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37)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은바리라이프 2013. 10. 7. 12:07

로마서(37)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롬3:9~20)

9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 하였느니라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9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우리는 지난주까지 로마서 3장의 앞부분을 모두 공부했습니다. 바울은 시편 51편의 다윗의 고백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맡는다는 것의 의미를 유대인들에게 설명을 합니다. 하나님은 마치 맑은 물인 양 잘 가라앉은 흙탕물을 확 휘저으셔서 인간의 죄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역사와 인생을 통하여 설명하시는 분이라 했지요? 그러한 캔버스의 역할로 다윗이 쓰였던 것처럼 유대인들도 율법과 할례를 가지고 그렇게 사용되었음을 사도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지난주까지의 설교 두 편을 듣고 우리 교인 중 한 분이 이런 글을 써서 제게 보내 주었습니다. 본인의 허락을 받아 여러분께 일부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원수 사울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두 번이나 흘려보냈다. 그는 충분히 죽일 수 있었고 반드시 죽여야만 했던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 너무나 멋지게 원수를 용서해 버린 것이다. 그런 다윗의 모습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는 타이틀에 자격을 주고도 남는다. 사람들은 그런 다윗의 모습을 칭송하며 본받길 원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성화라고도 한다.

그런데 그런 원수 같은 사울을 참아낸 다윗이 우리야를 죽인다.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울을 용서한 그가 자신을 위해 전장에 나간 우리야를 죽인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사건 같지만 그것이 인간이다. 내게 원수 같은 이를 참아내고 용서하는 것은 결론적으로 나를 빛내는 일일 수 있다. 선한 것을 추구하고 착한 삶을 살아서까지 자신의 가치를 빛내고 싶어 하는 우리 인간들의 의지는 그야말로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에 어떠한 역경도 이겨낼 수 있다. 원수를 살려주는 것뿐이랴.

그러나 나의 죄를 덮기 위해 발각될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일에 있어서 사람은 남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칼같이 냉정하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는 영웅 혹은 철저한 희생양의 자리에 섰을 때에 발휘되던 그 인내심과 자비는 볼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둘러대는 그 명분 또한 가관이다.

다윗은 우리야를 교묘하게 죽였다. 참으로 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사울을 용서한 다윗보다 우리야를 죽인 악한 다윗에게 마음이 간다. 사울을 용서한 다윗에게는 예수님의 죽음이 마치 소용이 없었던 것처럼 다윗의 곧은 의지와 자비와 용서가 빛이 나지만 우리야를 죽인 다윗은 그의 모든 행위가 삭제되고 그 위에 오직 예수의 십자가만이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서야 비로소 그는 온전히 선악과를 따먹고 숨어있는 자신을 자각하고 하나님이 피 흘리게 하신 희생양의 옷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방법이 없는 자, 은혜를 폐하지 않는 자, 십자가의 죽음이 헛되지 않은 자로 인식이 된 것이다. 원수를 용서한 다윗, 그가 빛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충실한 부하를 교살한, 그렇게 악한 그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순간이다.”


인간의 실존과 은혜의 복음을 너무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이의 글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하나님처럼의 삶을 추구하는 아담 군상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의 성숙과 변화가 인간 자신 안에 사유가 되고 쌓여 갈 수 있는 것이라면 원수를 두 번이나 살려준 성숙한 다윗이 그 다음 단계에서는 더욱 더 훌륭한 성자의 모습으로 도약을 해 있어야 맞지 않나요? 


그런데 원수를 용서한 다윗이 어떻게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부하의 아내를 범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아무 죄가 없는 충신을 교살을 하는 자로 추락을 하지요?


인간은 자신의 가치와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던질 수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나’라는 존재의 이름을 높이고 인간의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까지도 불사를 수 있는 것이 하나님처럼의 삶을 추구하는 인간의 보편적 실존입니다. 내가 빛나기 위해, 나라는 존재를 향한 세상의 칭찬과 인기와 좋은 평판을 챙기기 위해, 원수 정도가 아니라 원수 할아버지라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없음이라는 자신의 실체를 감추기 위한 아담들의 몸부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자기 감추기의 달인들이 자신의 부끄러움이 발각이 될 상황을 맞게 되면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요? 자신의 더러움을 들킬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요소들을 제거해 나갑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모형하고 있었던 모든 이스라엘의 대표요 오실 메시아의 그림자였던 다윗을 그 자리에서 발가벗겨 버리십니다. 거기에서 인간 다윗의 왕위가 삭제되고 하나님의 왕 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게 말씀을 맡은 다윗의 역할이었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자리를 차고 앉아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 하는 모든 보편적 아담 군상들의 실체와 하나님의 왕 되심을 그려내신 하나님의 작품이었습니다. 그 다윗은 바로 ‘나’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다윗의 성숙에 관심이 있으셨던 것이 아니라 다윗을 통해 드러나게 되는 하나님 언약의 계시, 즉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 죽음의 필연성과 그것을 홀로 모두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시는 것에 관심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게 역사와 인생의 목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에베소서 1장에서 수도 없이 확인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성도를 당신의 찬송이 되게 하시려고 창조를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일이 찬송이 되어야지 인간과 인간이 행한 일이 찬송을 받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들의 자존심을 끝까지 챙기려 합니다. 심지어 하늘나라에 가서도 상을 받겠다고 들 합니다. 상이라는 게 뭡니까? 이렇게 남과 다르게 열심히 노력하여 훌륭한 업적을 쌓은 나를 차별적으로 좀 칭찬해 달라는 것 아닙니까? 그게 찬송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져야 할 찬송을 자신도 좀 나누어 갖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게 돌려질 찬송을 그 누구와도 나누지 않는다,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

역사와 인생은 오직 하나님만을 찬송하는 자리로 밀려 내려가야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가리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부르십니다.

거기에 ‘합한’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형용사가 아니라 ‘카타’라는 전치사입니다. 그 말은 다윗이 너무 훌륭하게 성화를 이루며 살아서 하나님 마음에 쏙 드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말이 아니라,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이리저리 사용되었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 ‘카타’라는 전치사가 ‘~을 따라’라는 의미의 전치사거든요. 


하나님은 다윗이라는 한 인간을 통하여 당신의 마음과 뜻을 담아내셨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이리저리 사용되었던 것이고요.


성경은 그렇게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로 쓰이는 자를 ‘정직하다’라고 합니다. 그 말은 거짓말을 안 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계시해 내는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왕상15:11)

11아사가 그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그려내는 인생을 정직한 인생이라고 하며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에 장악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만을 꼭 의지하게 되는 그 상태를 온전함이라고 합니다.


(왕상15:3)

3아비얌이 그 부친의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 마음이 그 조상 다윗의 마음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나


보세요. 성경이 자신이 모태 중에서조차 죄인이었으며 이 육신을 벗는 날까지 죄인일 수밖에 없어서, 자신은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우슬초와 꺾으신 뼈의 은혜만을 의지하지 않으면 영원히 멸망 받을 자임을 확실하게 깨달은 다윗을 온전한 자라고 칭한단 말입니다.


솔로몬은 어때요? 늙어 갈수록 성숙한 모습을 보였나요? 늙어갈수록 쓰레기가 되어 갔습니다. 심지어 성전에 우상을 세우고 우상을 예배 하는 자로 폭로가 됩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늘의 참 성전을 완성하는 하늘의 지혜의 모형으로 살다가 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여디디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고 부르셨고, 심지어 당신의 아들이라고까지 부르셨단 말입니다. 뭘 잘해서요? 아니요. 하나님의 언약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온전하게 쓰였기 때문에요.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18절 이후로 장황하게 나열하고 있는 모든 인간들의 마귀 적 실체가 ‘너도 죄인, 나도 죄인, 우리 모두 죄인’의 양태로 결론지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열거한 것처럼,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하나님을 목숨 걸고 섬긴다고 하는 유대인이나, 율법은 받지 못했지만 양심대로 살아서 인간들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헬라인이나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율법을 주어도 그걸로 죄를 짓고 양심을 주어도 그것으로 죄를 짓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죄 론의 결론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어서 하나도 쓸모가 있는 이가 없다’로 내려 버립니다. 이게 사도 바울이 1장 18절에서부터 3장 20절까지 그 긴 설명을 통하여 말하려 했던 메시지의 핵인 것입니다. 인간들의 모든 선, 깨달음, 의, 같은 것들이 다 쓸모없는 배설물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인간 모두를 죽은 자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모든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위와 생각까지도 다 악으로 부정해 버리니까요. 악이라는 것은 산 자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예수님께서도 사람에게서 나오는 모든 생각의 실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7:21~23)

21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2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23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이것이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의 실체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생각까지도 다 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 산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가 부어지기 전까지는 아무리 생각을 하고 움직이고 일을 한다고 해도 다 죽은 것입니다.


왜요?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내가 생명이고 내가 진리고 내가 길이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생수라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요한복음 1장에서도 예수 안에만 생명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수 밖은 다 뭐라는 거지요?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만 빛이고, 예수만 생명이며, 예수만 길이고, 예수만 진리이며, 예수만 생수라는 것은 

예수 이외의 모든 것이 다 어두움이고, 죽음이며, 낭떠러지이고, 거짓이며, 청산가리 탄 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예수 이외의 모든 것을 ‘죄’라 합니다.


그 죄가 거짓에서, 낭떠러지에서, 어두움에서, 죽음에서 살아올라오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난 어두움이고, 죽음이고, 낭떠러지에 떨어진 자며, 거짓에 속한 자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빛이시고, 생명이시고, 길이시고, 진리이신 예수의 의를 붙드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빛을 조금 섞는다고 빛이 될 수 없어요. 청산가리 탄 물에 생수 조금 섞는다고 그게 생수 되지 않아요. 전적으로 다 비우고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잘 들어보세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생명력으로부터 차단이 된 그 상태를 죽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서 생령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생기가 빠져나간 그 상태는 죽음이 맞지요?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이 된 것입니다. 그 상태를 노아의 방주 사건에서는 하나님의 신이 떠난 상태로 표현을 합니다.



(창6:3)

3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여기에서 ‘신’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생기’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 ‘루아흐’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떠난 상태를 육체라고 하고 그 상태가 정녕 죽은(무트 타 무트) 상태인 것입니다. 에스겔서에서는 그 상태를 이미 죽어 먼지가 풀풀 나는 마른 뼈로 묘사를 하고 신약은 그 상태를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라 표현을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아담들이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주체성과 존재성을 챙겨 보겠다고 선악과를 따먹고 분연히 일어선 상태, 즉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상태를 죽었다고 하고 ‘난 하나님 앞에서 없는 자, 죽은 자여야 하는 것이 맞네요.’하고 자신을 부인하는 자를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건 다른 말로 ‘난 하나님으로부터 성령, 즉 생기를 선물 받지 못하면 존재일 수도 없는 자’라는 것을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이 성도의 본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성도를 가리켜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말은 율법지킴, 즉 인간의 행함과 됨됨이와 열심과 노력과 자격과 조건이 인간의 결국을 좌지우지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게 되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임을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이 세상 아담 군상들의 실상을 낱낱이 폭로한 뒤에 이렇게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롬3:19~20)

19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율법을 왜 주셨다고 해요? 모든 자들이 다 죽어 있는 자들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모든 인간은 에덴동산의 아담 안에서부터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맞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죽은 자들은 생기, 즉 성령이 임할 때에만 산 자가 됩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교회에게만 내려 왔습니다. (교회만 산 것입니다.)

그리고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예수에 대하여 교훈을 하신답니다. 


그러면 생기를 다시 부여받고 산 자가 된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 어떠한 것이겠습니까?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예수가 누구신지 알아먹는 자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나를 포함한 이 모든 세상이 다 죄의 상태, 죽은 상태이며, 그들이 합의하여 만드는 의는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며, 하나님이 당신 아들을 죽여 만들어 내신 하나님의 의만이 우리의 살 길이며, 

그들만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를 산 자라합니다.


그렇다면 그들 이외에 모든 사람은 여전히 죽은 상태가 맞지요? 

그들은 단 한 번도 산 자인 적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나면서부터 죽은 자로 태어나 죽은 자로 이 세상을 떠납니다.


중요한 것은 단 한 번도 산 자인 적이 없었던 자들이 도덕이나 윤리나 선행이나 구제 등의 일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령에 의해 산 자가 되었다는 하나님의 백성들보다 더 훌륭한 모습으로 인생을 그려내는 이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가난한 삶, 청빈한 삶, 섬기는 삶, 봉사의 삶, 구제의 삶을 사는 이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한 번도 산 자인 적이 없는 그들 속에서 그 행위가 나왔다니까요.


그런데 그들은 다 죽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에게서 나오는 선행이나 도덕지킴이나 윤리 행함 등을 가치 있게 여겨 주실까요? 

하나님이 죽은 시체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옳아 보이는 행위라도 카운트 하실 것 같으세요?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성령 받지 못하고, 한번도 산 자인 적이 없는 사람들도 행할 수 있는 그걸 성숙이라고 하고, 기독교의 목적지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게 되면 성화라고 가르칩니다.

기독교의 성화는 그게 아닙니다. 오직 믿음 있는 자만 행할 수 있는 그걸 하는 걸 성화라고 합니다.

한번도 산 자인 적이 없는 사람들도 행할 수 있는 그걸 하나님은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건 인간이면 누구나 다 추구하게 되는 기본적인 겁니다.

그거 하지말라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다 추구하게 되는 그거, 기독교이면 더 민감하게 해야죠.

더 열심히 하세요. 불교인들보다 더 착하게 사시고, 구제 섬김 더 하세요.

그런데 그걸 성화라고 하면서 성도가 예수 믿으면 이렇게 변해야 한다고 하면 안됩니다. 

기독교가 착각하는 겁니다. 그건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잘하는 것들이에요.


여러분, 인간들은 죽어서까지 화장(make up)을 하는 존재들입니다. 왜 그래요?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관 속에 들어 있는 시체에게도 화장을 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역사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존재들의 삶이 바로 그러한 모습이에요. 다 죽었어요. 다 죽었는데 그 죽은 시체들이 자기들 얼굴에 열심히 화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도덕으로, 윤리로, 사회참여로, 선행으로, 구제로, 명예, 인기, 재산 등으로요. 죽었는데 산 자인 척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선악과 따먹은 죽은 흙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창세전에 선택이 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성령이 찾아오세요. 그리고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확실하게 가르쳐 주세요. 그리고는 그들의 골수와 관절까지 후벼 파서 뼛속까지 죄인인, 다른 말로 뼛속까지 죽어있는 그들의 실체를 보게 해 주세요. 화장을, 무화과나무 잎사귀 치마를 확 벗겨 버리신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어떤 고백이 나올까요? ‘하나님 살려 주세요. 하나님 긍휼을 베풀어 주세요. 하나님의 의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그 의의 옷 입혀주세요.’라는 고백이 나오겠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어줍지 않게 떡칠을 해 놓은 그들의 화장을 낱낱이 벗겨 버리신단 말입니다. 


사울을 두 번씩이나 용서하며 ‘기름부음 받은 자는 이 정도는 살아 줘야지’하며 자신을 기특해 하던 다윗에게 찾아가 그의 실체를 확 뒤집어 까 버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열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교회라는 집단이 죽은 자들이 합의하고, 정의하고, 추구하는 시체 화장놀이를 하면서 성숙이니 성화니 하며 꼴값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도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정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하늘의 성숙일까요?


우리는 지금 성숙과 성화를 그렇게 정의하고 있잖아요? 어려운 일이 와도 참고, 원수도 용서하고, 이웃을 섬기고,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도덕과 윤리를 잘 지키고, 술 담배도 끊고, 뭐 그런 걸 성화라 하지 않습니까? 그건 시체들이 더 잘하는 거잖아요?


적어도 믿음에 의한 성화는 그러한 시체 화장놀이와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 안 드세요?

아니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일어나는 성숙이 아내에게 폭력 휘두르지 않고, 술 담배 안하고, 구제에 힘쓰며, 사회법이 금하는 나쁜 일 안하는 정도라면 예수 믿기 전에 이미 그렇게 살고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변해야 하지요?


성화라는 말은 성경에 없어요.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인데, 굳이 그 단어의 의미를 풀어보면 그것은 말 그대로 거룩한 이와 방불한 자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화는 지금의 상태에서 조금 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예수’가 되는 것을 성화라 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죽은 시체에 불과한 인간이 예수가 될 수 있지요? 

그가 죽은 자가 될 때, 질그릇이 될 때, 비워진 그릇이 될 때, 쉬운 말로 죽을 때, 보배이신 예수가 담겨 연합의 상태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화했다라고 해요. 


그러니까 성화는 ‘저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예수님의 의가 아니면 저는 죽은 흙에 불과 하오니 예수의 의를 제게 베풀어 주옵소서.’하고 믿음을 의지하는 것을 말하고 그러한 고백을 하는 이를 성화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화는 내가 얼마나 예수의 의를 덜 의지해도 되는 훌륭하고 기특한 사람이 되어 가느냐로 설명되고 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친구와 다투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고, 어른을 공경하며, 사회 규범을 잘 지키고, 남의 것을 탐내지 않으며, 질서를 지키고, 몸에 해로운 것을 금하라는 것은 온 세상 초등학교 도덕책에 공통적으로 다 들어가 있는 내용입니다. 인도에도, 네팔에도, 터키에도, 아프가니스탄에도, 똑같은 도덕과 윤리가 존재합니다. 


종교와 인종이 다르고, 역사와 지형이 다르고, 문명과 문화가 달라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같은 도덕과 윤리와 착함이라는 것이 있어왔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 도덕과 윤리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하고 변하기도 해요. 그런데 왜 굳이 믿음이라는 게 필요하겠느냐고요. 온 세상이 믿음이 없이도 열심히 훌륭하게 잘 해낸 일들 아닙니까?


여러분, 성도에게 있어서 성화는 분명히 있습니다. 성도는 복음과 무관하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복음에 참여되는, 말씀을 맡은 자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시체들도 살아낼 수 있는 그런 시체 화장놀이의 차원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얼마만큼 예수의 의를 의지하느냐로, 자기가 부인되어지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모범생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아니면 살 수 없는 자로 밀려 내려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자신의 행위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자기 인식과 올바른 하나님 인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진짜 겸손한 성도의 행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때 진짜 헌금이 나오고, 진짜 섬김이 나오고, 진짜 구제가 나오고, 진짜 예배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온다고요. 


그런데 꼭 얼치기로 배운 인간들이 다른 이들이 헌금하고, 구제하고, 봉사하고 하는 것까지도 자기 의를 쌓는다고 비아냥거린다니까요. 자기가 하기 싫으니까 남이 하는 것까지도 폄훼를 해 버려서 자기의 불성실함과 게으름을 합리화시키고 정당화 시키려는 악한 의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장악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부터 고민하시고 생각해 보시란 말입니다.


여러분이 경험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인간의 행위나 변화나 성숙을 외치는 이들이 뭐 대단하게 변하지도 않아요. 제가 14년 전에 미국으로 오면서 아주 감명 깊게 보았던 광고가 어떤 회사의 보일러 광고였습니다. 아주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밤에 며느리가 남편에게 ‘여보 아버님 댁에 보일러 한 대 놔 드려야겠어요.’하고 젖은 목소리로 안타까워하는 그런 광고였습니다. 아들보다 먼저 시 아버지를 생각하는 며느리의 모습, 너무 멋지잖아요? 


작년 겨울에 홍콩 집회를 마치고 한국 집회를 인도하러 가서 한국 TV를 봤는데 14년 전 그 며느리가 아직도 ‘여보 아버님 댁에 보일러 한 대 놔 드려야겠어요.’하고 있었습니다. 14년 동안 말만 한 거예요. 남편은 매번 거기에 속는 거고요. 마음이 있으면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몸이 움직이는 겁니다. 


그런데 입만 열면 성화, 입만 열면 변화, 입만 열면 성숙, 하는 이들을 보면 말만 해요.

아니 때론 멋지게 하는 흉내도 냅니다. 원수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준 다윗이 무색할 만큼 번드르르한 선행도 하고 열심도 부리는데 결정적으로 자기를 무시하거나 자기를 부정하는 일이 발생하면 우리야가 아니라 우리야 할아버지라도 다 죽여 버려요. 그게 시체 화장놀이인 겁니다.


여러분, 자신의 실존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인간이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게 무엇인지 아세요?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부정당하는 거예요. 

율법을 받고 전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착하게 살던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을 죽였지요? 

메시아라는 사람이 그렇게 착하게 살고 있던 자기들을 ‘착한 사람,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소위 성숙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죽였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그 성숙한 모습을 회칠한 무덤, 시체들의 화장놀이라고 무시를 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들이 무시를 당하면 시체들은 참지를 못합니다. 좀비처럼 다 일어나 하나님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아 살아난 자들은 어때요? ‘맞습니다. 제가 죄인 중의 괴수 맞습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고 그동안 제가 내어 놓은 모든 일들이 다 배설물입니다. 그래서 저에게 예수님의 의가 필요합니다.’하고 자기부정의 고백이 나온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산 자들은 ‘난 죽은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고 죽은 자들은 ‘난 산 자인데 왜 죽었다고 하느냐?’고 하나님을 향해 돌을 드는 것입니다. 그걸 바울이 이렇게 그려냅니다.



(롬7:9)

9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율법의 진의가 무엇인지 몰랐을 때에는 바울이라는 인간이 살아있었습니다. 그리고 죄가 죽어 있었습니다. 그 말은 바울 자신이 자신을 산 자로 여기며 죄를 스스로 제어하고 컨트롤 할 수 있는 자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의 진의가 깨달아지자 자신이 죄를 어거할 수 있는 산 자가 아니라 죄에 의해 끌려 다니는 죽은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걸 살았다라고 하는 겁니다. 

난 예수의 의가 아니면 도저히 산 자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산 자의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해 보세요. 죽은 자 앞에, 다른 말로 죄인 앞에 영이신 하나님이 나타나면 그는 죽습니다. 맞습니까? 그건 오로지 하나님만이 존재이고 그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존재일 수 있는 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이 죽은 것이고, 모든 것이 악이며, 모든 것이 비거룩이며, 모든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부으시면 그 존재가 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메카니즘을 알아먹는 자를 하나님 백성이라고 해요. 

"나는 죽은 흙이 맞구나. 하나님이 시작부터 끝까지 나의 존재를 완성시키시는구나"

이 자를 산 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뵈었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율법으로 시내산에서 인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율법은 예수니까요. 하나님이 직접 내려오셨어요.

그러면 그 율법이 인간들에게 떨어지면 어떻게 돼요? 죄에 대한 심판이 일어납니다.

"아, 이게 죄구나!" 확 드러나고 "예, 우리는 죽어야 할 자가 맞습니다."

율법이 떨어지는 곳마다 그 고백이 나와야 하나님을 알아본 게 됩니다.


거룩이신 하나님이 죄인 앞에 오면 '없음'으로 드러나야 하는 게 진리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내려왔는데 "내가 그거 지켜서 당신한테 잘 보여 볼게요", 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알아봤다, 못 알아 봤다? 말씀 속에 계신 그 하나님을 못 알아본 겁니다. 그걸 죽었다고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어요. 그러면 죄인들, 어두움, 죽음들이 예수님을 맞닥뜨렸을 때 어떤 고백이 나와야 합니까?  그 율법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 자들은 어떤 고백을 하겠습니까?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살 수가 있습니까?"

이 고백이 나와야 하는데 예수님이 "너희는 죽은 자야. 그러니까 살 방도를 구해야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입니다.


회개하는 건 너희들이 가는 그 길이 잘못됐다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세상에서 제일 착하게 살았는데, "그게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죄인입니다, 해야 할 자들이 "내가 왜 죄인이야?"하면서 하나님을 죽였단 말입니다.

이걸 하나님이 미워하신단 말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 주셔야 저는 겨우 산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지요? 


그게 오늘 본문 말미의 결론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들의 세상에 육신을 입고 내려 오셨습니다. 율법이 사람의 모습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신 하나님을 알아보는 인간이 없었습니다. 원래 그 말씀이신 하나님을 알아보는 자가 그 말씀이신 예수 앞에 섰을 때 어떤 반응이 나와야 합니까?

(계1:17~18)

17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8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눅5:8)

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사6:5)

5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렇게 죄인이 하나님을 뵙게 되면 이렇게 ‘난 죽은 자 맞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이신, 말씀이신 예수가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났는데 아무도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는 고백을 한 자가 없었습니다. 나를 떠나라는 것은 ‘나는 죽어도 싼 자’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생명이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내가 죄인입니다. 지금부터 나의 선행이나 나의 제사나 나의 율법지킴 등의 나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만을 의지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무도 하나님을 못 알아보았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난 율법 지켰다. 난 제사 지냈다. 난 할례 받았다’는 식으로 ‘난 살아있는 자다’를 증명하는 데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열심을 무시하는 예수를 죽여 버렸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러한 모습이 죽음의 모습이기에 ‘너희들은 회개해야 한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인데 그 말에 동의하지 못한 아담들은 그러한 말씀을 하시는 예수를 오히려 죽이더라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어떤 사람이 시집을 가서 자기 집 장만을 하겠다고, 자기의 노력으로 완성된 자기 나라를 구축하겠다고, 20년간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으며 돈을 모았습니다. 드디어 내일이면 적금 만기일이 되어 자기 집을 살 수 있는 순간이 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시 아버지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집 장만이 뭐 그리 중요하냐며 자기가 급히 필요하니 그 돈을 내 놓으라고 합니다. 결국 며느리는 적금 타는 그 날 시아버지에게 그 모든 돈을 다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 며느리는 지난 20년을 자기 집 장만이라는 목적에 투자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시 아버지가 나타나서 그 지난 20년간의 인생을 차압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건 ‘넌 그동안 헛살았다. 너의 지난 삶은 가치 없는 죽은 것이다’라고 그녀를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 여자가 시 아버지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이를 갈겠지요? 아마 화병이 나서 죽을 지경일겁니다. 시 아버지란 사람을 볼 때마다 죽이고 싶을 것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나’와 ‘나의 행위’를 부정당하면 그 부정한 대상을 죽여 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게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된 아담들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실체를 압니다. 자신의 삶은 하나님께 차압당해 마땅하다는 것을 압니다. 아니 자신은 이미 십자가에 정과 욕심과 함께 못 박힌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은 이미 자신은 십자가에서 부정당한 사람임을 알기 때문에 자신이 부정당하는 것을 기분 나빠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렇게 십자가에서 부정당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옷을 입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것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대속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렇게 육이(행위가) 죽어야 하나님의 은혜의 옷이 입혀져 하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본으로 보여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예수의 십자가가 드러나야 하는데 ‘열심히 노력해서 훌륭한 사람, 멋진 사회를 구현하자’로 갑니다. 그건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말씀 속에 하나님이 담겨 있지 않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아무도 말씀 속의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말씀이신 예수가 그들 앞에 떡하니 나타나도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라는 고백이 들려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 예배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이 제대로 선포되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입에서 ‘주여 저는 죄인 맞습니다. 저는 죽어 마땅하오니 저를 떠나소서.’라는 고백이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왜 인간의 가능성을 그렇게 부정하느냐고 화를 냅니다. 성경은 그러한 자들을 가리켜 잡혀 죽기 위해 태어난 짐승이라고 합니다.

(벧후2:12)

12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유1:10)

10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 하는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 하느니라

멸망받기로 결정이 되어 이 땅에 태어난 생각 없는 짐승들이 하나님 아들의 죽음을 가치 있게 드러내려 하는 곳에서 인간의 가치를 들먹이며 방해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걸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본능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이렇게 명확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교회 완전주의’를 주장하는 지방교회를 비롯한 ‘자칭 교회’들이 ‘성화’ 운운하며 인간들의 자존심을 수호하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자, 도둑질하지 말자, 주일 성수하자, 남의 것을 탐내지 말자, 부모를 공경하자, 등등 기존의 율법에서 시민법과 의식 법을 제외한 새로운 율법을 만들어내어 그걸 성숙과 성화의 기준으로 삼고 있단 말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지키려거든 완전하게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땅에 떨어짐 없이 다 지켜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율법 중에는 면제년이 되면 이웃에게 꾸어준 것을 모두 면제하라는 것도 있고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19:18)는 대목도 있고, 까닭 없이 다투지 말라는 대목도 있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킨다는 바리새인들이 이런 걸 다 지켰을 것 같으세요? 그랬다면 그들이 세리나 창기들을 보며 그렇게 모멸 섞인 말을 하지 않았겠지요? 그건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행위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율법을 지킨다는 사람들은 몇 가지 큰 항목들을 합의하여 정해놓고 그러한 것만 지키면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서로 인정해 주었단 말입니다.

어떤 랍비들은 '너희는 어미 새와 새끼 새를 함께 취하지 말라'(신22:6)는 것을 가장 작은 율법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소와 나귀를 겨리 하여 갈지 말며,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와 같은 명령들을 가장 작은 율법이라고 차등을 매겼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것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그런 것으로 취급했단 말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5:17~18)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 이로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지키려거든 다 지키라는 것입니다. 꾸어준 것도 받을 생각 말고, 그 누가 네 이웃이 되던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되냐고요?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지가 없어질 때 그 율법의 일점일획이 다 이루어진다고요. 18절이 그런 말입니다. 그건 이 천지가 존재하는 한, 이 첫 창조의 영역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그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켜낼 자는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천지가 없어지고 새 나라가 세워지는 그날, 그걸 누가 이루시겠다는 것입니까? 예수가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이미 묵시 속에서, 십자가에서 성취가 된 것이고요.

율법은 예수를 의존하고 예수만 믿으라는 하나님의 친절한 몽학선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겠다고 하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나만 완전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 자체가 말씀이신 예수님이시니까요. 주님은 이어서 또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마5:19)

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천국에는 작은 자 큰 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는 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건 천국에는 없는, 천국에 어울리지 않는, 천국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다 지켜내지 않고 하나라도 어기는 자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못 들어가겠네요? 맞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른 의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마5:20)

2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율법의 경중을 스스로 합의하여 회칠한 무덤처럼, 시체 화장놀이를 하는 자들의 의와는 완전히 다른 의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다음 주에 공부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입니다.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신 예수가 준비하신 은혜의 옷, 그것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다른 의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율법지킴을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의 진의를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 주십니다.

(마5:21~24)

21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여러분에게 한 가지 여쭤 볼게요. 여러분은 살인, 도둑질, 간음, 이런 것들이 십계명에 율법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안하세요? 오늘 아침에 살인하고 오신 분? 왜 안하셨어요? 율법 지키려고 안 하셨나요? 그럼 저 우간다나 아마존에서 문명과 전혀 상관없이 사는 이들은 살인을 밥 먹듯 할까요? 아니요. 그들은 성경이라는 것을 보지도 못했고 율법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듣지도 못했는데 살인을 하지 않아요. 인간이 살인이나 도둑질을 밥 먹듯 마음대로 하지 않는 이유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법에 의한 처벌을 받는 것이 두려워서, 혹은 양심에 꺼려서, 혹은 도덕과 윤리 때문에 안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러한 이유로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을 안 하고 죽은 사람들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다 계명을 지킨 사람이 되는 건가요?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주셨을 때에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도덕이나 윤리, 사회법의 준수등과는 수준이 다른 웅숭깊은 뜻이 있었단 말입니다. 주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형제에게 노하는 것이 살인이라고 하셨지요? 형제에게 노하여 형제를 죽인 사람, 하면 생각나는 이가 누구지요? 가인입니다. 그러니까 가인이 아벨을 살인한 시점은 실제로 아벨의 숨이 끊어졌던 그 시점이 아니라 가인이 아벨에게 노하기 시작한 그 시점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가인이 아벨을 때려 죽였을 때는 아직 율법이라는 것이 주어지기 전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을 저주하셨단 말입니다. 왜요? 율법을 어겨서인가요? 아니에요. 그로부터 수천 년 후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율법에 적혀있는 ‘살인’이라는 것 속에 들어 있는 진짜 하나님을 화나게 했던 것이 그 상황 속에서 펼쳐져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게 뭐였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낀 가인이 자신의 행위의 가치를 수호하고자 자기와 비교가 되는 형제를 자기 눈앞에서 삭제시켜 버린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처음자리를 확인한 상태에서 그런 상황을 맞았다면 그렇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난 죽은 자라는 사실을 아는 자들은 자신의 행위가 부정을 당하고, 남과 비교를 당해도 기분 나쁠 일이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가인은 자신의 행위가 비교당하고 상대적으로 부정 당하자 화가 난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상대적 비교 대상인 아벨을 죽인 것으로 나타났지만 사실 가인은 자신을 그렇게 대우하시는 하나님을 죽인 것입니다. 죽은 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에 동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살아있다고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행사가 못 마땅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자신을 중심으로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살인은 바로 하나님과의 불화에서 비롯된 형제를 향한 미움을 모두 총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를 보고 라가(밥통, 멍충이)라 하고, 미련한 놈(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이라고 하고, 형제에게 노하는 것은 다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살인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면 하나님을 하나님 대접하지 않는 인간의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처사가 수긍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죽은 흙으로 폭로되고 고백되지 못한 자들이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형제에게 노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살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물을 들고 하나님을 예배하러 오는 것입니다. 예물을 들고 하나님께 예배를 하러 온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이 전제가 되는 것이고, 그 화목 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예물을 근거로 복을 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게 유대인들의 예물 관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형제들과 불화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과의 불화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 했지요?

그런데 이 인간들이 예물이라는 인간 측에서의 행위를 근거로 화목 되지도 않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뇌물 칠을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진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제사를 지내려거든 형제와 화목하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받아준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데 어떻게 형제들과 진심으로 화목할 수 있겠느냐는 그런 말입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제사 전체를 몹쓸 것으로 부정해 버리시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들의 유익을 위해 겉만 번드르르한 예배 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거지요? 화목제물로 오신 예수를 믿으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살인, 간음, 도둑질, 탐욕 등의 계명들은 그걸 잘 지키면 성숙으로, 성화로 인정해 준다는 의미에서 주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아무리 훌륭한 일을 내어 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화목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어 놓는 것은 다 시체들의 배설물들이므로 예수를 믿어라’는 하나님의 몽학선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의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의 진의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모든 율법을 딱 두 마디로 정의해 버리신 것입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라. 그런데 그건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 되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의를 믿고 그 분의 긍휼을 구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이 땅에서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지 우리의 업적을 쌓고 행위를 성숙시켜 하나님 나라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나요? 아니요. 율법이, 천지가 없어지는 때에 완성이 된다는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법인 율법이 예수에 의해 완전히 성취가 되어 예수에 의해 그 나라가 완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 나라가 가시적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인정하며 그 분의 뜻에 자신의 삶을 맡겨버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상황과 사건과 정황을 맞게 되어도 그 전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며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주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가 주요, 예수가 구원자 그리스도라는 것을(우리의 행위가 아닌) 인정하며 더 낮아지고 겸손한 자리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의 기독교는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위장을 한 가짜 기독교에 완전히 장악이 되어 있습니다. CS Lewis, John stott, JI packer, Billy graham, Robert Schuller, 미 모든 사람들이 성경 안의 이적이나 인간의 이성으로, 과학으로 이해가 되어 지지 않는 부분을 다 부정하고 삭제한 사람들이라는 걸아십니까? 빌리 그레함이 92년에, 존 스토트가 97년에, 빌리그레함과 로버트 슐러가 2006년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각각 창조와 내세와 성경의 이적을 부정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의 저서와 설교에 아무런 반감을 갖지 않고 오히려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존 스토트가 74년에 로잔 언약의 언약서 초안을 작성했다는 건 다 아시지요? 거기에서 성경의 모든 기적이 다 삭제된 건 아세요?

그렇게 되면 이 역사와 성경의 주인공이 누가 됩니까?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납득이 되어야 신이고, 인간에게 이해가 되어야 올바른 말씀이며, 인간에게 유익이 되어야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무리 속에서 긍정의 힘이니 뭐니 이런 궤변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부정하고 부인하라고 하시는데 기독교는 오히려 자신을 긍정하고 비전을 가지라고 부추깁니다.

그래서 올바른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들이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근데 좀처럼 찾기가 힘들어요. 아무리 책을 무료로 나누어주고 설명을 해 주어도 못 알아듣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마저도 자신들의 논리로 규정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규정을 한다는 것은 한계가 설정이 된다는 뜻이고 그러한 한계설정을 인간들은 이해했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게 바로 자유주의인 것입니다. 저는 그 뿌리가 칼 바르트라고 생각을 합니다. 거기에 대한 더 깊은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

지난주에 우리 큰아이가 그동안 모아 놓은 세배 돈, 용돈을 모두 털어서 가지고 왔어요. 우리 아이는 자기를 위해 돈을 거의 안 쓰는 아이입니다.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모아 놓은 용돈이며 세배 돈이 꽤 되더라고요. 그런데 그 돈을 가져오더니 중고등부 선생님 중에 신학교에 들어가려고 하는 선생님이 계신데 아마도 학비가 부족한 것 같으니 이 돈을 그 선생님 학비로 주어도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왜 네가 그런 생각을 했냐고 물었더니 ‘그 선생님이라면 정말 훌륭한 목사님이 되실 것이라고 생각 되어서 자기가 무언가라도 돕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네가 생각하기에도 요즘 복음을 올바로 전하는 좋은 목사님이 별로 드문 것처럼 보이니?’ 아이가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좋은 목사님들을 잘 키워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돈을 들고 간 우리 아이와 그 선생님이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도 요즘 생각이 참 많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말씀을 올바로 전하시는 목사님을 모시고 복음이 풍성하게 떨어지는 그런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연락이 많이 옵니다. 그럴 때마다 복음을 잘 전하시는 목사님들을 선별해서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목회자를 찾기가 참 힘들어요.

그만큼 때가 악합니다. 사람들은 올바른 복음에 관심이 없고 설교자들도 복음 전하는 일에 매력을 못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복음이 올바로 전해지고 그것이 수용되는 현장에서는 항상 인간들이 없음으로 부정되기 때문에 불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설교의 중심도 인간이 되고, 복음의 주인공도 인간으로 귀결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 역사의 종착역은 모든 만물이 예수를 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래서 골고다에 선 것이고 이 역사는 그래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행2:36)

36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왜 하나님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어야 했나요? 이 세상에 다른 주, 다른 그리스도가 너무 많아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은 다른 주, 다른 그리스도가 다 부정되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이 세상 모든 엉터리 하나님들과 그들이 내어 놓은 행복에 이르려는 시도, 자존심을 챙기려는 열심 등이 다 부정당해야 할 것들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들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행위를 내어 놓은 인간들을 여전히 성자의 반열에 올려놓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법정이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자신을 믿지 않는다 하여 자신의 자식이라 하는 인간들을 지옥 불에 던져버리는 당신네들의 신을 난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차라리 난 지옥에 가서 당신네 신에게 버림받은 그 억울한 영혼들을 구제하겠다.’ 멋지지요? 지옥에 들어가서라도 하나님에게 버림 받은 이들을 섬겨서 구제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게 마귀입니다. 죽은 흙이 죽은 흙들의 집인 지옥에 들어가서 무슨 일을 해요? 그냥 거기서 영원히 멸망당하는 것이 죽은 흙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흙들이 산 자인 척, 멋있는 척을 한다니까요.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가 산 자의 인생이라고 하는데 모든 인간들이 살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산 자의 증거를 인간들의 행위로 제시한단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든 즉각적인 결과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풍랑아 멈추어라 하면 그 즉시 멈춥니다. 나사로야 나와라 하면 그 즉시 무덤이 열립니다. 앉은뱅이야 일어나라 하면 그 즉시 앉은뱅이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백성만 이러한 역사라는 과정을 통과해야 하지요?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입니까? 아닙니다. 그것도 이미 완성이 되고 성취가 된 것입니다. 그 완료된 하나님 나라를 역사가 잠시 펼쳐서 설명을 하는 것이지 이 역사의 열심과 노력에 의해 그 결과가 번복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생과 역사가 내어 놓는 행위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모두 하나님의 캔버스로 사용되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나 이사야 같은 선지자들도 인생의 걸음까지도 자기가 걷는 것이 아니라(렘10:23)는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걸음걸이도 자기의 것이 아니라면 그 무엇을 ‘내 것’을 내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잖아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 내실 때, 다른 말로 구원해 내실 때 파리, 메뚜기, 이, 심지어 독종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까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서 고센 땅에서 다 나갔습니다. 그런 것들까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움직입니다. 하물며 인생은 어떻겠어요? 하나님이 그려내시는 그림만 그려내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어줍지 않게 하나님 앞에서 산 자인 척하지 마시고 ‘주여 제가 죄인 중의 괴수가 맞습니다. 저를 도와주소서.’하고 항복하세요. 그들에게 진짜 하늘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