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신경강해

사도신경16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11:23

사도신경16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1:3)

3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오늘 우리가 공부할 부분은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대 제사장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제물로 하여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 받으실 온전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그리고는 영원한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셨지요? 그게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승천입니다.

(9:24)

24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 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주님은 그렇게 이 땅에서의 임무를 마치시고 하늘 지성소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주님은 지금 그곳에서 무얼 하고 계신 것일까요?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당신 백성들이 살 천국 맨션을 열심히 건축하고 계신가요? 오늘 본문을 보시면 주님은 하늘 지성소로 올라가셔서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합니다. 우편에 앉으셔서 무엇을 하신다는 말입니까? 보좌 우편에 가만히 앉아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구경하고 계신 걸까요? 그리고 고린도후서 13 5절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우리 안에 계신다고 하는데 그 말씀과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화해시켜 이해를 해야 합니까? 이러저러한 질문들을 들고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말의 개괄적 의미 파악부터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은 손과 발 등의 신체부위를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교수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은 자신을 개별화하기 위해 어떤 물질을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분이 어디에 앉아계신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요? 그럼에도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앉아 계신다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그러나 항상 ‘어디에’앉아 계신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리고 그 ‘어디에’는 늘 보좌입니다. 그것은 신인 동형론적 표현법(antropomorphism)입니다. 하나님을 인간에 비유하여 표현을 해서 우리로 하여금 사태를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히브리 문학의 표현기법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신체부위가 없으신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발, 하나님의 귀, 하나님의 얼굴 등이 성경에 등장할 때 우리는 인간이 가진 손, , , 얼굴 등의 정의와 개념을 동원하여 그것을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과 전지하심과 사랑으로 이해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 계신다는 표현은 인간 세상의 왕이 그의 보좌에 앉아서 나라를 다스리듯이 하나님께서는 온 땅의 왕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한마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와 권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103:19)

19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이렇게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만유를 그 분의 권세로 통치하고 계심을 나타내는 표현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이 승천하셔서 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 또한 신인 동형론적 표현인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마련된 또 다른 의자에 앉으셔서 헛기침만하며 이런 저런 명령을 하고 계신다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전능하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편이 의미하는 바를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동양인들에게 있어서 우편은 늘 바른편, 혹은 옳은 편을 의미했습니다.(바른쪽, 오른쪽) 그래서 고대시대 때부터 누군가를 최고의 예우로 우대할 때 왕의 우편에 앉게 했던 것입니다.

(왕상2:19)

19밧세바가 이에 아도니야를 위하여 말하려고 솔로몬 왕에게 이르니 왕이 일어나

영접하여 절한 후에 다시 위에 앉고 그 모친을 위하여 자리를 베풀게 하고 그

우편에 앉게 하는지라

솔로몬이 어머니 밧세바가 처소로 들어오자 왕의 신분인 자신의 우편 자리를 내어 드립니다. 그러니까 왕의 우편 자리는 왕이 소유하고 있는 권능과 영예를 함께 누리는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지금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표현은 예수님이 성육신하셔서 이 세상을 사시는 동안에 겪었던 약함과 수난과 죽음의 삶의 대척점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영예를 회복하시고 하나님으로서 통치를 하고 계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2:9-10)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바로 이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시지요?

 

그렇다면 이제 하늘과 땅을 권능으로 통치하고 계신 진정한 만유의 왕 예수님께서 어떠한 통치를 하고 계신지를 알아야겠지요?

(110:1~2)

1(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2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원수를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즉 원수의 머리를 밟으실 때까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십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원수의 머리를 밟는 일을 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 시편 110편을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2장에서 그대로 인용을 하십니다.

여기에서 ‘여호와께서 내 주께’라는 어구를 주의 깊게 보셔야 합니다. 그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 내 여호와 하나님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능의 보좌에 앉으셔서 하나님의 권세로 원수의 머리를 밟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2절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은 원수들까지도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금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을 해 드리면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3 15절에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여자의 후손이 원수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는 원시복음을 주셨습니다. 그 언약대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원수의 머리를 밟으셨습니다.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승리는 영적인 승리입니다. 이제 승리 안에 들어온 당신의 백성들의 삶 속에서 그 승리가 이해가 되고, 적용이 되고, 가시적으로 완성이 되어야 하는데 육신을 입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이 스스로의 자아 안에서조차 그 싸움을 버거워하며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이 이미 밟아놓은 원수의 머리를 밟기는커녕 주님께 밟힌 그 머리에게 오히려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권능의 자리에 앉으셔서 바로 그 싸움을 돕고 계신 것입니다. 아니라고, 그건 이미 죽은 머리라고, 복음을 믿으라고,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이 이미 이겨 놓은 싸움을 제발 이해하고 받아들여 온전한 거룩으로 완성이 되라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 일을 돕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라는 어구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때때로 지금 이 세상을 죄의 세력이 다스린다고 표현을 합니다. 세상 권세 잡은 자라는 등의 표현들이 그러한 의미의 표현들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하늘 위의 것들이나 땅 위의 것들 모두가 예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주님은 원수들도 통치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백성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싶으셔서 그들이 한시적으로 예수님의 통치 아래에서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루이스 벌콥의 조직신학에서는 원수들까지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으로 예‘권능의 으로’라 부르고, 그 중에 들어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특별시적으로 예‘은혜의 으로’라 합니다. 그래서 전자의 으로로 경륜되는 이 세상을 ‘권능의 왕국’이라 부르고, 후자의 으로에 의해 특별하게 경륜되는 교회를 ‘은혜의 왕국’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권능의 통치’로 움직이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 특별히 ‘은혜의 통치’를 받아 원수를 밟는 자리로 성숙되고 완성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수를 발등상 되게 하는 것, 즉 원수의 머리를 밟는 일이 어떠한 일인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하시는 일이 바로 그것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그 일을 올바로 규명하고 있지 않으면 지금 이 우주의 역사와 우리 인생의 목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어영부영 살게 되는 수가 있으니까요.

그것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다시 창세기 3 15절로 올라가야 합니다.

(3:15)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최초로 인류에게 주신 원시복음입니다. 여자의 후손을 보내어 원수의 머리를 박살내 버리시고 마귀와 여자, 즉 교회를 원수 되게 만드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사망권세를 깨 버리심으로 그 원수의 머리를 밟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밟아 뭉개버리신 원수의 머리라는 것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풀어 설명하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창세기에서의 그 원수는 무엇을 조장하는 자였습니까?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들의 연합, 즉 하나 됨을 깨는 자였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그분께 모든 것을 의뢰하고 의존하며 살아야 하는 피조물을 하나님의 자리로 밀어 올려놓고 하나님과 그들의 사랑의 관계를 깨버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들에게서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 버리자 인간들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그들의 마음을 자기 자신에게 쏟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추구해야 했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쓰여져야 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모든 것이 자기 사랑에 쓰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돈, 명예, 인기, 쾌락, 건강, 가족 등을 ‘나’라는 존재의 범주에 복속시키고 그것들을 살찌우는 것으로 자신들의 만족과 행복을 삼으며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왜곡된 사랑을 다시 당신께로 돌려놓으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렇게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자들에게서 그 사랑의 대상들을 빼앗아버리는 역사를 진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신 것이 우리의 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죄’라는 것은 단순히 간음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살인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 그들의 마음을 두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품어 안고 우리의 죄가 되셔서 죽으셨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말고 사랑하는 것들을 다 죽여 버리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죽고, 세상이 우리에 대해 죽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원수의 머리를 밟고 계신다는 표현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자로 만들고 계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힘으로 추구하며 살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끊어내고 계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는 뭘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보좌 우편에서 우리가 마음을 두고 있는 세상을 사뿐히 즈려 밟고 계신데 오늘날 교회는 주님이 밟고 계신 그 세상을 더 살찌워 달라고 종교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자로 타락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얻은 이후에도 여전히 자기 사랑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고, 말씀을 통해 양육하시며, 올바른 길로 우리를 통치하고 계신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권능의 보좌에서 우리의 대 제사장으로 일을 하고 계신 것이고, 여전히 선지자 직분을 감당하고 계신 것이고, 왕으로 통치하고 계신 것입니다.

(10:11-13)

11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이렇게 우리를 위해 이 땅에서 대 제사장의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하신 주님이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여전히 대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해 내고 계십니다.

(7:24~26)

24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25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6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우리의 죄를 위해 영원한 제사를 영 단번에 드리신 대제사장 예수가 지금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거룩과 하나님 백성으로의 완성을 위해 그 분이 기도를 하고 계신단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보좌 우편에 앉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도는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지요? 따라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아니다?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 예수님의 기도가 있기에 우리가 이렇게 엉뚱한 곁길로 못가고 십자가의 길, 자기부인의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세상이 자꾸 내게서 멀어져가는 일만 생기니까요. 반면에 예수님의 기도에서 제외된 이들은요? 자기들 뜻대로, 이 세상 것들로 만족하며 행복해 하며 즐겁게 삽니다. 거기에 대한 훌륭한 예가 시편 73편 아닙니까.

예수님의 기도 속에 들어 있는 이들이 어떻게 살게 되는지 로마서로 가서 잠깐 확인해 보지요.

(8:34~37)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잘 보세요.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여전히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칼이 있고, 종일 주를 위해 죽음을 당하게 되고,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기대하기를 그런 것을 다 막아주시고 이 땅에서도 우리의 소원과 야망을 모두 이루어 내며, 모든 문제를 해결 받는 그런 기도를 하실 것이라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는 그러한 것이 닥쳤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만으로 그러한 것들을 넉넉히 이기게 해 달라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대 제사장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가 왜곡된 사랑을 회복하여 하나님께로 올려드리면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힘 삼아 살고 있던 것들이 끊어져 나가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당면한 상황들과 현실들을 잘 이겨내는, 넉넉히 이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이 되게 해달라는 그런 기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은 우리의 세상 사랑과 자기사랑을 밟아 뭉개고 계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분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하늘의 비밀을 계시해 주십니다. 주님의 하늘에서의 선지자 직분이 지금도 시행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성령님이십니다.

(14:26)

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고 계시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구체적 세목이 뭡니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해 주십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통한 예수님의 선지자 사역의 내용도 역시 죄에서, 세상 사랑과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왕의 직분이지요? 예수님의 왕의 직분은 무엇을 위한 직분인지를 볼까요?

(고전15:25~26)

25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26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또 나오지요? 예수님께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의 머리로, 우리의 왕으로 우리 교회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분의 통치가 무엇을 향한 통치라는 말입니까? 원수의 머리를 밟고 사망을 멸망시키시기 위한 통치입니다. 역시 하나님 사랑으로 집중이 되어야 하는 당신 백성들의 마음에서 세상 사랑과 자기 사랑을 끊어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요약을 하면 주님은 지금 당신이 왕으로서 완성하신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성도들에게 이해시키시고 적용시켜 세상 사랑과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 하나님만 사랑하는 자로 회복시키시는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정리를 해 보면, 지금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지니신 채 실체로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에 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지금도 쉴 새 없이 우리를 위해 간구를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양육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간구와 양육은 우리의 소원 성취나 문제 해결 등을 도우시는 간구나 양육이 아니라 우리의 지금도 쉴이, 과녁을 벗어난 사랑이 하나님께로만 집중되게 하기 위한 기도입니다. 그게 원수의 머리를 밟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 완성의 지점을 향하여 이 세상을 권능의 통치로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교회를 은혜의 통치로 다스리고 계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은 한가지로 수렴이 됩니다. ‘나’ 자신만을 사랑하던 죄인들을 돌이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역은 이미 영적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권능의 도우심을 받아 이루어 내야 할 것은 우리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의 크기와 깊이를 깨달아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그 분만을 나의 힘으로 여기며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질병이 쓰일 수 있고, 파산이 쓰일 수 있으며, 가난이 쓰일 수 있고, 이혼이 쓰일 수 있고, 사고가 쓰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저주로 매도하지 마세요.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만 사랑하는 자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자로 성숙이 되고 완성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선 것입니다. 그 모든 구속의 이야기가 적혀 있는 책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말씀, 구약의 율법이나 신약의 언약을 모두 통 털어 한 마디로 줄이면 ‘주 너의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라’가 되는 것입니다.

(22:36~40)

36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39절의 ‘둘째는 그와 같으니’라는 어구는 첫째와 둘째는 구별이 없이 동등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첫째의 사랑이 회복이 되면 둘째 사랑은 필연적이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사랑이라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곳에서는 이웃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도 하는 것이고,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 사랑이 율법의 정수라 말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둘은 따로 떨어질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엣것이 파괴되면 뒤엣것도 파괴가 되고 앞엣것이 회복이 되면 뒤엣것도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13:8~10)

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그렇지요? 그러면 이 쉐마는 어디에서 인용이 된 것인지를 추적해 보겠습니다.

(6:4~5)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유대인들은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이스라엘에게 한 명령 중 신명기6 4절에서 9절까지의 내용을 ‘쉐마’로 받아 경문에 넣어 차고 다녔으며, 아침저녁으로 암송을 했습니다. 쉐마라는 말은 신명기 6 4절의 첫 단어인데 그 단어의 의미는 ‘듣고 순종하라’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리고 대대손손 전하여 꼭 해야 할 일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건 곧 교회에게 떨어진 쉐마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약속의 땅, 즉 천국에서 하나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 사랑’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 자연스럽게 격발되는 것이 ‘나’이외의 다른 사람, 즉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은 이기적 자기 사랑에서 벗어난 자들에게서만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의 삶 속에서 당연히 이웃 사랑이 격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백성들에게 떨어진 쉐마는 원래 ‘주 너의 하나님을 마음을 다 하고, 뜻을 다 하고, 성품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당연히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므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으로 표기가 되고 회자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에게 요구되는 이웃 사랑의 개념이 조금 더 명료해 지지요?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서 격발이 되는 이웃 사랑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 한해서 주어진 명령입니다. 그렇지요? 쉐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이들에게만 주어진 명령이란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어린양의 피라는, 같은 은혜를 입은 운명공동체인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웃은 누구이겠습니까? 함께 은혜를 입고 홍해를 건너 나와 약속의 땅을 향해 진군하고 있는 운명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동일한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운명 공동체를 신약에서 무엇이라 부릅니까? ‘교회’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성도에게 요구하는 이웃 사랑은 교회 안에서의 이웃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율법의 명령은 하나님 나라 안에 속한 이들 간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쉐마가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것이니까요. 잘 생각해 보세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에서의 그 몸이 어떤 몸이겠습니까? 한 몸으로서의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12:4-5)

4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5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12:13)

13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우리가 복음을 올바로 이해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있는 성도가 맞다면 우리와 함께 한 믿음 안에서 한 길을 가고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그 한 몸인 교회는 바로 내 몸이니까 자연스럽게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건 이제 우리가 열심을 내서 이루어 내야 하는 계명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어 내신 은혜와 축복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네가 밥 한 그릇 먹으면 이웃에게도 밥 한 그릇 가져다주고, 내가 백 불을 썼으면 이웃도 백 불을 쓰게 해 주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아, 너희가 받은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너희가 정말 안다면 그걸 한번 내놓아 봐라’라는 확인의 요구인 것입니다.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성경은 분명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건 ‘나’를 사랑함이 전제가 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네 몸을 사랑함’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구원을 얻게 되면 그렇게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나’를 믿음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그렇게 새롭게 창조가 된 ‘나’를 인식하게 될 때 그 구원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지지요? 그 소중함과 그 감격이 바로 새로운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구원을 받았음을 아는 이가, 자기와 한 신앙으로 묶여 있는 다른 사람을 볼 때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저 사람도 나처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힘입어 구원을 얻은 사람인데 어떻게 내가 세상 적 기준으로 그를 평가하겠는가?’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그 사람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쉐마의 진의인 것입니다.

그렇게 같은 운명 공동체 안에서 한 길을 가고 있는 한 몸으로서의 교회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들은 그 공동체의 구성원인 자기 이웃이 조금 못 배우고, 가난하고, 부족해도 절대 그를 우습게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자격이나 조건이나 상황이나 인격이나 성품 등이 그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로 적용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나처럼 면목 없이,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안에서 함께 구원을 받은 귀한 영혼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구원을 얻은 성도는 돈 많고 권세 있는 사람들 앞에서 주눅 들지 않습니다. 그들도 역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니까요. 우리는 한 몸이거든요. 한 몸이 어떻게 스스로 주눅이 들고, 스스로 우습게 여깁니까? 그들도 다 내 몸처럼 구원을 얻은 사람들인데요.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한 성도는 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내 이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밖으로 자꾸 도망쳐 나가 이 세상 것들에 관심을 두고 거기에 착념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가르치고, 훈계하고, 기도하고, 안타까워하며 그를 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게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이웃을 오직 하나님의 사랑 안에만 거하도록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 명예, 취미, 건강, 가족 등등, 내 이웃이 그런 것에 착념하느라 하나님 사랑을 자꾸 놓치고 있을 때 그냥 두고 보는 것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설교를 준비하고 설교를 쏟아낼 때마다 여러분을 죽도록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교리와 잘못된 가르침에 의해 엉뚱한 것들을 바라고, 그것을 얻어내기 위해 예수를 이용하려하는 그런 못된 습관들을 향해 칼을 던져 도려내 버리는 것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사랑은 친절과 다른 것입니다. 친절은 사랑의 증상일 수는 있지만 동의어는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은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내 이웃을 붙들어 놓기 위해서는 때때로 나의 존재가 그들에게 날카로운 메스로 여겨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내가 주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나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이 세상의 힘이 아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만을 사랑하는 새로운 ‘나’가 너무 소중하기에 내 이웃 또한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선행이나 구제나 친절을 베풀지 말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사랑을 입은 성도의 당연한 열매입니다. 그런데 진짜 사랑은 그렇게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시라는 말입니다.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았다고,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고,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 주지 않았다고 ‘저 사람은, 저 교회는 사랑이 없다’라고 너무 쉽게 판단해 버리지 마시라는 말입니다. 진짜 사랑을 하느라 불친절해 보일 수 있습니다. 진짜 사랑을 하느라 싸늘해 보일 수 있단 말입니다. 거짓되고 위장된 사랑을 오해시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가면을 써가며 친절을 가장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이 없다’라고 매도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싸늘함과 불친절 속에서 인간은 이렇게 사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배울 수 있는 실력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바로 사랑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분명 좋아함과는 다른 것입니다. Love Like는 다른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언약적 사랑이며 의지적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원수에게 다가가 떡이라도 하나 더 줘 보라고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게 훈련을 해서 해 낼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말씀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의지적 사랑을 시도하는 과정 속에서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그 상대방을 미워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꼭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기부인이 나오는 것이고 그러한 일이 반복이 될 때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의 사랑,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어진 이웃 사랑을 조금이나마 내 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말씀을 드립니다. 죽도록 사랑해 보세요. 최선을 다해 사랑을 주세요. 그리고 많이 실패하세요. 자신의 사랑 없음을 많이 폭로 당하세요. 그러나 그 자리에서 반드시 십자가를 붙드세요. 머지않아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진짜 사랑이 조금씩 풍겨 나오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이미 완성이 된 겁니다. 그걸 사단이 깔고 앉아서 우리 것 아니라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사랑할 수 없을 때 그 마귀의 방해를 하나님께 고소하세요.

우리 집에 다른 이가 들어와서 자기 집이라고 우기면 어떻게 해야 해요? 당장 신고 해야지요.

왜 우리 것을 자기 것이라고 붙들고 안 줍니까?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그래요. 우리는 사랑에 실패할 때마다 스스로 자학을 합니다. ‘난 사랑할 수 없어’ 참 좋은 믿음이네요.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랑할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주신 겁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난 사랑할 수 있게 되었구나’를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꿇어 앉아 기도하세요. 예수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현실이 오늘 내 것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세요.

 

정리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하고 계신일이 무엇이라고 했지요? 원수를 밟아 발등상 되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샅샅이 훑어 내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점점 이 세상과 ‘나’라는 존재의 연장선상에 묶어 둔 또 다른 ‘나’들을 기각당하고 부인당하는 중입니다. 우리의 눈은 점점 하나님을 향하여 옮겨지고 있는 중입니다. ‘나’는 그런 큰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새로운 ‘나’를 감사함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와 한 신앙을 고백하는 한 몸, 내 이웃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얻어내기 위해 오늘도 형식적 종교 생활에 여념이 없을 때에, 나를 좀 인정해 달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에게만은 친절을 좀 베풀어 달라고 투정을 부릴 때에,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좀 해주어서 나를 좀 위로해주고 감동시켜 달라고 땡깡을 부릴 때, 예배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순서나 형식을 넣어서 나를 좀 울려 달라고 고집을 피울 때, 우리가 어떻게 그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까? 가르쳐야지요. 훈계해야지요. 야단쳐야지요. 그리고 기도해야지요. 그게 진짜 사랑입니다. 여러분,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어 주어서 서로서로 문제없이 편안한 상황을 만들어 내는 그런 가짜 사랑은 너무나 쉽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좀 어색해 하고, 낯설어 하며, 심지어 거부감을 느끼며 왜 나에게 칼을 들이대느냐고 오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구원을 얻은 자라는 사실을 감격 속에서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성숙되고 완성되도록 하기 위해 그를 향해 쏟아 붓는 사랑은 정말 힘이 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모든 이들에게 거부감을 주었고, 실망감을 주었으며, 오히려 그들의 모든 희망을 다 꺾어버린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큼 큰 사랑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달게 져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공부하세요. 복음을 이해하십시오. 그리고 그 복음 속의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예수님이 지금 보좌 우편에서 그 일을 돕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감사하거든 여러분의 이웃을 여러분의 몸처럼 사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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