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로마서강해

로마서 44 너는 도대체 누구냐

은바리라이프 2013. 10. 16. 13:01

로마서 44





본문:롬 4장23-25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대낮에 호롱불을 들고 마치 미친사람처럼 (대낮에 호롱불을 들었다는 것은 뭔가를 못보고 있다는 뜻이죠)그렇게 미친사람처럼 신은 어디 있는가 라고 외치면서 신을 찾아 헤메던 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내를 지켜보면서 키득거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내를 조롱하듯이 맞장구를 쳐주었습니다.

"네가 찾는 신은 애들처럼 길을 잃었을거야, 아니 어쩌면 우리가 무서워서 어딘가 숨어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걸거야." 

그 사내는 고민했습니다.아주 괴로웠어요. 정말 그런걸까? 마침내 그 사내는 전광석화처럼 자신을 때리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신의 거취에 대한 결론을 내렸지요.

"신은 길을 잃거나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다. 보아라 죽은 신을 매장할 사람들의 발자국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신은 죽었다. 내가 그토록 고민한 신의 부재의 경험은 그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더이상 그는고민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의 광적인 거인 니체의 이야기 입니다. 신을 찾아 헤메던 니체가 결국 신의 죽음으로 그의 고민을 결론 내면서 수 천년 동안 서양문명을 지탱해왔고 그 서양문명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왔던 신이 니체에 의해서 무기력하게 살해당한 거예요. 그렇게 니체에 의해서 신이 살해 당하자 곧 이어지는 순서가 있어요. 곧이어 아버지들이 처참하게 살해 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 속에서 일어난 일이예요. (참고 <현대인의 자아상실>http://blog.naver.com/sophiryu/120026467065)


1919년 프로이드의 제자 폴 페드런이 ‘혁명의 심리-아버지 없는 사회’라는 논문에서 현대사회 속의 부권의 필연적 몰락을 예언한 바 있어요. 그리고 실제로 이 땅의 아버지들이 페미니즘이니 여권신장이니 하는 캐치프레이즈 아래에서 가부장의 자리에서 하나 둘씩 내려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제 이 지경이 된 거예요. 


에릭 프롬은 그렇게 신이 죽고 아버지가 죽은 이 세상을 향해서 '우리 인간은 모두 죽었다고 인정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인간이 의지할 대상은 신이었고 아버지였는데 '인간들의 신 되기 프로젝트, 자기 신 삼기 프로젝트, 가부장되기 프로젝트'에 의해서 신이 죽고 아버지가 죽었다는 거예요.

이제 의지할 대상을 잃은 거예요, 인간은요. 그러므로 이제 인간이 의지할 대상은 다 사라지고 오로지 믿을 것은 자기 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 자기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류의 죽음이다' 라고 에릭 프롬이 외쳤죠. 


물론 에릭 프롬이 복음을 근거로 해서 역사를 해석해 낸 것이 아니란 것은 저도 잘 압니다.그런데 그러한 일련의 역사 네러티브를 이렇게 바라보면 어쩌면 그렇게도 성경이 예언한 역사흐름의 지향성과 인간의 결국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실현되어 가고 있는지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에덴 동산에서의 그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권위를 타고 넘는 거였잖아요? 그게 역사에서 그대로 실현되어지고 있는 거죠. 

신을 쫒아내고 아버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신을 잃고 아버지를 잃은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모든 관심을 '나'라는 존재 안으로 집중하게 됩니다. 그건 니체와 폴 페드런과 에릭 프롬의 시대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아담과 하와 때부터 시작된 인류의 일관된 성향이며 실체인 거예요.


그렇게 밖으로부터의 어떤 압제도 권위도 통제도 허락하지 않는, 선악과 입에 문 아담들은 자기자신 안으로 숨어 들게 되고 자신의 심층 심리와 본능적 충동에 충실한 노예가 되는 거예요. 왜? 내가 하나님이니까 .


그렇게 흙인 자아 속에 갇혀버리는 상태를 땅에 갇힌 상태, 그래서 지옥이예요. 그래서 나만 위해 사는 것, 인간을 높이는 바로 그 인본주의가 지옥인 거예요. 그렇게 외부의 압제와 권위와 통제를 몰아내기 위한 투쟁에서 우리는 이겼다, 라고 생각하는 역사속 아담들은 자유라고 하는 전리품을 마음껏 향유하죠.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하나님이 말하는 자유가 아니라 자신들이 조합하고 정의하고 구축하고 상정한 자신 섬기기의 자유예요. 자아 섬기기의 자유란 말예요. 쉽게 말해서 자기의 뜻을 따라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내 천국, 내 구원, 내 상'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게 올바른 거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그건 방종입니다. 그 자유의 다른 이름은 방종이란 말예요. 그렇게 자기 밖의 상위 권위인 신을 죽이고 아버지를 죽인 인간들은 그 외의 다른 모든 권위들을 살해하는 인생을 살아요. 이제 좀비들의 세상이 된겁니다.


그리고는 서슴없이 '인간들의 가지고자 하는 무한 추구는 곧 신의 뜻이다!' 막스 뵈버가 한 이야기죠? 

인간들이 뭘 가지고자 하는 이 욕망, 이 뜻은, 이 무한 추구는 끝이 없어요. 무한 추구는 곧 신의 뜻이다. 이게 근대 자본주의의 근간이란 말예요. 핵심이란 말입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입니다. 그런말까지 서슴없이 해내는 그런 인간들이 된 거예요. 다른 말로 '내가 신이다' 라는 말이 되는 거예요. 내 뜻이 곧 신의 뜻이다 라는 말이니까요.


그러니까 아담들의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 하나님처럼 된 나 외의 다른 대상들의 피가 된거예요. 다른 대상들이 피를 흘려줘야 내가 살아요. 내 뜻이 관철되기 위해선 다른 이들의 뜻이 묵살 되야 되거든요. 이게 피란 말예요. 나 외의 다른 대상들의 피..


얼마전에 일본에 지진이 나고 쓰나미가 덮쳐서 아비규환이 되었을 때, 전 세계 특히, 한국의 전자 업계와 자동차 업계가 쾌재를 불렀죠? 한 번 더 흔들어야 되는데,, 이런 말까지 나왔어요. 애플의 수장 스티브 잡스가 죽자 애플과 경쟁관계에 있던 아이티 업계의 주가가 급상승했어요. 엘지와 삼성은 노났습니다. 증권시장의 독수리눈인 기관 투자자들이 기가 막히게 알아 낸거죠. 


지구 한쪽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제약회사의 상품판매량과 주가가 폭등합니다. 자연재해로 도시가 망가지면 중장비 업계가 호황을 누립니다. 그렇게 이 세상 아담들은 나 이외의 타자의 피를 먹고 사는 것입니다. 타자의 시체 앞에서 손익 계산을 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논리 개발을 하고 시나리오 작성을 하죠. 가상 시나리오 작성을 한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타인의 피가 많이 흐를수록 나의 이익이 늘어난다 라는 손익 계산이 끝나면 그때부터 그 마음속에 바램이 생깁니다. 더 많이 죽어줘, 더 많이 피를 흘려줘 하는 기도가 나옵니다. 그게 인간세상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갸기가 아니예요. 바로 역사속의 나의 실체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바로 그러한 나의 실체, 그 처음자리를 올바로 알아 가야하는 거예요. 


게오르그의 소설, <25시>에 나오는 그 유명한 문장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너는 유대인이냐? 독일인이냐?’  

그런데 그 사람도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나중에 잊어버려요. 

'내가 누구야?' 여러분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올바로 하실 수 있습니까?


이 대답을 올바로 하는게 성도의 신앙생활의 목적지입니다. 도대체 여러분의 정체가 뭐예요? 오늘 분문은 여러분의 정체를 예수님이 죽으셔야 할만큼 불가능하고 추악한 죄인이라고 정의를 내려 줍니다. 본문 25절을 보세요.



4장25절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여러분이 잘 들으셔야 돼요. 사실 4장 24절 까지에서 그 설명을 완료하고 있어요. 25절은 총정리를 하는 구절이예요. 유대인들의 율법과 할례라는 그 행위를 갖고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예로 들어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사는 것이다 라는 걸 설명한 사도 바울이 25절 마지막 절에서 그 전체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 구절을 정확히 번역을 하면 '우리의 죄가 예수를 넘겨 주었고, 우리의 의가 예수를 높이 들어 올렸다' 예요.사뭇 다르죠? 이게 정확한 번역이예요. 우리의 죄가 예수를 넘겨 주었고, 파라디도미, 하나님이 예수를 십자가에 넘겨주었다 할때 쓰는 단어예요. 넘겨주었고, 우리의 의가 예수를 높이 들어 올렸다, 찬송했다 라는 뜻이예요. 단순하게 예수가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고,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살아나셨다가 아니란 말입니다. 왜 용서하기 위해 살아나야 되요? 논리도 제대로 세우지 못하면서 함부로 추측들 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이 25절의 현실은 이미 묵시 속에서 벌어진 현실이기도 하고, 지금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일어나게 될 천국의 현실을 가리키고 있는 거예요. 그걸 조금 이해하기 쉽게 풀어 설명을 하면 이러합니다. 


성도는 원래 처음 자리가 먼지(아다마), 흙(아파르)입니다, 없음이예요. 혼돈(FORMLESS)과 공허(EMPTYNESS), 그릇도 없고 내용도 없는 ‘없음’이란 말이예요. 그 위에 하나님의 그 창조의 능력, 그 하나님의 신, 생기(루아흐)가 덮음의 은혜(라하프)로 이렇게 가입을 하게 될때 비로소 그 ‘없음’들은 존재(있음)로 탄생을 하게 되는 거라 그랬죠?


이게 하나님 나라 백성들, 하나님 나라 존재들의 탄생 원리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없음’들이 원래 '나 있었음’의 흉내를 내기 시작할 때 그걸 죄라고 한다 그랬어요. 하마르티아, 그 죄는 나라는 존재에게만 집중을 하기 때문에 나 밖의 모든 상위 권세들을 살해하기 시작해요. 왜? 내가 왕이 되고 내가 하나님이 되야 되기 때문에 내 위의 상위 권세는 반드시 살해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급기야 니체처럼 신까지도 살해하게 되는 거예요. 니체의 가장 핵심사상이 뭐예요? 초인사상이예요. 인간은 강하다, 그러니까 신은 죽어야 되는 거예요.


신을 살해한다는 건 나를 만드신 창조주를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예요. 하나님을 어떻게 가서 죽이겠어요? 신을 살해한다라는 건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예요. 그 말은 다른 말로 창조주 앞에서의 나의 처음자리를 먼지, 흙으로 자각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그런 뜻이예요. 이게 신을 살해하는 거예요. 왜냐면 창조주, 그 창조라는 말 자체가 ‘없음’이라는 전제를 가질때 비로소 발할 수 있는 단어란 말이예요. 그래서 창조주 앞에서 내가 있음의 흉내를 낼때 그것이 창조주를 무시하는 거고 창조주를 살해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없음에 불과한 자들이 있음의 흉내를 내면서 창조주를 살해하는 걸 이해하기 쉬운 그림으로 그려준 게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예요.


자기들의 있음의 흉내, '우리도 잘 지켜', '우리도 착하게 살아'.. 

이걸 지켜내기 위해 자기들의 제사를 지켜내기 위해 내 상위권위자인 그 창조주를 죽여 버리는 거예요. 살해해 버리는 거예요. 쫓아내 버리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내어줌이 되다 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파라도때는 넘겨주다라는 헬라어 파라디도미의 수동태예요.그러니까 예수는 우리의 ‘죄에 의해’예요.’ 죄를 위해서’가 아니예요.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 전치사는 죄에 의해서란 말예요. 죄에 의해서 쫓겨난 거예요. 넘겨진 거예요. 우리의 죄는 그렇게 하나님을 쫓아내는 것, 넘겨 버리는 거란 말예요.십자가에.

그게 신이 되고 싶어하는 아담들의 하나님 살해 사건이란 말예요.


그런데 바울이 4장 전체에서 , 아니 1장 1절부터 4장 24절까지에서 집요하게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나님의 의가 예수를 살해한 죄인들 위로 덮이고 부어지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죄인들이 의인으로 여겨지게 되는 거, 노기조마이, 여겨지게 되는 불가항력적 은혜의 현실이 성취가 되는 거예요.


그것을 자각하게 된 의인들이 무엇을 하게 되는가? 그렇게 해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여겨지게 된 자들이 뭘 하겠어요?

그 의로? 예수를 높이잖아요. 25절이 정확히 그 뜻이란 말예요. 죄가 예수를 십자가에 넘겨주는데 십자가로 말미암아 거저 의롭게 되자 그 의인들이 의로 예수를 높이는 거예요. 수동태란 말예요, 그것도요.그러니까 오늘 본문 25절 한절에 에베소서 1장의 창세전 언약의 현실이 모두가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그리고 우리 죄- 하나님 살해, 그 내어줌-와 (하나님이 선물해 주신)우리 의- 예수님 높임, 예수님 찬송- 사이에 십자가가 떡하니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렇게 죄는 끊임없이 상위 권위를 살해하려 하고, 의는 끊임없이 예수만 높이는 작업을 해요.

자신들의 처음자리를 모르고 나를 찬양하려는 자들이 끊임없이 구원자이신 예수를 쫓아내며 살해하려고 할때에 (우리안에 그 성향이 분명히 있잖아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찾아오셔서 그 ‘나’를 죽이시고 예수만 찬양받게 만들어 버리시는 거예요. 나를 절대 찬양하고 자랑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이 두 양상이 우리의 자아 속에서 공히 일어나고 있단 말예요.


나는 끊임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는데 그러한 나의 실체 자각을 통해 십자가가 감지 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나의 ‘있음’의 흉내가 죽어가고 예수의 공로만을 찬송하는 새로운 피조물로써의 나가 창조되는 거예요. 그것을 신학에서 생성론적 교회라고 불러요. 여러분 신학들 좋아하시죠? 너무들 좋아하시지 마세요. 신학과 교리가 예수를 죽였습니다. 세리와 창기가 죽였어요? 신학을 유일하게 갖고 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죽였습니다.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엉터리 신학이 예수를 죽여요. 하나님을 못 알아 먹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생성론적 교회로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아나는 거예요. 교회가 이 역사속에서 생성되고 완성되어져 가는 과정을 통과하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완료되어 있는 묵시속 교회의 현실을 역사속에서 차근차근 깨달아 간다,라는 의미로서의 생성론적 교회라는 뜻이예요? 그러한 생성론적 교회의 현실을 사도 바울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후 4장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여기서 후패하다라고 번역이 된 '디아프데이로'는 '철저하게 부패되다, 철저하게 썩다, 철저하게 파괴되다' 라는 뜻이예요..

우리의 겉 사람 즉 하나님과 관계 없이 규정되고 정의된 그 ‘나’ 그 나라는 자아는 매일매일 철저하게 부패되어 사라지고 파괴된다는 뜻이예요. 이걸 자기부인이라 합니다. 성숙시키고 변화시켜 내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철저하게 부패되고 파괴되는 거예요.그런데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그러죠?


속사람이 누구예요? 내 안에 사시는 이, 예수입니다.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렇다고 나라는 존재와 완전히 상관없는 그런 타자로서의 그 예수만을 지칭하는 게 아닙니다. 

나란 존재의 삶에 깊이 개입을 해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연합이 되어서 나의 그 겉 사람의 처음자리를 폭로해 내시면서 예수가 이끌어가시는 새사람의 실체를 깨닫게 하시는 나와 관계하시는 예수, 그게 속 사람이예요.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비롯한 상위 권위를 모두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자기가 주체자가 되어서 살아가요. 모든 인간이 자기를 신앙하면서 살아간다는 뜻이예요. 나를 신앙하면서 산단 말예요. 그런데 유독 성도의 인생에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 자신을 신뢰하지 못할 자로, 신앙해서는 절대 안될 자로 폭로해내세요. 나한테 먼저. 그러한 자기 확인에 의한 자기 실망, 이것을 부패라고 하고 파괴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이미 아버지와 하나님을 쫓아내 버렸기 때문에 나를 신뢰하고 신앙하면서 살아야 되요. 내 뜻이 곧 신의 뜻이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내 삶에 개입해서 나를 신뢰하지 못하고 신앙하지 못할 자로 드러내는 거예요. 이게 죄의 확인이란 말예요. 


사도 바울이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로 결론짓고 죽은 것처럼 그 자리로 밀려 가는 거란 말입니다. 

이게 겉사람의 파괴, 겉사람의 후패입니다. 그렇게 겉사람이 후패해지면 당연히 성도가 붙들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가 부각이 되겠죠? 내가 믿을 건 십자가 밖에 없는 거예요. 그걸 '속 사람인 예수가 새로워진다, 강건해진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는 겉 사람을 벗는 게 아니다. 너희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이걸 벗는 게 아니라, 착하게 열심히 살아서 옛 사람을 벗는 게 아니라  새 사람을 덧입는 거라고 합니다. 그게 바로 생성론적 교회의 모습이예요.



롬7장 21절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아래로 나를 사로 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건져내랴


이것은 사도가 사도 일을 할 때 한 고백이예요. 로이드 존스목사 틀린 거예요. 구원받기 전의 일을 여기다 적어 놨다고 억지로 끼어 맞춰서 로마서 강해를 했는데 틀린 거예요. 그 부분에서는 틀려요. 일관성이 없어져요. 구원 받은 사도의 고백이예요 이것이. 바울 안에도 두 가지 모습이 다 나타나고 있어요. 내 안에 분명히 예수가 계신데 사망의 몸이라는 게 공존하고 있어요. 


이렇게 바울은 사도로 일을 하는 중에도 자신의 겉사람의 실체를 수시로 폭로당하는 삶을 살았어요.

자신은 절대 신뢰 받을 대상이 될 수 없다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끌어 갔단 말이예요. 

자기가 개척한 교회에서 계속 쫓아내 버렸어요 하나님이. 그리고 유대 문헌을 보면 생긴 것도 너무 못생겼어요. 이 사람이. 

머리도 무지하게 크고 대머리에다가 매부리 코 그리고 짝다리였어요. 오다리. 유대 사가들이 기록한 바울의 모습이예요. 거기다가 말도 졸하다 그러고, 사람들이, 심지어 자기가 개척한 교회에서 교인들이 그의 도덕성을 갖고 들먹였어요. 왜 남의 자리 남의 범위 남의 한계에 침범하느냐 이렇게. 거기에다가 육체의 가시라는 걸 주었는데 이걸 단순히 간질이나 안질 이런 질병으로만 생각하지 마시란 말예요. 그의 외양, 겉모습, 사람들에게 평가되어지는 겉모습이 형편 없었다는 뜻이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왜 그렇게 놔두냐구요? 가시가 뭐예요? 스콜롭스라니까요.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하나님 이것 좀 제발, 이것좀 제해달라고,스콜롭스를 제해달라고 기도를 했단 말예요. 세 번이나. 이것은 응답 받을 때까지 기도했다는 뜻이라고 했죠? 


그 스콜롭스는 전쟁통에 데려다가 옆구리를 찔러서 끌고 다니던 그 쇠꼬챙이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걸 꽂아 놔뒀다니까요, 죽을 때까지. 사람들이 뭐라그랬겠어요? 그거나 먼저 빼 나한테 복음이니 뭐니 이딴 얘기 하기 전에 야 그거 꼴보기 싫으니까 그거나 먼저 빼,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안빼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놔두신 거예요.왜? 일은 네가 하는 게 아니라 네 안에 있는 내가 하는거라는 걸 보여주려고요. 그래서 사도 바울의 사역 반 이상이 감옥에 있었어요. 그런데 감옥에 있는데 밖에서 시기 질투 해서 사람들이 복음 전해, 친구들이 복음 전해, 자기는 가만히 있는데 되어져 가고 있어 일이.



롬 7장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 상태에서 사도 바울의 마음이 어디로 가는가)

어디로 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요. 내가 이 사망의 몸, 어떻게 할 수 없는 이 사망의 몸으로 고통스러워 하는데 길이 생겼어요. 벗어날 길이 생겼는데 그게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 의지 할 수 밖에 없더라는 것이죠. 그렇게 성도는 자기의 겉사람의 실체가 깨달아지면 깨달아 질수록 자신은 절대 신뢰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걸 분명하게 알게 되요.그래서 어디로 갑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로 가는데, 여기서 끝나면 괜찮아요. 그런데 또 '그런즉'이라고 나오죠? 그게 ‘데이’ 예요. ‘그러나’예요, 그런즉이 아니라.


‘그러나’ 내 자신이 여전히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가 기대하는 건 이제 그 '아, 예수가 우리를 구원해낸 거구나', 이걸 깨달았으면 사도 바울이 '그래서 이제는 내가 마음으로도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도 하나님의 법을 섬긴다',로 끝내야 되는데, 그런데 이렇게 예수께 감사한다 그래놓고 마지막을 그러나,로 또 반전을 일으킨다 말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으니 이걸 어떻게 하면 좋으냐?' 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래서 내가 죄인중의 괴수 맞구나! 그러고 돌아가신 거예요. 그게 바로 생성론적 교회의 모습인 거예요. 

우리는 이 육신을 입고 있는 한 계속해서 이 육신의 한계와 실체를 속속들이 알아가는 과정을 겪게 되는 거고, 그 속에서 홀로 선을 이루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항복하게 되는 거예요. 여기서 성화의 어떤 수준에 올라 가서 '오, 나는 이제 완전성화에 가까왔기 때문에 죄 짓는 게 너무 힘들어', 그러면 뭐하러 그걸 새 옷으로 바꿔줍니까? 그냥 입고 천국 보내지 왜 바꿔주냐구요 이걸요?



왕하19장31절

남은 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심이라


이제 구원받는 이들이 나오는데 무엇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시는 거예요. 우리의 열심이 거기에 가입될 수 없단 말예요. 그렇게 나라는 존재는 예수라는 신랑에 의해서 완전히 장악이 되어 그분에 의해 끌려가는 순종의 삶을 살게 될 때 비로소 하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라는 걸 알아 가는게 성도의 신앙여정이예요.

그것을 사도 바울이 질그릇 속의 보물이라는 아주 명쾌한 그림으로 설명을 해주죠?



고후 4장 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속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이 역사 속에서의 우리의 실체, ‘너는 누구냐? “ 그러면 ‘나는 질그릇입니다’ 라고 대답해야 해요. 질그릇이예요. 그죠? 왜? 하나님의, 예수의 영광과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내가 질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바울 신학의 백미인 '약할 때 강함 되심'이라 그러는 거예요. 


여기서 보배는 예수예요. 그런데 그 예수를 담고 있는 그릇이 질그릇이예요. 질그릇이라고 번역이 된 그 단어는 직역을 하면 흙으로 만든 신부란 그런 뜻이예요. 재밌죠? 흙으로 만든 신부? 깨어지기 쉬운 신부란 뜻이예요. 신부중에서도 신랑에게 완전하게 순종하는 신부를 ‘스큐어스’라 그래요.


그러니까 질그릇은 신랑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은 언제든지 깨어짐을 감수하며 ‘없음’에, 그 흙의 자리에서 신랑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 순종하는 신부로 사는 여자를 말해요. 그게 질그릇이예요. 


순종은 내 뜻과 내 의지가 신랑의 뜻 앞에서 꺽이고 부수어지는 걸 말하죠? 이걸 순종이라고 그래요. 그것도 완전하게 꺾이고 부숴지는 것을. 그런데 신부인 교회의 신랑은 예수라는 완전한 분이예요. 그래서 그 예수라는 신랑에 의해 끌려 가는 삶은 겉으로 볼때 어떻게 보인다 할지라도 다 선으로 귀결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신부는 '난 어떻게 취급이 되어도 좋으니까, 다른 이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아도 좋으니까 내 안에 들어있는 보물이신 내 신랑만이 존귀하게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을 삶으로 살아내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나는 어떻게 평가를 받아도 괜찮아요. 

‘ 아, 저 놈 저거 도둑놈이네, 야 예수 믿고 저 정도 성숙 밖에 못이뤄?’ 괜찮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저런 걸 예수가 구원했는가? '예수가 드러난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좀 비도덕적이고 좀 더러운 평가를 받는다 할지라도 괜찮습니다'가 질그릇인 거예요. 그래서 그 안에 있는 보배가 질그릇을 깨고 밖으로 나오는 거예요. 보배가 드러나기 위해 질그릇이 깨져야 된다니까요.


그래서 '깨지기 쉬운 질그릇'이예요. 그래서 흙으로 만든 그릇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그 예수를 드러내기 위해 성도가 이 세상에서 드러내야 하는 건, 나는 질그릇, 흙 맞아요. 죽은 흙 맞아요. 이걸 스스로 고백하고 남들에게도 드러내야 되는 거예요. 


좀 더 제가 쉽게 설명을 해드릴게요. 그릇의 정체성은 무얼 담는가에 있어요. 내용에 의해서 결정이 되죠. 밥 그릇은 밥을 담는 것입니다. 국 그릇은 국을 담는 거죠. 요강은 배설물을 담는 것이구요. 보석함은 보석을 담는 그릇이예요.


그 그릇의 자격과 됨됨이와 조건은 그 그릇의 정체성 확립에 아무런 기여를 못해요.그릇은. 주인이 아무리 화려한 그릇도 요강으로 쓰면 요강 되는 거예요. 주인이 거기에 무엇을 담느냐에 의해 그 그릇의 정체성이 결정이 되죠. 따라서 그릇의 기능은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의 영광을 위해 쓰여지고 소모되는 것이어야지, 그 그릇의 가치나 위상 확립에 있는게 아니예요.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이 되면 그릇은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아도, 어떻게 훼손이 되어도, 어떻게 평가를 받아도 두렵지 않아요. 불쾌하지 않아요. 내 안에 든 내용물이 그 가치와 영광을 인정받으면 그만이예요. 그것이 바로 생성론적 교회라는 거예요.

나는 계속 후패해지고 내 안의 예수의 은혜만이 더욱더 빛이 나게 되는, 그런 과정속에 있는 이들을 생성론적 교회라고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질그릇 됨의 자아인식 속에 있는 이들은 점점 자신의 치장이나 겉모습 외모 때문에 두려워 하거나 부끄러워 하는 일에서 벗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도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라고 단호하게 이야기 했던 거예요.


왜? 두려워 한다라는 건 내가 주인공 이거든요. 내 안에 담긴 보석이 주인공이 아니라 내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 모습이 왜 이래?’ 두려워하는 거예요. 생각해 보십시요. 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두려움에 떱니까? 하나님은 한번 택한 자들은 끝까지 끌고 가신다면서요? Perseverance of the saint , 견인.자기가 해 놓은 일에 대해서 불만족스럽고 불안해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두려워 떠는 거죠. 쉬운 말로 질그릇의 업적과 공로를 열심히 만들어 놓고 그게 못내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워서 두려워 떨어요.


그릇을 열심히 닦고 치장해서 이 정도면 됐나, 하고 봤더니 옆에 도자기가 딱 있네. 그러면 이내, ‘난 뭐야? ‘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두려움이예요. 하나님은 질그릇 안의 보석이신 예수를 보세요. 여러분 이 겉사람 껍데기 안에 예수를 보신다구요. ’ 너 얼만큼 변화 되어서 왔어?’가 아니라, ’너 안에 예수 있어?’ 를 물으신다니까요. 그리고는 그 껍데기를 불에 태워버리는 게 '불가운데서 얻는 구원'이란 말입니다. 예수만 남기고.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이 보신다고 하는 보석에는 관심이 없고 열심히 질그릇된 자신의 치장에 열을 올리면서 두려워 떠는 거예요.


그릇이 그릇인 자기에게 관심을 갖게 되면 ,그 그릇에 금이 가거나 그 그릇의 균형이 맞지 않거나, 그릇에 칠이 잘못됐거나 그 그릇에 뭐가 묻거나 하면 두려워서 어쩔줄을 몰라 해요. 그게 그릇의 원래 기능을 상실해버린 엉터리 그릇의 모습이예요. 그릇은 원래 누구에게 보이는 걸 목적으로하는 작품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란 말예요. 그릇의 용도는 내용물을 담는 거예요. 


그런데 그릇의 원래 기능과 용도를 착각한 사람들은, 마치 여주 이천의 도자기 공방에서 도공들이 흠 있고 균형이 맞지 않은 것 다 깨버리죠? 50%이상 다깨버려요. 망치로. 작품의 가치가 없다고. 그러나 우리 같은 사람이 옆에서 불땐 뭐를 담아도 담아서 쓸 수 있는 걸 왜 깨? 라고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다니까요. 그들은 작품을 원하고 우리는 그릇을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작품을 원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 안에 있는 보석. 너는 그릇이 되라고 얘기 했단 말예요. 그런데 스스로 자기에게 punishment를 줘서 자기를 깨는 거예요 자꾸. 두려움이예요 이것이요. ‘나 왜 이렇게 흠이 많어?’ ‘난 왜 여전히 이렇게 완성되지 못했지?’ 이렇게. 자기들이 스스로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이건 선이고 이건 악이라고 스스로 평가를 해버리고 스스로 두려워 하면서, 때로는 스스로 기특해합니다.


그게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의 보편적 죄성이예요. 그 그릇의 원래 목적이 전시용이라면 흠있고 균형이 안맞는 그릇은 깨버리는 게 맞아요. 그리고 열심히 닦고 치장해서 예쁜 작품이 되는 게 맞다구요. 그런데 성경은 그 그릇의 목적을 전시가 아니라 담지라고 이야기 한단 말예요. 보석을 담는 담지. 그렇다면 그릇에 조금 흠이 있어도 조금 균형이 안맞아도 그안에 담을 것만 확실하게 담고 있으면 그게 하나님 뜻에 맞게 사는 그릇입니다. 그게 바로 외모로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 성도의 올바른 자아인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쓰셨던 그릇들이 하나같이 다 모자랐던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들 보세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솔로몬, 다위, 바울. 왜 그런 살인자들, 갑옷도 안맞는 어린애, 함부로 남의 아내를 겁탈한 그런 자 뭐 이런 사람들을 데려다 쓰냐구요? 이왕이면 스데반 같은 사람, 보기만 해도 그냥 광명한 천사 같은 그런 사람 오래 좀 살려두고 두고두고 쓰시지, 왜 설교 한번 하고 죽이냐구요? 


일은 하나님이 하는 거라니까요. 일례로 다윗 같은 사람. 물맷돌 다섯개로 누구도 대항 할 수 없었던 골리앗의 이마를 쳐서 죽였단 말예요. 다윗이 잘 던진 거예요? 그 위에 뭐라고 기록이 되어있어요? 다윗은 수시로 곰과 사자 늑대에게 돌 던져서 잡기도하고 쫓기도했다 그랬죠? 다윗은 갑옷도 안입고 똑같이 일상의 돌을 던졌는데 하나님이 다윗이 하는 그 일상의 일, 거기에 표적으로 골리앗의 대가리를 딱 잡고 옮겨가서 맞춰준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가 위에 붙어 있는 거예요. 다윗은 일상의 일을 했는데 하나님이 죽였다는 뜻이예요. 그게 보석을 담은 그릇이라니까요. 그런데 무슨 상을 받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신앙생활이라는 건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자기자신까지도 판단을 하며 이건 선이고 이건 악이라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면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아담들의 그 선악판단의 그 판단권이 차압을 당하는 과정이예요.


왜 가난한 게 잘 못된거죠? 이 시대는 가난한 게 악이죠? 그래서 여러분이 가난해지면 절망 하는 거 아닙니까? 악이니까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렇게 판단 한거거든요 지금. 가난하면 안되는 거예요. 나는 . 그죠? 왜 부자가 선입니까? 왜 병 걸리는 게 악이죠?왜 건강한 게 선이냐구요? 누가 결정 했냐구요 그걸요?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이 결정해 놓은 거 아닙니까? 그 선악 판단이 하나님께 차압 당할 때 여러분은 가난해도 괜찮고 병걸려도 괜찮은 거예요. 이걸 천국이라고 하는 거예요.


선악 판단의 주체권을 하나님께 넘겨드리는 거란 말입니다. 상황과 사건이 변화되는 게 아니라, 내 선악 판단의 능력, 선악과 따먹고 얻어버린, 도취해버린 능력이 하나님께 빼앗기는 거 걸 구원이라고 한다니까요. 그런데 그 선악 판단을 내가 해서 율법을 잘 지키고 하나님 말씀 잘 지켜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라고 하는 그 판단은 누가 내린 거냐구요? 도대체가. 예수를 믿으래잖아요. 십자가를 믿으래잖아요. 


하나님은 흙으로 만든 그릇이 아무리 열심을 부려서 업적과 공로와 치장을 마련해서 가져온다고 해도 전혀 관심이 없어요.

흙은 태초부터 저주를 받았거든요. 그리고 그 흙이 만들어내는 역사, 즉 땅도 함께 저주 받은 상태잖아요? 그런데 그 저주 받은 흙들이 저주 받은 땅의 자원으로 만들어 낸 인간측에서의 행위가 하나님께 무슨 가치가 있어요? 스티브 잡스가 죽었습니다. 아이폰, 아이패드, 아이팩, 아이맥, 유일하게 실수 한 게 아이 댇입니다. 아빠로써의 일은 실패한 거예요. 그럼 한번 보자구요. 스티브 잡스 지금 하늘에 올라 갔을텐데, 지옥에 갔는지 천국에 갔는지 난 그건 모르겠어요. 예수 안 믿고 갔다니까 미루어 추측하세요.

그사람이 아이팯,아이폰 5, 아이맥 이거 들고 올라 갔을까요? 이거 내가 개발한 거라구? 하나님 나라에. 지금 우리는 그거 어떻게 하나 살라구 그거 바꿔볼려고 열심히 돈벌고, 문명을 새롭게 바꿔볼려고 그러고 있는데, 하나님 나라에 스티브 잡스가 그걸 갖고 올라가서 이거 하나님, 하나님 나라에서 유용하게 쓰일텐데 쓰실래요? 하나님이 이 문명의 산물, 땅의 산물을 받으시겠냐고. 아무 소용 없단 말입니다 그건요.흙들이 땅을 자원으로 만들어 낸 건 하나님 나라에 아무 쓸모가 없는 거예요. 창 3장 17절 보세요.



창 3장 17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은 이미 저주받은 상태예요. 그러니까 땅에서 잘 될수록 여러분은 저주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거란 말입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요 (땅이 낼 수 있는 건 가시덤불과 엉겅퀴 밖에 낼 수가 없어요 이거는 구약 전체에서 여러번 반복되서 나오지요, 뭐예요? 저주의 산물이예요. 가시 덤불과 엉겅퀴는)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이게 은혜의 언약입니다)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네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여러분 이게 은혜의 언약이예요.야, 흙이니까 흙으로 돌가라, 이게 저주인줄 아셨죠? 이 역사가 내어놓는 모든 건 가시덤불과 엉겅퀴예요. 원래 흙은 스스로의 힘으로 소산을 내어 놓을 수 없는 존재죠?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 따먹고 해보겠다고 나선 거지요?그래서 하나님이 그래, 그럼 땅을 갖고 만들어 봐라 이야기 한거예요.열심히 만들어 보라고 그러는 거예요.땀이 흐를거야 힘들거야.그러나 만들어라! 열심히 만들었어요. 스티브 잡스가 지금 겪고 있는 것처럼 열심히 만들었는데 하나님이 안 받는데. 아이폰 5 이거 아직 나오지도 않은 건데 이거 안 받아요?내가 갖고 왔는데? 아무한테도 안 알려줬는데? 부사장 한테도 안 알려줬는데 이것도 안 받아? 안 받아요!

그때에 성도는 아, 안 받는거구나! 그러면 나는 어디로 들어가야지? 아, 흙이 되어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 앞에 서야 나는 사는거지? 로 가잖아요.그러니까 만들어라 해놓고 너는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갈 거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살리겠다는 거예요. 그랬더니 즉시 바로 다음절에서 아담이 자기 아내 이름을 하와라고 짓는 거예요. ‘우리는 산댄다!’ 산 자의 어미예요. 창세기 3장 20절 보세요.

창 3잘 20절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라 (그죠?)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가죽옷을 입히시니라

이거예요. 하나님이 덮으시는 거, 우리는 흙이 되는 거예요.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원래의 자리 흙의 자리로 내려보내시는 것이 구원이라는 걸 창세기 3장이 벌써 힌트하고 있는 거예요.그게 바로 하나님의 가죽옷 사건, 십자가 사건이라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 여기에 벌써 힌트 되고 있는 거란 말예요. 그걸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골로새서 3장 1절 보세요.

골 3장 1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니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

다시 살리심을 받은자, 거듭난 자는 위엣 것을 찾으라는 거예요.그리고 그 위의 것의 내용이 뭐라 그래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앚아있는 그것이 위엣 것이예요.예수 그리스도란 말이예요.그리고는 땅의 것을 버리라고 그러죠? 땅의 것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율법과 율법의 열매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욕심부리고 탐욕부리고 이거 아니고.율법과 율법의 열매. 행위들을 이갸기 하는 거라구요, 버리라고 해요.그리고는 3절에서 그 이유를 말씀해주시는데 그 이유가? ‘너희는 죽었기때문에’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죽었기 때문에’, 죽은 자들이 무얼 만들어요?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자들인 거예요. 질그릇, 흙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흙, 그래서 죽여 버린 거예요. 흙으로 만들기 위해서. 죽여서 흙으로 보내기 위해. 그렇게 죽어서 이미 하늘에 앉아 계신 예수님 안에 앉아있는 우리, 성도, 이게 우리의 실체예요. 그게 우리의 현실이라니까요.그런데 왜 이땅의 육신과 이 역사의 자원으로 땅의 것을 만들어서 하늘에 오르려고 하느냐는 일갈이란 말예요. 기독교는 이땅에서 인격을 도야하고 선행을 실천하여 훌륭한 자, 강한 자가 되는 게 그 주목적이 아닙니다. 그거는 석가가, 간디가, 라지니쉬가 본 성경관이예요.부처가 성경을 보면 어떻게 보겠어요? 자비를 베풀고 보시를 하고 이웃을 섬겨 너의 이 이후의 삶을 유익한 것으로 보다 나은 것으로 쟁취해내어라가 석가의 가르침이죠? 석가는 성경을 그렇게 볼거라구요, 분명히.그죠? 공자는? 도덕과 윤리 잘지켜 그리고 부모 공경하고 국가에 충성해. 상위권위에 충성하라 그러면 좋은 나라 될거고 행복하게 살거야. 이게 공자가 보는 성경관 이예요. 공자가 성경을 보면 그렇게 볼 거 아니예요? 라지니쉬가 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인도 철학자 라지니쉬는 4 복음서 강해를 한 사람입니다.내가 부처라고 말했던 사람이 4복음서 강해를 했다구요.그런데 개혁주의 성화론과 똑같아요. 찾아서 읽어 보세요.똑같다니까요. 4복음서 강해가. 라지니쉬의 4복음서 강해가.

성도는 성경을 그렇게 보는 거 아니예요.그건 표피로 보는 거예요. 예수와 십자가로 봐야된다니까요. 우리는 분명히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세상은 우리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고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고 하는 바로 그런 관계에 있는 , 대척점에 있는 자라는 걸 확인했습니다.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세상과 성도가 서로 ‘네가 죽은거야!’’아냐, 네가 죽은 거야!’이런단 말예요. 그런데 성경을 도덕과 윤리로 여러분이, 행위로 보게 되면 지금 여러분의 대척점에, 십자가의 대척점에 있다라는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여러분이 추구하는 것이 똑같아 진단 말입니다.

예수는 분명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거라고 했고, 너희를 쫓아 낼거라고 했는데 어떻게 세상과 성도 사이에 교집합이 생기냐구요? 생각을 해보시란 말입니다. 어떻게 우리를 미워하고 우리의 대척점에서 우리를 원수 취급한다라는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지와 라지니쉬와 석가나 간디가, 슈바이쳐가 추구했던 그것이 성도가 추구 하는 게 될 수 있냐구요. 어떻게? 원수라며? 대척점에 있다며요? 어떻게 교집합이 생기냐구요? 남이 써놓은 책이나 주석책 이딴 거 보고 함부로 자기 거 정리하지 말고 생각을 하시라니까요!

한국기독교의 역사는 백년도 안됐어요.그 역사가 쏟아 놓은 게 다 라고 착각하지 마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거고 내칠 거라고 했지 똑같은 목적지를 두고 누가 먼저 그 목적을 성취하고 달성하나를 내기 하는 그런 사이라고 말하지 않았단 말입니다.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도덕적 윤리적 명령은. 세상이 인식하고 이해하는 , 간디가 적어도 산상수훈을 이해한 것과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달라야 되지 않아요? 성도가 보는 성경과 성도가 아닌 이가 보는 성경은 달라야 되지 않아요? 그러면 그러한 수 많은 도덕적 윤리적 명령의 그 표피적 의미 말고 더 웅숭깊은 메시지가 있다라는 증거겠죠? 그죠? 그게 뭐겠습니까?

왜 하나님은 성도의 인생에 수많은 도덕적 윤리적 명령들을 내려놓은 걸까요? 사랑해라, 둉서해라, 인내해라,이웃을 섬겨라. 여러분 율법의 기능이 뭐라 그랬어요?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게 하는 몽학선생리가 그랬죠? 그래서 선악과라는 율법이 떨어지자 마자 인간이 따 먹는 죄를 짓는 거예요. 죄인이구나 드러났잖아요.율법의 원시모형이 선악과니까요.먹지말아라! 선악과는 여자가보기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거였어요.

그걸 따먹었다는 건 내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자가 되겠다는 거죠? 그래서 그거 먹은 거 아닙니까?내가 그렇게 되겠다는 거예요.이것을 오늘날로 가져와 보세요.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도덕과 윤리와 선행은 누가 봐도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 스럽죠?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착하게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이나 화면으로 접하면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고승들 보세요. 평생을 진짜 장삼 하나 짚신 하나 갖고 살면서, 성철스님 같은 분 밥알 하나도 안버렸어요. 밥알 몇개 떨어트리잖아요? 그거 우물에서 씻어서 드셨어요. 그리고 중들이 선방에서 졸면 대나무로 뒤통수를 진짜 있는 힘껏 두들겨 패면서 너희들이 밖에 나가서 일해서 돈 벌어서 먹고 여기서 참선하는 줄 아냐? 신도들이 갖다 준 돈으로 여기서 참선하는 거 아냐? 그런데 왜 자? 밥값내놔라 도둑놈아 이랬어요. 누구한테 해꼬지를 하겠어요? 심지어 고승들은 죽을 때도 천화라고 해서 자기가 죽는 자리를 안남겨요. 남들에게. 그래서 입적한 흔적이 없는 고승들이 그렇게 많은 거예요.죽는 순간에, 사람이 죽음 앞에서, 여러분 같으면 몸살만 걸려도 못일어 나잖아요? 그런데 죽음 앞에서 고승들이 산으로 기어서 올라 갔다니까요.나뭇꾼도 못올라가는 거기까지 기어올라가서 거기에서 아무도 자기의 그 더러운 , 추한 마지막 모습을 못보게 나뭇잎으로 자기를 가리고거기서 죽었어요.천화라고요 그게요. 우리는 그런 거 보면 ‘야, 참 인간이 이렇게 깔끔해야지’라고 감동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건 여자가 보기에 보암직도 먹음직도 한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아더라의 열매여야 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하나님이 홀로 없음에서 ,혼돈과 공허에서 만들고 ‘야,참 보기 좋다’라는 그런거란 말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홀로 찬양 받으시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성도는 ,교회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보기에, 인간이 보기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들을 마구 만들어 내놓고 하나님은 그걸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으로 바꾸어 내는 게 신앙생활이란 말이예요. 이 두 가지가 성도의 인생에 공히 나타난다니까요. 그걸새창조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예요.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똑같이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 성도들에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선악과를 던지세요. 에덴 동산의 선악과가 따먹으라고 주신 과일인 것처럼, 그리고 네가 누구인지 알라고 주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도덕과 윤리의 명령 또한 따먹으라고 주신 게 맞아요. 하지 말라는 게 아니예요.열심히 하세요. 열심히 지키세요.그래서 보람도 느끼세요.제발. 거기에서 오는 만족감, 훌륭한 평판 다 좀 챙겨보세요. 뭘 해봐야 그게 허무하다는 걸 알지 해보지도 않고 말로만 허무하다, 뭐가 허무해요? 자기가 죄인이라는 걸 경험해보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말로만 죄인들이 너무 많아. 나는 죄인이래. 웃으면서. 순 사기꾼이야. 나는 죄인인데 웃음이 나옵니까? 천만의 말씀이예요. 다 새빨간 거짓말 이예요. 이 시대가 무슨 죄를 알아요? 뭘 하나님을 압니까? 실실 웃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먹어라!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거 먹어! ‘ 열심히 먹고 진짜 그게 내 영광을 위한 건지 네 영광을 위한 건지 확실히 깨닫고 오라고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 열심히 하셔야 되요. 최선을 다하셔야 되요.피 흘리기까지 싸우세요.제발, 노력하라니까요. 결국 이게 내 평판, 내 가치 챙기기 위한 것이었구나 까지 아시란 말예요. 안하고는 몰라요.잊지 마십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의 주체가 되어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한 열매를 맺어 내고 역사와 인생에 기여를 하겠다고 나선 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거예요.

하나님을 ‘나’ 밖으로 쫓아낸 거 아닙니까? 하나님은 그걸 우리를 쫓아냈다고 하는 거예요. 그게 예수를 내어주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죄가 예수를 내어준다니까요. 쫓아 낸다니까요. 선악과라는 율법을 수호하겠다고 생명나무이신 예수를 못 박아 죽이는 게 인본주의에 갇힌 인간의 실체예요. 선악과 따먹은 아담안의 인간들은 열심히 훌륭한 인간상 구축을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런데 그 모든 수고가 결국 하나님을 쫓아내고 자신이 신이 되기 위한 노력이요 애씀이다라는 걸 이 역사가 증명해 낸 거예요. 그게 전체가 십자가에서 축약이 된 것이고. 에스겔서의 성전측량의 내용을 보면요 성전문으로 들어가는 그 문마다 계단이 있죠? 성전은 분명 하나님 나라를 원형으로 해서 지어진 모형이라고 했어요.그러니까 하나님 나라 그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계단을 통해서 가야 되요. 그 계단이 어떤 계단인가? 성전에 계단이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야곱의 이갸기입니다. 사닥다리 나오죠? 그게 사다리가 아니라 stair way예요. 계단이란 말입니다. 성전의 계단. 그래서 야곱이 나중에 아, 이게 하나님의 전이구나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성전이야기 하는 거예요. Stair way, 성전의 계단이 나오는 거란 말입니다. 자신이 차자 임에도 불구하고 장자권을 자신에게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야곱은 뱃속에서 받았어요. 약속을 받았습니다.그런데 도무지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역사속에서 안나타나네요. 자신은 왜소한 반면에 형은 건장한 사냥꾼의 면모를 갖고 있어요. 몸에 털도 많아 자신은 할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형은 멋지게 사냥을 해서 아버지가 원하는 맛나는 음식을 수시로 갖다 바쳐요. 누가 장자의 자격이 있는 것 같아요? 당연히 에서예요. 그래서 아버지도 당연히 에서에게 장자권을 주려고 하고 있어요. 그때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이죠. 스스로 증거를 만들어 내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 성취에 인간의 꾀와 노력이 가입하는 것입니다. 뭘 입고 갑니까? 에서의 털,그걸 위장한 염소의 가죽을 입고 가죠? 부끄러운 차자가 장자의 옷을 입고 장자권의 복을 받는 게 구원이예요. 그래서 아버지가 목소리는 야곱인데 라고 인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그러잖아요?안단 말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을 부어줘버리는 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왜? 장자의 옷을 입고 왔거든요. 예수의. 장자이신 예수의 피! 그 예수의 흰옷을 입고 가야 구원받는 거예요. 그래서 가죽으로 옷 입고 가는 거예요. 창세기에 조금아까 우리가 읽었던 그 무죄한 짐승의 옷이 비리비리한 야곱, 강도의 몸에 입혀지고 그가 아들이 되는 거예요. 장자가 되는 거란 말입니다.

야곱이 그 일로 아버지 집에서 쫓겨 납니다. 이미 장자가 됐어요. 복을 받았어요. 근데 어떻게 해서 네가 이 복을 받은 건지 왜 이런 방식으로 복을 받는 건지를 이제 설명해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야곱이 쫓겨 났습니다. 복을 받았는데 개뿔이나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빈손으로 쫓겨 나서 광야에서 누워서 돌베게 베고 자는데 하늘에서 stair wa가, 계단이 내려와요. 땅에 닿지 않아요.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운 계단이란 뜻이죠.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내려오는데 복을 갖고 내려오는 하나님의 사자들인 거예요. 보십쇼. 야곱이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으로 너에게 복을 주겠다, 장자의 복을 주겠다라고 약속하셨는데 인간들이 내가 여기서 무슨 일을 해야 되는 거 아니예요? 라고 계단을 쌓아 올라가는 거예요. 이게 아브라함의 이스마엘 사건이고 야곱의 장자권 도취사건이란 말예요. 인간들이 개입을 하는 거예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계단을 하늘에서 다시 내려보내면서, 성전을 내려보내면서 그를 덮어버리는 거예요. 요한복음에 나오죠? ‘예수님이 이 땅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가 성전이 우리를 덮는다라는 뜻이라고 했어요. 그게 요한계시록에서도 장막이 우리를, 교회를 덮죠? 똑같은 거란 말예요. 그렇게 성전이 내려와서 너희를 덮는 게 구원이지 네가 여기서 계단 쌓아 올라가는 게 구원 아니다를 광야에서 설명해준 거예요. 이게 우리의 인생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거기가 광야인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러는 거예요. 여기가, 이게 하나님의 성전이구나, 하나님의 성전, 여러분, 예수, 성전,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 건 이런 형국으로 완성되는구나 라는 것을 알고 거기를 ‘벧엘’, 하나님의 집, 이라고 이름을 지은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인간들이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이 세상의 자원으로 하늘에 닿기 위해, 야곱처럼, 하늘에 닿기 위해 쌓아 올렸던 계단이 있었지요? 뭐였어요? 쌓아올리다, 계단이 ‘쌓아 올리다’에서 나온 단어란 말예요.

바벨탑이란 말예요 그것이요. 그래서 거기도 stair way가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거 때려 부셨잖아요. 인간들이 하늘에 닿기 위해서 돌과 진흙이 아닌 역청과 벽돌이라는 문명의 산물들을 이용해서 계단을 쌓아 올라가는 거예요. 이게 역사예요, 그때 한 번 있고 마는 게 아니라 이게 전체 역사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바벨탑이고 요한계시록에서 이 세상 전체를 바벨론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걸 부수는 거란 말입니다.그런데 이 하늘에 오르는 계단 쌓기 경연장인 이 세상을 하나님이 부수지 않고 그냥 놔두세요.그냥 놔두세요. 그리고 유독 당신 백성의 바벨탑 쌓기만 부수세요. 요걸 고난이라고 해요. 애굽에서 발견된 피라미드에 이런 글귀가 씌어있어요. 전부 다에. ‘하늘로 향한 계단은 그를 위해서(왕이죠) 만들어졌다.계단을 통해 하늘로 오르기 위해서’ 애굽사람들은 이 피라미드를 .stair way라고 이야기 했어요. 인간이 스스로 하늘에 이르기 위해 인간의 힘으로 쌓은 계단, 그게 피라미드입니다. 지금도 인류가 만든 세계 최대의 건조물로 칭송되는 애굽의 피라미드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7백년 전 BC 2700년에 만들어진 거예요. 아브라함과 롯이 그 어마어마한 피라미드가 있는 애굽에 갔다온 거예요. 그래서 롯이 소돔과 고모라땅을 보면서 야 애굽 같다! 그런거예요.

지금도 피라미드를 보면 세상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지는데 아브라함과 롯이 그 땅을 갔다 왔다니까요. 왕의 피라미드는 높이 146m이구요. 밑변의 길이가 230m나 되는 거대한 석조건물이예요. 이걸 쌓아 올리는데 필요한 석회석이 268만 개, 전체의 무게가 600톤입니다. 600톤이 아니라 600만 톤, 돌하나의 무게가 2.5톤에서 10톤까지 나가요. 돌 하나의 무게가. 거기에 쓰인 석회암은 가자 남동쪽 15km지점 엘뚜르 등에서 캐어 온거구요. 화강암은 850km Ejfdjwls 곳에서 나일강을 통해서 싫어 온 거예요. 10톤짜리 돌멩이를 850km 떨어진 곳에서. 지금부터 5000년 전에 만든거예요, 이게요. 하루 십 만명이 20년 동안 매일 만든거지요. 그 피라미드가 총 268만 개의 돌로 만들어졌고 총 20년의 공사기간이 사용됐으니까 이걸 산술적으ㅗ 한번 계산해보자는 말예요. 268 개의 돌 나누기 20년 나누기 365일 나누기 24시간 그러면 한 시간에 돌멩이를 몇 개씩 쌓았는가가 나올 거 아니예요? 뭐예요? 15개를 쌓은 거예요. 한 시간에. 면도칼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돌을 쌓았는데, 4분에 한 개. 가능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중장비가 없던 그 시절에, 이건 불가능이다 그래서 세계 7대 불가사의,피라미드를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러는 거예요. 외계인들이 와서 만들었다. 아뇨. 그런거 궁금해할 필요 없어요. 역사는 끊임없이 뭔가를 그려내는 거라 그랬죠? 거기서 여러분이 배울 건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의 그 인본주의적, 율법주의적 성향, 자기 가치 챙기기, 자존심 챙기기 우리가 계단 쌓아서 하늘에 올라가겠다고 하는 그 집념이 얼마나 무시무시 한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5 천년 전에, 중장비 하나 없는 그 시대에 10톤짜리 돌을 쌓아 올릴 정도로 하늘에, 우리힘으로 하늘에 올라가겠다고 하는 인간들 집념이 그만큼 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끝! 외계인은 무슨 얼어죽을 외계인이예요? 인간은 내가 신이 되기위해선 뭐든지 한다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걸 그냥 놔뒀잖아요. 지금도 이집트의 관광수입의 대부분이 그 피라미드가 벌어들이고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놔두시는 거예요. 열심히 쌓아라. 계속 쌓아라, 기적을 만들어 내라 그리고 죽어라. 놔두십니다. 은혜의 계단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야 돼요. 그 은혜의 계단, 은혜의 통로로 이땅에 오신 분이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신 예수예요. 그 야곱의 사다리 stair way 가 요한 복음 1장에 다시 나오죠? 볼까요? 51절 보세요.


요1장51절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사자들이 인자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걸 보리라 하시니라


성전되신 예수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예수가 하나님의 사자, 복을 갖고 내려온, 은혜를 갖고 내려온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stair way 끝에 서 있는 거예요.예수입니다. 예수가 내려오신 거예요.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여 올라가는 거 아니란 말예요. 성도는 바로 그 예수라는 길을 통해서 성전, 즉 하나님 나라로 입성을 하게 되는 거지 자신이 쌓는 계단을 통해서 성전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 바로 뒤에, 요한복음 2장에, 지금 여기서 참 성전이신 예수의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성전 계단,stair way. 그러면 옛 성전이 기각 당해야죠. 부정 당해야죠. 그래서 바로 그 뒤에 옛 성전을 허물어 버리는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이 나오는 거예요.


옛 성전, 때려부셔 버리는 거요.내가 성전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성전 정화사건과 하나님 나라의 stair way, 계단으로서의 예수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하나 삽입이 돼있어요. 그게 뭘까요?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란 말입니다. 설명해주는 거예요. 그게 (인쿨루지오?)양쪽의 빵을 가운데 속이 강화시켜주는 거지요. 


가나의 혼인잔치 사건은 정결예식을 행할 때 쓰는 물을 담아두던 여섯 개의 물항아리가 비어 있었다라는 것을 기억함으로 해서 인간들이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려고 했던 그 물,그 율법의 항아리가 결국은 다 위선적이었다라는 것, 그리고 아무 쓸모가 없었다라는 걸 먼저 드러내지요. 그래놓고는 포도주로 그걸 채워버려요. 예수님이. 포도주 항아리가 여섯 개, 이 혼인잔치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안식,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의미 하는 거죠? 잔치가 잔치 되기 위해서는 어린양의 피가 반드시 전제 되어야 된다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새창조의 완성은 반드시 창조의 수 7이 필요한데, 항아리가 6개란 말예요. 그럼 7곱번째 항아리는 누구? 예수란 말입니다. 어떻게 예수가 7번째 항아리가 되는지 보시란 말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내가 목마르다’ 라고 말씀하셔요. 그건 성경의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요. 그러니까 목이 마른 게 아니었어요. 뭘 응하게 하기 위해 내가 목마르다 라고 했어요. 뭘 지금 유도하고 계신 거란 말예요. 예수님이 목마르다라고 하시자 군인들이 신포도주를 해융에 묻혀서 우슬초에 묶어 예수님께 댔단 말예요. 요한복음 19장28절 보세요.



요 19장 28절

이후에 예수께서 모든일이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더라


예수님께서 우슬초에 발린 포도주를 받으시고 테텔레스 타이, 다 이루었다! 이제 끝!그러고 돌아가셨어요. 왜 하필 포도주죠? 그리고 이 포도주는 무얼 의미 합니까? 그리고 왜 그건 굳이 우슬초에 매여서 전달이 되어야 됐을까요? 창에다가 매서 줘도 되잖아요? 먼저 그 포도주가 뭘 의미하는지 한번 보세요.


10장 38절

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있느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으셔야 할 잔이 있죠?


누가복음 22장42절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예수님이 받아야 할 잔이 있어요.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받으신 이 잔, 저주의 잔 심판의 잔. 예수님은 이 잔을 받고 운명하시는 거예요.그래서 신 포도주를 맨 마지막에 마시고 죽는 거라구요. 이 잔, 예수님이 그토록 무서워했던 이 잔. 그런데 성경에는 이 잔 말고 또 다른 잔이 나와요.



누가복음 22장 20절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제자들에게 주는 잔이 또 나와요. 그것도 포도주예요. 그런데 그건 예수의 피’라 그래요.보십쇼. 우슬초가 뭐지요?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어린양, 무죄한 어린 양의 피를 발라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던 도구가 우슬초예요.그런데 거기에 발린 피가 어린양의 피라구요.지금 세례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 한 그 어린양이 십자가에 달려 있어요.거기에 어린양의 피가 발려져야 되요. 우슬초에 발려 져야 되요. 발려지기 위해선 예수가 먼저 죽음의 잔, 심판의 잔을 받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해 먼저 신포도주 잔이 예수께 가는거죠.받고 다 이루었다, 죽는 거예요. 죽자 그 피가 우슬초에 묻혀 우리에게 발려진 거란 말입니다.그리곤 다 이루어진 거예요. 끝!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그 우슬초에 발린 어린양의 피가 2백 만명의 집에 발려졌어요. 2백 만명이면 지금 직할시예요.그 2백 만명이 다 착했을까요? 그 2백 만명 중에 도둑놈 없었을까요? 그 시간에 부부싸움 하는 사람 없었을까요? 그 시간에 강도질 하던 놈 없었겠냐구요. 그 시간에 간음하던 자들 없었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안의 내용물을 안 보고 피만 보고 넘어 가신다니까요.


예수님의 새언약의 피, 마찬가지예요. 여러분이 어떤 존재인가 그걸 근거로 피가 발려지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창세전에 불가항력적으로 택해버린 그자 들에게 그냥 발려지는 거예요. 거기에서 찬송이 터지는 거예요.예수님의 피가 우슬초에 발릴 때 온 세상이 한 일이 뭐냐구요? 합심하여 예수 죽이는 것밖에 더 있어요? 뭘했냐구요? 그래서 그 주위에 전부 마리아 밖에 없었다 그러죠? 이름이 딱 하나 마리아, 마리아,마리아, 마리아,마리아. 마리아가 뭐예요? ‘마라’. 쓴 물들이 단 물이 되기 위해 예수의 피를 기다리고 서있는 형국인 거예요. 


그 은혜를 찬송하기 위해선 여러분이 마라’라는 걸 반드시 알아야 되요.그걸 진짜 아냐구요? 제가 강조하고 싶은 건 그거라구요.아무것도 하지 말고 막 살라는 뜻이 아니라 진짜 입으로만 내가 죄인이다라는, 그 입으로만 내가 죄인이라는 그런 인간들 말고 진짜 내가 죄인임을 아는 그 성도들이 여기 있냐는 뜻이예요.여기 있냐구요 진짜로.그런데 그 죄인들이 무슨 이렇게 잘난 척을 하느냐구요.뭘 그렇게 대단하게 많이 하세요?


여러분이 성경을 통하여 하나 알고 가야할 거 있는데 그게 뭐냐하면 나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더 이상 필요 없어요. ‘나에겐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이거 하나 알면 다른 거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자랑하지 마세요.무슨 신학과 교리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그런데 왜 서머나 교인들은 다른 데 가서 자랑들 하고 다녀요? 십자가로 말미암아 새로운 우슬초에 묻혀진 새언약의 피도 역시 불가항력적 은혜로 발려지는 예수의 피에 촛점이 있는 거지 그 피가 발린 대상의 자격과 조건과 업적과는 별 관계가 없어야 되요.


잘들으세요. 새언약의 피로 우리 성도들은 새로운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엑소더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거예요.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그렇다면 지금 성도가 나와야 하는 애굽이 어디겠냐구요? 여러분은 어디서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 피를 지금 예수님이 발라 놨는데 어디서 나와야 되냐구요? 그걸 알아야 막 살든지 말든지 할거 아니예요. 어디서 나와야 되는 거예요.여러분이 나와야 하는 애굽이 어디냐구요? 도데체가 우리가 지금 어디에 갇혀 있다구 왜 또 다른 우슬초에 피가 발려 지냐구요? 그 애굽이 어딘지는 요한계시록에 나와요.요한계시록 11장 8절 보세요.


계 11장 8절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여기는 바벨론입니다)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계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라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 하더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 어디죠?예루살렘입니다. 율법주의의 총화.율법주의가 예수를 죽인거죠?은혜 이야기 했다고. 왜 인간의 자존심을 팍팍 긁냐고. 예루살렘이 예수를 죽였다구요.거기에서 예수가 율법이 되어 죽으시는 게 십자가예요. 그죠? 그곳에서 지금 두 증인, 교회가 죽습니다. 율법주의에서 죽는 거예요.그리고 생기를 받아서 다시 살아나죠. 그런데 그곳이 애굽이래요. 


그러니까 성도가 나가야 할곳은 바로 여기예요. 새언약 하에서의 새로운 출애굽은 바벨론, 이 세상, 바벨탑 쌓기의 현장.이 세상 바로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 처럼된 나’. 나에게서 죽고 나에게서 빠져 나오는 걸 새언약하의 출애굽이라고 하는 거예요.인간에게서 나오는 거예요.하나님과 연합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인간에게서 나와서. 나라는 자아안에 갇혀서, 지옥이잖아요? 흑암에 갇힌 게 지옥이지 뭐예요? 나의 신 됨을 구축하려는 자들이 쌓는 그 계단이 바벨탑이었잖아요. 그 바벨론에서 내가 죽는 거예요. 두 증인, 교회,’ 나’가 죽은 거예요.


그걸 겉 사람의 후패라고 해요. 하나님이 놔둬요. 그리고 생기에 의해 새롭게 살아나는 거 이게 십자가와 부활이예요. 이게 역사 속에서 여러분의 인생에서 똑같이 나타난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가 죽은 곳이라고 하는 거예요.그걸 새언약 하의 새로운 출애굽이라고 하는 거예요.그러면 이 역사속 바벨론에서 우리 성도가 반드시 거쳐가야 할 과정이 뭐겠냐구요. 그것은 나의 죽음, 그리고 새로운 나에로의 탄생인 거예요.


잘들어보세요. 우리 인간들은 원래 없음이죠? 원래 우리의 처음 자리는 없음이예요. 따라서 그 없음이 스스로 나’라는 자아를 구축하거나 규정할 수가 없어요.없음이기 때문에.’나’는 없는 거란 말예요. 원래가. 그러면 그 없음이 나’라는 존재가 되기 위해선 외부에서 어떤 대상이 나에게 나’라는 내용을 주입해 줘야 되요. 그래야 비로소 그 없음이라는 존재가 나’라는 자아를 구축할 수 있게 된다구요. 


예를 들어서 애기가 태어나서 엄마 품에 안겨요.그리고는 엄마의 아들이라는 나’의 내용을 전달 받아요.아들, ‘나’ 예요. 그죠? 자라면서 학교에 들어갑니다.학교라는 대상에 의해 나는 학생이라는 나’의 내용을 받게 되요. 내 친구들을 통하여 친구라는 나’를 또 규정합니다.직장에 들어갑니다.직장에 들어가서 직원 또는 장사를 하면서 주인이라는 나’를 또 규정하죠. 결혼해서 아내, 남편이라는 나를 또 규정하게 되죠. 그런데 그게 다 뭐예요? 다 이땅의 것이죠? 그 땅의 것에 의해 규정된 나를 성경이 육이라고 그래요.


그러면 이게 싹 사라지고 성령에 의해, 하나님에 의해 규정된 나를 뭐라그럴까요? 영 이라고 해요. 그래서 육으로 난 건 육이고 영으로 난 건 영이다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여러분은 바로 그 육이 죽는 경험을 이 세상 속에서 해야 되는 거예요.하나님이 그걸 끊어 가시는 거예요.내가 내 마음 내 생명처럼 여겼던 것들을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끊어 가시면서 그러면 이제 나는 뭐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자식을 생명처럼 여기면 그 자식이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죽고 싶은 거죠. 그죠? 그러니까 그게 나라니까요.돈이 내 생명이었을 때 돈이 없어지면 그 돈때문에 내가 죽고 싶잖아요.그게 나라고요, 내 생명이라고요. 그런데 이게 다 제한된 시 세상 거니까 이게 사라질 때 나도 사라지게 되는 거예요.사망이라 그래요.


반대로 영생은 뭐겠어요? 나와 관계하고 있는 그분이 영원히 사시는 분일 때 , 그분이 내 생명이 될 때, 영생이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 세상속에서 육과 관계 맺고 있는, 땅과 관계 맺고 있는 모든 걸 차단 당하고, 그래서 이렇게 힘든 거예요. 그러면 그 자리에 하나님이 이제 슬금슬금 들어오시는 거예요.그리고는 나를 장악해 버리는 거예요.그런데 그게 힘들어요. 고통스럽습니다. 내가 완전히 아무것도 아닌자로 폭로되는 거예요. 그게 내 육이 죽는 거예요. 그럼 나는 뭐야? 이렇게 되야 되는 거예요. 나는 뭐야? 뭐긴 뭐야 흙이라니까.그래서 하나님이 그 흙을 붙드는 거예요.생기로. 그게 성령이라고 하는 거예요.여러분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요한복음 6장 33절 보세요.



요 6장 33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


육은 무익하대요. 고린도 전서 15장 50절로 가보세요.



고전 15장 50절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세상과 인생에 의해 규정된 나 즉 육은 무익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거라잖아요.한마디로, 죽은 흙이 저주 받은 땅에서 만들어낸 그 어떤 업적과 공로도 하나님이 일절 받지 않으신단 그런 말이예요.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새롭게 창조해 내셔야 해요.어떻게? 영으로. 그걸 거듭남이라고 하는 거예요.요한복음 3장 3절 보세요.



요 3장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거듭나다’ 이건 위로부터 나다’ 라고 했죠? 땅에서 난 건 아무것도 안돼. 위로부터 나야 된다구요.땅에서 난 나는 아니예요. 다 육이란 말입니다. 땅의 것으로 규정되는 나’가 죽고 위에 계신 분, 즉 성령에 의해 규정되는 나’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그럼 성령으로부터 규정되는 나는 뭐예요? 하나님은 창조주, 나는 피조물.끝.


거기에서 있음의 흉내가 어떻게 나올 수 있어요? 그게 나’라니까요. 도데체 너는 누구냐? 나는 흙이고 하나님의 생기가 덮혀 하나님의 백성이 된 하나님 나라의 장자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 성도의 역사속 인생이 나라는 육적 자아의 죽음으로 점철이 되는 건 바로 그러한 이유인 거예요.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승승장구의 자리에서 지리멸렬의 자리로 내려가는 게 맞는 거예요. 사업이 잘 안되죠? ‘야 이런, 서머나 교회에서 교육 받는 우리 자식새끼가 왜 그 모양인가?’ 당연한 거예요.서머나 교회이니까. 뭐가 내 뜻대로 잘 안되잖아요. 여러분을 죽여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성령으로 여러분을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아니, 이미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여러분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요한복음 3장 6절 보세요.



요 3장 6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이 영이다.


그것만 산 거란 말이예요.그것만 산 거. 그래서 하나님은 이 역사속에서 인간이 밀어내 버린 상위권위, 하나님, 그 예수를 다시 원래의 자리에 올려놓아 버린 거예요. 이게 부활과 승천입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쫓아 내봐라. 아무리 잘난척 해봐라. 이미 내 아들은 승천하여 그자리에, 왕의 자리에 앉아있단다. 그러니까 항복해! 성도만 이 음성을 알아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역사와 인생은 끊임없이 육적 나’를 하나님으로 부터 폭격을 당하게 되고, 깨어지고 부수어지며 나 질그릇 맞음’의 그 깨달음을 얻게 되는 거고 위로부터 나는 것, 거듭남만이 우리의 진짜 살길이라는 걸 확고하게 붙들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함부로 여러분의 선악 판단으로 깨끗한 거, 더러운 거, 저건 악, 이건 선,이런 소리 하지 마세요.이거는 벗을 거라니까요. 여러분은 작품이 아니라 그릇이라 그랬잖아요. 근데 왜 이 껍데기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세요? 이걸 어떻게 하면 성숙시켜서 하나님의 기쁨, 그런 열매로 만들어 낼까? 어떻게 하면 이 몸뚱아리를 깨끗하게 유지하고 보호하여 하나님의 기쁜 산 제사로 드릴까?

그러니까 이 병신들이 지 와이프가 뭐 첫날밤에 너무 적극적이었다고 이혼 소송을 하고 너 처녀 아니지?’그래갖고 위자료를 줘야 되냐 말아야 되냐 이런 일이 하루에 수십건이래요.지들은 더 더럽게 살면서. 그래 그 몸뚱아리가 좀 더러워졌으면 어떠냐구요. 원래 더러운 건데. 예수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분들어서는 안됩니다. 그걸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세요.



벤전 2잘 9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뭘 선전하게 하기 위해 우릴 구원했대요? 예수의 아름다운 덕! 은혜! 그걸 선전하는 게 우리의 의무이며 역할이라니까요. 그걸 너무 섣불리 내가 훌륭한 인격을 갖추고 놀라운 성숙을 이루어서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 예수 믿는자는 이렇습니다, 이렇게 좀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게 주먹 불끈 쥐고 이 악물어서 되던가요? 욕이나 먹이지 마세요. 왜 자동차 뒤에다가 붕어 달고 다니면서 그렇게 교통위반 하고 그래요? 그게 예수의 덕을 선전하는 게 아니라 나같은 것도 용서하신 분이 예수입니다를, 예수를 높이는 게 예수의 덕을 선전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나는 죄인중의 괴수라고 편지에다까지 만천하에 공개하면서 다닌 거예요. 농담한 거 아니예요.내가 진짜 그래. 진짜 그래. 빌립보서 1장 20절 보십쇼.



빌 1장 20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담대하여 살던지 죽던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니라


여기서의 죽음을 단순히 육의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서 내가 죽는다라는 건 사람들로 부터 어떤 평가를 받아도 내 안에서 예수가 존귀하게 된다면 나는 감수하겠다 라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가 되어서라도 예수님의 그 용서가, 십자가 보혈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증명해야 한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이예요. 누가 강도로 죽고 싶어요? 이왕이면 슈바이처로 죽고 싶지. 그런데 살던지 죽던지 뭐든지 괜찮다는 거예요.예수만 높아 진다면.그게 그릇이란 말입니다. 그게 약할 때 강함 인거예요.고린도 후서 5장 14절 보세요.



고후5장 14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컨데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인간의 자존심을 높이기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보세요, 바울은 예수의 은혜만을 증거하는 자로 살았다라는 거예요.예수가 이 세상에 연약한 자로 왔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외모를 보고 저거는 믿어서는 안될 존재구나라고 겉으로 평가했던 것처럼, 그러나 그분이 진짜 구원자였던 것처럼 그 누구도 그렇게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예수 믿고 왜 아직도 저 모양이야? 예수 믿고 아직도 저, 저자리에 저렇게 있어? 이렇게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왜? 우리는 다 죽은 자고 하나님이 그 안에 들어가서 그려내는 대로 살아야 되는 자이기 때문에 그걸로 절대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그냥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예요. 이제는 외모로, 육으로 판단 받아서는 안되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뭐 잉여공로설이니 뭐니 하면서,, 성도에게 잉여공로가 어딨어요?


나는 뭘 해도 다 무익한 자입니다가 성도의 신앙고백이어야지. 초대교회 때부터 잉여공로설이 있었어요.그래서 존 칼빈이 기독교강요라는 유치한 책에서까지 그걸 부순 거란 말입니다. 뭔 잉여공로가 있어요? 머리속에 그게 꽉 차 있으니까 야, 인간이 이렇게 잉여의 절정에 있을 때, 스티브 잡스처럼 최고의 자리에 있을 때 죽어야 신화가 된다’ 이따위 소리들을 하는 거지요. 인간은 이땅에서 신화’되는 거 아니란 말입니다. ‘산화’되는 거지. 그 잉여 공로를 선이라고 해서 이게 구원에 기여한다고 해요.그리고는 그게 상,벌에 근거가 된다고,,,어디 이따위 소리를.


뭐를 해도 저는 무익하고 쓸모없는 종입니다, 이 고백을 해야 된다며요? 예수님이 한 말씀 아닙니까? 근데 뒤로는 다 계산 하고 있는 거예요?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못들어간다고 했죠? 거기서 어린 아이가 유아예요. 유아.애기라구요. 무슨 말입니까? 아버지에게 모든 걸 다 맡기고 자기의 부끄러운 것 더러운 것 그냥 아버지한테 다 맡기는 거예요.애기들이 똥 싸고 오줌 싸면서 그거 갈아주는 아버지한테 아버지 상당히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기저귀에 실례를 하고 말았습니다. 조금만 참아 주시면 제가 그러지 않도록, 횟수라도 줄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애기가! 그러면 아이구 기특하다 그러나요? 화들짝 놀라서 척키 아냐 이거 혹시?’ 이렇게. 


부모님들이 그거 닦아 주면서, 그 애기의 기저귀 갈아주면서 아이 더러워 죽겠네 정말’ 그런적 있어요? 찍어 먹기도 한다더라구요. 아버지는 애기가 어떤 짓을 해도 이뻐요. 그리고 아버지에게 자기의 모든 걸 맡길 때 가장 사랑스러운 거예요. 그 아버지가 아기에게 아가야 아빠만 믿어’ 라고 하는 게 믿음이거든요. 그런데 아빠만 믿어 그러면서 야 그래도 그렇지 너 계속 그러고 있을거야? 나좀 도와줘야지. 잉여공로 못들어봤어?’애기한테 그러겠냐구요. 아바만 믿어 그랬을 땐 다 책임질게 이뜻이란 말입니다. 그게 아버지가 아기에게 요구하는 믿음이고 이게 하나님 나라다 하는 말이예요.


예수가 그 어린 아이로 오셨다구요. 그래서 어린아이들이라고 했다가 그 다음 줄에는 어린아이, 단수예요. 어린아이. 내가 어린 아이로 왔단 말예요 이땅에, 예수가. 그런데 아무도 안믿어. 어린 아이라고. 안된다는 것입니다.외모로 판단 되는 게 아니라구요.아버지의 사랑으로 판단이 되어야 되는 거란 말입니다 여러분. 


왜 히브리 사람들이 긍휼과 자궁이란 단어를 같은 단어로 쓰겠어요?긍휼,은혜,사랑은 어머니 자궁에서 그냥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어머니가 낳는 거지 애기가 그 안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하지 않으면 끝까지 막아 두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엄마가 그냥 엄마의 힘으로 낳는 거예요.그게 긍휼이예요.그래서 자궁인 거예요. 여러분 


사랑은 그렇게, 긍휼은 그렇게 우리의 아버지 거예요. 성경에도 나오잖아요. 사랑은 아버지에게 속한 것이다,그러죠.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러죠?그러면 사랑은 우리가 하는 거예요? 믿는 거예요? 사랑은 여러분의 신앙의 대상이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그래서 요한이 사랑하라! 라고 해놓고 거기에 사랑은 아버지께 속한 것이다라고 전제를 달아놓은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가 사랑이라는 게 뭐예요. 그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셔서 예수를 주셨구나 라는 걸 내가 알고 깨닫고 내 안에 있는 예수를 , 그 사랑의 실체를 보여줄 때 이걸 사랑한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거예요. 교회끼리. 예수라는 교회끼리만 할 수 있는 게 예수라는 사랑교환이라구요.그런데 누가 감히 서로에 대해서 이 교회는 사랑이 없다 그래요? 밥 먹는 데 가서 등허리 한번 쳐 주는 게 사랑입니까? 쫓아 다니면서 어디에 사세요? 다음 중에 오실 거예요? 이래야 사랑이냐구요? 그 안에 예수가 없는데, 할 얘기가 없는데 무슨얘기를 하느냐구요? 입닥치고 밥이나 먹어야지.근데 왜 사랑이 없다 그래요?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 살아계신 하나님, 예수를 붙드세요.예수를 믿으시란 말입니다.여러분은 그 하나님과 그렇게 화목하여 하나님 나라로 가면 되는 거예요. 다음주에는 5장으로 넘어가서 하나님과 성도같의 화목이 뭔지 구체적으로 한번 공부해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