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신경강해

사도신경 강해(7)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11:16

사도신경 강해(7)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눅1:26~38)

26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30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31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33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36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38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 가니라


우리 속담에 ‘떼놓은 당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속담의 기원이 이러합니다. 당상이라는 것은 정3품 이상의 벼슬아치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당상에 해당하는 벼슬아치들은 망건에다 옥관자, 금관자를 달고 다니므로 흔히 옥관자, 금관자를 당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관자가 달려 있던 귀 앞부분을 우리가 관자놀이라 부르는 것도 거기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상투에서 망건을 떼 놓고 쉴 때는 그 관자가 필요 없기 때문에 벼슬아치들은 수시로 그 관자를 떼어 놓았습니다. 그 관자가 금이나 은이나 옥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난 사건이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당상이라는 벼슬이 그 도둑놈한테 갈 수도 없고, 또 잠깐 떼어 놓았다고 해서 금관자나 옥관자가 좀이 먹거나 색이 변할 리 없다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확실하고 변할 수 없는 어떤 확정된 사실을 가리켜 떼놓은 당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바로 그 당상을 소유한 하나님 나라의 벼슬아치들인 것입니다. 그들이 잠깐 그 당상이 떨어지는 실수와 넘어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당상 벼슬인 구원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냥 잠시 금관자, 옥관자를 떼놓은 상태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의 실수나, 넘어짐까지도 모두 덮으십니다. 아니 오히려 그 실수와 넘어짐을 선용하셔서 그들의 거룩에 양념으로 쓰십니다. 마치 보자기와 같은 사랑이며, 은혜입니다. 보자기는 아무리 모가 난 것도 다 감쌀 수 있지요? 하나님은 은혜의 보자기로, 사랑의 보자기로 우리의 모든 실수와 넘어짐까지 다 덮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점점 더 면목이 없어지고, 자랑할 것이 없어지며, 자연스럽게 그 사랑 앞에서 겸손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덮으심의 은혜가 오늘 우리가 공부할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고백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사실로 현실로 실현될 것이라는 위대한 진리가 그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 고백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성령 잉태에 관해 공부를 할 것입니다. 그 동정녀 탄생과 성령 잉태 속에 어떻게 덮으심의 은혜가 스며들어 있는지 잘 들어보세요.


거두절미하고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 정말 그 사실이 믿겨 지십니까? 암수의 성적 결합이 없이도 어떤 생명체가 여자의 자궁에 착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믿겨 지세요?


신 정통주의자라 일컬어지는 칼 바르트와 에밀 부르너의 ‘계시의 수용성’에 관한 논쟁을 기록해 놓은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자연신학’입니다. 저는 최근에 그 책을 읽으면서 칼 바르트에 대한 재해석과 재평가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습니다. 저는 그 책을 통하여, 칼 바르트가 유수의 많은 신학자들이 평가해 놓은 것처럼, 자유주의자의 범주에 속하는, 복음주의 좌파에 해당하는 신 정통주의자로 분류가 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의아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언제 칼 바르트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 자연신학이라는 책에 등장하는 에밀 부르너와 칼 바르트의 첨예한 대립 점은, 하나님의 계시 수용의 접촉점(point of contact)에 관한 것입니다. 에밀 부르너는 세상이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에게는 창조자의 영을 어떤 방법으로든 느낄 수 있는 능력이 남아 있다고 믿습니다. 부르너는 하나님의 형상을 형식적(formal)인 것과 물질적(material)인 것으로 나눕니다. 안토니 후크마는 그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구조적 형상과 기능적 형상으로 나누지요? 대동소이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함으로 해서 물질적 형상은 사라졌고, 더 이상 유지 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형식적인 형상은 죄인이든 아니든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이 된다는 것입니다. 부르너는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도 이 형식적 형상 때문이며, 죄를 짓더라도 이 형식적 형상은 파괴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 형식적 형상은, 인간에게 남아 있는 자발적이며 자의적인 어떤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여전히 그 자의적이며 자발적인 능력에 의해 죄도 짓고 선도 행하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에밀 부르너는 인간에게 형식적 형상이 남아 있으며, 그 형식적 형상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접촉점(point of contact)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구원에 관한한 주체적이며 책임적일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와 정당성이 보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일견 맞는 소리 같습니다만, 제가 그 책을 통하여 발견한 부르너의 오류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이 은혜보다 먼저라고 생각을 한다는 데곐능성이 은혜보저는 부르너의 그런 구분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구분해 놓은 그 형상의 이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 뿐 입니다. 부르너의 말을 그대로 인용을 해 보겠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들려질 수 있는 가능성이란, 인간의 책임성(responsibility)이 전제 조건이 된다. 하나님께서 말을 건네실 수 있는 사람만이 책임성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무엇인가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결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사람만이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리고 책임성을 가진 인간은 죄를 지을 때 어느 정도 알 수도 있다. 인간이 스스로의 죄를 안다는 것은 거룩한 은혜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전제 조건이 된다.’


잘 보시면 부르너는 인간이 은혜의 말씀을 듣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능력이 ‘전제조건’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부르너에게 있어서는 은혜의 말씀이 먼저가 아니고, 인간의 죄에 대한 인식이 먼저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책임성과 죄에 대한 각성을 은혜의 전제조건으로 본다는 것은, 율법이 먼저라는 신학적 인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그러한 부르너의 주장에 대해 ‘그 어떠한 것도 은혜보다 우선 될 수가 없다’고 단호하게 외칩니다. 저는 칼 바르트의 신학을 전적으로 수용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는 마치 하나님에 의해 세우심을 받은 은혜의 수호자처럼, 말씀의 칼을 들고 부르너를 난도질합니다. 저는 자연신학에서의 칼 바르트의 논증에 크게 박수를 보내는 바입니다.


바르트의 신론의 핵심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식되어지는 하나의 객체(an object)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유주의의 역사 비평학을 공격합니다. 마치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이나 알매니우스와 칼빈의 논쟁과 흡사하지요? 저는 바로 여기에서 바르트를 신 정통주의자의 범주에 넣어도 되는가하는 의아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 정통주의자들은 역사 비평학을 전적으로 수용하여 성경에 나오는 기적이나 신비 등을 하나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르트는 그 점에 있어서 그들과 많이 다릅니다. 저는 지금까지 칼 바르트 역시 신 정통주의 신학자로서 역사 비평학을 수용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나 말씀으로 동일시하지 않는 그런 자유주의자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칼 바르트가 역사 비평학을 신랄하게 비판을 하고 있었습니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어떠한 존재의 유비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잘라 말합니다. 인간의 어떠한 능력으로도 신에게 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 비평학에 의해 성경의 역사성을 의심하고, 또한 신마저 인간들의 이성과 지식으로 제한하고 규정하려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신은 인간의 지적인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경험의 대상도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객체로 전환될 수 없는 주체(subject)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으로, 연구하고, 탐구한 것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제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많은 객체들 중 하나가 아니며, 그 자신이 스스로 말함으로써만 우리에게 알려지는 ‘주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칼 바르트의 이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를 합니다. 그래서 창조과학회의 역할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과학으로 증명해 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으로, 신비로 남겨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 신비가 믿음에 의해 실체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자꾸 성경에 등장하는 기적들과 신비들을 과학으로 증명해 내어 다른 이들을 설득하려 하다보면, 우리 자신부터가 과학으로 하나님을 한정하는 오류를 범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에밀 부르너가 그러한 부류의 사람입니다. 에밀 부르너는 그렇게 모든 인간에게 계시 수용의 능력, 형식적 형상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좀 더 쉽게 말해 과학에 의해 ‘참’으로 증명될 수 없는, 성경에 등장하는 기적들을 역사적 사건으로 수용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에밀 부르너를 비롯한 수많은 신정통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조작된 설화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공부할 부분은 다 부정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어떤 이들이 그러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에 반박을 하기 위해 인간복제의 메카니즘을 들어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설명하려 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러한 시도 또한 정말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인간복제라는 것은 암 눘. 성적 결합 없이 새로운 생명체가 태어날 수 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복제의 실현이 눈앞에 왔다는 사쟤 눈예로 들어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논지를 펴 갑니다.


참으로 가상한 노력이라고 칭찬을 하실 분들도 계실지 모르지만, 저는 그러한 시도들이야 말로 성경의 근본적인 의도를 왜곡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인간의 성적 결합이 없이도 어떤 이가 잉태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이 되었기 때문에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을 의심하지 않고 믿게 되었다면 그건 믿음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인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믿음이란 단순히 과학으로 입증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이지 공식으로, 수식으로, 논리로 설명해 놓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자연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기적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우리 독자들로 하여금 과학적으로 증명하여 사실로 받아들이라고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기적으로 일어난 것임을 인정하고 그냥 믿으라고 준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기적은 탐구나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잘 보시면 마리아가 혼자서 아기를 잉태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에 의해 아기를 갖게 되었다고 나옵니다. 절대 인간 복제의 메카니즘 등에 의해 혼자 잉태한 것이 아닙니다. 그건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리가 오늘 공부할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는 고백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과 인간되심, 즉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믿고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 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간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완전한 인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성육신(incarnation)'이라 합니다.


게할더스 보스는 자신의 저서인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이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선재하시는 메시아가 인간성(human nature) 안에 들어오시며, 초역사적인 분이 역사의 흐름 속으로 들어오시는 놀라운 일’이라고 정의를 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영원 속에서 존재하시는 분이신데 이 유한한 역사 속으로 자원하여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육신이며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고백 속에 함축되어 들어있는 위대한 진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은 무엇을 위해, 어떤 일을 하시기 위해,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역사와 시간 속으로 들어오셔야 했던 것일까요? 그리고 왜 그 분은 성령으로만 잉태 되셔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35절로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 한 절에 아주 풍성한 기독교 교리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눅1:35)

35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이 문장에서 ‘임하시고’라는 단어와 ‘덮으시리니’라는 단어가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임하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쓰인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이사야서 32장 15절을 그 배후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32:15)

15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그러니까 ‘임하시고, 에펠류세타이’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영’의 강력한 임재를 묘사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영이 강력하게 임재를 하신 것입니다.


왜 그런 단어가 거기에 쓰였는지 질문을 갖고 따라 오셔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 35절의 ‘덮으시고, 에피스키아세이’ 또한 하나님 영광의 신현적 임재를 표현하고자 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 이 두 단어가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의 키워드입니다.


(출40:35)

35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하게 임할 때에 ‘덮음’이라는 단어가 사용이 됩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의 영광의 ‘덮음’은 때때로 독수리 날개의 덮음으로도 표현이 되지요?


(시91:4)

4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여기에서의 ‘덮으시리니’가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에서 쓰인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 개념은 창세기 1장2절의 ‘라하프’ ‘수면 위에 운행하시다’에서부터 출발이 된 개념입니다. ‘라하프’라는 단어는 암탉이 달걀을 품은 상태를 말한다고 했지요? 암탉이 달걀을 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병아리가 태어납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영광의 덮으심과 독수리 날개의 덮으심이라는 개념은 새 창조를 향한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 그리고 완성에 대한 강력하고 집요한 의지와 확신이 모두 포함된 그런 개입니다. 그런데 그 개념이 거기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 발 더 확장되어 나아갑니다. 독수리 날개에서 그 ‘날개’라는 단어는 ‘옷자락’이라는 단어로도 쓰입니다. 그 단어가 쓰인 곳을 한 번 볼까요?




(룻3:9)




9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여기에서 ‘옷자락’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단어가 ‘카나프’입니다. 그 단어는 ‘날개’라는 뜻입니다. 지금 수면 위를 덮으셨던 여호와의 신에서, 성막을 덮으셨던 여호와의 구름으로, 이스라엘을 덮으셨던 여호와의 독수리 날개로, 신부인 룻을 덮었던 신랑 보아스의 옷자락으로, 점진적 묘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시대 때에는 신랑이 옷자락으로 신부를 덮으면 그것이 곧 혼인의 증표였습니다. 그 신랑의 옷자락에 의한 덮음에서 새 생명이 잉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면 위에 운행하시던 하나님의 신, 이스라엘을 덮으셨던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 하나님의 백성들을 덮으셨던 독수리 날개로서의 하나님, 신부를 덮었던 신랑의 옷자락,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새 창조를 상징하고 있는 그림들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단어가 오늘 본문 35절에 쓰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본문 35절을 보지요.




(눅1:35)




35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하나님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라는 생명이 잉태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잉태에 관한한 마리아의 남편은 ‘지극히 높으신 이’인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즉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여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앞으로 줄줄이 탄생하게 될 육신을 입은 하늘의 장자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탄생하게 될 교회의 출현에 관한 내용을 미리 유비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하늘의 자녀들이 될 성도는, 예수님처럼 육신의 몸을 입고 영원을 살게 될 터인데, 그들이 바로 영과 육을 동시에 소유한 자로, 하나님의 옷자락의 덮으심을 통해 탄생을 하게 될 것을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의 제한된 육신을 입으신 그 상태처럼, 우리 성도들도 영원을 사는 하늘의 존재로서 하나님이 새롭게 입혀주실 새 육신을 입고 살게 될 것임을, 그런 존재가 정말 가능하다는 것을 모형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는 신앙고백을 할 때, 그 사실이 정말 역사적 사실인 만큼, 우리도 분명 하나님의 은혜의 덮으심으로 인해 육신을 입은 신적인 존재로 완성이 될 것임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제한된 육신을 입은 자가 하늘의 영원을 살 수 있는가? 우리는 이해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그 모습으로 영원을 살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확실한 역사적 사실을 현실로 믿고 우리의 완성된 미래 또한 확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부연을 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 성도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됩니까? 성령에 의해 거듭나게 되지요? 그 말은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성령에 의해 잉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1:16~18)




16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7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18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태복음 1장의 족보가 엘 네 대씩 나누어지지요? 그것은 DAVID, 즉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언약의 성취를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표현 기법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었기 때문에 히브리 자음에 숫자를 붙여서 썼다고 했지요? 모음은 없었으니까요. 히브리어 달렙, 즉 D가 4이고, 바우, V가 6이었습니다. 따라서 DVD하면 14잖아요? 그래서 굳이 14대로 족보를 맞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족보가 완전한 족보가 되려면 7이 7개가 있어야 완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7은 히브리 사람들 맞욘전수로 쓰던 숫자니까요. 그런데 14가 셋이면 7이 6개밖에 안 되잖아요? 마지막 7번째 무리가 그 아래 붙어야, 마태복음의 족보는 완벽한 하나님 백성들의 족보가 됩니가 완전한마지막 7번째 무리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그 를 말합니다. 그런데 전한마지막 7번째 족보의 제일 머리가 되시는 분이 누구지요? 예수님입니다. 17절을 보시면 전한7번째 무리의 머리가 되신 예수가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다는 것이 강조가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머리를 좇아 7번째 무리가 되는 교회는 모두 누구에 의해 잉태가 된다는 것입니까? 성령에 의해 잉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7번째 무리의 제일 위 조상이신 예수님이 성령에 의해 잉태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아래 교회는 당연히 성령으로 잉태가 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렇게 성령에 의해 잉태가 되는 것이며, 완전한 부활의 육신을 입고 영원을 살게 될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그 교회의 머리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마리아에게서 나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고백을 함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는 것이 우리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지만 그것이 사실임과 동시에 우리에게 믿겨지는 것처럼 우리 또한 성령으로 새롭게 창조가 된 자들이며 반드시 새로운 육신을 입은 하늘의 신적존재로 완성이 될 것임을 아울러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 신부인 교회에게 ‘내 사랑하는 자야 일어나 나와 함께 가자’ 하시며 쉬지 않고 당신의 옷자락으로 덮으십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새 생명이 성숙되고 완성이 되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거듭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완전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완성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의 임하심과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덮으심에 의해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이 땅에 오신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 성도들의 새로운 창조를 위함이었고, 두 번째로 우리 성도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창조가 될 것인지를 미리 모형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성령으로 잉태되어 마리아의 태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왜 예수님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셔야 했는가에 관해 간단하게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나실 것이라는 건 이미 이사야가 예언을 했던 것입니다.




(사7:14)




14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유다 왕 아하스 때에 아람과 북 이스라엘이 연합을 하여 유다를 공격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당신께 징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들은 절대 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하스가 너무 겁을 먹어서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징조를 안 보여주어도 하나님을 신뢰하겠다는 기특한 신앙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절망에서 일말의 기대도 저버린 나약함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징조를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징조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반드시 승리를 이끌어 낼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구원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십자가 승리를 상징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마리아의 처녀성을 의심하며, 이사야서에 쓰인 ‘처녀’‘알마’라는 단어는 남자를 모르는 여자를 지칭하는 단어일 뿐 아니라 일반적인 보통 ‘젊은 여자’를 지칭하던 단어였다는 것을 들어서 동정녀라는 단어에 흠집을 냅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을 해 보면 그들의 주장이 얼토당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알마’라는 단어와 ‘징조, 오트’라는 단어를 함께 연계해서 생각해 보자고요.




징조라는 것은 독특성과 예외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징조가 되지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은 징조의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젊은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징조를 주시면서 ‘그냥 젊은 여자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것이 징조야’라고 하셨겠습니까? 그건 ‘너 삼일 굶으면 배고플 거야, 그게 징조야’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건 징조로 쓰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일을 굶으면 누구나 배가 고프고, 언제나 배가 고픕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징조가 됩니까? 적어도 징조가 되려면 ‘너 열흘을 굶었는데 배가 하나도 안 고플 거야, 그 때 그것이 징조인 줄 알아라’ 이 정도는 되어야지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직접 징조로 주신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징조는 ‘동정녀’를 지칭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징조라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주어져야 그 효력이 있는 것인데 하나님은 800년 후에 일어날 일을 징조로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이번 일에 꼭 성공을 하겠습니까?’하고 묻는 어떤 이에게 ‘그럼, 너는 꼭 성공할 거야, 내가 징조를 줄게, 네가 이 문을 나서는 순간 천둥이 다섯 번 칠 거야, 그게 징조야’ 이건 징조로서의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징조를 줄게’하면서 ‘나중에 네 자식이 60년 뒤에 80살로 죽을 거야, 그게 징조야’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징조는 당면한 문제보다 먼저 주어져야 징조의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하스에게 800년 후에나 일어날 일을 징조로 주신 것은 ‘비록 800년 후의 일이지만 유다지파에서 반드시 메시아가 와야 하므로 너희는 절대 지금 망할 수 없다’는 언약을 확인시켜 주신 것임과 동시에 ‘유다지파로 올 그 메시야는 불가능한 전쟁을 승리로 완성해 낼 참 구세주’라는 것을 인식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불가능한 전쟁 앞에서 800년 후의 메시아의 탄생이 징조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메시아가 동정녀에게서만 나와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세주는 우리 성도를 어디에서 구원해 내는 분입니까? 죄에서 구원해 내시는 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세주 자신이 죄와 아무 상관없는 자로 이 땅에 오셔야 합니다. 그런데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이 다 원죄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인 아비의 씨를 받아서 태어나는 모든 자는 다 ‘죄 있음(guilty)’의 선고를 받고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세주는 인간인 아비의 씨를 받아서 나면 안 됩니다. 구세주는 남자의 손이 닿지 아니한 순결한 태를 잠시 장소로 빌려서 무죄한 상태로 이 세상에 오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안에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의 죄를 담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속의 제물로서의 자격이 있기 위해서는 그 제물에게 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성도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러 오시는 메시아는 동정녀에게서 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족보에서도 예수님의 아비가 기록되지 않고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라고 표기가 된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탄생에 조금도 기여한 바가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정녀 마리아의 태속에 성령으로 잉태가 되신 예수가 가지는 의미는,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무죄한 분이라는 것을 웅변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그분의 신성을 드러내는 대목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꼭 마리아의 태를 빌렸어야 했는가? 그냥 공중에서 뿅 하고 나타나시면 안 되는 것인가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신성과 함께 완전한 인성을 동시에 갖고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인간의 대표가 될 수 있고, 우리가 겪어야 할 시험과 고난을 인간으로서 체휼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4:15)




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완전한 인성으로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시험과 고난을 무죄한 상태에서 다 겪어 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정답을 삶으로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합격 점수를 우리에게 거저 전가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완전한 인간이셔야 합니다. 그런 연유로 하나님이신 그 분은 인성 안에서 배가 고프셨고, 피곤하셨으며, 먹어야 했고, 배설을 해야 했으며, 주무셔야 했습니다.




(눅2:40, 52)




40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52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나셔서 자라고, 강해지셨으며, 지혜도 점점 풍성해졌던 것입니다. 전지하신 그 분이 히브리어, 아람어를 알파벳부터 하나하나 배우셔야 했고, 천지를 창조하신 그 분이 아버지로부터 목수 일을 배우셔야 했습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그 분이 사소한 질병을 달고 사셨고, 만왕의 왕이신 그 분이 동네 남정네들에게 수시로 멱살을 잡히셨습니다. 그 모든 것이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가 당해야 할 시험과 고난을 다 당하고 계신 예수님의 인성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간혹 주변에서 이런 질문하시는 분들 있으시지요? ‘예수님은 언제부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인지하셨는가?’ 그게 왜 궁금합니까? 적어도 12살 이전이라고만 알고 있으면 됩니다. 열두 살 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나요?’하고 엄마에게 말했으니까요. 아무튼 예수님은 그렇게 완전한 인간으로, 그러나 무죄한 존재로 자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절에 보면 그러한 예수님의 성육신을 잘 표현한 어구가 나옵니다.




(롬8:3)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 하사(카타크리노, 선고하다, 정죄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그 분의 무죄한 육신에 ‘죄 있음’의 선고를 내리심으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율법의 요구가 모두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마르시온의 말처럼 예수님이 그저 육체를 가진 것과 같이 나타난 것이라는 뜻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 죄를 가지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 어절에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라는 것은 피사성이나 유사성을 뜻하는 말이 아니고, 형태(form)라는 뜻입니다. 죄 있는 육신을 입으셨는데, 그것은 ‘형태, 호모이오마티’만을 취하신 죄 있는 육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연약한 육체와 동일한 육체를 지니신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었는가?




여러분, 그건 신비입니다. 한 인격 안에 두 본성이 공존한다는 것은 탐구의 대상이나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인 것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믿음의 영역에 있는 것들과 탐구나 지식의 영역에 있는 것들을 구별하지 못하고 억지로 증명을 해 내려할 때 곁길로 가게 되고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니케아 회의나 칼케돈 회의에서 이단들을 정죄하고 기독교의 신조들이 하나 둘씩 첨가가 된 것은 어떤 지식을 교회에게 가르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이단들의 주장을 물리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어떻게 과학적으로 이해를 하여 설명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천착하기 보다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올바른 성도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리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완전하신 하나님과 불가능한 죄인의 중간에서 그 둘 사이를 중보 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셔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심을 증거 하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어구는 그 분의 거룩하심과 순결함, 그리고 중보자로서의 자격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중요한 선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실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미치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5번 질문이 이러합니다.




35.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심은 무슨 의미인가요?




‘참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계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 참 인간의 본질을 입으셨습니다. 그는 성령의 역사로 잉태 되셨고 참된 다윗의 자손이 되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36. 당신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잉태와 탄생으로부터 어떠한 유익을 얻게 됩니까?




‘그분은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고, 그의 순결함과 거룩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를 덮어줍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예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을 무죄한 하늘의 순결한 백성들로 완성해 내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의 임재와 능력의 덮으심으로 이 땅에 성육신하여 오셨던 것처럼 우리도 성령의 덮으심에 의해 이 땅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육신을 입은, 그러나 무죄한 신적 존재로 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내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고난과 시험을 다 겪어내시고 결국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정답을 내 놓으시고는 그 합격점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고통도, 시험도 없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육신을 입은 신적 존재로 행복만을 누리며 살게 된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이 왜 함의 저주로 끝난다고 했지요? 구원사건은 부끄러움을 무조건 덮어주는, 은혜의 사건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해 노아의 홍수 사건이 아비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지 않은 함의 저주 사건으로 끝이 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지금은 비록 이렇게 불가능해 보이고 전혀 무력해 보여도 반드시 우리를 고쳐 내십니다. 아하스가 도저히 불가능하다 하여 징조마저 구하지 않았던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징조를 받고 전쟁에서 승리를 한 것을 기억하세요. 전쟁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으로, 독수리 날개로, 영광의 구름으로, 신랑의 옷자락으로 우리를 덮으시고 인도하십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우리도 분명 그렇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우리가 무죄한 자로, 하늘의 존재로 완성이 될 것을 믿으세요.




 




그리스 신화에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아테네 교외의 케피소스 강가에 살면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에 데려와 쇠로 만든 침대에 눕히고는 키가 침대보다 짧으면 잡아 늘이고, 침대보다 길면 다리를 잘라버렸다고 합니다.




‘침대’는 그에게 나그네의 생과 사를 결정하는 절대적 기준이었으므로 무고한 희생자는 끊임없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누군가에게는 절대기준이었을지 모를 그 침대의 길이가 나그네 입장에서 보면 막무가내로 적용되는 악법의 횡포였을 것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라는 말 자체가 ‘늘이는 자’ 또는 ‘두드려 펴는 자’라는 뜻으로, 이 신화에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 및 ’프로크루스테스 체계(Procrustean method)'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보통 융통성이 없거나 자기가 세운 일방적인 기준에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억지로 맞추려는 아집과 편견을 비유하는 관용구로 오늘날 종종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구원에 관한한, 하나님은 프로크루스테스처럼 막무가내로 우리를 당신의 선에 맞추어 늘이고 자르고 계신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자격과 조건, 다 필요 없습니다. 우리의 노력과 열심도 거기에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덮으십니다. 그리고 그 덮으신 은혜의 보자기 안에서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를 당신의 침대에 딱 맞는 자로 만들어 내고 계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다리가 조금 잘려 나가는 고통을 느낄 수도 있고 팔이 조금 늘어나는 통증을 느낄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래도 잘 참으세요. 하나님이 지금 구원의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에 여러분을 맞추고 계신 중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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