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신경강해

사도신경17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11:24

사도신경17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벧전4:5-6)

5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6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 우리가 공부할 부분은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부분입니다.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제가 새벽 예배를 위해 교회에 도착해서 제일 처음 하는 일은 세상의 모든 빛이 차단이 된 사무실 안쪽에 있는 작은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시간이 참 좋습니다. 세상과 철저하게 구별된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독대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신자들만의 특권이지요. 그렇게 기도를 하기 위해 앉아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하고 조용히 묵상을 합니다. 그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김없이 묵상의 화두로 올라오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저는 이미 요한계시록 강해를 끝냈기 때문에 마지막 때에 일어날 하나님의 심판의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매일같이 하나님의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에 대해 묵상과 기도를 하고 있는 터라 하나님의 심판에 관해서는 그 어떤 설교보다 할 말이 많았습니다.

그것을 좀 더 학문적으로 체계를 세워 정리를 할 요량으로 3주 전부터 부랴부랴 종말과 심판에 관한 교부들의 글들과 독일 신학자들의 논문들과 여러 책들을 거의 900불 어치 정도를 온라인으로 구입을 해서 심판에 관한 내용들을 발췌해서 읽고 또 읽으며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무려 삼 주일을 끙끙대며 매달렸음에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명료하게 정리가 된 책이나 논문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거의 다 뜬 구름 잡는 식의 추측이나 상상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차라리 성경을 찾아가면서 성경에 나오는 것만 정리를 해서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해 드리기로 하고 어제 저녁부터 설교 원고를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아주 쉽고 간단하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설명을 해드릴 테니 잘 들어보세요.

 

최근에 ‘2012’라는 영화가 개봉이 되었습니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영화는 자연 재해로 인한 인류의 멸망을 다룬 아주 무서운 영화입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현대판 노아의 방주와 같은 그런 영화입니다. 컴퓨터 그래픽 효과가 엄청나게 사용이 된 그런 영화여서 그런지 지진이나 해일 등으로 땅이 내려앉고 바다가 요동을 치는 그런 장면들에서는 정말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실감이 났습니다. 저는 이러한 종류의 영화, Deep Impact, Tomorrow, Core, 2012 같은 인류 멸망에 관한 내용을 담은 영화가 나올 때마다 은근히 기대를 하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러한 영화를 보면서 인류의 마지막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 등을 갖고, 너무 현실에만 얽매여 있는 자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돌아보며, 자신들의 구원에 대한 관심을 미미하게나마 가지게 되면 참 좋겠다는 그런 기대 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러한 무시무시한 인류의 종말을 영화로 보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건 그냥 영화일 뿐이지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는 것이지요.

아니,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조차도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대해서는 그다지 크게 관심을 두고 살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참 심난 합니다.

 

성경은 분명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며 그 때에는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임을 반복하여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9:27)

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딤후4:1)

1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살후1:6~9)

6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8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9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보시다시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붙들지 못한 이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고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천사가 예수님의 승천을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한 말 기억나세요?

(1:10~11)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부활의 몸을 입으시고 모두가 볼 수 있게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영광, 즉 구름 속으로 들어가신 것처럼 다시 공개적으로 오실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직접 그러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24:30)

30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러니까 심판을 위한 예수님의 재림은 단 한번 공개적으로, 세상 모든 족속들이 볼 수 있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자 들의 말처럼 종말에 예수님의 은밀한 재림이 한 번 있고, 그와 동시에 성도들이 휴거가 되며, 다시 한 번 예수님의 공개적인 재림이 있을 것이라는 이중 재림 설은 얼토당토한 말인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미래의 어느 날 공개적으로 이 땅에 다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게으른 우리의 다급한 질문은 ‘과연 그 분이 언제 오실까?’가 되겠지요? 왜냐하면 평소에는 대충 살다가 그 때에 맞춰서 열심히 심판을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영악한 제자들도 주님께 그 날에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가를 물었던 것입니다.

(13:3~10)

3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 묻자오되

4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5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6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7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8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9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 되려 함이라

10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제자들이 예수님께 종말의 때에 나타날 징조를 묻자 예수님께서 네 가지의 징조를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도 그 징조를 잘 공부해서 마지막 때에 낭패를 당하지 않도록 준비를 하자고요.

 

보시다시피 그 첫 번째 징조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교회를 가짜복음으로 미혹을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은 이미 예수님의 초림 때부터 있어왔던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수많은 가짜 메시아가 출몰했고 예수님의 승천 직후에도 여전히 가짜 메시아, 가짜 선지자들이 가짜 복음으로 교회를 미혹했습니다.

(요일2:18)

18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요일4:1)

1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 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이렇게 이미 사도 요한의 시대에 많은 적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교회를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그러한 적그리스도들과 거짓선지자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와 교회를 미혹했습니다. 종교 개혁 이전의 로만 가톨릭이 그러했고, 작금의 성공주의, 물질주의, 번영의 신학 등이 그러한 것이며, 신비주의와 자유주의, 자연주의, 다원주의 등이 그러한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 번째 징조로는 우리가 주님의 재림의 때를 추측하여 가늠해 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지요?

 

그렇다면 이제 두 번째 징조를 한 번 보겠습니다.

(13:7-8)

7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8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심판의 날에 관한 두 번째 징조는 전쟁과 지진과 기근입니다. 쉽게 말해서 전쟁과 자연재해와 극한의 이기주의로 인한 약자들의 굶주림입니다. 그러한 전쟁과 자연재해도 예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있어왔던 것들입니다. 지난 3,000년 동안 역사서에 기록된 공식적 전쟁만 33,00회라고 합니다. 작은 국지전 같은 것까지 포함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숫자가 되겠지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매년 각기 다른 커다란 전쟁을 치르며 지금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지진과 해일과 가뭄, 전염병 등의 재난도 인류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바로 그 때부터 있어왔던 것들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 징조로도 예수님의 심판의 날을 추측해 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 번째 징조는 무엇입니까? 성도들의 고난입니다.

(13:9)

9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 되려 함이라

그런데 성도들의 고난도 인류 역사 내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왔던 것입니다.

(11:35~38)

35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36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 하였느니라

이렇게 구약을 살던 성도들조차 이미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 번째 징조도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가늠할 척도로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 징조를 볼까요?

(13:10)

10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제가 지금까지 방문했던 모든 선교 단체의 벽에 바로 이 구절이 걸려 있었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심판이 오기 전에 복음이 만국에 전해져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정말 그렇습니까? 이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말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부족들이 선교 활동을 통해 복음을 들은 이후에라야 주님이 오실 수 있다는 그런 말씀일까요? 도대체 모든 민족의 정의가 뭡니까? 모든 민족의 구성원들이 전부 다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 민족 중에 어떤 한 사람만 들어도 그건 그 민족이 복음을 들은 걸로 해 주겠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사도행전이 어떤 책입니까?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영과 함께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1:8)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바로 이 예수님의 말씀이 사도들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일은 사도시절에도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예루살렘 교회가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러자 그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집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로 복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8:1)

1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그리고 그렇게 흩어지는 과정에서 빌립 집사가 땅 끝의 사람인 아프리카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고, 사도 바울은 당시 사람들이 땅 끝이라고 생각했던 유럽 전역에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땅 끝을 향해 전해지는 복음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진 것은 이미 사도시대에도 이루어진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땅 끝까지, 만국에 복음이 전해진 후에야 주님이 오신다는 말씀도 재림의 때, 심판의 때를 추측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성경의 독자인 교회들에게 과거부터 늘 있어왔던, 그리고 당시에도 번번이 일어났던, 징조로 쓰기에는 깔끔하지도 못하고 선명하지도 못한 그러한 징조들을 주신 것일까요?

주님은 지금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당신이 승천하신 후부터 매일 매일을 심판의 날로 여기며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깨어서 살라는 의미에서 그러한 징조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 징조들이 벌써 매일 매일 일어나고 있었던 것들이니까요. 마치 에녹이 무드셀라를 낳고(이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매일 매일을 심판을 준비하며 살았던 것처럼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삶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 하지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잖아요? 그게 바로 성도의 삶을 모형으로 보여준 사건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을 사는 우리 또한 바로 내일이라도 우리 주님께서 오실 수 있다는 마음으로 오늘을 이기며, 인내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 사정과 현실이 아무리 암담해도 주님 오시면 다 끝난다는 그런 심정으로 오늘을 이기셔야 하는 것입니다.

(24:36~41)

36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 이니라

혹자들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징조를 구하면서, 그러한 징조가 보이면, 그 때부터 만사를 제쳐두고 기도에 힘쓰거나,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거나, 착한 일을 하거나, 봉사와 구제에 힘쓰며 살겠노라는 얄팍한 잔머리를 굴리곤 합니다. 이왕이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기도하다가, 혹은 예배를 드리다가, 혹은 찬송을 부르다가, 혹은 착한 일을 하다가 만나면 훨씬 그림이 좋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읽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보시면 마지막 심판의 때에 성도들이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가 명확하게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40절과 41절을 보시면 한 사람은 휴거를 당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는데 둘 다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둘 다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둘 다 맷돌을 갈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있고 한사람은 밭에서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일상을 살고 있었습니다. 종말의 심판의 모형으로 성경에 나타난 노아의 홍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들 일상을 살고 있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있었습니다. 노아의 식구들도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게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노아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상이 그의 인생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보같이 방주를 만들고 있었고, 그 방주 만드는 일을 위해 먹고 마시고 시집도 가고, 장가도 간 것이고, 밭도 갈고, 맷돌도 돌린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날마다 대해야 하는 일상이 있습니다. 우리도 날마다 일을 해야 하고, 먹어야 하고, 마셔야 하며, 시집도 가고, 장가도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일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 살던 사람들은 전부 홍수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 일상을 열심히 살던 이들은 방주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날 우리 성도들이 만들어야 할 방주는 무엇이겠습니까? 방주는 사실 아무 쓸모가 없는 배입니다. 방주에는 돛도 없고, 닻도 없으며, 방향키도 없습니다. 자기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갈 수가 없는 배입니다. 서고 싶어도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노아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같은 짓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날로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중에 세상 사람들에게는 전혀 쓸모도 없고, 활용할 가치도 없으며, 오히려 그걸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보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전혀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붙들고 이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하며 사는 이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바보취급을 받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 십자가를 자기 마음대로 개조를 하기도 합니다. 무력하고 힘없는 십자가가 아닌, 기적과 능력의 십자가로 개조를 해서 그 십자가를 세상의 힘을 얻어내는 강력한 것으로 재탄생 시킵니다. 그게 번영의 신학이며, 신비주의이며, 성공주의, 고지 론이며, 긍정의 힘 같은 것들입니다. 만일 노아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배를 짓다가 자기의 지혜를 보태서 방주에다가 돛도 만들고, 방향키도 만들고, 닻도 만들어 달았다면 그 방주가 방주의 역할을 제대로 했겠습니까? 아니요. 노아는 비바람이 치고 천둥이 칠 때마다 자기의 생각대로 돛을 조정하고 방향키를 돌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방주는 하나님의 목적지를 향해 갈 수가 없어요. 인간의 생각으로 움직이는 방주는 곧 홍수 속으로 침몰해 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붙들고 자기 부인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나의 야망과 나의 소원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무력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내 삶의 방향키를 완전히 주님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건강도 아니므로 난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간절히 바란다는 순종의 고백이 바로 십자가만 붙들고 있는 자기부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건 세상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으로 볼 때, 바보 같은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만이 심판을 면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바보 같은, 어디에다가도 쓸모없는 방주만을 의지하여 자신들의 인생을 걸었던 노아와 그의 식구들을 생각하시란 말입니다. 종말이 없다면, 심판이 없다면 그까짓 쓸모없는 방주 같은 것 안 만들면 그만입니다. 그렇게 힘든 십자가와 자기부인의 삶, 안 살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그 쓸모없는, 바보 같은 방주가 완성이 되자 심판이 임했듯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그 바보 같은 십자가를 오롯이 붙들게 되는 그 날, 하나님의 심판이 도적처럼 임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행복과 우리의 만족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것을 가슴 속에 명심을 하고, 그 사실을 세상에 선포하고 선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삽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가정과 직업과 이웃 속에서 그들은 열심히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져야 하기 때문에, 직장에서도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 잔머리를 굴리며 불성실하게 일을 한다거나, 직장 복사기로 교회 주보를 몰래 찍어 온다거나 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건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직장을 이용하여 자기의 유익을 챙기는 것입니다. 그게 돛이 달린 방주처럼 개조된 십자가인 것입니다. 오히려 성도는 그 직장에서 최고로 성실하고 최고로 희생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가정에서도 자신의 유익을 챙기느라 다른 이들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가정에서도 열심히 섬기며, 품어주며, 사랑해 주는 삶을 사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심판과 종말을 기다리며 사는 이들은 열심히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일상을 삽니다. 성도는 절대 대충대충 일상을 살다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대충대충 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러한 성도의 열심은 그 일상 자체를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의 일상은 심판 후의 삶을 준비하는 열심으로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여러분이 이 땅에서 모은 재물이 쓸모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여러분이 이 땅에서 얻은 관직이나 명예가 통용이 될까요? 안 될까요?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낸 모든 업적과 소유와 명성과 인기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그 순간 모두 타 버릴 것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십자가만 온전히 붙들게 되는 데에 한시적으로 사용되는 소품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세상의 힘이 하나님입니다. 제가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면 완전히 소멸되어 멸망할 것들이, 우상이 되어 하나님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상태를 묘사하는 성경구절이 어디에 나올까요?

(24:15-16)

15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6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 지어다

여기에서 ‘멸망’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에레모시스’라는 헬라어인데, 그 단어는 ‘황폐, 멸망, 소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가증한 것’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브델뤼그마’는 ‘우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멸망될 우상이 거룩한 예수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있을 때, 그 때가 마지막 때라는 말입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임할 때 모두 멸망해 버릴 이 세상의 힘들이 지금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잖아요? 이제 주님 오실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에게 항상 깨어서 준비하라고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예고 없이 도적처럼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 믿음으로 보이거든 산으로 도망가라고 하십니다. 그 말은 이 세상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서 전부 수도사처럼 살라는 말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에서 마음을 거두어들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도망할 지어다’ 그게 자기 부인이며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이 세상은 멸망의 가증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심판의 땅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거기에 마음을 두고 목숨까지 걸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이 어찌 코미디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 밑 구절을 보세요.

(24:17-18)

17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18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 지어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성취해 놓은 자기 물건, 자기 소유, 자기 명성, 그런 것에 미련을 두고, 마치 롯의 아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돌아본 것처럼 마음을 거두지 못하면 심판으로 멸망당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세상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이를 때까지 한시적으로 존재하며 우리의 거룩을 위해 쓰이다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전혀 필요가 없는 그런 것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뒤 돌아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지고 가봐야 하나도 쓸 것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만 꼭 붙들고 있으면 됩니다. 다른 것은 다 멸망의 가증한 것들입니다. 그것들에게 속지 마세요. 그 가증한 것들에게 속아서 예수님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만 간절하게 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우리가 이 땅에서 무언가 열심을 부리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에 못 들어갈 것 같은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양과 염소의 심판 이야기입니다.

(25:31~36, 40)

31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40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보시면 예수님께서 오른편의 양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당신이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었을 때에 양들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예비 된 나라인 천국을 허락하시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성도들의 구제나 선행을 독려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만일 그러한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면, 예수 안 믿는 사람들 중에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이 구절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40절을 잘 해석해야 합니다. 40절을 보시면 양들이 을 보시면 양잘 대접을 한 사람들을 ‘내 형제’ 즉 예수님의 형제인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불특정 다수가 아니란 말입니다. 알 수성도의 을웃 사랑이 교회로 한정되는 것과 같은 그런 원리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별명은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 이 말씀을 곡해하여 여 사씀은 예화들을 많이 나왔지요?것입나가는 앰은를 잘 대접하고 후대를 하여 보냈더니 꿈속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오늘 너 아마났는데 네가 잘 대접하여주어서 내가 참 다마웠다’고 말씀을 하셨다느니, 길에서 얼어 죽어 가는 문둥병자에게 입니, 던 코트 아벗어서 입?것주었더니 곧 그 문둥병자가 예수님으로 변신해서 ‘고맙다. 내가 네 코트가 아니었으면 이곳에서 얼어 죽을 뻔 했구나’ 뭐 이런 신파조의 예화들을 참 많습니다. 여 분, 정 것예수님이 우리 아시험하시기곡해하여날마다님이 우리앰은로, 문둥병자로 변장을 하고 여기저기 나타나시는 분이라면 그분이 좀 측은하지 않아요?

이 양과 염소의 심판은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양과 염소의 이야기는 성도의 세계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도는 다른 성도가 굶주리고, 목마르고, 병에 걸리고, 감옥에 들어가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쯧쯧 저 사람 뭔가 하나님께 잘 못한 게 있어서 저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 거야’ 라든지 ‘믿음이 부족하면 하나님께서 절대 도와주지 않으셔’라는 등의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 천국 형제가 예수님의 십자가 삶과 고난의 삶을 직접 몸으로 살아내면서 자기부인과 십자가 신앙을 견고히 다지고 있구나’하며 그의 삶을 예수의 삶으로 인정할 때, 그것이 바로 양들의 세계관이라는 걸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걸 알고 있는 자들이 바로 양이며 천국은 그러한 양들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들을 약자로, 바보로, 힘없는 자로 볼 테지만 너희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수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의 삶 속에서도 그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면 너희들의 삶 속에서 예수의 삶이 나타나는 것으로 옳게 인식하고 감사함으로 잘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러한 삶을 경험하면서 이 세상의 덧없음과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배워가며 자신이야말로 ‘지극히 작은 자’라는 자각을 하는 이들이 예수님의 ‘형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자’와 ‘형제’라는 말이 함께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착한 일을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예수와 예수의 십자가를 찾아내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20장의 흰 보좌 심판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가? 계시록 20장에 보면 심판 대 앞에서 모든 인간들이 심판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들의 심판의 기준이 어떤 책에 기록된 이 땅에서의 그들의 행위입니다.

(20:12~15)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여기에 보면 생명책과 행위들이 기록된 책이 나옵니다. 그 둘은 다른 책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이 심판을 받는데 그 행위가 기록된 책의 기록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혹자들은 ‘그러니까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한다’고 우기는데, 15절을 보면 그 행위의 책과 상관없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심판에서 제외가 됩니다. 그러면 한 번 보자고요. 그 생명책은 언제 작성이 된 것입니까?

(1:4~5)

4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 생명책은 이미 창세전에 작성이 된 책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그 책을 근거해서만 주어집니다. 그런데 심판은 사람들의 행위가 적혀있는 책을 근거로 부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행실이 적혀 있는 그 책은 인간들의 구원의 근거로는 쓰일 수 없고 단지 멸망의 근거가 되는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 말은 쉽게 말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인간의 행위는 심판의 근거로밖에 쓰일 수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3장의 불에 타버리는 공력의 이야기가 바로 이 이야기인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다 불타 버릴 것입니다.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시록 20장의 흰 보좌 심판의 이야기는 착한 행실을 많이 하여 구원을 받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정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손톱만큼이라도 의지하는 이는 멸망의 심판으로 던져진다는 복음의 진수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이런 구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5:29)

29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여기에서의 선한 일을 도덕적, 윤리적 선한 일로 이해를 하시면 성경 전체가 일관성이 없어집니다. 그렇지요? 예를 들어 위 구절과 로마서 9 11절은 완전히 모순처럼 보입니다.

(9:11-13)

11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선택은 착한 일을 한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가 착한 일을 하고 누가 악한 일을 하기 전에 이미 택한 백성을 생명책에 기록해 놓으신단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의 선한 일은 어떤 일인가? 사도행전으로 가면 진짜 착한 일을 하신 어떤 이가 나옵니다.

(10:38)

38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예수님께서 착한 일을 행하셨는데 그 일이 어떻게 나오게 된 것입니까? 성령과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자 착한 일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착한 일이란 하나님의 백성이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게 되는, 창조의 목적 아래로 회복이 되어 돌아가게 되는 과정에서 겪는 모든 삶을 가리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착한 일은 우리가 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에 의해 하늘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길에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든 현실이 다 착한 일인 것입니다.

(1:6)

6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착한 일을 누가 시작하십니까? 하나님이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누가 완성하세요? 하나님이 완성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사람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실까요? 아니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생명책에 택해 놓으신 사람들 속에서만 착한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는 그 착한 일을 완성해 내십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그저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착한 일도 하나님이 하세요. 그렇게 자신이 부인이 되고 기각이 될 때,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의 삶이 밖으로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서 나오는 선한 행위들은 전부 예수님의 삶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착한 일을 하고도 자랑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들에게는 착하게 살 수 있는 능력도 있고, 방법도 알고 있다고 하면서 열심을 부려 행위를 쌓을 때, 그 행위들이 전부 요한계시록 20장의 행위의 책에 기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 의’라고도 부르지요? 죄인들은 그 행위에 의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기위해 열심히 노력하세요. 그리고 열심히 자신에 대해 실망하세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드세요. 그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짜 착한 삶이 여러분 안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착한 일을 하려고 애를 쓰지 말고, 사회를 개혁하고, 불쌍한 사람을 돕고 하는 일을 하기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먼저 배우세요. 그때 진짜 착한 일이 나옵니다. 만일 십자가를 충분이 이해하지 못한 채로 착한 일에 몰두하게 되면 그 모든 행위가 심판의 책에 적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흰 보좌 심판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티끌이 되세요. 낮아지세요. 자기를 부인 하세요. 십자가만 붙드세요. 세상의 힘을 내려놓으시고, 그런 것이 없다고 절망하지도 마세요. 그건 심판의 때에 전부 소멸될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심판의 때는 도적같이 임할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같이 십자가를 붙들고 자신을 부인하며 이 세상의 힘들에게서 마음을 놓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심판이 도적같이 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심판을 준비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는 자로 완성되기 위해 우리에게 시작된 착한 일, 자기 부인의 삶을 인내 속에서 잘 살아내셔서 결국에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을 사는 심판 뒤의 여러분의 삶을 소망 속에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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