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35) 말씀을 맡은 자들에게 부어진 저주
(롬3:1~8)
1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3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 하겠느뇨
4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 지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5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결코 그렇지 아니 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 하시리요
7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할 부분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지만, 로이드 존스 목사님 말씀대로 아주 어렵고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부분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자신의 로마서 강해에서 이 대목을 지적하시면서 ‘성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내용’이라고 하셨을 정도로 어렵고 중요한 부분이니까 잘 들어주세요.
지금부터 제가 여러 개의 단어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속으로 제가 불러 드리는 단어들의 공통점을 한 번 맞춰 보세요. 십자군 전쟁, 911 테러, 마녀사냥, 보스니아 인종청소, 아프가니스탄 내전, 자살 폭파범, 강제 수용소, 종족 학살, 홀로코스트, 아우슈비츠, 참수, 오사마 빈라덴, 더 많지만 여기까지만 하지요. 지금까지 제가 불러드린 그 단어들을 들으시고 하나로 모아지는 교집합이 무엇인지 맞춰보세요.
종교입니다. 인간이 신앙하고 있는 종교 때문에 발생하고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만일 인간들에게 종교가 없었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들이며 현상들입니다. 인간들에게 종교가 없었다면 911 테러도, 종족 간 학살도, 자살 폭파범도, 십자군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하나님처럼’의 삶을 유지하고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선행 체계와 지식체계 중 선행 체계의 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인간들이 만들어 낸 선행체계 중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평가가 되는 종교가 오히려 사람들의 분열과 다툼과 살인과 미움을 생산해 내고 있을까요? 왜 종교가 인류와 역사를 파괴하는 주범이 된 것이지요? 그렇잖아요? 많은 미래 학자들이 미래 전쟁의 발단은 종교에서 비롯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왜 종교가 이 마지막 때에 인간과 역사의 파멸의 단초가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게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추구하는 선행체계, 선(善)의 실체인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선은 결국 멸망으로 귀결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교가 뭡니까? 쉽게 정의가 되세요? 그러면 다른 것을 여쭤 보겠습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뭡니까? 인간들의 인간다움 회복입니다. 쉬운 말로 인간들의 하나님 흉내 내기인 것입니다.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각 개체가 착해지고, 순수해지고, 현명해지고 똑똑해져서,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와 국가를 구현하여 인간들이 구상하고 추구하는 행복의 지평으로 나아가는 것이 모든 종교의 궁극적 목적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종교 안의 모든 객체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나’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아담들의 보편적 속성이니까요.
‘나’라는 존재가 가장 착해야 하고, ‘나’라는 존재가 가장 선하다 평가를 받아야 하며, ‘나’라는 존재가 가장 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가장 행복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모든 아담 군상들이 ‘내가 하나님이다’를 외치고 싶어 안달이 난 자 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이 모여서 ‘종교’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의 표피적 목적은 선하게 보임에도 불구하고(심지어 사탄 교까지도 예수와 상관없이 사탄을 중심으로 한 인간들이 주인공이 되는 평화로운 세상을 구현하자는 선해 보이는 목적 하에 모임) 그들이 맺어내는 열매와 결과가 분열과 다툼과 미움과 전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수가 무리지어 망상에 시달리는 것을 종교라 한다.’ 아주 적절한 정의라 생각이 됩니다. 물론 제가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그러한 망상의 종교를 버리고 인간의 의지를 발동하여 지성과 도덕준수를 바탕으로 한 행복을 쟁취하라고 주문을 합니다. 제가 보기엔 그 또한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가 내린 종교의 정의는 참으로 날카로운 정의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데올로기가 바로 그러한 인간들의 종교 중 하나입니다. 어차피 모든 종교의 주인공은 ‘나’를 중심으로 한 인간이거든요.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데올로기의 주인공도 ‘나’를 포함한 인간입니다. 생겨난 지 약 100년 만에 무려 1억 명의 인간을 학살한 공산주의,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보이지 않게 몰살시켜 가고 있는 자본주의, 계층 간의 갈등을 고조시켜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게 만들어 버린 사회주의, 다수의 의견을 정의와 진리라 우기며 소수와 약함을 짓밟는 민주주의, 모든 이데올로기가 다 ‘나’를 중심으로 나와 대척점에 있는 이들을 향해 시위를 당기고 있는 모양 아닙니까? 그래서 역사는 늘 전쟁 중인 것입니다. 이렇게 ‘나’, 즉 인간이 중심이 된 인간들의 종교 행위는 항상 다툼과 분열과 전쟁을 유발시키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지금 왜 이런 이야기로 서론을 여는가 하면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오도하고 오해하여 종교가 되어 버리면 어떠한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내용이기도 하고요.
한국에 머무는 동안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한 편 보았습니다. 장훈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고지전’이라는 영화입니다. 1953년 휴전협상이 난항을 계속하고 있는 가운데 최전방 고지인 애록고지를 지키던 일명 악어중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입니다. 그 영화는 국군을 포로로 잡은 인민군 장교의 일장 훈시로 시작이 됩니다. 그 인민군 장교는 국군 포로들을 풀어주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너희들의 꼴을 보니 이 전쟁은 일주일 안에 끝난다. 너희들은 그만큼 유약하다. 왜 너희가 이렇게 지고 있는지 아나? 그건 너희가 왜 싸우는지를 모르고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일주일 후면 우리에 의해 이 조국이 통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고향에 돌아가서 통일 조국을 기다려라.’ 그리고 너그럽게 국군 포로들을 풀어줍니다.
너무 멋있지요? 그의 말에 의하면 인민군은 목적이 있어서 싸우는 사람들이고 국군은 목적도 없이 엉겁결에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인민군이 이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관객은 이런 질문을 품게 됩니다. ‘그럼 너는 왜 싸우는데?’ 감독은 영화 말미까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 주지 않습니다.
1953년에 남과 북의 종전협상이 그렇게 자주 결렬이 되었던 이유는 어디를 휴전선으로 긋느냐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남과 북이 서로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서 합의를 하지 못하는 그 상황 속에서 남과 북의 군인들이 수십 만 명이 죽어나가고 있었습니다. 협상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 차지하고 있는 고지가 자기 땅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야말로 피가 튀기는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고지의 주인이 바뀝니다. 그렇게 고지의 주인이 수시로 바뀌다 보니까 국군과 인민군들이 자기들의 보급품들을 다 짊어지고 후퇴를 하지 않고 고지 꼭대기 참호 안에다가 감추어 두고 갑니다. 그러다가 서로의 보급품들을 나누는 해프닝이 벌어집니다. 인민군들은 북에서 유명한 정종을 참호 속에다가 묻어두어 국군들을 감동시키고 국군들은 화랑담배를 묻어 두어 인민군들을 감동시킵니다. 그리고 서로 편지도 주고받습니다. 그리고는 서로에 대해 궁금해 하기도 하고 심지어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싸우고 있습니다.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서는 남을 죽여야 합니다. 자기가 쏴 죽인 그 사람들 안에 자기에게 정종 병을 묻어 두고 간 따뜻한 마음의 형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압니다. 그런데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는 수많은 병사들이 무언가에 장악이 되어,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 속에서 무조건 방아쇠를 당기고 대검을 휘두르고 있는 겁니다. 결국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는 그 많은 젊은 군인들이 다 죽습니다. 몰살을 당합니다. 저는 거기에서 예수를 알지 못하는 이 세상 모든 종교인들(무신론자들도 ‘나’라는 신을 섬기는 종교인)들의 결말을 보는 듯 했습니다.
국군포로를 풀어주며 ‘너희는 왜 싸우는지 몰라서 우리에게 지는 거야’라고 훈계를 했던 그 인민군 장교와 그 때 그 자리에서 ‘넌 왜 싸우는지 아니?’라고 묻고 싶었던 국군 장교가 마지막 죽음을 앞에 두고 대면하게 됩니다. 국군 장교가 묻습니다. ‘그동안 정말 물어 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넌 정말 우리가 왜 싸우는지 아니?’ 인민군 장교가 숨을 거두면서 말을 합니다. ‘글쎄 처음엔 아는 것 같았는데 하도 길게 싸우다 보니 나도 이제 왜 싸워야 하는지 잊어버렸어.’
여러분,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의 실체이며 실상인 것입니다. ‘나’가 주인이 되어 ‘나’를 위한 종교를 만들고 ‘나’의 위상과 가치를 챙기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그것이 선악과를 따먹고, 각자의 ‘하나님처럼’의 삶을 추구하는 아담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이 역사의 실제 모습인 것이며, 바로 그들이 마귀의 세력인 것이고, 그들이 사는 곳이 지옥인 것입니다. 그것이 이데올로기를 포함한 선행체계, 종교가 만들어내는 실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작금의 기독교가 그러한 종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큰일 난 겁니다. ‘나’를 포함한 ‘인간’이 기독교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안에 다툼과 분열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영화 속에서 한 군인이 이런 말을 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죽인 사람을 차마 셀 수가 없다. 난 지금 죽으면 당장 지옥에 갈 거야.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생각을 했어. 이렇게 우리가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죄를 짓고 있는데 왜 하나님이 우리를 당장 지옥으로 보내지 않으실까? 난 알았어. 여기보다 더한 지옥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이 지옥에 그냥 놔두시는 거야.’ 제가 그 대사를 들으면서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 성도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올바른 역사인식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지옥과 같은,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실체를 올바로 인식하고, 거기에 쏟아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커다란 선물인지를 감동스럽게 인정하게 되는 이들을 성도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구원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존재로서의 성립에서조차 그 어떤 모양으로도 주체로서의 기여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수많은 종교들을 만들어 놓고, 자기들이 주인공이 되고 자기들이 구상한 행복이 충만한 망상의 성을 구축하기 위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을 열심히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로 결론이 지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온전 성에 관해 설교를 하면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홀로 완전한 십자가의 은혜 앞에서는 자기를 포함한 ‘사람’, 즉 아담군상들이 모두 무시되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이야기하면 ‘무 율법주의자’라느니, ‘도덕 폐기론 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가장 많이 듣는 비난입니다. 심지어 저에게 무료로 책을 받아보고 있는 신학생들까지 제게 인간의 자유의지를 들먹이며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서의 신인 협동 설을 주장할 정도이니 제가 얼마나 낙심이 되겠습니까?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 7권 275페이지에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설교를 한 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기인하고 진행되고 완료된다면 이제는 나의 그 어떤 행위도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되거나 걸림돌이 될 수 없는 것이구나. 이제 나는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것이구나. 나는 이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구원 앞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는 정확하게 복음에 반대되는 설교를 한 사람이다. 설교자가 무 율법주의의 입장에서 설교를 하고 있다는 식의 오해나 중상모략을 받지 않는다면, 그가 복음을 진실로 믿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며, 또한 그가 진실로 복음을 설교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274페이지에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복음적인 설교가 아닌 것은 이런 설교입니다. ‘자 여러분, 여러분이 착한 삶 살기에 애를 쓰고, 죄를 안 짓기 위해 노력하고, 다른 이들에게 선을 행하고, 교회에 빠지지 않고 정기적으로 출석을 하며, 교회 일에 바쁘고 활동적인 사람이 되면 여러분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고 반드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 설교의 정반대의 설교인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신약 교수인 싱클레어 퍼거슨 교수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되지 않은 자들의 그럴듯하게 보이는 경건한 종교행위는 악마의 유희에 불과한 사악한 것이다. 성도의 올바른 신앙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지식에 의해 비워진 자아의 빈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발생되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이게 바로 종교와 기독교의 다른 점인 것입니다. 종교적 열심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모르는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지만 성도의 열심은 은혜가 격발시켜 내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자랑이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어 버린 인간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굴복한 행위가 아닌 자신들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 내어 놓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을 주었더니 그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거 굉장히 기특해 보이지요? 그게 가인의 계보를 따르는 구약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고 믿음을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자들을 모두 때려 죽였습니다. 왜지요? 열심히 착하게 살면서 자신들의 체면을 챙기고 있는데 갑자기 ‘회개하라’고 하는 거예요. 회개라는 것은 지금 가는 길이 잘못 되었으니 반대 방향으로 유턴을 하라는 것이거든요. 아담들은 자신들의 선한 행위가 부정당하는 꼴을 참아 내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무 율법 자라느니, 도덕 폐기론 자라느니 혐의를 씌워서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자들의 실체를 이렇게 폭로하십니다.
(마23:33~35)
33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35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의이 아벨이 자신의 제사, 즉 행위를 지키려 하는 가인에게 맞아 죽었다는 것은 익히 잘 아시지요? 그럼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는 누구입니까? 사가랴의 히브리어 이름은 스가랴입니다. 그 스가랴가 어디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지요?
(대하24:20~21)
20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저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 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21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을 좇아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 죽였더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성전에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선지자 사가랴가 이스라엘의 우상 섬김을 질책합니다. 그때 이스라엘이 성전 뜰에서, 즉 교회에서 하나님의 진짜 계시를 전하는 자를 죽여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성경은 우리가 가진 성경과 편집이 다르게 되어 있는 거 아시지요? 유대교의 구약 성경은 맨 마지막이 역대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아벨에서부터 역대하의 마지막 선지자 스가랴를 언급하신 것은 이 세상 아담 군상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올바로 전하는 모든 선지자를 역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 때려죽일 것이라는 걸 암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디서? 성전에서, 교회에서요. 누구에게? 종교인들에게. 왜요? 자신들의 행위를 지키기 위해서요. 우상이라는 것은 결국 ‘나’로 귀결이 되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종교인들에게 참 진리가 전해지면 그 종교인들에 의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모두 맞아 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극명한 예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었던 것이고요. 그래서 성경이 목숨 걸고 은혜의 도, 믿음의 도를 지키라고 반복하여 경고하는 것입니다.
(유1:3~4)
3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4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요한 계시록으로 가면 그러한 가짜들과 진짜들의 전쟁이 이렇게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계16:13~16)
13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5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16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성경에서 개구리는 항상 부정함과 저주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애굽에서도 개구리 재앙이 있었던 것이고 레위기에서도 개구리는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가 됩니다. 요한은 그러한 개구리를 거짓선지자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그 개구리가 세 더러운 영이랍니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옵니다. 마귀의 세력이 뭘 흉내 내고 있지요? 삼위 일체 하나님을 흉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과 전쟁을 해야 할 성도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합니까? 옷을 지키라고 합니다. 유다서에서는 믿음의 도를 지키라고 했지요? 여기에서는 그것을 하나님이 입혀 준 자기 옷이라고 합니다. 그 옷을 지켜서 벌거벗고 다니지 말고 부끄러움을 보이지 말라고 하시지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무슨 옷을 지키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옷과 벌거벗음, 부끄러움이라는 개념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곳이 창세기 2장과 3장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겨져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창조가 되었을 때에는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지요? 그들이 인간들의 손이 가지 않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벌거벗었음에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이 굳이 삽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의 삶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이 벗겨져 버렸습니다. 그 상태에서 인간이 자신들을 바라보게 되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벗고 인간들의 벌거벗음이 인간들 자신에게 노출이 되면 인간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데 그 상태를 진짜 벌거벗은 부끄러운 상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그 부끄러움과 벌거벗음을 가리려 시도를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처럼 되어버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하나님처럼’ 되어 버린 자신들의 힘으로 부끄러움을 가릴 옷을 스스로 해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인간들이 해 입은 옷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입니다. 그게 바로 율법주의와 인본주의라는 옷입니다. 그 옷은 아담군상들이 존재하는 역사 내내 인간들의 로망이 됩니다. 명예의 옷, 재물의 옷, 인기의 옷, 선한 평판의 옷, 등등 인간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벌거벗음과 부끄러움을 가리려 애를 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세상의 옷, 인간의 옷을 가리켜 벌거벗음이라고 합니다.
(계3:17)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 하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모든 것이 풍요했습니다. 교인들의 선행, 구제, 열심,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 스스로 자기들은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 없이 잘하고 있다고 자기들에게 반해 버린 것입니다. 그게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을 입은 마귀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게 벌거벗은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 백성들에게 찾아가셔서 바로 그 옷을 벗기시고 무죄한 짐승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은혜의 옷으로 갈아입히시는 것이 구속사의 전체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사는 인간들의 무화과나무 잎사귀 옷과 하나님의 은혜의 옷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께서 무화과나무 잎사귀 옷을 입고 벌거벗은 자들에게 뭐라고 하시지요?
(계3:18)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의의 흰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흰옷은 어린양의 피에 씻은 옷이라 했지요?(계7:14) 환난에서 나오는 무리들이 입고 있는 흰옷, 불로 연단한 금으로 사는 흰옷, 같은 옷인 것입니다. 그 옷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 옷이 십자가에서 만들어 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겉옷을 달라고 하는 자들에게 속옷까지 주라고 하셨지요?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누가 제비 뽑아 가져갔나요?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벗겨 갔습니다. 그러니까 산상 수훈의 겉옷과 속옷 이야기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미리 비유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옷이 예수를 죽인 우리에게 입혀진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짠 옷. 의의 흰옷. 그 옷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갈3:27)
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성경이 아마겟돈 전쟁에 참여하는 성도에게 끝까지 지키라고 한 옷이 바로 이 그리스도라는 옷인 것입니다. 다른 옷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렇게 그리스도에게 장악된 상태를 ‘순종’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라는 행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뜻과 의지로 살진 제물들을 살려서 가지고 온 사울에게 뭐라 하셨지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거기에서 낫다는 것은 better가 아니고 ‘옳음’이라는 뜻입니다.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은 순종이지 제사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순종이라는 것은 몇 가지 지시사항을 잘 지켜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순종 ‘솨마’는 두 객체가 하나로 연합이 되어 한 몸이 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순종은 두 객체가 따로 존재하며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복종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한 쪽 대상이 다른 쪽 대상에게 완전히 장악되고 흡수되어 자신을 부인당하고 끌려가는 그 연합의 상태를 순종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 끌려가는 성도의 삶 속에서 나오는 순종에는 자랑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옷을 입은 자들이 바로 그러한 순종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모든 성도의 삶은 전부 다 순종의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걸 원하시는 겁니다. 제사, 행위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널 비워낼 때 넌 그냥 살아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라는 은혜의 옷을 입은 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의 의미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 돈, 명예, 인기 등이 없으면, 벌거벗었다고 자신을 자책하고 부끄러워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라는 옷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벌거벗고도 벌거벗은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벌거벗은 임금님과 그 임금님을 바라보면서 ‘그 옷 참 멋있다’고 외치던 나쁜 백성들처럼 진짜 벌거벗은 무리들이 우리들이 입은 옷이 진짜라고 너스레를 떨고 있는 격입니다.
바로 그러한 아담들의 세상 옷을 찢어 버리시는 것이 자기부인이라는 것이고 그러한 자기부인 위에 입혀지는 은혜의 옷이 구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여전히 인간들의 공로와 열심과 노력이 가미된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을 열심히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옷을 서로 자랑하고 있는 겁니다. 그건 아무리 훌륭해 보이고 멋져 보이는 옷이라 할지라도 잔치집 밖으로 내쳐져서 영원토록 이를 갈게 될 자들의 엉뚱한 옷인 것입니다. 왕이 원하시는 옷은 왕이 준 예복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말씀을 똑같이 주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말씀 속에서 자기들의 무력함과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능력을 배우는 반면(그것이 은혜의 옷을 입은 자들) 종교인들은 인간들의 가치와 체면을 먼저 챙겨내는 것입니다. 그게 율법과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의 모습이었고 오늘날 율법주의에 매인 교회 안의 종교인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롬3:1~2)
1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헬라어 원어로 보면 3장 1절이 ‘티 운’이라는 의문 대명사와 접속사로 시작이 됩니다. 그것은 지금 3장의 내용이 2장의 내용에 이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2장의 내용이 뭐였지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시자 유대인들이 그 율법을 받은 일 자체를 자신들의 자랑으로 삼아 그것을 선민의식 고취에 사용을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율법을 받기만 하면 뭐하냐? 율법을 행하는 자가 진짜 하나님 백성이다(13)’하고 일갈을 합니다. 그 말은, 율법이 인간들의 죄의 실체를 폭로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십자가를 붙들게 하는 몽학선생으로 주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 율법으로 자신들의 실력을 입증하려 했음을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은 율법의 역할로 주어진 양심으로 자신들의 체면과 가치를 챙기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둘을 다 심판받을 자들이라고 몰아붙입니다.
그리고는 17절부터 유대 선민사상의 두 핵인 율법과 할례를 가지고 시비를 겁니다. 사도 바울이 거기에 인용하여 쓴 구절이 에스겔서 36장의 내용입니다. 그 에스겔서 36장의 내용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하나님의 새 언약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37장에서 그 새 언약의 실현이 마른 뼈의 그림으로 설명이 되고 있는 것이고요. 바울은 에스겔서 36장의 새 언약의 내용으로 유대주의와 율법주의를 공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새 언약의 내용 중 굳은 마음을 제하여 버리고 새 마음을 준다는 대목에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명하신 할례 언약이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라 했지요? 그래서 제가 에스겔서 36장과 37장을 가지고 로마서 2장을 설명해 드렸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 문맥에 의거하여 로마서 2장과 3장을 써 내려가고 있거든요. 여러분도 에스겔서 36장과 37장, 그리고 로마서 2장을 함께 읽어 보세요. 에스겔과 바울이 정확하게 같은 내용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차치하고, 그렇게 유대인들의 율법지킴과 할례 행함을 무차별 폭격을 한 사도 바울이 3장 1절에서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면 유대인들이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하고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데, 그 내용이 ‘그러면 유대인은 도대체 왜 택하신 것이냐? 그리고 할례를 행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기에 하나님은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을 하신 것이냐?’입니다. 그게 본문 1절입니다. 바울은 참 논리적인 사람입니다. 자기가 얼마 전까지 그 율법과 할례에 묶여서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본인은 잘 알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자기처럼 여전히 눈멀고 귀가 먼 율법주의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 명확하게 간파하고 스스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질문에 즉시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유익이 참 많으나 가장 중요한 유익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다.’ 그게 2절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의해 선택이 되고 율법과 할례를 받은 것이 그들에게 어떤 유익이 되었지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만 율법과 할례와 제사를 주심으로 그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많아진 것인가요? 정말 그래요? 에베소서 1장에서 우리는 언제 선택되고, 예정되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고 했지요? 창세전입니다. 그건 창세전에 결정이 난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율법과 할례와 제사를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해도 인간 측에서 그것들의 의미를 스스로 이해하고 파악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열고 귀를 열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이해시켜 주신 자들만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과 할례와 제사를 하나님께 받았다고 해서 유익이 될 것은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손을 대시지 않으시면 인간들은 그 율법과 할례로 자신들의 체면과 가치와 위상만을 챙기려 할 테니까요. 아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도 선악과를 먹어버리는 존재들입니다. 아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나’를 중심으로 한 종교를 만든다니까요. 바울이 본문 3절에서 어떻게 말을 하는지 보세요.
(롬3:3~4)
3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 하겠느뇨
4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 지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것이 유대인들의 유익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자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아니, 유대인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때려 죽였단 말입니다. 그걸 로마교회는 알고 있습니다. 성령 받은 교회니까요.
그렇다면 논리상 하나님의 말씀 맡김이 실패한 것이고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이 나는 것이잖아요? 어려워요. 잘 들으세요. 그러면 그들의 그 불신앙이 하나님의 원래의 계획에 차질을 빚게 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3절에서 두 번째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맡기셨는데 그들이 그 말씀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미쁘심이 폐하여 진 것이겠느냐?’ 여기에서 미쁘심이라고 번역이 된 말은 ‘신실함’이라는 뜻인데 그 원래의 뜻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미쁘심은 ‘하나님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믿음이란 하나님의 계획과 소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널 믿는다.’에서의 그 아버지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니까요. 사람들이 믿어주건 믿어주지 않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절대 실패 되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를 안 믿은 것은 하나님의 미쁘심, 즉 하나님의 믿음 안에 들어 있는 계획이었지 절대 그들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을 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선택하지 예수를 선택 안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어느 누가 자신의 의지를 발동하여 하나님처럼의 삶을 버리고 예수 안으로 비워져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4절로 이어집니다. ‘모든 인간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시다’
여기에서 ‘거짓되되’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프슈스테스’인데 그 단어는 단순히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거짓말쟁이라는 말이 아니라 어리석고 무식해서 자기 마음에 옳다 생각하는 것을 진리라 믿고 행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걸 개역 성경이 거짓이라고 번역을 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을 직역을 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나 경륜을 그들의 이성이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프슈스테스’들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진리시라는 것입니다. 그 어구에서 ‘하나님은 참 되시다’가 정확히 번역하면 ‘하나님만 진리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던 유대인들이 정작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신실하게 성취해 내시는 분이심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들을 통하여 인간들의 거짓됨, 즉 어리석음과 무력함이 확인이 되고 오직 하나님만이 참이며 진리라는 것이 입증이 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두 가지 의문을 불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가 유대인들의 질문, 즉 ‘율법과 할례 그 자체가 우리에게 구원을 주지 못하는 것이라면 율법과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의 유익이 무엇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라는 질문이고, 두 번째가 ‘만일 하나님께서 말씀을 맡긴 것이 유대인의 유익이라면 왜 유대인들이 믿지 않았느냐? 그리고 원래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 말씀을 맡긴 거라면 그들이 믿지 않았으니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뭔가 불완전한 것 아니냐?’라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뭘 안다고 사람의 이성과 논리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비판할 수 있겠느냐? 사람은 모두 무식한 거짓말쟁이들이다. 하나님만이 진리이시다. 할 말 있어?’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거기에 대한 예로 시편 51편 4절을 인용 해다가 씁니다.
(롬3:4)
4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이 부분이 바로 시편 51편 4절을 그대로 인용한 구절입니다. 물론 70인 역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시51:4)
4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왜 사도 바울이 갑자기 여기에서 시편 51편의 다윗의 시를 인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이 다윗의 시편은 다윗이 밧세바와 잠자리를 하여 임신을 시키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교살한 후에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다가 나단 선지자로부터 하나님의 저주를 전해 듣습니다. 그때 다윗이 하나님의 저주를 전해 듣고 쓴 시편이 51편입니다. 그 시편의 배경이 되는 사무엘하 12장의 몇 구절을 읽고 가겠습니다.
(삼하12:10~13)
10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1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13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바로 이때에 다윗이 쓴 시가 시편 51편인 것입니다. 사실 고대시대에는 왕이 부인을 여럿 두는 것이 흠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그리 큰 고민을 하고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나단이 그렇게까지 자기 이야기를 하는 데도 못 알아들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나단을 통하여 자기에게 떨어진 저주가 너무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아마 다윗이 속으로 ‘이건 좀 너무 한 것 아닌가? 내가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고 경건하게 산 삶에 비하면 이런 정도의 흠은 이스라엘의 왕의 신분을 감안해서라도 눈 좀 감아주시면 안되나?’하고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하셨습니다. 그때 다윗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진리이고 하나님만이 의로우십니다.’ 내 생각은 다 틀렸다는 것입니다. 내 이성이나 내 논리로 하나님을 평가하고 재단하려 하는 것이 얼마나 무식한 짓인지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다윗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의 이성이나 논리를 떠나 무조건 옳다는 것을 인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도에게 요구되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그 시편 51편 4절의 내용이 오늘 본문 4절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인용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시편 51편에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다 옳고 의로우며 순전하십니다. 하나님의 판단에 따르겠습니다.’에 초점이 있는데 그것을 인용한 오늘 본문 4절은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주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나고, 주님께서 판단을 받으실 때에 항상 주께서 이기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라는 데에 초점이 있습니다.
이건 사도바울이 의도적으로 이렇게 바꾸어 인용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사용하셔서 다윗으로 하여금 우슬초와 꺾으신 뼈, 즉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만을 의지하게 하셨던 것처럼, 율법과 할례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시고 폭로하심으로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게 하려 하셨던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의로움과 하나님의 이기심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모두 그 안에 넣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 식으로 일을 하시느냐? 차라리 미리 말려 주시던가, 아니면 미리 경고를 해 주시던가 하시지 왜 불의와 죄를 저지르게 해 놓고 그 때에서야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하나님의 긍휼을 덮으시는가?’ 그런 질문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옳고 하나님의 방법이 늘 맞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토 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곧 이런 질문이 들겠지요?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하나님의 참되심의 능력을 보이시기 위해 사람의 불의와 죄를 사용하시는 것이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의 불의와 죄를 심판하실 수 있는가?’ 그게 본문 5절과 7절입니다.
(롬3:5,7)
5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7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이게 아직 복음을 모르는 자들의 억지인 것입니다. 바울도 그것을 괄호로 묶어서 분명하게 표기를 합니다. 자기 의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창세전에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어리석음과 불의와 죄로 심판 받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을 예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다 덮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의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는 이들은 ‘그러니까 이제 막 살아도 되겠네.’라는 결론으로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는 막 살아도 되는 게 맞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그 자체로 시작과 끝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로이드존스나 싱클레어 퍼거슨 같은 사람들이 ‘그럼 이제 막 살아도 되겠네’라는 반응을 끌어내지 못하는 설교자는 복음을 모르는 설교자라고 단호하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체험한 이들은 삶 속에서 그게 안 된다는 말입니다. 논리로는 그 은혜의 복음에 동의하여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되지만 삶 속에서는 아주 처절한 고민과 고뇌를 통과하며 예수의 삶의 궤적을 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원래 막 살고 싶어 했던 자들이 자기의 체면과 가치와 위상에만 관심을 둔 종교놀이에 빠져서 근사하게 선행과 열심으로 위장을 하고 있다가 하나님의 십자가와 은혜를 이야기하면 ‘이게 웬 떡이냐’하면서 방종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와 위상에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방종한 삶을 살면서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그 불안함을 유발시킨 방종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를 시키게 되는데 그 대상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를 가르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는 것은 자기들이 개판으로 살아놓고 하나님의 은혜의 온전 성을 설교한 교사나 설교자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키면서 ‘왜 경건한 삶 살기’에 대해 강조를 하지 않느냐고 소리를 높이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여러분 주변에서 ‘왜 우리 교회에서는 십자가만 이야기 하고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는 그토록 가치 없이 이야기를 하느냐’고 볼 멘 소리를 하는 이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던가요? 정말 여러분이 본받을 만한 경건한 삶을 멋지게 살고 있던가요? 마치 담배가 너무 좋아서 담배를 못 끊은 사람이 여전히 담배를 즐기면서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리며 ‘당신이 담배를 끊는 것이 선이라고 말을 해 주지 않아서 내가 계속 담배를 피우는 것 아니냐? 내가 계속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은 당신 책임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사는 건 자기들이 개판으로 살아놓고 왜 나에게 똑바로 살라고 안 가르치냐고 항의를 한다니까요. 그건 원래 그렇게 살기 싫었던 사람들의 자기변명인 것입니다. 성령이 살게 한 이들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성령이 이끄는 삶을 삽니다. 그런데 은혜의 왕 노릇에 의해서가 아닌 아담들의 열매, 무화과나무 잎사귀 옷을 열심히 만들어 입던 자들은 원래 하기 싫던 일을 억지로 하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즉시 방종의 삶으로 떨어집니다. 그리고는 그 책임을 엉뚱한 사람들에게 전가해 버린단 말입니다. 네가 그렇게 가르쳐서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요. 그들이 심판받고 정죄 받게 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8절입니다.
(롬3:8)
8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보세요. 사도 바울이 활동하던 초대교회 때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니까요?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설교 했더니, 지들이 좋아서 막살던 놈들이 그 불안함을 어쩌지 못하고 바울에게 책임전가를 하며 ‘저 사람이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해도 된다고 했다’고 누명을 씌웠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성령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에 눈과 귀가 열리게 되면 ‘그럼 이제 막 살아도 되겠네.’로 밀려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에 의한 올바른 신앙의 행위를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제가 지난주에 기도원에 올라가 있었는데 기도원에서 밤을 보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는 내가 왜 기도해야 하는가? 어차피 내 기도에 의해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이 바뀌지 않을 것인데 왜 내가 기도해야 하는가? 도대체 성도의 신앙생활 속에서 기도의 가치와 역할은 무엇인가?’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은 제가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와 긍휼, 그리고 십자가의 온전 성을 설교한다고 해서 기도하지 않으세요? 기도 하시지요? 왜 기도하세요?
우리 성도가 기도를 한다는 것은 내가 필요한 어떤 것을 얻어내기 위해 애를 쓰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신 일, 이미 묵시 속에 완료된 그 일의 구체적 내용을 이 역사 속에서 알아가는 도구의 차원에서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통로, means of grace 가 말씀, 기도, 성례 인 것입니다. 기도라는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해야 내게 은혜가 쏟아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 이미 내게 쏟아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 비로소 이해되어지고 깊이 깨달아지는 그 과정 속에 기도가 소용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성경은 분명 우리는 우리가 기도할 것을 알지 못한다고 명확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우리 대신에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를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기도, 혹은 나쁜 기도, 혹은 잘못된 기도, 등등 여러 가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알게 되는 것이지 기도를 해야 하나님이 일을 행하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삶에 맺히는 열매는 그 자체가 인간의 존재됨과 인간의 가치 확보에 어떤 힘이 있거나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아가고 인간의 무력함을 인정하여 십자가를 꼭 붙드는 데에 필요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지 하나님마저도 감격시킬 수 있는 인간들의 공로와 업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한국에 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이제 곧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 권사님도 계셨고, 산소 호흡기에 의존해 있는 죽음 직전의 환자들도 있었습니다. 산골에서 문명과 상관없이 살고 있는 불쌍한 촌로들과 장대비 속에서도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무료 급식소 앞에 줄을 서 있는 노숙자들도 만났습니다. 가난한 신학생들과, 오갈 데 없는 고아들도 만났고,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타국 만리에서 피땀을 흘리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연신 부르고 다녔던 노래가 ‘평화의 기도’였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슬픔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비우게 하소서’
이게 누구의 기도 같으세요? 이 기도는 프란시스의 입에서 나온 기도이지만 그 이전에 예수님의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만나면서 제 안에서 진심으로 이 프란시스의 기도가 제 기도로 터져 나왔습니다. 말씀으로든 물질로든 그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힘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온전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저 자신은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런데 어느 때보다도 더 간절히 그러한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그렇게 살도록 노력할 겁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삶 속에서 구현해 보도록 열심히 노력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그러한 불쌍한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시고 그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주신 것은 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불쌍한 지경에 처해 있었던 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시켜 주시는 도구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이 진심에서 우러나지 않는 이들을 함부로 폄하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그러했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자기만 생각하는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배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나만을 생각하면서 살까? 하나님의 은혜가 날 찾아오지 않았다면 난 정말 어떻게 될 뻔했나? 할렐루야’로 열매가 맺힐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살게 하시는 예수 닮은 삶이나 그렇게 살지 못하여 안타까워했던 그 모든 삶이 다 성도의 복음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이 성도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합력되어 선을 이룬다’고 한 것입니다. 모든 일입니다. 착한 일, 선한 일만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하나님께서 예수의 심장으로 살게 하시거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사시면 됩니다. 게으르지 마시고 최선을 다해서 이웃을 섬기시고 나누시고 봉사하시고 하세요. 그러나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들을 가리키며 손가락질을 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도 그 과정을 거치고 은혜의 깊이를 깨달아 아는 만큼 예수 닮은 삶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능력을 계시해내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성도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성도에게 유익입니다.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절에서 바울이 이스라엘의 유익을 말씀을 맡은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이유로 구원에 있어서의 그 어떤 유리한 고지도 선점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 속에서 완료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아니다. 유익이 있다’고 말을 하면서 그 유익이 ‘말씀을 맡은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힘주어 말을 합니다. 여기에서 ‘말씀’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로고스’가 아닙니다. 여기에 쓰인 단어는 ‘신탁’이라는 의미의 ‘로기온’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성경에 몇 번 안 나오는 단어입니다. 제가 찾아 본 바로는 성경 전체에서 서너 번밖에 쓰이지 않은 단어입니다. 그 ‘로기온’이라는 단어는 고대 문명사회에서 신의 계시를 몸으로 머리로 받아 몸과 입으로 그 계시를 신의 도구가 되어 구현해 내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우리가 구약의 선지서 등을 보게 되면 선지자들이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소리쳐라’하고 외치는 내용들이 많이 나오지요? 그렇게 마치 빙의된 사람처럼 자신의 뜻과 의지를 부인당하고 자기를 장악하고 있는 어떤 존재의 뜻과 계시를 담아내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행위와 말과 글 등을 로기온이라고 합니다. 단순히 구약성경, 율법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그 ‘로기온’을 맡은 자들이라는 것은 그들의 됨됨이와 행위에 상관없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내는 그릇이었다는 말입니다. 사도는 죽은 흙에 불과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계시를 담는 그릇으로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는 그것조차도 유익이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담는 그릇이라고 해서 다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그릇으로 들려서 애굽에서부터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입성을 하고 그 가나안에서 다시 성전을 건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맞기까지 그 모든 이스라엘의 역사가 다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의 성취를 담아내는 계시의 그릇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모세가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즉 보이는 것에 의해 계획되고 움직여지고 운행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태어나고 양육되며 완료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걸 성경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것을 계시해 낸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게 말씀을 맡은 것입니다. 말씀이 계시하고자 하는 것을 몸으로 입으로 행동으로 설명해 내는 자들이 ‘로기온’을 맡은 자들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말씀을 맡아서 살면서 인간들은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이며 얼마나 은혜가 필요한 자들인가를 설명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하지 않은 자들은 반드시 자신을 은혜로 장악하러 오시는 하나님을 때려죽인다는 것도 설명해 내었습니다. 그것들이 로기온입니다. 말씀을 맡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다 버림을 당했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 속에 들어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기필코 구원해 내시고야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을 맡은 이스라엘의 유익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성실하심과 미쁘심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실패 되어질 수 없다고 말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말씀을 지키고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서 구원을 받겠다고 나서며 하나님의 복음을 대적하는 자로 설명을 맡았지만 하나님은 그들 중에서도 당신의 백성은 구원해 내시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지와 더러움과 추악함,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잘 계시한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와 그들의 범죄 함과 상관없이 당신의 신실하심에 의해 당신의 뜻과 계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맡은 이스라엘의 모습이 다윗의 모습 속에서 축약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시편 51편을 인용 해다가 쓴 것이고요.
그런데 바울은 우리 자신도 그렇게 말씀을 맡은 자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고전4:1-2)
1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 지어다
2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믿음)이니라
따라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 하늘의 비밀을 계시해 내는 삶을 사시면 됩니다. 때로는 예수의 심장으로 이웃을 자기 목숨처럼 섬기고, 자신을 비워내며 살게도 하시고, 때로는 이기적이며 자기밖에 모르는 마귀처럼 살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예수를 여러분에게 경험케 하시거든 목숨 바쳐서 경건하고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내십시오. 부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 존재의 실체를 경험케 해 주시기 위해 여러분의 마귀 성을 드러내시거든 그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십자가를 꼭 붙드세요. 다른 이들 함부로 평가하지 마시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분들이 되세요.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서 2장을 거쳐 3장 20절까지는 모두 인간들의 무력함과 범죄 함을 들추어내는 부분이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마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속에 ‘나에게서도 예수의 삶이 좀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 나도 섬기는 삶을 살고 싶다. 나도 평화의 도구가 되고 싶다’는 그러한 새사람으로서의 고민을 두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번에 한국에 가서 제가 어머니라 부르는 권사님의 암 발병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늘 저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시는 분인데 말기 암 환자가 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를 꼭 만나 식사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찾아뵈었습니다. 그 어머님은 집안도 많이 어려워진 상태에서 암까지 걸린 그런 불쌍한 인생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도 씩씩하고 당당하고 기쁜 모습이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평생 기다리시던 신랑과 혼인잔치를 앞두고 있는 신부 같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진짜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 아십니까? 여러분 중에 정말 죽음을 눈으로 목도해 보신 분이 몇 분이나 계세요? 그냥 주워들은 이야기로 죽음을 추측하는 것일 뿐이지요? 그래서 함부로 죽고 싶다느니, 살아서 뭐하냐느니 이런 소리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 앞에서 혼인 잔치를 앞둔 신부의 모습이 된다는 것이 쉬운 줄 아세요?
어떻게 그 어머님이 그렇게 죽음도 두렵지 않은 사람이 되었을까요? 남들보다 착한 일을 많이 해서? 누구보다 교회 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아니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결정이 된다는 것을 알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나로부터 발생한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거나 뒤집어엎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 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그 하나님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아 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죽음 앞에서도 기뻐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가 철저하게 부인되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어머님께서 제게 마지막으로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어떤 기도였을 거 같으세요? 말기 암 환자의 고통을 없애달라고 부탁을 하셨을까요? 병을 낫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셨을까요? 아니요. 수시로 찾아오는 그 고통이 너무 커서, 스스로의 의지와 힘으로는 그 고통을 감당해 낼 수가 없으시다고, 혹시나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니 끝까지 하나님 사랑하고, 하나님 기대하며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기 부인 아니겠습니까? ‘목사님 제가 끝까지 잘 참아 볼게요.’가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이 힘주시지 않으면 질병이 주는 고통도 이기지 못해 하나님 원망할 사람이니 끝까지 하나님 원망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합니다.’ 그 사람을 신앙인이라 합니다. 이 설교를 들으시는 여러분도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 의존하는 성도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떠나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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