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신경강해

사도신경 강해 11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11:19

사도신경 강해 11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III)

 

(2:12~15)

12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 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 하셨느니라

 

작년 여름, 강원도의 어떤 마을에서 조카가 외삼촌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조카가 외삼촌에게 채무증서를 써주고 돈을 꾸어서 장사를 하다가 망하는 바람에 외삼촌에게 큰 빚을 지게 되었는데, 조카의 아버지가 자기 아들 몰래 외삼촌에게 진 빚을 갚아 주었습니다. 빚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아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무책임하고 불성실하게 부모만 의지하는 나약한 사람이 될까봐 그 사실을 아들에게는 비밀로 했습니다. 대신에 아들이 일을 해서 외삼촌에게 빚을 조금씩 갚게 되면, 그 돈을 외삼촌이 아버지에게 돌려주는 것을 조건으로 부채를 상환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갑자기 지병으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거기에서부터 발생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외삼촌이 조카에게 돈을 빌려 줄 때 작성을 했던 채무 증서를 들이밀며, 아버지께 받은 유산으로 자기에게 빌린 돈을 당장 갚으라고 요구를 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외삼촌의 누이였던 그 조카의 어머니는 자기 남편이 동생에게 빚을 모두 갚아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외삼촌의 누나였던 어머니가 아버지가 채무를 다 갚았다는 것을 아들에게 이야기 해 주었고, 아들은 그러한 파렴치한 사기를 친 외삼촌에게 따지기 위해 외삼촌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외삼촌은 이미 그 채무 증서를 근거로 조카를 고소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빚을 갚으면서 채무증서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돈만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채무 증서는 여전히 외삼촌 손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대신 빚을 다 갚은 것이 사실이지만 채무 증서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아들은 현행법상 외삼촌에게 채무 상환의 의무를 이행해야 했습니다. 조카는 채무 증서를 들이밀며 막무가내로 돈을 요구하던 외삼촌을 무려 열일곱 군데나 찔러서 살해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외삼촌의 시체를 강원도의 어느 산에다가 암 매장했다가 그 외삼촌 가족들의 실종신고로 범행사실이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빚을 갚았다고 하더라도 채무증서가 남아 있게 되면 또 다시 빚을 갚아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빚을 갚은 후에는 반드시 그 채무증서를 없애버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그 채무증서가 등장합니다. 14절에 나오는 ‘의문에 쓴 증서’가 바로 ‘법적인 효력을 가진 채무 증서’라는 의미의 ‘케이로그라폰 토이스 도그마신’입니다. 그 채무증서는 바로 우리의 빚이 적혀있는 채무증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채무증서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도말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그 누구도 우리가 진 빚에 대한 상환 요청, 즉 고소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빚을 졌었다는 근거마저 완전히 다 태워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의 채무증서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채무증서가 존재했다는 것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빚을 졌었다는 말인데,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어떤 빚을 졌던 것일까요? 그리고 그 빚이 얼마나 큰 빚이기에 예수님의 목숨이 그 빚의 상환비용으로 지불 되어야 했던 것일까요? 그리고 그 채무증서는 어떠한 방법으로 도말이 된 것인가요? 그러한 질문들로부터 오늘 말씀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지어졌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짐승도,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것이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하는 말은, 오직 인간만이 도덕적으로 책임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도덕적 피조물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도덕이라는 것은 단순히 착하고 선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강아지가 아무리 주인에게 순종을 하고, 의리를 지키며, 심지어 사지에서 주인을 구출해 내었다고 해도 그 강아지의 도덕이 훌륭하다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도덕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착하고 선한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라는 것이 어떤 대상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맺은 대상과 ‘더불어 살아가는데’ 필요한 성향과 미덕을 발휘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지어진, 도덕적 피조물인 인간들에게만 당신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에게 요구되는 하나님 나라의 성향과 미덕에 관한 지침을 주셨습니다. 함께 더불어, 어우러져 행복하게 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들에게 하나님의 형상다움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율법이라고도 합니다. 율법은 성문화되어 인간들에게 주어지기 전에도 인간들의 마음속에 양심이라는 것으로 존재합니다.(2:14-15)

그러니까 율법이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 성향과 미덕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살 수 있는 삶의 원리와 규범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는 그 율법을 좇아 살 때에 가장 행복할 수 있습니다. 신약으로 가면, 예수님께서 그 율법을 단 두 조항으로 축약을 시켜 주십니다.

(10:25~28)

25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그러니까 율법을 지킨다는 것,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최상의 행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적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이 사랑하라고 하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순종을 바탕으로 격발이 되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을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을 수 없고, 순종하지 않을 때 나를 약탈하여 자신들의 배를 채우려 하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지킴이라는 것은 순종이라는 다리를 거치지 않고는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최초의 율법을 ‘선악과를 먹지 말라’라는 순종의 명령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곧 순종입니다. 그리고 순종은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을 격발시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께 오롯이 순종할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가시지요?

 

이렇게 율법은 도덕적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그 관계의 대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성향과 미덕에 관한 것들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타락한 인간’이 그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도덕적 존재로 절대 살 수 없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타락이라는 것 자체가 곧 불순종이고 불순종은 율법의 반대편에서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19~20)

19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니까 타락한 상태에서 인간들에게 주어진 율법은, 그것을 받은 자들이 그것을 잘 지켜내어서 행복에 도달하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무력함을 폭로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지어진 인간이 오히려 자기들에게 하나님을 순종시키려 했던 선악과 사건이, 그리고 그 선악과 사건의 확장으로 진행되어지는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불행하고, 치욕스럽고, 집요하며, 더러운지를, 율법을 던져줌으로 해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과 양심이라는 것은 우리를 계발시키고, 정화시키고, 성숙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지를 확인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자면 하나님은 하늘의 삶의 원리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도덕적 존재로 살아야 가장 행복할 수 있도록 지어진, 타락한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죄가 얼마나 끈질기며, 더러우며, 집요한 것인지, 또 그 죄가 얼마나 인간들을 불행하게 하는지 경험하게 해 주시기 위한 고발용으로, 타락한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삶의 절대 기준을 제시하심으로 해서, 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을 수 없는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율법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과 함께 해독제를 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율법과 제사를 함께 주셨는지 아세요? 율법에 근거하여 죄인으로 판명된 자들이 피의 제사를 통하여 죄가 속해지는,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는 ‘구속의 밑그림’을 율법과 제사 속에 집어넣어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걸 둘 다 잘 지켜서 구원에 도달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5:20)

20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보시다시피 율법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가입이 된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지 말라는 것은 더하고 싶어 하고, 보지 말라는 것을 더 보고 싶어 하는, 죄 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하라, 하지 말라’의 계명이 주어지게 되면, 그 반대쪽으로 더 많이 행하게 되어 죄가 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이 가입하기 전에는 죄라고 규정할 수 있는 판단 근거가 없어서 죄인지 아닌지 분간 할 수 없었던 것이, 율법이 가입함으로 말미암아 정확하게 죄로 드러나게 되기 때문에 율법에는 죄를 더하는 기능이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나쁜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서두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율법 자체는 선한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이웃과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성향과 미덕을 자세한 세목으로 의문에 기록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선한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내면 하나님과 온전한 화해를 하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충분한 자격을 얻게 됩니다. 다만 타락한 인간이 그 율법의 요구를 수행해 낼 능력을 상실한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완전한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는 가장 행복하게, 도덕적으로 순결하게 살아 낼 수 있는 훌륭한 원리이지만, 그것을 지킬 능력을 상실한 죄인들에게는 저주의 올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도록 지어진 자들이,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가장 행복하도록 지어진 자들이 그것과 정 반대로 살고 있음을 고발하는 채무증서가 바로 율법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로 요약 되는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나도 내 힘으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나 자신만을 사랑하고, 나의 배만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면서 그 율법에 의해 우리의 죄인 됨을 폭로 당할 때, 마귀가 마치 채권자처럼 채무 증서를 들이밀어 우리를 참소하는 것입니다. ‘너, 이거 어겼지? 저거 어겼지?’하고 채무증서를 들이밉니다. 율법을 들이민다는 말입니다. 그 때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본문 14절로 갑니다.

(2:14)

14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하나님은 그 율법이라는 채무 증서를 십자가로 도말해 버리셨다고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아예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신 것입니다. 그 말을 잘 이해해야 하는데, 율법을 도말하셨다는 것은 예수로 하여금 율법을 모두 완성케 하여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심으로, 더 이상 율법이 우리를 고소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율법을 채무 증서로 잡고 우리를 고소하는 마귀의 세력이 완전히 무력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게 본문 15절입니다.

(2:15)

15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 하셨느니라

여기에서 정사와 권세는 마귀의 세력을 말합니다. 그리고 ‘벗어버려’라고 번역이 된 ‘아펙뒤오마이’는 ‘완전히 벗기다’라는 뜻입니다. 그 단어는 전쟁에서 이긴 승전국의 장군이 패전 장수들의 옷을 모두 벗겨 자신의 전차 뒤에 매달고 행진을 하던 모습을 묘사할 때에 쓰던 단어입니다. 뿐만 아니라 ‘드러내시고’라고 번역이 된 단어 ‘데이그마티조’도 패전국 적장을 공중 앞에 드러내어 질질 끌고 다니며 수치감을 줄 때 쓰이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정사와 권세, 즉 마귀의 세력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미 완전히 벌거벗겨지고, 포박을 당해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표준 새 번역 성경이 그 부분을 참 잘 번역했습니다.

(2:15)(표준 새 번역)

15그리고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셔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심으로써,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

이렇게 마귀들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패배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무기로 쓰던 율법이 십자가에서 도말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성도들을 참소할 무기를 빼앗겨 버렸기 때문에 들고 싸울 무기가 없어요.

(고전15:55~56)

55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독침)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의 쏘는 것(독침)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마귀는 채무증서를 하나님께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채무증서를 가지고 죄를 입증하여 성도를 사망이라는 독침으로 쏘려했던 마귀의 모든 궤계가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무력화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빚을 모두 청산해 버리시고 채무증서까지 빼앗아서 전부 십자가로 불태워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에 대해서 죽고, 우리 또한 율법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그게 로마서 7장 전체가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제 나쁜 외삼촌이 아무리 돈을 요구해도 채무증서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지불할 의무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지금도 율법에 얽매여서 ‘성도는 안식일을 꼭 지켜야 한다느니, 절기를 지켜야 한다느니, 주일 성수를 꼭 해야 한다느니, 선교를, 봉사를, 구제를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느니, 착하게 살지 않으면 구원이 취소 될 수도 있다느니’하는 그런 가르침에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고 두려워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아직까지 율법주의자인 것입니다. 아예 채무 증서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그 어떤 것으로도 여러분을 고소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을 죄인으로 규정할 모든 판단 근거가 여러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입니다.

 

상습적으로 교통위반을 하던 사람에게 교통 법규가 모두 없어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는 여전히 교통위반을 하고 있는데, 법이 없어져서 그를 범법자로 고소할 수가 없잖아요? 바로 그러한 원리인 것입니다. 여러분을 향해 채무증서로 준비되어 있던 율법이 십자가에서 죽어 버렸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은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되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되고,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되며, 도둑질을 해도 됩니다. 잘 이해하셔야 해요. 저는 지금 방종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해방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참소할 법이 모두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 어떤 파렴치한 죄를 범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기소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사랑하라, 그리고 네 멋대로 하라’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이 말은 복음 안에서 우리 성도들이 어떤 자유를 얻게 되었는지를 잘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울러 그렇게 자유롭게 된 자들이 반드시 도달해야 하며, 도달하게 될 ‘사랑과 순종’이라는 목적지를 함께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교통법규를 상습적으로 어기던 그 사람에게 교통법규 자체를 없애버리심으로 멋대로 교통법규를 어기며 살도록 만들어 준 것이 율법의 폐지가 아니라, 법이 없어진 상태에서 말씀과 삶을 통해, ‘법을 어기며 살면 이렇게 사고가 잦게 되는 것이구나’를 알게 하셔서 자발적인 순종을 격발해 내시기 위해 법을 없애버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서두에 말씀드린 그 나쁜 외삼촌처럼 여전히 자기가 채무증서를 쥐고 있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을 속입니다. 거짓말을 해도 채무 증서가 날라 오고, 화를 내도 채무 증서가 날라 옵니다. 부부 싸움을 해도 채무 증서가 날라 오고, 자식들에게 짜증을 내도 채무 증서가 날라 옵니다. 그런데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 때마다 불안에 떨고, 그 때마다 두려움에 떨면서 ‘혹시 하나님이 벌을 내리셔서 내 구원을 취소해 버리시는 건 아닐까?’하고 불안해합니다. 혹자들이 그러한 불안함을 가리켜 ‘기특함’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하는데 아닙니다.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그런 경우에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 있지, 내가 그런 죄를 지어 놓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뻔뻔스럽게 있으면 되겠어? 두려운 척이라도 해야지’하는 마음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을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주의자들에게 무어라 말씀하셨는지 잊으셨어요? 독사의 새끼들이라 하셨습니다.

(2:21)

21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키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여러분의 실수나 넘어짐 속에서 예수의 십자가 능력을 의심하고 ‘나도 뭔가 일조를 해야 하지 않겠어?’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시는 분들인 것입니다. 더 뻔뻔스러워지세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저주하고 부인한 베드로가 ‘제가 주님 사랑하는 것 아시지요?’하고 주님께 돌아온 것 기억하시지요? 맞습니다. 그 삶이 바로 은혜 안에서 사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죄책감도 갖지 말라는 말인가? 반성도 하지 말라는 말인가?’ 아니요. 그렇게 우리가 실수를 하고, 넘어지고,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의 실체를 인정하세요. 그게 반성입니다. ‘내가 왜 또 그런 일을 저질렀지?’가 반성이 아니라 ‘나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자구나’를 인정하는 것을 진짜 반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그래서 제게는 예수님의 은혜가 필요 합니다’하고 십자가를 붙들게 되면, 그 십자가 복음이 우리를 조금씩 바꿔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하다보면 죄에 대해 너무 관대해 지고 무감각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계속해서,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 때문에 말씀이 그렇게 놔두지를 않습니다. 그러한 실수와 넘어짐 속에서 하나님의 십자가 복음을 붙들게 될 때 그 십자가 복음은 우리의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우리를 변화시켜 가십니다.

반대로 죄를 지을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리다 보면, 마귀가 내민 가짜 채무 증서에 속아서 아버지가 갚아버린 빚을 자기가 또 갚는, 바보 같은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이 너무 부담스럽고 버거운 것입니다. 늘 우울하고, 늘 힘겹습니다. 아닙니다. 자유하세요. 자기 힘으로 하려니까 힘겹고 버거운 것입니다. 은혜가, 감사가 일을 하게 하세요. 여러분은 자유입니다. 죄는 이제 여러분과 아무 상관없는 단어가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의 파워가 그렇게 놀랍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이 폭로된 현장에서 면목 없어 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양심 있는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가 폭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드는 이가 진짜 성도입니다. 그리고 감사하세요. 아울러 그 감사가 여러분을 어떻게 바꾸어 내는지도 경험하십시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진짜 율법주의자인가 아닌가를 한 번 진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몇 가지 질문을 드릴 테니까 여러분은 과연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렸던 율법주의자에서 벗어나 있는지 아닌지를 진단해 보세요.

첫 번째로, 여러분은 구약의 율법의 조항 어느 하나에라도 여전히 묶여서 그것으로 고민하고 계십니까? 그건 대부분 ‘아니오’로 대답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여러분의 공로가 단 1%라도 기여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쉽게 아니라고 대답하실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질문을 하겠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우리의 공로가 단 1%라도 기여를 할 수 없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인데, 여러분은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나는 아무개 보다는 조금 나아’라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보셨나요?

‘내 생각에 나는 저 사람보다는 조금 더 착한 것 같아, 나는 저 사람보다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해, 나는 저 사람보다는 성경을 더 많이 알아, 나는 저 사람보다는 훨씬 더 도덕적이야, 훨씬 더 깨끗해’ 이런 생각 안 해보셨어요? 우리가 그러한 생각에 잡혀 있을 때에 우리는 그 순간 율법주의자, 독사의 새끼가 되는 것입니다. 나의 나됨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인데 어떻게 내가 ‘나’를 주장합니까? 어떻게 ‘나’를 다른 이보다 더 낫게 여길 수 있습니까?

 

여러분과 제가 더 당황스러워 해야 할 질문은 네 번째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해코지를 한 사람을, 그게 어떠한 것이라 할지라도 은혜로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건 좀 어렵지요? 용서와 율법주의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마태복음 18 21절 이하에 보면 용서에 관한 비유가 하나 나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됩니까?’ 당시 유대랍비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했을 때 최고 세 번까지 용서를 해 주어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그 두 배 보다 조금 더 부른 것입니다. 일곱 번이면 충분할 거라는 생각에 예수님께 물은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십니다. 사실 그 말은 ‘칠십’을 가리키는 ‘헵도메콘타키스’와 ‘일곱’의 ‘헵타’가 붙어 있는 어구를 ‘칠십 번씩 일곱 번’이라고 번역을 해서 490번 쯤 용서하라는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어구는 ‘일곱’이라는 숫자를 들이대며 ‘이 정도면 되겠지요?’하고 한 베드로의 질문에 거기에 10을 곱한 숫자인 칠십이라는 숫자로 응대를 하심으로,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그러니까 끝없이 용서를 해 주라는 예수님의 강조 어법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등장시켜 용서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일만 달란트는 지금 돈으로 따지면 약 1 8천억 원 정도가 되는 돈입니다. 어떤 개인이, 그것도 고대시대에 그만한 돈을 빚을 진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민족 전체가 로마에 내야 했던 일 년치 세금이 800달란트 밖에 안 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일만 달란트가 얼마나 큰돈인지 상상이 되시지요? 그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바로 우리 죄인들을 대표하는 자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함으로 해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큰 부채를 져서 율법이라는 채무증서를 가지고 영원한 감옥에서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구원받기 전의 죄인들의 실존이 바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인 것입니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 어떤 대가가 치러져야 하는지 마태복음으로 직접 가서 볼까요?

(18:25-26)

25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한대

26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자신의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못 갚는 것이 죄의 부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빚진 자가 주인에게 말하기를 일만 달란트를 다 갚을 테니까 참아달라고 합니다. 거기에서 ‘참으소서’는 부정과거 명령형입니다. 한번만 기회를 주면 다 갚을 테니까 기회를 달라고 호언장담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노동자가 20만년을 일해서 하나도 안 써야 일만 달란트를 모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수로 그 빚을 갚습니까? 그 상황에서 빚진 자는 ‘주인님, 용서해 주세요.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하고 납작 엎드려야 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게 율법 앞에서의 죄인들의 모습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일만 달란트를 제사와 율법지킴으로 갚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들이 독사요 뱀들의 새끼들인 것입니다.

주인이 그러한 자를 불쌍히 여겨 그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 탕감을 받은 자가 나가는 길에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일만 달란트의 60만 분의 1에 불과한 액수입니다. 그런데 그 종은 자기에게 빚진 자를 만나자마자 목을 졸랐습니다.

(18:28)

28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여기에서 ‘목을 잡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프니고’는 마가복음 5장에서 이천 마리의 돼지 떼가 몰살당하는 장면에 쓰인 단어입니다. 따라서 그 말은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이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죽기 직전까지 목을 졸랐다는 뜻입니다. 거의 죽을 지경까지 목을 조르고는 감옥에 쳐 넣어 버렸습니다. 그 때 주인이 그 사실을 알고 어떤 조치를 취합니까? 그를 붙잡아다가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졸들에게 붙입니다. 영원한 감옥으로 넣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너무나 값비싼 것이라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갚을 길이 없어 값없이 줄 수밖에 없었던, 일만 달란트짜리 구원이라는 은혜의 선물을 받은 이들이 백 데나리온에 불과한 이 세상의 손해에 일희일비 하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를 경각시켜 주는 비유인 것입니다.

‘너희들이 정말 구원의 가치를 알고 있느냐? 그리고 그것이 전적인 은혜로, 거저 주어졌다는 것을 정말 아느냐?’는 물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1 8천억 원짜리 은혜 앞에서 왜 이천 원짜리 손해를 그렇게 분해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비유는 용서 안 하면 구원을 취소해 버리겠다는 협박이 아닌 것입니다. 구원의 가치를 좀 깨달아 알라고 큰 사람으로 살라는 권고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율법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하나님께 다시 갚을 길이 없는 너무나 엄청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채무변제를 받은 우리가 고작 백 데나리온을 손해 보았다고 해서 악착같이 자기의 권리와 유익을 챙기려고 한다면,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로 이해한 사람들이 맞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구원’을 일만 달란트로, ‘이 세상 모든 가치들’을 일 백 데나리온으로 비유하고 계신 것입니다. 로마 황제의 자리, 총독의 자리, 분봉왕의 자리, 다 합해도 그 가치는 일 백 데나리온입니다. 거기에 비해 우리가 받은 구원은 1 8천억 원이라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총독 베스도 앞에서 ‘이렇게 결박 당한 것 외에는 당신들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 한다’고 했지요? 십자가 복음을 알고 있는 바울에게는 왕의 자리와 총독의 자리가 이천 원짜리로 보였기 때문에 그들 앞에서 자기가 갖고 있는 1 8천억 원짜리 구원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쇠사슬에 꽁꽁 묶여 있는 죄수가 왕에게 ‘당신도 나와 같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단 말입니다. ? 왕의 지위는 이천 원이요 자기가 갖고 있는 구원은 1 8천억 원이니까요.

그렇다면 누군가가 내 모든 소유를 다 빼앗아 갔다고 해도 그가 가져간 전부의 가치가 얼마라는 것입니까? 이천 원입니다. 나의 명예, 나의 소유, 나의 건강, 내 가족, 심지어 나의 목숨, 모든 것을 다 합쳐도 이천 원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의 은혜를 올바로 깨달은 이들이 자신의 손해 앞에서 손해를 끼친 당사자를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그러했습니다. 두 아들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자 안재선 씨를 용서했을 뿐 아니라 그를 구출해 내어 양 아들로 삼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내었습니다.

몇 년 전에 유영철이라는 사람이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이 있었지요?

그 피해자 가족 중에 고정원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SBS의 다큐멘터리 프로에서 그 분의 이야기가 방송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아내의 회갑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일을 하러 나갔다 오는 길에 안방에서 잔인하게 난자된 아내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옆방으로 가보니 그 곳에는 팔순이 넘으신 어머니가 역시 잔인하게 살해당한 채 웅크리고 누워 계셨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이층에 있던 4대 독자 아들이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나이에 수십 군데를 칼에 찔려 죽어 있었습니다. 그 분은 그 자리에서 자살을 하려 했다고 합니다. 모든 가족들이 누군가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 상태에서 맨 정신으로 삶을 지탱해 나갈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차에 어떤 이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 후 고정원씨는 자신의 4대 독자 아들과 사랑하는 아내와 열로 하신 어머니를 살해한 유영철을 용서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분은 사형선고를 받은 유영철의 사형 선고를 취소해 달라는 탄원서를 사법 당국과 청와대 등에 보내며, 지금도 유영철의 사형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영철의 가족들을 돌봐 주고 계신답니다. 십자가의 파워입니다.

4대 독자에게 꿀 밤 한 대 때린 것이 아니라 그를 난자해서 죽인 자입니다. 내 아들이 어디 가서 맞고만 들어와도 그렇게 분이 나는데 그 아들이 백주 대낮에 참혹하게 죽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를 용서합니까? 아니, 어떻게 그의 가족들을 돌 봐 줍니까? 십자가 은혜 앞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와 관계가 이천 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우리에게 손해를 끼치게 하고, 우리를 해롭게 하며,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기도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요셉이 자신을 애굽으로 판 형제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생각해 보세요. 칠십 명밖에 안 되는 유랑민 중 한 사람이 전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됩니까? 불가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에 당신의 백성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 후손들을 애굽으로 들여보내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요셉이 애굽으로 먼저 들어가 그 곳의 총리가 되어야 합니다. 요셉의 형들은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진 것입니다. 요셉은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자기 형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당신들의 자손까지도 내가 다 돌봐 주겠다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쓰이느라 자신을 파는 역할까지도 감당해야 했던 그 형들이 오히려 불쌍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의 마음속에는 감사함까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손들까지 모두 책임지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 속에 들어와 있는 인생 채찍, 사람 막대기들을 사용하여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시기도 하시고 우리의 거룩을 성숙시키고 완성해 가시기도 하십니다. 지난 금요일에 몇 주 전 프리웨이에서 기적적으로 만났던 그 집사님이, 사업을 정리하시고 한국으로 들어가시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 분은 자기 집안 뿐 아니라 처갓집 전체를 빚쟁이로 만들면서 사업을 벌였다가 쫄딱 망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가게를 인수할 때부터 사기를 당해서 1년 반 만에 몽땅 잃고서 자살을 생각하고 있던 분입니다. 아내를 비롯한 온 가족들이 자신을 빚쟁이 취급을 하고, 자식들까지 자신을 패배자로 여기는 것에 분개하여 몇 달을 술로 사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어떤 분이 전해주신 우리 교회 설교 CD를 듣고 복음을 올바로 알게 되자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우선 자기가 그렇게 망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진지하게 들었을 리가 만무이고, 여전히 세상의 힘과 가치에 눈이 팔려 하나님이 아닌 돈을 찬양하고, 세상의 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망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자신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을 알 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돈이 없어지자 자신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떠나버린 가족들을 보면서,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임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잃은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고, 오히려 그렇게 자신에게 깨우침을 준 그 사기범과 자신을 버린 가족들이 고맙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알고 나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자살을 해야 할 이유로 여겨졌던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다시 펼쳐 보니까 하나님의 선물이더라는 것입니다.

 

용서해 주세요. 긍휼한 마음으로 바라보세요. 내가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하고, 내가 해를 입었다고 생각할 때마다 하늘을 보세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순간이라 생각하시란 말입니다. 그 때 용서가 나와요.

스데반이 자신을 돌로 때려죽이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지요? 하늘을 보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이 자신을 기다리고 계세요. 그 전에도 그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알고 있었고 소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이루실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함부로 자신을 빨리 데려가 달라고 요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가 눈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고 있는데 돌을 든 자들이 스데반을 하늘로 보내주려 애쓰고 있는 거예요. 돌이 하나 날라 올 때마다 그는 하늘과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그 때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이들이 미울까요?

하늘을 보고 있는 상태에서 나를 향해 비수를 꽂는 이가 있다면 아마 저라도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자주 하늘을 보지 못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자꾸 눈을 돌리라고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하늘을 열심히 보는 이들은 이 세상 것들을 이천 원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 때 자신에게 손해와 상함을 준 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확히 말하면 성도는 손해를 볼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합력하여 우리의 선에 기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이 세상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그러한 사건들과 사람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손해라고 오해하며 살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구를 용서하고, 참아주고 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이미 1 8천억 원짜리 구원을 확보하고 있는 사람이 이 세상 모든 가치를 다 합해봐야 이천 원인 이 세상에서 무슨 손해를 볼 게 있습니까? 자식이 속을 썩이세요? 이천 원 손해 보신 거예요. 사업이 망하셨습니까? 이천 원 손해 보신 거예요. 사기를 당하셨어요? 이천 원 손해 보셨어요.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이미 용서를 받았지만 지금도 현재형으로 끊임없이 용서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현재 시제는 계속적인 용서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이 여러분을 용서하지 않고 있으면 어쩌시겠어요? 아니,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한 용서를 어느 시점에서 뚝 끊어 버리시면 어떡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을 다 모아 놓는다면 우리를 용서하지 못하고 여전히 우리를 미워하는 이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겁니다. 기분이 안 좋으시지요? 그들이 여러분을 끝까지 용서하지 않고 죽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끔찍하지요? 그러니까 나부터 용서해 보자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 이야기로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그 분은 아내와의 사이가 정말 안 좋은 분입니다. 결혼할 때부터 가난한 사위를 못마땅해 하는 처갓집 식구들로부터 냉대와 멸시를 받아왔는데 아내까지 자신을 무시하고,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기도 하고, 시댁식구들을 홀대해서 정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던 장사까지 망해서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아내가 와서는 ‘돈도 못 버는 주제에 술까지 마신다’고 구박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분을 못 참고 부엌에 있는 칼을 들어서 아내를 찔렀대요. 아내가 자신의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잠시 후에 아내의 숨이 멎었는데 누가 신고를 했는지 밖에 경찰차가 왔습니다. 그 때 그 장로님이 비로소 정신이 들어, 아내의 시신을 붙들고 통곡을 했답니다.

다 자기 잘못인데 그 잠깐의 분노를 못 참고 아내를 살해한 것이 너무 후회스러워서, 그리고 앞으로 감옥에서 평생을 보내야 할 일이 너무 막막해서 막 울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여자 목소리가 들리더랍니다. ‘이 웬수야, 돈도 못 벌어 오는 인간이 잠을 열 시간이나 자냐?’ 꿈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향해 독설을 내 뿜는 그 아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하더래요.

여러분 분노는 성도의 것이 아닙니다. 참아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나의 거룩을 위해 쓰이다가 지옥에 떨어질지도 모르는 그 사람들을 위해 오히려 기도해 주십시다. 사이좋게 지내세요. 제발 싸우지들 마시고, 잘 지내세요. 부모가 제걼, 슴이 아플 때가 언제인지 아세요? 자식들이 서로 싸우고 화 서지 않을 때 가겥, 슴이 아파요. 그건 부모걘, 슴을 보이지 않는 칼로 난자하는 것이 똑같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가겥,슬퍼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신 자식들이 서로 물고 윯식들미워하식들싸우는 겁니다. 용서하세요. 화해하세요. 여러분은 율법으로 구원받은 이들이 아닙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갚아지고 은혜가 부어져서 여러분에게 구원이 임했습니다.

뭘 용서 못하겠습니까? 용서하세요. 화해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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