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34) 유대인과 율법과 나
(롬2:17~29)
17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19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 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22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23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25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 할례가
되었느니라
26그런즉 무 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또한 본래 무 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28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요즘 전 세계 TV 예능 프로그램의 대세는 단연 오디션 프로그램입니다. 노래, 연기, 화술, 개그, 댄스, 등등 각 분야의 최고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필살기를 가지고 나와서 평가단과 심사위원단의 평가로 순위가 매겨지는 그런 프로그램입니다. 그러한 오디션 프로의 영역과 종류는 날로 넓어지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그러한 순위 매기기에 열광을 할까요? 그게 바로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발전, 자기 성숙, 자아확장, 자아실현을 모토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거기에 올인 하며 사는 이 세상 아담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고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모두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자기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다른 이들의 경합을 보면서 거기에 대리 만족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전부 순위 매기기의 경연장이 되어 있습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운동 경기장에서,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우리는 최고로 평가를 받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교인 수를 늘이고, 건물을 확장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들을 개발하여 어떤 면에서든 좋은 평가들을 얻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러한 자기발전과 자기성숙과 자아실현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오히려 자기부인과 자아삭제라는 다소 불편한 목적지로 우리를 밀고 내려갑니다. 그게 기독교의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을 가지고도 여전히 자기자랑과 자기증명, 교회자랑과 교회증명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로마서 2장의 마지막 부분에 당도했습니다. 사도는 로마서 1장 16절과 17절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산다.’는 로마서의 대 주제를 제시한 뒤 18절에서부터, 왜 인간은 예수님이 이루신 의로만 살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중입니다. 그게 로마서 3장까지 장황하게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인간 측에서 생산해 내는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 드릴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하지 않은 인간들의 모든 행위는 아무리 선해 보이고 근사해 보여도 다 죄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들이 내어놓은 행위를 근거로 남을 외모로 판단하고 심지어 율법 지킴이나 양심이라는 것을 가지고도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는 데에만 급급하더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지난주까지 공부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얼핏 보면 유대인들과 그들이 붙들고 있는, 할례로 대표되는, 율법 지킴에 대한 경고의 말씀처럼 보입니다. ‘유대인들아 너희들에게 주어진 율법을 말로만 하지 말고 잘 지켜라’ 그렇게 보이시지요? 만일 그렇다면 이 부분은 우리와는 상관없는 부분이 되지요? 우린 유대인이 아니니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이 역사에 편만하게 흩뿌려진 보편적 교회 전체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따라서 모든 내용이 우리 교회에게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도 단순히 민족적 유대인의 행위만을 지적하는 내용으로 보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나’를 찾아 내셔야 하는 것이고 그 속에 들어 있는 ‘나’에 동의가 되시면 그 ‘나’에게 던져지고 있는 하나님의 교훈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의 의가 아니면, 인간들은 율법을 지켜서 망하고, 양심을 따라 살아서 망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율법은 보편적 아담 군상들의 대표로 택해진 기능적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리트머스 시험지였고, 양심은 그 기능적 이스라엘 밖의 모든 인간들에게 주어진 리트머스 시험지였습니다. 그 둘은 같은 기능을 합니다. 그런데 그 율법과 양심이라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에덴동산의 선악과처럼 인간들의 마음에 가 닿자 ‘죄인’이라는 색으로 금방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인간들은 그 무엇을 가지고도 전부 자기 자신의, ‘하나님처럼’의 위상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인 17절부터, 그러한 인간들의 어리석음과 우매함을 율법과 그 율법의 총화라 할 수 있는 할례를 가지고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민족적 유대인을 떠 올릴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율법주의, 우리 안의 유대주의, 우리 안의 인본주의를 찢어내는 하나님의 메스를 받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 17절을 보시면 오늘 본문의 교훈의 대상이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롬2:17)
17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교훈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유대인이라 칭하는 너’입니다. 그 말은 ‘스스로 자랑스럽게 유대인이라 칭하는 너’라는 뜻입니다. 어떤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 전체가 힐난의 대상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전체를 ‘너’라는 단어로 축약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 ‘너’는 바로 우리를 여전히 붙들고 있는 우리 안의 유대주의와 인본주의인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유대인이라 칭하는 너’라는 어구가 요한계시록에도 등장합니다.
(계2:9)
9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계3:9)
9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보시다시피 ‘유대인이라 칭하는 너, 자칭 유대인’은 ‘사단의 회, 사단의 세력’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자아 숭배 사상에 여념 없는 나, 율법주의 속의 나’가 바로 자칭 유대인인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과 양심으로 자신의 영광과 가치를 챙기고 쌓아서 다른 이들에게 ‘나’를 과시하고 자랑하고 싶어 하는 ‘인본주의 속의 나’가 바로 자칭 유대인이요, 사단의 회인 것입니다. 자기는 자신 있게 ‘난 교회다’라고 우기는데 하나님은 ‘넌 사단의 회야’라고 하시는 그 무리, 그게 내 안에도 혼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자신을 평가하게 되는지 보세요.
(롬2:17~20)(표준 새 번역)
17그런데 스스로 유대 사람이라고 하면서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그분의 뜻을 알며, 율법으로 가르침을 받아서 옳고 그른 것을 분간할 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19그런데 그런 사람일수록 스스로 눈먼 사람의 길잡이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20율법에서 모든 지식과 진리의 근본을 터득하였다고 하면서,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으로 확신합니다.
사단의 회, 자칭 유대인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우선 ‘내가 교회다’라는 자신감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자기를 ‘유대인’이라 부를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나야말로 유대인이야, 난 자격 있어.’
성도는 신앙생활에 연륜이 붙을수록 ‘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은 할 수 있을지언정 ‘나 정도는 되어야 구원받을 자격이 있지’라는 말은 절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의 회는 자신감이 넘칩니다. 왜요? 눈에 보이는 자신의 가시적 행위를 갈고 닦아서 자신에게도, 타인들에게도,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존재로 평가를 받고 있거든요. 구원은, 영생은 외모를 근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인데 기특한 자신의 외모에 자기가 반한 것입니다.
17절을 보시면 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도 안다고 하고, 율법을 잘 공부했기 때문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며,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 것인지 잘 분간할 줄 안다고 확신을 합니다. 자신의 지식과 양심으로 선과 악의 판단을 스스로 내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분명 다른 이들보다 뛰어난 무언가가 있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그런 이들은 반드시 다른 이들의 행사를 지적하고 가르치려는 선생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그게 19절과 20절입니다. 자기는 율법도 알고 선악 분별 능력도 뛰어난 성숙한 사람이기 때문에 충분히 소경의 길잡이로,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빛으로 살 자격이 있다고 믿고, 자기가 외모로 판단하기에 아직 어리석어 보이는 이들의 교사가 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 아닙니까? 사도 바울도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는데, 사단의 회는 자기의 됨됨이나 지식 정도를 자신이 사유하여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21절부터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인본주의자들의 실체를 확 까발려 버립니다.
(롬2:21~24)
21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22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신성모독) 하느냐
23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사도는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자신들의 선함과 잘남과 유식함을 자랑하던 유대주의를 향해 ‘야 이 도둑놈들아’하고 일갈을 합니다. 이 대목도 마치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부분처럼 ‘말만하지 말고 지켜서 행하라’는 메시지처럼 보이지요? 지금 이 힐난의 대상이 전체 유대인이라는 걸 놓치지 마세요. 그럼 유대인 중 단 한 사람도 율법을 잘 지켜낸 사람이 없다는 것인가요? 그들이 전부 도둑질하고 전부 간음을 했다는 말입니까? 사도는 지금 그러한 죄의 세목을 가리켜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로마서 2장 13절의 ‘율법을 듣는 자가 되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 어떤 말씀이었지요? 율법의 진의를 올바로 파악하고 올바로 반응을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율법은 인간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폭로하는 기능으로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인데 인간들이 그 율법을 이용하여 오히려 자신들의 가능성과 위대함을 입증하는 도구로 썼지요? 그게 유대주의 아닙니까? 따라서 율법을 듣지만 말고 행하라는 말은, 함부로 남을 외모로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자격은 너희들에게 없으니까 율법의 진의를 올바로 깨닫고 낮아지고 겸손해지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내러티브에 이어지는 오늘 본문의 내용도 ‘너희는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지 말고 너희가 가르치는 대로 잘 행해야 진짜 선생이다’라는 내용일 수가 없는 거지요?
사도는 지금 겉으로 드러난 ‘자칭 유대인’들의 모습을 나열한 뒤 그들의 진짜 속을 극명하게 대조를 시킴으로 해서 ‘왜 너희들에게도 예수의 의가 필요한지 아니?’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목숨 걸어 지키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둑질이나 간음이나 심지어 신성모독을 함부로 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둑질이나 간음이나 신성모독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를 근거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자아숭배’라는 죄 속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다 도둑놈이고 간음한 자들이며 신성모독 자들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도 도둑질이라고 하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음란한 생각만 해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 합니다. 신성모독?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모든 삶이 다 신성모독입니다. 죽는 날까지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자신의 실체를 올바로 자각한 이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우월함을 근거로 남의 선생과 훈도와 본보기가 될 수 있다고 나설 수가 있겠느냐는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도 선생 되려 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를 한 것입니다.
(약3:1)
1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이것은 선생 된 사람이 말만 번드르르하게 잘하고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는 그런 말이 아니라, 스스로 선생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직접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마23:8~15)
8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10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11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4(없음)
15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보세요. 유대주의에 빠져서 ‘난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선생 자격도 있고 인격이나 인품도 남들보다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는 이가 열심히 전도해서 다른 이들을 가르치게 되면 당사자도 지옥엘 가고 가르침을 입은 사람도 지옥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선생이라 칭함 받기를 좋아하는 유대인들이 열심이 없었습니까?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며 전도했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천국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노력하여, 인간이 쟁취한, 인간이 주인인, 천국을 전파했단 말입니다. 인간의 노력과 열심이 천국백성 되기의 근거가 되면 인간은 반드시 그 천국을 자기 방식대로 추측을 해 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의해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입은 이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천국을 아무런 불평 없이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자신이 기여한 것이 전혀 없으니까요. 그런데 인간 스스로가 판단하기에 자기가 자신의 천국 백성 되기에 조금이라도 기여를 했다는 생각이 들면 꼭 인간의 수준에서의 천국을 그리고 요구하게 된단 말입니다.
(창13:9-10)
9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 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 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면서 거기를 뭐라 불러요? 여호와의 동산이라 불러요. 그런데 거기는 애굽이래요.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애굽에 다녀온 적이 있어요. 그는 그 엄청남과 화려함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를 보니 애굽 땅과 같이 멋지고 아름다웠습니다. 이 창세기를 모세가 쓰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모세가 왕자로 지내면서 바라 본 애굽도 그러했어요. 그러나 그 땅은 사람들이 보기에 힘의 땅이요, 물질의 땅이었지만, 세상의 땅이요, 마귀의 땅이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가 멸망당할 소돔과 고모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역사의 중심으로 놓고 싶어 하는 자들은 그러한 인간들 눈높이 수준의 땅을 여호와의 땅, 천국으로 기대하더라는 것입니다. 롯이 지금 그러고 있잖아요? 그들은 그 땅이 불 탈 때 함께 불탈 수밖에 없어요. 그들이 선생이 되고 싶어 하는 유대주의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선생의 자격을 부여하고 싶어 하는 자칭 유대인들을 전부 ‘율법을 범한 자’로 낙인을 찍어 버립니다.
(롬2:25)
25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 할례가
되었느니라
어떻게 사도가 모든 유대인들을 다 이렇게 율법을 범한 자로 매도해 버릴 수가 있지요? 그게 이 역사를 통과해야 하는 모든 인간들의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는 여러분과 저도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잘 지켜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율법을 범했고 범하고 있고 앞으로도 범할 수밖에 없음에도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 그러한 은혜의 구원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 인간들의 기특해 보이는 열심들을 전부 낱낱이 까발려 버리는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의에 의한 구원의 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의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라고까지 일갈을 합니다.
그리고는 할례를 예로 들어 진짜 율법의 의미를 친절하게 설명을 해 줍니다.
(롬2:28~29)
28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여기에서 표면적 유대인이라는 말은 자칭 유대인, 그러니까 율법이나 제사나 선행 등의 행위로 자신들을 치장하여 외모 상으로는 전혀 나무랄 데 없는 그러한 인본주의자, 율법주의자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표면적 유대인은 진짜 유대인, 다른 말로 하나님의 진짜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표면적으로 지켜 낸 율법은 진짜 율법의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셨던 진짜 율법의 행위는 ‘주님 저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제게 주님의 긍휼이 필요 합니다’라는 자기부인의 고백이었고 그러한 자기부인에서 나오는 사랑의 방향 바꾸기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셨던 율법의 행위잖아요? 사도는 그걸 28절 말미에서 ‘표면적 육신의 할례, 즉 표면적 율법지킴은 할례가 아니다, 율법을 지킨 게 아니다’라고 확고하게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왜 율법의 상징으로, 율법의 표상으로 할례를 들고 있느냐 하면, 율법이라는 것은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할례라는 의식 속에 진짜 율법지킴이 무엇인지가 잘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갈5:3-4)
3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 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보시다시피 할례는 율법이고 율법이 할례입니다. 바울은 할례와 율법을 자주 혼용해서 씁니다. 그런데 바울이 율법, 즉 할례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하지요? 그래서 바울이 율법을 대표하는 할례를 예로 들어서 율법지킴으로 자신의 가치와 영광을 챙기려 하는 유대인들, 아니 우리 안의 유대주의와 인본주의를 폭격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난지 8일 된 남자 아기의 고추 끝을 자르는 할례 의식이 자기들의 선민 됨을 확고히 확증해 주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이외의 다른 타 민족들을 한 마디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할례는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의 성취에 관한 모형이었던 것이지 그 자체가 무슨 효력을 갖고 있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방인들이 할례를 행하지 않았던 것도 아닙니다. 할례는 고대 근동에서 편만하게 행해지던 보편적 관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나 다 아는 그러한 보편적 관습을 실습 도구로 채택을 하신 것뿐이지 그것이 유대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뿐이지요. 그 할례가 가장 먼저 등장한 곳이 어디입니까? 창세기 17장입니다.
(창17:10-11)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하나님께서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시지요? 그 언약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다른 말로 ‘생육하고 번성하게’하시겠다고 하시면서 하나님 자신이 언약의 주체로서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십니다. 그 그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그 언약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그림인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6장에서 아브라함이 하갈과의 사이에서 인간의 힘으로 이스마엘을 낳아 버립니다.
하나님은 엘리에셀도 아니라고 하시면서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될 것이고 그 후사로 말미암아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하셨는데, 아브라함이 그 언약서의 인주도 마르기 전에 금방 또 자신의 힘으로 아이를 낳아 버린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의 실수로 흠이 났습니다. 율법주의가 하나님의 은혜를 공격하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창세기 15장에서 당신의 쪼개짐을 언약의 전제로 하셨기 때문에 당신이 쪼개지셔야 그 언약이 성취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무력함과 패역함으로 하나님이 해를 입으셔야 하는 십자가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17장에서 할례라는 것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의 ‘제물을 쪼개다’라는 어구는 히브리어 ‘바타르’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역시 ‘쪼개다’라는 단어 ‘바라’를 어근으로 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바라’라는 단어를 어근으로 갖는 또 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그게 ‘베리트’ ‘언약’이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언약은 모두 그렇게 쪼개짐을 전제한 것이기 때문에 ‘언약’이라는 단어가 ‘쪼개다’라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어근의 단어가 또 하나가 더 있는데 그 단어가 ‘복, 바라크’입니다. 그리고 그 ‘칼로 자르다, 칼로 쪼개다’라는 단어 ‘바타르’의 동의어는 히브리어 ‘물’이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가 바로 ‘할례’입니다. 그것들을 하나로 연결을 해보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당신의 쪼개지심(바타르), 즉 십자가 은혜로 당신 백성들의 생육과 번성(교회)을 이루시기로 창세전에 언약(베리트)을 하셨습니다.(히9)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죽은 흙에 불과한 피조물의 열심과 노력으로는 절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죽은 흙에 하나님의 피가 부어져서 반죽이 되어야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걸 은혜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십자가 위에서 쪼개지셨고(바타르)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바라크)이 부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전체 복음의 이야기를 몸에 흔적으로 새기는 것이 바로 할례였던 것입니다. ‘나의 출생을 위해 하나님이 피를 흘리고 쪼개지셨다’를 마음에 새기는 것이 할례의 참 의미인 것입니다. 그 단어는 신약에서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막9:43,45)
43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5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 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기에서 ‘찍어 버리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아포콥토’가 ‘자르다, 베어버리다’라는 뜻의 제사 용어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절의 손 할례당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 헬라어 ‘카타토메’와 혼용되어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할례, 베어내기는 누구에게 행해져야 했던 것입니까? 너희의 손발을 찍어 버리라고 하잖아요? 죄인인 우리의 손발이 잘리고 찍혀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할례가, 그 쪼개짐이, 그 베어냄이 예수에게 행해졌다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의 손발이 우리의 눈이 쉬지 않고 범죄를 하니까요. 그게 죄와 허물로 죽은 아담들의 실체거든요.
그러니까 할례는 율법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의 행사를 이해하고 바라보고 붙들라는 의미로 주셨던 것이지 할례를 행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공로나 업적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서, 할례를 받아서, 자신들의 가치 향상과 자아 확장에, 자기 발전에 사용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과 할례가, 다른 말로 인간들이 구축하는 인간들의 외모가, 하나님 나라 백성 되기에 전혀 무관한 것임을 반복하여 강조를 합니다.
(롬3:30)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롬4:13)
13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 이니라
할례나 율법지킴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도구요 방법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길은 오직 믿음이라는 길 뿐인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지킴이나 할례 행함은, 인간들의 행위는, 인간들의 자기 자랑, 자아실현, 자아확장의 더러운 욕망의 표출이더라는 것입니다.
(갈6:11~15)
11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 이라
13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 이니라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 하니라
15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 이니라
이렇게 유대주의 자들의 할례 행함이나 율법지킴은 오히려 육체의 모양을 내거나 육체를 자랑하기 위한 위장에 불과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할례를 마음에 받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10:16~17)
16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17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렘 9:26)
26 대저 열방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보세요. 구약에서조차 할례는 마음에 받는 것이라고 하지요?
(렘4:4)
4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 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고 하시면서 너희 마음 가죽을 베라고 하십니다. 마음 가죽을 베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골2:11)
11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마음 가죽을 베어 버리는 마음의 할례는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입니다. 물론 그 마음 가죽은 우리의 실력으로 노력으로 베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 가죽이 베어져서 새 마음을 갖게 된 이들은 육적 몸이 벗어지게 되는, 다른 말로 육적 자아가 죽게 되는 과정을 통과하게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절대로 자기 자랑이나 자기 성취, 자아실현으로 안 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빌3:2-3)
2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3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어떠세요? 진짜 할례당이 누구에요? 예수만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자가 진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할례라는 것이 인간의 생식기가 잘라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의식이거든요. 그렇게 인간의 자연적 생식 능력이 사라진 상태에서 후손이 생긴다면 그건 누구의 작품이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만들어 낸 작품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제일 먼저 할례 받은 자로 서는 것입니다. 마른 장작이었잖아요? 그게 할례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약속의 자손이 되는 것입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진 후손이니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이삭도 할례를 받자마자 모리아 산에 가서 쪼개짐 당하는 제물이 되지요? 그로 말미암아 누가 살아나요? 죽어야 할 아브라함이 살아난단 말입니다. 모리아 산은 시온산입니다. 시온산에 예루살렘 있고 예루살렘에 골고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골고다로 자신이 달려 죽을 나무를 메고 올라가신 분이 또 있었지요? 그리고는 그 나무에서 쪼개지셨잖아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골고다에서 쪼개지신 예수의 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육적 몸을 부인하게 되는 성도의 삶 속에서 그러한 모양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교나 유교나 노자나 장자, 심지어 힌두교까지도 모두 보다 나은 인간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렇게 육체에 대한 신뢰를 차압당하고 육적 자아를 부인당하는 것을 목적지로 하여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존재임을 증명하고 자랑하려는 시도가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단 말입니다. 그건 폐기된 구약입니다.
(신30:1-6)
1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 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2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3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4너의 쫓겨 간 자들이 하늘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5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열조가 얻은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너로 다시 그것을 얻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로 네 열조보다 더 번성케 하실 것이며
6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여기에는 마음의 할례에 조건이 붙어 있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열심히 순종하지 않으면 마음의 할례를 베풀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약이 새 언약에서 어떻게 바뀌지요?
(겔36:25-27)
25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 할지라
여기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단어가 ‘베어내다, 잘라내다’라는 의미입니다. 좀 전 신명기에서는 ‘율법을 잘 지켜야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생명을 얻게 하겠다’고 하셨는데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시는 조건이 뭡니까? 없습니다. 여기에 연결되는 에피소드가 마른 뼈가 살아나는 에피소드지요? 그런데 그 마른 뼈들이 어떻게 살아나요? 생기, 성령이 그것들을 덮으니까 살아납니다. 마른 뼈들을 무덤에서 빼내어 먼저 살려 놓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가르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인 것입니다.
(겔37:11~14)
11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12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14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보세요.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제일 먼저 일어나야 하는 자각이 뭡니까? ‘우리의 뼈들은 말랐고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불가항력적 은혜로 생기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여전히 죽어 있는데 생기가 들어가서 무덤이 열리고 그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신다고요? 14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알게 하시는 것이 이 역사와 인생의 목적이란 말입니다. 멋지게 자신을 성숙시키고 계발하여서 무덤 문을 여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자였다고 해요. 그렇지요?(엡2:1) 그런데 그 죽음의 죄와 허물이 어떻게 사라져요?
(사53:5)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예수가 십자가에서 할례를 받아 사망의 죄와 허물이 사라지고 거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의 복음을 깨닫고 어깨 춤 덩실 추며 ‘예수님 찬양, 하나님 찬송’하고 가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당연히 그러한 깨달음에서 성령께서 맺으시는 겸손과 사랑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고요. 그게 자기부인이란 말입니다.
롯을 보세요. 롯은 이 세상 아담 군상들의 대표적 특징을 다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는 이 세상의 힘과 화려함과 강함을 원했어요. 쾌락을 원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딸들하고 근친상간을 하여 이스라엘의 대적인 모압과 암몬을 낳아 버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후서에 가면 하나님이 그 롯을 의인이라고 해요. 어떻게 그런 롯이 의인이 된 것이지요?
(창19:29)
29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아브라함이라는 중보자가 롯을 의인으로 만들어 살려 낸 것입니다. 의인 아브라함이 롯을 위해 기도하지요? 그게 누구의 모형이었나요?
(사53:12)
12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기도하시고 예수님이 죄를 짊어지셔서 우리가 의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 육의 존재성과 주체성과 자율성은 그렇게 폭격을 당하여 부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서에서도 그렇게 살아난 마른 뼈의 이야기 바로 다음에 곡과 마곡의 전쟁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36장에서 조건 없는 마음의 할례, 새 언약이 주어지고, 37장에서 그 새 언약의 현실이 마른 뼈와 생기와 인자라는 그림으로 충분하게 설명이 된 후에 38장부터 곡과 마곡의 전쟁이 나옵니다. 그건 새 언약 하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역사 속에서 겪게 될 영적 전쟁의 양상과 형태에 관한 것입니다.
(겔38:1~2)
1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인자야 너는 마곡 땅에 있는 곡 곧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에게로 얼굴을 향하고 그를 쳐서 예언하여
곡과 마곡의 전쟁이 에스겔서 38장부터 펼쳐지지요? 그런데 이 곡과 마곡의 전쟁은 요한계시록에서 아마겟돈 전쟁으로(16장),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의 전쟁으로(19장), 곡과 마곡의 전쟁으로(20장) 반복되어 그려지고 있는 전쟁입니다. 그 요한계시록의 전쟁이야기는 전부 에스겔서 38장 이하에 그려지고 있는 곡과 마곡의 전쟁을 인용해서 묘사를 하고 있는 전쟁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을 누가 주도하는지 보세요.
(겔38:15~16)
15네가 네 고토 극한 북방에서 많은 백성 곧 다 말을 탄 큰 떼와 능한 군대와 함께 오되
16구름이 땅에 덮임 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 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로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곡을 불러 오십니다. 그리고는 당신 백성들을 치라고 하세요. 이 모습이 우리가 지난 수요일에 공부를 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핍박에 성도가 어떻게 되지요? 핍박받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습니다. 한 마디로 곡에게 진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 전쟁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면 어떻게 된다고 했어요? ‘또 다른 법이 나의 속사람을 이기는 형국’으로 나타난다고 했지요? 그래서 거기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도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 좀 건져 줘요’라는 부르짖음이 터지게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게 심령의 가난이며, 애통이며, 긍휼을 구하는 것이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그들이 십자가를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곡이 어디서 와요? 북방에서 온다고 하지요? 그 북방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짜폰’인데 그 단어가 성경에 별로 안 나오는 단어에요. 그 단어가 쓰인 곳을 두 곳만 찾아 드리지요.
(사14:12~13)
12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13절에 ‘북극 집회’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짜폰’입니다. 거기가 어디입니까? 마귀, 뱀, 아담이 노렸던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시48:1~2)
1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2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
2절의 시온산이 있는 ‘북방’이 ‘짜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러 오는 곡이 어디서 와요?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나서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고앉은 유대주의, 인본주의의 산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들이 차고앉은 하나님의 자리에서 끌려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곡이 하나님의 백성을 이겨버려요. 자기부인입니다.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처럼 되고싶다’는 욕망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곡’의 공격으로 알게 됩니다. 거기서 애통이 터져 나오는 겁니다.
그 곡의 전쟁과 똑같은 전쟁이 다른 그림으로 묘사된 것이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했지요? 그 아마겟돈은 므깃도의 산이라는 히브리어 ‘할마게돌’의 헬라어 음역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 므깃도라는 단어 자체가 ‘군대를 소집하다’라는 의미의 단어라 했습니다. 그 므깃도의 산에서 누가 죽어요? 요시아 왕이 애굽에게 맞아 죽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라 했지요? 거기에서 이스라엘, 즉 교회가 죽는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성과 주체성과 자율성이 죽어 버리는 곳이 아마겟돈인 것이고 므깃도의 산인 것입니다.
보세요. 새 언약에 의한 구원이란, 우리가 우리 힘으로 이겨내고 발전시키고 성취해 내는 것이 아니라, ‘짜폰’,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모르는 우리의 정체가 곡에 의해 폭로가 되고, 거기에서 우리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이 밝히 드러나게 되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하게 되는 자기 부인, 육체의 불신, 육체의 죽음의 자리로 내려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그러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선생의 자리에 앉으며, 누가 감히 훈도의 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혹 하나님께서 그러한 역할을 맡기신다면,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 하며 겸손하게 그 역할을 잘 수행해 내시면 됩니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할례로 구원을 얻은 면목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 한없는 은혜 앞에서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해지며 더 많이 죽읍시다.
예수님께서 천국은 아이들의 것이라 했습니다. 그들과 같지 않으면 절대 못 들어간다고 하셨어요. 아기들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은 부모가 도와 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도 어눌하고 걸음걸이도 불안하고, 물가에 내 놓으면 항상 빠질 것 같고, 그래서 늘 부모는 그 뒤를 좋아 다니지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예뻐요. 아기가 세계 경제 동향에 대해서 토론하자고 덤비고, 오바마의 정치성향을 들먹이며, 이슬람 수니파의 계보 같은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골치 아파요.
‘하나님은 나는 너의 아비가 되고 너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를 언약의 기둥으로 세우셨어요. 그런데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고 선생이나 되려하고 훈도나 되려하면 아비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아기들에게 배우세요. 그 의존성을 배우세요. 그래야 우리 아버지가 기저귀 갈아주시며 행복해 하시고, 은혜와 긍휼의 젖 물려주시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김성수 목사 > 로마서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36) 말씀을 맡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캔버스 (0) | 2013.10.07 |
---|---|
로마서(35) 말씀을 맡은 자들에게 부어진 저주 (0) | 2013.10.07 |
로마서(33) 율법으로 범죄 하는 나, 양심으로 범죄 하는 나 (0) | 2013.10.07 |
로마서(32) 지붕을 세우고 당을 짓는 자들, 지붕을 벗기고 흩으시는 하나님(III) (롬2:6-11) (0) | 2013.10.07 |
로마서(31) 지붕을 세우고 당을 짓는 자들, 지붕을 벗기고 흩으시는 하나님(II) (롬2:6-11) (0) | 2013.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