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사도신경강해

사도신경(21)

은바리라이프 2013. 10. 13. 11:31

사도신경(21)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21:1-8)

1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5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8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 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이제 사도신경 강해 마지막 편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긴 시간 우리 성도가 놓치지 말고 믿어야 할 바인, 기독교 교리의 DNA라 해도 과언이 아닌 성도의 신조에 관해 공부를 해 왔습니다. 오늘은 그 모든 내용을 아우르는 결론 부분을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다름 아닌 부활과 영생입니다. 부활과 영생은 기독교의 핵심 교리일 뿐 아니라 우리 성도의 소망의 뿌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도 부활을 언급하면서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자’라고 했겠습니까? 부활은 곧 영생과 직결이 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오늘 부활과 영생, 그 참 의미와 그 둘은 어떻게 연관이 되는 것인지 잘 설명해 드릴 테니까 열심히 들어 주세요.

 

여러분 부활이라는 개념의 전제가 무엇입니까? 죽음이지요?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있는 거니까요. 그러나 부활은 소생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분명 역사 속에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사로나 도르가, 야이로의 딸, 유두고 등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에 관한 기록은 성경에도 많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부활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건 그냥 소생이며 회생입니다. 그들은 다시 죽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불사성, 즉 태초에 아담에게 있었던 immortality를 소유한, 새 영역에서의 생명(eternal life)을 가진, 새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활은 옛사람의 죽음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죽음에서부터 출발을 해야겠습니다. 도대체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오늘 사도신경의 결론이므로 그 죽음과 역사와 부활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구속사 전체의 큰 주제들을 제가 창세기부터 연결하여 성경을 하나로 연결을 해서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특별한 두 나무를 주셨습니다. 하나가 선악과나무이고 다른 하나가 생명나무입니다. 그 두 나무에는 열매가 있었는데 그 중 선악과나무의 열매는 절대 먹으면 안 되는 금기의 열매였습니다. 그 두 나무의 열매는 단순히 어떤 효력과 효능을 가진 그런 신비의 열매가 아니라 그 자체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성례전적 열매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두 나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의중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이십니다. 유일하신 신이십니다. 그런데 그 신께서 피조물과 함께 당신의 능력과 소유와 성품과 누림을 나누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 장자들의 총회, 교회, 성도, 하늘의 예루살렘 등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피조물과 신의 격차는 너무나 커서 하나님 앞에서의 피조물의 존재는 그저 티끌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피조물들이 흙으로, 티끌로 지어지는 그림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티끌에 불과한 피조물들의 버금 왕으로 아담이라는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아담은 그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정복하여 하나님 앞에서의 티끌 됨을 순종으로 보여야 했던 사람입니다. 그걸 ‘안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안식의 현실이 오늘 날 우리의 예배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티끌에서 나온 아담이라는 피조물이 하늘의 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합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신적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피조물 자체에는 그런 능력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오로지 당신의 능력으로 아담에게 신적 능력을 입히셔야 합니다. 그걸 복(바라크)라 하고,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생명력이라고도 합니다. 피조물이 바로 그 하나님의 생명력, 복을 충만히 받은 상태를 영생의 상태라 하고, 그러한 영생이 밖으로 드러난 상태를 성도의 영광(독사)이라 합니다.

그런데 인격과 이성을 가진 피조물이 하나님의 신적 능력과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면 나타나게 되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게 마치 자기에게서 나온 것 인양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로봇이 아니라 생각하고 판단하고 의지를 발휘하는 인격적 존재이 것 인에 하나님의 형상을 취하여 그 분의 능력을 덧입게 되었을 때 자칫 교만의 자리로 떨어질 수 있 교만의 자리로 걸 휘브리스라고 합니다. 피조물이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하여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가려 하 교모든 시도를 말합니다. 그만큼 천상의 교회는 엄청난 존재들입니다.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상태로 존재하고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영원히 살게 될 인격적 존재들인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인격과 이성을 간직한 채, 왜 인간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아서는 안 되는 지를 올바로 배우고 인식하도록 가르치셔야 했습니다. 피조물은 원래 티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연합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면 그냥 티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죄와 사망이라는 소품을 들어 설명을 해 주십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독자성과 무의탁성을 갖게 되면 그것이 곧 죄이며 죽음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으로만 존재하고 살아가야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그 자리를 떠나 다른 것을 의지하고,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며 자신을 주인 삼아 살게 되면 그것이 곧 죽은 상태임을 가르치십니다. 거기에 등장한 것이 바로 에덴의 두 나무 이야기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요한계시록을 이미 공부하셨기 때문에 오늘 설교는 좀 쉬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선악과나무가 없습니다. 그런데 생명나무는 있습니다.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원래 있던 것을 어느 시점에 뽑아 버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원래 선악과가 없습니다. 있었다가 뽑힌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에덴동산을 새 하늘과 새 땅과 혼돈하시면 안 됩니다. 에덴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떤 교훈을 하시기 위해 한시적으로 사용된 무대 세트일 뿐입니다. 그곳은 우리가 회복하여 돌아갈 곳이 절대 아닙니다.

에덴에 심겨졌던 생명나무는 우리가 성찬식에서 사용하는 떡과 포도주처럼 성례전적 의미를 가진 하나의 모형으로서 그 생명나무의 원형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는 교육용 probation 이었던 것입니다.

(2:7)

7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이건 주님이 에베소 교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낙원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파라데이수’는 천국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가 존재하던 그 때에 이미 생명나무가 있는 천국이 있었다는 말이지요? 너희가 이기면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주겠다고 하잖아요?

(22:2)

2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여기는 지금 새 하늘과 새 땅,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 거기에 생명나무가 있는데 그 실과로 만국이 소성케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생명나무 실과는 만국을 살려내는 힘이 있는 어떤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다른 책 요한일서에서 그 생명나무 실과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요일1:1-2)

1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요한은 그 태초부터 존재한 생명을 보았는데 그 생명이 말씀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생명나무 실과가 누구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천국의 생명나무 실과가 이 땅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 생명을 보고 손으로 만졌다고 합니다. 바로 그 성육신 하신 예수 안에 생명나무 실과가 있습니다.

(요일5:11~12)

11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 것이니라

12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11절을 잘 보시면 요한이 예수 안에 들어있는 생명을 가리켜 영생이라고 하지요? 따라서 생명나무 실과는 티끌인 피조물에게 영생을 주는 실과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그 생명나무 실과를 품고 내려오신, 아니 생명나무 실과 자체이신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1:1-4)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따라서 영생은 하나님의 신적 생명이며 그 생명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상으로 선물을 해

주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셔서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그 영생은 어떤 조건과 자격과 공로를 배경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흙이 무슨 자격이나 기능이나 공로나 열심을 내어놓아 아담이 된 것이 아닌 것처럼, 영생은 티끌인 인간에게 은혜로, 무상으로, 선물로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 있을만한 공로나 업적이나 열심을 내어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흙은 그냥 죽어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생을 값없이 주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을 다 갖다 팔아도, 이 우주를 다 처분해도 영생 하나를 못 삽니다. 영생은 그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선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티끌들이 자기들도 힘이 있으며 영생에 도달할 지혜가 있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이고, 바벨탑을 쌓아 영생에 이르겠다고 시도한 저주받은 인간들이며, 제사와 율법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따겠다고 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담 안에 내가 있는 것이고, 이스라엘 안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소품 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전체로서의 피조물의 모습과 결국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티끌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셔야 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지난 수요 예배 때 말씀을 드렸으므로 생략합니다. 그런데 그건 우리 세상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볼 때에는 손해이며 상함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나라를 사는 존재들의 행동양식이며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3:14-16)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티끌 같은 존재에게, 아니 원수 되어 떠난 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영생)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비우고 털어내는 것, 아니 자기 스스로가 저주의 존재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속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바로 그 영생을 주셔서 당신이 누리시는 하늘의 모든 것을 다 누리게 해 주시며 함께 교제하며 연합하여 사시기로 하시고, 천상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게 그 원리와 본질을 역사와 말씀을 통하여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드실 겁니다. 이왕 그렇게 영생의 본질이, 하나님의 신적 생명의 본질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털어서 원수의 유익을 챙기는 것이라면 왜 마귀와 불신자들은 지옥에 보내시는가? 그들도 원수, 우리도 원수, 둘 다 원수였는데 왜 어느 쪽은 계속 미워하시고 어느 한 쪽만 편애를 하시는가? 여러분, 그게 바로 인본주의적 질문인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과 모든 생물이 다 존귀합니까? 그렇다고 대답을 하는 것이 인본주의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존재는 그냥 티끌일 뿐입니다.

(40:17)

17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어떤 무리를 선택하셔서 당신의 생명인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을 하시고 나머지 먼지들은 그냥 소품으로 쓰셔서 당신의 백성들의 교훈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불만 있으세요? 에베소서2 1절을 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을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고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모든 존재는 죽은 흙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비로소 아담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생기를 불어넣기 이전의 아담은 죽어있는 인형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짐승들처럼 ‘네페쉬’, 즉 살아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굳이 그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력을 받았을 때에만 존귀함을 얻습니다. 그래서 열 두 제자를 천상의 교회로 세상에 보내시면서 그들 향하여 숨을 내쉰 것이며, 최초의 교회가 탄생하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도 성령이 바람처럼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생명력이 피조물에게 임하는 각기 다른 모양의 동일한 그림인 것입니다. 차치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이들은 이미 창세전에 모두 결정이 되어 있습니다.

(1:1-2)

1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2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2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보면 이러합니다.

(1:2)(표준 새 번역)

2나는 영원한 생명에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약속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요? 이렇게 영생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영원 전에, 영생을 주시기로 선택된 어떤 무리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머지는요? 그냥 멸망입니다.

(3:16)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잘 보세요. 영생과 멸망이 극명하게 대조가 되어 있습니다. 영생을 얻지 못한 자는 다 어떻게 됩니까? 멸망합니다. 그런데 그 멸망할 자들도 이미 결정이 되어 있는 걸 아세요?

(9:20~23)

20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 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 하겠느뇨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과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이 영원 전에 이미 나누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13:48)

48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그러니까 다시는 모든 인간은 다 평등하다든지, 하나님의 처사가 너무 독선적이고 불공평하다든지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 사고의 중심은 여전히 인간인 것이니까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자칫 어떤 분들은 너무 비인간적이고 차갑다고 말씀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다만 조심할 것은 우리 스스로는 누가 그저 죽은 흙이고 누가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완성될 사람인지 절대 판단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사람도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그 어떤 존재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영생은 하나님이 선물로만 주셔야 하는 아주 소중한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은혜의 자각 앞에서 납작 엎드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과 순종을 올려 드릴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귀하고 소중한 것이 영생인데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 영생에 도달하려 하고, 심지어 그 영생을 곡해하여 이 세상 다른 것에서 행복과 쾌락과 만족을 찾으려 합니다. 그런 자들은 절대 영생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해 주시기 위해 선악과가 동원이 되었습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만으로 행복하고 하나님만으로 존재해야 하는 피조물이 하나님 절대의존의 자리를 떠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를 설명하는 설명용 교보 재였던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자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감추십니다.

(3:22~24)

22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여기 보시면 재미있는 말이 나와요. 인간이 선악을 아는 일과 선악을 판단하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면 그게 죄라는 것입니다. 그 상태가 영생의 반대인 멸망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이들에게서 영생의 나무를 감추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죄인들에게 자신을 감추시는 하나님은 출애굽기를 비롯한 모세오경, 선지서, 시가서, 심지어 신약의 복음서에도 계속 반복되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 기억나세요? 백성들이나 짐승들이라도 절대 거룩한 곳에 들이지 말라고 하시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돌격하여 죽여 버리시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씀은 지금 하나님 당신 자신이 두루 도는 화염검과 그룹의 역할을 하고 계신다는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을 떠나 자신들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그런 존재들은 절대 하나님과 연합하여 영생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냥 흙일뿐입니다. 그들은 절대 하나님의 생명에 근접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화염검과 그룹으로 상징화하여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티끌이 되지 못하는 자들은 절대 하나님과 연합할 수 없고 영생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현실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6:9~10)

9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보세요.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시면서 그들의 눈과 귀를 막아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그 상태로 절대로 하나님께 돌아와 고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막혀 버린 생명나무의 모습입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인용을 해다가 쓰십니다.

(13:10~17)

10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12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 함이니라

14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생명나무 실과인 영생을 품은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 분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요? 그 분이 자신을 숨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비유로 말씀하셨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였습니다. 멸망할 자들에게서 생명나무 실과를 감추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전에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믿음이라는 것을 허락하셔서 그들의 눈과 귀를 열어, 그들에게만 복음을 들려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다음 주부터 우리가 공부할 천국의 은닉성, 복음의 은닉성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숨기신 사건이 여러 번 반복되어 나오지요? 구약에도 숨어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그게 다 화염검으로 가리워진 생명나무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게 영생의 근원이신 예수님은 세상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영원히 당신의 생명을 감추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감추어진 예수님을 보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바로 제자들로 상징이 된 교회인 것입니다. 17절을 보시면 많은 선지자와 의인들이, 제자들이 지금 보고 있는 예수님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듣고자 하여도 못 들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영생의 열매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 버리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무슨 노력을 한 것도 아니고, 대단한 학식과 뛰어난 재능과 열심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불가항력적 은혜로 생명이 그들의 삶에 뚫고 들어와 버린 것입니다. 인간은 그러한 방식으로만 영생의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걸 십자가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생명나무를 가리고 있던 성소의 휘장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위에서 아래로 찢어집니다. 생명나무 열매, 영생은 우리에게 그러한 은혜의 방법으로만 수여될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비밀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못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절대 복음에 수긍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외로운 것입니다. 바울도 똑같은 말을 합니다.

(16:25~27)

25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26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27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여기 또 재미있는 말이 나오지요? 생명나무이신 예수님과 그 분을 설명하는 복음이 영원 전부터 감추어져 있었답니다. 그 말은 인간 측에서 영생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영세 전부터 이미 불가능으로 차단이 되어 있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인간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한 순종의 상태가 되어 은혜로, 선물로만 영생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신자가 이 땅에서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 말은 성도가 이 땅에서도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5:24)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얻을 것이다’가 아니라 ‘얻었다’입니다. 영생은 천국에서 사는 영원한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뚫고 들어와 오버랩 되어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영생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점입가경이지요? 영생은 신적 생명이라면서 어떻게 우리가 이 땅에서 그 삶을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성도에게 믿음이라는 것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서 눈을 들어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를 볼 수 있는 눈을 말합니다. 따라서 믿음을 소유한 이들은 자신들의 티끌 됨을 온전히 자각하고 수긍하고 인정하며, 그 위에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무게를 실감하고,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선악을 판단하고 열심을 부려 행복에 도달하려 했던 그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 공로만을 의지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고백하는 자로 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일, 즉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우주의 중심 행세를 하려는 그 모든 일에서 돌이켜, 오직 예수만이 믿음의 대상이며, 예수만이 의지의 대상이며, 예수만이 행복의 근원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자리로 자꾸 내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성도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예수만을 믿는 일’, 즉 돈이나 명예나 건강이나 인간관계나 그런 것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을 믿는 자로 무장해제 되는 일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게 영생을 사는 삶인 것입니다.

(6:27~29)

27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28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명확하지요?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은 예수를 믿는 일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상태가 선악과를 따 먹는 일에 동참하지 않고 생명나무에 다다른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그 분을 보내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을 알지 못하며, 여전히 우리의 힘을 의지하고, 세상의 재화를 얻어내는 데에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선악과를 따먹고, 영생 나무를 화염검으로 차단당하는 그런 멸망할 자의 신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영생을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도 한 것입니다.

(17:2~3)

2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니이다

그런데 그 삶이 잘 안 살아지지요?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이미 거듭나고도 영생의 의미를 잘 모르고 여전히 세상 사람과 방불하게 사는 이들이 있다고 성경에까지 기록을 해 놓았습니다.

(요일5:13)

13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20:30~31)

30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영생을 얻고도 영생과 무관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뭐가 필요했다는 것입니까? 성경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 무지의 자리로 내리꽂히는 것이 바로 성경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너희는 말씀을 잘 배워서 너희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영생을 가진 자처럼 살라’는 말과 동일한 말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의 묵상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수시로 확인하여야 하며, 그 말씀의 힘으로 이 땅에서 영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 말도 잘 분별해서 들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노력해서 영생을 살도록 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이미 영생 안으로 들어와 있다는 것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여러분 자신이 이미 영생을 살고 있음을 아시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께 제가 하나 여쭤 보겠습니다. 영원을 사는 것이 영생인데, 여러분은 영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아십니까? 영원 속에 사는 것이 영생인데 영원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영원을 사는 삶, 즉 영생을 살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영원이란 하나님의 시간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영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통합된 그런 개념입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그런 것을 영원이라 합니다.

영원 속에서는 순서나 시차가 없습니다. 모든 게 온전히 완성된 상태입니다. 그곳에는 발전이나 성장의 개념이 없습니다. 자라남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입니다. 더 이상 자랄 필요도, 발전할 필요도, 성장할 필요도 없는 모든 것이 완전하게 이루어진 상태가 영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시간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는 그곳에는 기다림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작정하시고 만드신 하나님 나라는 이미 영원 속에 완성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참 생명나무이신 예수님이 열방을 소성케 하시는 막강한 생명력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신 그런 곳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죽음이라는 문을 통과하여 이 시간 속에서 영원 속으로 들어가시는 순간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로 입성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통합이 된 그 영원이라는 하나님의 시간대가 역사 속으로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믿음이라는 것을 사용하여 시간 위로 붕 뜨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영원을 사는 자가 됩니다. 어떻게?

우리 성도는 믿음으로 아담의 범죄 현장에 참여하여 자신의 모습을 폭로당합니다. 우리는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는 현장에서 또 다시 우리의 불가능함과 티끌 됨을 보기도 하고, 노아의 홍수 사건에 투입이 되어 저주의 바다에서 건져지는 경험도 합니다. 우리는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기도 하고, 출애굽을 하여 홍해 앞에 서기도 합니다. 우리 앞에서 홍해가 갈라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홍해를 건넙니다. 그리고 이미 2,000년 전에 골고다에 섰던 그 십자가의 현장으로도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덧입습니다. 나는 지금 2010년을 살고 있는데 AD30년의 십자가가 내 앞에 현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재림 사건에도 우리는 동참하며, 아직 가시적으로 오지 않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창세전에 구원을 받았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창세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도 하는 것이고, 이미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있다고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게 다 뭡니까? 현재만 살고 있는, 그래서 현실에만 묶여 있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성도는 이 땅에서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동시에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 전체를 이 땅에서 산단 말입니다. 어떻게? 믿음으로. 그게 이 땅에서 영생을 사는 이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영생을 살고 계신 거예요? 아니에요? 맞지요?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올 때를 기다리다가 보았다는 표현이나, 구약시대에 동물 제사를 지내면서 미래에 있을 그 제사의 원형인 십자가에 동참하여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나, 미래에 살면서 과거의 십자가 공로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이들이 영원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 이 세상 속에서의 현재라는 시간과 현실이라는 상태에 묶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영원 속에서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자기부인 과정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부인 당하다가 육신의 죽음을 맞는 날 하나님 나라에 영광스럽게 입성할 것을 알기 때문에 잘 견뎌냅니다. 그러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 십자가와 자기부인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완성이 되어 있는 우리의 실체가 시간 속에서 겪는 잠깐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기에 영생을 사는 이들은 그 십자가와 자기부인의 삶 속에서 완성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열심히 배울 뿐입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향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삶이 바로 영생입니다. 그렇다고 성도는 이 세상을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자체에 목적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영원을 사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나는 영생을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하는 이들은 지금 이 땅에서도 영생을 사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영생은 나중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생은 나와 하나님이 하나로 연합이 되는 삶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꾸 하나님의 뜻에 항복하는 자로 부인 되어져 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삶이 쉽지 않을 때 여러분은 항상 성경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요일5:20)

20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영생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지각을 주시지 않으시면 절대 알아챌 수도 없고, 도달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각을 주시는 방법은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이신 예수를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6:63~68)

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8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예수님 자신이 영생의 말씀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영생의 말씀이 이렇게 우리에게 성경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생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에 너무 눈을 팔고 있습니다.

(1:18)

18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벧전1:23~25)

23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렇게 말씀을 통하여 영생을 살다보면 우리 안에 성경 전체가 실재화 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이라는 것 자체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통합이 된 그런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삶이 우리에게 살아지고, 요셉의 삶이 살아지며,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등에 걸리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복음의 실재화라고 합니다. 복음은 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다이내믹한 것입니다. 복음은 이미 창세전에 준비되어졌고 완성되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그 영원 속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직접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 앞에서 무력한 우리 자신을 보며 십자가에 매달려 죽습니다. 죄가 되셔서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삶에 그대로 실재화 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새 생명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조금씩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때마다 우리 안의 새 생명은 그만큼 살아납니다. 따라서 영원을 사는 우리는 매일 죽으며 매일 부활하는 것입니다. 죽은 만큼 부활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새롭게 살아났습니다. 그게 겉 사람의 후패요 새사람의 새로워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려거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영원이 제자들의 삶 속에서 살아지게 된다는 그런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아브라함의 자기부인을 경험하게 되며, 야곱의 얍복강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이 무엇이며 영원이 무엇인지를 아는 이들은 절대 자기의 현실을 이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현실 속에서 영원 속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삶과 예수의 삶을 발견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천국에는 있지도 않은 선악과라는 probation 기간을 살고 계신 것입니다. 열심히 선악과를 따 먹으세요.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도 잘 배우세요. 그리고 그 열매의 쓴 맛을 가슴에 새기시고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한발 한발 돌아오세요. 선악과는 지금 이 세상에서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는 그 선악과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옛사람이 계속 죽어가다가 결국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우리는 영생을 소유한 찬란한 부활의 몸을 입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불사성(immortality)을 회복하게 됩니다. 서두에 말씀 드린 것처럼 그 불사성과 영생(eternal life)을 혼돈하시면 안 됩니다. 불사성은 부활 이후에 회복되는 것이지만 영생은 이 땅에서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둘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영생을 사는 이들은 이 땅에서 부활의 삶을 삽니다. 십자가의 삶, 자기부인의 삶인 영생을 살다보면 옛 사람이 죽어가고 새 사람이 부활하는 매 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영생과 부활은 이 역사와 인생이라는 과정을 통과한 후 완전히 완성되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히 영원을 사시게 될 것입니다. 완전한 나라, 완전한 왕국,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그런 곳에서 영원을 사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그 부활의 현실을 믿으십니까? 부활이 없다면 우리같이 불쌍한 사람들이 없다는 바울의 말을 이해하세요? 우리는 지금 이 시간 속에서 믿음으로 영원을 살며, 우리 몸의 부활을 직접 경험하며 매일 매일 부활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부인되고 죽을 때 내 안에서 살아나는 예수의 생명을 경험하셔야 합니다. 그게 부활을 시간 속에서 당겨 사는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이제 모두 이해가 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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