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 43 죽어야 사는 여자, 교회 롬 4장 18-25절

은바리라이프 2013. 10. 16. 13:00

로마서 43

 

 

제목: 죽어야 사는 여자, 교회




본문: 롬 4장 18-25절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거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백 투더 퓨쳐, 포레스트 검프, 캐스트 어웨이 같은 걸작을 만들어 낸 로버트 저메케스 감독이 1992년에 만들어낸 영화가 죽어야 사는 여자’라는 영화 입니다. 얼굴을 성형 하는 대신에 자신이 하는 일에 있어 내공을 쌓음으로써 능력 그 자체가 아름다움일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보여주는 배우다 그런 칭찬과 평판을 받고 있는 메일 스트립과 셀 수 없는 성형으로 여전히 삼 십대 같은 얼굴과 몸매를 소유하고 있는 골디 혼이 주연을 한 영화죠? 거기에 부르스 윌리스까지 다소 부자연스러운 조합 입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지키고 자랑하기 위해서영원히 죽을 수 없는 영생의 묘약을 마신 두 여자가 얼마나 추악하게 이 역사를 살아가는지를 아주 울적하고 부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그런 영화예요.

당시 영화 평론가들은 저메키스 감독의 이 영화에 대해서 아주 혹평을 했습니다. 저메키스 답지 않다는 것이었어요. 그의 작품을 하나하나 한번 떠올려 보세요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런데 왜 이런 블랙 코미디를 만들었는가? 밑도 끝도 없이 극단적으로 치닫는 그런 사건들,다소 비현실적인 의상들,시대에 맞지 않는 건물들과 셑트들, 고딕 양식의 건물들이 막 나와요. 지나친 오버 연기를 요구함으로서 나타나게 된 그 배우와 캐릭터의 괴리, 이런 것들을 지적하면서 아주 신랄한 폭격을 당했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포레스트 검프나 케스트 어웨이 같은 영화를 만들어 냈던 저메스키 감독이 실수로 그런 부자연스러움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믿지 않아요. 그 사람이 평소에 얼마나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감독인 것을 알기 때문에 절대 그런 실수를 할 사람은 아니란 말입니다. 저메스키 감독은 억지스럽게 생명을 연장시키므로써, 즉 죽음을 없앰으로써 삶까지 망쳐버리는 인생들의 부자연스러움 이라는 그 주제의식을 부자연스러운 구현 방식을 택해서 표현해냈던 거예요.알아 들을 사람만 알아 드으라는 거죠. 적어도 제게 있어서 죽어야 사는 여자’ 라는 영화의 부자연스러움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감독의 용의주도함을 돋보이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죽어야 할 자들이 아니, 이미 죽은 자들이 산 자인척 하는 이 율법의 세상, 인본의 세상의 실체와 결국 그건 그렇게 부자연스럽고 추악한 겁니다.

죽은 자가 억지로 산 자인 척을 하기 위해서 이미 죽은 흙처럼 말라 비틀어진 피부에 덕지덕지 화장을 하는 장면이라든지,(나중에 그게 살짝 벗겨지는데 아주 추악하죠)계단에서 떨어져서 이미 목이 180도 뒤로 돌아가 버린 메일 스트립이 자기가 죽은줄도 모르고 벌떡 일어나서 목이 돌아간 채 남편을 쫓아가는 그런 장면이라든지, 골디혼이 총을 맞아서 배가 이만큼 뻥뚫어 졌는데 여전히 죽은 줄도 모르고 그 추악한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는 장면이라든지, 맨빌 박사의 장례식에서 돌아오면서 여전히 어떻게 하면 더 예쁘고 길게 살까를 고민하던 두 좀비가 글러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난 상태에서도 집요하게 눈을 껌벅이고 있는 그런 모습들은 우리 인생들의 이 역사속 삶의 의지 그 의지를 너무 적확하게 보여주는 그런 것 같아서 아주 소름이 끼쳤습니다.

반면에 맨빌 박사는 영원히 살 수 있는 약을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걸 거부하고 죽어야 할 시간에 아름답게 죽습니다. 그런데 자손들과 친지들이 그의 죽음 앞에서 그의 아름다움을 마음에 새기죠.감독은 그게 바로 진짜 영원히 사는 것임을 관객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는 그것보다 한 발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지만요.

맨빌 박사의 장례식 장면은 나’ 이 자아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나의 생명을 지키고 보존 하기 위해 이 삶의 시계를 밀고 가고 있는 그런 더러운 좀비들의 모습과 대조되는 아주 멋진 장면이었어요. 저는 그렇게 죽어야 할 시기를 놓치고 삶의 의지를 불태우며 악다구니를 쓰는 검은 곳의 두 여자와 죽어야 할 시기에 아름답게 죽어서 그렇게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그 남자의 모습 속에서 육을 입고 있는 의인인 이 세상 속 성도의 이중적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이 두 가지 모습이 성도의 삶에 그대로 다 나타난단 말입니다.

살려고 애쓰는 자들의 추악함과 죽어서 아름다운 묵시의 신비가 여러분의 삶에 공히 나타나요.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죽어야 사는 여자, 그 이름 교회 입니다. 성경이 우리를 여자, 신부라고 하잖아요.그리고 이 역사는 우리를 결국 십자가에 매달아 부활의 몸으로 살려내는 목적으로 지어진 거니까.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보신다고 하셨어요.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의 현장에서 아, 내아들 드디어 죽었구나.’’내 아들 마침내 죽었구나’하고 기뻐하신다는 그런 말이예요.

그건 애초에 하나님께서 성도의 결국을 죽음으로 결정해 놓으셨다라는 거거든요. 그래서 쫓아 다니면서 언제 죽나 언제 죽나 하다가 죽는 그 순간에 내 아들 드디어 죽었구나!’ 하고 기뻐하신다는 뜻이거든요. 성경은 그러한 성도의 죽음과 그 죽음에서 비롯되는 하늘 백성으로서의 살아남의 이야기를 여자가, 신부가 아이를 낳는 것으로 종종 비유한다고 그랬죠? 우리가 우리의 위상과 가치를 위해서 열심히 살려고 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철장에 의해 맞아 죽고 죽고 죽다가 결국 예수 아니면 안되는구나 라고 가는 게 예수를 낳는 거예요.

이 땅에서 성화되어서 나중에 예수처럼 변하는 게 아니라. 그걸 예수를 낳는다고 한단 말예요.엄마가 아이를 낳는 건 어미의 몸을 아이의 먹이로 쏟아 부어서 어미가 새로운 생명으로 창조 되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엄마는 아이를 낳는 게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죽여서 아이로 재탄생하는 형국인 거예요. 그래서 엄마가 아이를 배면 그때부터 엄마의 생명을 아이에게 뺏겨 가는 거예요. 엄마는 그 다음부터 자기의 외모에도 관심을 못가져요.그리고 아이가 먹고 싶은 것만 먹게 되요.그걸 입덧이라고 그러죠? 엄마가 아이에게 생명을먹히는 거예요.탯줄을 통하여. 그렇게 성도는 이 세상속의 옛 자아를 먹이로 해서 이게 지금 먹이가 되는 거예요.

요걸 경험이라고 이야기 하고 요거는 환란으로 감지가 되는 거예요. 요걸 먹이로 해서, 다른 말로 죽어서 새로운 피조물로 환골탈태 하는 거예요. 그건 물론 역사 속에서 봤을 때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 역사속 엄마의 사랑이 아빠의 사랑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깊고 큰 거예요.아빠는 술먹고 들어와서 애 두들겨 패지만 엄마는 그 아빠의 몽둥이를 몸으로 막아내는 것입니다. 아이가 불타는 차에 있을 때 아버지는 어떻게 할까 전화를 찾지만 엄마는 그 차를 드는 거예요. ‘나’거든요. 내가 죽어 새롭게 나온 것이 바로 아이거든요. 그래서 그 엄마에게 있어서 아이는 우리 안 목사님의 영어 식대로 하면 아이 엠 유’인 것입니다. 내가 너 인거예요. 내가 죽어 아이가 나온 거니까.

오늘 본문을 보시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둘 다 죽은 것 같은 상태예요. 그런데 믿음이라는 게 홀로 약해지지 않고 아브라함과 사라를 견고케 만들더라는 거예요.아브라함과 사라가 죽은 태가 되자 거기에서 약속의 후손이 탄생을 해요. 이삭이죠.하나님은 그믿음의 활약으로 발생된 결과를 의라고 하세요. 아브라함은 그러한 믿음의 활약에 의해 의인으로 여김을 받은 거예요.그게 22절까지의 내용입니다.그런데 바울은 그 의의 이야기를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설명을 하고 있어요. 그걸로 이어가서 끝을 낸단 말예요.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에 예수의 십자가가 들어 있다라는 것을 힌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죽은 자처럼 되자 믿음이 홀로 일을 해서 약속의 자식인 이삭이 태어난 것처럼 육신의 예수가 죽고 진정한 하늘의 후사인 부활의 예수가 탄생을 하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죄인이 되셨죠? 그래서 십자가에서 그 죄인이 죽어야 돼, 그래야 부활의 예수가 탄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와 부활이예요. 그건 단순히 우리 죄를 대속하는 방법이요 수단이 아니라,하나님 나라 백성의 탄생의 원리와 존재 양식을 함께 상징하고 있는 거라 그랬죠? 성도의 역사 속 육의 몸이 죽어야 묵시 속 부활의 몸이 살게 되는 그런 원리란 말예요.

생각해보세요. 묵시와 역사에 새 사람과 옛 자아가 살고 있단 말예요. 그런데 묵시와 역사에 새 사람과 옛 자아가 영원히 공존 할 수는 없어요. 둘 중의 하나는 죽어야 됩니다.그래서 이 역사, 땅이라는 곳에 계속 살면서 이 힘의 원리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을 지옥을 사는 자들이라고 하고, (땅 지 니까요)이 땅 에서 죽고 묵시 속에서 은혜의 원리로 영원히 사는 자들을 성도라고 해요.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해요. 그래서 반드시 둘 중의 하나는 죽어야 되요.

자, 그게 역사란 과정을 통하여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완료 되어 있는 현실이예요. 사람들이 자꾸 이 역사와 그 완료된 묵시를 헷갈려서 요한계시록도 그 둘이 번갈아 가며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이걸 온전히 여러분이 개념 정립을 해놓지 않으면 성경이 뒤죽박죽으로 이해가 되게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아마 다음주 까지만 제가 조금 길게 거기에 대해서 개념 정리를 할 거고 그 다음주 부터는 짧게 할 거예요.진짜로.



엡1장 4절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언제? 창세전입니다. 그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요 이전이라는 얘기예요)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음이니라


4절을 보시면 우리 성도는 창세전에 In Christ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택함을 받고 영화롭게 되었다 라고 한단 말예요.그런데 7절을 보면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다 그래요.그러면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난 일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인데 성경이 그걸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라고 이야기를 해요.하나님 나라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가 존재하게 된 그걸 예수의 피로 구원 받았다라고 이야기 한단 말예요.

그럼 보세요. 이 창세전이라는 건, 아담과 하와도 태어나기 전이예요. 그런데 그 창세전에 우리의 죄가 예수의 피에 의해 구속이 됐다라는 게 도데체 무슨 말이냐는 말예요.역사가 시작 되기도 전에 왜 죄의 개념이 거론이 되냐는 말예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의 죄의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해결이 되었다라고 이야기 하는데, 창세전에 이미 있었던 그 죄라는 게 도데체 뭐냔 말입니다. 우리도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과 아들 사이에서 거론 되었던 그 죄가 뭐냔 말예요.

우리는 죄라는 걸 정의 하기를 인간이 이 역사 속에서 인간들이 합의한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을 어기며 사는 걸 죄라고 그러잖아요.도둑질 간음 살인 험담.뭐 이런 것, 그런데 성경은 이 역사와 인생이 시작 되기도 전에 죄라는 개념을 이야기 하고 있단 말예요. 요게 지금 창세기 1장 1절 앞 부분에 들어가야 될 부분 입니다. 에베소서 1장의 창세전 언약이요. 요걸 근거로 창세가 일어난 거니까.

죄라는 건 없음’이 없음’의 자리를 이탈해서 있음’의 흉내를 내는 거라 그랬죠? 창조주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이 자신의 존재됨에 스스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게 바로 죄예요. 그것이 예수의 피에 의해 사해졌다라는 건 그런 시도가 원천 봉쇄된다는 뜻이예요. 창세전에 예수의 피에 의해 그게 사해졌다라는 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라는 뜻이예요. 예수의 피가 그러한 없음’들의 있음’의 흉내를 폭로하고 무력화 시키는 것이다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쉬운 말로, 예수의 피는 그 피가 뿌려지는 대상의 죽었음’을 확증 해내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그래서 예수의 피가 뿌려지면 살아나는 거란 말예요. 그러니까 그 피가 안 뿌려졌을 땐? 죽은 거라는 말이예요. 확증이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죽었음을 살았음으로 창조해 내는 유일한 능력이요 길이라는 걸 창세전 언약이 이야기 하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흙이 ,그 없음’이, 예수의 그 피, 십자가,은혜,긍휼에 버무려져서 비로소 존재로 성립이 되는 게 하나님 나라라는 걸 설명해 주는 게 창세전 언약이란 말이예요.그래서 세상이 시작 되기도 전에 존재가 있기도 전에 죄라는 개념을 들어서 이게 예수의 피에 의해 사해진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야 그 창세전 언약 속에서 이 하나님 나라, 묵시 속의 존재들의 존재 양식과 탄생의 원리 이것이 지금 설명이 되고 있는 거예요. 그걸 설명하기 위해 죄라는 개념이 도입이 되어서 여러분에게 역사 속에서 설명이 되는 거고 그걸 설명 하기 위해 마귀라는 존재가 필요했던 거예요. 사탄이라는 존재는 원래 하나님이 타락 할 수 없게 만들었는데 스스로의 능력과 의지로 타락 할 수 없는 거란 말예요. 피조물은 그게 안되는 게 피조물이란 말예요.

이 조로아스타 교회의 영향을 받아서 사탄 마귀가 이렇게 우화적으로 바뀌었단 말예요. 사탄이 뭐예요? 찬송하던 자라고 그랬죠? 이게 뭐냐면 성도가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지어졌단 말예요. 에베소서 1장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런데 그들이 그 자리를 떠나 나’를 찬송하는 자리로 갔을 때 이게 어떻게 멸망을 초래하는가를 설명하는 게 역사란 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죄와 마귀의 개념이 도입이 된 거예요. 실재하는 존재 맞아요. 마귀도. 왜? 내가 마귀거든요. 나라는 존재, 나만을 위해서 사는 이 존재들의 세력의 총합이 마귀이기 때문에 그 마귀의 총화로 실제로 이 사단이 존재는 하지만 나 밖에 있는 그 사단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지 말란 말예요.

나란 말예요 그게 나. 여러분이 보다시피 창세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 됐어요. 그렇다면 이제 이 역사속 인생들의 행위와 사고는 그 존재의 존재됨이나 상, 벌에 아무런 가치를 발휘할 수 없는 거예요.영향을 미칠 수 없단 말입니다.다만 왜 이 역사와 인생이 생기기도 전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 그 창세전 언약이라는 걸 체결 하실 수 밖에 없었는가를 설명하는 설명용 드라마로서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거예요.

창세전, 즉 영원 속에서 이미 결정난 걸 이 역사의 행위가 뒤집어 엎을 수는 없는 거예요. 알미니안 주의자들의 이야기처럼 아, 하나님은 역사 속에 서 일어날 일을 아시고 결정하셨다, 예지 예정론 이 따위 소리들 하지 말란 말예요. 그건 인간들이 만들어 낸 말이지, 그건 추측 아닙니까? 반복합니다. 이렇게 창세전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간에 언약이 세워졌어요.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존재는 반드시 하나님 아들의 피로만 존재로 설수 있다는 게 창세전 언약이예요. 그리고 창세가 일어나는 거란 말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가 바로 이 에베소서 1장 다음에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천지 만물은 무엇을 그려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의 창세전 언약, 즉 예수의 피에 의해서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있음’이 될 수 있는 것이예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존재거든요.예수의 피로써만 하나님 나라의 존재가 성립이 될 수 있다라는 걸 설명하는 게 바로 이 역사와 인생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역사와 인생은 복음을 설명하는 셑트장이예요. 드라마 촬영장인 거예요.

그 쎝트장 안에서는 모든 게 감독의 의도 대로 움직여요.하나님이신 감독의 의도대로만. 영화 촬영장에 가보면 수 많은 엑스트라들을 볼 수 있어요.우리 써클 선배중에 장 감독이라는 감독이 있어서 촬영장에 자주 가서 봤거든요.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의 수 백배가 거기 있어요. 엑스트라, 스텝 다 따지면.우리가 영화들을 볼 때 엑스트라들은 자기 마음대로 서있다가 그냥 대충 사라지는 거 같지요? 아닙니다. 비록 그 역할이 행인 1,2,3에 불과 할지라도 철저하게 감독의 지시와 의도대로 움직여야 되요. 심지어 시체 1,2,3의 역할을 맡은 사람도 정확하게 감독이 지시한 그 자리에 시간에 맞추어 죽어 줘야 되요.고개도 감독이 놓으라고 하는 쪽에 놔야 되요.그래야 카메라에 걸리거든요.지 맘대로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면 그것 때문에 NG되요.

감독의 지시나 허락 없이 웃어도 안되고 울어도 안되요. 재채기? 안됩니다.모든 게 감독의 허락하에 일어나야 해요. 그 모든 걸 장악해야 하는 게 감독의 임무이며 권한이예요. 심지어 무대 셑트 하나도 감독의 의도와 상관없이 세워져선 안되요. 그 카메라 앵글에 걸리는 거기에 감독이 허락하지 않은 돌멩이 하나도 있으면 안되요.그래도 NG예요. 그래야 감독이 구상한 영화가 제대로 완성이 될 수 있는 거예요.하물며 창세전 언약이라는 치밀한 시나리오가 하나님이라는 전지전능하신 감독에 의해 진행되어지고 있는 역사라는 드라마에 우발성이라든가 우연이라든가 배우들의 애드립은 절대 허용 될 수 없어요.

자유의지,자유의지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그건 신학자들이 만들어 낸 소리예요. 그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뜻, 작정 안에서 제한된 자유의지 이지 인간들의 피조물의 자유의지가 이미 결정된 창세전 언약에 영향 못미칩니다. 그러니까 자유의지 이런 소리 하지 마세요. 모든 건 감독이 장악하고 감독의 뜻대로 움직여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 역사와 인생은 이 예수의 피와인간들의 없음의 실체, 처음 자리를 그냥 그려내고 가면 되는 거예요.이 역사와 인생이 이 내 생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하시면 안되요.

배우들의 개별적 개성이나 우발적 행동이 절대 고려되거나 허용되지 않는 그런 곳이 바로 이 역사예요. 특히 교회의 역사입니다.그래서 이 역사는 역사 자체와 그 역사를 채우는 만물의 죄인됨과 죽었음을 드러내야 되고 그 죽음과 없음을 덮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오롯하게 찬송받는 장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예수의 피! 따라서 이 역사와 역사속 인생들은 끊임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됨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해야 되고 ,이게 죽은 거니까, 끊임없이 시도를 해줘야 되요. 그래야 예수의 피가 오롯하게 드러나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구원 받았는데 여전히 여러분만을 위해 사는 거예요 우리가 무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삽니까? 아무일 없었을 때는 얼마든지 그렇게 살 수 있는데 위급한 상황이 닥쳐보세요. 하나님이고 나발이고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걸 의도하고 계시다니까요.왜 피로만 너희들이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그려 내셔야 되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변화와 성숙과 번영을 끊임 없이 모색 할거예요. 그리고 그 결과를 파괴와 썩어짐과 멸망으로 낳아야 되요. 그게 이 역사의 역할이요 임무인 겁니다. 여러분 보고 계속 죄를 지어야 된다라고 말씀 드리는 거 아니예요. 왜 이 죄는 나를 파괴할 수 밖에 없는가를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배우게 될 거고 결국에는 하나님 나좀 도와주세요. 이리로 갈거예요.이걸 예수 믿는다 그래요.

반면에 하나님 홀로 세워 가시는 묵시의 현실도 교회에게서, 성도에게서 나타나요. 끊임없이 발전하며 살고자 하는 자들의 추악함과, 숨쉴 틈도 없이 죽은 자로 폭로되며 새로운 피조물의 탄생양식을 몸으로 , 삶으로 그려내며 살게 되는 아름다운 성도의 삶이 오롯하게 대조가 되는 게 이 역사의 현장이며 여러분의 인생의 현장입니다. 예수의 피 없이 그 어떤 노력과 지혜로도 절대 산 자가 될 수 없다 ,이게 바로 이 역사가 증명하고 증언해 내야 할 대명제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 백성의 탄생의 원리를 가장 먼저 원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창세기 2장 7절이예요.

창 2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여기서 흙이라고 번역이된 히브리어 단어가’ 아다마 인 아파르’예요. 정확하게 번역하면 땅에 속한 없음. 티끌, 땅에 속한 티끌. 이걸 그냥 흙이라고 번역을 했는데,그러니까 땅의 세상에 속한 흙 이게 없음’이죠, ‘없음’ . 그 없음에 르와흐’, 생기가 들어가자 이게 산 자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없음이어야 되고 여기에 예수의 피, 생기가 들어가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존재 양식이며 탄생 원리인 거예요 이게. 생기가 어디서 그리스도라고 했냐? 예레미야애가에 나오잖아요.

애4장 20절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여

콧김이 르와흐’예요. 우리의 콧김, 이 콧김 막으면 죽습니다. 우리의 콧김 이 생기 이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메시아다 그런다구요 성경이. 그러면 존재는 아다마 인 아파르’ 이 땅에 속한 없음에, (이게 우리 처음자리라구요) 여기에 그리스도의 피가 얹어 져야 존재가 되는 거예요.그것은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존재 되게 만든다라는 것이죠. 이걸 알고 가는 거예요. 이게 인생과 역사의 목적이란 말입니다. 그걸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데 설명용 교보재로 채택이 된 게 선악과예요.

선악과는 선악을 판단하는 힘을 가진 거라고 그러죠? 선악을 판단하는 힘.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선악을 판단한다라는 건 그사람이 통치자요, 재판관이요. 경영자라는 의미가 있었어요. 선악을 판단한다, 선악을 판단하는 자가 통치자예요. 선악을 판단 하는 자가 재판관이고 선악을 판단하는 자가 경영자란 말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선악의 주체가 되겠다, 선악판단의 주체가 되겠다라고 한 건 단순히 금지된 과일 하나를 따 먹은 정도가 아니라, 통치자요 경영자요,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여 올라간 거죠.

내가 선악의 판단을 하겠다라는 건 당신도 선악을 판단하고 나도 판단하겠다, 이게 안되요. 통치자는 하나여야 되거든요. 그런데 내가 선악의 판단을 하겠다라고 한 건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면 선으로 받아 들이고 하나님이 악이라고 하면 악으로 받아들여야 할 피조물이 나는그거 하기 싫으니까 이제 부터 내가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겠다’라고 한 하나님처럼’의 반란이란 말이예요. 인간에게는 그러한 권한과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선악과가 금단의 열매로 금해졌던 거예요.그거는 아니라는 거예요. 너희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러한 선악의 판단이 능력으로 주어지지 않은 인간들에게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명령이 주어지면 안되 잖아요? 선악의 판단을 못하는 통치자도 아니고 경영자도 아니고, 재판관도 아닌 인간에게 선악과 따 먹기 전에 먹지 말아라하 선악과 따 먹기 전에 다스리고 정복하라라는 명령이 주어졌단 말예요.

창1장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 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제가 생육과 번성은 이게 무슨 의미인지 로마서 (초기?) 전에 설명 해드렸죠? 그것을 잘 참조해서 보세요. 다스리고 정복하라, 이게 선악판단 이거든요 그런데 선악판단의 능력도 없는 자들에게 어떻게 다스리고 정복하라라는 말씀을 할 수 있는가 ? 그건 누가 다스리고 정복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이 존재에게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명령을 하는데 하나님도 알고 이 존재도 알아요. 다스리고 정복할 선악판단의 능력이 없다고요. 그러면 하나님이 힌소리 하실 수는 없고 누가 누구를 통하여 힘을 행사하여 다스리고 정복하겠다는 거예요? 이 선악판단의 능력이 없는 빈 그릇인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나님의 능력을 부어,생명력을 다스리고 행사하시겠다, 이게 하늘 왕들의 존재 양식입니다. 이게 하늘 왕들의 존재 양식이란 말입니다.

하늘 왕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의 왕이 되기 위해선 , 하나님의 능력 이 있어야 되는데 인간에게는 그 능력이 없어요.그 때에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다스리고 정복하는 왕 노릇을 하기 위해선 완전히 비워져서 하나님이 거기에 하나님의 것을 백 프로 부으실 수 있어야 하늘의 왕 노릇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요걸 그대로 그림으로 보여주고 간 사람이 솔로몬이었어요.

왕상 3장 7절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니

(솔로몬이 왕이 됐어요. 어디의 왕? 이스라엘의 왕,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하늘의 왕이예요. 왕이 됐어요. 왕이 됐는데 )

종은 작은 아이라

(여기서 작은 아이라는 단어가 카탄’이라고 하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이건 가장 작은,혹은 없음’ 이란 뜻이예요.나는 없는 아이예요. 난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아이 예요, 죄인중의 괴수예요 이런 뜻이예요)

작은 아이라 출입 할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에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그걸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보세요.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됐는데 솔로몬이 알아요. 나에게는 선악 판단의 능력이 없어요. 왕이 되기 위해서는 선악 판단의 통치를 하고 재판을 하고 경영을 해야 되는데 나에게 선악 판단의 능력이 없어, 그러면 누가 줘야 되요? 하나님이 줘야 되요. 이 없음’이 하나님으로 부터 받는 어떤 것으로 왕노릇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지혜를 달라 그러죠? 지혜는 뭐예요, 잠언에서? ‘나 지혜’는, 솔로몬에게 있어서 지혜는 다 백 프로 성전 짓는 지혜예요. 하나님 나라 완성에 관한 지혜란 말이예요.

‘나 지혜’ , ‘예수’의, 창조의 주 그 예수의 지혜가 생명력이, 없음’에게 (작은 아이,카탄) 작은 아이 에게 임하자 이 이에게 선악 판단의 능력이 주어지고 이가 왕이 되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솔로몬이 그대로 보여준 거 라구요.그런데 이 지혜가 솔로몬에게 사유 되느냐? 아니요. 솔로몬이 이 지혜로 성전을 완성해요.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는데 그 다음의 솔로몬의 행보를 보세요.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거, 신명기에서 왕이 가지지 말아야 될 거를 다 갖죠?

금,말,와이프. 그리고 죽기 전에는 성전 안에,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 안에 온 세상의 우상들을 다 갖다가 놓고 거기에 절을 하다가 죽었어요. 그러면 솔로몬은 그 행위로 지옥 간다? 천국 간다? 사무엘 하 나단의 신탁에 보면 하나님이 이는 내 아들이라’ 그랬어요. 하나님은 언약으로 당신의 백성을 천국 보내는 거지 그의 행위로 보내는 게 아니예요. 솔로몬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창세전에 내 아들로 선택 되어 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그 지혜로만 하나님 나라의 왕 노릇을 할 수 밖에 없는가를 그려내고 죽은 거예요. 천국 갔죠,,,안심되세요?

이게 역사의 역할이며 기능인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나는 작은 아이니까 하나님 지혜를 주세요. 그래야 내가 왕이 됩니다. 그래야 선악 판단을 합니다, 선악 분별을 합니다 한 이 이야기가 어느 에피소드에 붙어 있느냐 하면 일천 번제 사건에 붙어 있는 거예요.

이 일천 번제를 시중에서는 새벽기도를 천 번 하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다 라고 사기 쳐서 잠도 못자게 만들어 갖고 사람 거의 미치게 만들죠? 갈때 그냥 가요? 헌금도 가지고 가야 돼. 그러니까 일거 양득 이예요. 일 타 쌍피. 속지 마세요. 강도들이예요. 일 천 번제라는 건 번제로 드려진, 십자가에서 번제로 드려질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 이것이 영 단번에 완전하게 드려진다 그래서 천’이라는 완전수로 그려지는 거예요.

예수의 십자가에 의해 이 없음인 솔로몬에게 예수의 피가 부어져서 이가 하나님 나라의 왕 노릇 하게 된다가 바로 그 일 천 번제의 이야기란 말예요.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피가 부어지고 그들은 비로소 산 자가 되어서 하늘의 왕 노릇을 하는 자들로 살게 되요. 그런데 그게 어떠한 왕 인가 하니 자신의 존재성과 주체성을 완전히 차압 당하고 작은 아이가 되어서 지혜이신 예수의 능력으로 통치하는 왕 인 거예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로 설 때 하나님 께서 당신의 능력을 그 안에 채우셔서 그를 존재가 되게 하고 다스리고 정복하는 자로 세운다라는 거예요.

요게 아브라함의 이야기예요.그래서 마른 뼈가 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후사가 나오는 거예요.후사가 뭐라 그랬어요 갈라디아서 6장에서, 예수! 내가, 여자가 죽어서 예수를 낳는다.어떻게 더 쉽게 설명을 해요?

예수님이 정확하게 그 현실을, 하늘 왕의 현실을 이 역사 속에서 보여주셨어요. 예수님은 하늘의 왕이시죠? 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보세요.

요8장15절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사람이 정한 기준으로 판단하나 란 뜻이죠)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나니 만일 내가 판단 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예수님은 사람의 정한 기준으로 그 어떠한 것도 판단하지 않으신다 그러셨어요. 그런데 판단을 하시긴 해요. 어떻게 판단 합니까? 아버지가 내 안에 계셔서 아버지가 판단 하는 걸 (선악판단 이지요) 아버지가 판단하는 것으로 판단을 하는 하늘 왕의 모습을 예수가 보여주고 가셨다구요. 그래서 예수를 다 비운 분이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다 비운 분’ 사도 바울이. 그게 죽음이란 말예요. 존재 개체가 차압 당한 거, 하나님에게.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찾아와서 선한 랍비여 라고 이야기한 부자청년에게 누가 선하냐? 하나님만 선한 거야. 그거는 예수님의 존재론적 자아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존재는 어떠한 형식으로 존재해야 되는지를 역사 속에서 계속 그려내는 게 예수님의 임무였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하나님은 선하고 나는 그릇이 비워지고 그 선이 채워져 하늘 왕 하늘 존재가 되는 거란 말예요.왜 왕인가? 거기는 모든 존재가 그렇게 자기를 비워 다른 존재를 섬기는 나라이기 때문에 다 왕인 거예요.나 외에 다른 존재가 자기들을 다 비워내고 있으니까. 그래서 다 왕인 거예요. 이 세상 왕하고는 달라요.

거기서 전부 다 왕관 쓰고 있으면 누가 백성 하냐구요, 그 개념이 아니란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 현실이예요.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선악 판단의 주체로 설 수 없어요. 그말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존재는 그 존재성과 주체성을 다 삭제 당해야 한다는 그런 뜻이예요.그래야 하늘의 왕 노릇을 하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빌립보서 2장 5절에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빌 2장 5절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가져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더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왕 삼더라

이 이야기, 하나님이 죽이실 때 죽는 자가 하늘의 존재이며 하늘의 왕인 거예요. 다시 창세기로 갑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죄인,즉 죽은 자가 됐습니다. 좋은 의미의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인 척 하는 진짜 죽은 자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그 왕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의 앉아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고 하는 악마적 왕 노릇을 하려고 한단 말예요. 그걸 선악구조 속에 들어간 죽은 인간이라고 해요. 아담은 하나님 처럼,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기 위해 선악과 따 먹고 그 다음부터 자기를 왕 삼아 살았고 진짜 하늘의 왕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그걸 버리고비워져 진짜 왕이 되었단 말이예요. 이 첫 번째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을 잘 비교해 보시란 말예요.

무엇이 복음인지! 그런데 오늘날엔 이 첫 번째 아담의 행세를 하자고 그래요. 개혁주의가!! 이게 변질된 개혁주의 인거예요. 그렇게 자신이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다스림과 정복의 주체자로 서려는 자들에게 율법이라는 게 이제 통치의 수단으로 내려오죠. 내가 통치자가 되어 있어요. 선악 판단을 내가 하겠다고 선악과를 먹었단 말예요.그럼 내가 통치자가 된거예요. 내가 재판관이 되어 있다구요 이미. 여러분이 아니라고들 발뻄 하실지 모르겠지만 거짓말들 하지 마세요. 여러분 자신은 여러분을 알잖아요? 이 세상에서 여러분은 여러분이 왕 되고 싶어서 사는 분들이예요. 여러분은 다.

그런데, 거기에 내가 이미 통치자가 되어 있는데 나에게 어떤 통치자가 자기의 법을 내렸을 때, 통치자인 내가 이 법에 순종 할수 있어요 없어요? 애초에 그 기능을 상실한 게 선악구조에 갇혀있는 첫 번째 아담 들이란 말이예요. 이걸 율법에 갇혔다, 죄에 갇혔다, 죄의 종, 율법의 종이라고 해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첫 번째 아담들을 율법 아래 가두었다, 죄 아래 가두었다 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의도하셔서 그렇게 선악과를 입에 넣어 처박고 내려 보내신 거란 뜻이란 말이예요, 그게.

율법에다 가두었다라고 한단 말예요,그게. 그리고는 뭐를 알으라고? 그렇게 살면 멸망이다를 알고 결국 다 내려 놓고 예수 십자가 붙들으라고, 그 피 붙들으라고, 창세전 언약 붙들으라고, 여러분을 율법과 죄에 가두어서 내려 보냈단 말예요. 그런데 그렇게 우리가 육신을 사는 동안은 그 죄와 율법에 가두어져 있는데 도데체 어떤 놈이 나는 이제 성화가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러서 죄를 짓는 게 안 짓는 것보다 힘들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냐구요? 그 사람 예수 안 믿는 사람이예요. 그 제자들이 LA에 하도 많아서 요즘 내가 밖을 못돌아 다녀요.

율법을 지킨다는 건 그 율법을 제정하신 이의 통치에 순복한다는 뜻이죠? 그런데 있음’의 흉내를 내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들은 통치를 하려고 하는 자들이지 통치를 받으려 하지 않아요. 이미 선악 구조속에 들어가 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거기에 넣어서 내려 보냈다니까요. 가두어서 내려 보냈다고 하나님이 말씀 하셨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지 맘대로 나왔다고 하는 인간들은 뭐냐구 도데체가. 내가 판단자요, 내가 경영자요, 내가 통치자요. 그런데 그들에게 율법이 주어 진다고요. 그러면 그 율법이 어떤 기능을 하겠냐구요.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먹은 자들이 얼마나 불가능 하고 추악한 자들인지 어떻게 율법을 못지키는지를 폭로하는 기능 으로 작용하는 거,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의 하나님 처럼의 그 왕위 수호를 하기 위해 율법 지킴이라는 걸 얼마나 교묘하게 위장하고 조작해 내는지를 율법이 드러낸 다니까 요.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만 그 추악한 모습을 알게 되요. 나에게서부터 먼저. 그게 율법의 기능이예요.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3장 20절에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하고 명확하게 율법의 기능과 역할을 명기해 놓은 거란 말예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인간들의 율법지킴은 자기들의 왕위를 지키기 위한 위장이요 술책에 불과한 것이란 말예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이들의 노력은, 분명히 제가 단서를 달았어요. 자신이 자신의 인생을 통치하기 위해서 율법의 통치에 순복하는 것처럼 연극하는 거예요.인간들의 자아 챙기기 자기 왕위 수호의 열정은 그토록 집요하고 교묘하고 ,더럽고 사악합니다.착한 척 하여, 성실한 척 하여 나의 왕위를 수호하겠다는 거죠. ‘하나님 처럼’의 이 체면을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꼼수는 말씀 앞에서 완전히 폭로되고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그래서 여러분은 여기에서 이 말씀이 선포되는 현장에서 그 꼼수를 들켜야 되는 거예요.나 잘했죠’ 라고 갖고 온 것 조차도 이게 죄였네’ 이러고 가야 된다구요.그러니까 다 저를 미워하고 가야 되요. 나는 안 그럴꺼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 일을 하신 예수님을 죽였단 말입니다.그런데 여러분이 어떻게 복음을 이야기하는 설교자를 좋아할 수 있냐구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됐어요. 그 자신이 통치자 경영자, 판단자가 된 거예요. 그 통치자가 가정 먼저 가장 가까이에 있는 통치 대상을 붙드는데 무얼 가장 먼저 붙들까요?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게 누구죠?나’ 예요. 나부터 통치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통치를 받던 나를 내가 통치하기 시작하는 것을 아담, 죄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신앙생활 까지도 내가 나를 통치하는 데에 사용하죠. 내가 내 뜻대로 나를 통치하기 위해 우리가 흔히 쓰는 도구가 뭐예요? 기도 잖아요. 여러분이 하는 기도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기도가 몇 개나 되요? 다 내 뜻을 관철하기 위해 하는 거잖아요? 그러면 내가 나를 통치하기 위해 내 뜻대로 나를 통치하기 위해 우리는 기도까지도 동원해서 쓰는 인간들이란 말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들의 율법지킴의 노력은 전부 아담들의 왕위 수호 작전에 불과한 거예요. 자연을 위한다구요? 아뇨, 자연도 나를 위해 이용해 먹는 거예요, 우리는요. 그래서 계속 파괴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면서 미끼를 던져 놓으셨던 거예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면서 항상 토를 달아요. 후렴구 처럼 붙이는 말이 있어요 뭐예요? 율법 지키면 복 준다. 그렇죠? 구약성경 보세요. 율법이 내려올 때마다 항상 붙는 게 뭐냐면 율법 지키면 복 준다. 율법주의는 엄밀히 말해 기복주의를 살짝 감추고 있는 거예요.

윫버을 하나님이 말씀 하실 때마다 복을 말씀 하셨기 때문에, 인간들은 율법을 떠올릴 때마다 내가 원하는 복을 떠올리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요 진짜 우리에게 복을 가져다 주지 못해요.성경이 이야기 하잖아요. 율법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드러내기 위해 준 거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왜 율법을 주면서 다 지키면 복 줄게 라는 거짓말을 하시냐구요?

그건 인간들의 자기 왕위 지키기, 다른 말로, 인간들의 복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집요하고 추악하고 사악한지 보라는 거예요.인간들은 복을 받기 위해서라면 선악 구조속에 들어가서 자기들은 도저히 지켜낼 수 없는 율법이라도 목숨 걸고 지키려고 애를 쓰는 게 인간들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다 뭘 위해서? 내 복, 내 구원,내 천국 !! 이게 내 복이지 뭐예요? 무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합니까? 무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를 하냐구요?우리가.

다 나를 위해 하는 거 아닙니까? 따라서 십자가에서 율법이 못박혀 죽었다,그리고 율법이 나에 대하여 죽었다, 내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라는 말은, 성도는 율법을 지켜 인간의 자존심을 챙기려고 하는 그러한 복의 실체 그리고인간들의 그러한 의도를 정확히 깨달아서 이제 그것과는 상관 없는 삶을 살게 된다를 보여주는 게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동안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라는 게 도데체 무어라고 생각하시면서 읽으셨나요?

여러분 오늘날 성도라는 사람들이 말씀을 지키면서 성화를 이루겠다, 성화를 이루고자 노력하겠다라고 하는 게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자기의 성숙과 진보를 자랑하고인간들의 보편적 자존심을 높이기 위해서입니까? 왜 성화를 하고 싶으세요?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스러우세요? 웃음 밖에 안나오네. 진짜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스러워서 나는 이 성화된 모습을 반드시 하나님께 보여 드리고야 말거야, 이렇게 지금 성화에 힘쓰고 계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들의 왕위 수호작전, 자아 챙기기 일환으로 행해지는 율법지킴을 저주 하셨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가장 선하고, 가장 청빈하게 살던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새끼 독사의 자식이라고 최고의 저주의 말로 욕을 하셨다니까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런 걸 원하신 게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를 지키기 위해 예수를 죽이더라니까요.그런데 내 놓을 게 없는 세리나 창녀는 지킬 행위가 없으니까, 지킬 제사가 없으니까 , 가인처럼 자기의 지킬 제사가 없으니까 예수를 붙드는 거예요. 죄인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될 필요도 없어요 지금 죄인이예요. 그럼 나보고 죄인이 되란 말이예요? 아니 어디 그런 말이 있어? 그럼 나는 지금 죄인이 아니란 뜻이예요? 그걸 인정하고 예수를 믿으라니까. 우리보고 막 살란 말이예요? 이 따위 소리를 하고 앉아 있는 거예요. 그럼 지금까지 막 안살았다는 뜻이네?

자기만을 위해 사는 걸 막 산다고 해요.무슨 양야치들 처럼 개차반으로 사는 걸 막 산다고 그러지 않고 자기만을 위해 사는 모든 생각과 행위를 다 막 산다고 그래요. 우린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 왔잖아요?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이 이끌어 가는 삶을 살게되기 때문에 그러한 삶을 살면서도 거기에서 배우는 게 있단 말예요. 그래서 성도는 막 못산다고 하는 거예요. 겉으로 보기엔 막 사는 것 같은데 그 안에서 하나님이 양육해 내신다니까요.

예수님께서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으시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래서 예수님이 애기로 오신 거예요. 그냥 십자가만 지면 되면 성인으로 오면 되잖아요. 아담 처럼요. 그런데 왜 애기로 와서 그 고생을 다하냐구요. 창피하게 사람들이 기저귀 가는 것도 다 봤단 말예요. 하나님인데. 예수님은 나면서 부터 똥 오줌 가렸을 거 같으세요? 왜 그 모습으로 오셔야 되느냐하면 율법을 지켜야 되기 때문에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는 것으로 율법을 지켜야 되기 때문에 오신 거예요.

그런데 그걸 왜 지키냐구요.완벽하게 다 지켜서 인간들에게 전가시켜 주려고? 그러면 다 지켜야 되요. 그런데 예수님이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서 죽여야 되는데 놔 줬어요. 율법 어긴 겁니다.안식일 날 일했습니다. 율법 어긴 거죠? 온전하게 못지켜죠? 그러나 온전하게 지키려고 애기 때부터 애를 썼어요. 그래서 동생들에게 초막절날 안 올라 간다 그러고 올라 가셨단 말입니다.왜 그러셨겠냐구요.예수님은 율법을 지켜 선악과 먹고 내가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이 보편적 인간들의 위상을, ‘하나님 처럼’의 위상을 끝까지 수호 하겠다라고 하는 인간들의 율법 지킴을 날 때부터 돌아가시는 날까지 다 낱낱이 보여준 거예요. 예수님 보다 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어딨어요? 예수님은 완벽하게 다 지켜 내셨어요.

그런데 안식일 이라든지 간음한 여자를 대하는 사건이라든지 여기서는 진짜 율법의 진의가 뭔지 설명하기 위해 이걸 어겼단 말예요. 그러면 문자 그대로 예수님은 율법을 완벽하게 못 지킨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그걸 전가시켜 줄 수가 없어요.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그러니까 예수님은 율법을 우리에게 전가 시켜주기 위해 다 지킨게 아니라,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쓰면서 하나님 처럼’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으려고 하는 우리의 마귀성을 그대로 다 보여주시면서 그걸 자기가 끌어 안으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율법 지킨자로 십자가에서 죽는 거예요.’율법을 다 지키면 산다’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안되요.’ 다 지켜서 하늘로 가셨더라’ 여야지, 왜 다 지켜서 죽냐구요? 인간들이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율법을 지켜 인간들의 자존심을 챙기려고 하는 건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어야 된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어떻게 없음’이 있음’의 흉내를 내어 있음의 자리에 올라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니? 그건 안되잖아. 그래서 십자가의 피로 이들이 구원 받는다라는 게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거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지키시고 그리고서는 십자가에 매달렸어요. 십자가에 매달려서 뭐라 그래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는 뭐라 그랬어요? ‘하나님, 제가 꼭 이걸 마셔야 됩니까? 할 수만 있으시다면 이 잔을 좀 치워주세요’ 그랬어요. 그리고 얼마나 두려워 떨었는지 땀이 피가 됐어요. 홀리캅은 어떻게 죽었지요?내가 어찌 팔 십 년 동안 나를 배반하지 않은 예수님을 배반하겠느냐 어서 불 붙여라’ 화형대에서. 예수님과 사뭇 다르죠? 사람도 야 내가 이제 하나님 나라에 가는데 어서 불 붙여,’ 베드로 보세요. 내일 참수가 확정 되었는데 오늘 천사가 와서 옆구리를 차서 깨워야 될 정도로 푹 잤어요. 예수님은? ‘제발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셨다니까요.

뭐냔 말예요? 스데반은 죽으면서 얼굴이 천사 같앴어요. 그리고 죽으면서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랬어요. 그랬더니 하늘이 열려요. 예수님은?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그랬더니 하늘이 닫히고 흑암이 임해, 뭐냐구요? 율법 지킨 자들의 종말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지막까지 체휼을 하시는 거예요. 율법을 날 때부터 완벽하게 지켜서 인간의 자존심을 챙기려 하는 첫 번째 아담들의 결국이 뭐냐하면, 그걸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가겠다고 내가 사유해서, 쌓아서 가져가는 건 하나님이 이거 아닌데 라고 했을 때 왜 나를 버리십니까 라고 원망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내가 가지고 왔는데 왜 나를 버립니까?원망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그리고 이걸 하나님이 배설물 취급하신다 라는 걸 알고 난 다음에는 못 죽는거죠. 이 잔은 내게서 빨리 비켜가야 되는 거지 내게 오면 안되는 거예요. 왜? 내가 여태까지 평생 긁어 모은 율법지킴, 착하게 산 거, 재산, 세상의 힘 이걸 하나님이 부정해 버렸을 때에 나 어디로 가냐는 거예요. 이게 우리 것이고 원래 하늘이 열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아들이다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이것이 전부 예수님 거 였단 말예요. 이게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걸 다 가져가신 거란 말입니다. 그게 발 용서다 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나마 한 마디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이 무얼 하는지 모르나이다’ 한 거예요.

그렇게 완벽하게 예수님이 다 지켜낸 율법과함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육을 도륙 당하자 이제 그러면 그런 존재가 붙들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요? ‘ 아버지여, 나의 영혼을 아버지가 맡아 주셔야 되겠네요. ‘ 이 부탁을 하는 거예요. ‘아버지여, 나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 이게 성도가 마지막으로 하고 가야할 고백이예요. 이게 예수님의 옆에 달렸던 강도의 고백 이었잖아요. 그렇게 자기의 모든 게 삭제되고 부정 당한 그 사람만 아버지 이제 내가 뭘 의지해야 되요? 내 행위, 내 힘, 내 육, 성숙하고 개발되고 번영되어진 내 이 육신 이것 다 부정하면 그럼 아버지 나, 뭘 의지해야 되요?’ 이 때 성도는’ 아버지 그러니까 내 영혼을 아버지가 맡아 주세요’,로 가는 거죠.

그래서 맨 마지막에 이 육적 세상이 완전히 삭제 되는 거예요.어떻게? 가족관계가 재편 되지요. ‘요한아 너의 어머니다’. 이 역사와 인생이 삭제되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겁니다. 그냥 우리가 죽을 죄를 지었는데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몰라 솔직이, 죄를 지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셔서 우리가 살았대,아무런 감동이 없어 그러니까. 솔직히 얘기해보자구요. 무슨 감동이 있었어요 우리가요? 죄를 용서해줬다 그러는데 뭐 그렇게 대단한 죄를 지었길래 내가 예수님의 목숨값을 지불하여 용서를 받아야 되는가 오히려 의아해 하지 않았냐구요 우리가?

여러분 우리는 그 버려짐이라는 의미를 잘 이해하셔야 되요. 버려진다라는 건 일체를 전제하는 개념이예요. 하나였던 게 버려질 수 있는거지 원래 이 안에 없던 건 버려질 수 없어요. 아예 관계가 없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려 질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였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런데 그 버림이 뭐냐하면은 예수가 이 역사 속에서 성취하고 해낸 모든 걸 하나님이 그냥 부정해 버리는 걸 그냥 버림이라고 해요.

예수님이 인간의 몸,육신으로 하늘에게서 버려진 거거든요. 그런데 그 육신이 행한 모든 게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못박았다 잖아요. 율법을, 예수님이행한 평생에 행한 윫버 지킴이 못이 박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육신과 예수님의 행한 모든 게 못박히고 부정 된거예요. 이게 버려짐이예요. 그런데 성경은 성도와 예수님이 한 몸이래요. 따라서 이 세상에서 버려짐을 경험 할수 있는 건 성도 밖에 없어요.그 버려짐이 뭐냐 하면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다른 이들보다 더 착하고 더 훌륭하게 산것 같은데 본인에게도 흡족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도 나를 별로 인정해주지 않아.그러면 나는 어떻게 나라는 이 자아를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인정 받아야 돼?분명히 성도는 이리로 가게 돼있어요.

왜? 하나님이 성도만 버리거든요. 그들의 육과 그들의 행위를 하나님이 버리거든요. 그때 예수님 처럼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리로 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삽의 시 처럼, 시편 71편 처럼, 왜 하나님 저 예수 안믿는 저놈들은 저렇게 잘 사는데 왜 나만 이렇게 침 삼킬 동안도 놔두지 않고 이렇게 괴롭혀요? 이야기 하는 거예요.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수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고백을 했다니까요. 도데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구요?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만 버릴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들이 버려지는 거예요. 그리고는 결국에 그러면은 하나님, 내가 이렇게 착하게 산것도 안되고 이렇게 윫버 다 지킨 것도 아니라면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놔두는 거라면 그러면 난 도데체 뭘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가야 됩니까? 그때 십자가 딱! 주시는 거예요. ‘이거 붙들어야 살어’ 그게 창세전 언약이예요. 여러분 복음이 어렵지 않아요. 심플하다구요. 율법 지킴, 말씀대로 사는 게 여러분을 살릴 수 있는 거라면 하나님이 거기에 피 부으시면 안되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율법 책에 피를 부으신다구요. 피를 붓는다는 건 뭐라그랬어요? 그 밑에 있는 게 죽었다라고 그런다 했죠? 피로 사는 거니까. 히브리서 9장 보세요.



히9장19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우슬초와 피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지요? 유월절 이란 말예요. 그런데, 이 피가 율법책에도 발려진다라는 건 이게 죽은 거예요. 의문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죽은 의문. 사도 바울이 그러잖아요. 여러분은 이것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이것으로 내가 십자가를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자구나를 배우는 거란 말예요. 그래서 거기에 피가 뿌려지는 거란 말입니다.

롬 4장 24절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주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자니라

예수님은 자기의 능력으로 살아나신 거예요, 누가 살려 주신 거예요? 예수님 하마터면 무덤에서 못나올 뻔 한거예요.하나님이 죽은 예수를 살려 내셨어요.왜? 율법을 의지하여, 역사를 의지하여, 육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간 자는 다 죽는다를 완벽하게 보여 주기 위해 예수님이 그 자리까지 내려가신 거란 말예요. 그리고는 그렇게 죽자 하나님이 살려 내신 거예요. 내 영혼 아버지께 의탁합니다 한게 죽는 거잖아요.우리 육이 죽는 거잖아요.아무것도 할 수 없는거니까.그러자 하나님이 살려 내는 거예요. 뭘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부활의 몸으로.

이게 십자가와 부활이예요. 그런데 요즘은 신학교에서도 소설 책처럼 복음을 가르치고 앉아 있으니 ,,우리 아들 신학교 간다고 그러는데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말리고 있어요, 뭘 배우냐구요 ? 다시 한번 아브라함의 얘기로 돌아 갑니다. 창15장 에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그 쪼개진, 십자가로 말미암는 은혜의 언약을 그림으로 보여줬어요. 그런데 복을 받고 의인이라 칭해진 아브라함이 은혜의 언약을 언약으로 받은 다음에 즉시 행하는 게 뭐냐하면 율법으로 이스마엘을 낳았죠. 갈라디아서 4장에서 공부했잖아요. 지난주에.

하갈과 이스마엘을 사도 바울이 율법’이라고 해요. 시내산 이라고 하죠, 그죠? 왜,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는데 증거가 안나타나는 거예요. 그럴때 인간들은 믿음 없는 인간들은 내가 내 힘으로 증거를 만들어 내야 되는 거 아닌가 하고 조바심을 내게 되어있어요. 아니라구요. 하나님은 그렇게 증거 없이 죽은 자가 됐을 때 후사를 주는데 증거를 만들겠다고 애굽의 종, 하갈을 데려다가 율법의 열매를 만들어 낸거죠.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야단을 치신다구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얼마나 그 율법의 열매인 이스마엘을 자랑스럽게 여겼는지가 창세기 17장에 나와요.가볼까요?

창 17장 17절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구세니 어찌 생산을 하리요 하고 (약속은 안 믿어요 요렇게 그런데 뭘 들이미는지 보세요)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어차피 다른 건 증거도 없는데 하나님 그나마 내가 이거 만들어 왔는데, 이거나 기쁘게 받아 드세요. 우리집 똥개가 똥에다 양념해서 나에게 갖고 온 거랑 똑같은거죠.이거나 기쁘게 받아주세요. 그런거죠. 이게 우리의 모습이예요.오늘날 교회의 모습이예요, 이것이요. 약속을 의지하지 않고 뭔가를 자꾸 만들어서 하나님께 갖다드리려고 하는 거요. 인간 개혁, 사회 개혁, 교회 개혁, 국가 게혁. 믿음의 선진들이 대부분 이 경험을 해요.

야곱도 보세요. 야곱은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때 이미 너는 장자다’하는 약속을 받았어요. 내가 장자의 축복, 너에게 준다 라는 약속을 받았는데 자라면서 보니까 증거가 안나타나요. 자기는 계속 비리비리 한데 형은 아버지가 원하는 기쁜 일을 자기 힘으로 다 해내, 먹고 싶은 걸 다 만들어 내, 누가 봐도 장자의 자격이 있어요. 그러니까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지꾀와 힘으로 증거를 만들어 낸다구요. 이게 율법주의란 말예요.

아브라함이랑 똑같은 짓을 한 거라구요. 우리들이 역사 속에서 그짓을 똑같이 한다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거를 배설물이요 쓰레기라는 걸 여러분에게 가르쳐 줘요. 그게 성령이 하시는 일이란 말예요. 절대 그것으로 자랑을 못하게 한단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율법의 열매를 내놓자 하나님이 나타나서 뭐라고 말씀 하시는지 보세요.

창17장 1절

아브라함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세기 15장에서는 은혜의 언약이 주어졌어요. 내가 쪼개져서 이 언약을 성취할 거다.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너의 후손과 가나안 땅, 약속의 땅과 내가 너희 왕이 되는 이 나라, 하나님 나라를 내가 이룰것이다. 이게 쪼갠 고기사이로 지나가는 하나님의 횃불의 이야기란 말예요. 그런데 16장에서 아브라함이 덜렁 율법으로 열매를 만들어 갖고 왔어요. 이스마엘이란 열매를. 그랬더니 하나님이 나중에 나타나셔서 뭐라 그러느냐 하면 나 전능한 하나님이거든 너 내가 분명히 은혜의 언약에 대한 셜명을 해줬는데 율법으로 나에게 열매를 갖고 왔어, 그래 지켜보겠다는 거지? 그래 그렇다면 행하여 완전하라!’ 나는 너에게 분명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후손, (이건 예수 안에서 이루어질 일이잖아요) 그걸 약속 했는데 너는 지금 이스마엘 덜렁 하나 낳아 갖고 와서 하나님 이거나 좀 살게 해주세요 라고 갖고 왔어.그러면, 네가 해볼거면 완전하게 하라는 거예요.

행위 언약이 다시 주어지는 거예요.창세기 17장에서, 이게 율법이란 말예요. 그럼 그 율법 앞에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고백해야 했을까요? 알았어요, 잘못했어요. 내가 어떻게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걸 만들어 냅니까? 이것도 겨우 만들어 갖고 왔는데. 잘못했어요. 내가 약속 믿을게요. 이렇게 가야 되는 거예요. 이게 율법을 올바로 해석한 사람이예요, 성경을 올바로 본 사람이라구요., 이게. 그런데 우리는 전부, 그러죠 뭐.한번 해볼게요.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때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어떤 일을 행하세요? 할례를 행하라고 하세요.고자를 만들어 버리시는 거예요. 그건 하나님이 생식 능력 제로로 만들어 버리는 게 아니라 너는 이미 고자라는 걸 하나님이 확인 시켜주는 작업이었어요. 그게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나타나는 거예요.그래서 그렇게 노력을 하는데도 하나님이 스위치를 꽂아주면 가끔 되다가도 더 안되는 시간들이 많은 거예요. 그때 괴롭죠? 안 괴로우면 그건 진짜 성령 받은 사람 아니예요.

괴로워요. 가장 아파요 그게, 성도는.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사랑이, 은혜가 더욱 더 크게 체감이 되어 그게 이겨지는 거지, 은혜를 아는 자는 아무렇게 나 살아도 안아프다? 천만의 말씀. 그렇게 하나님은 아브라함 밖의 어떤 존재의 할례 받음,쪼개짐에 의해 아브라함이 후손을 낳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는 것, 하늘의 존재로 사는 것임을 설명하기 위해 할례를 행하라 그런 거예요. 진짜 하나님이 그를 생식 능력 제로로 만드실 것이었으면 생식기 자체를 잘라라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흔적만 가지라는 건 네가 노력해서 성취되는 거 아니니까, 네 밖에 진짜 쪼개진 어떤 이가 너를 살렸다는 것을 알라는 게 마음의 할례라는 거예요.그게 복음의 이해란 말예요.그래서 성경이 마음의 할례 받으라는 거예요, 우리한테. 성경은 이땅에 오고오는 아브라함의 후손 모두가 다 그런 아브라함의 궤적을 답습할 거라고 말씀 하셨어요. 본문 23절 24절 보세요.

롬 4장 23-24절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자니라

우리도 똑같이 아브라함처럼 그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예요. 자기들이 내 놓은 각자의 이스마엘들을 부정 당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짐을 경험한 이들이 하나님 내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합니다.이런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께 돌아와서 의인의 대열에 합류하는 이 역사속 구원 과정의 정석, 그것이 여기에 기록 되어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건 요한계시록에도 똑같이 기록되어 있어요.

계3장 1절

사데교회 사자에게 편지 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예수죠)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보세요, 사데교회가 당시에 굉장히 많은 행함을 내놓던 교회였어요.그래서 자기들도 이게 진짜 살아있는 교회지 라고 했고 다른 이들도 저 교회는 살았다 라고 했단 말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뭐라 그러느냐 하면 내가 네 행위를 아는데, 온 세상이 너를 살았다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넌 죽었다!!라고 해요. 행위를 지적한다구요 지금. 그러면서 뭐라 그러느냐 하면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것을 굳게 하라 네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노라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똑같이 나오는 거예요. 네가 지금 여러가지 행함을 내어 놓고 네 스스로도 살았다 하고 세상도 너희들한테 살았다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너희들을 알거든,그게 죽은 거란다.만약에 너희들이 그것으로 살려고 한다면 온전한 거 내놓아야 되는데 내가 보기엔 너희들의 행위는 온전하지 않아, 그러니까 죽은거야.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가 사데교회에서 나오는 거예요.

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이 역사속 보편적 교회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일곱개로 완전수로 보여주는 거예요. 어떤 지역 교회 하나의 문제를 지적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다 하나님의 복음이 올바로 전해지는 살아있는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예요. 하나님의 복음이 올바로 전해지지도 않는, 교회도 아닌 그런 교회는 하나님이 아예 신경도 안쓰고 교회’에게 하는 이야기라고요 이게.

교회는 반드시 이런 죽은자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다 죽은 것같애. 왜? 하나님이 율법안에, 죄안에 가두어서 내려보냈기 때문에 먼저이걸 경험하게 되요. 다 죽은 것같애. 그런데

계3장 3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그 구원을 너희들이 어떻게 받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고 회개하라.

(돌이키라는 거죠.은혜로 받았잖아. 이야기 하는 거예요)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시에 내가 임할른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 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다 죽어있는 것같은 그 사데 교회에 몇 명이 살아있어요. 그런데 그들은 무얼 입었다? 흰옷을 입었다. 그런데 그 흰옷은 계시록 7장에 가면 어린 양의 피에 빤 옷이라 그래요.그러니까 자기들의 행함으로 우리는 살았다 라고 한 사데 교회, 죽어있는 사데 교회에 예수의 피만 이야기 하고 피만 의지하는 살아있는 자들이 그들에게 맞아 죽으면서 거기서 붙어 있더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들을 제시하시면서 쟤네들이 산 거니까 너희들도 지금 남아 있는, 다 죽지 않았다는 것이죠, 남아있는 그것으로 너희들도 살아야지. 제발 은혜와 긍휼과 십자가와 피를 알아 먹으라는 거예요.

성경 전체는 다 이 이야기 하고 있다니까요. 선악과부터 계시록의 끝까지의 이야기가 다 이 이야기란 말예요. 너희들은 죽어야 사는 거야. 왜 자꾸 산 자 인척 해? 왜 있음’인척 해?처음 자리가 원래 없음’이잖아? 하나님이 물어 보시는 거예요.다시한번 말씀 드립니다. 성도는 역사 속에서 무엇을 해서 구원 받는자가 아니라 예수를 믿어서 구원 받는 거예요.그런데 우리 교회 잘 다니다가 교회를 나가면서 그분들이 저에게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 뭐냐하면 우리교회는 적용, 어플리케이숀을 목사가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이 모양이고 교인들이 막산다 그랬어요. 여러분은 막 사는 분들이 되는 거예요. 지금.

목사가 어플리케이션, 적용을 중요시 하지 않으니까 교인들이 막 산대. 막 사는 건 어떻게 사는 게 막 사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에 의해 끌려 가는 삶을 살지 막 안살아요.보자구요,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고 십자가를 설명하고 예수를 설명하고 예수의 보혈을 설명합니다. 은혜를 성령을 설교하면 회중들은 그게 보이지 않으니까 이걸 어떻게 이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지 인간답게 사는 법, 신자답게 사는 법,성화를 깊이 이루는 법, 사람들을 사랑하며 사는 법, 용서하며 사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해요, 저한테, 적용으로.

그런데 이게 뭐예요? 다 이렇게 사는 법, 저렇게 사는 법. ‘율법’이란 말예요.은혜를 설교하면 그걸로 예수를 붙들고 예수를 알아 먹어야 되는데, 이 웬수들이 이것을 법으로 다시 해석해 달라는 거예요.감히 나한테! 은혜를 설교하는 나한테!! 이것을 법으로 해석해 줘야 내가 뭘 할 거 아니냐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죠. 그걸 당신이 안가르쳐 주니까 이 교회가 지 맘대로 막 되먹게 산다는 것이죠.여기 어디 막 사는 사람이 있냐구요? 내가 보기엔 다 하나님에게 끌려 가느라고 지금 코피 터져가며 그길 끌려 가고 있는데 누가 막 사느냐구요? 여기에.

그렇게 살다가 너무 힘들어서 가끔 소주 한잔 먹다 걸린 거 이거 막 산 거예요? 고작 우리는 막 산다는 거의 개념을 고런 것으로 정의를 한다니까요.그 똑같은 요구를 사도 바울이 받았아요. 사도 바울이 뭐라고 대답 했는지 한번 보세요.

갈 3장1절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려느나 (은혜의 설교를 듣고 법으로 마치려고 하니?)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사도 바울의 말은 아멘 하면서 왜 나한테 지랄들이냐구요.똑같은 말하는 건데. 네? 못알아 듣는 거예요.그러니까 남들 웃을 때 웃지도 못해, 무슨 말인지 알아야,,,도데체 너희들 구원이 뭔지는 아니?라고 묻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 조심하라 라고 하면서 나보다 먼저 온것은 절도요 강도라고 했죠? 예수 보다 먼저 온 게 뭐예요? 십자가 보다 먼저 온게? 율법이잖아요. 그게 여러분을 죽이는 거예요. 그래서 죽음에 이르는 직분이라고 하는 거예요.

성도는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의 언약의 후사가 되는 거예요. 그게 아브라함이고 아브라함의 후사들이예요. 그렇게 내가 완전히 부정당하고 이 나의 육으로 이뤄낸 모든 게 열매 없음으로 판정되고 하나님 나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하는 이 자기 없음의 자리, 자기 부정의 자리, 이 십자가 지는 바로 이 자리, 이것을 예수를 낳는다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여자가 예수를 낳죠?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이를 낳잖아요.그런데 누가 방해한다 그래요? 사단이 방해하죠? 마귀가 방해하죠? 그 마귀가 뭐라그랬어요?

하나님을 찬송하여야 하는 것이 그 자리를 이탈하여 나 자신을 찬송하는 게 마귀라 그랬잖아요. 그래서 마귀를 천사장 루시퍼라고도 하고(그건 라틴어인데) 찬양 대장이라고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찬송해야 될 자들이 자기를 찬송하는 게 마귀란 말예요. 고 인간의 집요한 마귀성, 속성이 예수만을 절대적으로 붙들려고 하는 걸 방해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얼마나 집요한지 여자가 부르짖어 아파서 애쓴다 그래요.그게 우리 인생이라니까,, 아프다구요.내가 부정 당하고 부인 당하는데 어떻게 안아프냐구요? 그런데 하나님이 결국 낳게 만들어요. 그게 여러분의 인생이란 말입니다.

안죽으려고 안죽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계속 살아있으면 메릴 스트립이나 골디혼처럼 좀비 된다. 나는 너 죽여야 돼, 반드시 죽여서 예수를 낳게 만들어요.예수를 믿게 만든다 말예요. 여러분이 그 예수를 믿냐구요? 제 설교의 요점은 바로 그거예요.예수를 믿냐구요. 아니면 여러분을 믿으세요?예수를 찬송하기 위해 사세요? 아니면 내가 찬송 받기위해 내 인생을 영위해 나가고 계세요?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예수를 믿었습니까 아니면 율법을 숭앙했습니까? 모든 인간은 다 율법속에 갇혀서 율법을 지켜내느라 예수를 죽여요.우리도 그렇게 살아선 안되잖아요. 예수를 죽인다는 게 다른 말이 아니예요. 왜 내가 예수의 공로만 전적으로 의지해야 돼? 이게 예수 죽이는 거란 말예요.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야, 진짜 내가 예수 죽인자 맞구나! 그러니 예수, 하나님이신 예수를 죽였으니 내가 어떻게 감히 천국이야기를 꺼내? 이게 내가 죽는 거예요. 천국조차도 저는 제가 요구할 권리가 없다라고 그때에 하나님이 고 자, 네가 예수 죽인자 맞지? 없음이지? 그 자에게 하나님의 생기를 붓는 거예요.그게 예수의 피로 구속되는 창세전 언약이란 말입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보육원 아이들하고 가장 많이 했던 게임이 불루마블 게임이거든요. 모나폴리 게임이라고 . 이 아이들과 함께, 아이들은 부모가 없으니까 ,어떤 게임을 해도 목숨을 걸고 해요.진지하게 . 불루마블 게임이 뭐냐면요 이런 모형 판위에서 땅도 사고 빌딩도 사고 나라도 사고 도시도 사고 주사위 던져서. 너무 재밌어요.주사위 몇번 던지면 막 땅이 이만큼, 심지어 도시도 내거가 되고요 빌딩이 막 여덟 채씩 돼. 양손에 모형 돈이지만 돈이 주체할 수 없을만큼 들어와요. 저는 게임을 진짜 못해요. 난 진짜 민화투도 못쳐요. 그렇게 앉아서 바둑두고 장기두고 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해요. 앉아서 그렇게 하는 거.

그러니까 무슨 게임을 해도 다 져요. 나는 가위 바위 보를 해서도 절대 이긴적이 별로 없어요. 로또 같은 거? 절대 안하지,나는 소풍가서 보물 찾기에서 뭐하나 찾아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저는 맨날 져요.그리고 가장 먼저 져요.그런데 게임을 할 때는요 얼마나 재밌는지 쑥 빠져요 거기에. 다 잊어, 현실을 잊어요. 그런데 다 털리고 나면 애들이 안끼어줘요. 그럼 할 게 없잖아요. 그럼 그때 내 현실이 이제 자각이 되죠. 아, 집에 가야 되는데, 집에서 아버님이 기다리는데. 그럼 애들한테 그러죠. 야, 선생님 집에 갈게. 그럼 조금이따 후배 선생님들이 와서 그 모나폴리 게임을 뒤집어 엎어버리죠. 야 이제 치워, 자게. 그럼 얘네들이 그 빌딩과 도시와 나라들과 돈을 쥐고 나 어디로 가야돼?’ 이렇게 되요.

선생님은 아버지 만나러 간다는데 난 어디로 가야 돼?내가 그걸 매번 보면서 이게 역사의 결국이구나,깨달았어요. 인생들은 자기들이 쌓은 뭐 인격, 성숙, 변화, 돈,재물 인기 , 평판 이것들을 쌓느라고 정신이 없어요. 진짜 묵시라는 현실, 실체가 있다라는 걸 모르는 거예요.마지막에 하나님이 이 판을 확 뒤집어 엎었을 때 이걸 들고 어디로 갈건데? 여러분은 이 역사와 인생속에서 바로 그 하나님 ,그 예수, 그분이 계시는 하나님 나라, 내 아버지 집, 그걸 명료하게 붙드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붙들기 위해서는 내가 부정이 된다니까요. 그래야 모나폴리 게임, 불루마블 게임이 끝났을 때에 여러분은’ 아, 아버지한테 가야지’, 진짜 더 좋은 내집’. 그 아버지를 사랑하시느냐구요? 우리가 다음주에 공부할 부분인데 그 하나님과 화목하시냐구요 지금? 왜 여기에 신경들을 안쓰냔 말예요? 도데체가? 하나님을 배우세요. 하나님 나라를 배우시란 말예요.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그게 여러분이 이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할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