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29) 인과응보의 하나님?

은바리라이프 2013. 10. 7. 11:52

로마서(29)

 

인과응보의 하나님?

(롬2:6-11)
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동양의 철학과 사상은 그야말로 백가쟁명(百家爭鳴)의 경연장과 같은 다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공자를 중심으로 한 유가(儒家)와 노자를 중심으로 한 도가(道家)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백가쟁명의 소리들이 하나로 묶인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게 다름 아닌 ‘자연주의’라는 것입니다.
 모든 동양 사상은 초월자와 초월의 영역을 부정합니다. 그들은 자연 자체가 자생력과 번식력, 그리고 창조력을 가지고 있어 

거기에서 모든 존재의 탄생과 변화와 성숙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동양 철학에 존재의 근원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존재를 존재로 탐구하는 것 자체가 존재의 궁극적 근원을 따지는 것이거든요. 


우리 기독교는 존재의 탐구를 통해 존재의 궁극적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의 궁극적 근원에 대한 탐구는 종교적 세계관을 전제하지 않고는 인류의 사고에 등장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동양의 사상과 철학에서는 그러한 종교적 세계관을 일찍 탈피해 버렸기 때문에 

존재의 궁극적 근원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냥 존재는 ‘이미 있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그들의 사고는 출발을 합니다.
 

 따라서 동양 철학은

 ‘인간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등의 질문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미 살고 있는 몸이니 의미 있고, 보람 있고, 가치 있게 잘 살자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 있는 삶을 근거로 보다 밝은 미래를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 동양 사상의 목적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석가모니가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라는 제자의 질문에 ‘너는 그러한 것에 관심을 두기 전에

 제 존재 자체가 지금 인생이라는 독화살에 맞아있는 상태라는 것에 집중을 해야 한다. 

지금 네가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그 생로병사의 윤회에서 빠져 나갈 수 있을까, 여야 한다.’라고
대답을 한 것을 보아도 동양의 사상이나 종교나 철학은 존재의 궁극적인 근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관심은 존재를 있게 한 어떤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인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동양 사상에서는 그 존재 자체의 행위와 수고에 의해 그 존재의 향후 양태가 결정이 되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논리가핵심 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인연생기란 자기 존재가 원인이 되어 향후의 결과를 도출해 낸다는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인연생기의 사상은 인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것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인간과 모든 만물이 하나로 묶여서 서로에게 원인의 역할을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원인을 가지고, 자기 자신이 결과가 되어 ,그 하나님 속에서 이러저러한 역할로 변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주는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거대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걸 생기자연(生機自然)이라고 합니다.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면서(생명의 움직임) 또 다른 생명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게 변화입니다. 그 전체가 생명입니다. 따라서 동양사상에서는 죽음이, 죽음이 아닌 것이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것은 존재가 커다란 생명 안에서 또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걸 만물유생론(萬物有生論)이라고 합니다. 만물이 변화하여 ‘사는 것’만 있다는 말입니다. 

과거의 생명이 현재의 생명으로 변하고 현재의 생명이 미래의 생명으로 변하며, 생명으로 이어지면서 사는 것만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이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생명이란 시간에 따라 모양만 다른 것이요 항상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은 하늘, 땅, 사람, 동물, 식물 등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지, 소멸이 되거나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는 입니다. 그러한 자연의 변화를 역(易)이라고 합니다. 바로 그 역에 관한 책이 주역(周易)입니다.

 주역은 그러한 자연의 변화와 이치, 역(易)을 64괘(卦)를 이용하여 설명해 놓은 책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작용을 빚어내는 우주의 기운을 신(神)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야기하는 신과 동양 철학에서의 신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동양 철학의 신은 살아계신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변화를 빚어내는 기운일 뿐입니다.

 그래서 동양 사상에서는 귀신도 초월적이고 세상 외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 봅니다.
 ‘귀’는 돌아감(歸)‘ 즉 자연의 움츠리는 힘이요, ’신(伸)‘은 자연의 펴는 힘으로 이해합니다.

 ’귀‘는 사람의 죽은 몸이 땅으로 간 것을 말하고 ’신‘은 하늘로 간 것 즉 정신적인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귀신이라는 존재가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속하여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식의 생각이니 자연을 초월하는 하나님이라는 별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양 철학에서의 우주와 자연인식이 얼마나 물질적인 것에 갇혀 있는지 잘 아시겠지요

동양의 사상은 눈에 보이는 것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물질이라는 것의 뒤에 

주권자로 계시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주가 항상 변화하면서 생명력을 끊임없이 흘려보내는 것을 ‘성실함’ 혹은 ‘진실’이라고 이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명력의 전달 과정과 변이에는 어떠한 원리와 질서, 규칙성이 존재하는 데 그걸 도(道)라 합니다.
그러니까생명이 흐르는 길이요 원리인 것입니다.

  그걸 도가(道家)에서는 무(無)라고도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존재가 생겨날 때에
공간이 필요하고 그 존재를 구성하는 원소가 필요하지요? 그러나 그것들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이잖아요?
공간이 보여요? 만져집니까? 원소가 보여요? 인식이 가능합니까? 그러나 있잖아요? 그걸 무(無)라고 합니다.
그 무에서 유(有)라는 존재, 물질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무(無)눈 ‘움직임이 없음’의 무위(無爲)와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허무(虛無)를 함께 포함합니다.
그렇게 형태 없는 형태요, 물체 없는 상(象)을 황홀(恍惚)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은 그렇게 황홀에서 나오고 다시 무위로 돌아간다는 것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고 하고,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망동(妄動)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움직임도 없고 존재도 없다는 무(無)의 실체를 어떻게 정의하고 인식할 수 있는가?
노자는 그건 불가능이라고 합니다.
그냥 그 무(無)가 천지 만물의 시원(始源)이라는 것만 알면 된다고 합니다. 너무 사변적이지요? 그런 말은 누가 못합니까?
아무튼 모든 존재는 그러한 자연의 성실함과 도를 따라 살게 되는데, 그것이 도리를 다하는 삶이요 성실한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성실함을 추구하고 도리에 맞는 삶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자연의 이치이기도 하지만 현재에 진행되고 있는 존재의 삶, 즉 원인으로서의 삶이 미래의 그 존재를 결정하기 때문에 현재를 성실하고 착하게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실함을 노자는 ‘수련’이라고 명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수련이나 성실함이나 착한 삶 등을 통하여 미래의 자기 위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공식처럼 정확하게, 원인의 삶에 대한 결과로서의 삶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지게 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니까요.

 어떠세요? 오늘 본문을 읽으시면서 마치 그러한 인과응보가 생각나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은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했잖아요?

정말  성도들도  이 역사 속에서의 행함에 의해  미래라는 결과를  보응 받는 그런 사람들입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는 중국의 워치만 니가 이러한 동양 사상을 기독교와 많이 섞어낸 사람입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 워치만 니의 책이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가 되어서 그가 쓴 로마서 강해를 읽은 기억이 있는데 

우리가 오늘 공부할 부분을 강해하면서 그 분이 든 예화가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어떤 마을에 예수를 믿는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아주 성실하게 농사를 짓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물을 길어다가 논에 물을 대고 다음날 가보면 그 물이 아래 논으로 다 빠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다시 물을 길어 논에 물을 대어 놓으면 또 물꼬가 터져서 아래 논으로 물이 다 내려가 있었습니다. 

아래 논 주인의 소행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 차렸지만 그는 가서 따지지 않았습니다.
따지는 대신에 아예 논에 먼저 물을 대 주고 자기 논에 물을 대는 방법을 택했다는 거지요. 그리스도인이니까요.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실력이며, 본문에서 말하는 선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께서도 워치만 니의 그 예화를 설교 예화로 드시면서 이 본문을 설교하셨던 생각이 납니다.

 여러분, 정말 여기에서 말하는 선을 행함이 그런 종류의 것일까요?
그래야 이 세상에서든 천국에서든 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맞나요? 아닙니다.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의 행함에 의해  미래의  ‘되어질 나’를  보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미래의 되어질 ‘나’를 이미 확보하고 이 세상에 온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인과응보의 신학을 주장하고 가르치는 자들은 

동양 철학의 영향을 받아 엉터리 신학을 제조하여 투여하고 있는 그러한 자들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너무 목적론 적이고 결정론 적이어서 기독교의 현실성을 강조하느라
그런 예화를 들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그런 유의 교훈적 설교는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불의로 진리를 막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그 분은 간과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행한 대로 갚으신다말씀의 진의는 무엇인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항상 문맥 속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까지 공부한 내용이 무었습니까?

성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의해서만 살아나는 자라는로마서 전체의 대 주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남을 판단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 남을 평가해서도 안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다시 2장 1절 이하를 보겠습니다.

 (롬2:1-3)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줄로 생각하느냐

  여기에 어떤 행함이 반복하여 지적되고 있지요? 못 된 행함입니다.
어떤 행함입니까?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행함,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행함입니다.여기에 이어지는것이 오늘 본문6절인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안의  못 된 유대주의를 지적한 다음, 그러한 행함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이라고 5절에서 경고를 한 후

 6절에서 그러한 행함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보응이 있을 것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6절은 ‘착한 일 많이 해, 안 그러면 하나님이 벌주신다.’는 식의 권선징악의 교훈을 적어 놓은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으로 함부로 사람 판단하는 거, 그거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7절과 8절에서 다시 그 못 된 행함과 선한 행함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7절을 보세요.

(롬2:7-8)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7절에는 영생을 보응으로 받게 되는 선을 행함이 나오고
8절에는 노와 분으로 보응을 받게 되는 악한 행함이 나옵니다. 

그런데 영생으로 보응을 받게 되는 선한 행함은 어떤 행함입니까?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행함입니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게 뭘까요?   그게 선을 행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영광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독사’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이 보이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건 성경에서 곧잘 사람의 영광과 대조되어 나오는 그러한 영광입니다(요12:43).

그리고 존귀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티메’ 는  ‘대가, 지불된 돈’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전6:20)
20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여기에서 ‘값’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오늘 본문의 ‘존귀’라고 번역이 된 ‘티메’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대충 감이 잡히시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품고 육신을 입고 내려오셔서 죄인들의 값으로 치러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썩지 아니함이 함께 나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자주 함께 쓰곤 합니다.

 (딤전1:17)
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귀와 영광과 썩지 아니함누구를 가리킵니까?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한군데 더 보지요.
(벧전1:23)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 성도가 거듭난 것이무엇으로 된 것이라 합니까?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그 썩지 아니할 씨가 무엇인가 하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입니다.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영생으로 보응을 받을 사람들은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않음의  ‘하나님 나라’ 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는 ‘행함’을 보이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만을 의지하는 자들이 남을 함부로 심판해 버릴 수 있느냐는 행간의 메시지를 

여러분은 읽으실 수 있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7절의 ‘참고’는 누구의 참음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예수의 참음입니다.
다시 7절 앞부분을 보세요.
(롬2:7)
7 참고 선을 행하여

 여기에서 ‘참고’라고 번역이 된‘카스 휘포모넨’은 지속적인 인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중간에 끊어지지 않는 인내, 계속적인 인내, 그건 인간의 것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카다’라는 전치사도 ‘according to'라는 의미의 전치사입니다.
그 부분을 직역을 하면, ’지속적인 오래 참음에 의해 선을 행하게 되는 자가 있는데‘입니다.

그 지속적인 오래 참음이 누구의 것인지  잘 나타나 있는 곳이 우리가 조금 전에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않음‘이라는 단어를 찾아내었던 디모데전서 1장 17절 바로 앞에 나옵니다.
(딤전1:16)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누가 일절 오래 참으신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일절 오래 참으신 것입니다.
그 분이 일절 오래 참으시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심으로 믿는 자들이 영생을 얻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으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 7절은 일차적으로 예수의 행함인 것이고
그 예수의 행함에 의해 예수를 믿게 되는 성도의 수동적 행함을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그게 바로 선을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선을 행하여’라고 번역이 된 어구가 헬라어 ‘에르곤 아가돈’인데 

그 어구는 여러분이 여러 번 공부를 한 어구입니다.

 (빌1:6)
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여기에서  ‘착한 일’ 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오늘 분문의 ‘’선을 행하다‘ 와 정확하게 같은 단어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그 ’착한 일‘의 주체를  ’하나님‘ 으로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 착한 일은 성도 안에서 일어나는 새 창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단어는 창세기의 첫 창조의 매 날에 후렴구처럼 붙어 있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의  ’토브‘ 바울이 인용해다가 쓴 것이라 했지요?
 

그러니까 우리 안에서 시작된 착한 일은 우리가 행하는 어떤 일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가리키는 것이
그 하나님의 행하심에 의해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되는 증상을 ’선을 행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뭡니까? 믿음이지요. 바울이 그 믿음을 가리켜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함이라고 묘사를 한 것입니다.
행함과 믿음은 같은것...
 

(행10:38)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착한 일을 누가 하세요? 예수가 하십니다.
그 예수의 착한 일에 의해 하늘의 백성들이선한일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착한 일이요, 교회의 착한 일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인간은 스스로  선한 일을 만들어 낼 수 없음을,  같은 로마서 7장에서 분명하게 밝힙니다. 

 

(롬7:18-19)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보시다시피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서조차 선한 일이 나오지 않음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선한 일아 아니라 악한 일이었습니다.

이게 구원 받기 전의 사도 바울의 현실이 아닙니다. 사도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때 그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신 속에서 선한 일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뭐였습니까?
 

7장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일이었습니다. 믿음이며  행함임며  그게 성도의 선한 일입니다.


디도서 3장으로 가보세요.
(딛3:4-7)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5절을 보시면 사도가 분명히 밝히지요?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기인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뭘 준다고 해요? 영생을 준다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행한 대로 보응을 하시는데 선한 일을 행한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신다고 했지요?
 그런데 왜 디도서에서는그 영생이 사람의 의로운 행함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까? 


그건 오늘 본문의 선한 일이 사람에게서 생산되어 나오는 그러한 종류의 선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한 일이라는 마중물에 의해서만 비롯되는 성도의 수동적 선한 일인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다 외우고 있는 요한복음 6장28절 이하로 가서 

그러한 하나님의 선한 일에 의해 성도에게서 나타나게 되는 선한 일이 어떻게 설명이 되고 있는지 다시 확인을 해 보겠습니다.

 (요6:28-29)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여기에 쓰인 ‘일’이 오늘 분문의 ‘선을 행하다’의 ‘에르곤’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 일이 뭡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가 행해야 하는 선 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믿어지는 것 이기에 예수 믿는것이 어려워요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오늘 본문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롬4:4-8)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여기 보시면 일한 것 없이 예수를 믿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 진짜 복 받은 자들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선한 일을 하라는 거예요?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인간이 생각하는, 보상의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선한 일은 하나님 앞에 전혀 카운트가 되지 않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믿음에서 자기가 부인되고, 그 자기 부인의 과정 속에서 격발이 되는 믿음의 행위는

하나님이 기쁘게 보신다는 그런 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한 일이랍시고 몇 가지 내어 놓고  남을 함부로 비판하고 정죄하는 그런 종류의 선한 일은

 오히려 저주와 노와 분을 쌓는 일임을 명심하고, 예수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행위만 가치로 쳐 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11절이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롬2:11)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보세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상을 걸어 놓고,‘착한 일 많이 하는 사람은 이거 줄 테니까 열심히 경쟁해 봐라’고 하시겠습니까? 앞뒤가 안 맞잖아요?

 바울이 정말 아래 논주인의 그 싸가지 없는 행사를 눈감아주며 오히려 그 논에 먼저 물을 대주는 그런 선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왜 그 이야기를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다’로 끝을 내냐고요.


노자도 ‘탐나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백성의 마음이 어지럽게 되지 않는다’ (不見可欲, 私民心不亂)이라고 했고,
‘훌륭한 사람을 숭상하지 않으면 백성이 다투지 않으며,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다고 하지 않으면 백성이 도적질을 하지 않는다’
 (不尙賢, 使民不爭; 富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판단하여 훌륭하다 생각되는 사람들을 숭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을 숭상하면 저마다 그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다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노자도 경계한, 그런 상을 걸어놓고 사람들을 경쟁의 자리로 불러들이시겠느냐는 말입니다. 

거기서 이기면 상주고 못 이기면 벌준다는 그런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불러도 되는 겁니까?
인과응보가 맞다면 은혜라는 단어는 거기에 쓰면 안 됩니다. 인과응보와 은혜는 모순이거든요.
 

그럼에도 많은 주석가들이 6절의 말씀을 인과응보의 경고로 해석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과응보로 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게 힘의 원리로 돌아가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어떠한 결과에 대해 반드시 원인을 근거로 요구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원인이 없는데 결과가 발생하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원인이 없지는 않지요.
원인은 하나님에게 있고 결과를 우리에게 선물 해주는것을 백성이 받아 챙기는 것이어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원인은 항상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런 의미에서이러한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마16:27)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오늘 본문의 말씀과 다르지 않지요?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어떤 문맥에 붙어 있는 것인지 아세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십자가 수난에 대해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절대 죽으면 안 된다고’ 꾸짖었던 그 에피소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왜 예수님의 죽음을 막아선 것입니까? 예수님을 너무 사랑해서? 예수님이 불쌍해서?

 아닙니다. 자기가 버리고 좇았던 시간과 노력과 소유가 너무 아까워서입니다.
예수님이 죽으면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니까요.


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꾸짖으시는지 보세요.
(마16:23)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여기에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대조가 되어 나오는데,
하나님의 일은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영생이 주어지는 것이고, 사람의 일은  예수님이 엄청난 힘을 소유한 세상적 메시아가 되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만들어 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후자의 메시아를 구하는 자를 ‘사단’이라고 부르십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행해야 하는 선한 일, 하나님의 일은 

자기의 가능성과 존재성, 주체성과 욕망을 예수님의 은혜와 공로 앞에 다 내려놓고,
이 세상의 복과 비전이 아닌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구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 곧 역사 속에서의 성도의 육적 자아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그리고 그 나라의 생명을 구한다는 것 자체가 

이 세상의 보이는 나라그 나라의 주인공인 ‘나’라는 존재의 죽음을 전제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시는 것입니다.
(마16:24-25)  
23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자기의 목숨을 위해 예수를 따르던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초를 쳐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가 전부 인간 존재의 가치와 위상을 높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합니다. 

인간의 성숙, 인간의 행복, 인간의 유토피아, 인간의 구원, 등등 모든 종교의 주인공은 인간입니다.
 

그렇게 인간 자체의 가치와 존재성을 중요시하는 인본주의 하에서는
 인간 행위의 가치 또한 대단한 것으로 여김을 받아 그러한 인간 행위의 다소와 경중에 따라 인간 존재 가치가 평가가 됩니다. 

그래서 판단이 나오고 심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존재성과 주체성을 완전히 박살을 내 버리십니다.

너희는 이 역사 속에서 죽은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옛 자아의 죽음이 없이 보이지도 않는 예수님을 어떻게 믿겠냐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를 믿어 살아나게 되는 것이지 그들의 행위로 살아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는 역사 속에서 

욕망과 신념 사이에서 사투를 벌이며 점점 자기 자신에게 ‘난 죽어 마땅한 자’라는 

사형 선고를 스스로 내리는 과정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부인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인 것입니다. 

그 삶을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의 성숙이라고 표현을 할 수 있겠습니다. 


나에 대한 신뢰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깊어진다는 뜻이니까요. 그게 육적 자아의 죽음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행함, 즉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방향으로 지향되지 않는 모든 행함은

 다 저주의 대상임을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내러티브의 마지막에 ‘내가 다시 올 때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영생을 보상을 받게 될 행함은 자기의 존재성과 주체성과 신뢰를 빼앗겨 가는 행함인 것이고 

저주를 받게 될 행함은 자신의 존재성과 가치를 챙겨서 스스로 영광을 취득하는 행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착한일 많이 하지 않으면 혼날 줄 알라는 일갈이 아닌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에도 똑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고후5:10)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여기에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된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선한 일을 하라는 것인가요?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성경은 절대로 권신징악의 도덕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찬송하는 책이지 성도의 선한 일을 독려하는 책이 아니란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현실성이요?
기독교 신앙의 현실성은 성도가 이 사회에서 유익한 존재로 사는 것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백성은 이 세상과 섞여질 수 없는 것이구나’ 에서 찾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너무 종말론적이며 결정론적으로 치우쳐 있다고요?
네, 그래서 우리는 불성실하게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소망 안에서 현실을 성실하게 살아냅니다. 

이미 결정된 미래가 있기에 오늘을 나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려 노력하며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 구절 바로 앞부분에 어떤 이야기가 적혀 있는지 보세요.

(고후5:7-9)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여기에도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전제로 등장하지요?
믿음으로 행하지 않은 모든 것에 노와 분의 보응이 있을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에서 비롯된 모든 것이 부정되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성도는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지향성을 부여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기쁘게 하는 자로 못 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건 옛 자아의 죽음으로 향하는 지향성인 것입니다. 


성도는 절대 자기의 유익이나 자기의 영광을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와 능력과 행위의 무가치함을 수긍하고 인정하고 고백하게 되는,
무덤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 자기의 행위를 보상의 근거로 제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의 그 무리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에게 ‘내가 주의 이름으로선지자 노릇도 했고, 권능도 행했고, 귀신도 쫓아냈고, 착한 일도 많이 했는데
 왜 나를 천국에 안 넣어 줍니까?’라고
자신의 행함을 보상의 근거로 디밀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뭐라고 하세요?

(마7:21)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냥 무턱대고 착한 일, 선한 일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걸 다 카운트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그 일만 아버지 앞에서
카운트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행함이 무엇입니까?
(요6:40)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아들을 보고 믿어 영생을 얻는 것,
즉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 영생에 이르는 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생은 어떠한 행함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영생을 선물 받은 자에게서 믿음이라는 행함이 나온다는 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바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도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입니다. 

행함은 믿음에 의한 자기부인의 몸짓인 것이지  믿음을 부여 받은 자가 자기의 의지를 발동하여 

신앙의 현실화의 측면에서 성취해 내야 하는 짐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행함이 있는 믿음의 예로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을 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 시작부터 하나님에 의해 인도되고 끌려 다니다가
결국 모리아 산에서 옛 자아의 심장에 칼을 꽂는 자가 된 사람이고  이것이 믿음 이고 행함이라고 합니다

기생 라합도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자신의 모국, 즉 자기가 속했던 이 세상 나라를 하나님 나라와 맞바꾸는 행위를 했던 사람입니다.

자기가 속한 나라를 멸망의 자리로 팔았다는 것은 이 세상 속 자아의 죽음을 자처했다는 말인 것입니다. 내가 속한 나라는 ‘나’거든요. 

그래서 국가와 개인의 자아 형성과정이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월드컵 때 왜 그렇게 광분해요? 대한민국이 곧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라합이 자기의 나라를 팔았다는 것은

 ‘나는 이제 죽었으니 하나님이 살려 주세요’ 라는 자기부인의 위대한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성도는 그렇게 자신의 육적 자아가 살해되는 현장으로 내 몰리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선한 행함입니다.

  요한계시록에도 똑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계20:12-15)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명단이 적혀 있는 생명책이 나옵니다. 

그 생명책의 이름은 어떻게 기록이 된 것입니까?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으로 기록이 된 것입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선물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은 믿음을 못 받은 사람들인 것이지요?
 그 사람들이 불 못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이유가 뭡니까?
믿음에서 결박된 행함이 없어서요. 믿음에서 격발된 행함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으로 밀려 내려가는 길에 나오는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믿음의 행위를 내어놓지 못한 보응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계시록 22장에서도 똑같이
 ‘내가 그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나님의 일갈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일은  믿음  행함  믿음  선한일 믿음...예수를 믿는가  의지하고 있는가...


계시록 19장으로 가면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계19:8)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입은 세마포 옷입니다.
그 옷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예복이기도 한데 그 예복은 잔치의 주인께서 선물로 주는 옷입니다.
그런데 그 옷이 어떻게 하얀 세마포가 되었습니까?

 (계7:14)
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어린양의 피에 씻어서 희게 된 옷, 그게 성도가 입고 있는 세마포요,
그것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영생의 옳은 행실인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의 피만을 의지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얻은 자들이 어떻게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고 인간 행위의 가치를 침소봉대 하여
그것으로 선인과 악인을 가르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 예수의 은혜만을 붙들고 겸손의 자리, 온유의 자리로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가실 때 당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인되어져 가는 성도들의 삶 속에 허락되는 직분이나 생업이나 사명 등이 무엇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게 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게 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모든 것 안에서 우리는 부인 되어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막 살 수 없습니다.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근거로 상을 받는다거나 보다 나은 미래를 확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여러 직분들을 이야기하며, 결국 그것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라고선언을 한 것입니다.

 (엡4:10-12)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렇지요? 그러니까 게으르지 마세요. 막 살지 마세요.
그건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며 게으름입니다. 자유와 방종, 자유와 게으름을 잘 구별 하세요. 열심히 사세요.
그리고 많이 실패 하시고, 그 속에서 많이 감사하세요.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의 구원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잘 배우세요. 그러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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