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신경강해

사도신경 강해 12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11:20

사도신경 강해 12

장사한지 사흘 만에

 

(27:57~61)

57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59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60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제가 어렸을 적에 청소년들이 즐겨 보던 호러무비가 있었는데 그것이 강시 시리즈였습니다.

강시라는 것은 원래 얼어 죽은 송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얼어 죽게 되면 그 장기가 그대로 보존이 되어 어떤 기운이 가입하게 되면 살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심리가 그런 영화를 탄생시키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아무튼 강시는 죽은 시신입니다. 장사까지 지내어 매장을 한 완전한 시체들입니다. 그런데 그 시체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콩콩 뛰어 다니며 온갖 나쁜 일들을 저지릅니다. 그 강시들을 진정시키려면 영환도사의 노란 부적이 필요합니다. 그 부적을 강시의 이마에 척 붙이면 강시는 제자리에 서고 영환도사가 이끄는 대로 콩콩거리며 좇아가게 됩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마치 이 세상에 있는 가시적 지역 교회의 모습이 그 강시의 모습과 방불하다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성도는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죽은 이들입니다. 그렇게 세상에 대하여 죽은 이들은 이제 영환도사를 좇아, 성령을 좇아 콩콩거리며 안식의 처소로 향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대하여 죽은 시체들이 가끔씩 살아나서 세상의 힘을 얻기 위해, 세상에 대해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있는 세상 사람들과 싸우고 경쟁하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죄와 허물로 하나님에 대해 죽어있고 세상에 대해 살아있는 자들을 말하고, 성도는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산 자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죽은 시체들이 돼지우리 같은 죽은 세상에서 저마다의 목적과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돼지 쥐엄 열매를 쟁취하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고, 세상의 시각으로 교회를 보게 되면 세상에 대해 죽은 강시들이 여전히 세상에 대해 시퍼렇게 살아서 세상과 싸우고 있는 형국입니다.

온통 강시투성이 입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 이리 날뛰고 저리 날뛰는 강시들을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 가는 영환도사의 부적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강시들의 이마에 인을 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인이 예배당 안의 강시들을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로 축약이 됩니다. 따라서 강시들을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긴 시간을 할애하여 공부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역사적 사실 속에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숨어 있는지 우리는 이제 충분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바로 뒤에 그 분의 장사됨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냥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이 연결이 됩니다. 그런데 왜 성도의 신앙고백 속에 꼭 그 장사됨이 강조되어 삽입이 되어야 하나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1번이 거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41. 왜 그는 장사 지낸 바 되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죽으셨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입니다.

장사(葬事)라는 것은 완전히 죽은 시체를 닦고, 싸고 하여 관에 넣어 무덤에 넣는 일까지를 모두 아우르는 말입니다. 좀 더 쉽게 요약하면 장사는 ‘죽음이라는 사실의 확인 작업’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셨다는 것을 한 번 더 강조하는 것이 예수님의 장사지냄입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 동안에 기독교를 공격한 수많은 이단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많이 공격을 당한 부분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잠시 기절했다가 다시 살아나서 마리아와 결혼을 해, 자식까지 낳고 오래오래 잘 살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나중에 마리아와 제자들이 무덤을 잘 못 찾아서 엉뚱한 무덤을 열어 보고는 말도 안 되는 부활을 주장했다고 우기기도 합니다.

얼마 전, 전 세계의 이목을 받았던 다빈치코드라는 책과 영화, 그리고 영국 BBC의 다큐멘터리 방송은 그들의 얼토당토 한 주장을 과학적으로 입증해 내려 했던 시도였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장사지냄을 굳이 그 내용에 넣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짜로 완전히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지낸 후 무덤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그 무덤 앞에 앉아있었다고 하지요?

왜 마태가 그 장면을 거기에 기록했을까요? 마리아가 무덤을 잘 못 찾을 수 없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무덤 앞에 앉아서 예수님의 장사 장면을 모두 목격한 마리아가 어떻게 무덤을 잘 못 찾아갈 수 있겠느냐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도 예수님이 완전히 죽으셨다는 것을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19:31~36)

31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이를 본 자가 증거 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 이니라

36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예수님의 완전한 죽음을 군병들과 빌라도 등 여러 사람이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물과 피가 모두 쏟아지는 것까지 확인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왜 그렇게 예수님의 진짜 죽음을 강조하여 확인을 시켜주고 있는 것일까요?

그 예수님의 죽음이 사실인 것처럼 그 예수의 죽음에 동참하여 구원을 받은 성도 또한 이 세상에서 옛 사람이 진짜로 완전히 죽는, 남김없이 죽는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될 것임을 주지시키기 위함인 것이며, 아울러 그 진짜 죽음 뒤에 이어질 위대한 부활을 더 선명하고 오롯하게 드러내기 위함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가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니까요. 그 죽음이 완전한 죽음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큰 일 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불가능하고 추악한 옛 몸이 완전히 죽지 않은 다음에야 어찌 새 몸으로의 부활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의 죄가 되셔서, 우리의 저주가 되셔서 죽으신 예수는 완전히 죽으셨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잘 들어 보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자 모든 이들이 실망과 분노와 두려움에 휩싸여 모두 그 자리를 떠나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살벌한 현장으로 들어가 빌라도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그의 이름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오늘 본문 57절로 가보겠습니다.

(27:57~60)

57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59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60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요셉이라는 사람은 아주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 대단한 명예를 가진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15:43)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그가 왜 예수님의 사형을 결의할 때 반대를 하지 않았는가? 마가복음에 보면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모두 만장일치로 예수님의 사형을 가결했다고 나오지 않습니까?

(14:64)

64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여기에서 ‘저희가 다’라고 번역이 된 어구 중 ‘다’라는 단어가 헬라어 ‘파스’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전체의, 모든’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전체가 다 예수님의 사형에 가표를 던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아리마대 요셉은 그 결정에 가표를 던지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3:50~51)

50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지만 그 대 제사장의 집 뜰에서의 사형결의 때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장사의 현장에서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요셉과 함께 예수님을 장사했던 니고데모도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도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이걸 우연이라 해야 하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반드시 죽이셔야 했기 때문에 그 두 사람을 그 사형 가결 현장에서 빼 버린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이 예수님의 장사를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예수님의 시체가 어디에 묻혔는가?’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그 예수님의 시체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묻힙니다. 그건 이미 구약에서 예언이 되었던 것입니다.

(53:9)

9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예수님은 어떤 부자의 묘실에 함께 묻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함께’라는 단어가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요셉과 함께 묻히시고 장사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그 예수님이 묻히셨던 무덤은 원래 무덤 주인이었던 아리마대 요셉의 시체로 채워졌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그의 죽음 앞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자기의 무덤에 이미 예수님이 묻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에서 예수님이 약속대로 무덤 문을 여시고 살아나셨습니다. 그 무덤은 자신의 무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에서 부활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제 자신이 그 무덤에 묻히게 될 판입니다. 사망은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은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고, 그 부활하신 예수님이 예수를 믿는 요셉자신도 부활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 가셨기 때문에 무덤이 두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확실하게 확인한 사람이 바로 자신입니다. 자신이 니고데모와 함께 예수님을 세마포에 싸고 자신의 무덤에 안치를 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예수님의 죽음을 확실하게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자신의 무덤에서 살아나신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도 그렇게 부활로 연결이 될 것임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입니다. 이제 그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있어서 육신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 즉 부활로 들어가는 최종 관문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기 때문에 그 죽음 앞에서 당당하게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하고 호탕하게 외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장사지냄, 완전한 죽음의 확인은 예수님의 부활을 더욱더 빛나게 하는 전제인 것입니다. 완전히 죽었던 그 분이 새 몸으로 살아나셨다는 그 사실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부활을 소망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사망을 향해 호통을 치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장사된 무덤이 바로 내 무덤이었거든요. 내 무덤에서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아니 나와 함께 묻히셨다가 살아나셨습니다. 따라서 나도 그렇게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임을 소망 속에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교회의 신조에 예수님의 장사됨을 굳이 강조하여 집어넣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장사에 참여했던 또 한 사람, 니고데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엄청난 부자였고, 역시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으며, 겸손하기까지 했던 그가 어두움에 속한 사람이라고 진술을 합니다.

(3:2)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이러한 성경의 진술은 이 세상의 학문이나, 물질이나, 명예 등의 모든 것이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밤에 속해 있던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칭찬하는데 예수님께서 대뜸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가 갖고 있는 모든 조건들을 그 한마디로 전부 다 기각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가 갖고 있는 세상적인 조건들을 전부 품어 안고 죽어, 다시 위로부터 새 생명으로 나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난다는 것은 지금 있는 존재의 죽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장사현장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눈을 피해 밤에 주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어떻게 변합니까? 요셉과 함께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는 자로 변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님의 장사를 치릅니다. 더 이상 세상이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19:39-40)

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 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몰약과 침향은 사람이 죽었을 때 냄새를 방지하기 위해 시체와 함께 싸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의 장례법에 따르면, 향 품을 준비한 사람이 향 품과 시체를 세마포로 함께 쌀 때, 그 자신이 죽은 자와 함께 죽고 싶을 만큼 애통하여 ‘나는 망자와 함께 죽습니다.’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가 세마포로 몰약과 침향과 함께 예수님의 시체를 싼 행위는, 니고데모가 만인들 앞에서 예수의 죽음에 연합하여 자신을 함께 죽이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주님과의 만남 이후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이제 밤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39절이 ‘밤에 나아왔던’이라고 과거 시제로 쓰여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와 함께 죽었고 예수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빌라도도 두렵지 않았던 것이고 제사장들도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저마다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은 자로서, 부활을 소망하며, 그 부활의 나라,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오늘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은 항상 완전한 죽음, 장사지냄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죽어 장사되는 삶을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하나님 없이 살던 때의 습관과 성향으로 세상을 삽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영적으로 벗어버렸다고 하는 옛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그 옛 사람을 죽여, 벗겨버리는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날마다 죽다가 결국 육신의 죽음에 당도하게 되어 그 육신을 완전히 버려야 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 때가 성도에게는 완전한 성화에 도달하게 되는 때입니다. 성도는 인생 동안에 옛 사람을 벗고, 벗고 또 벗다가 결국에는 그 옷을 완전히 벗어버리게 되는, 육신의 죽음을 통과하면서 완전한 성화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 이후로는 절대 죄를 지을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옛 사람에 속한 몸이 완전히 사라지고 새 몸으로 부활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죽음은 성화의 극치이며 신앙생활의 절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보신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2번 질문이 이러합니다.

4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는데, 왜 우리가 또 죽어야 합니까?

이제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죄의 값이 아니고, 죄에 대하여 가시적으로 완전히 죽는 것임과 동시에 영생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에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죽음은 이제 더 이상 죄의 삯으로서의 무시무시한 죽음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의 죽음은 죄를 완전히 벗어버리는, 그런 죽음인 것이고 부활을 향한 죽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기쁨과 감격의 무덤이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슬픔과 어두움과 탄식의 무덤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기쁨과 감격과 찬양의 무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이 바로 우리의 무덤이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의 죽음은, 슬픔과 탄식과 눈물의 죽음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활이 약속된 무덤이 왜 슬퍼야 합니까? 장사지낸바 된 예수가 멀쩡하게 새 몸을 입고 살아나신 사건이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부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서 완전하게 죽어야 합니다. 내 성품, 내 습관, 내 성향, 내 욕심 모두 죽어야 합니다. 아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철장을 가지고 백마를 타고 오셔서 우리의 옛 자아를 죽여 가십니다. 그게 역사이며 인생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이 나를 품에 안고 내 무덤에 함께 장사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이 세상에서 장사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너무 힘들어서 죽겠다고요? 그럼 잘 가고 계신 거예요. 지금 이 세상에서 죽어, 장사되는 자리로 가고 계신 거예요. 너무 너무 고통스러워서, 너무 너무 외로워서 죽겠다고요? 잘 가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함께 여러분의 무덤으로, 그러나 부활을 향하여 한발 한 발 가고 계신 거예요. 열심히 가세요. 죽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장사지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확인사살까지 하신단 말입니다.

 

지금 마음속으로 ‘그래 죽자, 난 죽을 수 있어, 열심히 죽어야지’이런 결심을 하시고 계신 분들 계시지요? 과연 우리를 이 세상에서 장사지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실감이 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하나님 이외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표적인 것 하나만 떠 올려 보세요. 자식, , 평판, 건강, 이웃, 취미 등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어서 장사가 된다는 것은 그러한 것들에 대한 나의 마음을 잘라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인 내가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 내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상태를 ‘죄’라 합니다. 과녁을 잘 못 잡은 것입니다. 그 대상을 잘라내는 것이 바로 성도의 신앙생활입니다.

 

내 마음의 전 영역을 오직 하나님께로만 집중하는 것,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내 삶 속에 철장을 가지고 들어오셔서 날마다 나를 죽여 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은 그 자기 십자가를 ‘날마다’ 지라고 하지요? 우리가 날마다, 매 순간마다 져야 할 십자가는, 하기 싫은 것, 동행하기 싫은 것, 그런 것들을 떠맡아 억지로 동행하며 해 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하여 이 세상에서 내가 행복의 근거로 삼았던 모든 것을 전부 부정하고, 잘라내며, 행복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꼭 붙들고 하나님 나라를 얻는 것뿐임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다가 ‘나’를 숭배하기 위해 쌓아놓았던 내 습관과 집착과 중독과 욕심과 악한 성향들을 못 박아 없애는 것을 자기 십자가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것은 우리의 의지의 결단이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무덤에서 우리의 옛 사람이 완전히 죽고 장사되었다는 그 사실을 배우고, 묵상하고, 믿을 때에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을 죽여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지요? 그게 바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졌다는 말과 똑같은 말인 것입니다.

(6:4-5)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5:24)

24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 성도는 우리 옛 사람의 육체 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정과, 물질에 대한 욕심도 모두 십자가에서 죽여 버리고 장사지내어 무덤에 묻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현실을 이 세상에서 경험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말고 여러분의 마음을 두고 있는 모든 것은 전부 잘려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놓지 않고 꼭 붙들고 있을 때 여러분은 그것과 함께 두들겨 맞게 되는 것입니다.

(요일2:15~16)

15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여기에서 ‘이 세상’이라는 것은 하나님 이외의 모든 세상의 가치와 힘, 그리고 세상의 관계들을 다 함의하는 말입니다. 그것들이 나의 사랑의 대상이 될 때, 그것은 즉시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이 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 수단과 방법은 우리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데에 유용하게 쓰여야 할 것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사랑의 대상으로 놓고, 나의 세상 적 유익에 사용하게 될 때, 그것은 우리의 거룩에 해를 끼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 미친개 같은 세상을 매로 쳐서 쫓아 버려야 하는데, 그 개에게 물린 우리가 그 개를 꼭 안고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함께 쳐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날마다 죽어가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드려지게 되는 것이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42:5)

5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이 귀로 듣기만 하던, 요즘 말로 바꾸면 설교로 듣기만 하던, 주님을 어떻게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까? 자신의 의지의 대상이 되었던 자식과 재산과 아내와 친구와 건강이 모두 날아가 버리자 그 세상의 집착에서 해방이 되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혹자들은 욥이 정말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여 다른 것에는 전혀 욕심이 없었던 사람이라고 하는데 아마 이런 구절 때문에 그런 것일 겁니다.

(1:21)

21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욥이 자식들을 비롯한 자신의 모든 소유가 다 날아간 상태에서 이런 위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욥의 말대로라면 ‘나’는 적신, 그러니까 발가벗겨진 몸 이외에 내 것으로 가지고 온 것이 하나도 없는 자입니다. 심지어 이 몸도 하나님이 흙으로 빚어서 내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내 것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전4:7)

7누가 너를 구별 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 하느뇨

그렇지요? 그러면 욥의 모든 소유가 없어진 것은 원래의 주인이신, 주신분이 도로 가져가신 것이므로 서운하거나 불쾌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욥이, 말은 그렇게 해 놓고, 나중에는 하나님께 하소연을 하지요? 내가 뭘 그렇게 잘 못했다고 내 것을 이렇게 송두리째 빼앗아 가냐고 악을 씁니다. 그건 욥이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원래 주인이 잠시 맡겨 놓았던 것을 찾아갔는데 왜 그걸 그렇게 억울해 합니까? 자기 걸로 여기고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그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데, 믿음이라는 단어는 ‘마음, 심장을 주어 버리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다른 곳을 향해 있으니 어떻게 하나님이 보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욥에게 당신을 보고 갖게 하시기 위해 욥이 마음을 두고 있던 다른 것들을 빼앗아 버리신 것입니다. 그 상태가 되니까 비로소 욥에게 하나님이 보였습니다. 그 후에 욥의 소유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많아졌지요?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풍요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5:8)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어떤 자들이 하나님을 본다고 합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 하나님을 본답니다. 여기에서 ‘청결’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카따로스’는 ‘제자리를 찾다’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있어야 할 것이 제 자리에 있는 상태를 ‘청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내 마음에 두어야 할 것만 남고, 내 마음을 차지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깨끗이 치워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돈이 가득 차 있을 때, 그 마음에 자식이 가득 차 있을 때, 그 마음에 인기에 대한 열망이 가득 차 있을 때, 그 마음에 명예에 대한 욕망이 가득 차 있을 때, 우리는 돈을 믿는 것이고, 자식을 믿는 것이고, 인기와 명예를 믿는 것이며, 그 마음을 가리켜 부패한 마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는 믿음으로 보아야 하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청결한 마음은 그 모든 잡티들이 다 제거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서 제거가 되어야 할 그 모든 것들이 이 세상이 가치와 힘으로, 그리고 행복의 조건과 방법으로 제시해 놓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에게 집중되어 있던 우리의 마음이 거기와 단절이 될 때, 우리는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연합되어 살던 우리가 세상과 끊어지는 삶을 살게 되니 그 삶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죽음과 장사됨의 과정을 통과하게 되면 그 때 비로소 우리의 눈에 하나님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비전과 우리의 꿈, 그리고 우리가 행복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어서어서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 장사지낸바 된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영적 부활을 이미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현실의 실존을 자꾸 부정하고 우리의 영적 실존을 자꾸 확인하여 새사람으로서의 삶을 열심히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현실 속에서는 자꾸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고,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죽으세요. 장사 지내 버리십시오.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야망과 우리의 욕심은 죽어야 할 우리 옛사람에게 자꾸 먹이를 주는 것과 똑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산 사람들이지, 이 세상에 대해 산 사람들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대해 장사된 분들입니다. 죽으세요.

지난주에 모 재벌 총수가 목을 매 자살을 했지요? 여전히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재산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미래가 불안하여 자살을 택했습니다. 그건 ‘난 이 세상에 대해 절대 죽을 수 없다’는 항변입니다. 난 절대 세상에 대해 죽을 수 없기에 내가 내 목숨을 끊어서라도 ‘나’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안 됩니다. 여러분은 살아서 죽으셔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과 계획과 야망과 지혜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어서 버리십시오. 절대 안 됩니다. 그리고 죽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림을 받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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