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0
롬 4장 1절부터 8절
그런즉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예전에 아프리카 케냐 사람이 이런 말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국사람은 빨리빨리 케냐 사람은 하쿠나 마타타 그 케냐 사람이 한국 사람으로 부터 제일 먼저 배운 말이 빨리빨리 였습니다. 그만큼 한국사람 입에는 빨리빨리란 말이 습관 처럼붙어 있더란 거죠. 음식을 씹으면서 계산을 하러 나오는 사람들은 한국인밖에 없다 그래요. 그러나 아프리카 케냐 사람들의 입에서는 ‘빨리빨리가 아니라 하쿠나 마타타가 습관처럼 튀어 나온다고 해요.
하쿠타 마타타는 스와힐리어 언어입니다. 말 그대로 옮기면 걱정거리가 없다, No Problem. 안 목사님이 아이 엠 노 프라블럼이라고 해서 한국에 있는 사람이 그거 진짜 맞는 거냐구 물어봤대죠.노 프라블럼, 걱정거리가 없다. 어차피 되어질 일이면 되어질 것이다. 그런것이죠? 재밌는 건 하쿠나 마타타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민족이나 국가들이 전부 가난한 아프리카나 바누아트 같은 남태평양의 그런 가난한 나라들이라는 거예요. 반면에 문명이 발전하고 문명의 혜택을 크게 누리고 있는 날들일수록 빨리빨리 허리(Hurry) 를 입에 달고 산다는 거지요.
그래서 가난한 거지,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영국의 신경제재단이 세계 178 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행복지수 순위표를 보면요 하쿠나 마타타를 입에 달고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그렇게 사는 가난한 나라들이 상위 순위에 올라가 있구요, 방글라데시가 1위입니다. 빨리빨리, 허리를 외치면서 분주하게 뭔가를 성취하며 사는 강대국들이 하위권에 랭크가 되어있어요.
참고로 세계 178개국 중에 미국 국민의 행복지수는 150위입니다. 그리고 러시아가 170위예요. 한 때 세계를 양분해서 갖고 있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닌 두 나라가 최고 꼴찌라니까요. 한국이 102위. 저는 아프리카 케냐에도 가봤고 바누아트에도 가봤어요. 비위가 약한 저는요 거기 가서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고 화장실도 제대로 갈 수가 없었어요. 다 재래식 화장실이니까. 그리고 잠자리도 너무 불결하고 불편해서 꼬박 뜬 눈으로 며칠을 새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이미 문명의 이기에 중독이 되었다는 증거겠죠. 당시 저는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큰 행복을 누리고 살고 있다는 것이 참 의문이었어요.도데체 행복이 뭐길래 그사람들은 그 상황 속에서 행복하다는 걸까?
그렇게 그나라들이 행복지수가높은 나라라는 것이 알려지자 전세계에서 이민자들과 투자자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그 가닌하고 평안한 나라에 낯선 사람들이 들어오고 돈이 물밀듯 밀고 들어 왔어요. 화장실이 수세식으로바뀌고 선풍기, 에어콘, 핸드폰, 티비가 들어왔습니다. 그러한 문명을 더 많이 얻어 내기 위해 교육열이 높아졌고요 삶의 구도가 하쿠나 마타타에서 경쟁 구도로 바뀌어 갔어요. 수많은 신종 직업이 창출이 되고 국민소득이 높아졌어요. 교육을 받은 원주민들이 더욱 더 예의 있는 쿨한 사람들로 변했고 공중도덕이라는 게 심지어 법에 의해 정해지기까지 했어요. 싱가폴처럼.
어떻게 됐겠어요? 그나라의 행복지수가 급격히 추락을 해버렸어요. 환경이 나아졌고 원주민들이 그나마 사람의 모양을 갖추고 성숙한 시민의식을 발휘하기 시작했는데 정작 행복이 날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이예요. 진짜 행복했던 사람들이 이 인류의 역사가 생산해낸 그런 문명의 이기와 본인들의 열심과 노력을 버무려서 멋진 인간적 성숙과 환경의 진보를 이뤄냈더니 불행이 찾아 오더라는 거예요.
하쿠나 마타타, 내 모습 이대로에 만족하고 더 나은 삶과 미래에 대한 욕심이 없었을 때에는 재래식 화장실과 석회가 가득한 물, 지저분한 잠자리가 불편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보다 나은 다은 나, 지금 보다 나은 미래라는 목표가 생기자 희망이 생기자, 현재의 나가 굉장히 불편하고 창피하고 심지어 불쾌해지더라는 거죠.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희망이 없을 때에는 그 자리에서 행복하게 살 수가 있었는데 희망이라는 게 생기자 인간들이 그때부터 빨리빨리 어디론가 분주하게 달리기 시작하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달리는 만큼 행복이 떨어져 나가요. 원래 희망(希望) 이라는 단어의 희자는 바랄 희자죠? 그런데 옛날에는 이 바랄 희자와 드물 희 (稀)자를 혼용해서 썼었어요. 드물 희자가 바랄 희옆에 불화 변이 붙으면 드물 ‘희’자 거든요. 그마만큼 희망이라는 건 그마만큼 성취하는 이가 드문거예요. 희망은. 그냥 ‘희 망’ 인거예요. 바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모든 인간이 보다나은 나 보다 나은 미래라는 희망을 향해 죽어라고 달리고 있는 거예요. 로또 한번 맞아 보겠다라는 그런 마음으로요. 그러면서 행복을 잃어 가는 거지요.
그렇게 아담안의 모든 인간은 지금보다 나은 ‘하나님처럼’ 의 삶을 향해 달려요. 발전없는 인생은 게으른 인생이 되고 심지어 악한 인생으로 평가 받아요. 오죽하면 어린 유치원 애들도로 생떽쥐 베리의 어린 왕자를 읽고 그 캐릭터에 대해서 불만을 표출하더랍니다. 어린 왕자가 자라지도 않고 성숙하지도 않고 힘이 세지지도 않고 그냥 그 상태로 죽는게 못마땅한 거예요. 애들이요.
이런 시대가 된 거예요. 인간은 발전 해야 되고 성숙해야 하며 그러한 발전과 성숙을 에너지로 삼아서 역사에 기여를 해야한다, 라는 그런 아담적 사고가 아이들에게서 까지 보여지더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인간의 자존심을 세우는 길이고 그러한 인간의 주체성과 존재성 챙기기에서 인간의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고 착각을 하는거예요. 이들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지금 그렇잖아요. 그렇죠? 그런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지면 우리는 굉장히 행복해질 것 같으죠?
그런데 하나님은요 선악과 따 먹은 아듬들이 자신들의 열심과노력으로 건설하고 있는 이역사와 인생의 결국이 파멸,파괴요,불살라짐 이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그말은 인간들이 역사를 통해서 건설해 놓은 보다 성숙한 인간상과 보다 발전된 세상이 결국 하나님의 빛 아래에서 불살라지도록 계획이 되어있다 라는 뜻이죠.
말4장 1절
만국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가 다 초개 같은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마지막 떄가 되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초개 같이 된다는 거예요. 이 초개라는 단어가 (코쉬) 말라 비틀어진 집이예요. 역사가 내내 건설한 그 집, 그 나라가 말라 비틀어진 집(코쉬)이라는 건데 고거 다 태워버리겠다는 뜻이예요.
그런데 똑같은 불이 성도에게도 떨어지는데 그 불은 치료하는 광선이 되더라는거지요. 성도는 그 마지막에 떨어지는 불을 역사속에서 끊임없이 받게 되요. 이게 불같은 시험이예요. 베드로가 이야기한 불 같은 시험. 그래서 그들이 세우고 있는 육의 집, 역사라는 집을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계속 불사름을 당해요.이걸 고난이라고 해요. 그렇게 말라 비틀어진 역사라는 집과 자아라는 집이 그의 인생 속에서 불태워진 자들에게는 (이걸 자기부인이라고 하는것)마지막에 내려오는 성령의 불이 치료하는 광선 즉, 그들을 성도로 완성하는 광선이 될것이지만 (왜냐하면 그게 다 타야, 고린도서에 나오는 불가운데서 얻는 구원이 그거란 말예요.공력을 다 태워버리고 예수라는 기초와 예수라는 집만 남긴다는 게 바로 그 이야기 잖아요) 그래서 그 불이 내려와서 완성 시키는거예요. 완성.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 빨리빨리를 외치면서 전혀 누군가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의 나라, 육의 나라 세상 나라를 열심히 건설한 건축자들은 그 나라와 함께 영원히 불타게 된다는 말 이예요.
벧후3장 7절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이 세상이 보존 되어 있어요.뭐에 의해? 말씀에 의해서. 그런데 그 심판과 멸망의 날에 뭐하기 위해서? 목적이 나오죠 거기? 뭐 하기 위해서 간수해 두신대요? 불살라 버리기 위해서 그러면 창조라는 것, 첫 창조라는 건 불사를 목적에 의해서 창조가 된거죠? 하나님이 바보예요? 불태울 걸 왜 만드시냐구요. 거기에서 성도에게 뭔가 가르치실 것이 있기 때문에.
옛하늘과 옛땅은 그곳을 살아가는 모든 피조물의 역사를 포함하는 개념이예요. 그러니까 태초에 천지는 불살라 지기위해 창조가 된거예요. 이 역사는 불살라 지기 위해 존재하는 거예요.지금.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불살라 버릴 것을 창조하셔서 그 속에 당신의 백성들을 넣으시는가
시 28편 4절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에 지은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이 뭘 자꾸 지을려고 한다는 거죠)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요걸 알게 하기 위해 불살라 버릴 첫 창조를 창조해놓고 결국 마지막까지 열심히 뭘 하게 만들어요. 그 다음에 하나님 나라를 옆에다가 떡 세워버리는 거죠. 그러면 아방궁 옆에 개미집 같은 게 생기는 거예요. 인간의 역사가 만들어 놓은 것이, 이걸 불사른다 하는거예요.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갖고 막 영화처럼 그러는 게 아니라.이게 불살라 진다는 거예요. 빛을 잃어 버리는 것. 그러니까 이 역사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열심히 자가 발전을 해서 자체 발광을 하도록 놓아두시는 하나님의 시험장입니다. 만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건설하라는 거예요. 그리고는 마지막에 빛이신 주가 그들을 확 비추어버리심으로 말미암아 태양앞에서의 화려한 네온사인이 쓰레기에 불과하다 라는 것을 증명내 내는 거예요.
라스베가스 가보셨죠? 휘황 찬란한 그 네온사인이 해가 살짝 뜨기 시작하면 쓰레기 처럼 더러운 것으로 드러나 버리잖아요? 그거예요. 그건 밤에는 멋있어요. 이 밤같은 세상에서는 멋진 것처럼 보여지지만 태양을, 빛을 요만큼이라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쓰레기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어있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역사 내내 인간들의 가자발전을 허락 하세요. 어디까지 쌓아 올리나 보시겠다는거죠.하는데 까지 해 보라는 거예요. 그리고는 당신의 건축물, (하나님의 성전이예요 그것이,인간들은 자기들이 왕이 되어 자기들이 거할 자기들의 성전을 건축하는데 하나님이 하나님의 성전) 을 건축해서 그 옆에다가 꽝 세워버리는 거예요. 어떤게 천국인가 보라는 거죠. 이 역사는 그렇게 인간들의 나라는, 하나님의나라 앞에서 민망하고 무색해 지게 되는거예요. 거기에서 진정한 항복이 나오는 거고 진정한 순종과 연합이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어후, 죽어라 열심히 했는데, 역사 내내 열심히 했는데 아니었네 ?를 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역사가 존재하는 거예요. 불살라지기 위해서 그래서 사도바울은 같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인간의 열심은 자기 의, 라고 못을 박아요.
롬 10장 2절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좆은 것이 아니니 (이 지식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죠)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 자기 의가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열심히 뭔가를 하는데 인간들이, 인간들을 위해서 그리고인간들의 가능성과 능력을 드러내기 위한 열심, 이게 자기 의 거든요. 이게 죄예요. 죄라는 건 원래 없음이었던 자들이, 하나님이란 존재 외에 존재는 없었으니까 여러분 진화론자들 아니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시기 전에는 없음이란 말예요. 하나님 밖, 예수 밖 모든 게 다 없음인데 이 없음 이었던 자들이있음의 흉내를 내면서 자신을 있게 하신 이의 은혜와 공로를 찬송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는 모든 게 죄예요.
단순히 세상의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으로 금한 어떤 걸 하는 게 죄가 아니라,, 제발 좀 알아 먹으시란 말예요. 죄는 없음이라는 자들이 있음의 흉내를 내는 그게 죄란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을 있게 하신 하나님 앞에서 저는 원래 티끌이었습니다, 아담, 흙이란 말예요. 인간은 원래 없는 존재라다는 것을 히브리 사람들이 알아 먹는 개념 티끌이라는 걸, 흙이라는 걸 동원해서 설명하는 거예요.
사람이 마치 흙을 갖다 주물럭 거려 갖고 어떤 목사님 말씀대로 푹 찔러 봤다 이게 아니라 , 없었던 거라는 걸 어떤 개념을 동원하여 설영하는거예요. 그래서 티끌이예요. 그래서 흙이란 말이예요. 저는 원래 티끌, 없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렇게 티끌 즉, 없음이었을 수 밖에 없는 제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있음이 되었습니다라는 요 고백을 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됨에 자기의 능력과 가능성이 일조를 했다고 믿는 모든 존재의 자기자리 이탈, 요걸 설명하기 위해 마귀가 동원된 거구요.
그 마귀는 자기자리를 처음으로 이탈한 천사라고 하잖아요. 그걸 설명하기위해 그 마귀, 이러한 죄악된 세상의 총화인 그 마귀라는 실체가 동원이 되는 거란 말예요. 마귀는 실제하는 존재이지만 그걸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상징이란 말이죠. 그런 자기자리 이탈과 그 자기자리 오해가 다 죄란 말예요. 그게 죄란 말예요.
하마르티아, 과녁을 벗어나다. 휘브리스, 교만이죠 이거는? 그것도 역시 자기자리를 벗어나다예요.죄,교만,하마르티아,휘브리스 이게 다 자기자리를 벗어나는 거란 말예요. 원래의 처음 자리를 잊고, 아니 생각하지도 않고 원래 자기는 있음 이라고 우기는 거,요게 마귀란 말예요.그건 바로 나란 말입니다. 나. 그러한 오해에서는 반드시 자기 주체성 확립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러한 자기 주체성 확립의 과정에서, 아 나는 이 정도의 사람이야 라고 자존심을 챙겨가면서 그게 행복이라며 착각하고 사는 게 역사예요.
우린 그렇게 살았잖아요. 나를 증명하는 게 행복이다. 라고 여기기 때문에 죽어라고 돈버는거지요. 벌어서 하루에 네끼 먹는 사람있어요? 다섯끼 먹는 사람? 나는 재벌회장들 일과를 보면서 이런 불쌍한 사람들이 있나 , 하루 세끼중에서 두 끼를 차 안에서 먹더라구요. 그러려면 뭐하러 그걸 해요? 나 자랑 하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이 굉장히 부러워 해주는 거, 부러워 해준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정치가이면서 외교관이었던 마키아 벨리가 쓴 군주론을 보면 인간들의 자기 군주 만들기의 욕망이 얼마나 추악한지가 잘 나타나 있어요. 군주가 되기 위해선 자기 상태방에게 사랑과 두려움을 적당히 맛보게 해줘야 되는데 그 둘중에 하나를 버려야 할 상황이 오면 사랑을 버리고 두려움과 공포로 상대방을 압도 해야 한다, 군주로 다 읽어야 되요. 정치가는 다 읽어야 됐어요.
또 군주는 자기를 대면하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자비롭고 신의가 있으며 정직하고 인간적이며 경건한 것처럼 보여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가 아니라 ‘처럼’ 보여야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경건한 것처럼 보여야 군주로서 존경을 받을 수 있다. 시체 화장놀이죠 이게? 위장을 해서라도 그렇게 보이라는 거예요.군주 되려면. 이게 모든 인간들이 지금 시도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을 짓밟을 때는 아주 처참하게 짓밟아 뭉게 버려야 감히 복수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이거 무슨 논두렁 양아치들의 행동강령도 아니고…양아치들이 그러잖아요. 누구 때리려면 반 죽이라고. 대충때리면 꼭 복수하러 오니까. 이게 군주론이예요. 정치학의 고전이요 정치가들의 필독서라는 군주론이 담고 있는 내용이 이거라니까요.
이건 단순히 정치가들의 행동 강령일 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주로 삼아 살고 싶어하는 모든 아담 군상들의 합의된 행동이예요. 그래서 마키아벨리즘이니 국가지상주의니 하면서 오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스테디 셀러예요 이것이. 쇼를 하던, 연극을 하던, 폭력을 휘두르던 표리부동이나 속임수를 동원하던 열심을 가장하던 어떻게 해서든지 군주의 자리를 확보하고 사수하며 지키라는 것.거기에는 수단과 방법이 가려져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인간은 믿을 만한 존재가 못되니까 절대 믿지 말아라, 요거는 꼭 잊지 말아라 이렇게 당부까지 해줘요. 너만 왕 되면 된다는 거예요. 마키아벨리는 그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군주자리를 지키는 게 복이며 선이고 군주의 자리를 뺏기는 게 실패이고 악이라 해요.이게 세상나라의군주가 꼭 숙지해야할 삶의 원리죠.
그러나 마키아 벨리의 군주론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확하게 반대가 됩니다. 정확하게 다. 예수님은 높은 자가 되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된다고 했고 지는게 이기는 거라고했어요. 상대방과 싸울때 복수하지 못하게 반 죽이라고 그러지 않고 왼쪽 뺨을 더 대줘라, 남을 짓밟아서 자신의 권위를 사수하는 게 아니라 네가 밟혀주라 그랬어요. 이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예요. 군주론으로 대표되는 힘의 원리인 세상은 내가 주 임을 증명하고 내가 가장 착하고성숙한 자라는 걸 입증하는 걸 목적으로 하는 자기 주체성 확립, 존재성 확립이 존재의 목적이 되지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주 이시고 하나님이 홀로 주체자이심을 인정하며 그 창조주 앞에서 자신의 처음 자리, 없음 이었던 처음 자리를 인정하고 그 창조자의 은혜와 긍휼, 생명력을 선물 받아서 그분의 것으로 존재하며 그분의 뜻을 그려내며 사는 게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 되는 나라인거예요.
아담 군상들은 빨리 빨리를 삶의 모토로 해서 역사속 바벨탑을 쌓으며 스스로의 몫을 찾아 가고 있는데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은 하쿠나 마타타하면서하나님의 은혜 만을 의지하며 살아가요. 그분이 끌고 가시는 곳으로 나는 반드시 갈거니까 하쿠나 마타타 될대로 디라 케세라 세라 어떻게든 되겠지, 이렇게 지 맘대로 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끌고 가시는데에 내 몸을 맡긴다는 뜻이예요. 하나님이 끌고 가시는 그 이끌림에 이끌리는 삶에 나를 맡긴다는 뜻이예요. 그게 하쿠나 마타타예요. 노 프라블럼.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내 가치를 챙기려고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이미 묵시 속에 완성해 놓았기 때문에 노프라블럼, 내가 조금 실수하고 실패해도 괜찮다는 거란 말예요. 예수님이 옆에 달린 강도한테 그랬잖아요.주님나라 임하실때 나를 좀 기억해주세요 그랬을 때 강도가 얼마나 면목 없겠어요? 죽을 때까지 강도질만 했는데 그때에 하나님이 말씀 하셨다니까요 노프라블럼, 하쿠나 마타타.
오늘 본문 6절 이하를 보시면 바울이 사람의 참된 행복을 이렇게 정의를 해요.
6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다위의 말한 바( 여기 행복, 복 계속 나와요 뭐가 행복이고뭐가복인지 보세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는 사람은 복 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성경이 말하는 복은, 행복은 빨리빨리 허리 업 하면서 자아성취와 자기 주체성 확립에서 오는 게 아니라 하쿠나 마타타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서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게 행복이다 그래요. 세상나라 즉, 자아라는 나라의 건축을 멈축고 하난미께서 주시는 하나님 나라를 덧입는 게 행복이라 그래요.
건축자들은 항상 예수라는 모퉁이 돌을 울타리 밖으로 집어 던지죠? 그거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아담 군상들은 행복의 정의를 완전히 잘못 내리고 있는 거예요. 행복은 인간이 노력하고 발전시키고 성취하여 얻어 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빈 그릇이 되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감사함으로 넙죽 받아 챙기는 거, 이걸 행복이라고 그래요. 이 구절은 다윗의 시인 시편 32편을 인용한 구절인데요, 다윗은 충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겁탈하여 임신을 시켜놓고 그 사실이 탄로가 날까봐 사람을 시켜서 우리야를 교살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단을 시켜서 그 실체를 보게 만들었지요? 다윗이 자신의 죄ㅣ가 뭇언지를 직시하게 되었어요. 그전까지 다윗의 자의식은 원수를 두번이나 살려준 사람, 아무도 대항하지 못한 골리앗을물맷돌 다섯개로 물리친 용감한 사람 이게 이게 다윗의 자의식 이었어요.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실체를 그냥 폭로시켜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껍데기를 확 벗겨 보았더니 자신은 말할 수 없이 추악한 죄인이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시편51편에서 나는 모태중에서도 죄인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겠습니까? 라고 이야기 하는 거죠. 죄인 맞습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돌이킬 수가 없어요. 부정해진 밧세바를 원래 상태로 돌려 놓을 능력이 없고 이미 저질러 졌어요. 죽은 우리야를 살려 낼 방법도 없어요. 어떻게 해야되요 그러면? 큰일났네, 일은 벌어졌네. 그때 유일한 방법이 하나님이 덮어 주는 거예요. 가려주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시32편이예요. 나단이 와서 확 폭로해버린 다음에, 그런데 하나님이 용서해주신단다 까지 이야기를 했어요.이게 뭔일이냐? 그 얘기를 듣고 쓴 시편이예요.
시32편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자가 복이 있다 그러죠? 거기에서 가리우심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에피 칼립토예요. 그 단어는 덮다, 숨기다 라는 뜻이죠. 바울은 의도적으로 아피 칼립토라는 단어와 바로 그 앞의 ‘사하심을 받다’ 아피헤미를 동의어로 채택하여 쓰고 있어요. 7절을 잘 보시면. 그러니까 죄를 용서 받는다는 건 그가 지은 죄가 다 없어진단 뜻이 아니라 (물론 그건 묵시속에서 환료된 성도의 현실이예요 그런데 이 역사속에서는 죄를 용서 받는다는 게 ) 여전히 죄만 생산해내는 나를 하나님께서 가리고 닾는다 가 용서받은 죄인이예요.
여러분은 지금 이 역사를 살아가고 있는데 성경은 여러분을 의이이라고 그러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의인이 된 게 아니라 다윗은 이후에도 여전히 죄를 지었어요. 여전히 죄를 지었고 마지막에는 아주 더러운 배설물처럼 살다 갔어요.그런데 다윗이 안거예요 하나님이 덮으시는 것을 안거예요. 그래서 바로 밑의 본문 8절로 가면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거기에서 인정하다 라고 번역이 된 로기조마이는 대차대조표의 차변과 대변을 기록할때 사용되는 단어예요. 가계부 쓰는 사람들 계시죠 여기? 가계부를 쓰면 차변과 대변을 기록하게 되어있는데 차변에는 수입을 기록하고 대변에는 지출을 기록해요. 하나님의 장부 차변에는 우리의 선과 의가 기록이 되고,대변에는 우리의 죄가 기록이 된다고 가정을 해보자구요, 성경에는 의인은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하나도 없다 라고 했으니까 당연히 차변에는 기록될 게 없어요. 하나도 없어요. 대변에는? 대차대조표의 대변에는 칸이 모자라요.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 그 전체 내용이 다 들어가야 되요. 그게 우리 거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대차대조표의 대변 항목을 하나도 기입하시지 않는다, 이걸 로기죠라 그래요. 죄가 없어서가 아니예요. 수많은 항목이 있어요. 여러분은 앞으로도 거기 대변의 항목에 적힐 수 많은 일들을 할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안적으신다.이게 메로기세타예요. 죄를 인정치 아니하신다. 죄를 대변항목에 안적으신다.없는 게 아니란 말예요, 안적으신다는 말이예요, 이게 덮으신거예요, 그래서 복음이라는 거예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버린 거예요. 그것을 경험하고 실감하는 게 역사이며 인생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계속 해서 죄를 쏟아내고 자신의 영광과 가치만을 위해서 살아가는데 하나님께서 끝까지의 사랑, 끝까지의 사랑으로 계속 우리의 발을 씻기고 계시는 거예요. 매순간 당신의 피로 우리를 덮어버리시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면 예수의 피 한잔 마시고 시작하는 거예요. 피 한잔 하실래요? 이러면서. 사망직전의 죄인들에게 계속해서 예수의 피를 부어 먹이시는 거예요. 우린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예수의 피와 십자가의 필연성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6절과 8절에도 똑같은 로기조마이, ‘여기심’이라는 단어가 등장 하는 거예요. 다시 6절로 가보세요. 오늘은 제가 밑에서부터 올라가면서 설명해드리는 거예요.
6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일한 것이 없이 의로 여기심을 받는 자라는 말에서 이 ‘여기심’이 바로 로기조마이 예요. 하나님께서 하늘의 대차대조표의 차변 항목에 전혀 기록할 것이 없는 상태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선한 일을 행하는 자도 없고 선을 생각하는 자도 없다그랬으니까) 차변 항목에 전혀 들어갈 것이 없는데, 당신이 준비하신 의를 그 차변 항목에 로기조마이, 인퓨트 하신다는 거예요.그걸 바울이 행복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이고 그러한 복된 소식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안좋으면 할 수 없는 거고.
이 로기조마이 여기다 라는 단어가 로마서 이해에 아주 중요한 키예요. 수없이 나와요 로마서에. 이 로기조마이라고 하는 단어는 어떠한 사실로 해서 판정을 내리고 기록을 하는 게 아니라, 판정권자의 권한으로 그냥 그렇다 라고 인정을 해주는 거예요. 사실은 아닌데, 이게 로기조마이예요. 그래서 복음이라니까요. 그런데 우린 자꾸 사실을 만들어 내려고 한단 말이예요.그것을 인퓨테이션, 전가 라고 하잖아요. 하나님이 사실이 없는데 그냥 자기가 만들어서 우리 것으로 여겨주는 거예요.
이게 전가란 말입니다. 그걸 이해하기 위해선 반드시 자신의 실체 파악이 먼저 되어야 되는 거예요.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구나 라는 실체 파악, 자아 인식. 그런데 인간들이 그걸 안하는 거예요. 심지어 교회라는 사람들도 말씀 앞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실체를 애써 외면 하려고 하지 제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려고 하지 않아요.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조금낫죠? 하고 우기고 싶어 한단 말이예요. 그러한 하나님의 전가가 실제로 효력을 바휘하는 걸 인정하고 수긍하는 걸 믿음이라고그래요. 물론 그 믿음은 하나님의 믿음에서 격발되는 우리의 주관적 믿음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일 한것이 없이’예요, 일한 것이 없이.
4절-5절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실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이 구절을 조금더 원어에 맞게 제가 풀어서 번역을 해볼게요. 일을 하는 사람은 그가 받는 품삯을 은혜로 생각하지 않고 당연한 보수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심판대 앞에서 염소들이 그러죠? 내가 언제 안했습니까?이랬으니까 달라는 거예요. 내가 언제 안했습니까?
5절
그러나 일을 아니할 지라도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의롭다 여겨주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 요게 이거예요, 나는 흙이었어요.나는 흙으로 있었는데, 먼지였는데 하나님이 너 의롭다, 너 존재 되라 창조의 말씀이 떨어져서 창조물이 되었을때 이것을 맞아요 그렇게 되는거지요? 하고 인정하는 것 요게 일한 것이 없이예요. 아무것도안해도 된다는 말이아니라. 제발, 그렇게 유아적으로 좀 생각좀 하지 마시란 말예요.)
그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의롭다 여겨주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비록 아무 공로가 없어도 그 믿음이 의로움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창조 하셨고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그것, 이게 역사의 목적이란 말예요. 그래서 이 역사가 그 목적을 다수행하면 불살라 없어지는 거예요.
보시다시피 사도 바울은 보편적 아담 군상들의 일을 아주 경계하고 있어요. 여기에서 일하다’라는 말로 번역이 된 단어는 엘가조마이 인데 이거는 노력하다는 뜻이예요. 노력하다. 그렇다면 지금 사도 바울은 인간들의 자기 자존심 챙기기 자기 존재성 챙기기 자기 주체성 챙기기의 모든 노력을 폭격하고 있는 거예요. 노력을 ,빨리빨리 이것을 폭격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배제된 상태에서 인간들의 그러한 노력은 혹, 그러한 일은 없겠지만 그가 은혜를 입는다고 해도 그것을 자기가 일한 댓가로 여기지 은혜의 선물로 여기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이게 4절,5절이예요. 인간들은 자기가 절대로 자기가 한 일을 두고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라는 고백을 못하는 족속들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한 일이라고는 죄지은 것밖에는 없다는 걸 아는데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하늘소망을 품게 해주셨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자들은 하나님의 주 되심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만을 찬송하게 되기 때문에 그들을 가리켜 의롭다 한단 말이예요.
의가 뭐라 그랬어요? 디카이오수네, 싸다크 뭐라 그랬죠? 히브리 사람의 원래 의의 개념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의의 개념과 달라요. 성경이 기록될 때 아리스토텔레스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그런 헬라의 철학자들이 의의 개념을 미덕 이런 걸로 번역을 해놓았는데 이게 영향을 받아서 의가 지금까지도 그렇게 우리에게 전해져서 의롭다 그러면 뭔가 대단한 의인. 착하게 잘 산 사람, 정의로운 일을 한 사람 이렇게들 이해를 하고 있는데 아니란 말이예요. 원래 히브리 사람들의 의의 개념은 관계의 개념이란 말예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인간과 자연 이런 관계를 맺고 있는 두존재가 그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와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해 내는 원래 있어야 할 그자리에서 그걸 성실하게 수행해내는 상태를 디카이오수테 싸다크라고 이야기 한단 말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의는 뭐겠어요? 하나님은 창조주로써의 역할을 계속 하는 거예요. 계속 붓는 거예요 생명력을요.그리고 인간은? 그 생명력을 받아 존재하는 거예요. 이게 의존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 그런데 얘가 ‘고만 고만, 나도 힘이 있는데 왜 자꾸 나를 이렇게 먹여 주려고 해? 엄마 그만좀 먹여줘 내가 알아서 먹을게’ 이런 어린아이처럼 그만 나도 할 수 있다니까요. 이게 선악과 사건이었잖아요? 그게 불의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걸 죄라고 하는 거란 말예요. 그런데 나는 아무런 공로도 없고, 일 한것도 없습니다.내가 죄인중의 괴수 맞습니다. 더스트 맞습니다. 먼지가무슨 선한 일을 하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그 의만을 꼭 붙드는 자, 믿 는자 그가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게 4절,5절이란 말예요.
그러니까 구약 때나 신약 때나 율법이 있기전이나 율법이 주어진 이후나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은혜로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게 로마서 전체의 진술이예요. 잘보시면 로마서 1장 17절 이게 그 키예요. 로마서 전체의 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이게 로마서 전체의 코어 키이고 그걸 중심으로 그 이야기를 쭉 설명해 놓은게 로마서예요, 그러니까 전체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율법이 있는 자건 없는 자건 전부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그래서 하박국에 그 말씀을 들어서 바울이 계속 반복하여 설명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뭔가 잘나서가 아니라 율법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사를 지내서가 아니라 착하게 살아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율법 이전의 사람인 아브라함과 율법 이후의 사람인 다윗이 등장하는 거예요. 율법 이전 사람의 대표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 율법 이후의 우리의 대표 다윗.이 두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 그럼 뭐예요? 율법 전이나 후나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건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한 로마서 3장 25절에서도 명기가 된 바 있어요.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삼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 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려 하심이라
여기서 전에 지은 죄가 십자가 이전에 구약 세대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어떤 개인의 예전에 지은 죄가 아니라 원어로 보면 이게 십자가가 서기 이전에 그 모든 죄 그리고 그이후에, 이때에도 라고 나오죠 26절에? 그러니까 그 때에도 이 때에도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화목제물에 의해 의롭게 되는 것이다를 설명 한단 말예요. 거기에 대한 확실한 예가 율법 이전 사람인 아브라함이죠.그래서 또 아브라함이 등장하죠. 또 아브라함이.
4장 1-3절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거니와
사도 바울은 로마서3장 21절 부터 31절까지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의롭게 되는 길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또 다른 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라는 것을 강력하게 웅변하죠? 그리고는 그런즉, 이라고 4장 1절을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즉. 거기에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예로 등장하고 있단 말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의의 이야기여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첫 구절부터 아주 원색적이며 강력해요.
아브라함이 육신으로 얻어 낸게 뭐가 있냐? 이래요 바울이 유대인의 조상인데..아브라함이 그의 육신으로 얻어 낸게 뭐가 있냐?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고 의의 조상이 된 것에 아브라함이 그의 육신으로 보낸 게 뭐가 있냐 그런 뜻이예요. 육신으로서의 아브라함은 쓰레기다 라고 선언을 해버리는 거예요. 이거는. 아브라함은 무용지물이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해 주신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더라는 거예요.
여기에도 여겨주시다. ‘로기조마이’가 나와요 아브라함이 괜찮은 사람이 되어서가 아니라계속 해서 마누라 팔아 먹고 애굽으로 도망 가고 그리고 130살이 넘어서도 계속 첩을 얻어서 자식 낳고 그러는데 하나님이 의로, 로기조마이, 여겨 주신 거예요. 차변 항목에 아브라함의 인생의 차변 항목에 하나님이 의를 쭉 기입해주신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의의 선진들의 면모를 보면 다 자기 인생이 아니죠? 아브라함,사라 마찬가지예요. 아브라함이 무슨 믿음으로 갈대아우르를 떠났어요? 사라? 하나님이 이삭 주신다고 했을 때 비웃었잖아요. 그런데 믿었대요 그거를. 모세? 사람 죽이고 도망간 거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이 별로 달갑지 않아서 자기가 간거 아니잖아요. 우리가 알잖아요. 그런데 그러한 대변 항목을 하나님이 싹 지우개로 지우더니 차변 항목에다가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을 받는 걸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낫게 여기고….언제 그랬느냐고요? 그런데 하나님이 차변 항목에 자기가 기록을 해주는 거예요.
이게’여겨주시다’예요. ‘로기조마이’ 이걸 구원이라고 한단 말이예요. 이걸 덮으심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사람처럼 각기 다른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일때가 있어요.
창 26장을 보세요. 거기엔 또 다른 말이 나와요. 지금 바울은 분명히 아브라함이 한 게 뭐있냐 아브라함은 쓰레기다, 그러는데 하나님은 다른 말을 하세요.
창 26장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지금 하나님이 이삭에게 하는 말이예요)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바울은 지금 분명히 아브라함이 뭐 한게 있냐고 그러는데 하나님은 율례와 계명과법도를 지켰다 그래요. 누구말이 옳아요? 여기서 율례와 법도그리고 계명이라고 번역이 된 이말, 토라,후카,미쓰바는 다 율법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아브라함때 율법이 주어졌어요? 헷갈리죠 지금? 아브라함 모세 다윗 어떤 시대 사람인지.
모두 다 율법이란 뜻인데 아브라함때 율법이 주어졌어요? 아브라함은 B.C 이 천년전 사람이예요. 율법은 B.C천 오백년, 모세에게 주어진 거란 말이예요. 그럼 이때에는 율법도 없었는데 하나님이 내 아들 아브라함이 율법 지켰다 그래요.그럼 아브라함한테만 몰래 살살살살 율법을 줬는데 아브라함이 그걸 다 지킨거예요? 여러분 율법의 내용이 뭐라 그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메시아에 관한 하나님의 창세전 약속이예요. 그래서 너희에게 메시아가 필요하단다, 이게 율법이 가리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그걸 믿었다는 거예요. 이게 ‘율법을 지켰다’ 는 거예요. 율법이 의미하고 상징하는 진의가 따로 있었는데 그 진의를 알아먹은 걸 ‘율법을 지켰다 ‘라고 하지 그런 어떤 구체적 세목 몇개를 지키고 안지키고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예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인생을 통하여 왜 예수 그리스도가 너를 살려야 되는지를 알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삭에게 찾아가셔서 똑같은 일을 또 행하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또 야곱에게 찾아가서 똑같은 일을 행하시고,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또 똑같은 일을 행하시는 거예요. 왜 예수가 와서 너희들을 구원해줘야하는 지 알아?왜 죽어야 되는지 아니?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동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 홀로 이루시는 것이며 그 언약 성취의 방법으로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가 사용될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건 마치 창세기 3장 15절의 원시복음안 여인의 후손에 의해서 아담과 하와가 살게 될거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구원을 얻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와 같은 거예요. 아, 여인의 후손에 의해서 사는 거구나! 아브라함도 그걸 알았다는 거예요.
자꾸 요즘 새로 우리 교회 설교를 듣는 분들이 에베소서 강해중에 제가’ 아담과 하와가 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천국에 못갔죠?’ 라고 제가 이렇게 말한 대목이 있나봐요. 제가 그렇게 이야기 한 건 ‘왜 아담과 하와과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에덴 동산에 있어야 됩니까 천국에 가야지’ 이런 이야기였는데 아담과 하와는 지옥 간다고 그랬다고 어떤 웹싸이트에다가 제 이름을 거론하고 이렇게 써 놨더라구요 다 이해도 못했으면서.
아담과 하와는 죄가 없었는데 에덴동산에서 선악과의 시험을 통과해야 했단 말예요. 그러니까 천국은 죄가 없어서 가는 게 아니라 의가 덧입혀져야 가는 곳이란 말이예요. 그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거지 무슨 아담과 하와가 왜 지옥 가요? 천국 갔어요. 알아 먹었다니까요. 그랬기 때문에 산 자의 어미라고 지은 거 아니예요? 산다! 우리는.
그래서 신약에서도 계명을 지킨다. 말씀을 지킨다는 이런 개념과예수를 믿는다 이런 개념을 같은 걸로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요일 3장 22절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가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계명을 지키는 게 뭐라고 해요? 율법의 세목을 지키는 거라고 해요? 예수를 믿는 거라고 하잖아요.예수를 믿는 게 계명을 지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 이름 앞에서 자신들의 처음자리를 확인하여 다른 이들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다른 말로 사랑하는 다른이들을 외모로 판단하는 거 이게 미워하는 거예요. 그런데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당신이나 저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 아니면 다 그냥 쓰레기이며 죽은 흙에 불과 합니다, 이걸 인정하면서 상대방을 바라 보는 걸 사랑이라고 해요.
그게 바로 계명을 지키는 거라는 말이예요. 그러니까 말씀을 지킨다, 말씀대로 산다 라는 말의 의미는 성경에 나오는 하라 하지 말라의 명령을 잘 분별하여 지켜내고 수행한다는 말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하라 마지 말라의 명령은 노자의 도덕경에도 똑같이 나오고 불경에도 똑같이 나와요. 그러면 그 사람들도 지금 말씀대로 사는 거예요? 말씀대로 사는 게 뭔지 잘 생각해보세요)그게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를 알아 먹는 거예요.그리고 말씀이신 예수가 창조해 나가는 새창조의 과정에 들어가 있는 그게 말씀대로 사는 거예요. 말씀에 의해 끌려 가는 거, 새창조의 자리로.
‘주여, 왜 당신의 때가 아닌데 벌써 와서 괴롭히나이까?’ 이거 누가 한 말이예요? 귀신이 한 말이예요. ‘이 돌들로 떡을 만들어라’ 누가 한 말이예요? 마귀가 한 말이예요. ‘나에게 경배하면 이 세상 천하 만국의 영광을 너에게 주리라’ 누가 한 말이예요? 마귀가 한 말이예요. 이거 말씀이예요 아니예요? 마귀가 한 말인데? 성경에 기록되어 있잖아요? 말씀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지킨다는 게 뭔지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란 말예요.
마귀가 한 말도 지켜야 되는 거예요? 말씀대로 산다는 건 이 말씀 자체가 예수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걸 계시의 역사라고 해요. 예수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예수가 나의 구원자이며 주 라는 걸 아는 자리로 내가 말씀에 의해 끌려 가는 그걸 ‘말씀대로’ 산다그러는 거예요. 말씀에 끌려가며 산다라고 하는 거요. 말씀을 지킨다는 건 그 말씀을 내가 장악하여 사유한다는 뜻이잖아요. 그래야 지키죠. 그런데 하나님이신 말씀이 어떻게 우리 같은 인간에게 장악이 됩니까, 포착이 되요?
말씀이 우리를 장악하고 포착하여 당신이 이끄는 곳으로 끌고 가지요. 이걸 말씀대로 산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디서 어줍지 않은 도덕 윤리 수준을 갖고 끌고 들어와서 왜 교회에서 말씀대로 안사느냐고 ,,그 사람들 한테 물어보세요. 당신 말씀이 뭔지는 아느냐고. 말씀에 대한 정의 구원에 대한 정의, 죄인에대한 정의 이런 것도 하나도 세워지지 않은 인간들이 어줍지 않게 훈계하고 돌아 다녀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그려내는 하나님이예요. 그래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그분이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예수를 배우고 예수를 의지하고 예수를 의존하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을 보면 되는 거예요. 그 말씀을 하나하나 지켜내는 , 그 세목을 지켜내는 게 우리의 본무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율법과 계명을 지켜서 의롭다 하심을 얻고 복을 받았다는 창세기의 말은 아브라함이 무슨 기특한 행위를 해서 점수를 얻었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처음 자리를 자각하고 아, 나는 이런 인간이구나 이렇게 처음 자리를 자각하고 하나님이 선물해주신 믿음에 의해서 자신을 완전히 부인 당하고 오직 어린 양 예수만 믿는 자가 되어 의롭게 되었다 라는 그런 말인 거예요.
자, 이제 왜 로마서에서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 대표적 인물이 아브라함으로 등장하는데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으로 구원 받는 이의 대표로 아브라함이 동일하게 등장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루터가 잘못 본 거예요.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 아닙니다.로마서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기독교에서 이야기 하는 행함은 믿음이 격발해 내는 자기 부인인 것이지, 우린 아니구나 이런 자기부인인 것이지 다른 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도 열심을 부려서 행하고 있는 도덕적 윤리적 착한 행위정도가 아니란 말이예요. 성도에게 요구되는 행함은 다른 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이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행함이어야 되요. 그래야 믿음으로 하는 행함일 거 아니예요.
야고보서에서 이야기하는 믿음과 행함은 뗄래야 뗄 수가 없다면서요? 야고보가 그렇게 예기 했잖아요. 그러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행함만 성경이 요구하는 행함이잖아요. 그런데 믿음이 없이도 할 수 있는 그 행함은 성경이 요구하는 행함이 아니란 말예요. 믿음으로만 나오는 행함, 그게 뭐냐는 말이예요. 야고보서로 가서 야고보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한번 읽어보면서 그 행함이 뭔지 한번 보자구요.
약2장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도 믿고 떠느니라 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데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구원을 받았대요. 바울과 야고보가 싸우고 있는 거 같죠 마치? 어떤 토론회 석상에서. 바울은 아니다 무슨 행함이냐? 야고보는 아니다 행함이다! 그래놓고 아브라함의 예를 드는데 아브라함이 뭘했냐? 아들을 바쳤지 않냐 그래요. 그래서 혹자들은 자식을 바쳐야 되다는 거예요. 자식까지도 바칠 수 있는 헌신을 해야 행함이다 그래요. 오늘 맏아들 다 잡을까요? 오늘 그냥. 둘째 케빈 , 너무 안심하는 거 같다~ㅎㅎ. 맏아들 잡아버려요 오늘? 그건 몰렉에게 제사 지내던 우상숭배자들이 했던 일이예요. 맏아들 잡아서 자기 복을 구했다니까요.그럼 행한 거예요 그거? 맏아들 잡았잖아요? 신에게. 몰렉이라고 하니까 어디 딴데가서 우상 섬겼는 줄 아는데 성전안에 그 제단이 있었단 말입니다.
여러분 이 야고보서의 시작이 어떻게 되는 지 아세요?
약2장1절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받았으니로 시작해요. 믿음을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여기서 부터 오는 게 믿음과 행함의 이야기예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예수를 믿는 믿음을 받은자들아, 선물 받은 자들아 너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니, 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누가 잘나고 누가 못나고가 어디있니 그런데 믿음을 받았다고 하면서 어떻게 다른 이들의 됨됨이나 성숙의 정도나 성취의정도 이런 걸 갖고 저사람은 신앙이 좋은 사람, 저사람은 신앙이 없는 사람, 이사람은 부자니까 축복 받은 사람, 구약때는 부자가 하나님의 축복 받은 사람으로 여겨졌거든요. 이사람은 하나님의 축복 받은 사람, 이사람은 하나님의 저주 받은 사람, 어떻게 그렇게 판단을 할 수 가 있니 부터 시작하는 거예요ㅡ 야고보서 2장 1절이요.
너희들이 진짜 그 긍휼을 안다면 믿음을 받은자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거라는 걸 안다면 어떻게 사람을 그들의 됨됨이나 그들이 성취한 성숙의 정도나 그들이 한 착한 일이나 나쁜일 이런 외모로 갖고 그들이 구원을 받았느니 안 받았느니 축복 받았느니 저주 받았느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니? 이거예요. 그거 안하는 걸 행함이라고 그런다니까요. 완전히 거꾸로 보고 있는 거예요. 오늘날 개혁주의는 야고보서를요. 지금 야고보가 아브라함과 라합을 예로 들어서 강조하고자 하는 행함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서 믿음을 선물 받은자들이 그 긍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함부로 겉으로 나타난 증상만 갖고 사람들을 판단하는 못된 행위들을 지적해내는 거예요.
그래서 갑자기 귀신이 등장하는 거예요.귀신이 가진 믿음, 귀신들도 하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이 한분이신 줄도 안대요 그리고 그 앞에서 두렵고 떤대요.귀신들도 두려워 떠느니라. 그러면 적어도 귀신들이 우리 믿음보다 나은 거지요?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떨어 본적이 몇번 있어요? 귀신들은 계속 두렵고 떨어요. 우린 귀신보다 못한 믿음을 갖고 있으면서 뭘 하겠다는 거예요 지금? 귀신들은 적어도 하나님이 언제 오는지도 알고 그분 앞에서 우리는 두렵고 떨어야 하는 존재라는 걸 알아요. 인간들만 몰라요. 성도라고 하는 인간들만 몰라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요? 덮어야지요.
그러데 귀신들이 흉내낼 수 없는게 있어요. 귀신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지 않아요. 원래 마귀 사단 귀신 이건 나예요. 마귀 사단 귀신이란 존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도 있음의 흉내를 내려고 하는 모든 존재의 악마적 속성의 총합으로 상징적으로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진짜 그 존재가 있긴 있지만 그걸 모형하여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귀신은 절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아요. 왜? 나도 내 주체성과 존재성을 챙기겠다고 튀어 나온 게 마귀 거든요. 그걸 설명하기 위해 자기자리를 이탈한 루시퍼가 등장한 거니까. 절대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을 구하지 않아요, 귀신은.
기독교 역사속에서 사람들을 훌려낸 신앙지상주의가 바로 그러한 거예요. 지옥 가기 싫어서 천국 가고 싶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그분의 은혜와 긍휼앞에서 완전히 빈그릇이 되는 건 자존심 상해서 싫다는 거예요. 천국은 가고 싶어요 그런데 내가 주인공인 천국이어야 돼. 지옥 가기 싫어요, 역시 내가 주인공이예요. 긍휼이라는 히브리어와 어머니 자궁이라는 히브리어가 그 어근이 같다고 했어요. 옛날에는 혼용해서 같이 썼어요. 긍휼이라는 건 어머니 자궁속의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탯줄에 연결이 되어서 어머니 절대 의존적 존재를 살아야 하는 것 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단 한순간도 존재일 수 없고 생명일 수 없음을 깨닫는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생명을 긍휼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스스로의 존재성과 정체성을 챙겨서 하나님 앞에서 그 탯줄을 제거 하고 홀로 있음의 흉내를 내는 고깃덩어리, 이거 유산 된거예요. 그 마귀의 세력은 절대로 그 긍휼을 구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나는 홀로 살 수 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건 이미 고깃덩어리예요. 뿌리 뽑힌 풀,나무와 똑같은 거예요.살아는 있지만 죽은 거예요. 사망으로 가기때문에 .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헌금 선행, 구제 전도 예배 할 수 있어요. 이거 다 불교에도 있는 거예요. 이슬람교에도 다 있는 거예요.우리보다 헌금 더 많이 하고 우리보다 기도 더 많이 합니다. 그들은 폭탄, 박격포탄이 날아와도 하루 다섯번씩 꼭 기도해요.
예배? 우리는 골프 약속만 있어도 빠지지만 그사람들은 목숨 걸고 안 빠져요. 그러면 믿음 없이도 이건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그죠? 그런데 성령 받은 자들에게서만, 믿음을 받은 자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게 있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거예요.헌금을 하면서도’ 하나님 어떻게 이걸 하면서도 여전히 손이 이렇게 벌벌 떨리죠 역시 저는 하나님 은혜가 없으면 안되는 존재네요’ 자, 헌금은 똑같이 하는데 믿음을 얻지 못한 자들은 그걸 자기 자랑으로챙겨 갖게 되고 성령 받은 가진 자들은’ 역시 저는 쓰레기네요’로 가는 거예요.
구제, 착한일, 선한일 마찬가지예요.뭘 그렇게 대단하게 우리가 진심에 어린 구제와 선한일을 합니까? 다 나의 면을 위해서 하는거지. 그러면서 성도는 예수께로 가요.믿음이 없는 자들은 그걸 자기 자랑으로 다 챙겨 가지면서 나는 이렇게 했는데 너는 왜 못해 라고 지적을 하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걸 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예요.어떤 일을 하던 그 속에서 긍휼을 구하느냐 하나님의 그 탯줄, 하나님의 생명선이 떨어져 나가면 난 죽는다 라는 이 자각이 있느냐 없느냐 이게 문제란 말이예요.
그러한 죄인됨의 자각이 맨 먼저 있어야 되는데 이게 없단 말예요,이게. 여러분 예수 왜 믿으세요? 천국 가려고 믿으세요? 아니면 병 걸릴까봐?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안타깝게도 우리 교회는 평안이 아니라 울화가 치밀죠. 이건 질병이 낫는 게 아니라 감기 걸려서 와가지고 독감에 걸리고 그러지요. 여러분 그런데 그렇게 여러분의 천국,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를 믿었어요. 그런데 죽고 나니까 천국이 없어 그럼 어떻게 할거예요? 아 예수 괜히 믿었네 그럴거 아니예요, 목적이 그거였다면.
그러면 예수님은 얼마나 불쌍한 분입니까? 잘 생각하세요. 내 천국, 내 구원을 목적으로 예수를 믿는게 잘하는 거라고 알고 있었지요? 그건 예수님을 모독 하는 거예요 여러분. 천국, 구원 이런 거 없으면 예수는 쓰레기 되는 거예요. 이게 좋은 믿음이예요?
여러분은 그 예수를 사랑하는 분이예요. ‘그 예수와 함께라면 초가삼간도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거는 그냥 립서비스입니까?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 처음자리를 배워본 적이 없어서그래요. 그걸 자각하는 게 성도의 본무라는 걸 배워 본적이 없어서 그래요.
믿음은 예수가 믿게 하셔서 믿는 거예요.
예전에 80년대에 하이틴 스타 였던 박미령이라는 탤렌트가 무당이 됐어요. 그렇게 이쁘고 똑똑했던 여자가 갑자기 신이 내린 거예요. 받기 싫어요 자기는, 뭐냐구요? 잘나가던 탤런트가 무당이 됐다, 이거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울고불고 매달렸어요. 제발 다른 사람한테 가라고. 그런데 안되요. 건강이 나빠지고 사고가 생기고.. 받아야 돼 어쩔 수 없이, 받았어요, 무당이 됐습니다. 그 즉시 기적을 일으켰어요. 작두 위에서 뛰는데 머리카락도 잘라지는 작두 위에서 맨발로 뛰는데 사람이 하나도 안다치고 그리고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기 시작해서 그걸로 구제, 착한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모든 걸 털어 착한일을 하고 있어요. 여러분 성령받아 예수 믿고 착한 일 하는 사람과 이 사람이 뭐가 달라요?
우리의 목적이 그겁니까? 믿음이 그렇게 불가항력적으로 뚫고 들어오는 건 똑같아요. 맞아요. ‘아, 괜찮다니까요. 예수 믿는 거 맨날 지고 살아야 되고 당해야 되고 모함당해야 되고 아, 싫어요’ 그런데 성령이 들어와 버렸어, 그런데 끌고 가는 방향이 달라요. 나는 내 믿는 신을 의지하여 이렇게 착하게 살아요 라고 자랑하는 게 아니라 제가 이꼴이라 그냥 뜷고 들어오신거군요? 이렇게 우리를 몰고 간다니까요. 우린 무당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되요. 그런데 그 무당이 사는 삶을 쫒아가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요. 내가 모시는 신이 나를 이렇게 훌륭하게 만들어 줬다는 거지요. 거기에는 그 일을 하는 내가 주인공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야고보서1장 10절에서 낮은 자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 한자는 자신의 낮음을 자랑하라고, 모든 게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서 경륜이 되는 것이고 모든 게 하나님의 계시를 그려내는 도구라면 가난하다고 부끄러워 할 것도 없고.. 어차피 긍휼로 우리는 평등하게 된 자 들이고 이땅에서이 역할은 그냥 하나님이 맡긴 거니까, 없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고 많이 가졌다고 그 사람 부러워 할 이유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낮은 자야 너희들은 구원받았잖아, 하나님의 백성이 됐잖아 너희들의 높음을 자랑하라 그러는 거예요. 높은 자들아, 부한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낮음을 자랑할 수 있어야 된다 그래요. 그말은 많이 갖고 그리고 이땅에서 훌륭한 인격적 성숙과 선한 일을 행하며 이런 것들이 나의 가치를 높여 주는 건줄 알았는데 아니네, 긍휼로 구원 받는 거네 그때에, 이걸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야, 그거 아니라니까’ 하고 가르쳐줄때 그 낮아 짐을 ‘맞네요 하나님’ 자랑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성도는요. 야고보서의 내용은 전부 그 얘기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웃을 외모로 판단하느냐 그 이갸기 잖아요.
아브라함이 바로 그 행함의 세계로 들어갔다는 뜻이예요.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그게 나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자기 자식의 심장에 칼을 꽂을 수있었던 건 하나님의 언약은 제가 도와 준다고 성취되는 게 아니네요. 얘가 여기서 죽어도 하나님은 내 후손을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나한테 만드실 걸 저는 이제 믿습니다. 제가 안 도와 드려도 되네요. 그전에는 도와 드렸잖아요. 내가 죽으면 안되니까. 그 언약이 성취가 안되니까. 그러니까 와이프도 팔아먹고 애굽으로 도망도 가고 내가 살아야 되니까 그랬는데 모리아 산에 다시 가보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이 성취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 죽여’ 그럼 죽이는 거예요. ‘난 몰라요, 어차피 하나님이 살려 내시던지 아니면 딴 놈 데려다가 또 만드시겠지요’ 자기부인의 자리이지 거기는. 나는 내 아들까지도 이렇게 바쳤습니다는 행함이 아니란 말이예요.
라합, 마찬가지예요. 내가 속했던 나라를 나를 어떻게 할지도 모르는 그 이스라엘에게 팔아 먹어 버리는 거예요. 이 나라는 아니구나 나는 저 나라에 속해야 사는구나 라고 내 인생 전체를 팔아버리는 거예요. 이게 라합이예요. 그래서 야고보서에 행함이 아브라함과 라합으로 등장하는 거지 그 사람들이 행한 행함을 본받아서 하라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걸 본 받는 자들이 우상 섬기는 자예요. 몰렉에게 아들 바치는 자.
기독교는 하나님에게 아들 바쳐서 내가 원하는 거 얻어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날 찾아 와서 자기 아들을나에게 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야고보서에서 그러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 누가 친구라고 그래요 예수님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가 친구라고 해요. 우리는 안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심으로 우리의 친구가 된 거란 말이예요. 그 이야기예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요.
그런데 전부 자기들이 뭘 해서 예수님께 가겠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없음으로 내려간 거예요.결국에는 그게 긍휼을 구하는 자, 어머니의 탯줄의 소중함을 아는자예요. 이거 끊어지면 안되는구나,끊어지면 유산 되는 거예요. 그때 세상 사람들이 가치로 힘으로 규정해 놓은 것들이 모두 은혜의 산물임을 알게 되어서 나눔과 구제와 선행의 삶이 문득문득 나오는 거예요. 지속적이지도 않아요. 문득문득 나와요. 그러다가 또 아까워서 주머니 움켜쥐고 또 말씀과 나의 접촉점이 생기면 그때 또 그렇지 이게 진짜 가치가 아니지 하면서 그러한 변화가 나오는 거죠. 그러나 그러한 변화 또한 나에게 사유 되는 게 아니예요. 사유가 된다라는 건 계속 지속 되야한다는 뜻인데 그거 안되잖아요.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 가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이 어디에서는 이렇게, ’ 야, 무슨 행함이야?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야’ 라고 했다가, 딴데 가서는 ‘야, 이 나쁜 새끼들아 어떻게 그렇게 사니? ‘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도데체 무슨 말을 들으라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예?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하지 마시고.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고린도 교회 같은데에 편지 쓴 거 보세요. ’야 이 도둑놈 같은 새끼들아 너희들이 예수를 믿고 어떻게 그렇게 사냐? ’ 딴데서는 ‘야, 자유해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거야’ 이런 모순되는 설교를 저만 하는 게 아니라 사도 바울, 성경이 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똑같이 그렇게 설교를 하시다가 가셨다니까요. 뭐예요?
어떤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거기에서 예수의 긍휼을 붙들게 되어있는 거예요. ‘야 이 도둑놈의 새끼들아!’ 그러면 맞습니다, 로 가게 되는 거고 ,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거야 그러면 그렇죠 제가 이 모양이니까 예수의 긍휼로 저는 구원 받는 거죠? 어떤 설교를 해도 예수의 긍휼로 가게 되어있어요. 뭐가 옳은 설교이고 뭐가 그른 설교라고 그 사람이 진짜 예수와 십자가를 이야기 하고 있다면 여러분이 함부로 판단하면 안되는 거예요. 거기서 내가 예수를 붙드는가를 봐야지.
그래서 초대교회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알게 되고 성령이 임하자 자기 걸 다 내놓아 버린 거예요. 헌금 정도가 아니라, 십일조 정도가 아니라 재산 전부를 내놓은 거예요. 아,역사는 우리의 행복과 구원에 전혀 기여가 안되는구나 하고 버린 거예요 그건요. 착한 일을 한 게 아니라. 만일 성령 받은자들은 저부 그렇게 살게 된다면 그게 지속적으로 이어졌어야 되요. 안 이어졌어요 여러분. 성령 받은 자들은 전부그렇게 산다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그런 나라인데, 그런 모습들이 우리의 삶속에서 지향성으로 나타나고 문득문득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이 접촉점이 형성될 때 나타날텐데 그 때 야, 우리가 요리로 가는 거구나를 알아 먹으라는 거예요.
집 팔아서 헌금하고 같이 모여산다 이거 아니라니까요. 마게도냐 교회 보세요.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에 처했다니까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인데 바울의 말만 듣고 그 가난했던 사람들이,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었어요 그 사람들은요. 그런데 우리 제발 헌금좀 하게 해주세요,하고 쫓아 다녔어요, 사도 바울을. 이게 우리를 살리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복음을 아는 자들이 알더라는 것이죠. 그래서 마지막 남은 빵덩어리를 헌금 봉투에 넣어 버리는 거예요. 그러나 이게 지속 되지 않아요. 보세요 여러분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의 이야기가 창세기 15장이라고 했지요?
그 창세기 15장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아세요? 그 믿음과 의의 이야기, 그걸 지금 사도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인용해다 쓰잖아요. 어떡헤 시작되죠? 아브라함이 두려워 하더라에서 시작되요.
창15장1절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임이니라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 이야기 이거든요. 아브라함이 뭘 두려워 하고 있었을까요? 이때. 그런데 이 두려워하고 있는 아브라함을 뭘 보고 도데체 ‘너는 의롭다’, ‘너는 믿음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 했을까요? 이 때는요 아브라함이 4개국 연합군을 아브라함이 318명 데리고 가서 완전히 박살 내고 개선행진 한 바로 그 다음 이예요. 마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00명 다 참수해버리고 로뎀 나무에 머리 박고 나좀 살려주세요, 아니 무서워요 날 죽여주세요 했던 엘리야와 똑같은 모습이예요.
이겼어요, 318명 데리고 가서 이겼는데 금방 두려워 떠는 쓰레기가 되어있는 거예요, 또.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긴 거라고 멜기세덱이 얘기까지 해줬는데 그러면 다시 그 연합군이 쳐들어와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길 거 아니예요 그런데 또 믿음 없는 아브라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두려워 떨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오셔서 내가 네 방패야, 무슨 말이죠? 방패는 뭐예요? 공격을 가리는 거예요. 감추어 주는 거예요. 당신의 백성을. 내가 네 방패야 걱정하지마. 너는 이런 사람 맞어, 맞어 그러나 내가 네 방패란다. 그래놓고는 넌 의롭다 라고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네, 맞네요. 금방 제가 하나님으 도움으로 4개국 연합군 이기고 왔고 멜기세덱이 이거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이기게 한 거라고 얘기를 해쓴데도 저는 여전히 덜덜덜 떨리는 이런 인간인데 하나님이 덮으신다니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걸 ‘의’라고 한다니까요,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께 무얼 해드려서 의로운 자라 칭함 받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덮으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 라는 걸 믿는 자라는 말이예요. 절대 그것 잊지 마시라는 말입니다.여러분의 신앙 생활 속에서 혹은 가정 생활 속에서 또는 직장 생활 속에서 승리와 패배의 삶을 번갈아가며 살면서 하나님의 주체 되심 하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배우고 인정하면 되는 거예요.
헌금을 하면서 나 대신 먼저 헌금, 속전으로 드려지신 예수를 찬송하다가도 때로는 그것도 아까워서 벌벌떠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역시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의 은혜를 찬송 하면 되고, 구제를 하면서 예수의 긍휼을 조금 맛보다가 그러한 구제속에서도 나의 안일과 편안함을 챙기려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그러한 자신을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께 또 가면 되는 거예요. 성도는 그 어떤 상황속에서도 예수의 은혜를 깨닫고 발견하고 인정하게 되는 복된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야, 그러면 노프라블럼, 하쿠나 마타타 하고 가는 거예요. 이걸 행복이라고 그래요. 행복하지 않으세요? 굳 뉴스 아니예요 이게? 이게 왜 안 행복하냐구요.그 은혜 앞에서 겸손히 무릎끓고 그 은혜를 자랑하고 찬송하는 여러분이 되셔야 되요. 우리 유치부 샛별이가 식사기도 노래를 배웠다고 해요. 그런데 조금 다르게 부른다고 해요. 여러분 그거 아세요? ‘날마나 우리에게 약식을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샛별이는 그걸 잘못 배워가지고 ‘날마다 우리에게 당신을 주시는 은혜 로우신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지 아빠가 듣고 굉장히 은혜를 받고 있었다지요? 맞네, 어떻게 복음을 저렇게 정확히 이해를 하고 있나,,선생님들이 잘가르쳐서 그렇죠.
유치부 선생님이 유치부설교 원고를 나한테 보내왔는데 난 무슨 영화 시놉시스 인줄 알았어요. 세상에 영화감독 출신이라 그런지, 그런 설교를 들을 수 있는 아이들은 진짜 복된 거지요. 그런데 언니 하은이가 고쳐줬대요. ‘날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이렇게요. 그럼 애들이 그럴수도 있지, 지 아빠가 옆에서 정색을 하면서 이렇게 물었대요. ‘그럼, 양식을 안주시면?’ 하고 물어봤대요. ‘감사 안할거야?’ 이렇게 물어 봤대요.
양식을 안주시면? 그렇잖아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양식을 안 주실 수 있어요. 그죠? 날마다 우리가 원하는 거 다주세요? 안 주세요. 그런데 날마다 우리에게 당신의 피는 먹이세요. 예수의 살과 피는 먹이세요.그걸 감사할 수 있는 자가 성도예요. 그렇게 우리는 늘 예수를 떠나 아사 직전의 상태로 자꾸 달려 가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쫓아 오면서 당신의 피를 마시게 하고 있는 이 상태가 어찌 복된 상태가 아니냐구요? 그러니까 하쿠나 마타타 케세라세라가 나오는 거예요.
그냥 막 살라는 게 아니예요. 끌려 가는 삶속에서 이 현실을 수긍하고 인정하며 행복해 하시라는 거예요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칭함을 받는자, 영생을 선물 받는 자 그들이 복된 자다. 잊지 마십쇼.
기도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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