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신경강해

사도신경19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11:29

사도신경19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2:11~22)

11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 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새해가 되면 가장 호황을 누리는 곳이 점집입니다. 또 다시 어김없이 찾아온 한 해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가 될 것인가에 관한 궁금함과 대박 인생을 향한 옹골찬 기대심리가 합해져서 토정비결이나 사주, 관상 등을 봐주는 사람들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어제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서 설교 준비를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예수님의 사주를 보았다면 어떤 사주팔자가 나왔을까?’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이미 그 분의 인생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쉽게 거기에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주에는 애정운도 없었고, 재물운도 없었고, 관운도 없었습니다. 사주 용어로 그 분의 삶을 자미두수(전체 삶의 특징)로 이야기하자면, 그 분의 삶은 매일 매일이 삼재(三災)였고, 매일 매일이 원진살에 시달리는 날이었으며, 겁살(劫殺), 재살(災殺), 천살(天殺)이 풍성한 삶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자기 인생이 그렇게 암울하게 풀릴 것이라는 그런 사주풀이를 듣고 기분 좋아 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루라도 빨리 생을 마감하고 싶어 하겠지요.

그런데 바로 그러한 삶이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머리이신 예수님의 삶이었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러한 삶을 사시면서 늘 평안과 기쁨을 담고 사셨다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기 바로 전에도 ‘내 안에 있는 평안과 기쁨을 너희에게 주노라’하고 말씀을 하셨을 정도입니다. 그분은 우리 교회의 첫 열매이십니다. 그 말은 우리 성도들도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이 땅에서 살다가 가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사주팔자의 좋고 나쁨에 의해, 즉 재화의 있고 없음이나, 명성과 인기의 유무, 꿈과 소원의 성취나 실패 등에 의해 평안과 기쁨을 얻고 잃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으로의 택정 받음과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사실로 늘 평안을 누리고 기쁨을 누리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교회는 예수 믿고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 팔자한번 멋지게 고쳐보겠다는 그런 마음은 어서 버리고 예수의 삶을 살면서 예수의 평안과 예수의 기쁨을 가질 수 있는 자로 성숙되어져야 하는 것이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이 땅을 잠시 살면서 세상 적 명성과 부를 쌓아 세상적인 즐거움과 편안함을 추구하도록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이 진짜 행복이라는 것을 경험하며, 배우고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왜 이것들로는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는가?’를 배우라고 주어지는 것이지, 그것들로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아보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돈을 주시는 것은 ‘왜 난 이렇게 많은 돈으로도 이 마음속의 공허를 메울 수가 없는가?’를 경험하게 해 주시기 위해 주시는 것이지 그 돈으로 하나님도 잊어버릴 만큼 행복하고 기쁘게 살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이고,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앞에서 기각당하고 부인 당할 것들이지 우리가 집중하여 추구할 것들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천국을 사는 훈련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다 풍족하게 구비되어 있는 곳이어서 좋은 곳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곳이어서 좋은 곳입니다. 그래서 지금 천상에 존재하고 있는, 천국을 살고 있는 교회가 이 땅에서도 똑같이, 하나님만으로 좋고 행복한 천국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교회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이 바로 그 삶을 먼저 살다가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생을 하나님 아버지와 동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수시로 내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다고 말씀을 하심으로 해서 당신은 늘 하나님과 동행하고 계심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삶에 고난이 닥치고, 모함과 배반이 닥치고, 십자가가 들이 닥칩니다. 상황과 환경이 지옥 같은 어두움이 되었는데 그 분 안에 아버지와의 동행으로 말미암는 기쁨과 평안이 있었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모진 환경과 어려운 현실을 통과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난 행복한 사람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자로 지어져 가고 양육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곳에 계신 기혼 여성분들에게만 여쭤 볼게요. 여러분 좋은 집에 살고 싶으시지요? 여러분이 원하는 아주 좋은 집이 생겼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런데 그 좋은 집에서 시 어머니와 시누이가 평생 함께 산다면 그 좋은 집이 정말 행복한 집이 될까요? 좋은 곳은 내가 사랑하는 이가 나와 함께 있는 곳이며, 나를 끔찍이 사랑해주는 이가 나와 함께 있는 곳을 좋은 곳이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곳이라 할지라도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이가 24시간 함께 붙어 있어야 하는 곳이라면 그곳은 곧 지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도는 인생을 통하여 그것을 배우고 가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삶을 통하여 배우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먼저 그 삶을 살다 가신 것이고, 우리가 그와 똑같은 삶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아들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왜 교회를 예수님을 머리로 한 하나의 지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교회는 예수와 한 몸인 하나님의 장자들임을 말씀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떼려야 뗄 수없는 하나의 존재로서 예수의 삶을 그대로 살게 됨을 아울러 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여러분이 궁금해 하시는 사주팔자 대신에 올 한 해 여러분이 살게 될 여러분의 앞날을 명확하게 예언해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올 한해에도 예수님의 삶을 좇아 세상 사람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수난을 당하실 것이며, 세상과 의사소통도 잘 안 될 것이고, 많이 외로우실 것이며, 매일 매일 작은 십자가들을 져내며,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행복의 근원이라는 것을 또 한 수 배우시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것 궁금해 하지 마세요.

성도는 그렇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의 본질에 대해 올바로 이해를 하고 무한 경쟁과 전쟁과 다툼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평화의 사람, 섬김의 사람, 기쁨의 전달자로 구별되어지고, 지어져 가고, 완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집합적이고 집단적이며 유기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敎會)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은 ‘거룩한 공회를 믿습니다.’라는 고백과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바로 그 고백이 교회의 존재양태와 지향점에 관한 고백인 것입니다.

 

먼저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거룩한 공회는 ‘Holy catholic church’입니다. 여기에서 catholic 이라는 단어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 말은 로만 가톨릭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catholic church 는 보편적 교회, 우주적(universal)교회를 말합니다. 따라서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말은 각 지역에 가시적으로 산재해 있는 가시적 지 교회를 모두 아우르는 전체로서의 불가시적 천상의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 역사 속에서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계속 확대되고 확장되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천상의 교회는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 속에서 하나로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천상의 교회가 이 역사 속으로 각기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며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공회, 하나님의 보편적 교회’를 믿는다는 고백은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을 인정하지 않고는 절대로 할 수없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 거룩한 공회 안에는 아담도 들어있고, 아벨도 들어있고, 노아도 들어있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엘리야, 바울도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공회 안에는 여러분과 저도 들어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보편적 교회로 창세전에 부름을 받은 것이고,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여 이 땅에 잠시 내려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인격과 이성을 간직한 채 배우고 가는 것입니다. 그걸 믿는 것이 ‘거룩한 공회’ 즉 보편적 교회, 우주적 교회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 안에 함의 되어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22:32)

32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었지요? 그리고 아직 육신의 부활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을 가리켜 산자의 하나님이라 말씀을 하심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지금 살아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보편적 교회는 이미 천상에, 다른 차원으로 완성이 되어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들이 벌써 살아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나타난 엘리야와 모세가 천국의 육신을 입고 그 자리에 서 있었지요? 아직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들이 찬란한 천국의 옷을 이미 입고 있었습니다. 그냥 영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영원 속에는 이미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어 있는 것이고, 거기에 창세전에 부름 받고 택함 받은 교회가 집합적이며 유기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12:22~24)

22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24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잘 보시면 히브리서 기자가 성도들이 이른 곳을 나열하는데 그곳이 장자들의 총회인 교회라고 합니다. 하늘의 장자들인 성도가 이미 총회로 모여 있습니다. 하나의 전체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곳을 교회라 부르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잔치가 벌어져 있고 축하객으로 천만천사들이 줄지어 서 있으며,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 있는 곳이랍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교회를 가리켜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도 부릅니다. 성도는 이미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르러 있으며, 그곳에서 의롭게 된 영들과 함께 존재하는 무리라는 것입니다. 그게 거룩한 공회, 보편적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으로 가면 그 하늘의 예루살렘이 땅으로 내려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21:2)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새 하늘과 새 땅이며, 동시에 교회를 지칭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이미 그 새 예루살렘에 당도해 있다고 말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교회를 천상에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시간과 공간, 즉 천지를 창조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의 저주받은 육신을 입혀 이 땅으로 내려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역사와 인생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을 해야 하는지, 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되기 위한 모반을 해서는 안 되는지를 배우고,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완전히 항복하고 순종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교훈은 역사 전반을 아우르며 속속들이 배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다보면 예루살렘이 교회인지 예수님인지 헛갈릴 때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성경은 교회와 예수를 하나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지금부터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고 여종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잉태치 못하고 구로치 못하던 사라를 통해 기어코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주십니다. 이삭은 인간 측의 노력과 꾀를 상징하는 이스마엘과 대비되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게 되는 약속의 백성들인 교회를 뭉뚱그려 상징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따라서 이삭은 그 자체로 새 예루살렘이어야 합니다. 새 예루살렘은 교회니까요. 그런데 바울은 그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가리켜 예루살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4:21-31)

21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3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26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 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자유 하는 여자, 즉 예루살렘이 이삭을 낳았는데 그 이삭이 바로 우리 성도의 대표요 상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의 예루살렘은 십자가로 교회를 낳은 예수님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그런 바울이 다른 곳에서는 그 약속의 자녀 이삭과 그로부터 말미암게 될 아브라함의 후손이 교회를 낳은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고도 합니다.

(3:16)

16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여기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자손은 이삭과 이삭으로 대표되는 교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이삭으로 상징되었던 자손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예루살렘이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다는 소리가 되지요? 그런데 예루살렘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예수를 낳았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설명은 요한계시록에 잘 나와 있습니다.

(12:4~6)

4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여기에서 여자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여자가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 예수를 낳습니다. 예수는 교회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으므로 여자가 예수를 낳는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인 교회가 예수를 낳는다는 것에는 또 다른 메시지가 있다고 했지요? 여자인 교회가 해산의 고통을 통하여 예수를 낳는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산의 고통과 같은 고난을 통과하며 순종의 아들인 예수, 즉 하나님의 아들로 완성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가 예수를 낳는데, 히브리서 기자나 사도 요한은 낳아진 자를 가리켜 예루살렘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과 성도의 탄생을 혼돈스러울 정도로 혼용하여 표현을 합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이 세상에서의 삶은 성도의 탄생과 삶을 그대로 모형 화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시며 그 자신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생과 사와 부활과 승천은 그대로 성도에게 적용이 되는 것이고, 그러한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탄생과 성장과 완성을 그대로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앞서 살폈던 예수님의 사주팔자가 바로 우리의 사주팔자라는 말입니다.

(고후4:10)

10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표준 새 번역)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 즉 십자가의 삶이 따라다닌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와 예수는 한 영을 가진 한 몸이며, 하나의 유기체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는데 우리가 또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입니까?’하고 질문을 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사해준 은혜의 십자가일 뿐 아니라 그 십자가의 삶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우리의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지어져 가고 완성되어지기 위해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을 통과하면서 ‘나는 절대 신이 아니구나,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아담의 시도는 정말 우매한 발상이었구나’를 배우는 것이고, ‘내가 이 세상에서 신처럼 받들고 살던 우상들이 결코 나의 우상이 될 수 없는 것들이었구나’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추어 죽기까지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12:27)

27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은 그 자체로 하나이지 절대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금 하늘에 하나님의 백성들과 예수님이 한 몸으로 완성되어 존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회에게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말씀은 천상의 교회와 지상의 교회는 보편적 교회로서 하나라는 말씀으로 하늘의 교회가 땅에 존재하고 있음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 이 땅에 잠시 내려와 여전히 하늘의 장자들의 총회에 속한 자들로 무언가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 교육장에서 여러분의 신분을 망각하고, 교육장 밥맛이 형편 없다느니, 교육장의 난방 상태가 왜 이 모양이냐느니, 훈련복 색깔이 참 촌스럽다느니 그러고 계시다면 얼마나 우습습니까? 하나로 완성이 된 보편적 교회가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 나그네 길에서 보편적 교회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이 세상의 현실과 현상에만 집중하고 사는 건 성도의 올바른 삶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십자가를 통과하며 예수라는 동일한 목적지를 향해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고 있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따라서 교회에는 세 가지의 아주 중요한 특성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교회의 통일성입니다. 교회는 이미 창세전에 불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1세기의 교회나 5세기의 교회나 20세기의 교회가 다 한 교회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교회나 미국의 교회나 아프리카의 교회도 모두 한 교회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여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가시적 지역 교회들은 모두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는 장유유서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한 몸이며, 하나로 부름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인 교회는 반드시 전제조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의 가르침이며, 하나의 신앙고백입니다.

(4:13)

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렇지요? 교회는 하나의 가르침에 의해 하나의 고백을 하는 존재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가르침을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동일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것이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2:20)

20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런데 사도와 선지자들의 가르침인 성경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만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4:27)

27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래서 바울은 교회의 터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분명히 못 박아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고전 3:11)

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그러니까 사도와 선지자들이 교회에게 가르친 것은 오직 예수만이 행복의 근원이며 오직 예수만이 그리스도이시며,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야지 이 세상 다른 것들을 우리의 주인으로 삼아 그것들이 우리를 다스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만이 그리스도시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16:16~18)

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진리는 단 한분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런데 긍정의 힘이니 고지론이니 하면서 엉뚱한 진리들을 내어 놓으면서 예수 말고도 당신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지천으로 많다는 가짜 복음을 내 놓는 곳은 우리와 하나가 아닙니다. 교회는 올바른 가르침 안에서 하나의 통일성을 지녀야 진짜 참다운 보편적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와 한 몸이기 때문에 예수가 가신 길을 그대로 좇아 예수에게 당도해야 한다는,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지 않는 교회는 우리와 하나로서의 교회가 아닙니다. 초대교회도 우리와 하나의 가르침을 배웠고, 카타콤의 교회도 그러했으며, 우리 서머나 교회가 그러합니다. 그렇게 교회의 올바른 사도적 가르침이 교회의 통일성을 결정짓는 유일한 잣대인 것입니다.

 

두 번째가 교회의 보편성입니다. 교회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누구하나 자기의 의나 실력이나 노력을 보태서 구원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 적으로 잘나가는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고, 아무리 못나 보이는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구원이 된 사람입니다. 그렇게 창세전에 하나로 구원을 받은 교회가 이 땅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맡아 잠시 살다가 천상의 교회로 복귀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3:26-28)

26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교회로 한 번에 선택이 된 것이고 한 몸으로 유기체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아는 이들이 이 땅에 잠시 사는 인생 속에서 차별을 하고, 상대적 우월감을 즐긴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정말 교회가 뭔지 아는 사람일까요?

 

세 번째 교회의 특성은 거룩성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구별되고 선택된 무리라는 의미에서 교회는 거룩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거룩하게 구별된 이들은 거룩하게 이 땅에서 고립이 되어가고, 외로워지게 되고, 나그네 취급을 받게 됩니다. 거룩이라는 말 자체가 구별이라는 말이니까요. 그게 거룩한 무리들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에 있는 장자들의 총회이지 이 땅에서 세상의 장자가 되어 사는 이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점점 이 땅에서 대화도 안통하고, 세상 사람들과 세상 적으로 어울릴 수도 없는 사람들이 되어져 가야 합니다. 그게 거룩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세상과 너무 친하게 잘 지내고 있다면 혹시 여러분은 거룩한 교회가 아닐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벧전1:14~16)

14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15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이렇게 교회는 거룩이라는 목표지점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하나님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아무런 구별이 안 되게 여전히 세상 사람들이 좇고 있는 사욕을 좇고 있다면 그건 언어도단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 거룩한 삶을 좇게 되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거룩하게 지어지게 됩니다.

(17:16~19)

16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17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9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꾸 눈을 돌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추구하고 지향하게 되는 데 유일한 길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를 설명하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뜨게 만들어 하늘의 거룩한 자들로 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공부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교회의 통일성과 보편성과 거룩성을 잘 배우고 실현해 가는 성도의 모든 삶 속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 성도의 교통입니다. 성도가 교통을 한다는 것은 한 복음을 전해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한 몸으로서 사귐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성도의 고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교제(코이노니아)도 역시 올바른 가르침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일1:1-3)

1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3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성도의 사귐은 3절의 말씀처럼 먼저 생명의 말씀을 전해 들어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사귐이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제되지 않은 교제나 사귐은 친목계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이미 그렇게 천상의 교회로, 장자들의 총회로 한 몸이 되어 있으며, 이 땅에서는 서로의 것을 비워서 상대방의 유익을 챙기는 십자가의 도를 훈련하여 하나님 나라로 입성을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참 목적임을 아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올바른 복음 아래에서 서로의 것을 아낌없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교제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자기를 비우고, 부인하는 이들이 자기 것으로 다른 이의 유익을 구하는 행위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천국 백성의 삶의 원리이니까요. 그게 천국 백성의 교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도로 부르신 사람들 간에도 가난한 사람과 부한 사람의 역할을 나누어 주신 것이고, 강한 사람과 연약한 사람의 구별을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열심히 연습해 보라고 그렇게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많이 가진 이들은 한 몸으로 구원을 받은 교회가 어렵고 힘들지 않을 수 있게 흔쾌히 나눌 수 있어야 하고, 연약하고 가난한 지체들은 한 몸으로서의 교회에게 부끄러움 없이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이 절대적 빈곤에 처해 있으면서도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힘들어 했을 때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고후8:1-5)

1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2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마게도냐 교회는 큰 핍박을 받던 교회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시련과 극한 가난이 풍성한 연보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시면서 힘에 지나도록 해 보신 일이 어떤 일이 있습니까? 힘에 지나도록 놀아본 적은 있고, 힘에 지나도록 취미생활을 즐긴 일은 있어도 힘에 지나도록 자기 것을 비워 본 적은 없으시지요? 교회는 힘에 지나도록 자기 것을 비워내는 삶을 열심히 훈련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바로 그러한 노력이 마게도냐 교회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교육용 도구로 쓰였던 것이 시련과 극한의 가난이었던 것입니다. 극한의 가난을 통과하며 겪었던 십자가의 삶이 그들의 세상 소유를 서슴없이 털어내어 한 번도 보지 못한, 일면식도 없는 어떤 교회를 돕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교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헌금을 교제라는 말과 혼용해서 쓰기도 합니다.

(고후9:13)

13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여기서 후한 연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코이노니아’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자기 것을 털어서 마치 자기의 몸을 보살피듯 보편적 교회를 섬기는 일을 ‘후한 교제, 풍성한 교제’라고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천상에서 그렇게 살게 될 것입니다. 나의 것을 비워 내 몸인 내 형제 자매를 위해 힘에 지나도록 섬기는 삶, 그 교제의 삶을 완벽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그걸 성도의 교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교통하고 교제하는 자로 반드시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천국의 교제를 열심히 연습하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자신의 것을 비워내는 장이지 자신의 유익을 위해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성도의 교제를 기뻐하십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연보, 교제를 많이 거두는 것이라 합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거두어야 할 것이 바로 그러한 교제로 인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고후9:6-7, 12-14)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12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14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이 말씀은 헌금을 많이 심으면 이 세상에서 많이 거두게 해 주시고, 헌금을 적게 심으면 이 세상에서 적게 거두게 하신다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적게 심는다는 말은 억지로 하는 연보, 즉 하기 싫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삐지시면 이 세상 것을 많이 안 주실 것 같아서 골을 부리면 하는 연보를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많이 심는다는 것은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힘에 지나도록 세상 것을 비워내는 것을 많이 심는다고 하는 것이고 거기에 대한 거둠으로 성도들의 감사와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게 많이 거두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많이 심고 많이 거둔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들의 예를 들면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많이 심고 많이 거두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은사와 소유라는 것을 주시지요? 왜 주시는 것입니까?

(4:7~12)

7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우리의 은사나 소유를 털어서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온전하게 세우게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은사나 소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교회 각자에게 주시는 은사나 소유는, 나누고 비워서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라고 주시는 것이지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 혼자 살찌우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 같은 사람은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 공부를 하여 성도들을 교육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을 하는 것이며, 부엌일을 맡은 사람들은 부엌에서, 많은 물질을 맡은 사람들은 그 물질을 사용해서, 훌륭한 음악적 재능을 가진 사람은 그러한 재능을 사용해서 다른 지체들을 섬김으로 해서 예수의 몸인 교회가 진짜 예수의 삶인, 십자가의 삶, 자기부인의 삶을 사는 자로 완성이 되는 데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난 교회에 가서 얻는 것이 없어서 교회에 안 간다고 하는 사람들은 정말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교회는 내가 뭘 얻어내기 위해 가는 곳이 아니라 내 것을 비워주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한 상황이 아닌데도, 난 말씀만 들으면 된다고 하면서, 교회에는 안 가고 설교만 인터넷으로 듣는 그런 게으른 사람들, 그들은 올바른 교회로 지어져 갈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말씀이건, 뭐건 내가 유익을 얻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비워 다른 이들을 섬기는 훈련을 하러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라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가시적 지 교회를 가리켜 신자의 어머니라고도 부른 것입니다. 교회는 어머니가 계신 가정처럼 자라남의 장이라는 것입니다. 가시적 교회의 불완전함은 오히려 성도의 성숙에 도움이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말씀만 제대로 공부하면 됐지 뭐 하러 교회에는 가서 이런 저런 시험에 드냐’는 식의 그런 발상은 어서 거두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수한 시험을 겪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천상의 주인공이 된 교회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러한 세상의 현상들이나 현실들로 일희일비하지 않고 하나님만으로 행복해 하는 자라는 것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에 나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자기 것을 비워 주시고, 열심히 하나님으로 그 빈자리를 채우세요. 그게 천상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삶이며 예수의 삶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게 잘 안 되거든 무릎 꿇어 기도하시고 ‘그래서 내게 예수의 십자가가 필요했구나’하며 또 한 발 예수님의 십자가로 가까이 가세요. 그게 ‘성도의 교통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의 진의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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