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 41 분노하라 너의 역사와 너의 인생에 대해 분노하라.

은바리라이프 2013. 10. 16. 12:58

로마서 41

 

분노하라 너의 역사와 너의 인생에 대해 분노하라.



롬 4장 9-16절 말씀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쫓는 자들에게도니라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저의 대학 선배 중에 난민전 사건으로 수배를 당하던 중에 프랑스로 망명을 했다가 그곳에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택시운전, 관광안내 등을 하면서 힘겹게 살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 이름이 홍세화 입니다. 남자예요. 프랑스에서 운전을 하며 자서적 고백을 담은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을 썼고 그 책은 90년대 최고의 베스트 셀러에 올랐죠, 돈 많이 벌었습니다. 일명 똘레랑스 신드롬을 일으킨 장본인이예요. 똘레랑스는 프랑스어로 관용이란 뜻입니다. 그가 호구지책으로 택시 운전을 하면서 느낀 프랑스 저변의 스며들어 있고 뿌리 내려 있는 그 다양성과 타인에 대한 배려 등을 자서적 고백 형식으로 기록한 책인데 당시 그 책의 영향력이 실로 대단했습니다. 그 책으로 인해서 한국의 보수와 진보 각 계층에서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이 되는 것 같은 그런 신드롬이 일어났습니다. 한국사회에서도 양심의 자유, 다양성, 그러니까 다를 수 있는 자유, 다를 수 있다라는 걸 인정하는 자유, 이런 것들이 용인되어져야 한다라는 분위기가 보편 포괄적으로 확산이 되는 듯 싶었습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여기서도 관용, 저기 가도 관용.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 관용이 화두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대한민국의 똘레랑스는 끓던 냄비 식듯이 또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습니다. 관용은 무슨 얼어죽을 관용이냐? 관용이라는 건 설득이나 선동에 의해서 생산되거나 자라는 게 아니라는 게 입증 된거죠. 있다가 없어질 수는 없어요 그게 인간에게 사유되는 거라면. 그러면 홍세화에게 관용의 나라라는 극찬을 받은 프랑스는 어떤가? 홍세화 선배가 반했던 똘레랑스의 프랑스는 십 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분노의 프랑스가 되어 있습니다. 홍세화의 영향으로 우리에게 똘레랑스의 종주국처럼 여겨졌던 프랑스는 지금 실업률이 10% 에 육박하고 물가가 천정부지로 올라서 가난한 사람은 시장 한번 보기가 힘드는 지경, 그런 나라가 되어 있습니다. 환경과 현실이 그렇게 되니까 관용의 나라라는 프랑스가 폭력이 난무하고 불신과 배신이 판을 치는 그런 우스깡스런 나라가 되어 버린 거예요.

그런 전반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르코지 정부가 강경한 이민정책 이라는 특단의 조치들을 내렸어요.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집시, 외국인 홈리스, 외국인 도둑 이런 사람들은 가차 없이 정부에서 추방을 하겠다는 정책이예요. 강경책이죠. 관용이 사라진거예요. 그리고 은퇴연령을 연장하고 의료보험 제도 하향조정해서( 하향이면 다행이죠, 미국에는 없잖아요. 나는 이렇게 우스운 나라는 처음 봤어요. 가난한 사람은 병원도 못가는 나라가 이나라예요) 유엔을 비룻한 국제사회는 사르코지 정부의 강경한 이민정책에 대해서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관용을 좀 베풀라는 거예요. 그 사람들 그럼 어디로 가느냐는 거예요. 다시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 죽을 수도 있고 굶어 죽을 수도 있는데 어디로 가라고 추방을 하느냐? 관용을 베풀어라, 유엔이 권고를 했어요.

그런데 정작 그 관용이 몸에 배어있다는 프랑스국민의 절반이상이 사르코지 이민정책에 환호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밥그릇에 손을 대는 약자들에게 분노 한거예요. 너희만 없으면 상황이 좀 더 나아질 거라는 거죠. 너희들이 굶어 죽던 말던 그건 우리와 아무 상관 없다는 거죠. 이게 똘레랑스의 종주국입니까? 그들이 어떻게 살던 그 불이익의 당사자가 나만 아니면 된다라는 심보예요. 그러니까 홍세화가 보았던 프랑스의 똘레랑스는 아무문제 없이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때에 인간들의 자존심 챙기기에 불과했던 것이예요. 그들이 내 옆에 있던 없던 내가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을 때는 얼마든지 관용을 베푸는데 그들의 밥그릇이 축나기 시작하자 이 관용이 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분노로 바뀌어요.

똘레랑스의 인본주의와 인도주의의 한계가 바로 그거예요. 자기가 먹고 살만하면 인간은 얼마든지 연극을 할 수 있어요. 인도주의니 휴머니즘이니 하면서 근사하게 포장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밥그릇의 밥이 줄어 들거나 자기 목숨에 위협이 될때 그 즉시 인도주의와 휴머니즘은 미움과 질투와 전쟁과 분열과 분노로 그 옷을 갈아 입죠. 그래서 애증이란 말이 있는 거예요.

사랑이 증오로 바뀌어요? 그러면 그게 진짜 사랑입니까? 아니죠? 쑈하고 있는 거예요. 똘레랑스의 종주국이 분노의 종주국으로 바뀌는 게 시간문제 였던 것처럼 모든 인간이 내어 놓는 선이라는 건 나의 유익에 반하게 될 때 반드시 그 가면을 벗습니다. 그러한 프랑스의 모습에 프랑스의 사회운동가인 스테판 에셀이 분노했죠. 잘 아시죠? 베스트 셀러 작가니까.

그런 그가 아주 짧은 책을 하나 썼는데 그게 지금 한국서점가뿐만 아니라 전세계 서점가를 강타하고 있는 분노하라는 책이예요. 60페이지 밖에 안되요. 읽는데 삼 십분도 안걸립니다. 한번 읽어 보세요. 약자에게 분노하는 그 분노에 분노하라는 겁니다. 당연히 우리가 해야할 일 같지 않으세요? 자신이 평생을 걸고 수호한 민주주의와 평화가 시장경제라는 독재에 의해 훼손되어 가는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라는 것이죠. 아흔 세살의 전직 레지스탕스는(원래 독일 사람 이예요. 귀화 해가지고 레지스탕스 운동을 한 사람인데 ) 프랑스뿐 아니라 전세계의 사회적 약자들에게 일어나라 분노하라, 봉기하라 투쟁하라 싸우라고 선동을 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해줄 수 없는 건 시민의 봉기로 약자의 봉기로 쟁취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 책이 인기를 끌면서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 봉기가 일어나고 있어요.


자신의 메시지를 단순히 사회적 현실에 대한 추상적인 울림, 신드롬으로만 보지 말고 구체적 실천으로 받아들이라고 웅변을 해요. 그런데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들이여 분노하여 똘레랑스를 되찾자 모든 인간들이 다같이 잘사는 그런 평화의 나라를 만들자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 사람은 그 책을 통하여 그나마 남아 있는 이 비루한 인간들의 잔여 똘레랑스마저 불을 확 붙여 태워버리겠다는 시도로 밖에 안보여요.


저는 그 짧은 책을 읽는 내내 19세기 말에 전세계 노동자들의 사회개혁을 위한 단결 의지, 결사를 도출 시키기 위해 발표 됐던 칼 막스와 엥겔스의 선언문이 생각 났습니다. 모든 사람이 같이 생산하고 같이 나누어 갖자, 그래서 유토피아를 만들자 이상향을 만들자 이게 공산주의예요. 나쁩니까? 그런데 그 공산주의 선언문을 시작으로 하여 1억 명이 살해 당했어요. 1억 명이. 


그 유토피아라는 말 자체가 없는 것 이란 뜻이예요. 이 세상에는 없는 것.

그래서 인간이 소망하는 그리고 그들이 그려내고 있는 유토피아는 절대 인간들이 이 땅에서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들의 시도는 오히려 이런 추악한 세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이상적 사회를 만들어서 잘 살아 보겠다. 모든 이들이 평등한 그런 누구나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 이게 뭐였어요? 에덴동산의 아담의 선악과 먹는 사건이 이거 였잖아요. 인간의 뜻이나 기호가 전혀 고려되지 않고 하나님 맘대로 만들어 내신 그런 나라는 식상하다는 거예요. 구차하게 하나님께만 의존하여 살지 않고 스스로의 힘과 노력을 동원해서 우리의 기호에 맞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서 거기에서 자신이 왕이 되어 살고 싶은 게 아담의 욕망이었잖아요. 그런데 아담이 잊은게 있어요. 하나님과 관계 없는 아담은 흙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었어요. 아담이라는 이름 자체가 ‘흙’이란 뜻이예요. 그 단어는 더스트 거든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아담, 흙 개념은 ‘없음’이었어요.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어 놓고 그 이름을 ‘없음’이라고 지었다니까요. 왜? 인간이란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 없음으로 존재해야 비로소 있음이 될 수 있기 때문이예요. 흙이 만들어 내는 , 다른 말로 없음이 만들어 내는 세상 그 세상나라는 결국 없음으로 끝나 버릴 것을 그가 몰랐던 거예요. 하나님은 이 역사와 인생들에게, 세상 속 아담군상들에게 바로 그 ‘없음’ 들이 만들어 내는 역사라는 작품을 감상 시키고 있는 거예요. 성도는 그걸 보고 가는 거예요. 열심히 구축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 어느 하나라도 있음의 가치가 있는 게 있나 잘 보라는 거예요.

너희들이 추구하는 행복 쾌락 아름다움, 그 어느 것 하나 진짜 있음의 가치가 있는가 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그런 걸 다 쟁취해 내는데도 이렇게 불안하고 공허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라는 거예요. 진짜 인생이, 흙이 만들어 내는 것 중에 진짜 아름다움이, 가치가, 행복이 쾌락이 있는가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그런 거 다 소유한 것 같은 자들이 자살을 하는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것이죠. 그게 인간들을 절대 행복하게 못 만들더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이 하나님의 복을 거부하고 스스로 노력하여 만들어 내겠다고 구축한 그 유사품 복 생산라인, 원래 인간은 만들어지자마자 복을 받았단 말예요.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자마자 복부터 부었잖아요. 복은 여러분이 뭘해서 얻어 내는 게 아니라 이미 받고 내려오는 거예요. 복을 받고 그 복으로 살아야 하는 인간이 ‘잠깐만, 스톱! 내가 한번 스스로의 힘을 동원하여 복을 한번 만들어 볼게요. 행복을 한번 추구해 볼게요’. 이게 선악과 사건이잖아요. 하나님처럼 되겠다, 그러니까 인간이 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복을 막고 우리가 복을 한번 만들어 보겠다라고 하는 이 복이 뭐예요? 이게 모조품, 유사품 복이라는 거예요.

그 유사품 복의 생산라인이 뭐냐면 선행체계, 종교라던지 도덕이라던지 윤리라던지 하는 선행체계와 교육이라던지 이념 같은 지식 체계란 말이예요. 요게 인간들이 유사품 복 만드는 생산라인 이예요. 그러한 선행체계와 지식체계의 결과물이 이렇게 더럽고 추악한 결과물로 드러나고 있다는 걸 성도는 알아 먹어야 되요. ‘아닌데요, 많이 발전 했는데요.’ 진짜 발전했는지 보자구요. 아담 안의 인간들은 그 누구도 자신의 밥그릇을 손해 보면서까지 선행을 지속할 수 없어요. 내가 타자보다 더 수고하고 고생하고 있다는 섭섭함이 밀려 들어오게 되면 관용이고 유토피아고 다 날라갑니다. 그 똘레랑스의 자리에 엥기네브가 가득 차게 됩니다. 분노가 가득 차게 되요. 그런데 그 엥기네브를 또 다른 엥기네브가 해결하라가 스테판 에셀이 이야기 하는 거예요. 분노하라 봉기하라 그래야 똘레랑스가 온다라는 것이죠. 평화가 온다는 거예요. 평등이 온다는 거예요.

쟁취하라는 것이죠. 정말 그렇게 해서 사회가 변혁이 될까요? 개혁이 됩니까? 정말 소시민들이 행복해하는 그런 유토피아가 올까요? 그거 하겠다고 한 게 공산주의 였잖아요. 분노와 비판이 똘레랑스를 회복시켜주지 못해요. 인간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자존심을 추켜세워주는 선동의 연설 앞에서 환호를 해요. 모든 이들이 다 평등하게 사는 그런 세상을 만들자, 왜? 인간은 소중하니까! 인간의 자존심을 높여주는 이런 선동에 모든 이들이 환호하게 되어 있어요. 모든 존재가 하나님처럼 되었거든요.

너희들이 행복하게 잘 사는 세상을 너희들의 힘으로 분노와 비판과 행동으로 성취해내라, 쟁취해 내라. 이런 선동은 사뭇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들지만 그렇게 해서 성취가 된 유토피아에도 또 다른 소외와 갈등과 결핍과 계급이 발생해요. 그러면 인간들은 또 다른 이상향을 찾아 향하여 탈주를 하죠? 이게 뭐예요? 노마디즘이예요. 들레즈의 노마디즘이잖아요. 이게 역사예요. 그러면 또 다시 재고착화 재고정화의 현상이 일어나고 이걸 반복하는 게 역사예요.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인간은 진심어린 똘레랑스를 내놓으며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진짜 복을 지속적으로 누리면서 살 수 있을까? 진짜 복은 분노하고 분투하고 투쟁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열심을 부려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착하게 잘 살아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거저 받는 거예요. 그게 우리가 지난 주에 공부한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 4장 6절이 그 말이예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거저 받는 복!

그게 복이예요. 헬라어의 행복이라는 단어, 마카리오스라는 그 단어 자체가 위에서 아래로 흐름이라는 뜻이예요. 행복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래서 행복 하면 위에서 아래로 흘러 내려오는 것이어야 되지 수평적으로 달리면서 쟁취해 낸 것은 행복이 될 수 없어요. 복이란 개념 자체가.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창조주에게서 흘러 내려오는 복을 거부한 아담들은 스스로 그 복을 생산해 내기 위해서 선행체계와 지식체계 등을 만들어 내면서 이 수평의 역사를 달리면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거예요. 왜? 이제는 그 복을 내가 만들어 내야 되요. 행복을 내가 만들어 내야 되요.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복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 내려 와야 진짜 복이예요.

그걸 ‘생명’이라고 해요. ‘바라크’. 그 수평의 역사에서 생산되는 복은 다 위조품이며 모조품이예요. 여러분을 그게 가끔 반짝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데, 자식 돈 남편 가정 인기 명예, 잠깐 행복하게 만들어 줄수 있지만 그게 여러분을 영원히 행복하게 못 만들어요. 그게 위조품이예요. 모조품 이란 말입니다. 그걸 모형이라고 해요. 르네상스라는 방법을 통해서, 문예부흥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그게 선행체계 잖아요. 지식체계 잖아요 사람들을 잘 가르쳐서 도덕적인 사람을 만들고 좀더 지식을 많이 쌓게 해서 평화로운 좋은 세상을 만들자가 르네상스 아닙니까.)

이 문예부흥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복된 세상을 구축하려고 했던 인간은 무식해서 세계 1,2차전으로 선행체계와 지식체계의 무용함을 체험해야 했어요. 그리고 도덕과 윤리를 안가르쳐서 세상이 이렇게 어지러운 줄 알았더니 잘 가르쳤더니 서로 수천만명을 죽이는 거예요. ‘아니네’를 증명해낸 거예요. 하나님이 역사를 통하여. 뿐만 아니죠. 물질문명이 개발하고 계발하여 삶의 자원을 확보하고 과학적 진보를 통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보다 나은 환경을 만들려는 그런 노력이 오히려 자연과 환경을 파괴해 버렸어요.

행복한 세상을 구축해 보겠다는 인간들의 노력이 오히려 세상을 파괴하고 있단 말예요. 지구가 지금까지 인간들을 보듬어 안고 생물의 존재 터전이 될 수 있었던 건 대기중에 산소 21%와 이산화탄소 0,03%가 그대로 유지 되어 왔기 때문이예요. 신기하죠? 여기에서 0,0몇%만 올라가도 지구는 멸망해요. 생물이 못사는 곳이 되요. 그런데 산소 21%, 이산화탄소 0,03%가 수 천 년 간그대로 그 비율을 유지하면서 왔어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거죠.

이산화탄소가 0,03%보다 적으면 지구는 사람이, 존재가 살 수 있을만큼 따듯해지지가 않아요. 산소는 생명체의 본질인 대사와 자기복제를 가능하게 하는 거예요 그거 없으면 안되요. 딱 그만틈 있어야 되요. 너무 많으면 폭파해요. 불타요. 산소용접기 되는 거예요. 심지어 산소는 오존층을 포함하는 거예요. O3가 오존이니까. 우주 공간에 흐르는 방사능의 물질을 산소가 막아주고 제어 해줘요. 우주공간에 흐르는 방사능 물질은 핵폭탄 이런 거는 비교도 안되는 거예요 여러분. 그런데 산소가 오존층이 그걸 막아주고 있는 거예요. 우린 그래서 살고 있는 거예요 지금요.

그런데 스스로 복을 생산하겠다는 인간들의 열망과 시도가 대기중 이산화탄소의 비율을 급격하게 증가 시키고 있어요. 그로 말미암아 산소를 배출해야 하는 식물들이 나무 스스로의 자존을 위해서 (왜냐면 이산화탄소가 너무 많으니까 나무들 자기들이 살아야 되거든요)그래서 산소를 나무 안에 저장하기 시작했어요. 변태들, 별종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는 나무가 광합성을 해서 산소를 내 줘야 우리가 사는데 이산화탄소를 내 주고 있어요. 아마존 밀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지구의 기온이 점점 올라 가고 있는 거예요. 이산화탄소가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대기중 이산화탄소의 비율이 0,06%가 넘는 순간 지구에서는 그 어떤 생명체도 살 수가 없어요. 그러한 이산화탄소의 증가는 오존층을 파괴해서 우주의 방사능 물질로부터 지구를 지킬 수 없는 상태로 오존을 찢어내고 있고 산호초 막을 부식시켜서 산호초를 질식시켜 폐사 시켜버려요. 지금 지구 곳곳의 산호초 군락은 멸종 상태에 이르렀대요. 몰디브나 괌이나 싸이판 가면 있던데요? 그건 사람들이 관광지에서 사람들 스노클링 시키려고 보존해 놓은 거예요. 산호초 군락이 거의 멸종상태예요.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산호초가 폐사하면 쓰나미나 해일이 왔을때 방호막이 없어서 대재앙이 됩니다. 인도네시아나 일본에 그 쓰나미가 대재앙이 된건 산호초 막이 없어져서 그런거예요.

꿀벌들이 죽어가고 있고 박쥐와 북극곰이 멸종의 위기에 처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꿀벌이 사라지는 것에만 관심을 두지요. 왜? 박쥐와 북극곰은 우리와 별 관계가 없는 거 같으니까. 꿀벌은 꿀도 주고 세상의 식물의 삼 분의 일이 충매화니까 꿀벌이 화분, 꽃가루를 이동시켜주니까 얘네들 죽으면 안되는데 거기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거지요? 실지로 이 충매화는 꿀벌이 없으면 우리에게 산소도 못주고 우리에게 식량을 제공할 수도 없어요. 그런데 그것들이 다 죽어가고 있다니까요.

마크 라이너스는 ‘6도의 악몽’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가다가는 곧 이 지구의 대부분이 사막이 된대요. 곧 지구의 온도가 높아 갈수록 해충이 안죽겠죠? 파리, 진드기, 모기 같은 거보세요. 온도가 높아지면 해충이 안죽고 그 해충은 농업에 치명적 영향을 미쳐요. 벌써 그래요. 미국의 농업 총생산량이 4천 만톤이 줄어 들었습니다. 일부러 생산하지 않은 게 아니고 무슨 일이 있었던 것 아닌데 이렇게 그냥 줄었어요. 그럼 우리는 거기서 징조를 봐야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아직 99 센트면 빅맥 하나 사 먹을 수 있으니까 우리가 거기에서 위기 의식을 못느끼고 있을 뿐이예요. 이미 일은 벌어지고 있단 말입니다.

바다가 산성화 되고 있고 이대로 가다간 바다 생물의 멸종도 시간문제예요. 빙하가 녹아서 해수면은 점점 높아지고 그 해수면이 높아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빙하 밑에 메탄이 들어있단 말예요. 빙하가 계속 녹아서 이게 터지면, 그래서 산성비가 한번 내리면 지상 생물은 멸종이예요. 그런데 녹아 내리고 있다니까요. 그래서 곰들이 죽어가고 있단 말예요. 그래서 에드워드 윌슨 같은 생태학자들은 현금의 인류를 서서히 뜨거워지는 주전자 안에 들어있는 개구리 , The Frog in the pot 라고 이야기 하고 있어요. 서서히 뜨거워지는 지구에 살고 있는데 , 아이구 따뜻해 하면서 사우나 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는 거예요. 인간들이. 괜찮아, 잘 될거야, 잘 될거야.

이쯤되면 눈썰미 있는 성도는, 적어도 성도는 인류 역사의 필연적 종국을 바라 볼 수 있어야 되요. 인간들의 모조품 행복을 생산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며 뛴 결과는 멸망이요 사망이구나를 볼 수 있어야 되요. 거기에 분노하여 그걸 고치고 자연을 보호하고 자연 환경을 원래대로 보존하고 이게 교회가 할일이 아니라(하지 말라는 거 아니예요, 하세요 그런데 그게 교회의 본무가 아니라 분노하고 일어나라 투쟁하라 이게 교회의 본무가 아니라) 아, 인간들이 아담들이 흙들이 만들어 내는 역사는 이렇게 밖에 열매를 못만들어 내는거구나를 보고 하나님이 만든 하나님의 나라를 붙들어야 되는 게 성도란 말입니다.

분노하여 사회를 세상을 개혁하여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사람들을 교육하고 도덕과 윤리를 가르쳐서 훌륭한 인격을 가진 자로 만들어 내는게 성도의 본무, 교회의 본무가 아니라 아담들은 하나님이 생명력을 부어주지 않으면 이렇게 멸망 받을 흙 밖에 못만들어 내는 인간들이구나 이거 배우고 예수의 십자가 보혈 붙드는 거예요. 십자가 붙드는 게 교회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이 교만한 인류가 대자연을 향한 사랑 운운하면서 또다른 종류의 모조품 생산라인을 가동시키고 있는 거예요. 분노하라고요. 대자연 사랑을 보편적 가치로 합의해서 이 지구를 살려 내자는 것이죠. 프레온 가스 쓰지 말자 스프레이 쓰지 말자. 냉장고에 들어 있는 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럼 냉장고도 쓰지 말아야지. 교회가 그런 거 하는 데에요? 이런 운동 하는 곳이 교회입니까? 동성애법 이거 통과 되면 안돼, 매일 전화와요 요새. 교회에서 그거 싸인해서 돌리라고.

교회가 이런 걸 해야죠. 너는 순리로 쓸 것 역리로 안쓰냐? 물어보고 싶어요. 너, 네가 도데체 뭔데 동성애자,동성애자, 그걸 하라는 게 아니라 너는 도대체 순리로 쓸 것 역리로 쓰는 거 없어? 다 그렇게 쓰고 있잖아 그런데 네가 뭔데 그 사람들을 함부로 그렇게 마귀 취급을 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걸 허락하시는 건, 보여주시는 건 우리가 다 창녀요, 우리가 다 그렇게 순리로 쓸걸 역리로 쓰는 자들이요, 우리가 다 도둑놈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그런 걸 갖다가 우리 주변에 놔두시는 건데, 나는 너랑 달라! 요걸 증명하는 데 그걸 쓴다니까요 우리가.

아니 자기 몸 위해서 자기 몸 팔아 일하는 게 창녀죠? 여러분은 안그렇게 사세요? 여러분은 유익을 위해 여러분 몸 파는 게 일하는 거 아닙니까? 그게 창년 짓이지 뭐예요? 우리가 무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을 해요? 다 우리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게 창년 짓이지 뭐예요? 그런데 우리가 창녀한테 너는 왜 더러워라고 이야기 할 수 있냐구요. 너는 왜 남자 백명하고 잤어? 나는 한 사람 밖에 몰라. 그래 그러는 너는 깨끗하다는거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걸 갖고, 그렇게 나타난 걸 갖고 사람들을 판단 한단말이예요.


저는 그런 것들을 볼때 참 인간들이 자존심 챙기기, 자기 주체성 챙기기, 자기 존재성 챙기기를 집요하게, 참으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구나 그렇게 밖에 안 보여요. 기특하다가 아니라. 심지어 일부 신학자들까지도 이런 진화 생물학자 생태학자들과 똑같은 이야기를 해요. 생태신학자인 쌜리 맥페이그는 기후 붕괴를 초래한 지구온난화를 이제 신학적 과제로 인식할 걸 촉구해요. 그리고 그걸 설교하라고 촉구해요. 저한테도 몇 번 이메일이 왔어요. 세계적이며 보편적인 포괄적 도덕성을 갖고 자타가, 인간과 자연과의 사이를 잇는 교량적 삶을 인간이 살아 내라는 거예요.

미국인 한 사람의 음식 소비량과 케냐 사람 한 사람의 음식 소비량이 500배 차이 난대요. 얼마전까지 50배였거든요. 그런데 얼마나 미국에 사는 사람들이 처먹었는지 500배가 됐어요. 별로안 먹는 거 같죠 우리? 그런데 그만큼 우리가 모르는 거예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가 케냐사람 500인 분의 음식을 먹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구? 조금 덜 먹고 덜 싸서 덜 먹은 걸로 나누고 덜 싸서 오염을 방지하자, 이게 교회가 해야할 일이냐구요.

너는 500배 먹고도 아무런 가책도 없이 이렇게 사는 인간이니까 예수 의지하라가 교회가 해야 할 일이지 덜 먹으라고 한다고 여러분이 덜 먹느냐구요. 다이어트에 도움 된다고 어떤 박사가 이야기 하면 덜 먹을까 ? 그건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아니란 말이예요. 그걸 사회학자들은 콜드 이블(Cold evil) 간접적 나쁜 행위라고 해요. 그 Cold evil을 인식하는 삶을 살자 그래요. 제발 그걸 인식하자. 우리가 그냥 사회법이나 윤리로 규정한 그런 죄를 짓는 건 나쁜, Hot evil이지요. 그런데 그것 말고 간접적으로 짓는 그런 죄를 제발 인식을 하고 이기적으로 살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죄라고.

예, 그건 사회학자들이 하는 이야기이지 목사가 하는 이야기여서는 안되요. 너희들은 죽은 흙이기 때문에 그래, 이게 목사가 해야 할 이야기지 Cold evil을 인식하여 그렇게 살지 말자가 아니라니까요. 어차피 몇 명만 알아들을 테니까 그 사람들만 들으세요. 그런데 어떻게하지요? 500배 더 먹는 우리가 500배 덜 먹는 케냐사람 보다 행복지수가 낮아요. 그럼 뭐가 행복이냔 말예요. 미국이 150위예요. 케냐는 백 위 안에 있어요.

그럼 덜 먹어서 불행해지자는 겁니까? 인간의 선행체계도 마찬가지예요. 교육과 종교 도덕 윤리 이것이 진짜 인간들을 착하게 만들어 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옛날에 자랄 때는 초등학교 들어갈 때 ‘가나다라’ 알고 오는 아이 몇 명 없었어요. 요즘은 영어까지 다 마스타 하고 들어온대요. 유치원 때. 이런 교육열,,,종교기관? 예전에 교회 몇 개 없었어요. 지금 한국에 가보세요. 공동묘지 같아요. 밤에 빨간 네온 십자가가 얼마나 많은지 하늘에서 보면 공동묘지 같아요.

그렇게 종교기관도 많아지고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그래요. 그러면 선행체계와 지식체계, 종교와 이념과 교육이 옛날 우리가 자랄 때와는 비교도 할 수없이 엄청난 물량으로 쏟아지고 있단 말이예요. 그게 사람을 착하고 성숙하게 만들어 냈냐구요? 지금 그렇게 만들어서 좋은 세상 만들자고 하는 거잖아요. 우리 자랄 때 어린 아이들과 지금 애들을 비교해 보시라구요. 난 지금 애들이 실세가 되어서 만드는 그 세상, 내가 살아야 된다라는게 너무 소름끼쳐요.


여러분 맨날 애들보고 그러지요? 왜 이렇게 버릇이 없어 왜 그렇게 싸가지가 없어, 부모가 뭘 가르친거야? 점점 더 그렇게 되어가고 있잖아요. 교육이 무슨 사람을 올바르게 만드냐구요. 종교가 무슨 사람들을 착하게 만들어내냐고요. 실패하고 있다고요. 흙들이 만들어 내는 역사가 실패하고 있는 중이란 말입니다. 아무튼 좋아요 다 좋은데, 노력 해보자구요. 열심히 해보자구요. 인류가 합심해서 지구도 살리고 모든 이들이 행복해 질 수 있는 그런 유토피아 건설해 보잔 말예요. 그리고 cold evil 같은 거 올바로 인식해서 모두가 함께 잘사는 지상천국 꿈꾸어 보자구요.


열심히 하세요, 그리고 실패 하세요. 아니, 실패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열심히 해야 그 실패가 진짜 실패로 내게 와 닿아요. 열심히 하세요. 그러나 그러한 노력이 인간들의 사정을 지금보다 낫게 만들어 줄거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이 세상은 점점 불행한 상태로 밀려 가고 있어요. 우리가 지난 주에 공부한 거 처럼 어차피 첫창조의 세상은 멸망 되기 위해 창조가 된거예요. 불사르기 위해 간수 되었다 그러잖아요. 그 자체가 죽은 것임을 증명해야 하는 그 역할을 부여 받은게 (아, 이거 죽은 거구나 하는 이걸 증명해야 하는 역할을 부여 받은게) 첫창조요, 첫창조 아래의 모든 만물이예요.

그들이 역사 속에서 뭘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이건 죽은 거네, 아담은 그냥 흙 맞는 거네, 흙이 만들어 내는 건 그냥 흙이네 이걸 증명하는 게 역사와 인생 이예요. 그런데 자꾸 이 흙들이 뭔가 있음의 흉내를 내는 거기에 분노를 해야지 당연하게 그렇게 진행 되어져 가는 그거에 분노를 하면 이게 기고만장이라는거예요. 누가 일부러 멸망을 시키려고 하지 않아도, 불살라 버리려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사망의 자리로 귀결 될 수 밖에 없는 첫창조의 그 세계의 실체를 성도는 보고, 왜? 성령이 들어와서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해서 알려 준다고 했으니까 성도는 그걸 보고 하나님나라, 하나님의 의 붙들고 가는 거예요. 그걸 기독교라 그래요.

누차 말씀 드리지만 만물은 예수로 말미암고 예수로 비롯되어 예수에게로 돌아가요. 다른 곳에서는 만물은 예수를 위하여 창조 되었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역사와 만물의 존재 목적은 예수가 누구이며 왜 예수의 은혜에 의해서만 존재해야 하는지를 증명해야 하는 게 이 존재들의 역할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라는 무리를 택하셔서 그들에게만 이 만물과 역사의 실체를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는 이 죽음의 세상으로 내려 보내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애굽의 종으로 보내시는 것처럼 당신의 백성을 이 세상의 종으로, 마귀의 종으로 보내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여기에서 마귀의 행사가 어떤 것인지 보게하고 거기서 끄집어 내는 걸 구원이라고 한다고요. 그래서 여러분은 구원을 알면 알수록 변태가 되고 별종이 되요. 온통 세상이 합의하여 가는 그 길에서 꺼내는 게 구원이기 때문에 그래서 좁은 문, 좁은 길이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하지 않았을 때 그들이 어떤 지경으로 사망이 되는지 자신의, 자기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선택 밖의 그 존재들의 행보와 그들의 열매와 결과물을 보면서 배우라는 거예요. 흙이 만들어 내는 인간상과 인간 세상, 도덕과 윤리 잘 지키고 성숙하게 되어서 누구나 다 똘레랑스를 누리는 그런 세상을 만들자, 이게 인간들이 만들어 낸 인간상이잖아요.

이것과 그런 걸 통하여 만들어 내는 보편적 인간들이 다 행복하게 살수 있는 그런 이상향, 이런 게 왜 흙으로 끝나게 되며 이게 무가치한 것이다라는 걸 우리는 배우고 가야 된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이 세상에 살 맛이 나면 안되요. 예수 믿으면 늘 행복하고 기쁘라고 그러지 않았나요? 진짜 그러세요? 정신병원 좋은데 소개해 드릴테니까 가보세요. 항상 기뻐하라는 건 나와 관계 맺고 있는 대상이 가변적일때 항상 기뻐할 수 없듯이 너는 항상 변하지 않는 예수와만 관계해야 된다가 항상 기뻐하라란 말이예요. 그 예수만 항상 나를 기쁘게 해줄 수 있다라는 것이죠. 그런데 나는 그 예수에게 관심 없잖아요. 거짓말들 하지 마시라구요. 다른 거에 더 관심 많잖아요 그런데 그건 항상 가면적이란 말이죠. 내 자식 내 남편, 돈 명예 이건 가변적인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나를 기쁘게 만들 수 없어요. 항상 변하지 않는 그 존재만 항상 나를 기쁘게 만들 수 있으니까 예수 믿어라! 라는 얘기란 말예요.

아니, 내 사랑하는 가족이 이렇게 예수를 모르고 좀비의 상태에서 뭔가 엉뚱한 걸 쫓아가고 있는데 기뻐요? 진짜 기쁘세요? 나만 아니면 돼요? 그걸 성도라고 합니까? 그런데 어떻게 기뻐요? 늘 기쁘기만 해요 어떻게 우리가? 아니예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하지 않았을 때 그 인간들이 만들어 낸 세상들을 보면서 탄식하고 통곡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나에게 하나님께서 쏟아 부어주신 이 은혜와 복이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그걸 떠올리면서 그때 잠깐 행복해지는 거예요.

그런데 내 관심이 거기에서 벗어나서 또 이 세상을 향했을 때 또 고통스러운거고 이걸 반복하면서 사는 게 성도의 삶인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기쁜 척, 아무 걱정 없는 척 그러지좀 말란 말예요. 그러니까 딴 사람들이 오해하잖아요. 나만 왜 이래 하고. 아니, 다 그래요. 마치 나만 성도다 이것을 증명 하고 싶어서 연극들 하는 거예요. 속지 마세요. 그렇게 이 세상의 실체를 보고 하나님이 세운 그 나라를 감사함으로 찬송하면서 붙들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 나라에서 새몸으로 바꿔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더럽고 불공평하고 불합리 하게 돌아 가는 세상에 대해서 분노해야 되는 게 아니라 그건 당연한 거란 말예요. 여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보다 나은 인간 만들기와 보다 나은 세상 만들기에 몰두 하느라 하나님마저도 방법과 수단으로 동원하고 있는 나에 대해서 이 역사와 인생에 대해서분노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좀 더 착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게 뭐가 나쁘냐? 거기서 주인공이 누구냐구요. ‘나’ 라니까요. 하나님이 거기서 능력으로만 사용이 되는 거란 말예요. 하나님이 주인이 되야 되요. 사도바울이 정말 집요하게 율법을 폭격하면서 은혜를 설명하고 있는데 9절 부터는 할례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서 또 다시 율법주의를 부수고 있어요.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게 할례 받기 전이냐 할례받은 후냐? 물어보고 있죠? 아주 아브라함 얘기 지겹죠? 로마서 4장이 제일 재미없어. 한 얘기 또하고 한 얘기 또하고 그만큼 이것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아주 귀가 가려울 거 같애. 저 만나면 이럴거 같애요. ‘야, 내 얘기밖에 정말 할 게 없었냐?’ 아니 성경에 당신 얘기 밖에 없는데 어떻게 해요 그럼? 지금 아브라함이 천국에서 그럴거 같지 않아요? ‘그래 나 두 번 팔아 먹었다, 아 됐니? 매번 설교 때마다 그렇게 확인해줘야 되냐?’

여러분이 한번 대답해보세요. 아브라함이 의인이 된 게 할례 받기 전이예요, 후예요? 전이죠? 할례라는 말이 처음 등장 한 건 창세기 17장인데 창세기 1장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요. 그런데 입만 열면 할례, 입만 열면 율법 하는 너희들, 너희들이 그 할례를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럼 아브라함은 뭐냐?

할례 받기 전에 먼저 의롭다 칭함을 받은 아브라함은 뭐냐? 그럼 너희들 아브라함의 후손 아니니? 까지 물어보는 거예요.

 

롬 4장 10절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정확하게 정말 너희들의 행함으로 할례와 율법 지킴이 사유가 되어서 그것이 너희들의 의인됨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냐를 물어보는 거예요. 그럼 이런 질문이 들겠지요. 그럼 이미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에게 할례는 뭐하러 행하라고 시키느냐? 이게 중요한 거예요. 이게 오늘 본문의 키포인트 예요. 왜 믿음으로 이미 의롭게 된 여러분을 묵시 속에 완료 되어있는 여러분을 왜 굳이 여기 역사라는 다른 차원에 만들어서 내려 보낼까요 왜? 그게 그 이야기거든요 .

왜 믿음으로 의롭게 됐으면 천국으로 데리고 가던지 가나안 땅으로 얼른 번쩍 들어서 옮기던지 하시지 왜 그가 인생에서 할례라는 그걸 경험하게 하실까요?

롬 4장 11절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음으로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그걸 설명하는 거란 뜻이예요. 그걸 확증하는 거란 뜻이예요. 아, 믿음으로 받는 의란 이런 거구나를 할례라는 역사와 경험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의 인생이란 말이예요. )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를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어차피 할례, 세례는 쎄클라멘트 예요. 그죠? 심볼리즘이란 말입니다. 그 자체가 효력이 있는게 아니란 말이예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한 건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라고 인정을 받은 그 구원의 현실이 확실하고 변개 될 수 없는 고정적이며 완료적인 현실임을 확증하는 표식이었단 말이예요. 우리가 인생 속에서 그걸 배우고 가는 거예요. 그 할례 행함이 어떤 효력과 효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설명이요 표식이란 말예요. 그게 인친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게 그게 진짜 할례거든요. 그래서 그 밑에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이 지나간 그림이 붙어 있는 거예요. 그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희생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게 그게 할례란 말이예요. 하나님이 할례받음으로 그가 의롭게 된 거 그걸 설명 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고추 끝을 자르게 하는 할례의 삶을 경험하게 하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의 인생이며 역사이며 역할 인거예요. 이 역사는 율법아래 붙들린 채로 움직여 가죠 그죠?

할례는 율법입니다. 그래서 이 역사를 율법의 종이라고도 하는 거 잖아요 성경이. 율법의 종, 율법 아래에 낳았다 그러잖아요. 이 역사가 할례처럼 이미 확정되고 완료된 어떤 걸 설명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역사를 율법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미 묵시 속에 완료된 어떤 일을 역사가 율법, 인본주의, 유대주의라는 걸 내어 놓으면서 이 묵시 속에 완료된 이 현실이 누구에 의해, 누구를 위해 완료 됐는지를 설명 하는 게 역사란 말예요.

성경신학의 중요한 진술 중에 종말은 창조의 완성이다 라는 말이 있어요. 그건 이미 완료된 새창조가 이 역사라는 과정을 통과하면서 그 새창조의 현실을 설명하다가 결국은 종말을 거쳐서 다시 원래의 새창조로 돌아가는 것이다라는 뜻이예요. 그래서 게알더스 보스가 이거를 Escotology process of soteology 라고 그랬죠? 종말이 구원을 앞선다. 이미 하나님 나라는 묵시 속에 완료가 되어있어요.

그걸 요한이 올라가서 묵시를 보고 ‘아.여기 다 있네’ 그리고 묵시록을 쓴 거죠? 요한묵시록, 요한계시록.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가서 ‘어 여기 다 있네, 여기 나 있네’하고 내려와서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있었다는 거예요. 봤다니까요. 모세가 올라가서 ‘오, 여기 완료되어 있네’하고 내려와서 성막 지은 거 아닙니까? 히브리서에 나오지요? 내가 보여준 대로 내려가서 지어라 하나님 그게 나라잖아요. 완료되어 있는 어떤 게 있단 말입니다. 그걸 역사가 지금 설명 해내고 있는 거예요.

왜 너희들은 죽은 흙이며 왜 아담이며 거기 생기가 부어지지 않으면 왜 하이네페시 하야, 생령이 못되는 지를 여러분은 여기서 그냥 배우는 거예요. 그래서 그 생기를 붙드는 자가 되는 거죠.그게 복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이런 말이예요,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뿐인 영원이라는 영역 속에서 그게 뭔지 아무도 설명해 낼수는 없어요. 영원한 현재뿐인 그 영원이라는 영역이 있어. 왜 영원한 현재뿐이 없다 그러느냐면 그나라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으로 창조해 내시는 완성해 내시는 나라이기 때문에 거기가 하나님 나라 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현재 밖에 없다는 거예요.

이것은 더욱더 건설되고 성숙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으로 그냥 창조해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현재라는 뜻이예요. 그러나 존재가 움직이기 때문에 흐름은 있단 말이예요. 이렇게 하고 그냥 (멈춘 상태로? ) 사는 게 영원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라면 그냥 이러구 (멈춤 상태?) 있어야 되는 거 아니예요. 그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의 말씀으로 창조해내는 그 나라. 그 나라는 무엇을 보태거나 고치거나 발전 시키지 앟아도 이미 충분한 완료의 나라란 말예요. 거기는요.

거기에 여러분이 창세전에 구원을 받아 들어가 있다는 것이 에베소서 1장이잖아요. 그런데 그 영원한 영원과 다른 차원의, 영원은 역사로 인해 뚝 끊겼다가 다시 영원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영원은 그냥 영원이고 다른 차원의 역사가 잠깐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거란 말이예요. 그러니까 그 영원, 그 영원은 있는데 그 영원과 다른 차원의 역사라는 게 잠깐 생겼어요 이게 뭐를 모형하느냐하면 이 새창조를 모형하는 거다 그래요. 성경이 그거를. 원형의 모형으로 역사라는 게 이렇게 잠시 창조 되었다가 이 원형을 설명 하고 모형이 사라지는 거예요. 모형의 역할이 뭐예요? 모형 비행기의 역할, 아 비행기가 이렇게 생겼겠구나를 설명해주고, 또 하나는 이거 진짜 비행기 아니네, 이게 모형이잖아요.

이게 역사의 역할이며 인생의 역할이예요. 여러분의 옛 자아, 이게 새 사람을 설명하는, 왜 하나님은 새 사람을 우리에게 입혀줘야 되는가, 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피조물이 뭐예요? 새롭게 창조된 게 새로운 피조물이죠. 왜 새로운 피조물이어야 하는 가를 설명하는 거예요. 여러분의 옛 자아가. 그렇게 완료된 묵시의 현실을 모형으로 이렇게 만들어서 역사 속에, 태초에 레시트, 확 흩어버리는 거예요. 혼돈과 공허로, 확 흩어버리는 거. 마치 대국이 다 끝난 바둑판을 확 흩어 버리고 프로 기사한테 정확하게 복기하라고 하면 그 사람들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복기합니다.

그것처럼 완료 되어 있는 이미 승리한, 완료 되어 있는 묵시 속의 현실을 모형으로 역사속의 혼돈과 공허로 확 흩고 하나님이 복기해 나가면서 하나님나라를 설명해 나가는 게 역사란 말이예요. 여기에서 여러분이 이 역사를 어떻게 진보 시키고 발전시키고 개발 시켜서 지금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인간들을 보다 성숙시키고 발전 시켜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게 우리의 삶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왜 새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창조해 놓아야 그게 진짜 영원히 갈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게 우리의 역사의 역할이란 말이예요.

빨리 지리산으로 들어가야지..... 어차피 혼자 떠드는 거, 아무도 못 알아듣네. 아른 예로 설명을 하면, 묵시라는 이 수직의 현실, 왜 제가 수직이라고 하느냐하면 이거는 한 번에 완료된 거니까 수직이예요. 묵시는 수직으로 서고 여기에 하나님의 빛이, 말씀이 확 비치면 이게 그림자를 드리워요. 이 묵시는 십자가로 완료가 되기 때문에 이 십자가를, 묵시를 빛으로 확 비치면 역사에 그림자가 수평으로 쭉 생기는데 이걸 역사라고 해요. 그런데 이건 실체가 아니잖아요. 하늘에 비행기가 가면 땅에 그림자가 생기는데 이 실체에 의해 그림자가 같이 가지만 이것은 실체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걸 역사라고 해요.

그러니까 역사는 이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가치가 있는게 아니라 진짜 가치인 묵시를 설명하는 역할, 그리고 불살라지는 거예요. 여러분의 인생 또한 마찬가지란 말예요. 그러니까 역사란 홀로 독립적으로 방향을 정하여 스스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완료된 묵시에 의해 이미 결정된 방향으로 흐르도록 되어 있어요. 이 묵시와 관계없이 얘가(역사가) 우발적으로 움직여지지 않아요. 그걸 예정이라고 하는 거예요.

할례가 예수의 할례를 설명하는 용도로 주어진 것처럼, 오늘 본문에서 봤잖아요. 할례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의 진짜 할례를 인치는 거라고, 명하는 거라고 했으니까. 그 할례가 예수의 할례를 설명하는 용도로 주어진 것처럼 율법주의, 유대주의, 이 아래에 있는 이 세상은, 할례는 왜 예수의 희생으로만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수 밖에 없는가를 설명 하는 거예요. 리고 확증하는 역할로 잠시 있다가 사라질 거란 말이예요.

그래서 산호초 계속 없어져야 되요. 이제 오존 뻥뚫릴거예요. 그리고는 결국 ‘어이구, 없음이네’ 결정 날 거란 말입니다. 오존을 어떻게 막을 거예요. 뚫어진 오존을. 구름으로 위와 아래로 갈라지는, 그 시내산에서 율법 수여 장면을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중보자 예수를 모형하는 모세에게 하늘의 법을 모형하는 율법을 주시죠? 그런데 산 위로 올라가요. 산 위. 제가 팔복 강해할 때 산 위에 있는 동네가 무슨 동네라고 했어요? 누가 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겠느냐? 이걸 들면 뭐가 확 드러난다? 산위에 있는 동네가 감추어짐 없이 드러난다고 그러죠?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예루살렘 이예요. 시온산 위에 예루살렘이 있었으니까. 그건 곧 율법주의죠? ‘이스라엘 ‘이예요. 이 인간세상, 역사를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빛이 확 들리면 이 산위의 동네 이 예루살렘이 ,율법으로 자기들을 근사하게 치장한 동네가 그 실체가 시커멓게 확 드러난다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산 위의 동네 거든요.

그런데 이 이스라엘은, 산 위의 동네는 산 위의 현실, 그러니까 묵시 속의 현실을 바라보며, 하늘의 현실을 바라보며 살도록 택해진 하나님의 백성이란 말이예요. 그런데 이들이 그 위를 못보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유대인들의 모습이란 말이예요. 이스라엘의 모습이란 말예요. 하나님이 왜 굳이 하늘의 법을 모형하는 율법을 주는데 왜 굳이 산 위로 끌고 올라 갔느냐 하면, 너희들, 산위의 동네라고 하는 이스라엘아 너희들은 바로 이 산위의 현실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못본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열어 주지 않으면. 그래서 구름으로 가려버리고 예수의 모형, 하나님의 아들의 모형, 중보자의 모형인 모세에게만 하나님이 이야기를 하세요. 율법을 주는데 언약이 체결되고 있는 거예요. ‘ 지켜라, 안지키면 죽어, 지켜’

에덴 동산의 그 선악과 이야기가 또 한번 반복 되는 거예요. ‘지켜라’ 그런데 아래 사람들이 산 위를 봐야 되는데 산 아래에 착념하다보니까 산아래의 신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게 하나님이다 라고 하고 있는 거예요. 그들을 폭로시켜내는 거예요. 산 위의 법, 하늘의 법이, 율법이 내려와서 이들을 광야로 끌고 가는데 거기에서 어떻게 끌고 가요? 어떻게 폭로시키죠? 다 죽어야 될 자로 폭로시키고 죽여버리는 거예요. 광야에서, 인생에서. 이게 역사의 실체란 말입니다.

하늘의 법이, 묵시가 내려와서 그들을 끌고 가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구름이 움직이면 가고 구름이 서면 선 거예요. 묵시가 움직이는대로 간 거예요. 이게 역사예요. 여러분은 여러분이 뭐 열심히노력하고 열심히 애를 써서 또 다른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완성되고 결정 되어있는 그 하늘의 현실을 이 세상에서 배우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개혁이란 말이 틀렸다고 제가 말하는 거예요.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가 만들어 낸, 하나님과 관계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 교회라고 하는데, 그 십자가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 냈길래 그 교회를 개혁을 해야 되냐구요? 교회는 개혁하여 세상 사람들이 다 칭찬하는 곳으로 만들어지는 곳이 아니라 이 곳에 있는 몇명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도대체 인간이란 존재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가면 죽은 흙일 수 밖에 없는 것이구나를 배우고 가는 거예요. 그런데 뭣 놈의 개혁을 한다는 거예요? 도대체가. 이게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라니까요. 뭘 분노하라는거예요? 어디에 분노하는 거예요? 원래 우리는 당연히 그런 존재인데.

율법을 올바로 이해한 사람들은요 그 율법을 통하여 예수를 믿게 되는 거예요. 이 역사가 율법 아래에 움직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없으면 큰일 나는 거예요. 그 율법이 예수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율법이 선하다고 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그 말은 율법의 세목을 다 지켜내야 된다라는 말이 아니 잖아요. 율법이 하늘의 법이니 다 지켜야 된다? 그럼 여자들은 하늘에 가서도 멘스합니까? 그거 있잖아요? 그거 율법이예요. 여자들 한 달에 한 번 부정하게 되니까 제사 지내라 율법이란 말입니다.

그게 하늘의 법이라면 그걸 하늘에 가서도 다 지켜야 되는 거냐구요. 그 말이 아니라 율법을 지킨다는 건 율법의 내용인 예수를 믿는다라는 뜻이란 말예요.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이 율법이, 이 율법의 세상이 선한 것으로 사용되어져서 율법은 선하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지키는 게 선한 게 아니고. 반드시 하나님께로 예수께로 끌고가기 때문에 율법이 선한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 밖의 사람들은 그걸 갖고 자기의 자존심과 영광들을 챙겨 간단 말예요. 그래서 율법으로 망하는 거예요. 거꾸로들 알고 있는 거죠. 잘 지켜야 살고 안지키면 죽는다라고 알고 있잖아요 지금.

그 율법,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에서 선한 법으로 사용되는 게 아니라 예수가 할례 당하여 죽었음으로 이 나라가 완성 되었다 라는 것을 믿고 그분의 은혜만 의지 하는 게 하늘의 법이예요.그게 하늘의 통치 원리 잖아요.그런 언약이 구름 위에서 하나님과 모세와 체결되고 있는 거예요. 그 모세는 예수의 모형이라고 했죠? 그 언약은 예수의 피로 성취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약이라고 했어요. 그걸 히브리서 9장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히9장 15절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언약은 언약을 체결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언약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 즉 언약을 체결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그래서 예수가 이 역사 속에서 죽는 것이고 모세가 역사를 상징하는 광야에서 죽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 나라가 오는 거란 말예요.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님 아들간의 언약은 하나님 아들의 피흘림이 전제가 되는 언약이예요. 그 피흘림이 없으면 그 언약이 효력을 발생하지 못해요. 그래서 피흘림이 없으면 생명이 없는 거예요. 사함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기 위해선 인간 측에서의 그 어떤 노력이나 열심이나 자격도 보낼 수 없다라는 걸 오직 예수의 피로만 너희들은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설명을 하는 거란 말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자기 비움, 그 십자가, 그 피흘림, 그 부어 주심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다는 하나님의 그 주최자 되심, 하나님의 그 주권을 설명하는 거예요. 다시 한번 에베소서 1장으로 가보세요. 창세전 언약.

엡1장 3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 여기가 출발점이예요. 복은, 상은 이 역사 속에서 행한 일을 근거로 여러분에게 차등있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 창세전에 먼저 받고 내려오는 거예요. 복에서 시작 된단 말입니다)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사 우리를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깊으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다 과거 완료예요 이거. 완료 되었다 라는 )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함이라.

복을 창세전에 이미 주어 놓고 그 복을 역사 속에서 설명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의롭다 칭해놓고 역사 속에서 할례의 삶을 살게 하는 거예요. ‘넌 진짜 무용지물 맞지? 예수가 할례 받아야 살 수 있는 거 맞지? ‘ 이거 가르치는 것. 그래서 하나님만 찬송 받는 것. 이게 역사의 목적이란 말입니다.

7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자, 그렇게 우리가 먼저 복을 받았다는 건, 완료된 하나님의 나라 그 안에 내가 들어가 내가 하나님 나라가 된 거예요. 내가 거룩한 나라잖아요. 베드로가 그러잖아요. 우린 거룩한 나라라고. 내가 하나님 나라가 된거 란 말예요. 그게 복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완료의 세계, 묵시의 세계 그게 복인데, 그 복을 받은 자들이 이 땅에 내려와서 이 역사 속에 내려와서 예수의 피가 아니면 도저히 그 나라가, 나라가 될 수 없다라는 걸 증명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역사와 인생의 처음 자리, 처음 자리가 뭐죠? 아담, 흙이잖아요 흙, 그걸 확인하고 이것들이 만들어 내는 건 나라도 될 수 없고 건축이 될 수 없구나, 건설이 될 수 없는 거구나. 그래서 ‘건축자들아, 건설 멈추고 건축 멈추고 모퉁이 돌로 내려오신 예수를 모퉁이 돌 삼아 하나님이 지으시는 그 나라 붙들라’고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이 역사의 역할이 복 받은 자들이 내려와서 그 복의 실체를 배우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창세기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은 복 부터 받고 시작하는 거예요.

아담과 하와가 만들어지자마자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구원 받았다고 했어요. 왜? 창세기 3장 15절이 원시복음이니까, 그 복음을 이해하고 아내 이름을 산 자의 어미라고 지었으니까. ‘아, 우리는 여인의 후손 예수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거구나’ 라는 고백을 한 거란 말예요 그게)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기 전에 아니, 에덴 동산이 만들어 지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묵시 속에서 구원 받은 사람이란 말예요. 그런데 그 복 받은 사람이 이 땅에 내려와서 그 복을 갖고 이 세상의 실체를 알아 먹을 수 있는 복을 갖고, 딴 복이 아니라 이 역사와 인생의 실체를 알아 먹을 수 있는 복을 갖고, 그걸 진짜 인식해 내는 걸 역사와 인생이라고 한단 말예요.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만들어 지자마자 복 받고 그 다음부터 선악과 따먹으면서 ‘아, 이거 우리 죽은 흙 맞네’ 라는 걸 폭로당하는 거예요. 복 받자마자, 선악과 먹는 거예요. 따라서 복받은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내가 죄인 맞네를 먼저 배워야 되는 거예요. 그게 복받은 사람이예요. 그리고 ‘이 역사와 인생은 도저히 가치가 될 수 없는거구나’를 배워야 되요.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망해보기도 해야 되고 이 세상 것들 많이 모아 놨다가 이게 허무하다는 것을 또 배워야 되고 또 내가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 여전히 변하지 않는 자기의 모습을, 실체를 올바로 바라볼 수도 있어야 되요. 그러니까 복받은 사람은 자주 망하고 자주 개차반 되고 그래요. 그러니까 막 살아야지? 그게 마귀예요.

창1장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었어요.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그들이 땅을 정복하게 되지요.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이 세상의 후사라 그러죠? 상속자예요. 그러면 이 세상을 상속해준 다는 얘기예요? 아니요 세상이 아니라 복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완료하신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이 세상을 받게 되어있어요. 다스리고 정복하게 되어있는데 자기들의 힘으로 정복하겠다고 그 세상을 마귀의 세상으로 만들어 내는 거예요. 복받은 아담과 하와가 바로 그 다음에 선악과 따먹고 마귀짓 하는 거.

구원 받았다고 하는 성도가 바로 말씀으로 은혜 받았다고 하고 돌아가면서 싸우는 거 생경한 일 아닌 거예요. 그런데 성도는 반드시 ‘그래서 예수가 필요해요’로 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이들이 제일 처음 장악해야 하는 게 ‘난 죄인이구나, 난 죄인이구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고 ‘아 우린 죽은 자 맞네’ 이걸 장악하게 되고 창세기 3장 15절의 그 원시 복음을 듣고 그 말씀 속에서 여인의 후손의 은혜로 산 자가 되는 구원의 현실을 이해를 하고는 하나님 앞에 면목 없는 죽은 자로 다시 이렇게 내려가는 거예요.

아담, 진짜 아담이 되는 거예요. 나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서 두 번째 아담인 예수가 나를 그렇게 ‘없는자’ 아담으로 만들어 줘야 나는 비로소 살 수 있다는 거, 이걸 아는 거요. 이게 이 세상 아담 군상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하고 가야할 일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왜 하나님의 첫 번째 백성인 아담을 지으시고 흙이라고 지었겠어요 이름을? 아담이 흙이라고 했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흙으로 존재해야 되는 거예요. 없음으로 존재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하나님이 하나님 것으로 다 줄 수 있어요.

그래야 하나님이, 창조의 하나님이 찬송을 받으실 거 아닙니까. 그런데 흙이 자기 스스로 자가발전 이런 거 해갖고 그 존재됨에 기여를 하면 흙과 하나님이 영광과 찬송을 나누어 가져야 되요. 하나님은 그런데 내 영광과 찬송을 누구에게도 안 나눠준다고 했단 말예요.그러니까 여러분은 거기에 기여가 되면 안되요.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흙이어야 되요. 그런데 그 흙, 없음, 아담이고 싶은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러잖아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서 보내거든요. 그래서 있음의 흉내를 내는 거예요. 그게 역사란 말이예요. 그러나 성도는 반드시 그러한 있음의 흉내가 마귀의 발광인걸 알게 되요. 그리고는 그 있음의 흉내를 멈추고 죽은 흙으로 다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거예요. 아담 보세요. 선악과 따먹고 기세등등하게 산 자 행세 하려고 했는데 그게 바로 죽음으로 가는 길임을 알게 되지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죽은 흙으로 아담으로 자신의 처음자리를 지키고 인정하는 게 사는 길임을 알게 되요. 아담이요. 그러니까 복받은 자들은 다 자신들의 처음 자리인 죽은 흙의 자리로 폭로가 되는 그 길을 걷게 되어있는 거예요.

망하셨어요? 예, 복 받은 거예요. 자기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게 예수 믿는 성도야? 난 아냐, 가짜일지도 몰라, 예 복 받으신 거예요. 믿지 않는 자들은 절대 그 고백을 못해요. 믿는 자만 그 고백 할 수 있어요. 나 아담 맞네, 나 죄인 중의 괴수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꺼내줘야 되지? 아 예수! 이것까지 알고 가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이 역사와 인생은 복받은 자들의 처음 자리 확인과 그러한 죽은 흙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인쳐지는 자리예요. 욥도 마찬가지죠? 욥기가 어떻게 시작해요? 욥은 의인이다! 그래놓고 40장 내내 욥의 치부만 들춰내는 것입니다. 그게 역사란 말이예요. 우리 인생이란 말예요. 그러고는 결국에 나중에는 ‘내가 하나님을 보게 되었네요. ‘ 이게 우리 역사와 인생의 역할이란 말예요. 그게 의인이라니까요.

욥이 처음에는 자식들 머릿 수대로 제사 지내고 온갖 율법의 행위를 다해요. 그런데 광야, 40장 내내 자기의 죄된 모습을 폭로 당하고 난 다음에 그런 거 했다는 말 없어요. 율법에서 빠져 나오는 거예요. 그게 의인의 삶이란 말이예요. 아브라함 마찬가지죠? 아브라함도 갈대아 우르에서 나오자마자 무엇부터 받아요? 복 부터 받아요. 그런데 복 받고 자기가 얼마나 추악하고 불가능 한자 인지를 폭로 당하는 삶을, 인생을 산단 말입니다. 복을 받고 . 15장 1절에서는 상까지 줬대요. 상금, 상, 내가 상이다 그러잖아요. 복 주고 상 줬는데 그의 인생이 없음으로 드러나 버리는 거예요. 폭로가 되버리는거. ‘아,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면 진짜 존재일 수도 없구나’이거 배우는 거예요. 이게 인생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받은 복은 묵시 속 완료의 현실, 하나님 홀로 이루신 완료의 현실을 말하는 거예요. 창세기 12장으로 가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면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될거다 그러죠? 그건 번역이 잘못된 거예요. 히브리 원어로 보면 ‘너는 복이다’ 예요. 그러니까 복은 여러분이 잘해서 하나님께 받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존재하는 여러분 자신이 복이예요.

그래서 그걸 하나님 나라라고 하고 그걸 성전이라고 하고 그걸 새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복이예요. 그래서 이 복은 지옥에 가도 복이예요. 그걸 이해하셔야 되요ㅡ 그러려면 여러분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되고 여러분을 사랑하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되요. 딴 거 다 필요 없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네가 복이다! 그래놓고 바로 그 밑에 절에서 너로 인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래요. 그럼 천하만민은? 천하만민 중에 구원 받는 백성 그 백성이 뭘 받는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아 네가 복이다 그랬으니까, 아브라함의 인생을 그대로 유전 받는 거예요. 그게 복이예요. 아브라함의 인생이 뭐였어요? 뭔가 하나님의 역사에 기여를 하려고 하다가 결국 마지막에 자기 심장에 칼 꽂고’난 아니네요, 하나님 하나님의 언약은 홀로 성취하시는 거네요, 여호와 이레!’ 로 끝나는 거예요.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물, 어린양에 의해 완료되는 게 하나님의 언약 성취네요 ‘ 알고가는 거예요. 그 아브라함의 인생이 여러분 것이 되는 거예요. 그게 복이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아 네가 복이다, 너를, 너의 인생을 네 후손, 믿음의 후손들에게 내가 나눠줄거다. 그 아브라함의 인생이 바로 십자가의 인생이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만 그 아브라함의 인생, 십자가의 인생을 거부하거나 그런 인생이 닥쳤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리로 안가게 된다는 뜻이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축복하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저주 받는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뭔데? 아브라함의 그 인생이 수긍이 되고 동의 되는 자가 복받은 자란 뜻이예요. 그거 아니야, 뭘 다 하나님이 해? 우리도 해야지 이게 저주 받은 자란 뜻이예요. 그렇게 복 받은 아브라함, 아니 복이된 아브라함이 15장에서 의인이 되는데요 그 선포의 현장을 제가 다시 한번 설명해드리고 갈께요.

창15장 6절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니라

이 어절에서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것을 히브리어로 보면’믿으니’ 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가 와우 계속법이라고 했죠? 그리고 사역형 동사예요. 히브리어에는 그런 게 있거든요. 사역형 동사라는 건 하나님이 시킨 거, 그러니까 ‘믿었다’는 아브라함이 믿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믿게 하셔서 의인 만들었다는 뜻이예요. 그래놓고 믿게 하셔서 의인 만들어 놓고 인간들이, 이 인본주의 유대주의, 율법주의가 절대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길을 끌고 가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믿음이예요.

의가 뭐라고 했어요? 의로운 일을 많이 하는 게 의인이예요? 그 의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이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성실하게 수행해내는 상태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 의의 관계가 진짜 의의 관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요?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계속 존재 해야 되고 우리는 하나님 절대 의존의 피조물로 존재해야 이게 의의 관계란 말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기호와 상관 없이, 아니 4천 년전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던 곳에서 광야, 화장실 가려면 땅을 파야 되는 이런 곳으로 끌려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끌어가는 그것에 순종할 수 밖에 없는 이걸 의인이라고 그래요.

착한 일 몇개 해놓은 걸 의인이라고 하지 않는단 말예요. 성경에서는. 이렇게 일단 의롭다고 해놓고 하나님이 언약을 주시는데 그리고 그 밑에 그 유명한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이 지나가시는 그림이 붙어 있는 거란 말이예요. 오늘 본문이 어려워요 그래서 이렇게 길게 설명을 해드리는 거예요. 이것을 다 이해하시면 여러분은 이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다 이해하시는 거예요.이 쪼갠 고기 사이로 언약의 당사자가 지나가는 건 당시 고대시대 때약속을 하고 언약을 체결할 때는 항상 언약 당사자가 제물을 쪼개 놓고 가운데를 같이 지나감으로 말미암아 이 언약이 깨지면 이렇게 쪼개는거야 이렇게 죽는 거야 이 뜻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강대국의 왕과 약소국의 왕이 언약을 체결할 때는 약소국 왕만 지나가게 되어있어요. 그 나라와 백성을 대표해서. 강대국왕이 지나갈 필요가 없잖아요. 주권을 내가 갖고 있으니까.

그러면 아브라함이 지금 아브라함 후손의 대표로 거기를 지나가야 되요. 아니면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같이 지나가던가, 하나님이 강자니까. 그런데 횃불과 연기 구름이 불기둥 구름 기둥으로 임재하신, 현현하신 하나님이예요. 횃불과 연기가, 하나님이 혼자 지나가요. 아브라함이 대표가 되어 아브라함이 언약 당사자, 언약 대표가 되어야 되는데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의 언약 대표가 되는 거예요. 이게 십자가예요.

렘 34장 18절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둘 사이로 지나서 내 앞에 언약을 세우고 그 말을 실행치 아니하여 내 언약을 범한 너희를, 곧 쪼갠 송아지 사이로 지난 유다 방백들과 예루살렘 방백들과 환관들과 제사장들과 이땅 모든 백성을 내가 너의 원수의 손과 너희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붙이리니 너희 시체가 공중의 새들과 땅의 짐승의 식물이 될 것이며

이게 그 모형이예요. 쪼갠 고기 사이로 이스라엘의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대표가 지나갔어요. 그런데 언약이 깨졌어요. 하나님이 다 죽인다, 그러는 거예요. 대표가 지나갔지만 어겼기 때문에 다 죽인다. 이게 원래 우리가 가야할 길이란 말이예요, 이게. 그런데 이 백성과 방백들의, 제사장들의 대표로, 우리의 대표로 예수님이 지나가 버린 거예요. 십자가에서. 그리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쪼개진 거예요. 언약이 깨졌거든요. 그 이야기를 아브라함의 할례의 이갸기가 담고 있는 거예요.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 란 책 있죠? 존 오웬이 쓴 것. 그게 그말이란 말예요. 우리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이 먹어버린 거예요. 여기에서 쪼개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단어가 ‘바타르’ 라고 있어요. 그 ‘바타르’ 언약이 부결되면 반드시 쪼개져야 되는데 이 쪼개다, 쪼개짐을 성경이 끊어진다, 잘라내다 이런 단어로도 표현을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 언약의 내용이 뭐였느냐 하면 내가 너의 후손을 주고, 백성, 땅을 주고, 나라, 국토죠, 내가 너의 왕이 될 거야(상급이 될거야)국민, 주권, 영토. 나라의 삼요소 잖아요. 하나님 나라를 약속 하는 거예요. 이게 언약의 내용이예요.

그런데 그게 우리예요 또.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쪼개짐으로 완성이 될 거라는 걸 아브라함에게 알아먹으라고 그림으로 설명한 게 창세기 15장이예요. 그리고 너는 의롭다 라고 이야기 한 거예요. 그러면 의로운 자, 복받은 자는 이 세상에서 반드시 어떤 자임이 폭로된다?’ 나는 죄인이네, 나는 죽은 흙이네’ 이게 폭로 된다 그랬지요? 그럼 아브라함이 의인이다, 믿음이다. 이 은혜의 언약을 받은 다음에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야 되요? 창세기 16장에서. 자기의 힘으로 뭔가를 만들어 내는 모습으로 드러나야죠. 이게 율법주의잖아요. 이게 이게 역사잖아요. 그런데 ‘그건 아니다, 꽝이다’가 하나님의 선언이고. 그래서 창세기 16장에서 은혜의 언약 바로 다음에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 나오는 거예요. 인간 측에서의 열심과 노력으로 무언가가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걸 인정 안해줘 버리고 다시 설명을 하세요. 할례가 뭔줄 알아? 내가 창세기 15장에서 너에게 이야기 한 그게 뭔줄 알아? 하고 할례 행하라 하고 이야기 한단 말예요. 이게 여러분의 인생에서 겪어 내야 할 일이란 말입니다. 보세요. 언약이 깨졌어요. 이젠 누가 죽어야 되는 거예요? 창세기 15장에서 언약을 했단 말예요.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이 지나 갔단 말예요. 그런데 언약이 깨졌어요. 아브라함이 거기에 뭘 보태려고 했단 말예요.

하나님이 혼자 한다 그랬는데. 아브라함 때문에 언약이 깨졌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쪼개져야 되잖아요.그게 십자가 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마저도 죽일만큼 집요한 자아, 자아 챙기기 자기 존재성 , 주체성 챙기기에 달인들 이라는 뜻이예요. 이것 보세요. 왜 아브라함이 그렇게 쉽게 언약을 깼을까?



창 16장 1절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리라.


갑자기 애굽이 등장해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 애굽으로 보내졌어요. 하나님이 보낸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끌어내는 거죠? 애굽은 율법의 종, 이 세상의 종인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이죠? 여기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여기도 보세요. 애굽 여자라는 말이 굳이 등장하는 건 바로 이제 율법이라는 게 마귀의 종, 율법의 종의 개념이 여기서 이제 등장한다라는 걸 암시하는 거예요. 하갈 , 애굽 여자, 이런 단어들이 지금 등장하고 있단 말예요.그런데 하나님이 언약을 주셨는데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조금 어울리지 않죠? 내가 너희들에게 후손을 주겠다고 그랬으면 그 약속을 받은 즉시 사래가 생산하였더라, 잉태하였더라. 그래야 맞잖아요?


그런데 약속을 주셨더라, 그런데 생산치 못하였더라. 왜 하나님이 이꼴로 만드시냐구요? 약속을 줬어요. 복을 줬어요. 너는 의인이다, 하고 선언을 해버려놓고 생산을 못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이게 우리의 모습이예요. 구원 받았다면서요? 하나님 백성이라면서요? 그런데 하나님 백성다운 삶이 생산이 안돼! 그때, 무얼 하려고 해요, 우리가? ‘기다리지 못하고 하나님은 약속으로 성취해 낼거야’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여기에다가 화장을, 이제 떡칠을 하는 거죠. 도덕 윤리 이런 걸 가지고 이스마엘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왜? 증거가 필요해요. 믿음이 없으니까. 증거가 필요한 거예요. 내가 의인이고 복 받은 자라는 증거가 필요해.


하나님이 나에게 약속을 주셨는데 증거가 없어, 생산이 안되요. 그러면 뭐라도 해야 될 거 아녜요? 이게 율법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갈이라는 여자가 애굽 여자로 등장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요게 기각 되는 거예요. 부정 되어 버리는 거란 말입니다. 이 시대에 이 교회 안에 파고들어온 율법주의가 바로 그거예요. 알메니안 주의, 성화론 이런 것이 바로 그런 거란 말입니다. 왜곡된 성화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열심히 노력해, 분노해, 투쟁해, 만들어, 기여해! 해놓고 우리는 할 수 있잖아. 이거, 이게 하갈이예요.


하나님이 왜 후손을 주겠다고 하고 생산치 못하게 했을 거 같으세요? 그가 ‘나는 진짜 생산치 못하는 자’라는 자각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신 거예요. 그래야 하나님이 주셨다는 걸 알잖아요.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까지 다 사라지기를 기다리신 거예요. 그런데 조바심이 났어요. 이렇게 가다간 진짜 안될 거 같애. 인간의 생각이죠. 아브라함의 힘이 남아 있을 때,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하나 낳자’, 낳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걸 인정하지 않아요.


여러분, 언약의 성취 과정에 자기들의 열심이 필요할거다라고 하는 게 바리새인이었죠? 율법 지키고 제사 지내고 할례 받고. 이게 하나님의 백성되는 데에 기여할 거라고 생각했잖아요. 이게 율법 이잖아요. 이게 예루살렘이란 말예요. 지상의 예루살렘. 그런데 그 율법,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을 왜 돌았다구요? 이게 인생이라고 했어요, 역사의 모형. 약속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 있는데 자기들의 자격과 조건을 자꾸 보는 거예요. 그리고는 ‘우리 힘으로 안돼’ 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했기 때문에 역사를 산 거잖아요. 그리고는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이렇게 죽을 수 밖에 없는거구나를 보인 게 광야에서 1세대가 다 죽은 거란 말예요.


그러나 그렇게 죽어야 하나님이 살릴 수 있어요. 그래서 2세대가 은혜로 그냥 들어 가는 거예요. 똑같은 인간들인데도 불구하고. 마찬가지예요. 아브라함이 약속의 후손을 생산하는 건 하나님의 약속으로 되는 거지 그들이 하나님의 후손 생산에 무얼 도와 주어서 되는 게 아니란 말이예요. 그런데 인간이 했단 말예요. 이게 율법이란 말이죠. 그게 바로 마귀란 말예요. 에덴 동산에서 뱀이, 죄가 아담을 어떻게 미혹했냐 말예요. ’네 힘으로 하나님 돼, 넌 할 수 있다니까’, 그랬잖아요. 이게 율법이란 말입니다.


그걸 하나님이 애굽의 종으로 설명을 해준 거잖아요. 그렇게 종 되었던 곳에서 하나님이 뽑아 내어 그들이 먹고 싶은 것 못먹게 하고 하나님이, 그들이 아주 귀찮아하는 만나와 메추라기만 먹여서 하나님 나라로 끌고 가는 게 역사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갈을 애굽사람이라고 밝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약속이 떨어진 상태에서 인간의 행위로 약속에 일조를 하려고 하는 그게 바로 애굽의 종 마귀의 종의 현실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 애굽으로 보내지고, 그들이 가고 싶어 간 게 아니예요. 하나님이 보내 놓고 거기서 꺼내는 게 구원이라는 게 이게 무슨 소리냐구요. 자기가 보내 놓고, 구원의 현실을 설명 하는 거란 말예요. 성경은 한치의 오차도 없어요. 갈라디아서 4장 21절에 보면 정확하게 바울이 그걸 이해했어요.



갈 4장 21절

내게 말하라 율법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낳았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낳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율법,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지금 예루살렘이 뭐예요?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이 사는 거기, 그들이 바로 시내산이더라는 거예요, 지금)저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 그들은 자유자니 곧 우리의 어머니라 


이거는 누구예요? 사라, 아무런 능력이 없는데에서 하나님이 점지해주니까 나온 거예요.

하가, 계집종, 시내산, 율법, 옛언약, 이게 모두 같은 내용이고. 사라, 자유하는여자, 하늘의 예루살렘 우리 어머니, 새언약 이게 다 같은 내용이예요.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고 언약을 받아요. 그 언약 체결의 현장에서는 하난님이 다 하신다는 메시지가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 혼자 지나가시는 것으로 그려 졌단 말이죠.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어요. 그런데 바울이 하갈을 뭐라고 그런다? 율법 이라고 그러잖아요 여기서. 율법을 시내산이라고 그러잖아요.


아브라함이 율법으로 들어 간거죠? 복 받은자가, 상 받은 자가, 의인이 율법주의 인본주의 로 다시 들어 가는 거예요. 그리고는 ‘이거 아니구나’를 배우는 거예요. 우리가 그래서 나만을 위해서 사는 거예요 지금도. 기도도 나만 위해서 하고. 내 새끼, 내 자식 내 부모, 그건 ‘나’란 말이예요. 우리교회, 그게 나란 말이예요. 예배도 나를 위해서 하고,헌금도 나를 위해서만 하는 거예요. 이게 율법주의예요, 딴 게 아니예요. 이게 인본주의란 말입니다

우린 지금 그렇게 마귀의 종처럼 살고 있다니까요. 그런데 그게 잘하는 것처럼, 잘 사는 것처럼, ‘야 분노하여 공평한 사회 만들고 훌륭한 사람되고 착한 사람되고’ 이게 마치 잘하는 사람처럼 우리는 마구 만들어 내고 있는데 성경이 그걸 쫓아내라고 해요. 어차피 낳은 것 놔둬라가 아니라 쫓아내라고 해요. 그거 별 가치 없지만 그래도 열심히 했으니까 떠리로 계산해서 상줄게가 아니라 쫓아버려라 그래요. 아! 그 쓰레기 좀 갖다 버려 그런다구요.


갈4장 30절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상속 못받아요.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 어떤 행함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도 하나님은 그걸 불로 태워버려요. 계집종 아들, 계집종 하갈의 아들, 다른 말로 율법의 행위는 내 쫓아야 할 것이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게 아니예요.

백 명을 낳아도 천 명을 낳아도 다 쫓아버리세요. 그 중에서 골라서 쓰지도 않아요. 다 쫓아 버리세요. 왜 그런지가 창세기에서도 갈라디아서에서도 분명히 나와요. 인간이 율법 아래에서 인본주의로 뭔가 맺어 내게 되면, 인간의 열심으로 맺어 내게 되면 인간들은 반드시 그 열매로 은혜 앞에서 면목이 없이 서 있는 자들을 공격하게 되어있어요. 그럼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 질 수가 없어요.그래서 이 자들을 못들어오게 하는 거예요.

창 16장 4절

아브라함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 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여주인을 멸시하는지라

이것 보세요. 뭔가 기미가 보이니까 멸시가 들어오죠 핍박하게 되어있어요.

창 21장 5절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여기도 굳이 애굽 여인이라고 하고 하갈의 소생이라고 하죠?)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괴롭히는 거예요)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갈4장 29절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더라


지금도 그래요. 분노하라, 가난한 자들이 이렇게 핍박 받는 이런 세계 이게 무슨 세상이냐. 분노하라, 봉기하라, 교회야 촛불 들고 나가자! 공평한 세상, 정의로운 세상 만들자. 거기에 ‘그게 진짜 복이고 그게 진짜 행복이 아니라 예수 믿고 천국가는게 복이다, 그런 모습을 통하여 인간들은 원래 이런 존재이고 역사는 이렇게 갈 수 밖에 없다라는 걸 인정하고 우리 예수 믿자’ 이러면 어떻게 하겠어요? ‘이런 방종을 조장하는 이단’ 이렇게 얘기를 하겠죠? 그건 요사이 내가 먹고 있는 욕인데.....

제주도 강정마을에 내려 가 있는 선배들이, 다 신학생들이고 , 목사들이예요. 해군기지 반대! 그러며 열심히 시멘트에 몸을 던져 가며 반대하고 있는데 ‘그런 거 반대해서 자연이 지켜지는 게 아니고 그런 거 반대해서 전쟁이 안 일어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은 그렇게 파괴 되어지고 전쟁을 일삼을 수 밖에 없는 곳이니 그냥 놔두고 예수 믿자!’ 그러면 우리 선배들이 지금 저 죽일라구 ‘동조 안 할거면 가만히 있어’ 이러고 있어요.

예수 믿고 진짜 살자는데 그건 안보이는 거니까 나중에 얘기하고 지금 좋은 세상 달라는 거지요. 우리가 만들어 보자구, 분노하여, 투쟁하여, 쟁취하여.

여러분 예수 믿으셔야 되요. 천국 가셔야 된단 말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열심과 노력이 만들어낸 열매는 반드시 은혜를 핍박하게 되어있어요. 지금도 똑같아요. 인도주의와 휴머니즘을 토대로 건강한 교회 개혁과 평등하고 공평한 세상 구현, 자연보호 등을 외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그 앞에서 십자가의 피의 공로를 찬양하고 있는 이들을 ‘저런 행동 없는 양심들’ 이라고 핍박합니다. 욕먹게 되어있어요.

신비주의, 기복주의자들에게 욕먹어 개혁주의 자들에게 욕 먹어 빨리 지리산으로 가야 돼. 계속 할 수 없어 이 일은. 여러분 기독교인이면 다른 사람보다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착해야 한다. 더욱 더 성숙한 면모를 보여 줘야 한다. 좋아요, 노력하자구요. 기왕이면 모든 사람들이 다 추구하는 거 예수 믿는 우리가 더 열심히 해보자니까요.


그런데 진짜 그렇게 해놓고 그게 여러분의 자랑이 안될 때 그게 여러분의 복이 되는 거지 그거 해서 그게 여러분이 여러분을 기특하게 여기면 그게 독이 된다는 걸 절대 잊지 마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쫓아 내라고 그런 거예요. 그 기특한 시도를.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 나오지요? 나사로란 이름 자체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자’예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는데 왜 거지예요? 그건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준 비유란 말예요.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들이예요? ‘ 아,나는 저 세리와 창녀들 같지 않게 이렇게 깨끗하게 살아서, 하나님 참 저 괜찮죠? 이렇게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바리새인이었죠? 거기에다 던진 거예요. 하나님의 도움을,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거지처럼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자로 드러난단 말예요. 그 곳으로 끌려 간다는거예요. 그게 지향성이예요. 헌데를 개가 핥는데 개를 쫓을 힘도 없어요.

그런데 부자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는 이 세상에서 정말 번드르르하게 잘 살아요. 이 거지 나사로는 자기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무슨 성숙은 개뿔, 개도 못 쫓는데 무슨 성숙과 변화를 추구해요? 그런데 이 부자는 자기 집 앞에 냄새나는 이 거지가 구걸을 하는데 놔뒀어. 어떤 부자가 그걸 놔둬요? 심지어 이름도 알아. 여러분 동냥은 많이 줘봤겠지만 그 사람들 이름 물어 본 적있어요? 이 거지는 이름의 알아. 이게 바리새인예요. 착하게, 율법을 갖고 자기들을 높이려고 하는 바리새인. 그런데 이들은 반드시 그들과 나 가 다르다는이 구렁을 만들게 되어있어요. 이걸 차이라고 하고 그 차이를 통해서 내가 만족과 포만감을 느낀단 말예요.

‘나 참 괜찮네’ 이렇게. 그걸 하나님이 독사의 새끼라 그랬단 말예요. 그 구렁이 이 세상에서 나의 열심과 노력으로 만들어 낸 그것이, 어떤 다른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게 되고 거기서 구렁이 생기면, 이 구렁이 끝까지 영원 속으로 가면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구렁이 된다는 뜻이예요. 율법주의를 박살내는 비유란 말예요, 이것이요. 그러니까 보세요. 성경을 다 뒤집어서 거꾸로 읽고 있잖아요. 착한 일 해야, 그렇게 자기만 부자로 잘 살다가 그냥 죽으니까 지옥가지, 거지한테 좀 나눠어 줬어야지, 이렇게 이야기 하잖아요?

그 반대의 이야기라니까요. 이 역사 속에서는 율법주의가 은혜의 성도들을 구별하고 핍박해요, 당연해요. 왜? 아닌자, 죄인중의 괴수, 없음, 이렇게 성도들은 드러나기 때문에. 예수 믿고 그게 뭐냐? 핍박 받아요. 그런데 그 핍박에서 벗어 날 수도 없어요. 왜? 그렇게 사는 애굽에서 하나님이 뽑아내기 때문에 응전도 못해. 보편, 포괄적 아담들이 다 가고 있는 길에서 뽑아내서 반대길로 끌고 가는 게 하나님의 은혜니까. 그러니 이 세상이 살맛 나겠습니까? 진짜 살맛 나세요? 구원 받아서 기뻐요? 행복해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과 접촉점을 만드는 그 순간 몇 초 행복하고 소망으로 들뜰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의 눈은 곧 세상으로 곤두박질 치기 때문에 여러분의 삶이 그렇게 슬픈 거예요. 우울 한거예요. 외로운 거예요.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이 또 말씀으로 찾아 오셔서 그 소망으로 살아 있게 만드는 거지, 뭐 그렇게 대단히 좋아서 펄떡펄떡 뛰면서 그렇게 살게 안 놔두세요. 아니, 죽어가는 내 형제들이 좀비처럼 엉뚱한 걸 보고, 배우고, 믿고 살고 있는데, ‘아이, 나만 아니면 돼. 나는 잘 믿으니까’ 이렇게 기뻐야 되요, 이게? 이게 인간입니까? 이걸 성도라고 해요? 그런데 뭐가 기뻐요? 공황장애 안 걸린 것들은 다 가짜야, 보니까. 우울하고 외로워야지.(웃음)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고 하나님이 13년 동안 안나타나셨어요. 삐져서 안 나타난게 아니라, ‘아직 힘 남았네? 지금 내가 가면 안되겠구나’를 기다린 거예요, 13년. 완전 마른 장작 될 때까지. 이제는 바이아그라도 안돼, 완전히 끝이야. 그때 나타난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비웃은 거예요. 자기는 알거든요, 안되는 거. 그런데 하나님이 오셔서 이제 와 갖고. 내가 힘 조금 남았을 때 하나 만들었더니 그건 버리라 그러시고 이제 와서 나한테 자식을 준다고 하시니까 웃은 거예요 아브라함이. 사라는 원래 안 됐어, 경수가 끊어졌으니까.사라도 웃었어요.

그래야, 너희들이 그 상황이라는 거, 그렇게 죽은 흙이라는 걸 알아야 거기서 진짜 생명이 잉태 된다는 걸 가르쳐주기 위해 13년 안나타난 거예요. 화 나서 안나타난 게 아니라. 이게 여러분의 인생이예요. 계속 해보게 만드신다니까요. 그래놓고 그걸 인정 안해줘요.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야? 그러다가 결국 나중에는 ‘어 나이제 죽을 때 다됐는데 이걸 어떻게 하나?’ 그러다가 꼭까닥 죽었어요. 죽은 시체는 자기 손으로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보신다고 그러신 거예요. 시편 116편에서. 하나님이 죽을 때를 기다리는 거예요. 그러다가 꼴까닥 죽었더니 이제 부활의 복이 뭔지 내가 한번 보여줄까 그러고 확 부어졌을 때, 그래 이렇게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주는 이게 복이구나, 알고 천국 가는 거란 말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이 역사 속에서 계속 죽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타나시더니 뭐라 그러느냐면 ‘할례 행하라’ 그래요. 할례라는 게 뭐예요? 생식기 끝을 자르는 거, 그건 생식 능력 제로로 만들겠다는 뜻이예요. 죽은 자로 만든다는 뜻이예요 그건. 그거는 아브라함이 지금 그런 상태가 되었다라는 거예요. 그 상태가 되어야 예수의 할례가 이해가 가는 거예요. 예수가 쪼개져서 네가 하나님 나라가 되었다라는 것을 알려면 네가 할례 받은자, 생식기가 끊어진 자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생식 능력 제로인 자가 되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은혜가 이해가 가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할례가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할례는 한 마디로 고자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뭔가 생산 해낼 수 없는 자라는 걸 알아 가는 걸 역사라고 그러고 그걸 할례 받은 인생이라고 해요. 그런데 그게 복 받은 자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에서 출발한단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할례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모든 걸 다 상실한, 죽은 자임을 알고 있다면 여러분은 지금 복받은 인생 사는 거 맞아요. 제가 게런티 해드릴게요. 빨리 하나님 나라가 왔으면 좋겠어요. 엉뚱한 소리 하는 놈들이 하도 욕을 많이 해서 난 그네들이 그 앞에서 어떤 표정으로 지옥으로 가는지 난 꼭 보고 말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쪼개져야 함에도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건 예수가 쪼개졌기 때문이예요.

사 53장 8절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예수가 끊어졌죠? 예수의 몸으로 할례를 받은 거예요.

단 9장 25절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메시아죠) 곧 왕이 일어 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메시아)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예수가 할례 받는 거예요. 쪼개 지는 거예요. 십자가란 말예요 이게.

슥13장 7절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여러분의 고추 끝이 짤라지는 게 아니라 예수의 목이 짤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칼에 의해서, 그게 할례라는 거예요. 그걸 알아 먹는 게 이 율법의 역사의 역할이란 말예요, 목적이란 말예요. 우리는 계속 해서 그렇게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라함처럼 율법 뒤로 인본주의로 빠져서 우리의 가치와 영광을 챙기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할 거예요. 그러나 성도는 분명히 알게 되요. 그것이 죄 라는 걸, 그 안에 성령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성령이 가르친다라고 하는 거예요. 제발 좀 알아 들으세요.

바로 그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예수가 오시는데 예수도 똑같이 생식능력 제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오시는 거예요. 성령으로 잉태되는 거예요. 그리고 성령으로 잉태되는 교회를 품어 안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다 은혜로 된다라는 걸 보여 주는 거란 말예요.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 할례의 현실을 똑똑히 배우고 가면 되는 거예요.

남편 다섯이나 있었던 그 창녀와 방불한 사마리아 여자가 말씀이신 예수를 만나고 고백한 게 뭐예요? ‘야 이제 남편 다 버려야지 세상의 남편이 뭐가 필요있어? 이제 착하게 살아야지, 여섯 번째 결혼 하려고 했는데 걔랑은 결혼 안하고 헤어질래’, 그랬나요? ‘그가 내가 한 일을 다 알고 있다’ 이 한마디 했어요. 성도가, 복받은 성도가 예수를 제대로 만나면 그 고백을 하는 거예요.

내가 죄인 중의 괴수, 사망의 몸을 가진 더러운 자가 맞습니다라는 그 고백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분이 날 사랑한다네요. 이 고백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복을 받아서 이 아브라함의 인생이 복으로 우리에게 전해지는 거, 그래서 우리가 그 아브라함처럼 마누라 두 번 팔아 먹고 애굽으로 수시로 도망가는 그런 자로 폭로 되는, 이게 복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러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셨는데, 그 복음은 여기서 머물지 않고 딴 사람에게까지 흘러 가더라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건 전도 하라는 말이 아니예요. 어디서부터 뜯어 고쳐야 될지 도대체가 전도하라는 말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인생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예수의 인생이, 십자가가 분명히 나타난다는 뜻이예요.

그러니까 당 황하지 마시란 말이예요. 그리고는 그렇게 폭로 당했을 때 내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얘기 하세요. 인정해 버리세요. 그렇다고 딴 사람들한테 일부러 찾아 다니면서 막 얘기 하고 그러지 말고. 사람들이란 게 일관성이 없어서 그걸로 또 흠을 잡아 갖고 나중에 여러분을 어떻게 공격 할지 몰라요. 그러니까 은혜 받았다고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저는요, 옛날에 이랬는데요…’ 우리교회에서 문제 일으키고 나간 사람들 대부분이 부부싸움 하고 와서 서로 자기 마누라 자기 남편 욕한 사람들있죠? 듣기 민망할 정도로 막 욕해요. 그런데 사이가 좋아지잖아요? 그 비리를 알고 있는 게 나 밖에 없으니까 날 막 미워해. 그래서 그런 얘기 하지 말라고 하는데 굳이 찾아와서 꼭 다 애기해. 그러라는게 아니라 혼자 알라는 말이예요. 내가 그런 사람 맞지 이렇게.

왜 하나님께서 당신의 첫 번째 백성을 지으시고 아담, 흙이라고 지으셨다고 했어요? 아담은 에덴 동산에 생겨나기 전에 이미 묵시 속에서 완료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었단 말이예요. 그런데 역사 속에서 그의 역할이 죽은 흙이었기 때문에 아담이라고 지은 거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담으로 오는 거예요 이 세상에. 그리고 죽은 흙임을 드러내고 진짜 두번째 아담, 그분은 진짜 하나님이 비워 내서 완전히 없어진 아담이었잖아요. 죽기 까지 순종한 아담, 그 아담 의지하여 하나님 나라 가면 되는 거예요.

여러분의 인생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이예요. 복이 주어졌잖아요. 상이 주어졌다고요. 그러면 하나님이 상급이라고 했으니까 여러분 안에 들어와 계시단 말이예요. 그런데 왜 우리가 이렇게 마귀새끼 같은 삶을 살죠? 자주 살잖아요. 가끔도 아니고.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성령의 스위치를 뽑았다 꽂았다, 뽑았다, 꽂았다 계속 하시면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너희들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선풍기 코드를 뽑아 버리면 선풍기가 안 움직여요. 코드가 꽂히면 선풍기가 돌아가요. 그런데 이 인간들은 선악과 따 먹고 내려 왔기 때문에 선풍기가 돌아가면 자기 힘으로 돌아가는 줄 알아요. 그러면서 ‘야, 봐라 내가 오늘 오백 바퀴 돌았다, 천 바퀴 돌았다’ 자랑한다고 그거 갖고. 그런데 하나님이 쑥 빼버려요. 나는 이 능력이 나에게 사유 되어서 내 능력이 되어 돌아가는 줄 알았어요. 이게 변화산 아래에서의 믿음 없음의 사건이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쑥뽑아 버리니까 아무리 돌아가려고 해도 날개가 안 돌아가, 그럼 이게 어떻게 된거냐는 거죠.

분명히 난 돌았는데 아무리 돌려고 해도 안 돌아가 그때 마귀짓 하는 거지 우리가. 그런데 어느날 또 돌아가, 이거 어떻게 된거지? 안되었는데 또 돌아가네? 그런데 또 금방 짜져, 또 안돌아가. 이게 반복되면 우리 인생에서 뭐가 인식이 되겠어요? 아 하나님이 꽂아야 돌아가는 거구나, 그거 내가 하는 거 아니구나 하나님이 하시는구나를 배우도록 여러분에게 그런 일상을 허락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를 갔는데 ‘너 저 땅에서 오 천바퀴 돌고 왔더라, 은 면류관. 너 만 바퀴 돌고 왔더라, 금면류관. 넌 뭐야? 네 바퀴? 개털모자.’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몇 바퀴 돌았는지는 아무 문제가 안되요. 네 바퀴를 돌던, 다섯 바퀴를 돌던 여러분이 그걸 통하여 예수의 은혜를 알았느냐 몰랐느냐가 중요해요. 그걸 아는 걸 진짜 성화라고 한단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몇 바퀴 돌아갔는지는 하나님이 절대로 카운트 하지 않아요.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자아실현, 자아성숙 이런 것을 추구하고 실현해 내는 게 아니라, 그 자아가 죽은 자 라는 걸 배우고 가셔야 되요.

자아가 뭐예요? 스스로 ‘자’, 나 ‘아’. 나 ‘아’자를 어떻게 쓰죠? 손‘수’ 변에 창 ‘과’자 그렇죠?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내 손에 창 잡고 있는 게 ‘자아’거든요. 그런데 이걸 실현을 하면 어떻게 되요? 이걸 성숙 시키면 어떻게 해요? 이게 죽음이며 죄란 말입니다. 이 창 놓고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어야 성도인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자기부인이라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그게 성도의 삶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영생에 관심 두고 사셔야 되요. 여러분의 여생에 관심 두시면 안되요. 그런데 우리는 이 영생에는 관심이 없고 은퇴 뒤에 우리 여생에만 관심이 있어요. 그걸 준비하느라고 영생을 놓치는 거죠. 하나님을 배우세요. 여러분의 인생과 역사를 통하여 하늘의 묵시를 읽어 내셔야 되요. 기도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