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36) 말씀을 맡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캔버스
(롬3:1-2)
1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저는 무언가 전문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열심히 그 일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떠 올리고는 합니다. 피아노 앞에서 피아노에 몰입하여 연주를 하는 사람을 볼 때, 부엌에서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요리를 하는 어머니들을 볼 때, 사무실에서 양 손에 전화기를 들고 정신없이 업무를 보는 직장인들을 볼 때,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진지한 얼굴로 스케치북이나 캔버스를 연필이나 물감으로 채워 나가는 모습을 보면 경외감까지 느낄 정도입니다.
몇 년 전에, 지금은 시카고에서 art therapist로 활동을 하고 있는 제자 윤지원이가 제 초상화를 그려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림을 좋아하는 저에게 누군가 제 모습이 담긴 그림을 그려 준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그 그림을 이 세상에서 제가 받아본 선물 중 가장 귀한 선물 중 하나로 여기고 있습니다. 누가 저의 모습을 그려 준 것도 처음이서 그러했지만 그 그림을 보면 제가 화들짝 놀랄 정도로 저도 모르는 저의 실체가 잘 묘사가 되어 있는 듯 보여 지기 때문입니다. 사실주의 화풍의 그림처럼 모양이 똑같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라는 사람의 내용이 그 친구의 그림 안에서 설명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림이라는 것은 항상 모델을 두고 그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현실감이 살거든요. 그런데 모델을 앞에 두지도 않고 정확하게 그 사람을 그려 낼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 마음속에 그 모델이 이미 완전히 파악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 파악된 대상은 캔버스를 채우는 내용이 되어 그 화가들의 화풍이나 취향대로 사실주의나 묘사주의, 관념주의나 큐비즘 등으로 각기 다른 모양으로 그려지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대상의 실체는 하나입니다. 아무리 주관에 의해 대상 묘사의 변모가 시도되었다 할지라도 그 화가가 파악하고 있는 대상의 실체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 역사와 인생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캔버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역사의 시작과 끝과 내용과 모양을 정확하게 완성해 놓으신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이 역사와 인생들은 완전히 파악이 된 상태입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파악 정도가 아니라 그 분에 의해 작정되었고 계획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그리고자 하시는 내용을 각각의 인생과 그들이 살아야 하는 역사라는 캔버스 위에, 겉으로 보아서는 각기 다른 모양처럼 보이는, 하나의 그림을 그리고 계십니다. 이 역사와 우주와 인생 각자는 거대한 하나의 캔버스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수천 개의 퍼즐이 각기 객체로 존재하다가 하나로 모여 맞추어 지면 거대한 그림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금 이 역사와 인생에 어떤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 걸까요? 예수라는 그림을 그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대로 아버지를 설명하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쉬운 말로 하나님은 지금 이 우주와 역사와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그려내고 계시는 겁니다. 왜 하나님이 주이시며 왜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여야 하는지를 당신의 백성들에게 3D 입체 영상으로 잘 그려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절대로 이 우주와 역사와 인생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하는 일이나 그들의 됨됨이에 의해 상벌이 주어지는 식의 인간 주연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곳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그려내는 하나님 주연의 대하드라마가 펼쳐지는 곳이 이 세상인 것입니다.
(골1:15~17)
15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선재)
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예수 안에서 존재가 되느니라)
(롬11:36)
36만물이 그에게서 나왔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기를 빕니다. 아멘
모든 만물의 존재의 이유가 뭡니까? 예수 안에서 존재 하는 것만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을 사는 하늘의 존재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 안에서, 예수를 위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이 만물의 본질적 의미이며 만물의 존재 원인과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예수와 관계없는 모든 것은 존재로서의 성립 자체가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만 모든 것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걸 설명하기 위해 창조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걸 올바로 깨닫고 자기 존재를 부인당하여 예수 안으로 흡수되는 것을 구원이라 하고, 그 상태를 순종이라 부르는 것이며, 그것은 다른 말로 안식이라는 말로도 설명이 됩니다.
그건 창세기에서부터 친절하게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창2:1-3)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 하셨음이더라
여기에도 천지만물이 등장하지요? 그 천지만물을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십니다. 그 첫 창조는 하나님 나라라는 묵시 속의 새 창조의 모형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 천지만물의 창조의 끝에 안식이 등장합니다. 안식이란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묵시 속에 완료된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에서는 천지와 만물의 창조 목적이 예수로 수렴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에서는 그렇게 천지 만물이 다 이루어진 상태를 안식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와 안식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지요? 잘 생각해 보세요. 사도 바울은 천지만물이 예수가 누구이시며, 예수의 하시는 일이 어떤 일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창조가 되었다고 하고 창세기를 쓴 모세는 그 천지만물이 안식으로 결과지어진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둘을 조합하면 어떤 이야기가 됩니까? 안식, 즉 하나님 나라는 예수가 홀로 성취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천지만물이 창조가 된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여섯째 날까지 일을 하시지요? 물론 상징적인 여섯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합니까? 아버지께서 일을 하시니 나도 일을 한다고 하시며 창세기 2장의 그 아버지의 일을 인용하셔서 새 창조를 말씀하십니다. 그 새 창조의 일을 여섯째 날에 마치시는데 여섯째 날은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금요일입니다. 그 여섯 째날, 금요일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그 어떤 일에 의해 무엇이 성취되나요? 그 여섯째 날, 그러니까 유월절 금요일에 십자가가 섭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서 창세기 2장에 쓰인 단어, ‘다 이루었다’라는 하나님의 선언이 세상에 떨어졌습니다. 거기에서의 다 이루어짐은 예수의 죽음에 의한 다 이루어짐이었습니다. 무엇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하나님 나라인 교회가 예수의 십자가로 완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그 이야기를 창세기 2장은 천지 만물이 다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리고 안식으로 설명을 하는 것이고, 바울은 그 현실을, 예수를 위하여, 예수로 말미암는 만물의 본질적 존재 의의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묵시 속 목적(창세전 언약)이 예수에 의해 완료가 되는 커다란 구속사의 그림을 설명하기 위해 천지와 만물이 모형으로, 재료로 창조가 된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의 창세전 계획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료가 된 상태를 안식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식이라는 개념은 ‘일하지 않음’이라는 내용을 내포하고 있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서는 안식일에 일을 하는 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까지 엄히 금한 것입니다. 그 말은 안식, 즉 하나님 나라는 너희들이 일해서 성취되는 곳 아니고 너희들의 노력으로 운영되고 유지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성취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는 나라라는 것을 계시로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러한 복음이라는 전체의 그림이 역사와 인생 속에 그려지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로기온, 말씀’이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붓을 잡으시고 하나님의 일을 그려내시는 그 모습을 상상하시면 됩니다. 그 캔버스에 그려진 바로 그 내용이 ‘로기온’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캔버스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그려내신다는 말과 똑같은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맡은 자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유익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혹자들은 말씀을 맡았다는 것을 준행의무의 차원에서 설명을 하곤 하는데 그건 아니란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말씀을 지켜낼 재간도 없었고 지켜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유익이라는 말을 한단 말입니다.
어떤 이는 그 유익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의 유익으로 해석을 하기도 하는데 원어 본문을 보면 그 유익이라는 단어는 유대인에게 걸려 있는 단어입니다. 헬라어 본문을 파싱해 보면 그 유익은 말씀을 맡긴이의 유익이 아니라 말씀을 맡은 자의 유익입니다.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이 역사와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의 필연성을 그려내는 캔버스인 것이라면 그 역사와 인생이 어떤 상태로 예수를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까? 아니 그보다 먼저,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는 뭔가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마1:21)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필연성을 이 역사와 인생들이 올바로 그려내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떤 상태여야 하지요? 구원이 필요한 자여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자의 능력과 성품과 본질이 설명이 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여러분은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이(paradigm shift)가 반드시 필요해요. 성경을 인간 중심으로 보게 되면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인가?’로 자꾸 관심이 쏠리게 되요. 그러나 성경을 하나님 중심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은 인간들을 통하여 어떻게 당신을 설명하시는가?’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성경은 후자의 관점으로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구원자 예수, 은혜의 하나님을 설명하고 그려내는 것이 이 역사와 인생의 목적인 것이기에 구원을 받을 자들은 구원을 받아야 할 자로 예수를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설명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 역사와 인생, 그리고 우주라는 공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라 했습니다. 캔버스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예수를 그려내십니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 백성만을(모든 존재 아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어떤 상태라는 것입니까? 구원을 받아야 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 즉 하나님 나라가 누구에 의해 어떤 희생을 전제로 성취가 된 것임을 그려내시기 위해 아담들의 입에 선악과를 물려서 이 죄악의 세상으로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자가 누구이며 왜 구원이 필요한지가 설명이 되니까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하지 않았을 때의 자기 자신들의 실체를 올바로 자각하고 ‘나는 죄인 중의 괴수가 맞고 그래서 마땅히 구원을 받아야 할 자입니다’라는 자기부인의 고백을 하는 자를 성도라 하는 것이고, ‘여기도 괜찮은데 왜 우리가 여기를 떠나는 구원을 받아야 해?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여기에서 유토피아를 세우자. 그리고 하나님에게는 그 유토피아 건설에 필요한 자원과 힘을 보태달라고 하자’라고 인간과 역사의 가치를 챙기는 자들을 지옥자식이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지옥 자식들까지도 이 역사와 인생 속에 직접 그려내시는 분입니다.
(롬9:21~23)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 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렇게 하나님은 지옥에 떨어질 자들도 미리 정하셔서 어떤 게 지옥자식인지를 그들의 인생이라는 캔버스 안에 그려 내십니다. 저는 지금 존 칼빈의 이중 예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진술을 그대로 읊어 드리는 겁니다. 그걸 굳이 이중 예정이라 부른다면 거기에 이의를 달 생각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 자신이 모든 것의 주라는 것을 만 천하에 공포하시기 위해 이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 필요했던 것이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기고만장하지 마세요.
(빌2:8~11)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분명히 나오지요? 이 역사와 우주, 그리고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심지어 땅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까지 주라 시인을 받으시는 데에 한시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의 비움과 예수의 죽음이라는 것은 예수가 홀로 다하셨다는 것을 강력하게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리고 이 만물의 역할이 종결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알아야 할 자들이 모두 알아먹었을 때에 이 역사와 인생과 우주라는 모델 하우스는 철거가 되고 오롯이 예수가 주인이 되고 예수만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가 가시적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안식의 나라인 것이며,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나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 성취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히1:10~12)
10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보세요. 모든 것이 다 낡아지고 결국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 예수입니다. 하늘과 땅을 비롯하여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낡아지고 급기야 갈아입혀져야 하는 소멸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지만 오직 주 만 영존하실 것이고 주 만 여전히 영원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이신 예수가 설명이 되면 그 나머지 설명용 도구들은 다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 역사가 두 개의 가치가 처절하게 싸우는 장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가치와 피조물들의 의기투합과 연합에 의한 바벨성이라는 가치와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예수라는 가치 앞에 모든 것들의 연합이 산산이 부수어지고 낡아져서 예수라는 가치만이 오롯하게 승리의 기호로 서게 된다는 그런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역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도 예수라는 가치와 인간이라는 가치가 전쟁을 벌입니다.
교회 안의 전쟁 중 가장 무서운 전쟁이 바로 그러한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인간들의 처음자리를 자각하게 하시고 확인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자기백성만 죄에서 구원하는 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무엇이라 했지요? 인간이 자신을 믿고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여 인간 자신들이 주인공이 되는 세상을 꿈꾸는 모든 것이 다 죄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열심히 공로를 쌓아서 하늘나라에 가서 상을 받겠다고 하는 사람도 다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본주의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과 관계없이 이 역사와 인간들이 내어 놓는 모든 것이(그것이 비록 선해 보이고 신실해 보인다 할지라도) 배설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 예수만이 있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빌3:2~9)
2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 할례 당을 삼가라
3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 당이라
4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사도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도덕과 윤리, 율법이라는 객관적 평가에 의해서는 거의 완벽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예수를 알고 나니 자신의 그 모든 것이 다 죄, 즉 배설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되자 그리스도를 얻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성경을 대하실 때에 죄라든지 구원이라든지 은혜라든지 이런 것들의 개념을 국어사전의 개념으로, 동화책 수준으로 이해를 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단순히 인간들이 합의하고 정의해 놓은 도덕과 윤리, 그리고 사회법이 요구하는 행위 규범을 잘 준수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피조물들이 자기들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모든 것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종적인 관계 속에서만 그 개념 성립이 가능한 것이지 인간들 사이에서의 횡적 관계에서는 기실 죄라는 개념이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의 죄가 인간의 횡적 관계 속에서 더럽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야기한 것처럼 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만 그 개념이 성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나 선이라는 개념을 참 잘못 알고 있어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의 이해득실의 결과로 그것들을 정의 한단 말입니다.
자, 그렇게 죄라는 것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종적 관계에서만 성립이 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들 사이에서 피조물에 의해 죄라는 것이 생산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게 가능합니까? 혹자들의 주장처럼 하나님이 죄를 만드신 것인가요? 아니면 또 다른 혹자들의 주장처럼 인간들이 자유의지로 죄라는 것을 선택한 것인가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역사와 인생이라는 것을 굳이 창조하셔서 묵시의 현실을 죄와 은혜와 구원 등의 소재 등을 사용하셔서 설명하고 계신 이유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 속에서의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할 것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없음에 불과했던 죽은 흙들이 하나님이 누리시는 모든 것을 함께 누리는 자리까지 올라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때 그들의 위상이 얼마나 엄청난지, 하나님은 노파심에서 역사와 우주까지 창조를 하셔서 ‘너희들이 어떻게 존재가 되었고 어떻게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는지 분명하게 알고오라’고 우리를 이 역사와 우주 속에 잠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자기들의 존재성과 주체성을 스스로 챙겨서 주장하는 것이 죄인 것이기 때문에 그 대단한 하늘의 존재들이 자신들의 존재의 뿌리를 확실하게 알지 못하면, 마귀가 제 분수와 제 자리를 모르고 하나님과 맞장을 뜨려고 했던 것과 같은 우스운 일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영원을 살 존재들을 이 역사와 시간, 공간과 우주 속으로 내려 보내셔서 그들의 처음자리를 확실하게 경험케 하시고 그들이 어떠한 은혜로 하늘의 존재가 된 것인지를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주시고 경험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캔버스는 철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와 인생은 이미 이루어진 것에 대한 이해와 설명용인 것이지 여기에서 행해지는 행위와 업적과 공로에 의해 결과가 도출되고 생산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서부터 출발을 시키시는 것이고, 애굽에서부터 출발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애굽은 죄악의 세상의 모형입니다. 애굽은 노아의 세 아들 중 저주를 받은 함의 후예들이 만든 나라이지요? 함은 덮으심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들의 대표 모형입니다. 덮으심의 은혜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 측의 자격과 조건에 의해 맺어지는 결과가 달라진다는 율법주의요 인본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인간들의 노력과 열심에 의해 인간들이 원하는 것이 차등 있게 주어지는 곳입니다. 그걸 마귀의 나라라고 합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애굽의 부추와 마늘과 고기였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이 자기들이 원하는 그런 것들을 더욱 풍성히 공급해 주는 그런 저급한 것인 줄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셔서 애굽에서 즐기던 것을 줄 양이었으면 뭐 하러 애굽에서 건져내십니까? 그냥 애굽에 놔두시고 애굽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리시면 되지요. 그런데 굳이 거기에서 끌어 내셨을 때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와서도 애굽의 생활을 그리워했단 말입니다. 그건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고도 구원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 40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 40년을 통과시키시며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들의 역사와 인생을 통하여 그림으로 그려서 설명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그들에게 다시 율법이 주어지고, 옛 사람들이 다 죽는 일과, 놋 뱀 사건과, 성막 짓기와, 모세의 죽음 등의 그림이 그들의 역사 속에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구원받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주인공이 되어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떼를 쓰며 하나님을 원망했지요? 그런데 그러한 것들은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만 충실하게 하면 얼마든지 얻어먹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잖아요? 마귀의 나라인 애굽에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자기들이 일한만큼 얻어낼 수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택할 때 그 곳을 애굽과 같다고 표현을 해 놓은 것입니다. 그 애굽에는 부추와 마늘과 고기 등의 자기들이 먹고 싶은 것이 다 있고,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살던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율법을 주지 않은 상태니까요. 성경이 광야의 이스라엘이 애굽의 부추와 마늘과 고기를 그리워했다는 것을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애굽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있는 곳이고 그들이 종살이만 충실하게 하면 그들이 원하는 그것을 얻어 낼 수 있는 그런 곳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고 보니 자기들이 원하는 것은 얻을 수가 없고 은혜에 의해 거저 만나라는 것이 주어지는데 그게 별로 탐탁치가 않은 겁니다. 그러나 그 만나야 말로 그들을 살릴 수 있는 하늘의 양식임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성도의 인생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종살이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사는 것을 죄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자들을 마귀의 세간이라고까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들은 그게 죄인 줄을 몰라요. 그래서 거기서 건져내 주었더니 자꾸 그리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게 죄인들의 본질적 속성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귀의 종들은 절대로 하나님 나라, 즉 약속의 땅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애굽이라는 나라의 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그려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도 애굽에서처럼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애굽왕 바로를 ‘똑같다’라고 선언해 버리신 것입니다.
(민14:22~23)
22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애굽의 풍요를 그리워하던 이스라엘을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않은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열 번만 하나님을 시험했나요? 아닙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열 번이라고 굳이 산술적 표현을 사용하시는 겁니까? 애굽에서 열 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았던 자가 누구입니까? 애굽왕 바로입니다. 당시 한 나라의 왕은 그 나라 전체를 대표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애굽 왕 바로는 애굽 전체를 모형하고 있는 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죄악의 나라, 마귀의 나라 애굽과 이스라엘을 똑같은 자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 번입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광야에서조차 애굽왕 바로처럼 개차반으로 살던 자들의 자아를 결국 죽여 버리시고 당신이 준비하신 안식의 땅으로 끌고 들어가시는 것이 이 역사와 인생이 그려내고 있는 그림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맡은 이스라엘이 끝까지 구원 받아야 할 존재로, 율법을 어길 수밖에 없는 마귀의 세간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발생되고 성취되었다는 것을 역사와 인생 속에 그려내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것이지, 어떻게 하면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취와 확장에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지침서나 교훈서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과 세상이 애굽의 모습으로, 어둠의 모습으로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열심만이 오롯하게 영광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도 못한 이스라엘에게 유익 운운하는지 아시겠지요? 말씀을 지키고 안 지키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현실 속에서 그려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애굽은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부터 미리 암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하나님 백성인 아담과 하와의 입에 선악과를 물려서 밖으로 쫓아내시는 것에서부터 구원이 무엇이며 은혜가 무엇인지를 그들의 인생과 그들이 엮어내는 역사를 통해 그려 내십니다. 선악과를 물고 마귀의 종이 되어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보암직도 하고(안목의 정욕) 먹음직도 하고(육신의 정욕)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이생의 자랑)’이 세상 것들을 추구하며 오직 자신들의 ‘하나님처럼’의 삶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아담들의 무화과나무 잎사귀 옷을 손수 찢어 버리시고 당신 아들의 피로 짠 의의 흰옷을 입혀내시는 그 은혜의 그림이 에덴동산에서부터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 은혜의 필연성을 그려내실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형하고 있던 이스라엘이 어떤 지경에 빠져 있었나요? 빛이신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두움들이었습니다.
(요1:5,10-11)
5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역사와 인생의 본질적 내용이신 예수가 이 땅에 오셨는데 세상이 모두 구원이 필요한 어두움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건 예수라는 제목의 하나님의 그림의 배경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림은 늘 거기에서부터 출발을 하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이 없음인 것이니까요. 그 없음에서 어떻게 있음이 창조가 되는지를 그려내는 것이 역사이고 그 그림의 제목이 ‘예수’인 것입니다.
또 반복합니다. 하나님은 그 어두움 중에서 당신이 선택하신 어떤 자들에게 복을 부으셔서 그들의 눈과 귀를 열어 그들의 처음자리를 확인케 하시고 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예수에 의해서만 말미암게 되는 것인가를 그려 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맡음’에서의 ‘로기온’인 것입니다.
(마13:14~16)
14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이렇게 자신들의 처음 자리를 온전하게 확인시켜 주시기 위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 율법이며 할례였던 것입니다.
(롬3:18~20)(표준 새 번역)
19우리는,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에게 말한 것임을 압니다.
그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20그러므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그렇지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처음자리, ‘난 죄인이며 구원이 필요한 자가 맞습니다.’라는 것을 확인시키시기 위해 주신 것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약에서는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이런 결론이 나는 겁니다. 구약의 율법이나 할례, 그리고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설명하며, 최종적으로 성취되는 하나님 나라의 모든 원인과 결과를 그리로 집중시키기 위한 도구였던 것이지 그것을 지켜서 하나님께 올라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출애굽 광야시대에 만나와 안식일로 설명을 해 주었던 것입니다.
(요6:48~51)
48내가 곧 생명의 떡 이로라
49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 이니라
51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 이로라 하시니라
보시다시피 출애굽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거저 내려왔던 만나라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은혜의 하늘 양식을 모형 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의 양식이라고도 표현을 하지만 ‘말씀’이라고도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까 만나와 예수와 말씀은 모두 같은 것을 설명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만나에만 집중해 보자고요. 어떻게 그 만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그려내고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6일간 일을 하게 하십니다. 어떤 일입니까? 자신들의 힘으로 만나를 끌어 모으는 일입니다. 만나는 구약시대에 율법과 할례와 제사로 주어졌던 하나님의 말씀을 모형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안식일에는 일을 하면 안 됩니다. 그 일은 다름 아닌 만나를 주워 담으러 나가는 일이었습니다. 그걸 신약 식으로 바꾸면 만나, 즉 말씀, 아니 예수를 자기 힘으로 붙들려 하는 모든 노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걸 그림으로 연상해 보면 이러합니다. 안식이라는 어떤 지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식을 목표지점을 향해 반드시 가야 할 어떤 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식으로 가는 길에 징검다리가 놓입니다. 다름 아닌 만나입니다. 그런데 안식은 그 만나를 쌓고 모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만나를 자기 힘으로 끌어당기려는 시도를 중단 할 때 비로소 당도할 수 있는 목적지입니다. 6일간 죽어라고 자기 힘과 지혜를 발휘하며 그 만나를 끌어 모을 때에는 안식이 요원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멈추자 안식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이라는 것은 자기가 예수를 붙들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손을 쉬고 예수의 은혜(하나님의 언약)를 신뢰할 때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안식이라는 것을 만나와 안식일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 안식일에 자기 힘으로 만나를 끌어 모으는 시도를 하게 되면 그는 죽습니다.
(출16:25~30)
25모세가 가로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그것을 들에서 얻지 못하리라
26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 칠일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27제 칠일에 백성 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2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 하려느냐
29볼 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제 육일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제 칠일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30그러므로 백성이 제 칠일에 안식 하니라
여기에서 중요한 구절이 28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끌어 모으는 일을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지요? 만나를 통하여 율법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16:4)
4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만나는 곧 율법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안식일에는 그 만나를 모으러 나가면 안 됩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안식은 율법을 지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안식일에 만나를 모으러 나가게 되면, 쉽게 말해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와 있다고 하는 자가 율법을 지켜 그 안식을 획득하겠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만나는 안식일로 가는 징검다리가 맞지만 그것을 열심히 먹고 에너지 삼아 안식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힘으로 쌓아서 획득하는 만나로는 절대로 안식에 들어갈 수가 없음을 알고,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만나 자체의 힘이 우리를 안식으로 들어가게 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 만나인 것입니다.
그것을 시내 산에서 주어진 율법으로 설명을 해 보자고요. 성경이 만나를 율법과 말씀에 비유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주어집니다. 유월절에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 그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인 오순절에 율법이 주어집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예수에 관한 기록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과 선지자가 당신 자신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시지요? 그래서 구약의 오순절에는 율법이 주어졌지만 신약의 오순절 날 하나님의 교회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것입니다.
둘의 차이는, 구약의 율법은 인간들의 힘으로 지켜내려는, 붙들려는 율법이었고, 신약의 오순절에 주어진 하늘의 율법은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선물로서의 율법이었다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둘 다 율법인데 하나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을 살려내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행위로서의 율법은 사람을 죽였고 신약의 은혜로서의 율법, 그리스도는 사람을 살려 내더라는 것입니다. 역사와 인생은 그 은혜의 현실을 그려내는 캔버스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이 만나를 밟고 안식일로 향했지요? 그런데 그 만나는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만나를 끌어 모으고 획득하여 그것을 힘으로 삼아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어지는 만나 자체의 은혜의 힘으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를 알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만나는 율법이래요.
그렇다면 율법의 역할이 뭡니까? 잘 지켜서 하나님을 감동시켜 너희들의 힘을 보태 안식의 땅으로 들어가라고 주신 것입니까? 율법은 만나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율법을 지켜서 안식의 땅,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보혈, 우슬초의 도움으로 거저 들어가게 되는 것임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 것이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롬3:20) 그럼 죄만 깨달으면 되나요? 아닙니다. 그러한 참담한 현실을 덮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대안까지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첫 번째, 계명의 돌 판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 부르는 인간들의 죄를 폭로해 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자신들이 추구하고 원하는, 애굽의 부추와 마늘과 고기를 제공해 주는 요술램프의 지니 정도로 취급을 해버리는 인간들의 인본주의 사상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예수를 설명하는 것이고 예수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으로 주어진 것인데 인간들은 그 율법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능력을 자랑하고 싶어 하고 그로 말미암는 반대급부까지 노리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걸 죄라 합니다. 그곳에서 심판이 일어나지요? 율법의 돌 판이 깨져 버립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도륙사건이 벌어집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그 누구도 안식의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 자리를 막아선 이가 모세지요? 모세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모두다 도륙당해 죽어야 할 자들을 살려 냅니다.
그리고는 두 번째 돌 판이 그들에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 돌 판이 법궤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가나안 정복 전쟁이나 그 어떤 전쟁의 선봉에는 항상 그 법궤가 앞서게 됩니다. 그 법궤가 앞장서지 않는 전쟁은 백전백패입니다. 그건 이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의 중보로 살아나게 되고 두 번째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그 율법을 볼 때마다 무엇을 상기하고 환기해야 했을까요? 우리는 우리 힘으로 율법을 지켜 살아난 것이 아니라 모세라는 인물의 중보로 거저 살게 된 것임을 상기해야 했습니다.
그게 진짜 율법의 순기능이며 올바른 역할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안식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율법을 잘 준행하고 지켜서 들어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그들의 실체를 폭로시키는 데에만 사용이 된 것이고 그들을 안식의 땅으로 들여보낸 것은 모세라는 중보자의 목숨을 담보로 한 기도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보자 모세가 죽자 그 중보자 모세가 모형하고 있던 예수라는 이름의(히브리어로는 여호수아)인물이 법궤를 앞세우고 은혜로 요단을 건너 안식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안식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백성을 살려 달라고 했던 모세가 안식의 땅 앞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안식의 땅 바로 앞에서 죽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저주받아 죽어야 할 어두움들을 살려내신, 율법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명확하게 모형 했던 인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모세라는 인물이 모형하고 있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그분이 지신 십자가의 필연성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율법이 모세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지 모세를 통하여 의무사항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모세가 이스라엘을 향해 얼마나 분을 내며 율법을 강조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율법을 통하여 모세를 설명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제가 지금 오늘 본문의 ‘에피스튜떼산 타 로기아’ ‘말씀 맡음’을 설명하고 있다는 걸 놓치지 마세요.
바로 그 그림이 그대로 신약으로 넘어와 예수 그리스도와 이스라엘로 다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여 그들이 원하는 세상 적 안식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비롯하여 수많은, 새로워 보이는 계명들을 던지셨습니다.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음욕만 품어도 간음한 것이라고도 하시고, 형제를 향하여 라가라 부르는 자는 지옥에 갈 것이라는 무서운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 십자가를 지고 죽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안식의 나라 하나님의 교회가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잘 지켜서 나를 좀 기쁘게 해 보라’는 차원에서 주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아담 군상들의 무력함을 폭로해 버리시기 위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을 설명하시기 위한 징검다리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최초의 하나님 백성인 아담과 하와의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다가 선악과나무를 심어 놓으셨을까요? 왜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 바벨론에다가 넣으셔서 우상을 섬기는 자로 살게 하십니까? 왜 하나님이 의인 롯을 소돔과 고모라로 들여보내십니까? 왜 하나님이 굳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들여보내세요? 왜 이스라엘 일 세대가 광야에서 다 죽게 만드시지요? 좀 더 나아가 볼까요? 하나님은 왜 묵시 속에 완료된 하나님의 교회를 이 마귀의 세상으로 내려 보내십니까?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일부러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백성들을 죄에서부터 출발하게 만드십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역사와 인생 속에 그려내시는 예수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작극이라는 말입니다.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갈4:1~5)
1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보세요. 예수님을 율법 아래 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해 내신 것처럼 우리 또한 죄 된 세상에 선악과 입에 물려 내려 보내셔서 은혜가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서 때가 되면 하나님 나라로 다시 불려 올리시는 것이 이 역사가 담고 있는 그림인 것입니다. 종노릇에서 시작해야 자유와 해방과 구원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통하여 가장 먼저 고백해야 하고 가장 마지막에 고백해야 하는 것이 동일하게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면 언제든지 마귀의 세간일 수밖에 없는 저이니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걸 믿음이라 합니다.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은혜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안식에 관한 말씀을 주시고서 이렇게 경고 하시는 것입니다.
(히4:1~2)
1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안식,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 말씀이 우리에게 떨어졌습니다. 그 말씀은 예수이며 만나이며 구약의 율법이기도 합니다. 그때 그 말씀을 예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을 공고히 하는 것으로 결합시켜 내지 못하는 이는 썩은 만나 한가득 품에 안고 안식의 반대편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말씀은 믿음을 공고히 하는 데에 사용되는 것이지 자신의 행위를 성숙 시키는 데에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믿음이 뭡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을 신뢰하고 나 자신의 자격과 조건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걸 쉼이라고 합니다.
(히4:10)
10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여러분에게 이 쉼이 있냐는 것입니다. 이 자유가 있냐는 것입니다. 이 안식, 복음에서 말미암는 이 안식이 있는 분들은 자신이 입고 있는 무화과나무 잎사귀 옷의 상대적 평가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재물이 많지 않아도, 명예가 없어도, 자식이 좀 속을 썩여도, 남들의 평가가 그리 훌륭하지 않아도,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만을 붙들며 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안식을 아는 이들이며 그들이 안식에 들어간 이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만나가, 율법이, 말씀이 우리의 처음 자리를 확인케 하는 것이 맞다면 말씀을 전하는 자가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설교의 핵심이 뭘까요? 어떻게 하는 게 설교를 잘하는 것이지요? 인간들의 처음자리를 낱낱이 폭로시켜서 ‘내가 죄인 중의 괴수가 맞습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없으면 저는 지금이라도 지옥에 떨어져야 할 그런 사람입니다.’라는 통곡을 하게 만드는 설교가 잘하는 설교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이러한 안식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한 뒤에 갑자기 말씀 이야기를 덧 붙여 놓았던 것입니다.
(히4:12~13)
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안식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받아 믿음으로 결합시켜야 한다고 웅변을 하던 히브리서 기자가 갑자기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다는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뭡니까? 만나, 율법,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요한계시록에서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그 검), 즉 수술용 메스가 되어서 환부를 다 도려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관절과 골수, 혼과 영까지 다 발라내어 그 속에도 죄가 들어 있다는 것을 폭로시켜 내는 게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믿음으로 화합하여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하고 십자가 붙들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말씀을 통하여 신앙생활을 통하여 부인 된 자아, 아니 부인 될 수밖에 없는 자아,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자아를 확인하고 그 속을 채우고 들어오신 예수를 찬송하고 감사하며 기뻐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걸 안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죽음을 안식이며 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옛 자아의 죽음.
(사57:1-2)
1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2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이렇게 죽음은 평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건 단지 육신의 죽음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육의 죽음은 결국 옛 자아의 죽음의 완성지점인 것이거든요. 그 전에는 절대 못 죽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부인된 자아를 열심히 확인하시고 예수를 믿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한 것입니다. 그 말은 열심히 선행을 쌓아서 안식에 들어가라는 말이 아니라 ‘제발 예수를 믿어라’라는 하나님의 외침인 것입니다.
자고로 역사란 게쉬테와 히스토리아로 나누어집니다. 게쉬테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이고, 히스토리아는 서술자의 성정이 담겨있는 글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의 역사에 게쉬테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것 인가에 대해서 저는 매우 부정적입니다. 자기를 신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인간들에 의해 기록된 역사라는 것이 과연 객관적인 역사일 수 있겠습니까? 아담들에게 있어서 객관이란 원래부터 주관을 좀 더 합리적으로 쓰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렇게 히스토리아로 기록된 역사를 읽어 낼 때에도 역시 주관적으로 읽어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담들은 성경도 게쉬테로 읽지 못하고 히스토리아로 읽습니다. 성경은 ‘예수’라는 팩트를 가지고 ‘게쉬테’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인간들이 자신들의 도덕과 윤리와 이성을 가입시켜 히스토리아로 읽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보시던지 설교를 들으시던지 ‘예수’로 결론을 내지 못하시면 아직 신자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인생 속에서 불신자라는 그림을 그려내고 계신 것일 지도 모릅니다.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세요. 예수를 믿으세요. 설교를 들어도 말씀을 읽어도 여전히 ‘나’로 결론이 나십니까? 통곡하세요. 부르짖으세요. 그게 힘쓰는 겁니다.
지난주에 멀리 사시는 어떤 인터넷 성도께서 이런 메일을 주셨습니다. 딸이 장애가 있는가 봐요. 딸을 목숨처럼 사랑하는 아빠로서 너무 가슴이 아파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를 드렸답니다. 그런데 딸아이가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아요. 나중에는 슬슬 원망이 생기더래요. 그래서 이렇게 외쳤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면서 왜 죽어 있는 하나님처럼 내 기도를 들으시지 않느냐’고요. 그렇게 기도를 하고 나서 가만히 묵상을 하는데 이런 깨달음이 왔답니다.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살아계셔야 하고 살아서 내 소원을 들어 주어야 한다고 외치는 자기가 평소에는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대우를 안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평소 삶은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면서(죽은 하나님)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어내려 할 때에만 ‘하나님은 살아계셔야 하고 자기를 위해 당신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모두의 모습 아닌가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은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의식하고 사시나요? 아니면 살아있는 나를 위해 내가 필요할 때에만 나타나서 나를 도와주어야 하는 박제가 되어 버린 가짜 신을 믿고 계신가요? 말씀을 통하여, 역사를 통하여, 인생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세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들으세요. 그들이 말씀을 맡은 자요, 그들이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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