이리를 만나도 절대 양에서 다른 것으로 변신하지 말라,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양의 신분을 망각하고 우리의 삶 속에 닥친 문제와 사건들을 우리의 힘으로 해결을 하려하고, 그것을 우리의 목적과 계획대로 바꾸어 내려할 때 우리의 삶은 부족함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신데 왜 나는 늘 부족하지?’라는 탄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양은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만 있으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늑대는 어떨까요? 늑대를 한 일주일 풀만 있는 푸른 초장에 감금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미쳐서 죽을 거예요. 호랑이는 어때요? 호랑이를 한 열흘 쯤 쉴만한 물가에서 쉬게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호랑이가 만족할까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서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양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종들에게 양의 신분을 벗어나지 말라고 권고를 하신 것입니다. 힘 빼고,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하며, 더 숙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십자가에 매달려 사망신고를 해버린 나, 그게 양입니다. 그 때 진짜 승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승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기면 하나님이 세상에게 지는 것이고, 우리가 져 줄 때 하나님은 세상에게 ‘봤지? 내 종들 봤지?’하고 호탕하게 승리의 함성을 울리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0:27~29)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8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보세요. 주님의 양들은 목자이신 주님의 말을 듣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가라고 하시면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들의 주인이신 목자는 절대 양에게 해가 될 일을 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양들은 주인이신 그 분의 말씀을 따라, 그 주인이 먼저 살아낸 어린양의 삶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14:4)

4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우리 양들은 우리 주인이신 어린양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리들에게 그저 당해주는 것입니다. 어린양이 인도하는 곳으로 열심히 좇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이 주인보다 낫지 못한 것입니다. 종은 반드시 주인의 길을 좇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기 비전, 자기 소원, 자기 계획, 자기 야망이 교회안에 난무하고 있습니다. 양의 시력은 마이너스10 정도 됩니다. 그런 양이 비전을 가질까요? 뭐가 보여야 비전을 갖지요? 그런 죽임당한 십자가의 양이 야망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미 죽은 자가 무슨 야망을 가질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양은 자기 앞에 있는 목자만 보는 것입니다. 목자 밖에 안보여야 양입니다. 아니라면 그는 십리 밖에서도 정확하게 먹이를 확인하고 그 먹이를 향해 돌진하는 독수리나 이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에게 끌려가는 양들이 무슨 소원이 그리 많고, 무슨 비전들이 그리 많으며, 웬 불평과 불만이 그렇게 많습니까? 목자만 보세요. 그리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주인이신 목자는 절대 우리에게 해를 끼칠 분이 아니라는 확신 아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이런 상황 속에서도 부족함을 못 느끼겠다’고 고백하세요.

(1:20-21)

20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 함이니라

이게 주인을 좇는 종의 자세인 것입니다. 주인이 죽으라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힘든 상황을 지나가고 계시더라도 지금 죽음까지는 아니잖아요?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을 한 우리의 선배들이 있었습니다. 에이즈 걸려 죽으면서도, 6개월 된 아기를 하나님께 보내면서도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하고 고백을 했던 그들이 바로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종’들인 것입니다.

(2:20)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를 주장하던 우리의 옛 자아는 십자가에서 이미 못 박혀 죽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없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가 ‘나’를 살고 계신데 우리 안에 오염이라는 모습으로 남아있는 옛 자아의 흔적이 자꾸 우리를 기고만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존귀하다는 둥,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둥, 신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한다는 둥, 이런 몹쓸 항변들을 해 대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장을, 우리의 계획을, 우리의 소원을, 우리의 비전을, 우리의 야망을 어서 버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14:7~9)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 이로라

9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요? 우리의 주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전에는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었습니다. 그게 사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자아를 십자가의 보혈로 빼앗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는 불가항력적 은혜로 우리를 주인 되신 자신이 정하신 목적지로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죽음도 불사하게 된 것입니다. 주인이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것이 종입니다. 그게 양입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죽을 수도 없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렇지요? 따라서 성도는 절대 자살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그 자살의 문제에 대해서는 사도신경 마지막 즈음에 가서 자세하게 다룰 것입니다. 여기서는 간단하게 ‘성도는 죽음조차 자신을 위해 죽으면 안 된다’는 것만 알아두고 가자고요.

뿐만 아니라 성도는 하나님이 어떻게 죽이셔도 담담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21:17~19)

18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하나님을 섬기던 종들을 좀 우아하고, 멋지고, 고상하고, 고고하게 죽음을 맞도록 하시면 하나님 체면도 서고, 우리도 폼 좀 잡을 수 있고 좀 좋아요? 그런데 어떨 때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곳에서 성도가 죽지요?

조나단 에드워드는 천연두 예방 주사를 잘 못 맞고 죽었습니다. 9.11의 현장에서, 쓰나미의 현장에서, 교통사고의 현장에서, 심지어는 코털을 뽑다가 파상풍에 걸려 죽은 목사님도 있습니다. 그 모든 상황들이 왜 일어난다고요? 하나님의 주되심을 증거 하기 위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백성은 어떤 상황도, 심지어 죽음의 방법이나, 모양까지도 주인인 나에게 순종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섬기는 성도의 삶이 그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주라 부르며 여전히 이 세상 것들을 추구하고 마음에 담아, 자신의 배 만을 위해 사는 이들은 성경이 주님의 원수라고 못 박아 말하고 있습니다.

(3:18~20)

18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십자가의 원수로 행 하느니라

19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는 우리 주님의 원수가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충실한 종으로 살고 있습니까?

 

부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려서 부모님이 이혼을 하셔서 새 어머니와 살고 있던 한 소녀가 새 어머니의 학대를 못 이기고 결국 가출을 했습니다. 그 소녀는 인신매매범의 손에 붙들려 부산의 완월동이라는 사창가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소녀는 그 곳에서 죽을 고생을 다하며 자신의 인생을 저주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그 완월동 포주의 아들과 눈이 맞아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과거를 잊고 새롭게 출발을 하기 위해 그곳을 벗어나 서울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들은 집 근처에 있는 교회에 등록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열심히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집사님 중 한 분이 그 두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소문은 즉시 교회 전체에 퍼졌고 그들은 그 공동체 속에서 왕따가 되었습니다. 창녀 출신인 여자와 포주 출신의 남자가 자기 구역에 있다는 것이 견딜 수 없다고 교회를 나간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그 사람들이 앉아 있는 의자에는 아무도 앉지 않아서 결국 그들은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그 두 사람은 단칸 지하 셋방에서 빨랫줄에 목을 매단 싸늘한 시체로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누가 죽인 겁니까? 교회가 죽인 겁니다.

그 두 사람의 장례 식장에서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통곡을 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제가 양들을 키우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리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창녀의 친구가 되셨고, 세리의 형제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십자가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대역 죄인들인 우리가 창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포주를 향해 욕지거리를 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추악하고, 지저분한 죄인은 바로 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바로 나의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대해서도 시퍼렇게 살아있고, 내 배를 채우는 것에만 급급하며, 그 알량한 ‘나’의 존재감을 높이기 위해, 나보다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밟아 버리는 이들이 어떻게 주인의 음성을 좇아 어디든지 좇아가는 어린양의 모습이겠습니까?

정신 차립시다. 우리가 ‘주’아닙니다. 예수가 ‘주’입니다. 어서어서 그 찬탈한 ‘주’의 자리에서 내려오십시오. 지금까지 배운 모든 내용을 다 수긍하고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를 우리 ‘주’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예수를 여러분 인생의 주로 모시고 있습니까? 만일 아니라면 우리 주님의 경고를 들으십시오.

(7:21-23)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김성수 목사 > 사도신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신경 강해(7)  (0) 2013.10.13
사도신경 강해(6)  (0) 2013.10.13
사도신경 강해(4)  (0) 2013.10.13
사도신경 강해(3)  (0) 2013.10.13
사도신경 강해(2)  (0) 2013.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