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39) 문둥병자들아 너희를 비추는 거울을 똑똑히 보라
(롬3:21~31)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 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동요 작곡가인 백창우 선생의 동요 중에 ‘싫단 말이야’라는 동요가 있습니다. 그 가사가 이러합니다.
“왜 국에다 밥 말았어?
싫단 말이야 싫단 말이야
이제부턴 나한테
물어보고 국에 말아줘
꼭 그래야 돼!”
이 동요의 곡은 백창우 선생이 붙였지만 가사는 조민정이라는 초등학생이 쓴 동시입니다.
어린 아이의 진심이 절절이 묻어나는 그런 동시입니다. 왜 엄마 마음대로 국에다가 밥을 말아서 주냐는 투정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저희 할머니께서도 제가 입맛이 없다고 하면 꼭 국이나 물에 밥을 말아서 억지로라도 마시게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지나쳐서 정말 체한 상태에서 할머님이 국에 말은 밥을 억지로 먹게 하셔서 화장실에서 다 토해내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토하고 나오는 길에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 아기가 밥을 너무 적게 먹어서 오늘도 국에 듬뿍 말아서 다 먹게 했다’고 할머님이 말씀을 하시자 할아버지께서 할머니를 칭찬하시며 다음에도 또 그렇게 해서라도 많이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너무 무서워서 도로 화장실로 들어가서 안에 있는 것을 몽땅 토해내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방과의 소통이 전제되지 않을 때 집착이 되고 심지어 폭력이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고려하지 않고 내가 해주고 싶은 것에만 관심을 갖게 될 때 상대방은 그 사람의 사랑표현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체감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대방의 마음은 고려하지도 않은 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쏟아 내놓고는 거기에 반응하지 않는 상대방을 향해 ‘내가 널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데 왜 내 사랑을 몰라 주냐?’며 삐지는 사람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주변에서 발견하곤 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그런 경우를 경험해 보지 않으셨나요? 그때 기분이 어떻던가요? 그냥 나 좀 가만히 놔두어주었으면 좋겠지요? 15년간 밀폐된 공간에 갇혀서 군만두만 먹다 풀려난 올드 보이 최민식에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군만두를 구해다가 갖다 주며, 이거 구하느라 정말 힘들었으니까 맛있게 먹으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5년간 군만두만 먹다가 나온 사람이 그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군만두’가 먹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그걸 거절한다고 삐져서, 자기 사랑을 무시했다는 둥 이러면 정말 속 터지지요?
이게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엉뚱한 것을 내어 놓으며 ‘이게 내 사랑의 징표’라고 우기고 있는 꼴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단호하게 ‘싫단 말이야’를 외치셨습니다.
(암5:21~23)
21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22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23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 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사 1:11)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말1:10)
10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이게 다 뭡니까? 하나님의 ‘싫어 싫단 말이야’라는 외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처음자리를 확인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당신의 백성을 삼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로 가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결국 그 율법이 무엇을 목적으로 했던 것인지를 명확하게 밝혀 주십니다.
(신6:1,4-9)
1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 지니라
보시다시피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가입한 이유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을 하여, 자녀들에게 앉았을 때에나, 누웠을 때에나, 길을 행할 때에, 언제나 가르치라고 말씀을 하시고는 그 내용을 이렇게 부연을 하십니다.
(신6:10~14)
10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11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12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13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 이니라
14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라
보세요. 율법의 이야기에서 불가항력적 은혜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옮겨가지요? 하나님께서 홀로 준비하신 성읍, 하나님께서 홀로 마련하신 집, 하나님께서 채우신 가재도구, 하나님께서 심으신 감람나무를 보고 경험하며, 그것을 거저 주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곧 어디로 향하는 징검다리인 것입니까? 우리의 무력함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깨닫게 하고 그러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징검다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율법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자꾸 그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구약을 통해 ‘싫단 말이야’를 반복해서 외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계속 국에다 밥을 말아서 가져오니까 하나님께서 급기야 그 밥상을 엎어 버리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독사의 새끼들아 국에다 밥 좀 그만 말아라.’하고 밥상을 엎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로도 인간들은 계속해서 자기들의 자존심을 챙기고 자기들의 사랑을 증명하느라 열심히 국에다 밥을 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로마서 3장 본문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싫단 말이야’라는 일갈을 신약의 용어로 잘 풀어 놓은 것입니다. 율법은 의에 이르는 길이 되지 못해서 하나님께서 다른 의를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거저 받는 의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늘 본문 마지막에 ‘믿음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라 기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이끌기 위한 징검다리라는 것을 알고 예수의 의만 꼭 붙들게 되는 것을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이신 하나님이 죄인 앞에 나타나게 되면 인간은 ‘저는 죽은 죄인 맞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합니다.’라는 자기 부정과 자기 배제의 고백이 먼저 나와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이사야가 말씀이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지 보고 가겠습니다.
(사6:5~7)
5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말씀이신 하나님이 이사야 앞에 나타나자 이사야가 입술을 가리고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하고 말을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입이라는 것은 그 안에 있는 것이 나오는 통로를 의미하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입이 부정하다는 것은 ‘내 안의 모든 것이 다 부정 합니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마 15:18)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그러니까 이사야는 대 선지자인 아모스의 아들이었으며 자신도 선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이신 하나님을 뵙자마자 ‘저는 부정한 자입니다’하고 자기 존재의 올바른 자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한 순간에 부정에서 순결로 옮겨갑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열심히 노력을 했나요? 율법을 지켰나요? 아니요. 하나님께서 그 입술을 숯으로 지져서 한순간에 순결한자로, 죄가 없는 자로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그걸 구원이라 합니다. 구속사, 즉 역사는 바로 그러한 구원의 즉각적 현실을 그려내는 캔버스인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새로운 피조물들을 ‘아노뗀’ 위로부터 난 자들이라 부르셨습니다. 하늘의 것은 하늘에서 완성이 되어 내려오는 것이지 땅의 것을 조합하거나 땅의 것을 계발하고 성숙시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구약의 여러 곳에서 확인하셨던 것처럼 이 역사와 천지만물은 하늘의 성전을 원형으로 하여 세워진 모델하우스 같은 것입니다. 이 모델하우스는 하늘의 원형이 내려오면 그 즉시 철거가 되어야 할 것들입니다. 그 옛 것들 중에 인간의 육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인간의 옛 육신을 성숙시키고 계발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왜 새것이 필요한가를 배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를 하십니다. 그 창조는 즉각 성이 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면 그 즉시 빛이 생겨나야 합니다. 그 말은 곧 완료를 의미합니다. 창세전에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백성은 그렇게 완료 상태로 창조가 되었단 말입니다.
(롬8:30)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보세요. 성도는 이미 영화의 단계까지 완료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역사 속에 시간차를 두고 잠시 왔다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컨베이어 벨트 위로 건빵이 지나갑니다. 역사입니다. 흐름입니다. 그런데 그 옆에 긴 꼬챙이를 쥔 불량과자 제거반이 서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한 곳에 다리를 고정하고 서서 그 건빵들의 흐름을 한 눈에 봅니다. 그리고는 불량 건빵들을 하나하나 기가 막히게 집어냅니다. 그 컨베이어 벨트 위의 건빵들은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을 지나지만 그 옆의 불량 건빵 제거반은 그 모든 것을 한 눈에 봅니다. 그렇게 완료의 상태에서 뿌리를 박고 고정되어 있는 것을 묵시라고 하고 컨베이어 벨트위로 흐르는 불량 건빵, 우량 건빵들의 세상을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완제품은 그 뿌리를 박고 고정되어 있는 묵시에 의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시간이 없다고 하지요? 그걸 영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육을 가진 존재들이 활동을 하며 삽니다. 거기에 어떻게 흐름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왜 시간이 없다고 표현을 할까요? 천국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가 되는 곳이지 그 곳에 사는 존재들의 노력이나 열심으로 성숙되거나 발전되는 곳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시간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평을 하시곤 7일째에 안식을 하신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피조물이 도울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묵시의 세계는 창조의 세계입니다. 창조의 세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성이 되는 세계를 말합니다. 인간이 도울 일이 전혀 없는 완벽한 하나님의 작품이 바로 묵시의 세계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의해 완성이 된다는 것은 그 창조 사역 앞의 모든 것이 죽은 흙으로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 사역이 말씀으로 되었지요? 그렇다면 오늘날 그 창조의 말씀 앞의 우리가 어떻게 먼저 드러나야 합니까? 죽은 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없음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죽은 흙이 어떻게 산 생명이 되는지를 확실하게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러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송하는 것이 성도의 본무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창조의 말씀 앞에서도 우리의 가능성과 업적과 공로와 자격을 챙기려 하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말도 안 되는 인간의 존재목적을 국민교육헌장으로 배우고 외우며 자란 한국 교회는 특히 더한 것 같아요. 아닙니다. 인간의 유일한 사명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그려내는 캔버스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창조의 말씀 앞에서의 죽은 흙들의 상태를 ‘부정하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바로 그러한 구원의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이 땅에 저주받은 부정한 자의 모습으로 태어나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문둥병자들이었습니다. 문둥병자들은 여러분이 지금 이사야의 모습을 통해 보셨던 것처럼 항상 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하면서 다녀야 했던 이들이었습니다.
(레13:45~46)
45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46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
문둥병 환자는 늘 윗입술을 가리고 ‘난 부정한 사람입니다’라는 자아비판을 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진 안으로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도저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될 수 없는 존재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모든 존재의 처음 자리인 것입니다.
그렇게 문둥병자들은 늘 진 밖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진 밖은 ‘광야’입니다. 기억해 두세요. 문둥병 환자들은 광야에서 머물며 외인으로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성도는 자기 앞에 말씀이 떨어지면 그 말씀 속에서, 말씀이신 예수를 발견하게 되고, 성경의 그 수많은 증인들과 똑같이 죽은 자처럼 되어 ‘저는 부정한 자입니다. 저는 죽은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말씀 속에서 예수를 본 진짜 성도들의 올바른 반응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율법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끝나자 바로 문둥병 환자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마8:1-4)
1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2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 하라 하시니라
우리가 이미 공부한 것처럼 산상수훈은 교회가 지켜내야 할 행동강령이나 윤리 규범이 아니라
인간이 지켜낼 수 없는 율법을 홀로 온전히 지켜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몽학선생으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강설하시면서 ‘지키려면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켜라’하고 율법지킴의 완전성을 설파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마5:17~20)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 이로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주님은 여기에서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공부하고 있는 율법 외의 다른 의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라 했지요? 그리고는 산상 수훈 말미에서 율법을 열심히 지켜냈던 어떤 사람들을 전부 불법을 행하는 자로 선고를 해 버리시고는 문둥병자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7:13~15)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15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주님은 산상수훈 말미에서 좁은 문과 넓은 문 이야기를 하십니다. 좁은 문은 단순히 고생스러운 문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처럼 된 인간들이 절대로 가지 않으려고 하는 문, 즉 인간의 자존심이 무너지고 부정되는 은혜의 문을 말하는 것이고, 넓은 문은 인간들의 자존심과 주체성과 가능성을 부추겨주는 인본주의의 문, 율법주의의 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중심의 문이 넓은 문이고 하나님 중심의 문이 좁은 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 바로 위에서 ‘구하라, 두드리라, 찾아라’라는 권고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 말은 인간들에게 있어 진짜 좋은 것은 인간 스스로 생산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밖에서 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그런 말인 것이지 뭐든지 구하면 다 준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가 뭔가 해냈다고 우기면서 ‘이거 내가 마련해 왔어요.’하며 내미는 것, 그게 바로 율법을 행한 것이 아니라 불법을 행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국에 밥 말아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앞에서 ‘싫어 싫단 말이야’를 외치십니다.
(마7:21~23)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보세요. 뭔가 했다는 사람을 주님이 완전히 부정을 해 버리세요. 그리고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건 성도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은 주님을 아는 일이어야지 주님을 위해 무언가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게 아니란 걸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으로 가면 거기에 영벌에 들어갈 염소들과 영생에 들어갈 양들이 나오는데 염소들은 무언가 했다고 우기는 자들이고 양들은 자기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마치 기억상실증자들처럼 자기를 부인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게 산상 수훈, 즉 신약의 시내 산에서 내려진 새로운 율법은 예수라는 의를 붙들게 하기 위한 인간의 처음자리 폭로용으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산상 수훈의 진의를 올바로 이해한 사람들에게서 나와야 할 올바른 반응이 어떤 것이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죽은 자 맞습니다. 제가 부정한 자 맞습니다. 저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합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지요? 그래서 산상 수훈을 끝내고 산에서 내려오시는 예수님 앞에 문둥병자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의 계명을 듣고 바로 이런 모습으로 내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문둥병자가 산상 수훈을 말씀하시고 내려오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서 뭐라고 합니까?
‘저를 고쳐주세요.’라고 하나요? 아니요. 감히 그런 말도 못합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 말은 ‘저는 감히 주님께 저를 깨끗하게 해 달라는 부탁조차 할 수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께서 저를 깨끗하게 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압니다. 혹 주님께서 저를 깨끗하게 해 주어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계신다면(창세전 선택) 저를 좀 깨끗하게 해 주세요. 그러나 그러지 않으셔도 저는 아무 할 말 없는 부정한 자입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사야가 말씀이신 하나님을 뵙자마자 입술을 가리며 ‘주여 저는 부정한 자입니다. 저는 지옥에 가도 마땅한 그런 죽은 자입니다(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고백을 한 것처럼 신약의 율법, 산상 수훈이 떨어지자 그 앞에 문둥병자가 등장하여 똑같이 입술을 가리고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면(창세전 예정)저는 깨끗하게 될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둥병이 어떤 병입니까? 살이 썩어 들어가고 세포가 죽어 가는데 정작 본인은 자신의 몸이 썩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병입니다. 통점이 무뎌져서 아프지가 않은 겁니다. 이게 바로 자신들이 죽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현실을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는 역사 속 인간들의 본 모습인 것입니다. 죄인들이 자기들의 죄가 뭔지를 모릅니다. 그들의 죄가 그들을 사망으로 이끌고 있는데 죄의 정의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게 영적 문둥병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고쳐주십니다. 그리고는 성전의 제사장에게 가서 그 몸을 보여주어 증거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마8:4)
4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 하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증거’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말튀리온’은 ‘증거’라는 뜻도 있지만 성막 안의 ‘십계명’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주님은 아무 것도 한 것 없이 자신의 부정함을 인정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면 주님의 은혜로 자신이 정결한 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을 한 문둥병자를 값없이 고쳐주시고는 율법주의의 대표인 제사장에게로 보내어 ‘이것이 계명이고 이것이 율법이다’라고 폭격을 해 버리신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십계명의 제 일 계명이 뭡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입니다. 그건 계명, 즉 율법의 목적이 하나님이라는 신 이외에 다른 신, 즉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어버린 너희 자신을 신으로 삼는 삶은 죽은 자의 삶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임을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이외의 모든 존재의 처음자리 확인에 관한 것이 십계명인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이냐?’를 밝히자는 것입니다.
만일 너희가 하나님 맞다면 너희 힘으로 율법 지켜서 부정함의 자리를 벗어나 보라는 것입니다. 그게 십계명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주님은 그 문둥병 환자를 성전의 제사장에게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율법의 총화라 할 수 있는 성전과 그 안의 제사장을 신약의 율법, 야고보 사도의 말로 표현하면 ‘자유하게 하는 율법’으로 폭격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죄를 사하고, 죄인을 부정함에서 건질 수 있는 진짜 제사장은 예수님 당신이라는 것을 웅변하고 계신 것입니다. 문둥병자, 부정한 자들은 율법으로 깨끗하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로 정하게 된다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레위기에서 확인한 것처럼 그 문둥병자들은 어디에 머물러야 한다고 했지요? 진 밖, 즉 광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역사라는 광야(묵시와 비교하여 그 묵시의 밖에 있는 곳, 완성된 하나님 나라 밖)속에서 우리가 반드시 알고 가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아, 나는 문둥병자가 맞구나, 죄인 중의 괴수가 맞구나, 그래서 나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구나.’를 알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 광야 인생의 목적을 이렇게 명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8:2~3)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이 어린양의 보혈의 공로로 출애굽을 한 후에 왜 바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 40년을 살게 된 것이지요? 열 두 정탐꾼 중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가나안 땅으로 바로 치고 들어가려 했던 반면에 그 둘 외에 이스라엘 전체가 눈에 보이는 인간 측에서의 가능성과 능력을 기준과 근거로 삼아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40년 광야 생활을 통해 반드시 알아야 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 떡을 에너지 삼아, 다른 말로 우리의 열심과 노력과 자격을 근거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는, 은혜의 복음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광야 인생의 목적을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알아보려는 것’이라고 한 것이고, 바로 뒤이어 ‘말씀은 너희가 떡을 에너지로 삼아 힘을 내어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너희를 살게 하시는 것이다’라고,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세요? 잘 이해하셔야 해요.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말씀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을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건 이미 물 건너갔단 말입니다. 이스라엘 1,500년 역사가 ‘인간은 율법을 못 지킨다.’를 증명해 내었잖아요. 우리가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말씀이신 예수가 당신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 가실 때 그 흔적을 삶으로 그려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말씀을 지키며 사는 삶이 아니라 말씀에 장악당하여 그 말씀에 의해 끌려가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여호와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도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소가 ‘광야’로 명확하게 표기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막1:35, 40~41,45)
35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40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41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45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여기에서 ‘한적한 곳’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에레모스, 광야’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 계시면서 저주받은 광야에서 그렇게 저주받아 죽어야할 문둥병자를 고치셔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성전의 지성소로 보내시는 그림입니다. 물론 십자가를 모형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45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계속해서 ‘한적한 곳, 광야’에 머무십니다. 광야는 문둥병자들이 사는 진 밖이라고 했지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광야에서 저주 받아 죽어야 할 자들을 하늘의 보좌로 밀어 올리시고 당신이 친히 그들의 광야를 사시는 모습입니다. 마태복음의 문둥병자 치유 사건을 마태가 어떻게 묘사를 하는지 보세요.
(마8:17)
17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보시다시피 우리의 문둥병은 우리가 치료를 잘 받고 연고도 잘 바르고 해서 나아진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문둥병을 친히 가져가시고 우리를 거저 정결케 해주심으로 낫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현실을 레위기의 아사셀 염소를 통해 이미 우리에게 보여 주셨지요?
아사셀 염소는 이스라엘의 대 속죄일에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안수로 전가 받아 광야로 쫓겨나가 죽는 예수의 모형인 염소입니다.
(레16:21~22)
21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22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
지니라
그러면 지금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사는 이 광야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마 28:20)
20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 14:16)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성령(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받은 상태에서 이 광야를 살면서 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그려내는(말씀으로 사는)삶을 살아야 하는 지를 배우도록 명받은 이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이 광야에 머무셔야 합니다.
(히13:12~13)
12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예수께서 영문 밖, 즉 광야에서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라는 존재의 자아가 완전히 부정되고 비워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를 그 영문 밖으로 불러내고 있단 말입니다. 뭘 지고 나오라고 해요? 능욕을 지고 나오랍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오라는 말입니다. 그건 나라는 존재가 부정되고 부인되는 것입니다. 광야는 그렇게 우리가 문둥병자에 불과한 존재임이 폭로되는 곳이요,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이 확증되는 곳인 것이지 우리 인간의 가능성과 성숙과 변화가 입증되는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이 영문 밖 세상에서 문둥병자에 불과한 저주받은 죽은 흙에 부어진 하나님의 생기, 하나님의 사랑을 절절하게 깨닫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그 은혜를 찬송하는 자가 되는 것을 먼저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준비물부터 먼저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신랑은 진심으로 자기를 알아주고 자기를 사랑해 달라고 하는데, 자신이 누구이며 신랑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엉뚱한 사랑의 징표들만을 열심히 만들어 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소중하게 자기 것으로 챙겨갖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대 앞에서 그거 내어 놓겠다는 것입니다. 염소들입니다. 그들이 ‘내가 언제 안했습니까?’하며 하나님께 대들 자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자기 것을 챙겨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복음이 아닙니다. 아사 직전의 굶주린 이에게 빵 한 조각은 생명이지만 배부른 이에게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되듯이 복음은, 내가 문둥병자요, 부정한 자이며,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이대로 죽어 지옥에 가게 된다는 절박한 자기 확인이 있는 이들에게만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내어 놓을 것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생명처럼 붙들 수 있는 빈 그릇이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 아버님과 함께 즐겨보던 TV 프로그램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TV 진품명품이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출연자가 있는데, 그 분은 조상 대대로 가보로 내려오는 어떤 문서를 비단 보자기에 조심스럽게 싸가지고 오셨습니다. 판정을 하려면 거기에 있는 판정관이 그걸 만져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살펴보기도 해야 하는데 혹시 헤질지도 모른다고 만지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사회자가 그 문서의 예상 판정가격을 적어 보라고 했더니 그 의뢰인이 수억 원을 적었습니다. 그런데 판정관이 잘 읽어보더니 그게 조선시대 노비문서라고 하면서 가격은 십만 원 정도 될 거라고 판정을 했습니다. 이내 그 의뢰인의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가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자기 집안의 노비문서였으니 얼마나 창피하고 화가 났겠어요. 가져올 때는 비단 보자기에 싸서 아무도 못 만지게 조심스럽게 가져 왔던 사람이 나갈 때는 신문 말듯 돌돌 말아서 아무렇게나 가지고 나가는 걸 보았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준비하고 있는 것들이 모두 그런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내가 한 선행, 내가 한 헌금, 내가 한 봉사, 너무 귀하고 가치 있어 보이지요? 그걸 누가 부정하거나 폄하하면 당장이라도 목을 조르고 싶지 않으세요? 그런데 그게 바로 죄의 종들에게서 나오는 자기 의인 것입니다. 그러한 행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게 나의 의로 쌓일 때 그건 마귀의 작품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세요. 하는데 그 모든 것이 은혜의 산물이라는 것이 깨달아질 때까지 먼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존재의 실체를 분명하게 보셔야 한단 말입니다.
안 그러면 죽어라고 준비해간 그 가치 있는 행위들이 전부 죄의 종으로 산, 자신의 노비문서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거 내 놓으면 ‘너 죄의 노예로 살다왔구나’하고 내 쫓으신단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과 제사, 그리고 도덕과 윤리를 목숨 걸어 지킨 결과 어떻게 되었나요? 하나님으로부터 독사의 새끼라는 저주만 받았습니다. 그 행위가 나쁜 게 아니라 그들은 그들이 한 일을 자기 것으로 끌어 당겨 다른 이들과의 차별의 근거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거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에게 도덕과 윤리를 지키라고, 율법과 제사를 행하라고 부추긴 게 누구라는 말입니까? 마귀란 말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마귀는 여러분에게 더럽고 추하게 살라고 유혹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깨끗하고 순결하게 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우리의 자랑을, 의를 삼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마귀의 궤계인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교묘하게 감추고 있는 우리의 죄 된 모습을 확 휘저어서 폭로해 내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치시는 성령의 사역 아닙니까? 귀 있는 이들만 들으세요. 하나님께서 죄를 짓게 만드신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감추고 있는 우리의 본래 모습을 들추어 내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목욕한 자들은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신 그 말씀은 무엇인가? 구원받은 자들도 이 세상에서 자기들이 짓는 죄들을 계속 씻어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 이렇게 의문이 드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여러분이 그 예수님의 발 씻기심의 의미를 분명히 아시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구속에 대해 보다 분명하게 정리를 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종의 모습으로 무릎을 꿇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발을 씻기시는 에피소드 바로 앞에 어떤 구절이 있는지 먼저 보실까요?
(요12:46~47)
46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 이로라
47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 이로라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이 말씀을 듣고 지키고 안 지키고 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할 자를 구원하러 오신 것이지 그들의 행위를 근거로 하여 구원과 심판을 결정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요13:1)
1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 사랑’ 이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창세전에 정해진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변치 않는 완료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행위나 업적, 공로 등에 의해 변개 되거나 포기되지 않는 끝까지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종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이 모습을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히6:10)
10하나님이 불의치 아니 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들을 십자가에 매다심으로 말미암아 원수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아들을 원수들의 종으로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그게 ‘이미 섬김’입니다.
(빌2:6-8)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게 바로 종의 모습으로 우리를 섬겨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섬김, ‘이미 섬김’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이제도 섬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이 광야에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광야라는 역사 속에서 우리를 어떻게 섬기고 계신 것일까? 그게 바로 예수님의 발 씻기심입니다.
(요13:4~10)
4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6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7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10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이 에피소드가 어떻게 시작된다고 했지요? 12장 말미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말을 듣고 지키던 안 지키던 그런 것과 상관없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은혜의 복음이 선포되고 13장 1절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제목 밑으로 붙어 있는 에피소드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 주실 양이면 다른 곳도 다 씻겨 달라는 베드로의 말에 너희는 이미 목욕을 하여 깨끗한 자라는 선언을 해 주십니다. 그리고는 발을 씻겨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목욕을 하여 부정함을 벗은 것은 예수님의 창세전 언약과 십자가 대속 사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목욕을 한 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너희들은 이미 목욕을 한 자들임을 잊지 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건 목욕을 한 자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짓게 되는 또 다른 자범 죄들을 회개로 씻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예수님의 발 씻기심이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의 우리 쪽의 회개나 노력을 말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 안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씻겨야지요. 예수님이 여전히 종의 모습으로 우리의 발을 씻기신다는 것은 ‘너희는 나의 피의 공로로 이미 목욕을 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확인시키시는 작업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치시는 그리스도의 영의 사역입니다. 그래야 끝까지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지셨지만 그 후에 인간들의 발 씻김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라면 그건 끝까지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피로 목욕을 시키신 후 여전히 광야에 남으셔서 우리의 발을 씻기신다는 것은 교회에게 허락된 이 광야의 목적이 예수님의 피의 목욕 사건을 확인시키고 가르치시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고 하십니다. 그건 성도의 삶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발 씻기심 사건을 몸으로 그려내는 삶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삶으로 그려내는 캔버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발 씻김의 삶을 보여주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예수님의 피로 목욕을 한 사람입니다’를 증거 하는 것이 서로 발을 씻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발 씻김의 삶은 이미 율법에 예고가 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출21:1-6)
1네가 백성 앞에 세울 율례는 이러 하니라
2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 할 것이며
3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들었으면 그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
4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줌으로 그 아내가 자녀 간 낳았으면 그 아내와 그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5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6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
여기보시면 육년 동안 종노릇을 완수한 어떤 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육년 동안 임무를 완수하고 칠 년째 자유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칠 년째는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안식의 해입니다. 창세기의 첫 창조를 그려보시면 됩니다. 창세기의 첫 창조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 창조의 모형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일곱째 날이 안식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에 보시기에 심히 좋다’라고 그 완성된 나라를 평가하신 후 안식으로 들어가셨다고 했지요? 그게 출애굽기나 에스겔서, 그리고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성전 척량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으라고 하시고는 꼭 척량을 하게 시키시지요?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지으라는 그 식양과 수치대로 잘 지어졌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차는 모습을 성경이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건 하나님의 성전, 즉 교회는 하나님이 지으라는 그 방식대로, 다른 말로 은혜대로 지어지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의 영광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전, 즉 인간의 손으로 지어진 성전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예수라는 성전과 그 안에서 성전 된 교회라는 성전만 남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을 요한계시록에서 척량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지어진 교회라는 성전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라는 평가를 하시고 그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아무튼 여기 출애굽기 21장에서의 종은 6년간의 사역을 완전하게 마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종에게 주인이 신부를 주었습니다. 그 종은 그 신부와 결혼을 했습니다. 6년간의 사역을 다 마친 종은 이제 자유롭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주인이 신부를 데려갈 수 없다고 합니다. 만일 그 종이 신부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주인의 영원한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부와 함께 살 수 있습니다. 그때 그 종이 자기의 자유를 포기하고 신부의 신랑으로 영원히 살기를 원하면 그 종의 몸에 송곳으로 뚫린 흔적이 남아야 합니다.
그리고는 영원한 주인의 종으로 신부의 신랑으로 몸에 창 자국과 못 자국을 지닌 채 주인과 신부를 섬기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도마에게 창 자국과 못 자국을 보여주신 것을 기억하시지요? 바로 그 신랑이 우리를 위해 영원히 육신을 입으시기로 작정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과 역사를 통해 바로 그 예수의 사랑과 은혜를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 같은 것들과 혼인해서 살기 위해 하나님의 자리를 마다하시고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지금도 우리를 섬기고 계신 우리 신랑의 사랑을 배우시고 체험하시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의 발을 씻고 계신 그 종 되신 신랑의 은혜를 배우세요. 그 은혜를 찬송하십시오.
말씀은 반드시 여러분을 광야의 문둥병자로 폭로해 내고야 마실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여러분을 비추는 그 말씀이라는 거울을 외면하시거나 그 거울을 여러분의 행위로 가리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 거울을 똑바로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우리가 그 더러운 몸을 벗게 되었음까지 가세요. 그리고 그 더럽고 추악한 여러분의 몸을 새로운 몸으로 묵시 속에 완료시켜 놓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세요.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그게 성도의 본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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