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38) 그러나 이제는

은바리라이프 2013. 10. 7. 12:09

로마서(38) 그러나 이제는

(롬3:21-31)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혹시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는 만화를 아십니까? 까치 오혜성과 그가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엄지, 그리고 그 사이에서 둘의 사랑을 깨는 자로 등장하는 마동탁의 이야기입니다. 외팔이 최관, 키 작은 최경도, 혼혈아 하국상, 둔한 백두산, 그리고 오혜성. 외인구단의 멤버들은 모두 불구였고 약자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들의 약함이 강함을 누르고 승자가 되지요. 저는 그 책의 스토리 속에서 역사 속 성도들의 모습을 오버랩 시켜 그려 보곤 했습니다. 약자들이 힘을 합치면 강자도 이길 수 있다는 그런 건설적이고 희망적인 그런 종류의 그림이 아니라, 이 역사라는 과정을 살아가면서 불가능하고 무력한 자신들의 실체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러한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사랑과 긍휼로 채워 주시는 하늘 신랑의 사랑을 자각하고 체감하게 되는 성도의 삶을 그려 본 것입니다. 약자들이여 힘을 내어 강자를 이기자가 아니라 약자들이여 자신들이 무력하고 연약한자임을 알고 고백하는 것이 승리라는 그런 메시지를 본 것입니다. 결국 그 외인구단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오혜성이 눈까지 멀어가며 엄지의 사랑을 얻어내게 되는 그 이야기의 결론을 보면서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도의 결국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역사 속에서는 불구자로, 약자로, 세상의 업신여김과 조롱을 받으며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이지만 결국 신랑 예수의 심장을 선물로 받고 완전히 회복되어 신랑의 사랑을 독차지 하며 하늘 신방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지요. 그 공포의 외인구단이 영화로 제작이 된 적이 있었는데 그 영화의 주제가 가사가 참 좋습니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별보다 예쁘고 꽃보다 더 고운 나의 친구야

이 세상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친구야

네 곁에 있으면 사랑은 내 것

네 곁에 있으면 세상도 내 것

이런 사랑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사랑은 모든 걸 가능하게 하지요? 집에서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던 사람이 사랑하는 남자가 생기면 밤새 도시락을 싸서 천리 길도 마다 않고 면회를 가기도 하고, 그냥 사랑하는 사람이 사는 동네에 가서 그 사람 방에 켜진 불빛만이라도 보고 싶어 밤새 운전을 해서 다녀오기도 하고 그럽니다. 부모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 속이 터지지요. 우리한테 좀 그렇게 해 보라고요. 그런데 부모님들도 사랑할 때는 그렇게 하셨잖아요.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우리 신랑 예수께서 신부인 우리 교회에게 하시는 사랑고백이 이러합니다. 우리의 신랑은 뭐든지 정도가 아니라 목숨까지 내어주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왜요? 그 신랑의 피가 아니면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기 때문입니다. 신랑이 신부와 결혼을 하려 하는데 신부가 죽은 시체입니다. 그런데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이 있는데 생명은 피에 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자격 있는 존재의 피가 필요합니다. 신부를 향한 신랑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던지 그 신랑이 자진해서 자신의 목숨, 피를 바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리고는 신부가 들어가 있는 ‘사망’이라는 영역 속으로 들어가 버리셨어요. 마치 엄지가 까치에게 자기 남편 마동탁을 위해 경기에 져 달라고 하는 마귀 같은 부탁을 하는데 까치가 그 마귀 같은 엄지를 살려내기 위해 자신이 마동탁이 친 타구를 눈으로 받아내어 실명을 하는 그런 형국입니다. 진짜 장님은 엄지였는데 그 엄지를 구해내기 위해 까치가 장님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둘은 그 까치의 사랑으로 결국 이어지게 되는 것이고요.

그렇게 사망 속으로 들어간 신랑은 그 사망 속에서 신부를 만납니다. 신랑은 사망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신부를 자신과 함께 묶어 버렸습니다. 그걸 약속(約束)이라고 합니다. 묶을 약(約), 묶을 속(束), 신랑이 신부를 마치 샴쌍둥이처럼 자기에게 묶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시면서 그 이유를 ‘열조와의 언약’때문이라고 밝히시지요? 그게 이스라엘의 자격과 됨됨이에 상관없이 언약을 따라 하나님 당신과 묶어 버리시는 모습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제 죄와 상관없는 당신은 사망의 입에서 나가셔야 하거든요. 사망은 죄인만 먹을 수 있어요. 사망은 죄만 삼켜요. 그런데 죄 없는 어떤 이가 사망 안으로 들어와 버린 것입니다. 사망이 처음에는 자기 먹이인 줄 알고 덥석 삼켰어요. 그런데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거룩한 것이 들어와 버린 것입니다. 사망은 거룩을 삼킬 수 없어요. 사망은 거룩을 삼키면 죽습니다. 그래서 사망이 그 맛없는 존재를 확 뱉어 버렸어요. 무덤 문이 다시 열린 것입니다. 나가달라고. 그런데 그 신랑이 사망에서 튀어 나오면서 신부를 몸에 묶어 버린 것입니다. 그게 언약이며 약속이라고 했지요? 언약은 대상의 행위를 배제합니다. 언약은 무조건 적으로 부어지는 은혜입니다. 그렇게 사망 안에 갇혀 있던 신부를 구출하기 위해 신랑이 사망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약한 자로 스스로 내려가신 것입니다. 사망에게 먹히는 것 자체가 그 존재의 완전 부정이니까요. 그렇게 사망으로 들어가신 신랑은 그 사망 안에 갇혀있던 신부를 자기 몸에 언약으로 묶어서 구출해 내 오신 것입니다. 그 엔테베 구출작전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신랑의 신부 구출작전을 들으시면서,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신랑의 사랑고백이, 이 세상 다 주어도 너와는 바꾸지 않겠다는 예수의 고백이 여러분에게는 들리지 않으십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바라볼 때 다른 이보다 내가 나은 것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게달의 장막이요, 포도원의 노예처럼 못난 존재라는 것입니다. 악당인 마동탁을 위해 게임에서 져 달라는 부탁을 하는 철없는 엄지입니다. 그런데 신랑이 무조건적인 사랑과 무차별적인 긍휼로 내가 갇혀 있던 사망이라는 감옥으로 출격해 들어온 것입니다. 눈알을 뽑아 준 것입니다. 심장을 내어 줘 버린 것입니다.

신부인 교회는 바로 그 사랑을 깨닫고 그 신랑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 그 신랑이 준비해 놓은 어린양의 혼인잔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절대 그 검은 피부를 예루살렘여자들처럼 희게 만들어서 잔치 자리로 가는 것 아니고, 게달의 장막 같은 너덜너덜한 모습을 발전시키고 계발하여 잔치 자리로 가는 게 아닙니다. 예쁜 여자가 되어서, 현모양처로 성숙되어서 잔치 자리로 가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냥 ‘내 모습 이대로, 나 지은 것 죄 뿐이니, 천부여 의지 없어서’하면서 면목 없이, 그러나 감사함으로 혼인잔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이 외인구단의 멤버들보다 더 부족하고 불가능한 자임을 아는 것이 변화요 성숙인 것이지 그 불구의 상태를 열심히 노력하여 극복해 내고 멀쩡한 사람이 되어 잔치 자리로 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의 유일한 지참금을 가리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랑이 신부에게 왜 믿음만을 요구하신다고요? 그게 사랑이거든요. 신랑만 사랑하고, 신랑만 자랑하게 하시려고 신부의 그 어떤 도움도 받지 않으시고 오직 당신의 피로만 신부를 구출해 내셔서 혼인을 올리신단 말입니다.

(갈2:16~17)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바울은 16절 말미에서 율법의 행위로는 절대로 신부의 자격을 획득할 수 없다고 단언을 한 후 17절에서 자신의 행위와 노력으로 스스로 의롭게 되려하는 어떤 자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하다가 혹 죄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부정하려 하지 마라. 만일 그렇다면 너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가 너희에게 죄를 짓게 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냐?’ 생각해 보세요. 십자가는 그 자체로 하늘의 계획을 완료해 내신 완전성을 가진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들의 행위를 보다 나은 행위로 바꾸어 내는 도구로 선 것이라면 너희는 더 이상 죄를 지으면 안 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 너희는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가 죄를 짓게 하기 위해 선 것이 되지 않느냐는 질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목적이 고작 우리의 행위를 바꾸어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웅숭깊은 목적을 갖고 섰다는 것을 우회 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간들에게 보다 나은 도덕적 윤리적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주는 스위치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새 사람으로 창조해 내는 능력이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엡2:8~9)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 이니라

(고전1:28~31)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보시는 것처럼 어린양의 신부가 신부의 자격을 갖추는 것이 신부의 됨됨이에 있지 않습니다. 신부는 신랑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믿는 것으로 그 자격을 완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랑을 사랑하고 자랑하는 자가 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이 믿음이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믿기만 한다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과 22절을 보겠습니다.

(롬3:21~22)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사도 바울은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 아주 길게 인간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과 추악함을 폭로해 냅니다. 인간들은 율법으로도, 양심으로도, 심지어 말씀을 가지고도 죄만 생산해 내는 추악한 시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며, 그 발은 피 흘리는 데에 아주 빠른 좀비들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너희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외인구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우리에게서도 그러한 좀비의 모습이 똑같이 보일 때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도 다 같이 지옥가야 하는 것인가요?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21절입니다. ‘누니 데’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모든 아담 군상들은 다 좀비 맞습니다. 죽은 시체들입니다. 그래서 다 지옥에 가야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대 반전의 현실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 죽어야 마땅하지만 그 중에 어떤 자들을 위해 대안을 마련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지요? 21절에 잘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 성경에서 이미 증거 되어 있던 ‘하나님의 한 의’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한 의는 ‘율법 외에’의 것입니다. 율법을 부정해 버리고 나타난 하나님의 다른 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완전히 폐기가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여러 번 반복해서 설명해 드렸던 것처럼 율법은 예수라는 목적지로 향하게 만들어 주는 몽학선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율법을 통하여 배워야 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필연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 율법을 자기 치장의 도구로 끌어 당겨 버린 것입니다. 그걸 지켜서 자신의 명성과 자격과 평판과 가치를 챙겨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으로는, 인간은 죄인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배워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율법이 인간 치장과 역사 성숙의 도구로 사용이 되어 지자 하나님은 진짜 그 율법의 원형이신 예수를 이 땅에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나쁜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너희들이 오해하고 있는 그 율법의 원형이 여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로로 하여 그 대상에게 입혀지게 된다고 합니다. ‘아, 그 율법이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었군요.’ 하면 끝입니다. 그게 22절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성숙의 정도나 깊이 등에 상관없이 ‘차별이 없느니라’의 모습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선물의 의미가 그런 것이니까요. 자격이나 됨됨이에 따라 다르게 주는 것을 상이라고 하고, 차별이 없이 값없이 주는 것을 선물이요 은혜라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면서 23절부터 그 믿음의 내용에 대해 설명이 이어집니다.

(롬3:23~24)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합니다. 그 말은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존재도 될 수 없는 상태였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영광과 가치를 챙기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떠나 있는 상태를 죄라고 하지요? 그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생명력(루아흐), 즉 성령이 떠나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걸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늘 항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가 하나님의 생명력을 받는 것을 자존심 상해하며 거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과 하나님 되심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 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중 어떤 무리에게 ‘구속’의 은혜가 임합니다. 구속이라는 것은 노예로, 포로로 잡혀있는 무력 자를 자유롭게 풀어내기 위해 어떤 이가 그 몸값을 지불하고 그 묶임의 자리에서 풀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의 방생을 생각하시면 이해가 쉽겠습니다. 이미 포로로 잡혀있는 죽어야 할 물고기들을 돈을 주고 사서 강과 바다에다 풀어 주는 것을 방생이라고 하지요? 그런 것입니다. 그때 물고기나 거북이가 그들의 자격이나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가 선택을 받는 건가요? 착한 물고기, 성숙한 거북이만 돈 주고 사서 풀어 주나요? 아닙니다. 그들은 그냥 멍하니 있다가 엉겁결에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 바다로 돌아가 열심히 헤엄을 치면서도 그들에게 임한 은혜의 구원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누가, 왜, 무엇 때문에, 자신을 구원해 주었는지, 도대체 자신은 어떤 자격이 있어 그러한 혜택을 받게 된 것인지 오랜 시간 고민하고 알아가는 과정을 살게 됩니다.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고민하고 공부하고 찾아보아도 답이 없습니다. 결국 찾아지는 답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풀려난 것이라는 아주 궁색해 보이는 답뿐입니다. 그런데 그게 정답입니다.

풀려나긴 풀려났는데 그게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은혜’로 풀려난 것이래요.

은혜, ‘카리스’라는 것은 받을 자격도 없고 갚을 능력도 없는 자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했지요. 그러니까 은혜라는 말 자체가 그 수혜자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확증해 버리는 단어인 것입니다. 반면에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을 뭐라고 한다고요? ‘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구원과 영화까지 전부 하나님의 은혜로 성취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화로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당도해서도 여전히 신랑의 은혜만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만을 찬송한다는 것은 끝까지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수긍한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그 앞에서 ‘상’을 요구할 수 있는 자는 어떤 자일까요? 구원에서 영화까지의 과정에서 어떤 지점에서건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만한 자격을 획득했다는 자신감이 있는 사람만이 상을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정말 은혜를 아는 사람일까요?

25절로 가면 그 은혜의 구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값없이 주어지는 의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나옵니다.

(롬3:25)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사실 이 구절은 굉장히 해석하기가 까다로운 구절입니다. 바울은 24절에서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구속이 ‘엔 크리스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는 25절에서 어떠한 모양으로 그 하나님의 구속이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화목제물로 세우셨고 아담 들 중 누군가가 그것을 믿어주면 그것을 믿어주는 그 사람의 믿음으로 그 구속이 성취되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건 곧 구원의 주도권이 인간 측에 있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 측의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성패가 달려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24절과 25절이 서로 상충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 번역본들을 독일어 성경까지 포함해서 열두 권을 펴놓고 샅샅이 뒤져 보았는데 거기에 대해 명쾌하게 번역을 해 놓은 성경이 없어요. 킹 제임스 버전이 조금 원어에 맞게 번역이 되어 있는 듯싶은데 그것도 좀 명쾌하지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원어 성경을 펴 놓고 한 단어 한 단어 파싱을 해 보았습니다.

25절을 좀 더 풀어서 번역을 해 보면 이러합니다. 먼저 화목제물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힐라스테리온’은 법궤 위의 시은 좌, 속죄소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성경에 딱 두 번 나오는 단어인데 그걸 개역성경이 화목제물로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그 단어는 속죄소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세우셨다’라고 번역이 된 ‘프로티떼미아’라는 단어는 ‘set before, ~앞에 세우다’라는 뜻입니다. 개역 성경은 그것을 ‘화목제물로 세우셨다’라고 간단하게 줄여 의역을 해 놓았는데 그걸 지성소의 구조와 법궤와 시은 좌의 형태와 기능과 역할을 참고하여 그 부분을 직역을 해보면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시은 좌 앞에 세우셨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의 피 안에서 성취된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가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단어 앞에 쓰인 전치사가 ‘디아’로서 ‘~에 의해서’라는 의미이고 피 앞에 쓰인 전치사는 ‘엔’으로서 ‘~안에서, 그 안에서 성취된’이라는 의미의 전치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그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가 일어나는 유일한 장소인 시은 좌 앞에 세우셨다(set before)는 것입니다. 그건 그 시은 좌 밑의 인간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과 추악함이 예수에 의해 가려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예수의 피가 그 시은 좌를 덮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나타난 예수의 믿음에 의해 그 일이 성취가 되었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벌이신 이유를 25절 후반부에서 설명을 합니다. 뭡니까?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인간의 죄를 그냥 지나가심(파레시스)으로(유월절), 당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의, 디카이오수네’가 어떤 의미인지는 다 아시지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그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성실하고 완벽하게 수행해내는 상태를 의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을 바탕으로 25절을 다시 번역을 하면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해 당신 백성들의 죄를 그냥 지나치시는 값없는 구속을 계획하셨는데 그 값없는 은혜의 구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 성취되었다. 그 모습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은 좌 앞에 세우시는(set before), 하나님의 열심의 모양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머릿속에 그려 보시면 돼요. 법궤 안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두 번째 십계명 돌 판과 만나 항아리가 들어 있지요? 그게 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인간들의 죄를 상징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만나를 보면서 하늘 양식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했는데 오히려 세상의 떡인 부추와 마늘과 고기와 비교하며 예수를 모독했습니다. 십계명 돌 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하여 예수를 보아야 했는데 율법을 자기 치장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어때요? 이스라엘의 구원은 그렇게 마른 막대기 같이 죽어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싹이 나게 하는,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임에도 그들이 모세와 아론의 자격을 운운하면서 인간 측에서의 가능성을 논했잖아요? 그게 바로 죄입니다. 그래서 마른 막대기에서 싹이 나는 것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생명이 탄생한다는 것을 미리 예표로 보여주신 것이지요.

그러한 인간들의 무지함과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법궤 뚜껑이 덮고 있는 것입니다. 그 법궤 뚜껑 앞에 예수가 서(set before)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예수만을 보시는 것이고요. 그래서 그 법궤 뚜껑 위에 제물의 피가 부어지는 것이고, 거기에서만 속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26절이 이렇게 이어집니다.

(롬3:26)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의로우심, 그러니까 하나님 측에서의 열심과 노력으로 당신 백성들에게 줄 의를 만들어 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가 ‘예수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집니다.

자, 보세요. 25절에서는 자신의 피로 아버지의 뜻을 성취해 내시는 예수의 믿음이 등장하고 26절에서는 그러한 예수의 믿음에 의해 성취된 하나님의 의를 믿는 믿음, 즉 성도의 믿음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25절과 26절에 두 종류의 믿음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예수의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보자고요.

제가 초창기 에베소서 강해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거의 7년 반 동안 믿음에 관해 설교를 할 때마다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항상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첫 번째 믿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객관적 믿음이라 붙이자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한 믿음을 발휘하셔서 기필코 당신의 언약을 성취해 내시고야 마시는 이야기의 예로 아브라함을 자주 언급을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탁월해서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한 인간에게 일을 시작하여 주관적 믿음을 격발해 내는 가를 보여주는 아주 선명한 예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히브리서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고 기술을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먼저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떠나게 하셨던 하나님의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 했지요? 아브라함은 멋모르고 우상을 만들어 팔며 바벨론, 즉 갈대아 우르에서 호의호식하며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믿음을 가지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을 당신의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에게 밀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믿음이 어떤 대상에게 부어지게 되면 그 대상에게서 반드시 그 부어진 믿음에 의한 이끌림의 흔적이 생기게 되는데 그것을 성경이 행함이라고 합니다.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리켜 죽은 믿음이라 했을 때 그 행함이 바로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 격발이 되는 대상의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주관적 믿음은 산데마니니아니즘(sandemanianism) 식의 지식의 습득이나 고백 정도가 아니라 삶 전체를 장악당하여 끌려가는 자에게서 터져 나오는 삶의 몸부림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단어 자체가, 특정한 진술이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정도로 정의될 수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믿는다.’라는 단어는 원래 사람이나 신 등의 눈에 보이는 어떤 대상을 직접 목적어로 취하는 단어입니다. ‘나는 〜를 믿습니다.’라고 말할 때 고백하는 사람은 고백의 대상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이 생겼을 때 그 두 대상 사이의 관계 속에서 어떤 흔적들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행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다는 게 정확하게 뭐냔 말입니다. 영어로 믿는다는 단어인 ‘believe’는 고어인 ‘be loef’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인 데 그 뜻은 ‘친근히 하다’라는 뜻입니다. 거기에서 ‘beloved’가 나온 것입니다. 그 뜻은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가장 사랑하는’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믿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에 대한 신임이나 신뢰를 뜻하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게 ‘believe’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그분에 대한 어떠어떠한 진술이 참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걸 로마서 5장에서는 화목이라고 쓰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라틴어로 ‘나는 믿는다’는 말은 ‘credo’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이나 니케아 신경 등의 신조들을 ‘credo’라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바’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단어의 속뜻은 ‘나의 심장을 드린다.’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라는 것은 자신의 심장을 내어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장은 단순히 감정이나 느낌만이 아니라 가장 깊은 차원의 ‘자기’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의지, 생각, 감정보다 더 아래쪽에 있는 그 중심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성도를 예수 믿는 믿음으로 이끌어 내는 율법을 가리켜 ‘주 너의 하나님을 목숨 걸어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로 요약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과 이웃을 ‘믿으라’는 말과 똑같은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심장을 내어 주는 사랑으로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게 율법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건 우리 힘으로 안 되잖아요? 그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심장을 주신, 우리를 먼저 믿어주신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게 율법이란 말입니다.

하늘 신랑이신 예수가 사망에 갇힌 나를 위해 자신의 심장을 내어 주신 것을 명확하게 깨달아 알아 그 분을 사랑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반응하여 네 심장도 그 분께 내어드릴 수 있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 믿어라’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이 역사 속에서는 완성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보이지 않는 예수님에게 우리의 심장을 내어 드립니까? 그러니까 난 믿음이 있네, 믿음이 없네, 이런 말들 좀 하지 마세요. 우리가 무슨 믿음이 있어요? 하나님의 믿음이 우리 옛 사람의 심장을 도려내는 일을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믿음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이지, 믿음조차도 우리에게 사유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건 묵시 속에서 완료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우리 신랑이 먼저 고백을 하신 후 진짜 자신의 심장을 꺼내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왜 우리 신랑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심장을 꺼내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우리의 죽은 행실과 좀비 노릇을 통해 통렬히 자각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의 신랑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심장을 도려내어 우리를 살리셨다는 그 과분하고 지고한 사랑과 믿음 앞에서 허물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도 내 신랑을 위해 심장도 아끼지 않는 그런 신부가 되고 싶다’는 거룩한 염원을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점차로요. 그런데 잘 안되잖아요? 신랑을 위해 심장을 꺼내 놓기는커녕 여전히 그 심장 빠진 신랑이 매달려 있는 십자가 앞에 가서 자신의 결핍과 부족함을 들이대며 ‘왜 남편 구실을 이렇게 밖에 못하냐?’고 대들고 있는 게 우리 아닙니까?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십자가의 필연성을 굳게 붙들게 되는 것이고 결국에는 ‘나’라는 가짜 신을 죽여 버리고 하늘 신랑에게 온전히 순종하며 심장까지도 마다않고 내어 드릴 수 있는 새 신부로 만들어 내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들이 반복이 되면서 우리는 ‘나’만을 위해 뛰던 심장을, 이 악마 같은 나를 위해 자신의 심장을 내어 주신 주님의 가슴으로 점차 옮겨내는 진짜 성숙을 이루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부인이며 옛 자아의 죽음인 것입니다. 내 심장은 이렇게 나를 위해 뛰면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심장이 나를 위해서 뛸 때 그 자체가 죄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고 이 심장의 요동을 주님 손에 맡겨 버리게 되는 자기부인의 삶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걸 화목이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과, 신랑과 화목한 자는 형제와 불화하지 않게 되는 것이며 그 사람의 예배만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이 우리가 지난주에 잠깐 공부했던 산상수훈 5장의 ‘살인하지 말라’의 내러티브인 것입니다.

그렇게 형제간의 화목, 이웃 사랑은 하나님과의 화목이 전제된 것이어야 진짜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정작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웃과 화해하고, 이웃을 사랑했다고 하며 제사를 드리러 온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이웃과 화해하지 못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절대 예물을 드릴 수 없고 제사를 드릴 수 없다고 하셨는데 유대인들 전부가 제사를 드렸단 말입니다. 그 말은 ‘난 화해했고 사랑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는 것이잖아요? 그게 뭡니까? 회칠한 무덤 같은 율법주의의 시체 화장놀이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 안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제사는 전부 헛것이었다는 결론이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형제와 먼저 화목하고 오라고 말씀을 하신 것은 ‘너희가 정말 하나님과 화목한 자 맞느냐?’를 물으신 것이었는데 그들은 여전히 ‘나’ 중심의 가짜 제사를 드리며 난 형제와 화해했어요, 난 이웃을 용서했어요, 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근거로 예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본문 27절을 어떻게 이어가는지 보세요.

(롬3:27~28)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보세요. 율법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고 하나님의 믿음, 즉 하나님의 심장 내어주심에 의해 우리에게 거저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는 걸 알려주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걸 인정하게 될 때 ‘난 죄인 중의 괴수가 맞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저는 한 순간도 산 자일 수가 없습니다.’라는 자기부인의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옛 자아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옛 자아의 죽음의 현장이 주께 심장을 드리는 현장이 되는 것이며 그것을 성도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만 믿음이라는 단어를 수 십 번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30절 보세요.

(롬3:30)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이게 3장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러한 믿음과 하나님의 의에 관한 이야기를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서 설명을 합니다.

(갈3:5~9)

5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6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 지어다

8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9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오늘 본문의 믿음 이야기, 하나님의 의 이야기의 구체적 원시 모델이 아브라함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거고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뭘 어떻게 믿어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입니까?

(창15:5~6)

5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왕과, 땅과, 자손을 약속하시는 내용이 적혀 있는 창세기 15장입니다. 왕(상급으로 주시는 여호와)과 땅(약속의 땅 가나안)과 자손(백성)은 국가의 3요소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시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합니다. 뭘 믿었다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그 뒤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실 때에도 사라와 함께 비웃었을 뿐 아니라, 자기 아내 사라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또 다시 팔아먹는 아주 파렴치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심지어 모리아 산에서의 그 위대한 경험을 하고도 또 첩들을 들여서 다른 자식들을 낳습니다. 그럼 그가 뭘 믿었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어떤 면을 보고 의롭다 여기셨다는 것입니까?

6절에서 ‘믿다’라는 동사가 ‘웨헤에민’으로 와우 계속 법으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지속적이었다는 뜻인데 정말 아브라함의 믿음이 지속적이었나요? 아니지요?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을 지속적으로 장악하며 따라오고 있는 하나님의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믿음이 아브라함을 지속적으로 장악하고 있기에 그는 여전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의인으로 ‘여겨지는’것일 뿐입니다. 여기에서 ‘여기시고’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하솨브’는 실제로 그러해서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렇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판정권자가 은혜로 그렇다 여겨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단어 하나만 보더라도 창세기 15장 6절의 아브라함의 믿음은 일차적으로 아브라함에게서 생산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자명해 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을 의롭다 여기게 된 믿음은 아브라함을 장악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하셨던 하나님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끌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정작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디에서 증명이 되지요? 모리아 산 위에서 자식의 심장, 즉 자신의 심장을 하나님께 내어 드림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증명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5장에서 벌써 아브라함의 믿음 운운하신단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믿음이 어떻게 아브라함의 믿음을 격발해 내는지 보세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 다른 말로 아브라함을 장악하고 있는 믿음을 근거로 아브라함을 의롭다 여기시고는 아브라함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그 땅과 후손이 어떻게 주어지는지 15장 13절로 가보지요.

(창15:13~16)

13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땅과 자손을 그냥 덥석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애굽의 노예로 보내어서 400년 동안 고난을 받게 하시다가 다시 아브라함에게 약속이 주어지고 있는 그 땅으로 자손들을 들여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 보면 그 자손이 복수가 아니라 단수였다고 하지요? 그리고 창세기에서도 단수가 맞고요.

(갈3:16)

16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네 자손을 애굽으로 보내서 노예로 살게 하다가 다시 약속의 땅으로 끌어 들이겠다’라는 약속은 누구의 인생을 일차적으로 지칭하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일차적으로 지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손,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 애굽의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가 승리의 전리품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로 복귀하시는 그 메시아의 이야기를 일차적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삶을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형이 그대로 이 땅에서 살게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2장으로 가면 그 창세기 15장에서의 아브라함의 후손에 관한 약속의 내용을 누가 먼저 경험합니까? 아브라함이 먼저 경험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갔다가 그 땅에 기근이 들자 얼른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거기에서 애굽의 왕 바로에게 신부를 빼앗기지요? 그리고는 애굽에서 종처럼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편을 들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신부인 사라를 구해내어 많은 금은보화와 함께 가나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똑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들어가게 되는 계기가 뭡니까? 7년간의 흉년, 즉 기근 때문입니다. 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의 노예가 됩니다. 사라의 처지와 똑같은 것이지요? 그 때 이스라엘의 신랑 역할, 즉 중보자의 역할을 맡은 모세가 신부를 구하러 옵니다. 그런데 나이가 여든입니다. 애굽왕 바로 앞에서의 늙은 아브라함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왕 바로를 치십니다. 그리고는 그 하늘의 신부들인 이스라엘을 모세 안에 넣어서 가나안 땅으로 이끌고 들어가십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속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요? 그 말은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묶였다는 뜻입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이유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 때문이었음을 다른 말로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의 신부들이 이 세상이라는 애굽으로 내려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죄의 종으로 보내십니다. 그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신부들을 구원해 내시기 위해 하늘의 신랑을 보내십니다. 마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애굽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나오지요? 그것을 마태가 ‘애굽에서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기록을 합니다. 그리고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고 나오지요? 그 별세라는 단어가 엑소더스, 출애굽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애굽으로 당신의 신부를 구해 내기 위해 내려오신 분이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랑이 영 볼 품이 없습니다.(사53) 이 세상 권세 잡은 자 앞에서 늙은 아브라함이나 늙은 모세처럼 약하고 연한 순처럼 보이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 신랑 안으로 신부들을 묶어 버리십니다. 그걸 약속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신랑에게 속한 신부들을 약속의 땅으로 값없이 끌어 들이시는 것입니다.

자 이상의 이야기들 속에서 신부들이 한 일이 뭡니까? 그냥 종으로, 노예로 잡혀 있었던 것뿐입니다. 그런데 신랑이 백마 탄 장수의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왕 앞에서 전혀 힘을 못 쓰는 모습으로 온단 말입니다. 그러한 연약한 순 같은 자들을 하나님의 능력이 붙들어서 승리자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왜 하늘의 신랑과 그 신랑의 모형들이 하나같이 그런 연약한 모습으로 오는가?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시키시는 말만 하셨고 시키시는 일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건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 자신이 철저하게 부인되고 부정되었다는 말입니다.

(빌2:5-8)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보세요. 신랑이신 예수님 자신이 종이 된 신부를 구하기 위해 자신도 종으로 이 땅에 오셨답니다. 왜요?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영광이 드러나면 안돼요.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다 마치시고도 그 모든 일의 공로를 하나님 아버지께 돌려야 하는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대로만 일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아버지가 알파요 오메가이시며, 모든 일의 주체임이 드러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라는 존재는 다 비워지고 그 안에 아버지의 뜻과 능력만이 가득 차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상태를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반사적 영광의 삶이라고 해요.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 존재들의 존재 양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분을 하늘 자녀들의 맏아들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를 구하러 오신 신랑이신 예수도 자신의 업적과 공로를 스스로 하나도 챙겨 갖지 못하셨습니다. 그냥 죽었다니까요? 아버지가 살리시지 않으면 못 살아나는 그 자리로 가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 하나님 아버지가 찬송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찬송되지 않았어요. 그건 오로지 아버지의 영광만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그 분의 역할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진짜 무력한자, 진짜 불가능한 자인 우리가 그 어떤 공로와 업적을 챙겨서 하나님 앞에 들고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해 내시기 위해 아들이신 예수의 심장까지도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의를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과 의 앞에서 자신의 옛 사람의 심장에 칼을 꽂는 자로 밀려 내려가면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래야 예수가 주가 되시는 것이고 그래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금의 기독교는 인간에게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단 말입니다.

성경이 왜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하는 자들의 모양새를 그렇게 우스꽝스럽게 연출해 놓는지 아세요? 아브라함이 신부인 사라를 애굽 왕의 손에서 건져 내 올 때에도 그가 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백성인 롯을 구해 내 올 때에도 아브라함은 318명의 연한 순의 모습으로 가야 했습니다. 5개국 연합군이 하나님의 백성을 붙잡아 갔습니다. 그런데 그 롯은 소돔과 고모라 성문에 앉아서 심판관을 해 먹을 정도로 엉터리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그의 됨됨이와 상관없이 그를 하나님의 백성, 의인이라 부릅니다. 그리고는 그를 붙잡아간 5개국 연합군을 파하고 그를 건져 내오는 것입니다. 그를 붙잡아간 5개국 연합군과 소돔과 고모라 등의 4개국 연합군의 면모를 보면 그 안에 애굽, 바벨론, 앗수르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나라의 모형으로 등장한 나라들이 거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연합군 앞에 318명, 즉 군사 같지도 않은 군사, 뜨인 돌 하나가 떡 하니 선 형국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뜨인 돌 하나, 아브라함의 가솔들이 그 전쟁을 이겨버립니다. 그리고는 종으로 끌려간 하나님의 백성을 구해 낸 것입니다.

18만 5천명 앞의 기드온의 300 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맷돌 다섯 개를 가진 골리앗 앞의 다윗도 바로 그 모습인 거고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전쟁은 다 그런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그 전쟁을 치러내시는 분이심을 성경은 그토록 반복하여 명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전쟁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318, 300, 다섯이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아브라함 앞에 멜기세덱이라는 대 제사장이 나타나지요? 그리고는 그에게 뭐라 합니까? 그 전쟁은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것이라고 아브라함의 공로와 업적을 다 묵사발 내 버리십니다.

(창14:20)

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보세요. 가솔 318명 데리고 열심히 좇아가서 연합군을 파하고 롯을 구해 왔더니 그 전쟁에서 아브라함을 쏙 빼 버리십니다. 그 대적을 아브라함의 손에 붙이신 이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한 멜기세덱의 말을 인정하고 수긍합니다. 그게 십일조입니다.

승리의 전리품 중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쳤습니다. 그것은 승리의 전리품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도 전부 제자리에 돌려놓습니다. 그 전쟁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얻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어라고 싸웠는데 상을 하나도 못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뒤에서 하나님이 직접 아브라함에게 상을 주십니다.

(창15:1)

1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 이니라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상으로 주십니다. 그게 성도의 궁극적 목표지점인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가짜 신이 되어 버린 자들이 진짜 신의 죽음으로 자신들의 실체를 올바로 깨닫고 그 진짜 신의 사랑과 긍휼을 입어 진짜 신과 연합이 되는 것이 구원의 최종 목적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만 달랑 주고 십일조 거두어서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창14:18)

18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이었더라

이렇게 성도는 예수라는 상급, 떡과 포도주라는 상급만을 약속받은 하늘의 신부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랑이 하늘의 왕입니다. 그러면 신랑이 가진 것이 다 그 신부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상을 또 바란단 말입니까?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신랑이 아니라 신랑의 재산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런 프러포즈를 했다고 해 보세요. ‘난 재산이 많습니다. 그리고 명예도 있습니다. 나와 결혼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양해를 구할 것이 있는데 나는 당신과 함께 살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 그 프러포즈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결혼입니까? 사람은 안 가고 재산만 준대요. 명예만 준대요.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의 결혼관이 이렇게 바뀌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은 어떻든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그가 가진 배경과 재산과 능력만이 그들의 관심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꼭 이렇게 예수를 믿습니다. 신랑을 사랑하는 자가 되기보다는 신랑이 가진 재산과 명예와 능력만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랑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참 안식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쓰나미가 일본을 덮쳤을 때 그 쓰나미에서 살아난 사람들이 무엇을 붙들고 살아나던가요? 금덩이? 돈다발? 박사학위? 아니요. 쓰레기 더미에 버려져 있던 통나무, 스티로폴 같은 걸 붙들고 살아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눈에 보이지 않고 감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약속을 그렇게 쓰레기 취급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그러나 명심하세요. 하늘의 불이 이 땅에 쏟아지는 그날, 우리가 붙들고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지금 우리가 쓰레기 취급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뿐이라는 것을요.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업적과 공로로 우리를 치장하고 있다고 해도 마지막 날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말씀뿐이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마세요.

예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가 가신 길을 걸어야 진짜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을 쓴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Solviture ambulando’ 라틴어로 ‘걸으면 해결 된다’입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일상에 묶여서 진짜 역사와 인생의 실체를 못 본다는 것입니다. 그때 일상을 벗어나 걸으라는 것입니다. 다 잊고 걸으라는 것입니다. 그때 역사와 인생의 진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제주의 올레길이나 지리산의 둘레 길을 저는 참 좋아합니다. 무조건 걷는 것입니다. 느리게 걷는 만큼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거기서 배웁니다. 진짜 쉼이 무엇인지 우리는 그러한 걸음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에서 벗어나 걸어야 할 길을 이미 정해 놓으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라고 하신 예수의 길입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처럼 예수는 그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서의 삶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비우시고 이 세상에서 철저하게 부정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당신의 심장을 빼앗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믿음이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하나님처럼’의 일상에서 벗어나 예수라는 길을 좇아 걷는 이들의 삶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냥 부정당하는 것입니다. 그냥 심장을 빼앗겨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신랑을 상급으로 받는 것입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여러분의 공로, 업적, 행위 그 모든 것은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아무런 효력을 발하지 못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십자가의 가치는 위대한 것입니다. 예수에게 심장을 빼앗기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빼앗긴 심장 자리에 예수의 심장을 채우셔야 합니다. 예수의 피를 의지하시라는 말입니다.

성도에게서는 반드시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그 열매를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거기에서의 성령은 소유격이 아니라 주격으로 쓰인 단어라 했지요? 성령이 맺으시는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그 열매의 나무는 어떤 나무이겠습니까? 사과나무에서 열리는 것이 사과이고 배나무에서 열리는 것이 배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 나무도 있을 것 아닙니까? 어떤 나무일까요? 십자가라는 나무입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 옛 사람이 못 박힌 나무요, 예수님의 피만 빛나는 나무입니다. 그 나무는 자기부인의 나무요, 자기 부정의 나무입니다. 거기에서 ‘나’를 돋보이려는 마귀의 행사가 잦아들고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열매가 방향성과 지향성으로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 잊지 마세요.

여러분의 삶 속에서 참으로 부끄럽고 미성숙한 행동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때 외치세요. ‘맞다. 난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존재 일 수조차 없는 자이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또 다른 의,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주어져 있다. 그래서 난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그걸 안식이라고 하고, 그걸 자유라 합니다.

다음 주에는 이 역사 속에서의 성도의 삶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