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신경강해

사도신경 14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11:22

사도신경 14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고전15:12~19)

12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저는 중학교 때부터 LP판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습니다. 거의 삼 천장 정도를 소장하고 있었는데 CD라는 것이 나오고, 또 몇 번의 이사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오면서 지금은 거의 다 처분을 한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지금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LP 판이 몇 장이 있습니다. 중학교 때 처음 구입을 했던, 60년대 후반 최고의 아메리칸 밴드 CCR LP 원판과 Doors 의 앨범, 그리고 이글스(eagles)의 앨범 몇 장, 그리고 베토벤의 교향곡 음반과 오페라의 여신이라 불리는 마리아 칼라스의 음반입니다. 그 중에서 제가 가장 즐겨 듣던 음반이 마리아 칼라스가 Zeffirelli Covent Garden에서 공연한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입니다. 카바르도시의 ‘별은 빛나건만’, 토스카의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등 주옥같은 아리아들이 수록이 되어 있는 그런 진귀한 음반입니다. 제가 그 음반을 즐겨 듣는 이유는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가 좋아서, 혹은 토스카의 아리아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저는 대학시절에 그 음반을 들으면서 그리스도인의 현실 인식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성도로서의 삶이 힘겹고 고단하게 느껴질 때마다 그 노래들을 듣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는 비극입니다. 토스카가 사랑하는 혁명파 미술가 카바르도시가 사악한 왕당파 경찰서장인 스카르피야에게 잡혀가 온갖 고초를 치르게 잡혀을 때 토스카는 자기의 연인 카바르도시를 구하기 위해 스카르피야를 찾아가서 뇌물을 주려 합니다. 그런데 스카르피야는 토스카를 흠모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스카르피야는 돈 대신 토스카의 몸을 요구합니다. 그때 토스카가 하나님을 향해 불렀던 아리아가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입니다. 자신은 예술과 사랑을 위해 살환을 뿐 누구에게도 몹쓸 짓을 한 적이 없는데, 가난한 사람을 보면 자기가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고, 무언가가 생기면 제일 먼저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썼으며, 매순간을 신실한 예배의 삶으로 드리기 위해 애를 썼는데, 왜 자신에게 그런 가혹한 벌을 내리시있던며 신을 원망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아리아입니다. 결국 토스카는 연인인 카바르도시를 위해 스카르피야를 찔러죽이고, 카바르도시는 총살을 당합니다. 토스카 역시 절벽에서 뛰어내려 비극적 생을 마감합니다.

저는 그 음반을 턴테이블에 걸 때마다 토스카의 분신이 되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무관심을 지탄하곤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렇게 애걸하며 부르짖는 당신의 백성들의 신음과 같은 소원을 그리도 쉽게 묵살을 하는가?’ 왜 토스카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했건만 카바르도시가 총살을 당하는 것을 막아주시지 않으셨는지, 그리고 왜 기도의 당사자인 토스카가 절벽에서 투신을 할 만큼 힘들어 할 때 그녀를 찾아가 위로를 해 주시지 않으셨는지, 참으로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한 원망은 카르바도시나 토스카가 불쌍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제 마음 속에 품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토스카의 줄거리 속에서 재연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토스카를 보고 들을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폭발을 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 후 복음을 올바로 깨닫게 되었고 그 후부터는 다른 관점에서 토스카를 즐겨 듣습니다. 그 후로 저는 토스카를 들을 때마다 이 땅의 수많은 어리석은 토스카들의 가련한 아리아를 함께 들으며 올바른 복음전파를 향한 의지의 날을 벼르곤 합니다. 물론 그 수많은 토스카들 중에는 저도 포함이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요즘 여러분의 일상을 한 번 돌아보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흡족하게 도와주고 계신가요? 아니면 욥의 고백처럼 좌에 계신가하여 돌아보면 거기에도 안 계시고 우에 계신가 하여 그리로 돌아보아도 계시지 않는 무관심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멀고도 먼 절대타자로 인식이 되고 있나요? 솔직히 하나님이 잘 실감되지 않으시지요? 그래서 우리는 토스카처럼 원망과 불평과 고통의 아리아를 매일같이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고통과 불편함과 불안함, 그리고 거기에서 격발이 되는 원망과 섭섭함과 미움 등은 ‘희망 없음’ 즉 ‘절망’에서 기인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고장 난 냉동차에서 얼어 죽은 시베리아의 화물회사 직원의 이야기가 바로 그 절망의 파워에 대한 적절한 예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시베리아의 화물회사 직원이 고장이 난 냉동차 안에서 짐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 마지막 짐을 부리려 하는데, 그만 그 냉동차의 문이 철컥하고 잠겼습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안에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문을 닫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내 그 냉동차를 끄는 열차가 출발을 해 버렸습니다. 그 사내는 냉동차 안에서 소리를 지르며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고 열차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출발을 했습니다. 그 사내는 자신이 다음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분명히 그 차가운 냉동차 안에서 얼어 죽고 말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추위가 몰아 닥쳤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현실에 대해 절망을 하자 그 절망이 현실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 분별력을 파괴해 버린 것입니다. 사실 그때는 봄이었습니다. 그리고 냉동차는 고장이 난 상태였습니다. 그러한 기온에서는 절대 사람이 얼어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열차가 달리면서 문틈으로 바람이 조금씩 새어 들어오자 그 봄바람이 절망 속에 있는 사내에게는 냉동차의 추위로 인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사내는 결국 자신의 절망적 상황을 냉동차 벽에 낙서처럼 남기고 다음 정류장에서 얼어 죽은 시체로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 냉동차 문을 연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어떻게 고장 난 냉동차 안에서 사람이 얼어 죽을 수 있는지 모두들 의아해 했습니다.

절망은 그런 것입니다. 희망 없음이라는 것은 존재의 힘을 빼는 것은 물론이고, 목숨까지도 갉아먹는 무서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실험용 쥐들을 빛이 전혀 들지 않는 항아리 속에 가두면 30분에서 3시간 안에 모두 죽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항아리 속에 실험용 쥐를 넣고 항아리 뚜껑에 바늘구멍만한 구멍을 뚫어 작은 빛을 보게 해주면 사흘 이상을 삽니다. 그렇게 절망이라는 것은 어떤 존재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엄청난 힘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그의 글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의 정체를 ‘절망’이라 이름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절망은 우리를 우울하게 하고, 외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심지어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 분을 향해 불만의 독화살을 쏘게 할 수 있는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아담 안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이 다 절망 속에서 태어나서, 절망 속에서 살다가, 절망 속에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경은 우리 성도들에게는 희망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아니 성도에게는 희망 정도가 아니라, 번복될 수 없고, 확정된 희망, 즉 소망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망은 희망사항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희망은 언제든지 번복될 수 있고, 실패될 수도 있으며, 파괴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소망은 확정된 희망으로서 절대로 실패될 수 없고, 번복될 수도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소망을 가진 성도는 절대 절망이 주는 쓴 잔을 들고 독설과 원망의 아리아를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우리 성도들에게서도 그렇게 자주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아리아가 나오게 되는 것일까요? 그건 우리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성도가 가져야 하는 소망의 정체에 대해 너무 무지하고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 소망, 성도가 절망의 현실 속에서 그 현실을 밟고 일어설 수 있는 소망의 정체에 대해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성도가 이 땅에서 소망으로 갖고 있어야 할 것을 한 마디로 축약하여 제시를 합니다. 오늘 본문 12절과 19절을 보세요.

(고전15:12,19)

12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9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보시는 것처럼 성도의 소망은 ‘부활’입니다. 만일 이 세상의 삶이 끝이라면 성도가 이 땅에서 겪는 고난과 시험 등은 성도를 우울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며, 죽고 싶게 만들어야 맞습니다. 우리도 토스카처럼 원망과 고통의 아리아를 불러야지요. 그런데 이 땅의 삶이 끝이 아니라, 이 땅의 삶과는 비교도 할 수없는 영원한 삶이 존재하며, 그 영원 속에서 살 수 있는 신령한 몸이 성도에게 새로 주어지게 된다는 부활신앙이 성도에게 있는 한, 성도는 이 땅의 어둡고 암담한 현실 속에서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생의 현실로 모든 게 끝이 난다면 그렇게 고난과 수고를 감수하며 사는 성도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이들이 맞지요? 이생이 끝인데 왜 참고 살아요? 왜 당해줍니까? 왜 용서해요? 어떻게 해서라도 내 것을 찾아먹어야지요.

여러분은 정말 부활을 믿으십니까? 부활의 몸으로 살아나 영원을 살게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존재를 믿으세요?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과 육신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배우고, 훈련하며, 실습하는 장()일뿐임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반드시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부활하실 것을 믿으세요? 솔직히 막연하시지요? 여러분은 오늘 설교를 통하여 그 부활 소망을 확고하게 붙들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우리가 그 부활 소망을 확고하게 붙들기 위해서는 먼저 기독교의 케리그마를 확실하게 확인하고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케리그마를 아주 짧은 문장으로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곳이 고린도전서 15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고전15:1-4)

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 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 부분이 바로 성경 전체에서 가장 확실하고 명료한 기독교의 케리그마입니다. 내용을 잘 보시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복음을 선포하면서 ‘너희가 내가 전한 그 복음을 굳게 지키고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하고 교회가 믿어야 할 바인 복음의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합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바울의 케리그마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바울의 케리그마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데 그 분이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걸 지키고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까지를 말합니다. 그만큼 부활은 십자가와 함께 복음의 핵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를 위해 살아나신 예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저 예수의 죽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 예수의 힘을 이용하여 이 세상에서도 잘 먹고 잘살자는 것이 복음이 되어 버렸습니다. 부활은 관심도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렇게 타락을 한건 부활 신앙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기복주의, 신비주의, 성공주의, 번영의 신학, 고지론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다 부활 신앙의 실종의 결과물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진정한 대 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의 제사가 완전한 제사였음이 인정된 사건이었음과 동시에, 그러한 예수님의 완전한 십자가의 제사로 그 안에 연합된 예수님의 형제들이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창조가 될 것임을 공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성도 전체의 부활에 대한 보증서나 확증서 같은 것이었던 것입니다.

(고전15:20~22)

20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켜 첫 열매라 칭하는 것을 주의 깊게 보셔야 합니다. 그 첫 열매라는 단어는 제사용어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에 따라 여러 절기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 중 반드시 지켜야 할 절기가 유월절과 맥추절, 수장절입니다. 유월절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어린 양 예수의 피로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될,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의 구원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고, 맥추절은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땅에서 열매로 추수가 될, 하나님 백성들의 종말론적 상태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맥추절을 오순절이라고도 하지요? 그리고 그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의 교회가 탄생합니다. 추수가 일어난 것입니다. 연결이 되시지요?

마지막으로 수장절은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한 하늘의 풍요를 기업으로 받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교회의 풍요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잊지 말라는 차원에서, 그 풍요의 절기인 수장절을 광야의 천막 속에서 보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수장절을 초막절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씨앗 하나 뿌릴 수 없는 광야를 살던 이스라엘이 풍요로운 추수와 저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꼭 기억하며 하늘에서의 풍요 또한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로만 말미암는 것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모든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오신 이후에는 모든 절기지킴이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 중 유월절 사흘 후를 첫 이삭 드리는 날로 지키게 하셨는데, 그 날에는 이스라엘이 그 해에 최초로 거둔 이삭을 하나님 앞에 드려 제사를 지냄으로 해서 자신들에게 허락된 모든 이삭, 모든 열매가 다 하나님 것이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의 절기들을 잘 기억하시고 예수님께로 가 보겠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이 유월절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후에 부활하셨는데 그 날이 바로 첫 이삭 드리는 날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첫 이삭, 첫 열매로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바울의 진술은 첫 열매이신 예수님 뿐 아니라 그 분이 대표하고 있는 모든 열매들이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한 알의 밀알이 되셔서 많은 열매를 맺으셨지요? 그 많은 열매의 대표로 예수님이 첫 이삭 드리는 날 첫 열매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입니다. 그게 부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희생으로 열매가 된 우리 성도는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인 것처럼 그와 함께 부활하여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민으로 살아날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부활을 소망으로 삼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구약을 비롯한 성경 전체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11:25~26)

25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께서 당신을 가리켜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부활과 영생을 같은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부활의 삶이 바로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생, 즉 하늘의 복을 누리는 삶은 부활 이후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육의 세상에서 하늘의 복을 구하는 것은 연목구어와 방불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라는 사람들조차 이 세상의 육의 삶 속에서 하늘의 풍요를 누리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주는 대가로 이 땅에서의 번영과 성공과 풍요를 요구합니다. 그건 부활을 믿는 사람의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그러한 모습은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승부를 보고 싶어 하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도 부활의 삶을 맛보며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서 영적으로 이미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미 첫째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2:5)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보시다시피 바울은 우리 성도가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부활의 삶을 살고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그의 서신 요한계시록 20장에서 성도를 가리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첫째 부활은 가시적인 하늘의 풍요 속으로 입성을 하게 되는 둘째 부활로 가는 여정 속에서 믿음으로 사는 삶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째 부활을 한 성도들에게는 아직 가시적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은혜로 이 세상 속에서 첫째 부활의 삶을 삽니다. 그들은 반드시 둘째 부활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확실한 둘째 부활을 약속받은 자들이 이 땅에서 예수의 삶을 좇아, 작은 십자가와 작은 지옥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도는 그러한 자기 십자가와 작은 지옥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배우게 되는 것이고, 아울러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이라는 것을 발휘하여, 둘째 부활을 확신 속에서 기다리며 살고 있는 이들의 존재를 만 천하에 드러내는 이들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첫째 부활에 속한 사람의 삶입니다. 그 삶을 다른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이 땅에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로서 누릴 수 있는 하늘의 풍요는 믿음 속에서 누려야 하는 영적 풍요여야 하는 것이지, 부자가 되고, 병도 안 걸리고, 큰 명예를 얻어 세상의 자랑거리가 되는 그런 풍요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첫째 부활에 참여한 이들이 이 세상 속에서 영생을 사는 길은 십자가와 지옥을 경험하며 소망으로 그 삶을 이겨내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걸 이겨내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여러분 삶으로 증명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15:42~45)

42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43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45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바울은 45절에서 첫 사람 아담을 산영이라 부르고 마지막 아담, 예수를 살려주는 영으로 부릅니다. 산영과 살려주는 영이 대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산영은 살려주는 영의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서 누군가에 의해 살림을 받기 전에는 절대로 존재할 수도 없는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게 아담입니다. 그렇게 부활전의 자연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저 살아있는 상태였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우리의 첫 열매로 부활을 하셨으므로, 우리도 그 첫 열매처럼 ‘나’의 생존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살려내는, 다른 말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자로 지어져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육신의 삶 속에서 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으로 이름 붙여진 육신을 부인하고, 썩지 아니할 것, 영광스러운 것, 강한 것인 영의 삶을 추구하며 살도록 이끌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바울이 그렇게 육을 부인하는 삶을 가리켜 육으로 심는 삶이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씨앗으로 땅에 심는 삶이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삶을 말하며, 예수님께서 겪으신 지옥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씨앗으로 심기우는 삶, 죽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부활을 위해 이 땅에서 철저하게 옛 사람을 땅에, 지옥에 심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없으면 부활이 없습니다. 완전히 죽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나는 것은 회복이라 하지 부활이라 하지 않아요.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일상은 여러분이 땅에 심기운 씨앗이 되어 세상에 대해 죽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힘이 든 거예요. 그러나 그 속에서 탄식의 아리아를 불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고전15:36)

36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너무 확실하지요? 우리가 새로운 형체, 즉 부활의 몸을 입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씨앗으로 심겨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것으로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의 삶에 섬기는 삶, 용서하는 삶, 져 주는 삶, 당해주는 삶이 허락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성도는 그 속에서 부활의 소망을 붙들고 하루하루를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한탄과 불평과 원망의 아리아를 부른 뒤 절벽에서 뛰어내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죽어야 삽니다. 여러분이 부활 신앙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현실에서의 죽음을 수긍하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부활을 소망으로 갖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우울하고, 그래서 그렇게 고통스러우며, 그래서 그렇게 외로운 것입니다. 이 세상이 끝이니까요. 부활이고 뭐고 이 육신의 삶에나 신경을 좀 써달라는 것이지요.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의 날을 소망하며 오늘을 이겨야 합니다. 현실에 집착하여 그 상태에 머물러 계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좀 전에 읽었던 고린도전서 15 45절의 산영과 살려주는 영에 쓰인 단어가 다른 단어라는 것을 아십니까? 산영에 쓰인 헬라어는 ‘프쉬케’입니다. 그런데 살려주는 영에 쓰인 단어는 ‘프뉴마’입니다. 전자는 soul의 의미로 쓰이고 후자는 spirit의 의미로 쓰입니다. 전자는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임에 반해 후자는 방향, direction을 함의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첫 사람 아담, 즉 자연인은 소망이 없는 죽은 상태로 있다가 영원히 죽음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고, 부활하신 예수님, 즉 살려주는 영은 소망이라는 확실한 목표지점을 향하여 현실을 딛고 일어서서 움직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영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소망을 향하여 한발 한 발, 현실을 딛고 움직여야 하며, 절대 절망의 상태에서 원망의 아리아를 부르다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 성도 또한 살려주는 영이 되었으므로 아직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에게 살려주는 복음을 들고 삶으로 입으로 하늘의 존재들이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을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이미 영적으로 부활을 했고 가시적 부활을 소망하고 있는 성도들은 이 첫 창조의 영역에서 실망하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왜 예수님이 안식 후 첫날인 여덟 번째 날에 부활 하셨는지 아세요? 엿새 동안의 첫 창조 사역이 끝나고 일곱째 날 안식으로 첫 창조의 영역이 구획되어져 있지요? 부활은 그 타락한 첫 창조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이며 새로운 창조의 첫날이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안식일 다음 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던 예수님의 제자 글로바와 그 아내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안식 후 첫날 식사를 합니다. 그 식사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식사 중 여덟 번째 식사입니다. 안식일로 마무리 되는 첫 창조 너머의 식사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 설명해 주시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의 눈에 보였습니다. 거기에서 누가가 굳이 그 부부의 눈이 밝아졌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건 지금 논리정연하기로 유명한 의사 누가가 구약의 어떤 사건이 회복이 되고 있다는 것을 고지하기마음이 일부러 채택을 한 표현있다는 것을 고창세기에도 눈이 밝아진 경험을 한 비슷한 부부가 하나 나오지요? 아담과 하와입니다. 그들이 생명나니다실과를 놔두고 선악과를 먹어 버림으로 눈이 밝아져 선악의 판단을 자신들이 하게 되지요? 그 상태를 하나님에 대이 죽고 세상에 대이 살아있는 상태라 합니다. 그런데 부활의 날에 예수님과 함께 여덟 번째 식사 설명해 주시자세상에게 되식사 설하늘의 떡 예수 설생명나니다실과를 먹게 된 부부가 세상에 대이 소경이 되고 하나님께 눈이 밝아져 주시자세상을 보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는 것을 고글로바와 그 아내가 예수님에게 ‘그가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 기대했다’고 하지요? 세상에 대한 희망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못 박아 버리는 현장인 것입니다. 그들의 세상에 대한 희망이 십자가에 못이 박히고 이제 새로운 부활의 세계에 대한 소망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따라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자꾸 눈을 떼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 자꾸 죽는 거예요. 그리고 산영이 아닌 살려주는 영으로서 소망을 향하여 전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자꾸 머물려 하지 마세요.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증거를 대라고요? 제가 그 증거입니다. 저 같은 지독한 회의론자가 이렇게 목사가 되어 세상이 외면하는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 증거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위해 목숨을 거는 삶을 살다가 갔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예수의 부활이 사실인 것처럼 우리의 부활도 역사적 사실로 일어날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의 부활을 부인하려 한 그 모습 그대로 우리의 부활을 의심할 뿐 아니라, 우습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이 현실을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세기의 첫 창조 때의 그 사흘 동안에 일어났던,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어그러졌던 하나님 나라의 틀을 다시 세우시기 위해 사흘을 무덤 속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흘이 회복이 되자 찬란한 부활의 아침이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첫 창조는 반드시 끝이 납니다.

지금 이 세상은 무서운 역창조의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죽음입니다. 첫 사람 아담에 속해 있던 우리의 옛 사람은 지금 역창조의 과정을 겪으며 죽고 있는 것이고, 그 역창조가 완결이 되는 날,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이 모두 이 세상에 대해 죽는 날, 영광스러운 새 창조가 밝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참으세요. 여러분이 지금 이 세상에서 죽고 있는 건 잘 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 죽음의 삶 속에서 탄식의 아리아를 불러서는 안 됩니다. 영광스러운 소망의 찬양을 부르십시오. 여러분에게 약속된 부활의 나라는 반드시 옵니다.

 

오늘이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추수감사 주일 헌금이 일 년 예산의 10%를 웃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풍성히 드리면 다음 해에 몇 배로 축복을 받게 된다는 그런 잘못된 가르침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추수감사 주일이나 성탄절, 부활절 등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교회의 절기는 예수 안에서 이미 다 완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추수감사 주일은 더 그렇습니다. 저는 그 이름부터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왜 추수만 감사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추수할 거리를 주시지 않았을 때에는 감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가요? 은혜를 아는 성도는 망해도 감사해야 하고, 병들어도 감사해야 하고, 사고를 당해도 감사해야 합니다. 하박국은 무화가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어도 여호와로 즐거워하겠다고 했습니다. 하박국이 나열한 그 목록은다고 합니 사람들이 최저 생계를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다 사라져도 하박국은 감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기에 이 땅의 생필품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여호와로 감사할 수 있는 실력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잘 견디시고 잘 이기세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올 한 해 풍성한 추수를 허락하셨거든 감사한 마음으로 이웃과 교회와 잘 나누세요. 감사는 returning이 아니라 passing on입니다. 보상을 바라지 마시고 그냥 나누세요.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감사입니다.

현실에 집착하지 마세요. 부활을 소망하십시오. 그리고 진짜 감사할 것에 감사하세요. 가라지 같은 나를 열매로 추수해 주신 예수의 부활을 감사하세요. 그 사람이 진짜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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