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28) 저주 받을 세상의 심판자들

은바리라이프 2013. 10. 7. 11:43

로마서(28) 저주 받을 세상의 심판자들

(롬2:1~5)

1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 함이니라

2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 하느뇨

5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로마서 1장 마지막 부분을 공부하면서 정작 여기에 기록된 죄의 세목들의 주인은 예수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에 동의를 했습니다. 왜 예수를 믿는 우리 안에서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모양의 더러움과 추악함이 쏟아져 나오는가? 그건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우리 성도를 이 역사 속에 넘겨주셨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 목적은 다름 아닌 올바른 자 인식과 올바른 하나님 인식인 것이라 했지요? 우리 인간의 처음자리 확인과 그 자리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능력을 살아있는 인격 안에서 이해하고 경험하고 돌아오라고 우리를 이 역사 속에 넘겨 버리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죽음의 땅, 무덤 속을 살면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체계를 뒤엎고 순리로 써야 할 것을 역리로 쓰며, 모든 불의의 행사를 끊임없이 쏟아 내면서도 자아제어 능력 상실로 말미암아 사망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의 실체를 자각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자로 완성이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성도의 선악의 인식과 판단은 세상의 그것과는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선악의 판단을 스스로 하며 살도록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선악 판단의 주체는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들 스스로 법과 윤리와 도덕 등을 만들어 놓고 그러한 것들을 기준으로 하여 선악을 판단하며 스스로 선악 판단의 주체자로 서 버린 것이 타락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로마서 1장 말미에서 그토록 부르짖던 불의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부분에서 바울이 이 세상에게, 특히 성경의 독자들인 성도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의 강세는 ‘여기에 나열된 죄의 세목들을 하나하나 단계적으로 쳐 내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세목들을 인간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단죄하고 판단하여 사람들을 선인과 악인으로 갈라내려 하는 진짜 죄를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의 본질이 피조물의 하나님 노릇이니까요.

그래서 2장 1절에 ‘판단(크리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쓰인 ‘판단, 크리노’라는 단어는 재판정에서 재판관이 죄의 내용과 질, 형량 등을 선고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사도는 이미 1장에서 성도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이 유죄라는 것을 선고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어떤 무리에게 거저 부어진 것이 은혜라는 것과 그러한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이 구원을 받은 자들임을 분명하게 밝혀 놓았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전가 받은 그 의인만 산 의인이다’라는 선언이 바로 그것입니다. 믿음 외에 다른 그 어떤 행함으로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가 만들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은혜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살아날 수 없음을 명시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처지에 있는 것이 인간들이라면 그 누가 있어 다른 이를 자신의 선악구조 하에 심판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1절부터 차근차근 보겠습니다.

(롬2:1)

1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 함이니라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앞부분의 내용을 다 포괄하고 함의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그 ‘그러므로’를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의역을 해 보면 ‘이러한 것이 모든 인간들이 처해진 상황이라면’ 다른 말로 ‘의인은 믿음으로만 살게 되는 것이라면’ 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렇게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 날 수 있는 그런 존재이고 그러한 은혜에 의해 살아난 자들이 교회인데 너희 중 누가 함부로 다른 이의 선과 악을 판단하여 정죄하는 심판관이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부분의 내용이 유대인들을 겨냥한 것이다, 아니다 이방인들을 겨냥한 것이다, 라는 논쟁이 지금도 분분한데 그건 정말 쓸데없는 논쟁입니다. 사도는 이 편지를 교회에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자연인의 그 죄를 여전히 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자신들의 구별됨을 주장하고 자랑하기 위해 교묘하게 자신들을 위장하는 법을 고안하여 획득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사도는 그들에게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내용들은 죄에 빠져 있는 자연인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과 동시에 여전히 그러한 자연인의 죄에다가 남을 판단하는 죄까지 짓고 있는 교회를 겨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이 말씀에 의해 심판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 교회는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굳게 붙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로 들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들을 들어서 진짜 ‘죄’를 지적하시고 발라내시기 위해 우리 성도들을 죄 생산 공장인 역사 속으로 넘겨 버리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인간 존재의 처절한 의존성을 분명히 자각하고 인정하여 하나님 절대 의존의 삶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죄를 많이 안 짓는 경쟁을 하다가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 나라로 회귀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거듭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16:19)

19너는 굽게 판단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요7:24)

24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은 그 사람의 생김새나 입성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나, 외양으로 나타난 성숙과 변화의 정도, 됨됨이의 모양 등을 가지고 그 사람이 선인이다, 악인이다를 갈라서는 안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예를 들어 세리와 창녀는 악인이고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은 의인이라는 그런 종류의 가름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런 가름은 오늘 날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지요? 그걸 판단이라고 합니다. 사도는 그걸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인과 악인은 창세전에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갈라서 창조를 해 내시는 것이지 그들의 역사 속 행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인과 악인은 그들의 행위로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전적으로 의존하느냐 아니냐로 선인과 악인이 갈라집니다.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선하게 바뀌었느냐, 그들이 착한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로 갈리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걸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고 자신에 대한 신뢰를 놓는 자가 구원받은 자이지 자신의 행위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러한 행위를 내어 놓는 자신을 신뢰하고 칭찬하는 그런 자가 구원받은 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심판의 기준은 성도들의 성숙이나 변화가 아니라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2절이 이렇게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롬2:2)

2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심판은 진리대로 되는 것이지 사람의 행위나 외모를 근거로 되어 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여기에서 ‘진리대로’ 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카타 알레떼이안’은 ‘진리에 의해서, 진리를 따라서’입니다. 심판은 진리를 기준으로 내려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1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그 진리는 ‘true thing, 실체’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들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함부로 사람들의 선인됨과 악인 됨을 규정하고 가르더라는 것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자들이 유대인들이었고요. 그 유대인은 바로 그들처럼 종교인으로 전락해 있는 우리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님에게 독사의 자식이라는 욕을 먹은 바리새인들을 보면서 ‘이런 천인공노할 인간들’이라는 생각을 하는 건 정말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과 바리새인은 바로 역사 속으로 넘겨진 우리 성도 자신을 일차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지 우리와는 다른 딴 나라 사람들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잘 보세요.

(요8:15~16,31-34)

15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16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나와 함께 계심이라

31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신들은 분명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가던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죄의 종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우리가 왜 죄의 종이냐?’라고 따지지요? 그랬더니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게 죄다’라고 일갈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자유는 오직 진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는 것이라는, 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신 후 ‘너희는 죄의 종이다’라고 선언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나는 괜찮은 존재다. 그래서 남을 외모로, 육체로,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자격이 있는 자다’이렇게 선악 판단의 주체로 서는 그 자체가 죄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선인과 악인을 가르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 발휘를 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행위와 사유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들을 근거로 사람들을 이리저리 가르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타고 넘어온 마귀들의 행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절 말미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 한다’로 끝나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그 행위 자체가 정확하게, 스스로 자신을 ‘죄 있는 자’로 심판해 버리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도 똑같은 경고를 합니다.

(약2:1,9,1013)

1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9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10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3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 하느니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다 지키다가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긴 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규율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다 율법 어긴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하나님이 주셔서 구원을 해 내신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한 자들이고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한 자들은 반드시 긍휼 없는 심판에 던져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본문 3절을 보시면 사도 바울의 경고가 더욱 엄중해 집니다.

(롬2:3)

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그렇게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행실로 그 사람들의 선악을 판단하는 자들은 그들이 악하다고 심판을 해 버린 자들과 똑같은 일을 행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기에서 죄라는 것의 정의가 조금 더 선명해 집니다. 사도 바울이 1장 말미에서 나열한 죄의 세목들은 분명 죄의 증상들이 맞습니다. 그 자체가 죄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죄의 증상들의 뿌리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가치 부여와 무한 신뢰에 있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의 무용함과 무력함을 인정치 못하는 그 자체가 죄인 것이고 그 죄에서 죄의 증상들이 격발되어 터지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 속에서 역사의 잣대로 악하다고 선고를 받은 이들이나 그들을 악하다고 선고를 한 사람들이나 모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이들이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예수의 공로와 은혜를 의지하며 전적인 자기존재 의뢰의 삶을 살게 되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본문 4절은 그러한 성도됨의 근거를 확실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롬2:4)

4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 하느뇨

‘넌 어떻게 성도가 됐니?’를 묻는 것입니다. ‘넌 네가 훌륭한 행위를 내어 놓아 구원을 얻은 거라 생각해? 너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의해 인도되어 회개의 자리로 간 거 아냐? 근데 그런 네가 누구의 행위를 가지고 선하다, 악하다, 가망 없다, 등등의 판단을 한단 말이냐? 그건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행위 아니냐?’ 이게 4절 안에 담긴 메시지입니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5절에서 ‘그렇게 계속 제 잘난 맛에 사는 자들은 절대 천국 못 간다.’로 확인 도장을 찍습니다.

(롬2:5)

5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바꾸어 말하면 구원 받은 성도는 끝까지 그렇게 인간의 가치와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근거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자로 살 수 없도록 되어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건 회개하지 않은 자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기관차에 끌려오는 인간 측에서의 수동적 반응인 것이지 인간들이 생산해서 내어 놓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반드시 믿음을 동반하게 되는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성도의 믿음 또한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 주도되어지는 것이지 성도 안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님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설명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개도 그렇고 믿음도 그렇게 그 어떤 것도 성도에게서 출발된 것이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구원을 얻은 자들이 누구를 가리켜 선하다 악하다 판단하고 정죄를 한단 말입니까?

갈라디아서로 가면 사도 바울이 그 하나님의 믿음에 대해 잘 표현해 놓은 곳이 있습니다.

(갈5:4~6)

4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 이니라

선한 행위로 의에 이르려 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요,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완성되는 의에 의해 산 자가 되는 것인데 그 예수라는 의 앞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 같은 인간 측에서의 행위가 아무런 가치 발휘를 못 한다는 것입니다. 효력이 없어요. 그렇다면 성도의 구원의 근거가 되는 믿음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인가? 그게 6절 후반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성도를 살게 하는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하지요? 그 어구를 헬라어로 풀면 ‘피스티스 디 아가페스 에네르구메네’입니다. 직역을 하면 ‘사랑에 의해서(by) 믿음이 일 한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기인한 하나님의 믿음이 성도에게 가입되어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역사하다’라고 번역이 된 ‘에넬게오’의 주어가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의 믿음은 성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믿음을 낳았고 그 하나님의 믿음이 성도에게 역사하여 성도가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요일1:9)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여기에도 하나님의 믿음이 등장합니다. ‘저는 미쁘시고’가 ‘피스토스’입니다.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믿음으로 우리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의 믿음으로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죄의 자백’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은 죄 사함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 죄 사함을 받은 자들에게서 필연적으로 격발이 되어 나오는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라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즉 하나님의 믿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장인 것이지 인간들의 믿음의 경연장이 아닌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당신의 믿음으로 어떤 결과물을 완성하셨는지가 성도라는 소품을 통해 그려지는 곳이 역사란 말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육을 가진 인간들에게 가시적으로 설명이 되기 위해 ‘보임’이라는 특징을 가진 역사가 필요했던 것이지 역사 자체의 무궁한 발전과 번영을 위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도구가 되시는 게 기독교가 아니란 말입니다. 제발 인간들을 주인공 삼아 하나님을 역사의 소품으로 만들지 마세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해 이 역사를 만드시고 마귀의 자식들까지도 만드셔서 완벽한 드라마 세트장을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요일3:10,12)

10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12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 이니라

보시다시피 마귀의 자녀들이 있지요? 마귀의 자녀들은 마귀가 창조한 자들이 아닙니다. 마귀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창조를 할 수가 없습니다. 마귀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목적을 두시고 창조한 자들입니다. 왜 요한이 이 마귀의 자녀들 이야기를 하면서 가인의 이야기로 끌고 가는지 아세요? 하나님께서 가인이 아벨을 때려 죽였을 때 가인을 보호하셔서 세상에 가인의 자식들을 고의로 퍼뜨리시지요? 그때 가인을 없애 버렸으면 가인의 후예들이 아예 존재치도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을 보호하심으로 가인의 후예들을 고의적으로 세상에 편만하게 채우십니다. 왜요? 하나님의 은혜와 상관없는 이 세상 가인들을 통하여 셋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는, 다른 말로 하나님만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 소품으로 채워 놓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의 주체성을 챙기고 그 존재성을 확보하여 ‘나’의 왕국을 세우려 하는 가인들이 이 세상에서 주인공처럼 살지요? 창세기에 잘 기록이 되어 있잖아요? 문화, 예술, 공업, 과학, 심지어 미모와 총기까지 하늘을 찌릅니다. 이 역사의 주인공인 ‘사람’이 사는 곳을 ‘사람’의 힘을 사용하여 멋지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가인의 후예들이 정의한 세상살이입니다. 그래서 사회법도 만들고 도덕과 윤리도 제정을 해서 ‘사람’의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 가인의 후예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이 바로 지옥인 것을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보이십니다. 그리고는 거기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뽑아내시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상류사회로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고립이 됩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게 인류가 추구하는 번영과 진보와 발전의 결과물입니다. 좋은 집들은 전부 게이트로 막혀 있지요? 그 중에서도 특별한 부류들은 더욱 굳건한 게이트로 자기들의 거주지를 둘러 버립니다. 점점 꼭대기로 올라가거나 구석으로 고립됩니다. 그게 우매한 인간들의 머리에서 나오는 구별됨이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자신들이 구별됨으로 특별한 존재가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명품의 의미가 뭡니까? 효용이나 활용도, 외양 등에 의해 명품과 아닌 것이 갈라지나요? 효용이나 활용의 면에서는 배낭이 최고지요. 그런데 거의 쓸모도 없어 보이는 것이 수 천불을 호가합니다. 명품은 구별된 나를 사는 것입니다. 명품의 가격표는 ‘너 이거 살 능력 있어? 없으면 만지지도 마’라는 비아냥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내기 위해 명품을 삽니다. 그리고 그걸 살 수 있는 이들을 특별한 사람으로 취급하기로 합의 한 것입니다. 누구나 다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난 해병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표어와 똑같이 누구나 다 명품을 들 수 있다면 난 그 명품을 사지 않았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구별됨을 챙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거시적으로 그 모습을 바로 보세요. 그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울타리에 스스로 갇히는 것입니다. 톱스타들이나 재벌들이 아무 식당이나 가던가요? 그들이 아무 곳에서나 살 수 있어요? 그렇게 그들이 갈 수 있는 곳, 살 수 있는 곳은 제한이 되어 있어요.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이 특권층의 권력 누림이라고 미화를 해 댑니다. 그건 누림이 아니라 속박이며 제한인 것입니다. 그렇게 자꾸 자기를 특별하게 높이다 보면 결국 혼자밖에 남지 않습니다. 다른 모든 이들이 자신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떨어져 나가 홀로 갇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마다 그렇게 소수의 구별된 지옥 인을 꿈꿉니다. 그게 소경된 인간들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 소경들이 열심히 역사를 건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포도원 농부의 비유가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그 나쁜 농부들을 건축자들에 비유를 하시지요? 건축자라는 것은 건축의 전문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문가라는 것들이 진짜 머릿돌 하나를 분간을 못하고 계속 그 머릿돌을 가져다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세상의 건축자들은 진짜 머릿돌이 아닌 가짜 머릿돌로 집을 짓고 있다는 말이 되는데 그 집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면 금방 무너져 내리게 되는 그런 저주의 집이 된단 말입니다. 그게 이 세상 건축자들이 짓고 있는 역사라는 집인 것입니다. 성도는 그 실체를 보는 자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왜 포도원 농부들, 세상의 건축자들이 주인이 보낸 종들과 심지어 아들까지 때려죽였습니까? 첫째로 그들은 자신들의 열매는 자신들의 소유라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그 비유에서 그 포도원의 주인은 따로 있었고 그 농부들은 그 포도원을 세를 얻어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이라는 전제를 다셨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의 의미는 고용이라는 의미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포도원에서 열리는 열매의 일차적 소유권은 포도원 주인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 농부들은 그 포도원 주인이 삯으로 주는 것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챙겨야 순리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소득의 열매를 내어 놓으라고 종들을 자주 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포도원 농부들은 주인의 은혜를 싹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자신에게서 나오는 모든 열매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바리새인들에게 주어진 비유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지킴이나 제사 행위, 착한 삶 등이 자기들 것이라고 우겼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처럼 열매를 맺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저주받은 자, 불쌍한 자로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라고 양보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절대 포기 못하지요. 자기들이 열심을 부려 만들어 낸 것이거든요. 내가 한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종들을 보내도 자기의 소유권을 열심히 주장하는 것입니다. 내 걸 왜 네가 달라고 하냐는 것이지요.

더 중요한 것은 사실 그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이 요구하는 그 참 열매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요구하는 열매는 ‘내 것은 모두 주인의 것입니다’라는 자기부인의 열매였습니다. 그건 우리가 성경 전체의 맥을 통하여 쉽게 추론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는 존재의 울타리 안에 갇혀서 ‘나’의 왕 됨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자들은 절대 그러한 자기부인의 열매를 내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래저래 주인의 아들까지 때려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의 ‘판단하는 자’들을 바라보세요. 하나님은 ‘너희들은 은혜가 아니면 존재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그들을 역사 속으로 넘기셨는데 그렇게 넘겨진 자들이 이 역사 속에서 ‘난 저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야’라는 자아실현의 삶을 사는 것 자체가 뭐라는 말입니까? 그게 판단이잖아요? 그게 주인의 아들을 때려죽이는 일인 것입니다. 주인의 은혜를 찬송하라고 역사를 세 주었더니 그 셋집에서 주인의 영광까지 가로채 버리는 것이 오늘 날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절이 그러한 자들을 가리켜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쌓는 자들’이라고 선언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진짜 죄라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것이 ‘불의로 진리를 막아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진노를 받게 되는 자들’에 관한 것이잖아요? 그런데 외모로 남을 판단하는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자들이라고 한다고요. 그 말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자기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지 않는 그것 자체가 바로 불의로 진리를 막는 것이고 그것이 죄의 본질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이라는 것은 저마다 ‘나’라는 주인공을 무대 위로 올려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어 하는 이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찬송하며 사는 곳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하나님 나라에서는 ‘나’라는 존재를 기준으로 하여 선과 악, 좋고 나쁨을 가리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성도는 이 역사를 굳이 통과하지 않아도 천국에 들어가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창세전 언약 자손들입니다. 그럼에도 이 역사를 통과해야 하는 이유는 역사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올바로 직시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은혜를 찬송하는 자가 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새 창조의 모형으로 나타난 첫 창조가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로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요 예배 때에도 공부를 했지만 저녁은 성도가 애통해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아침은 성도에게 기쁨이 들이 닥치는 곳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애통의 저녁이라는 이 역사를 통과하여 기쁨의 아침이라는 묵시로 회귀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어 안식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곳을 안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132:13-14)

13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14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 하였음이로다

여기에서 쉴 곳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안식’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거처가 필요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이 거하실 거처를 정하시고 그곳을 안식이라 이름 하신 것입니다. 그 나라로 당신의 백성들을 뽑아 올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란 사람이 왕이 되는 나라에서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안식의 나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사35:10)

10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안식을 하고 계신 시온으로 돌아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시온에서 보내졌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이 없음에도 안식에 도달할 수 있을 것처럼 자신들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여 지옥을 건설하고 있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안식이 있는 곳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 올리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 안식에 먼저 들어가 계신 분이 계십니다.

(계3:21)

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예수님께서 교회에게 당신의 보좌에 앉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보좌는 아버지의 보좌입니다. 그건 곧 시온에 마련된 안식의 보좌를 말하는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그 보좌는 예수님께서 이기시고 앉게 되신 보좌랍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서 그 보좌에 앉게 되신 것이지요?

(히12:2)

2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의 시작이요 완성 자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셔서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앉으신 보좌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이기신 것처럼 이기는 자’들에게 그 안식의 보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예수처럼 이기기 위해서는 어떤 모양으로 이 땅을 살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발가벗게 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을 당하는 자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그걸 개의치 않는 자로 사는 것. 그게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데에 열을 올립니다. 세상의 힘으로, 가치로, 명예로, 도덕으로, 윤리로 자신의 진짜 내면 인격을 위장하며 사는 것입니다.

제 제자가 자기 블로그에 이런 글을 썼더라고요. 그렇게 인간들의 부끄러움을, 자신들의 내면적 실체를, 도덕이나 윤리나 그 밖의 어떤 것으로라도 가리는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생의 목적이라면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든 치마나 짐승 가죽으로 만든 치마나 용도는 같은 것 아니겠냐고, 오히려 가죽 옷은 땀띠나 나지 뭐 유익한 게 있냐는 것이지요. 맞는 소리 아닙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굳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든 치마는 찢어 버리시고 짐승의 가죽으로 다시 옷을 해 입히셨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 벗겨 놓으신 것을 자기들의 선악 구조에 의해 ‘이건 부끄러운 것’이라고 판단을 하고 그걸 가리려 하는 ‘죄’를 찢으시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들이 만든 무화과나무 잎새 치마였어요. 그렇게 인간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 자신이 자신의 존재성과 주체성을 스스로 챙겨 가지려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즉 예수의 가죽으로 비로소 존재가 되는 그러한 피조물임을 가죽옷이라는 소품이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가리는 게 능사가 아닙니다. 도덕이든 윤리든 무엇이든 이용해서 착해지고 순결해 지는 게 능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덮일 때 인간은 비로소 산 자가 된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여정에 있는 자들이 누구를, 무엇으로 정죄를 하고 심판을 한단 말입니까?

성경을 잘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미 결정이 되어 이 땅에 차례대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눅3:23,38)

23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38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부터 시작하여 위로 차근차근 올라가니 맨 위 조상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 예수 안에 여러분과 제가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조상이 누구라는 말인가요? 하나님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이 땅에 차례로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구원의 이야기를 너무나 일관성 있게 전개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창5:1~3,32)

1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이 일백 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32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하나님에서 시작된 하나님 백성들의 족보가 나열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나오는 하나님 백성들의 족보인데 그 족보가 누구에게서 끝나요? 셈에서 끝납니다. 두 번째 족보를 볼까요?

(창11:10,26)

10셈의 후예는 이러 하니라 셈은 일백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26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창세기 5장에서 셈에서 끝난 족보가 창세기 11장에서 다시 셈에서부터 시작하여 아브라함에서 끝나지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즉 교회의 조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 족보의 끝에 예수가 계시고 그 예수 안에 성령으로 잉태된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연결이 되고 있지요? 그런데 창세기 10장으로 가면 그 아브라함의 조상인 셈이 좀 색다르게 설명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10:21~24)

21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22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23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

24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아브라함으로 끝나는 족보의 맨 앞인 셈을 부연하는데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노아의 아들 셈을 에벨을 머리로 한 그 아래 모든 이들의 조상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 셈은 하나님에서부터 시작된 족보의 끝이었고요. 여러분이 보시는 것처럼 에벨은 셈의 증손자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굳이 셈을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셈 아래의 족보 전체를 에벨이라 부른단 말입니다. 왜 일까요? 셈으로부터 시작된 족보가 어디서 끝나요? 아브라함에게서 끝납니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족보는 예수와 그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교회에게서 끝나고요. 그러면 그 아브라함을 대표로 하는 믿음의 백성 전체가 에벨이라는 말인데 왜 모세가 우리를 에벨이라 부르지요?

에벨이라는 단어는 ‘히브리’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이스라엘을 ‘히브리’라 부르지요? 그리고 성경이 아브라함을 ‘히브리 사람 아브람’이라고 부릅니다. 그 때에는 히브리 민족이라는 것이 없었던 때잖아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히브리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 히브리라는 단어가 ‘이브리’, 즉 ‘에벨 족’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아브라함으로 대표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에벨, 히브리’라고 부릅니다. 그 ‘에벨’이라는 단어는 ‘건너간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어디에서 어디로 건너간 자들이라는 말인가요?

여러분, 이 에벨, 히브리가 살던 때가 언제인지 아세요?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인간들의 구음이 흩어지게 된 그 때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노아가 500세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0년 후인 600세 때 홍수를 맞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노아가 홍수 후에도 350년을 더 살았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셈이 홍수 후 2년, 그러니까 약 100세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그로부터 30년 후 아르박삿이 셀라를 낳습니다. 셀라가 30살에 에벨을 낳았고, 에벨이 삼십 사세에 벨렉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에벨의 아들 벨렉 때에 바벨탑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창10:25,31-32)

25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31이들은 셈의 자손이라 그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32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

벨렉 때에 세상이 나뉘었다고 하지요? 여기에 쓰인 ‘파라그’라는 단어와 3절의 ‘나뉘었다’가 같은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 ‘파라그’와 같은 의미의 단어인 ‘푸쯔’라는 단어가 11장에 나옵니다.

(창11:9)

9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여기에서 ‘온 지면에 흩으셨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푸쯔’입니다. 그러니까 벨렉 때에 바벨 탑 사건이 일어난 것이고 그 사건으로 방언이 갈린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나라가 나누어져 생성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0장 말미의 족보가 벨렉에서 멈추고 11장에서 바벨탑 사건이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벨탑 사건이 일어난 것은 넉넉잡아 노아의 홍수가 일어난 후 100년 안팎의 일인 것입니다. 그때는 노아도, 셈도, 에벨도 다 살아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당시의 모든 인간들의 상태가 ‘바벨탑 쌓기’로 설명이 되었다는 것이 너무 충격적이지 않나요? 그래서 인간은 불가능한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셈의 후예들이 똑같이 바벨론 안에서 바벨탑 쌓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나친 추론입니까? 아닙니다. 창세기 10장에서 셈의 족보 맨 마지막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지요? 그 셈의 후예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한 번 보세요.

(수24:2-3)

2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보세요.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를 비롯한 아브라함의 조상들, 즉 셈의 후예들이 강 저편에서 뭘 섬겼다고요? 다른 신들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벨탑의 현장에는 함의 후예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셈의 후예들도 함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들 중 아브라함으로 대표되는 교회를 강 저편에서 이편으로 끌어내셨다는 것입니다. 왜요? 자기 힘으로는 절대 그 바벨론에서 못나오니까요. 아브라함이 살던 곳이 갈대아 우르지요? 그곳 갈대아가 ‘바벨론’이잖아요? 그리고 그 바벨론이 요한계시록에서 그대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강 저편 바벨론에서 강 이편 가나안으로 건너온 자들이 ‘에벨, 히브리’인 것입니다. 어떻게요? 믿음으로요.

(히11:8)

8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브리서 11장 전체의 주어가 뭐라 했습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을 땅 저편으로 끌어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주체가 누구라고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여전히 바벨론이라는 도시에 대한 연정을 품고 바벨탑 쌓기에 열중인 자들인 것인데 하나님의 열심과 믿음이 그들을 강 저편으로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주의 풍랑과 저주의 홍수를 하나님이 은혜로 건너하게 하신 것처럼 성도의 인생 또한 하나님의 믿음과 열심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에벨, 히브리’인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꼭 홍해나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으로 진군을 하는 지 이해가 가시지요? 여전히 바벨론에서, 애굽에서, 광야에서, 뭉개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강 이편으로 이끌어낸 자들이 교회라는 의메에서 교회 전체를 ‘에벨, 히브리’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 저주받을 바벨론에서 끌려나와 가나안으로 밀려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 와중에 우리는 노아와 셈과 에벨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여전히 바벨탑을 쌓는 자들임을 폭로당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기필코 당신의 백성들을 그 저주의 바벨론에서 건져내셔서 가나안으로 건너가게 만들어 버리시는 분입니다.

그렇게 은혜로만 살고 은혜에 의해 끌려가는 자들이 누구를 판단하며 누구를 정죄하며 누구를 심판한단 말입니까?

우리는 그저 ‘하나님 제가 죄인 중의 괴수 맞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좀 도와주세요.’하며 면목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면 되는 것입니다. 왜 예수를 믿고도 이렇게 변화가 더딘가, 걱정 많으셨지요? 거룩한 걱정입니다.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께서 탄식하시는 소리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탄식 속에서 절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당신의 나라로 열심히 이끌고 계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시는 여러분이 되셔야 합니다.

너무 조바심들 내지 마세요. 지옥이 원래 우리의 자리입니다. 그리로 보내셔도 아무 할 말 없는 그 자리까지 내려가셔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앞으로도 여러분 자신에게 무척이나 부끄러운 폭로를 계속 당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절망으로 가지 마시고 예수의 은혜에 여러분을 다 맡겨 버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