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신경강해

사도신경 강해 9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11:18

사도신경 강해 9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9:22)

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옛날에 한 언덕에 사과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는 사랑하는 소년이 하나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그 소년은 그 나무에게로 와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한 잎 두 잎 주워 모았습니다. 그러고는 그 나뭇잎으로 왕관을 만들어 쓰고 숲속의 왕자 노릇을 했습니다. 소년은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가서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뛰고, 사과도 따먹곤 했습니다. 때로는 숨바꼭질도 했지요. 그러다가 피곤해지면 소년은 나무 그늘에서 단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소년은 나무를 무척 사랑했고 나무도 그 소년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그 소년과 함께 지내는 것이 무척이나 행복했습니다.

시간은 흘러 소년도 점점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나무는 홀로 있을 때가 많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나무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난 이제 나무에 올라가 놀기에는 다 커 버렸는걸. 난 물건을 사고 싶고 신나게 놀고 싶단 말이야. 나는 돈이 필요해. 내게 돈을 좀 줄 수 없겠어?’ 그 말은 들은 나무가 소년에게 말했습니다. ‘미안하지만, 내겐 돈이 없는데, 그렇지만 내게는 맛있는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 있잖아, 이걸 따다가 도회지에 가서 팔면 어때?

소년은 나무의 말을 듣자마자 나무 위로 올라가 사과를 따서 도회지로 가지고 가 버렸습니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자기의 몸에서 사과들이 다 떨어져 나갔지만 그로 말미암아 자기가 사랑하는 소년이 행복해졌기 때문에 나무도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떠나간 소년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나무는 소년이 너무나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돌아왔습니다. 소년은 시무룩하게 나무에게 말을 했습니다. 아내와 어린애들을 위해 집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나무는 자기의 가지를 베어 집을 지으라고 했고 소년은 그 나무의 말대로 나무의 가지들을 베어서 자기의 집을 지으러 갔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떠나간 소년은 또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소년이 돌아오자 나무는 하도 기뻐서 거의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무는 그 소년이 예전처럼 자기와 함께 시간을 보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은 말했습니다. ‘난 너무 나이가 들고 비참해서 너와 놀 수가 없어. 난 여기를 떠나야해. 난 여기로부터 나를 먼 곳으로 데려갈 배 한 척이 필요한데 배를 구할 방법이 없어.’ 나무는 가지가 다 잘려나간 상태에서 자기의 몸통까지 그 소년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그 소년은 그 나무의 줄기로 배를 만들어 먼 곳으로 떠났습니다. 밑 둥만 남은 나무였지만 그래도 자기가 사랑하는 소년이 행복했기에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소년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나무는 너무 기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은 또 다시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무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얘야, 미안하다, 이제는 너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사과도 없고, 가지도 없고, 줄기마저 없어, 나에게 남은 거라곤 이 나무 밑 둥뿐이란다.

 

소년이 말했습니다. ‘이제 내게 필요한 건 별로 없어. 난 너무 늙고 힘이 없어.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그저 앉아서 조용히 쉴 수 있는 곳이야. 난 몹시 피곤해.

나무의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아 그래? , 않아서 쉬기에는 늙은 나무 밑 둥이 그만이야.

친구야, 이리로 와서 앉으렴. 여기 앉아서 쉬도록 해.’ 소년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국어 책에 나왔던 창작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줄거리입니다. 그 때 당시 저희 담임선생님은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셨습니다. 저희 선생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면서도, 사랑하는 소년의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 나무의 이야기를 읽어 주시면서, 성경에 나와 있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오버랩 시켜 설명을 해 주시곤 하셨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우리 담임선생님의 가르침은, 자신의 유산을 미리 다 챙겨서 허랑방탕하게 탕진을 한 후에 면목 없는 돼지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또 다시 상속자의 상징인 가락지를 끼워주시고 좋은 옷을 입히신 후 큰 잔치를 베풀어 주신 그 아버지의 사랑이 바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헌신적 사랑이라는 요지의 내용이었습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흘러 제가 성경을 통해 탕자의 비유를 진지하게 공부를 하게 되었을 무렵, 저는 우리 선생님이 주셨던 그 비유에 관한 선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그 비유의 핵심을 간파할 수 있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창작 동화의 주인공이, 소년이 아닌 나무이듯이 그 비유의 주인공은 탕자가 아닌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재산 중 일부를 유산으로 받아,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믿은 그 둘째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나 자신들 속에 내재된,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스스로의 노력으로도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철썩 같이 믿으며 바벨탑을 쌓아 올라가는 우리 타락한 아담들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해 보이는 아담들의 삶은 탕자의 삶이 그러했듯이, 더러운 돼지우리 안에서 돼지들의 음식인 쥐엄 열매를 나누어 먹는 꼴에 불과한 것이며, 결국 돼지우리로 결론지어지게 될 것임을 그 비유는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의 패역으로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를 죽이는 것과 방불한 짓) 상처 입은 아버지는 여전히 문 밖에 서서 그 돼지 같은 아들을 기다리고 계시다가, 상거가 아직 먼데도 불구하고 아들에게로 뛰어나가 그를 맞이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헌신적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아들을 원수로 생각하신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자격지심에 그 분을 원수로 대했던 것이지요.

 

저는 그 비유를 읽으면서 늘 궁금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그 아들이 어떻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되었으며 어떻게 면목 없는 얼굴로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는가 말입니다. 나중에 십자가 복음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게 된 이후, 저는 그 비유에 아주 중요한 복음의 핵심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탕자의 비유, 그 전체의 주제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여 그 이전의 타락한 죄인들의 비참한 현실과 십자가 이후의 복된 하늘의 현실을 그려 놓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냥 하릴없이 돼지우리 같은 이 세상에서, 돼지들과 함께, 쥐엄 열매 같은 이 세상의 힘들을 경쟁하며, 다투며, 서로 빼앗고 뺏기다가 결국 돼지우리에 불과한 이 세상에서 돼지처럼 더럽게 죽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게 타락한 전 인류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돼지우리 같은 세상 속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뚫고 들어와 버렸습니다. 돼지우리 속으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돼지의 모습을 하고 내려와 버리신 것입니다. 그게 성육신입니다. 그리고는 그 돼지들 가운데 얼마에게 믿음이라는 것을 선물로 쏟아 부으셔서, 자신들은 왕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그들의 실체를 올바로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 믿음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의 백성들 또한 이 세상에서의 자신들의 삶이 돼지와 같은 삶이었다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여느 돼지들과 함께 쥐엄 열매 쟁탈전에 참전하여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돼지처럼 죽을 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 속에 믿음이 임하자 이 세상이 돼지우리에 불과한 곳임이 깨달아 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소원은 하루속히 그 돼지우리 속에서 빠져나가는 것으로 집중이 됩니다. 결국 그들은 돼지우리 같은 이 세상에서 빠져나와 천국 문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눈을 뜨게 하여,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우리 죄인들의 실체를 정확하게 인식하게 만들어, 그 돼지우리 속에서의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심과 동시에, 우리에게는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이나 재주나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꼭 붙들게 하는 데까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아는 이들은 자기들이 은혜 받은 돼지임을 인정하는 이들인 것입니다. 은혜는 받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면 돼지일 수밖에 없는 은혜 받은 돼지. 자꾸 돼지, 돼지 하니까 기분이 나쁘십니까?

(22:6)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 니이다

다윗의 시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불리던 다윗이 자기를 가리켜 벌레라고 합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썼지만 메시아의 시편이라 불리는 시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대표하여 죽으신 예수의 시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의 대표가 자신을 가리켜 벌레라고 말씀하십니다. 벌레들을 하나님 아들로 만드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이 벌레가 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받은 벌레이기도 합니다.

(41:14)

14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지렁이’라고도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난 수요 예배 때 공부한 요한복음 강해의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에서는 주님이 수로보니게 여인을 가리켜 ‘개’라고까지 하십니다. 자신이 ‘개’라는 것을 인정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주님은 ‘메갈레 피스티스’ ‘메가톤급 믿음’이라는 칭찬을 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통과한 성도는 자신이 구원받은 ‘개’이 여인‘벌레’이 여인‘지렁이’이 여인‘돼지’라는 것을 아는 이들걸’라는 것을 인래서 그들은 자랑이라는 것과 교만이라는 것에 대해 점점 자신이 는 것입니다. 그러주님이 수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은 벌레나, 지렁이나, 개나, 돼지 정도님이아니라 티끌이 여인먼지라는 것을 알신이 어 완전한 자기부인에 이르신이 어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온전히 점령하게 자신을 드리는 상태까지 인‘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씩것입르세요. 벌레, 지렁이, , 돼지여인먼지, 티끌 중에서 하나씩 골라 그것을 자기의 호()로 삼으세요.

벌레 김성수, 지렁이 정병주, 이렇게요.

이렇게 십자가는 벌레나, 지렁이, 돼지나, 개에 불과한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바꾸어 내는 요술방망이 같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고백은 기독교 세계관의 핵이며 DNA라 할 수 있는 바로 그 십자가에 관한 것입니다.

그 내용이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오늘 하루에 다 마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까지 이어서 공부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결론은 조금 깔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음 주까지 잘 연결해서 들으시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아주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중요한 교리의 지평을 마련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1992년에 제가 존경하던 목사님으로부터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마산의 어떤 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기고 계셨는데 담임목회를 하기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던 차에 몸에 이상이 생겨 병원엘 갔더니 암 말기로 이미 온 몸에 암 세포가 퍼져 3개월 정도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이 나왔답니다. 그 후 목사님의 건강상태는 극도로 악화되었고 누가 보아도 얼마 살지 못할 사람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 충북 음성에 있는 한 교회에서 주일 설교를 좀 해 달라는 요청이 왔답니다.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 교회 담임 목사님께서 미국으로 유학을 가시면서 평소에 아끼던 후배를 담임목사로 추천을 하고 가셨던 것이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설교 부탁을 받은 그 목사님은 그 설교가 자기 생애 마지막 설교가 될 것임을 직감하고 어떤 설교를 할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를 하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고민을 하고 기도를 해도 자기 생애의 마지막 설교에서 외칠 내용은 십자가밖에 없더랍니다.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가 끝나자 그 교회 당회가 그 목사님에게 담임목사로 와 달라는 청빙을 했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 전부가 만장일치로 ‘이런 설교를 단 한 번만이라도 더 들을 수 있다면 그건 우리의 축복이다’라고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목사님을 청빙한 것입니다.

그 교회 교인들은 목사님이 말기 암 환자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설교를 하실 수 있을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 분을 담임목사로 청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에 생명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 그 목사님은 그 음성의 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을 하셨고 하나님의 은혜로 몇 년간 더 설교를 하시다가 하나님 품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 분이 남은 생애 동안에 담임목사로 시무하시면서 어떤 설교를 하다가 가셨을 것 같으세요? 매번 설교를 하실 때마다 이번 설교가 마지막 설교일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에서 설교를 하셨을 그 목사님의 설교가 어떤 설교였을 것 같으십니까?

부자 되는 방법? 병 고치는 방법?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하게 살자는 권고? 사회를 개혁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권익을 찾아주자?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는 방법? 방언 받는 방법? 예배당 건축을 위한 헌금 강요? 인기 있는 교육 프로그램 개발? 아닙니다. 그 분은 그 날부터 죽는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하셨다고 합니다. 십자가만이 성도의 소망이요, 십자가만이 성도의 힘이며, 십자가만이 성도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으며, 십자가만이 구원의 도를 담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 이외에는 아무것도 전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바울이 왜 ‘내가 십자가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도, 자랑하지도, 전하지도 않기로 했다’고 했는지 아십니까? 교회는 십자가로 살고 십자가로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후부터 십자가 이외에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설교의 결론을 십자가로 내려왔습니다. 저도 매번 설교를 내 생애 마지막 설교라 생각하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이외에는 다른 설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설교가 마지막 설교가 되지 말란 보장이 없잖아요?

어디 설교자만 그런가요? 설교를 듣는 회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이외에 다른 내용이 담겨서는 안 됩니다. 도덕책이나 윤리 책에 있는 내용을 앵무새처럼 강대상에서 반복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의 강대상에서는 성도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십자가 복음만이 전해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착하게 잘 살자, 사회를 개혁하자, 하나님을 어르고 달래서 세상의 부귀영화를 얻어내자, 등등의 설교만을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도 여느 때처럼 착하게 잘 살자는 내용의 설교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그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해 보자고요. 눈을 떠보니 지옥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죄와 심판과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지옥에 가야지요. 그런데 잠시 후 그날 자기에게 마지막 설교를 한 목사가 지옥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습니다. 그 사람이 화가 났지요. ‘저 사람이 내 생애 마지막 설교에서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주었다면 난 여기에 있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생각이 거기에 미치게 되었을 때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아마 지옥에서 살인 날겁니다. 성도는 그런 심정으로 매일의 설교를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설교가 내가 이생에서 마지막으로 듣는 설교가 될 수도 있다는 심정으로, 설교자가 십자가 복음 이외의 다른 헛소리를 하면 역정을 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독교의 핵심이자 DNA는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공부할 부분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따라서 여러분은 오늘 설교를 너무나 쉽게 이해를 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동안 수없이 들어왔던 설교를 다시 반복하는 것일 테니까요. 그래도 십자가는 들으면 들을수록 새롭고, 들으면 들을수록 은혜가 됩니다. 그러니까 잘 들어 보세요

먼저 왜 예수님은 다른 방법이 아닌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에 대해 복습을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9문답의 질문이 이러합니다.

39. 그리스도께서 다른 어떤 방식으로 죽으시는 것에 비해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어떤 면에서 더 유익하기에 그렇게 하신 것일까요?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므로, 이로써 나는 그가 내게 내려질 저주를 취하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대답이 조금 시원치가 않지요? 제가 거기에 대해 조금 부연하여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찾아본 바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저주받은 자로 죽으셔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번 더 읽고 가지요.

(21:22~23)

22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의 이 말씀은 구약의 하나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백성의 연대적 책임 의식을 강조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신명기 21장의 말씀의 문맥을 따라 올라가보면, 한 사람이라도 현저하게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한 죄를 범하거든, 사람의 손도 대지 말고(사람의 손이 더러워지므로), 돌로 쳐서 죽여서, 나무에 달아 놓아, 온 백성들로 하여금 그가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았음을 보도록 하고, 또한 자신들도 그러한 동일한 죄를 범하려는 마음에서 벗어나도록, 경계를 받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권면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의,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삶과, 그런 의식의 확대를 위한 권면이었던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법을 어긴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며 아주 괴악한 것이므로, 그러한 자들을 죽여 나무에 매달아 그 수치 됨을 알리고, 그 저주와 형벌이 정말 이 땅에 왔음을 드러내고, 그러한 것이 재발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표본이 되어 다른 이들이 저주의 죽음에 이르지 않게 하는 연대성이 그 저주받은 나무, 십자가의 포인트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앞의 내용은 다 생략해 버리고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다’는 말만 부각시켜 이해를 했습니다. 연대성에 관한 부분은 배제해 버리고,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 받은 자라는 정죄에만 집중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신명기 21장의 내용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결을 시켜보세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 다심으로 말미암아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덧입지 못한 죄인들의 결국을 보여주신 것이고(모든 인류는 다 그렇게 죽어야 할 자들이라는 것), 두 번째로는 그렇게 하나님의 법을 어긴 수많은 아담들을 대신해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하여, 그리고 대표로, 저주의 장대 위에 달리셨음을 고지하는 것이며, 세 번째로는 ‘그렇게 구원받은 자들로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 수 있느냐?’까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를 다음 주까지 이어서 설명을 해 드릴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제물로서의 어린양 되심이라는 인식에 앞서,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실존이며 결국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그 속에서 예수와 성도들 간의 연대성, 즉 대표의 원리(representation principle)를 읽어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21장의 내용처럼 예수 하나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이 그 죽음의 공로를 힘입어 살아나게 되는 연대성 말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대표의 원리, 연대성(solidarity)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논리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그런 것이 바로 대표의 원리입니다. 어떻게 아담이 우리를 대표하여 우리를 모두 죄인으로 만들었으며,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의 대표가 되어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받아, 죽으실 수 있는지 우리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도 거기에 대해 굳이 설명을 붙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전반에 흐르는 대표의 원리를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잘하면, 이스라엘 전체가 칭찬을 받고, 이스라엘 왕이 패역한 짓을 하면,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는, 그 연대성의 원리를 우리는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성경의 대 전제라는 것을 알기에 그냥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것일 뿐입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설명이나 변증을 덧붙이지 않는 대 전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확인에 대한 것이라든지, 삼위일체 사상이라든지 그러한 것은 우리가 우리 인간의 언어와 사고로,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대 전제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기에 믿음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우리가 증명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대 전제가 많이 있습니다. 1+1=2라는 것, 그게 왜 정답입니까? 설명할 수 있으세요?

그냥 우리는 전제 되어있는 사실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어떻게 DNA RNA에 정보를 전달하고 그것이 어떻게 단백질을 형성하게 되는지 설명이 가능합니까? 만류인력을 인간의 언어로 설명을 해 낼 수 있나요? 그런 것은 모두 하나님이 자연의 법칙으로 만들어 놓으신 대 전제잖아요? 마찬가지로 대표의 원리, 연대성 또한 그렇게 이해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바로 연대성 아래에서, 우리를 대표하고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신,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의 죽음을 보아야 하는 것이고, 그 대속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그 십자가에서 끌어 내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울러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며, 이제 다시는 그러한 저주의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하나님 백성다운 삶에로의 몸부림까지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연유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너희들의 모습이니까 회개하고 은혜를 붙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들의 모습을 보기는커녕, 훌륭하고 고매한 자신들과는 달리 홀로 십자가에서 죽어버린 저주받은 예수에만 집중했던 것입니다. 거기에서만큼은 연대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저주받아 마땅한 아담들, 그 중에서 창세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이들을 위해, 그들의 저주를 대신하고 대표하여 모두 다 받아내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꼭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제 잘 아시겠지요?

 

이제 두 번째로, 그렇게 대표의 원리 아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익에 대해 구체적 세목을 들어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5:10)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 이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첫 번째 유익은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여기에서 ‘화목’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카텔라게멘’은, 원수 되었던 관계를 친구 사이로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뒤틀린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로 회복이 되는 것을 다른 말로 뭐라고 합니까? ‘관계’하면 생각나는 것? ‘의’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는 단순히 ‘옳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의’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관계의 언어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란, 어떤 것이 가장 이상적이며, 적절하며, 정상적으로, 최고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끈끈한 연대성 아래, 자신이 있어야 할 제 자리에서 자기의 책임과 임무와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해 내는 그 상태가 바로 의의 상태입니다.

여러분 몸속에 10 23승개의 세포가 있지요? 그 세포들이 모두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지금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으신 것입니다. 그 상태가 ‘의’의 상태입니다. 그러한 세포들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의 육신이 건강하게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좀 더 나아가 여러분의 장기가 제 자리에서 자기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지요? 여러분의 심장이 ‘아, 왜 나만 이렇게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하지? 5분만 쉬었다가 움직여야지’하고 쉬면 어떻게 됩니까? 바로 사망입니다. 여러분의 콩팥이 하루정도 휴가를 달라고 조르면 그 때부터 여러분은 큰 일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세포나 우리의 장기들은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자기의 일을 해 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의’입니다. 여러분 안에 유기체로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의의 상태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그 때 질병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라는 것은 존재의 유기체적 관계라 바꾸어 말을 해도 무방합니다. 나의 ‘의’가 나 이외의 다른 존재의 유익에 기여하는, 그러한 유기체적 관계가 바로 의의 관계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피조물로서, 그리고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여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버금 왕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세상을 사랑으로 다스려 내는 삶을 살 때 가장 의로운 것입니다. 그게 창조의 목적이니까요. 돈에게 정복당하지 않고, 명예에게 정복당하지 않고, 자식에게 정복당하지 않고, 인기에게 정복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다스리고 정복하여 하나님 앞에 순종케 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의로운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최초의 ‘의’가 설명이 될 때 다소 엉뚱한 곳에서 ‘의’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5 4절 이후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아브람에게 의롭다는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상황은 아브라함이 무슨 착한 일을 한 상황도 아니고, 선한 일을 한 상황도 아닙니다. 그저 도저히 불가능한 어떤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을 했더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게 ‘의’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진 율법이 ‘주 너의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 하라’로 축약이 되는 지 잘 아시겠지요? 그 관계 속에서 유기적으로 상대방을 위해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의로운 삶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서, 하나님과의 그 의로운 관계를 파기하고, 불의한 관계로 뒤 틀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이제 연대성, 대표의 원리 아래에서, 어떤 자격 있는 존재가, 그 뒤틀린 ‘의’를 회복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 번째 아담과 동일한 상태에서 그 첫 번째 아담이 실패한 것을 성공으로 회복해 내면 되는 것이지요? ? 하나님의 구속의 원리는 연대성, 대표의 원리라는 대전제 아래에서 진행이 되도록 되어 있으니까요.

 

생각해 보세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께 범죄를 했을 때 그 형벌은 무한한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형벌을 갚는 유일한 길은 영원토록 형벌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좋은 소식, 복음이 들려왔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유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유한한 인간의 상태와 무한한 하나님의 두 본성으로 형벌을 받아 버리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한하게 받아야 할 영원한 형벌을, 무한하신 예수님의 형벌 받으심으로 유한한 시간 안에서 상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한하신 예수님의 유한 속에서의 고난은 무한한 저주와 동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버금왕의 자격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해 내신 것이고 원수들을 위해 목숨을 주신 것입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목숨 걸어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의’의 삶을 완전하게 사시고 그 삶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시고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비로소 의로운 자가 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아주 명쾌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 곳이 로마서 3장입니다.

(3:20~25)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잘 보시면 인간 측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의’의 관계에 기여하도록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전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열심이 담긴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셨는데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예수의 대표되심에 의해 값없이 의로운 자가 된 것입니다. 25절을 보시면 ‘의’를 설명하는 와중에 ‘화목 제물’이라는 단어가 불숙 튀어나오지요? 이렇게 ‘의’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화해의 몸짓이 우리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요일4:9~10)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렇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의로운 관계 속으로 복귀를 하여,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세 번째로 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내야만 하는가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냥 타락한 상태이지만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다가 가면 안 되는가? 왜 꼭 하나님은 우리와 화목하게 사셔야 하는가? 왜 하나님은 당신과 화목하지 못한 존재들을 전부 유황 불 못에 넣어야 하는가? 성경은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고, 불의한 상태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상태를 ‘사망’이라고 합니다.

(2:1-5)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상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네 힘으로 행복에 도달해 보라는, 세상의 미혹에 귀를 기울이며 세상의 명령을 좇아 사는 상태를 ‘죽어 있는 상태’라 말합니다. 그러한 상태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을 ‘사망’이라합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그 ‘사망’은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단순한 약속의 개념이 아닙니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우리 피조물들에게 가르쳐 주셨고, 우리 존재 속에 뿌리 뽑을 수 없도록 심어주신 삶의 원리(principle)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며, 성취 될 수밖에 없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언약입니다.

그 사망에 관한 언약이 어디서 주어졌습니까? 선악과 사건에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 말 안 들으면 죽는다.’ ‘정녕 죽으리라, 무트 타무트’는 히브리 문학의 강조 용법입니다. 반드시 죽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을 안 들으면, 불순종하면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며, 언약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겼습니다. 인간은 그 즉시 죽음의 상태로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자기를 부인 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에 당신이 내리신 언약을 번복 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죽었습니다.

(딤후2:13)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그러니까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서 자신의 꿈과 야망을 좇으며, 하나님 이외의 다른 힘과 가치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려고 하는 그 상태가 바로 ‘사망’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지옥 간다’가 아니라 그렇게 사는 상태 자체가 지옥이며 사망의 상태인 것입니다.

어제 CBS 뉴스에 미국의 폴 로브슨 하이스쿨 학생 800명 중 미혼모가 115명이라는 충격적인 보도가 나왔습니다. 여학생 400명 중에 115명이 낙태를 하거나 아이를 낳은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재미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아버지가 친 딸을 성폭행하며, 어머니가 생활고로 아이들을 살해하기도 합니다. 에이즈에 걸린 여자 매춘부가 300명의 남자와 잠자리를 해서 복수극을 펼칩니다. 이게 다 어제 하루 동안의 헤드라인 뉴스입니다. 이 세상은 죽은 것입니다. 죽어 있는 시체들이 자기들은 절대 죽은 자들이 아니라고 기를 쓰면 살아있음을 증명하려 합니다.

죽었는데 산 자들처럼 행동하는 자들을 좀비라고 하지요? 이 세상은 좀비들의 세상입니다.

여러분 중에 예수 믿고 나서도 가끔 가위에 눌리는 분들 계시지요? 그럼에도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까봐 말도 못하시고 얼마나 답답하셨어요? 어떤 사람은 하도 귀신이 자기를 깔고 앉고, 올라타고 해서 손을 올려 만져 본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귀신의 다리를 수시로 만진다고 하더라고요. 여러분, 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그런 경험을 허락하실까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지 않고 이 세상을 사랑하며, 이 세상의 삶의 원리를 좇아 사는 것이 그렇게 귀신이 올라 탄 삶이라는 것을 경각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왜 가위눌리는 것은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정작 너희들의 일상 속에서 귀신들린 삶을 살고 있는 너희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게 관대하며 무관심하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대장이 되려고 하는 삶, 가위 눌린 삶입니다. 귀신들린 삶입니다. 돼지의 삶이며, 개의 삶이며, 지렁이의 삶이며, 벌레의 삶이며, 티끌의 삶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러한 지옥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 지옥이 잠시 주는 쾌락과 매력에 속아 열심히 사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러한 삶이 진짜 행복한 삶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들이 간혹 이해할 수없는 고난의 상황을 겪게 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곳이 바로 돼지우리이며, 너희들의 삶은 돼지의 삶에 불과한 것이니까 아버지의 집으로 가라고 떠미는 은혜의 사건이 여러분이 겪고 있는 고난의 정체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다음 주에는 그 십자가의 대속의 원리와 그렇게 대속된 자들의 신분과 이 세상에서 그들이 겪어내야 하는 신앙생활의 본질에 대해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어떠한 것인지를 극화해 놓은 듯한 이야기 하나를 해 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 펜실베니아에 사시는 어떤 장로님의 실제 이야기입니다.

 

눈이 수북이 쌓이도록 내린 어느 겨울날, 강원도 깊은 골짜기를 두 사람이 찾았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한 사람은 미국 사람이었고, 젊은 청년은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눈 속을 헤치며 한참 골짜기를 더듬어 들어간 두 사람이 마침내 한 무덤 앞에 섰습니다.

"이곳이 네 어머니가 묻힌 곳이란다." 나이 많은 미국인이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날을 회상합니다.

한 미국 병사가 강원도 깊은 골짜기로 후퇴를 하고 있었는데,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가만 들어보니 아이 울음소리였습니다. 울음소리를 따라가 봤더니 소리는 눈구덩이 속에서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눈에서 꺼내기 위해 눈을 치우던 미국병사는 소스라쳐 놀라고 말았습니다. 흰 눈 속에 파묻혀 있는 어머니가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얼어 죽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피난을 가던 어머니가 깊은 골짜기에 갇히게 되자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아이를 감싸곤 허리를 꾸부려 아이를 끌어않은 채 얼어 죽고만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에 감동한 미군병사는 언 땅을 파 어머니를 묻고, 어머니 품에서 울어대던 갓난아이를 데리고 가 자기의 아들로 키웠습니다.

아이가 자라 청년이 되자 그 미군 양 아버지는 지난날 있었던 일들을 다 이야기하고,

그때 언 땅에 묻었던 청년의 어머니 산소를 아들과 함께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청년이 눈이 수북이 쌓인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무릎아래 눈을 녹이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만에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더니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습니다.

청년은 무덤 위에 쌓인 눈을 두 손으로 정성스레 모두 치워냈습니다.

그런 뒤 청년은 자기가 벗은 옷으로 무덤을 덮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어머니께 옷을 입혀 드리듯 청년은 어머니의 무덤을 모두 자기 옷으로 덮었습니다.

그리고는 무덤위에 쓰러져 통곡을 합니다.

"어머니, 그 날 얼마나 추우셨어요.!"

그 어머니는 벌거벗은 갓난 아들을 위해 자신의 옷을 모두 벗어 주고, 생명까지 주고 떠났습니다. 그것을 안 아들이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어머니의 은혜를 기리며 매년 그 무덤에 가서 자신의 옷을 벗어 어머니의 무덤을 덮어 드린다고 합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옷을 모두 벗어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리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사망을 대신 경험하시고 우리를 살려 내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정말 그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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