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31) 지붕을 세우고 당을 짓는 자들, 지붕을 벗기고 흩으시는 하나님(II) (롬2:6-11)

은바리라이프 2013. 10. 7. 11:56

로마서(31)

지붕을 세우고 당을 짓는 자들, 지붕을 벗기고 흩으시는 하나님(II)

(롬2:6-11)

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 하심이니라

우리는 지난주에 이 세상 아담 군상들의 당 짓기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그건 단순히 파벌을 나누어서 서로 대립을 하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척점에서 인간들이 자신들을 세력화하는, 인간들의 자율성 발휘가 바로 당을 짓는 것이라 했지요?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힘과 지혜와 열심과 노력을 지붕으로 하는 인간 측에서의 바벨성을 쌓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것을 부수어 내시고 당신의 은혜를 지붕으로 한 거룩한 성을 건설하시는 것이 이 역사인 것이라 했습니다.

원래 존재라는 것은 없음에서 생겨난 것이며 그 없음을 있음으로 창조해 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고 찬송하는 것을 그 역할로 부여 받은 것입니다. 모든 존재의, 존재의 이유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없음에서 시작된 존재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과 영광을 인정하고 찬송하는 대신 자신의 주체성과 존재성을 스스로 챙겨보려고 하는 시도와 추구가 바로 타락인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의 자율성 발휘는 일견 기특해 보이기도 하고 대견해 보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절대 인정치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모든 죄의 기본적 뿌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피조물의 자율성인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들의 자율성이 하나님 앞에서의 패역한 죄인 고로 하나님은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그들이 내 안에’라는 십자가의 메커니즘으로 하늘의 하나 됨을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는 양수겹장의 형국으로 자신의 독립적 존재 영역을 삭제 당하고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며 하늘의 하나 됨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십자가의 메커니즘으로 성도를 당신과 연합을 시키시는 이유는 뭐라 했습니까? 아버지가 아들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교회를 사랑하셨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요17:23)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기인한 것이지 그들의 자격이나 됨됨이를 조건으로 탄생되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메커니즘으로만 성도를 창조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을 머리로 한, 한 몸으로서의 교회입니다. 그걸 제가 다른 말로 하나님의 당 짓기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의 당 짓기는 이 역사 속에서의 인간들의 당 짓기를 흩어버리시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도 자기들의 자율성을 챙기기 위해 하나가 되었던 마귀와 여자를 원수라는 관계로 흩어버리시며 에덴에서 쫓아내신 것이고, 가인과 아벨을 흩으시고, 용사, 유명한자, 거인 됨을 지향하며 하나가 되려했던 노아 시대의 아담들을 홍수로 흩어 버리십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하나 됨의 추구와 하나님의 흩으심은 아주 집요하게 대립을 하며 역사를 관통합니다. 인간들은 바벨탑의 현장에서 아예 노골적으로 우리가 힘을 모아 흩어짐을 면하자고 불륜의 연합을 꾀합니다. 그러한 인간 측에서의 당 짓기가 바벨탑 건설인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은혜 앞에서 그 분을 인정치 않는 행위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바벨탑과 바벨성, 즉 인간세상의 대표적 예표요 총화라 할 수 있는 바벨론을 흩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하나님 백성의 모형으로 선택이 된 이스라엘이 앗수르로 바벨론으로 애굽으로 계속 흩어지는 역사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인간들의 세력화 작업은 내 안에서 가장 먼저 왕성하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자율성을 그 누구에게라도 어거당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그렇게 자신의 자율성을 발휘하여 나라는 존재를 하나님의 대척점에 세웁니다. 하나님은 그걸 부수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는 하나님 심판의 완료 적 선언임과 동시에 구원에 있어서의 완료 적 선언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밖의 바벨론은 그렇게 무너짐으로 사망으로 던져지게 되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 안의 바벨론을 격파 당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절대 의존의 존재로 오롯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하늘 백성들의 역사 속 흩어짐은 성령이 오심으로 완료가 됩니다. 성령이 오시고 언어가 갈리는데 바벨탑 건설의 현장에서처럼 그들이 사분오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이라는 지붕 아래에서 하나로 연합이 됩니다. 하나님의 흩으심이 하나님에 의해 시행이 되니까 인간들이 비로소 그 아래에서 하나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들의 당 짓기의 표본인 바벨 성 건설과 대조되는, 교회라는 거룩한 성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벨론은 인간들의 자율성 발휘에서 비롯된 모래 위에 지은 집을 모형 하는 것이고 새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만을 기초로 하여 지어진 은혜의 집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자를 옛 성전이 모형하고 있는 것이고 후자를 새 성전, 즉 예수와 그 안에서 성전으로 지어지게 되는 교회가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의 힘과 능력과 지혜의 상징인 율법의 옛 성전을 부수시고 새 성전이신 당신 자신을 은혜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요2:19~21)

19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21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보시는 것처럼 인간들의 당 짓기와 하나님의 당 짓기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자기들이 주체가 된 성전을 건축해 왔습니다. 스스로 인간의 힘과 지혜를 규합하여 하나가 되어서 하늘에 이르는 길을 내어 하늘을 쟁취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벨성 건축의 현장에서 그림으로 설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의 율법과 성전제사에서 다른 그림으로 나타납니다. 원래 율법과 제사는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켜낼 수 없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지어진 인간들이 자신들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물로 드려지는 십자가의 제사를 의지하여 하나님과 함께 동거하게 되는, 하늘의 집으로 지어질 수 있음을 계시로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율법과 제사를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 낼 수 있다고 또 다시 당을 지었던 것입니다. 그게 옛 성전입니다. 그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거 부수라. 그러면 내가 다시는 부수어지지 않을 새 성전으로 사흘 만에 지어주마.’ 그게 무슨 의미죠? 하늘의 당 짓기, 하늘의 집짓기는 예수에 의해 시작되고 예수에 의해서만 완료가 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구약의 옛 성전이 인간들의 힘과 노력과 열심을 바탕으로 하늘의 지성소에 이르려 했던 패역한 당 짓기였는데 거기에 새 성전이신 예수가 제시되고 있는 것은, 인간이 하늘의 지성소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확실하게 설명을 해 줍니다.

(엡2:20~22)

20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인간들이 에덴동산에서부터 자신들의 힘과 노력을 동원하여 건설하려 했던 성전은 역사 속에서 부수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지어지는 새로운 성전이 ‘예수 안에서’ 서로 연결이 되어 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하늘의 성전 건축이며 하늘의 당 짓기인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처소, 즉 성전으로 하나가 되어 지어지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진단 말입니다.(성전과 성도가 하나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 하나님 나라와 성도를 동일시) 그건 옛 성전이라는 인간 측에서의 모든 가능성이 삭제되고 부정이 되는 그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인간들의 성 쌓기와 성전 짓기는 자기 존재의 주체성과 존재성을 스스로 챙겨 보겠다는 인간들의 자율성의 발휘인 것이고 하나님은 그러한 모든 시도들을 부수시며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 성전 안에서 은혜와 긍휼로 지어지는, 성도라는 거룩한 성을 지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하늘의 거룩한 성을 어린양의 신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계21:1~4)

1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없음에 불과한 인간이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서 자신의 존재됨을 갖추고 완성하겠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애통이요, 아픔이요, 사망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처음 하늘과 처음 땅, 그리고 옛 예루살렘인 육신을 부수어 버리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인 새 예루살렘으로 창조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곳에 전쟁이나, 시기나, 다툼이나, 질시가 없어질 수 있으니까요. 그러한 새 창조의 실현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 눈물 닦아주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새 창조가 어떠한 형국으로 실현이 되는가 하면 하나님이 직접 지붕이 되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3절에 장막이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그리고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에서 ‘거하다’가 ‘스케노오, 장막을 치다’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장막이 되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그냥 덮어 버리는 방식으로 하늘나라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나라는 성도 안에 건설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자신을 성전이라고 하고 우리 모두를 아우르는 교회도 성전이라고 하잖아요?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역사를 통과하면서 자신의 존재성과 주체성을 부정당하고 삭제 당하며 가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옛 에덴이 잠기고 새 에덴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그걸 계시해 내는 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살아내야 하는 이 역사 속에서 성도 안의 처음 것들은 다 지나가야 합니다. 4절의 ‘지나가다’라고 번역이 된 ‘아펠코마이’가 ‘pass away’입니다. 죽는 것입니다. 처음 것들이 죽어나가는 자리, 그것이 성도의 인생입니다. 처음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은혜의 장막에로의 하나 됨, 은혜의 성전건축은 7장에서도 똑같이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계7:13~17)

13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14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17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 이러라

14만 4천의 하늘 백성들이 하늘의 장막에 덮여 하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역시 눈물이 다 씻겨 집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보겠다고 하는 인생들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벗겨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새 창조의 이야기가 이 역사의 이야기이며 성경 전체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측에서의 덮으심에서 기인하게 되는 하늘의 성전 짓기는 창세기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무엇으로 덮으시지요? 하나님의 신으로 덮으십니다. 그게 ‘운행하다, 라하프’라는 단어에서 나타납니다. 암탉이 계란을 품듯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라는 것을 제시한 후에 첫째 날부터 창조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건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새 창조의 모형이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창조는 그렇게 하나님의 신에 의해 덮여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절대 스스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을 좀 더 선명하게 인간의 창조 장면에서 설명을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 생기(르와흐, 성령)를 불어 넣으십니다.(창2:7) 그랬더니 그 사람이 비로소 ‘산 자, 생령’이 됩니다. 하늘 백성, 즉 산 자는 성령의 덮으심으로 비로소 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신들의 자율성을 주장하며 존재성과 주체성을 스스로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자신들의 처음자리를 잊은 패역이었습니다. 그걸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죽은 흙의 자리, 사망의 자리에 다시 덮으심으로 찾아가십니다. 죄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마련된 은혜의 옷이 그 사망의 자리를 덮자, 거기에서 ‘산자의 어미’라는 생명이 발생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계속해서 인간들 사이의 마귀적 연합을 부수시고 은혜의 성령으로 덮으셔서 묶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덮으심의 당 짓기는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노아의 이야기가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로 시작이 되지요? 노아 이야기의 마지막도 역시 은혜입니다. 노아가 기식하는 모든 것들의 죽음에서 건져진 것이 노아의 자격이나 됨됨이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덮으심의 은혜에서 기인한 것임을 셈의 아버지 하체 덮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을 시켜주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요, 성전이요, 성도요, 하나님의 처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방주가 삼층으로 지어졌던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었습니다. 사자와 호랑이, 어린양과 어린 염소가 한 곳에서 어우러져 살았습니다. 그건 에덴동산에서도 모형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도 삼중 구조로 그려졌던 것입니다. 동산 중앙과 동산, 그리고 동산 밖으로 나누어져 있었지요? 바울이 다녀온 삼층 천이 바로 그 삼중 구조 속에서의 하나님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은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예수님이 가운데에서 기도를 하시고 그 예수님 곁으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위치합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다른 제자들이 섬으로 해서 하나님 나라의 삼중구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나라이며 하나님에 의해 건설이 되는 나라라는 것을 십자가 지시기 바로 전에 그림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의해 산 자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들이 연합이라는 형국으로 함께 거하는 성전 짓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 즉 성령이 배제된 인간들의 성전 짓기가 바벨탑 건설 현장에서 또 다시 폭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 그들을 흩으십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으로 가면 창세기 11장에서와 똑같은 흩으심의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불의 혀 같은 성령의 덮으심이 가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늘의 새 성전인 교회가 탄생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보시면 그러한 인간들의 성전 짓기와 하나님의 성전 짓기가 계속해서 대조되어 대립하는 것이 성경 전편에서 아주 자세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성령을 통하여 성전을 짓겠다고 하시는데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성전을 지어보겠다고, 나의 나됨을 챙겨보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건 다른 종교에서도 너무 극명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가 전부 인간들의 힘과 지혜와 가능성에서 출발을 합니다. 그러한 것들을 열심히 계발하고 발전시키고 성숙을 시켜서 해탈도 하고 극락도 가고 열반에도 이르고 상도 받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서로 독려해 주며 다독여 주고 도와주면서 인간들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증명해 보자는 것입니다. 심지어 불교나 힌두교 등의 범신론자들은 인간들이 바로 신이라고까지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들의 당 짓기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그러한 하늘의 성전 짓기가 오직 하나님의 덮으심, 성령의 덮으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집요하게 강조하셨습니다.

(출31:1~7)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3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4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5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겨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하고

6내가 또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무릇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로 내가 네게 명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

7곧 회막과 증거 궤와 그 위의 속죄소와 회막의 모든 기구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짓게 하시는데 그 성막을 짓는 자에게 하나님의 신이 부어집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신이 지혜가 되어 성막이 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8장에도 성막의 제사장의 옷을 짓는 이들에게 성령이 덮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출28:1-3)

1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 곧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2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3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이렇게 성막, 즉 성전이 지어지는 데에 필연적으로 가입이 되어야 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그 구약의 성전도 지성소와 성소 그리고 뜰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역시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예수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님과 연합이 되는 성도를 일컫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성도를 ‘거룩한 나라’라고 부른 것입니다. 따라서 성전이 지어지는 데에 성령이 가입을 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성령의 덮으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에덴동산도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던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었지요? 그래서 삼중구조로 그려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안에서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에덴의 다른 그림이 방주였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짐승들이 종류별로 함께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막과 성전은 어때요? 역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제사라는 매개로 함께 거하는 작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도 성령에 의해 지어지는 것이고, 에덴동산도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심으로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의 건축은 태초의 에덴이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되는 거지요? 물론 하늘의 새 성전인 교회의 탄생을 모형 하는 것이긴 하지만요.

(사51:3-4)

3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4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발할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보시다시피 하나님은 에덴을 여호와의 동산, 즉 여호와의 거하시는 처소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첫 번째 에덴을 잠가 버리시고 은혜의 에덴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이 새 창조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잠긴 에덴이 옛 성전으로, 또 이스라엘로 계속 반복되어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계속 삭제의 길로 가고 새로운 성전과 새로운 이스라엘, 새 예루살렘이 은혜로 제시가 되는 것입니다.

(시132:13~14)

13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14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 하였음이로다

여기에서 시온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시온이 하나님의 안식처로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게 에덴이었잖아요? 그래서 일곱째 날이 안식의 날로 선포가 된 것이고요. 그런데 우리가 조금 전에 찾아서 읽었던 것처럼 사도 바울은 그러한 하나님의 처소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합니다. 다시 보세요.

(엡2:21~22)

21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러니까 지금 에덴동산이나 성전 건축이나 모두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됩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이 마음 놓고 거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되어 가는가를 그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방법이 뭐라고요? 성령의 덮으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렘31:23)

23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그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때에 그들이 유다 땅과 그 성읍들에서 다시 이 말을 쓰리니 곧 의로운

처소여, 거룩한 산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할 것이며

이 역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당신이 거하실 수 있는 처소로 만들어내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천국을 기다리는 분들이 아닌 것입니다. 천국, 하나님 나라는 우주 저 편에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그 천국을 향하여 한 발 한 발 억지로 오늘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천국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수시고 우리에게 꽂아 버리시는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천국에서 행복하겠다는 생각부터 버리셔야 합니다. 그게 인간 중심의 천국입니다. 잘 이해하세요. 거기는 분명 행복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을 상상하며, 그곳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고 내가 원하는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그런 나라일거라는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들의 성전 짓기인 것입니다.

천국은 ‘나는 죽은 자입니다’라는 고백이 있는 곳을 말합니다. 그래야 짐이 벗어져요. 그래서 거기에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고, 아픔도 없다고 하는 것이지, 이 살기 싫은 인생 꾹 참다 보면 곧 좋은 세상이 오겠지, 라는 생각 속의 그런 유의 천국은 없다는 말입니다.

(사66:1~4)

1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3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4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보세요. 하나님의 처소, 즉 교회는 인간들의 그 어떤 기특한 행위로도 지어질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전을 짓겠다고 내어 놓는 그러한 인간들의 종교 행위나 선행을 오히려 가증한 것이며 악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에 의해 하나님에 의해 건설이 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연합이 되는 상태의 나라인 것입니다.

(겔37:26~27)

26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27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겔43:7)

7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할 곳이라

이렇게 교회라는 하나님의 처소가 에덴에서, 방주에서, 성막에서, 성전에서, 그리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계속해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의 처소는 하나님의 은혜의 장막, 성령으로만 완성이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성전을 이스라엘 안에 완성하는 이가 누구입니까? 솔로몬이죠?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사무엘하7장의 다윗 언약을 근거로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을 지혜의 왕이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성전을 다 짓고 나서 ‘어찌 하나님께서 인간이 지은 집에 거하시겠습니까?’하고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금 전에 출애굽기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성전은 성령의 덮으심으로 건설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성전 건축 명령이 하달되는 장면에서 하나님께서 그 성령을 무슨 성령이라 부르셨지요? 지혜의 성령이라고 부르셨지요? 그래서 다윗 언약 하에서 성전을 짓게 될 솔로몬에게 다른 것이 아닌 지혜가 부어졌던 것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려서 부어진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지혜를 원합니다’하고 말할만큼 이미 지혜가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굳이 지혜가 부어지는 그림이 성경에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출애굽기에서 등장했던 지혜의 성령에 의해 지어지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을 완성한 솔로몬의 지혜가 적힌 책이 무슨 책일까요? 잠언입니다. 그러면 잠언은 무슨 내용이 적힌 책이라는 말입니까? 지혜의 성령에 의해 지어지는 성전이야기, 십자가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이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지혜라는 말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잠1:1)

1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잠언이라는 책 안에는 아굴의 잠언도 있고 르무엘 왕의 어머니가 쓴 잠언도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솔로몬의 잠언이라는 제목을 답니다. 그리고 솔로몬도 그냥 솔로몬이 아니라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입니다. 그건 지금 솔로몬이 사무엘하7장의 다윗 언약에서 약속이 된 이스라엘의 왕 예수의 모형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하7:5~13)

5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6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7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8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9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10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11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12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보세요. 하나님의 처소는 인간들(그가 다윗이라 할지라도)의 힘과 지혜로는 절대 지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시면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겠다고 하시지요? 바로 그겁니다. 그 여호와가 육신을 입으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셔서 지혜의 성령을 받아 새 성전을 건축하시는 것이 십자가요, 구원사건인 것입니다. 따라서 잠언은 우리가 지켜내야 할 도덕이나 윤리를 기록해 놓은 책이 아니라 지혜의 성령에 의한 성전 건축 이야기, 십자가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에 나오는 지혜(성전을 건축하는 지혜의 성령)가 창조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잠8:12,22-30,35)

12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22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23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24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27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29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리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30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5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보세요. 지혜가 태초의 그 창조의 현장, 에덴의 창조 현장에 있었지요? 그 지혜는 누구?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 짓는 성령, 수면 위에 운행하는 하나님의 신입니다. 하나님의 처소인 에덴의 창조에 성령이 지혜로 개입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솔로몬의 성전 짓는 지혜에 관해 설명을 하고 있는 잠언이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처소 만들기라는 일관성 있는 주제로 기록이 되어 있음을 연계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잠9:1-6)

1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2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3그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

4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5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6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

보시면 지혜가 집, 즉 성전을 짓습니다. 그런데 일곱 기둥을 다듬는다고 하지요? 그건 요한계시록의 안식의 수, 완전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안식의 성전을 지혜가 완성을 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그 지혜가, 성령이 지혜 없는 자들에게 뭐라고 외쳐요? 내 식물을 먹고 내 포도주를 마시라고 합니다. 그 말은 성전이 지혜 없는 인간들의 손으로는 절대로 지어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혜이신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수의 보혈만이 성전을 짓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 없는 자는 누구입니까? 성령의 도움 없이도 자신이 자신의 자율성에 근거하여 성숙과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진노를 입을 인간들의 바벨탑 건축인 것입니다. 잘 보세요. 그 지혜가 성전을 짓는데, 다른 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전으로 지어 가는데 어떤 방향으로 지어져 가는지 보세요.

(잠9:10)

10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 이니라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고 거룩하신 자를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지혜가 하는 일이요, 지혜의 성전 건축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잠언에도 지혜의 성령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어지는 장면이 나와야지요?

(잠1:20~23)

20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21훤화하는 길머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가로되

22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23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보세요. 지혜가 ‘이 어리석은 자들아 정신 좀 차려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마’하고 말씀을 하십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구원의 이야기, 새 창조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렇게 잠언이라는 책은 전체가 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늘의 왕에 의해 창조되는 새 성전 짓기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잠언을 읽으시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 초점을 두고 보셔야지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얻겠다고 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윗 언약에 의거하여 하늘의 성전을 짓는 메시아 역할을 하던 솔로몬의 이름이 맨 앞에 나오는 책이 또 한권 있지요? 아가서입니다.

(아1:1)

1솔로몬의 아가라

솔로몬의 사랑 노래, 무엇에 관한 이야기겠습니까? 역시 솔로몬의 성전 짓기에 관한 내용입니다. 성전은 누구? 교회. 그러면 아가서에서의 교회는 누구이겠습니까? 술람미 여인입니다. 검둥이 노예에 불과한 술람미 여인이 어떻게 왕의 아내가 되는 지에 관해 잘 설명해 놓은 책이 아가서인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술람미가 왕의 처소가 되지요? 전적인 왕의 은혜로 검둥이 노예가 왕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왕이신 예수 안으로 들어가서 왕의 거처가 되는 교회의 탄생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니까 아가서는 지혜의 내용이 영화처럼 펼쳐져 있는 책인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아가입니다. 그 아가서 안에 요한복음이 들어 있다는 걸 아세요?

(아2:16)

16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아6:2-3)

2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3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아7:10~11)

10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11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보세요. 바로 이것이 신랑과 신부의 하나 됨의 이야기거든요. 신랑과 신부, 그리고 잠긴 동산의 이야기가 계속 반복됩니다. 이 내용은 창세기 2장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이 되는 하나님과 교회의 혼인 이야기에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성취가 됩니까? 십자가에서 성취가 됩니다. 다시 지난주에 우리가 그림으로 그려 보았던 요한복음 17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요17;21-23)

21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 이니이다

23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가서의 주제가 바로 이 이야기지요? 따라서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 이야기 정도가 아니라 솔로몬이 예표 하는 메시아에 의해 완성되는 하늘 신부, 하늘 성전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아1:5)

5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외양으로 따지면 예루살렘 여자들, 즉 율법주의에 입각한 바른 이들이 훨씬 구원받아 마땅한 자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검고 게달의 장막 같은 술람미가 솔로몬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것입니다. 그건 술람미가 다른 이들보다 훨씬 나은 자격과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가 아니라 신랑이 불가항력적 사랑으로 그녀만을 사랑해 주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게 신랑의 처소로 지어지는 하늘 성전의 지어짐인 것입니다. 신랑의 처소인 신부는 자격이 있어서 되어지는 자리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술람미를 누이라고도 부르다가 신부라고도 부르고 동산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누이는 하나의 생명의 근원에서 나온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솔로몬이 신부를 누이, 형제라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형제라 부르는 것과 동일한 이야기입니다. 그게 바로 신부이며, 그게 여호와의 처소, 성전, 하나님 나라인 동산인 것입니다.

(아4:12)

12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전도서는 어떻습니까? 전도서가 어떻게 시작이 되지요? 역시 다윗의 아들로 시작이 됩니다. 역시 다윗 언약의 성취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전1:1~3,12-13)

1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12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13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보세요. 스스로 성전을 짓겠다고 하는 이 세상 사람들의 모든 수고가 다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 언약 속의 참 성전이 지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뭐라는 겁니까? 지혜, 성령을 의지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욥기는 어떻습니까? 욥은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의인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 짓기에 대해 이해를 못하지요? 욥의 친구들이 욥의 행사를 지적하며 ‘네가 죄를 지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것이라’는 인과응보의 논리로 욥을 공격하자 욥도 똑같이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냐?’며 반박을 합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기백성 만들기의 근거를 인간 측에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인인 욥만이 그게 잘못된 지식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가 의인인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순전하려고 노력을 했고 걸핏하면 제사를 지내어 속죄를 하려 한 그런 것 때문에 그가 의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러한 것으로 자신의 의인됨을 챙기려 했던 욥을 부수십니다. 그래서 욥의 종교적 열심에 관한 이야기가 서론에서 장황하게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걸 잘했다라고 칭찬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이 의인으로 부른 자들에게서 무엇을 부수시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귀를 시켜서 의인인 욥의 일상을 다 때려 부수십니다. 자식들을 다 죽여 버리고 재산을 다 몰수해 버리십니다. 게다가 병까지 주어서 거덜을 내 버리십니다. 그때 욥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욥1:20~22)

20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21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

하니라

너무나 멋진 고백이지요? 그런데 조금 있다가 내가 뭘 그렇게 잘 못했냐고 따지고 듭니다. 이 고백이 어떤 고백이었다는 말입니까? 입술로만 드리던 고백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 고백을 깨시는 것입니다. 욥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물으시는 게 뭡니까? ‘너 지혜 있니?’입니다. 그리고 ‘너 능력 있어?’ 이 두 가지를 물으십니다. 욥이 할 말을 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욥이 욥기 서두에서 한 고백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니라 지혜이신 성령의 성전 만들기 작업에서 비롯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기 마지막이 이렇게 끝나는 것입니다.

(욥42:1~6)

1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2주께서는 무소불능 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 하나이다

뭐라는 거예요? ‘제가 올바로 깨닫지도 못하고, 헤아리지도 못하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의 무력함과 지혜 없음을 폭로시켜 주시니 이제 제가 하나님을 올바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회개합니다.’ 욥은 자기가 의인인 줄 알았습니다. 잘 살았거든요. 자기는 재물을 탐낸 적도 없었고 음욕을 품은 적도 없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를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사람은 그렇게 자기의 행위나 됨됨이를 근거로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님을 역사와 인생을 통과하며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서 최종적으로 나온 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의인들이 이 역사 속에서 필연적으로 내어 놓아야 할 고백인 것입니다.

시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은 전체가 예수의 인생과 사역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시편이 총 다섯 권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입니다. 모세 오경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다섯권이 전부 탄식으로 시작하여 영광과 찬송으로 끝이 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가서 전체가 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예수님의 성전 짓기, 즉 십자가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예수를 또렷하게 그려내고 있는 책들이 시가서 다섯 편이라고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 측에서의 성전 짓기를 부수시고 하나님의 성전 짓기로 역사를 완료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사도 바울이 이렇게 정리를 합니다.

(고후5:1~5)

1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땅에 있는 장막, 즉 우리의 육신을 주인으로 하여 우리의 육신의 힘을 바탕으로 하늘로 가는 길을 내려고 하는 모든 것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 예수님의 은혜의 장막을 덧입어(덮다) 하늘의 성전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완료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보증으로 성령이 우리에게 내려와 계신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성전 짓기인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왜 인간들의 당 짓기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패역한 일인지에 관해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