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계시록

(89)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는 자들     (계20:4-6)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22:19

(89)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는 자들

 

 

(계20:4-6)

20:4 내가 또 보좌들을 보니, 그 위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심판할 권세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나는, 예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베인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짐승이나 그 짐승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20:5 그 나머지 죽은 사람들은 천 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복이 있고 거룩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둘째 사망이 아무런 세력도 부리지 못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서, 천 년 동안 그와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4절부터는 또 다른 환상이 등장합니다. 1절에서 3절까지 에서는 천년 동안 무저갱에 던져지게 되는 사단의 모습이 환상으로 등장하고 오늘 본문인 4절부터 6절까지 에서는 천년 동안 왕 노릇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와 천상의 성도들에 관한 환상이 등장합니다. 이 두 부분도 역시 천년이라는, 같은 기간 동안에 일어나는 사건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만 잘 이해하시면 왜 전 천년설이나 후 천년설이 터무니없는 것인지 잘 정리하실 수 있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오늘 본문 4절 이하에 보면 첫째 부활에 참여한 성도들이 보좌에 앉아서 심판을 하며 왕 노릇을 하고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분명 이 부분은 현실 교회가 아닌 묵시 속에 완성되어 있는 교회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묵시 속에 영적으로 완성이 되어 있는 교회는 현실 교회와 아무 상관없는 모습이 아니라 현실 교회의 가시적인 면 뒤에 숨어있는 영적인 면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을 그냥 하늘에 있는 영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가볍게 넘기시면 안 됩니다. 묵시 세계의 교회의 묘사는 이 땅의 현실 교회인 우리의 삶이 담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예 를 들어 현실 세계에서는 교회가 핍박을 당하고 있는 것을 묵시 세계의 교회를 그릴 때는 교회가 승리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처럼 겉으로 나타나는 우리의 현실이 사실은 이러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요한 계시록에 자주 등장하는 완성된 묵시 세계의 교회의 묘사에서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잘 보시면 그 묵시 세계 속에 완성되어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왕 노릇을 하는데 그들이 왕 노릇 하는 기간이 천년 동안입니다. 그 곳은 시간이 없는 곳이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천년은 단순히 시간을 나타내는 숫자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부분은 조금 있다가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전체 적인 내용파악부터 해 보겠습니다.

 

이 부분을 제대로 주해를 하기 위해서는 5절에 나와 있는 첫째 부활이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알고 계신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육체를 입고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요한 계시록에서는 그 부활을 ‘두 번째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첫 번째 부활은 무엇일까요? 부활이라는 것은 죽은 것이 살아나는 것을 부활이라고 하니까 그 첫 번째 부활 앞에 반드시 죽음이 전제되어야 하지요? 그러면 이 땅에 죽음이 오게 된 사건부터 추적을 해야겠지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주시면서 ‘네가 이것을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필연적 강조 용법을 사용하셔서 확언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 약속을 어겼고 이 땅에 사망이라는 것이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사망, 죽음이라는 것도 잘 정의하셔야 합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들은 단순히 흙으로만 지어졌지만 인간에게는 흙으로 지어진 생명 위에 ’생기‘라는 것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동물의 죽음은 단순히 숨이 끊어지는 것을 말하지만 생령인 인간의 죽음은 단순히 숨이 끊어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생기로 말미암아 인간 속에 부어졌던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과의 교류가 단절이 되는 상태를 성경은 ’사망‘이라고 부릅니다.

 

(롬5:12)

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고전15:21-22)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이렇게 아담 안에서 모든 자들이 죽었습니다. 사망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인간들 중 한 무리를 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엡2:1-6)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분명 죽었던 자가 살아났다고 하지요?)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오늘 본문의 내용과 흡사하지요? 오늘 본문에서는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보좌에 앉아 세상을 심판하고 왕 노릇을 하고 있는데 여기 에베소서에서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미 죽음에서 살아나서 하늘 보좌에 앉아있다고 표현을 합니다.

 

(롬6:4)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보세요. 우리 성도들이 이미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자가 되었다고 하지요?

 

(요5:24-25)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여러분은 어떻게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복음을 듣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그 복음을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를 하시고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눈과 귀를 열어 복음을 듣게 하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장에서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망에서 살아나신 것이지요?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을 뭐라고 부르지요? 부활이라고 부르지요?

그러니까 첫째 부활이라는 것이 뭡니까? 예수를 믿고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리에서 다시 살아 난 성도들을 가리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4절 에 보시면 그렇게 첫째 부활에 참여해서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는 성도들을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 그리고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 이라고 묘사를 합니다. 이게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5절이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 이외의 나머지들은 천년이 차기까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더라.’라고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창세전에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첫째 부활, 즉 구원을 받지 못하더라‘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묵시 세계의 완성된 교회에서 세상을 심판하며 왕 노릇을 하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 이 땅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까?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는 고통을 당하게 되며,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않아서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면서 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제 첫째 부활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정리가 되었지요?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분명 첫째 부활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진 영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는 기간 천년이 언제라는 이야기입니까? 예수님의 초림에서부터 재림 때까지의 기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 천년이라는 기간을 어떻게 여러분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한번 설명해보면 어떨까 하고 궁리해 낸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의 후손들이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나옵니다. 그 중에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무드셀라입니다.

몇 살까지 살았습니까? 969살까지 살았습니다. 31년만 더 살면 1,000살인데 인간의 수명이1,000살을 채우지 못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900살이 넘게 살았는데 1,000살을 산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1,000이라는 숫자는 10X10X10으로 아주 많은 것을 나타내는 완전수입니다. 그래서 144,000명도 12X12X1,000 그래서 아주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숫자이지요.

그러니까 1,000년이라는 것은 인간의 수명과 대조되는 아주 긴 시간을 상징하고 있다고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 년 수로 따질 수 없는 긴 시간이 무엇입니까? 영생이지요. 그러니까 천년이라는 것은 어떤 기간이 아니라 상태를 나타내는 숫자로 보시면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의 상태.

천년이란 그렇게 타락한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수명 혹은  타락한 인간이 거할 수 없는 세상, 다른 말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의 사고방식이 아닌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 러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천년은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성도들이 실제 천년의 기간 동안 왕 노릇 하는 기간이 아니라 지금 현재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탄의 세력에 머리 숙이지 않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기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탄생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되기까지의 기간에 성도가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천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년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안 되고 ‘상태’로 이해하시라는 말입니다.

그 렇게 영생을 얻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을 하게 되는데 그 왕 노릇은 남들 위에 올라서서 군림하거나 지배하는 왕 노릇이 아니라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어 하나님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는 하늘의 왕 노릇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그렇게 이 세상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와는 정 반대의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로 이 땅을 살게 되면 당연히 세상은 우리 때문에 정죄를 받게 되겠지요?

재판관이 죄인을 정죄할 때 ‘너와는 다른 삶을 산 사람이 있다’라는 증거가 있어야 그 죄인이 행한 것들이 ‘죄’라고 드러나게 되지 않습니까? 다 똑같이 살면 무엇을 근거로 ‘너는 죄인이다’라고 심판을 하겠습니까? 그렇게 우리 성도들의 거룩한 삶은 세상을 심판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4절에서 ‘보좌에 앉은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하고 있더라.’라는 구절이 있는 것입니다.

그 렇게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는 고통을 당하게 되며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않아서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삶이 바로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게 되는 왕 노릇이라고 확실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6절을 보시면 그 ‘첫째 부활에 참여한 성도들은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고 나옵니다.

 

(계20:6)

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둘째 사망이 뭡니까? 첫째 사망은 아담 안에서 죄를 지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난 상태를  첫째 사망이라고 했지요? 둘째 사망은 뭐겠어요? 이제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심으로써 영원한 멸망에 처해지게 되는 상태를 둘째 사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첫째 부활, 즉 구원을 얻은 자들은 둘째 사망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고 사망을 조롱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그 성도들이 천년 동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서 왕 노릇을 하게 된다‘라고 그 환상을 맺고 있습니다. 보세요. 여기서도 우리 성도들의 왕 노릇이 어떤 것인지 설명이 되고 있지요? 제사장으로서의 왕 노릇입니다.

제사장은 뭐 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할 자들 사이에서 중보자의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제사장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왕 노릇은 하나님과 그 하나님과 화목하게 살아야 할 존재들을 위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섬기며 봉사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슥6:13)

13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시며 제사장이셨습니다. 하늘의 왕 노릇은 나를 비우고 나를 낮추어, 심지어 자기를 죽여 다른 이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데에 중보자로 서는 삶인 것입니다. 본문 6절의 말씀은 이렇게 메시아 하나님에게 주어졌던 직분이 이 땅에서 바로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졌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작은 예수가 되어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십자가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소개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내용을 정리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리에서 새 생명을 얻고 살아났습니다. 성경은 그 것을 첫째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왕 노릇은 제사장으로서의 왕 노릇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낮추고 자기의 손해를 감수하여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이웃들의 유익을 위해 섬김의 삶을 사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 그 것이 바로 제사장으로서의 왕 노릇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천상의 성도들이 하늘나라에서도 그렇게 보좌에 앉아 계속해서 왕이요 제사장으로 영원히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 다른 말로 십자가의 삶은 세상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를 공박하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그 성도들의 삶이 ‘세상을 심판 한다.‘ 라고 표현을 하는 것이고, 그 러한 하늘나라의 왕 노릇과 제사장 노릇이 이 땅에서 어떻게 가시적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는 고통을 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며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않아서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면서 살게 되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 역사 속에서 하늘의 왕 노릇을 하고 있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성도들은 성령을 받은 직후부터 그 하늘 백성의 삶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며 마귀는 그 성도들의 하늘의 왕 노릇과 제사장 노릇을 절대 막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가 천년 동안 무저갱에 갇혀있는 것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에서 제외 된 성도 이외의 나머지 사람들은 그 천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나지 못하더라, 그들은 절대 어떠한 방법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게 계시록 20장 1절에서 6절까지의 내용인 것입니다.

어떠세요? 하늘의 왕 노릇은 이렇게 하나님과 내 이웃의 유익을 위해 내가 손해보고 내가 약해지며 내가 낮아지는 왕 노릇입니다. 그 것이 너무 힘이 들어 성경은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받고 고통을 당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은 그 하늘의 왕 노릇을 지금 하고 계십니까? 오히려 내가 약해지며 오히려 내가 낮아지며 오히려 내가 비워짐으로 우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되는 그 하늘의 왕 노릇을 하고 계십니까? 이 이야기는 제가 수차례에 걸쳐 반복해서 설명을 해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으신 것 같아요. 어떤 분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나와는 교리가 다르다‘라고 교회를 나가신 분들이 계십니다. 왜 예수 믿고 바보같이 당하며 섬기며 낮아지며 살아야 하냐는 것이지요. 오늘 마침 본문의 내용이 그 하늘의 왕 노릇에 대한 것이 나왔으니까 다시 한 번 확인을 시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을 다스리도록 왕을 세우셨습니다. 그가 누구였습니까? 아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왕은 하나님께 순종 할 때만 만물을 다스리는 왕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자였습니다. 그 왕은 제사장이기도 했습니다. 그 에덴의 왕을 통해 만물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절대 상위권 자이신 하나님 아래에서 만물을 다스리는 하늘의 왕이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왕이 하나님께 반역을 했습니다. ‘왜 꼭 당신이 내 위에 있어야만 하는가? 나도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나의 삶을 개척해 보고 싶다‘ 이게 바로 인간의 타락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죄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강함을 자랑하고 싶은 것을 뿌리로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타락한 인간을 다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그 원래의 왕의 자리로 부르시는 것을 우리가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인간은 철저하게 하나님 의존적으로 존재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그 분께 철저하게 순종할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기부터 두 라인을 극명하게 대조시켜서 보여주십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은 대표적인 죄인의 라인이지요? 그 가인이 하나님의 라인인 아벨을 고의로 때려죽이고 쫓겨나서 제일 처음 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을 쌓았습니다. 그 성의 이름이 뭡니까? 에녹 성입니다. 에녹이라는 히브리어는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죄의 길을 걷게 되는 자들의 라인이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성을 쌓아 자신을 보호하려는 시도는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이어집니다. 타락한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의 최초의 조상인 아담이 지은 그 죄의 뿌리 속에서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류 전 역사를 횡단하는 시대정신인 ‘힘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절대 그 길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자신들의 힘을 쌓고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시집하고 장가하고 소도사고 농사도 짓고 할 때에 노아와 그의 식구들은 그들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않는 방주를 짓게 하십니다. 120년 동안 한 번도 비가 오지 않았고 비가 올 징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꼭대기에다가 바보짓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택하시고 복을 주시기로 작정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실제로 팥 죽 한 그릇으로 형 ‘에서’에게 돌아 갈 축복을 가로챕니다.

그런데 세상 적인 관점에서 진짜 복을 받은 사람은 사실‘에서‘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돌아 올 때 ’에서’는 자기 집에서 부리는 사병 400명을 끌고 야곱을 맞으러 나왔습니다. 당시에 사병 400명이라는 숫자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사병들 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에서는 큰 부자일 뿐 아니라 군사적인 힘까지도 갖춘 소위 ‘복 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나중에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자기 힘으로도 서지 못해 지팡이를 의지해서 서서 자신의 인생을 ‘험악한 세월’이라고 반추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야곱을 복 주시기로 작정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환도 뼈를 맞은 후 평생을 다리를 절며 살았습니다. 나중에는 먹을거리가 없어서 자식들을 애굽으로 보내서 구걸을 해야 할만큼 가난해졌습니다. 그게 무슨 복입니까?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신 것인가요? 아닙니다. 야곱은 복 받은 사람이 맞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힘으로 행복을 쟁취하려 했던 야곱을 불구자로 만드시고 먹을 것을 구걸해야 하는 약한 자로 만드셔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만드신 그 하나님의 행하심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은 절대 다른 힘을 의지하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왕을 허락하시면서 ‘그러나 왕은 말을 많이 가지지 말고, 아내를 많이 두지 말며, 은금을 많이 쌓지 말라고’ 하십니다.

고대시대에는 말이 곧 힘이었습니다. 왕이 기병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가가 그 왕의 힘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을 많이 갖지 말라고 합니다. 은금을 갖지 말라고 합니다. 은금이 없는 왕이 무슨 왕입니까? 아내도 많이 갖지 말라고 합니다. 당시는 아내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보세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힘이 되는 것은 하나도 갖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 말은 너희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직 ‘나 하나님‘ 만을 의지하라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기드온의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미디안 군사와 아말렉 군사 그리고 동방의 군사들 수십만 명과 싸워야 하는 이스라엘 군사를 다 돌려보내고 삼 백 명 만 남기십니다.

그리고는 항아리하고 횃불만 주시고 싸우라고 하십니다. 그건 어차피 싸움이 안 되는 전쟁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에서 이깁니다. 그 기드온의 전쟁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의지할 때, 그 때 진짜 강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확실한 예인 것입니다. 

 

이러한 전쟁은 골리앗과 다윗의 전쟁 때에도, 아사 왕 때에 백만 명의 대적과 삼백 승의 병거가 왔을 때에도,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러 왔을 때에도 늘 나타났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헛된 힘을 의지하지 말고 ‘나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그 때 너희는 진짜 강한 왕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찾아가셔서 그들에게 부여되었던 태초의 왕 노릇으로 그들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구속사‘입니다.

 

(고후13:4)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그리스도가 왜 그렇게 약한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으셨는지 아시겠습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의 참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새 하늘과 새 땅의 또 다른 왕들인 우리 교회가 어떻게 이 역사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지를 모형으로 미리 보여주고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약한 모습으로 깨어지는 질그릇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고 질그릇의 영광이 아닌 그 질 그릇 안에 담긴 보배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보고 가난하고 병들고 무식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운 사람도 약한 자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지고 아무리 많이 배웠어도 그 것을 여러분의 힘으로 삼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것을 목적 삼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으로 다른 이를 섬기고 공익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여러분은 약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을 사시라는 말인 것입니다.

‘돈 벌어서 남 주고 배워서 남 주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는 것, 그 것이 바로 하늘의 왕 노릇을 하는 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 성도들이 천년 동안, 다른 말로 우리의 인생동안 우리가 그 제사장 적인 왕 노릇을 하게 된다고 명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 반드시 군림하고 지배하며 다스리는 왕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 번 한국에 들렀을 때 한국 기독교 TV에서 한국에서 새벽기도로 유명한 어떤 교회의 새벽 예배 실황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새벽 기도에 서는 성가대만 300명이 넘습니다. 어떤 분은 매일 제주도에서 그 새벽기도를 올라온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평생의 반 이상을 그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데에 쓰고 있는 것입니다. 앞자리에는 어린아이들이 하품을 하면서 그 새벽에 부모의 손에 이끌려 나와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TV화면에 한 아이가 코피를 흘리는 장면이 잡혔습니다. 우리 교회 어린이들은 피곤해서 코피까지 흘리면서도 새벽 예배에 참석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목사님께서 뭐라고 설교를 하시는가하면 ‘난 시골에서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으로 자라났지만 어려서부터 50년 이상 새벽기도를 한 번도 빼 먹지 않았기 때문에  종합병원까지 운영하는 이런 큰 교회 목사가 되었고, 이렇게 출세를 하게 되었다. 그러니 여러분도 이러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새벽기도를 빼먹지 말아야 한다.’라고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곳에 모인 수 만 명의 교인들이 ‘아멘’으로 합창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수 만 명의 교인들을 위해 축복을 빌어 주는데 많은 사람들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감격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왜 매일 제주도에서 올라오는 거예요? 목사님이 받으셨다는 그 복 받으려고, 왜 아이들이 피곤한데도 코피까지 흘리면서 새벽 기도에 나옵니까? 그 담임 목사님이 받으신 복 받으려고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증거는 세상에서 힘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니까 신앙생활 잘 해서 그 힘을 얻어 보자‘는 것이지요.

어쩌면 그렇게 사도 바울의 이야기하고 정확하게 반대가 되는지 소름이 끼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약할 때,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약한 자로 보여 질 때 내 속에서, 내가 아닌 하나님께서 일하심이 드러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게 바로 성도의 강함이요, 성도의 왕 노릇이라고 했는데 오늘 날 어떤 목사들은 ‘내가 강함으로 하나님의 약함’이 드러나게 되는 ‘거꾸로 복음‘을 전하고 있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그게 바로 구약 내내 경고되어진 거짓 선생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예수를 이용해서 힘을 추구하고, 그 힘을 자기가 줄 수 있다고 기적과 이사를 동원하는 그 사람들이 바로 광명한 천사의 모습을 하고 온 마귀들인 것입니다.

 

(신13:1-5)

1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2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3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하사 너희를

4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5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여 취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케 하려하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하나님은 절대 이 세상의 힘의 논리인 물질주의 성공주의에 편승해서 기적과 이적을 동원해 성도들을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겸손한 자리, 낮은 자리, 비움의 자리로 인도하셔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내가 기적과 이사로 너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을 그냥 놔두는 것은 너희들이 정말 나 하나님을 의지하는지 시험하려고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그러한 자들을 대할 때 거기에 넘어가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가 되어야 하며 그들은 반드시 죽여라’ 이게 기적의 정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에서도 그저 세상의 힘만을 추구하고 있으니까 그런 것을 줄 수 있다는 사람들에게 꼼짝 못하고 당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완전히 황제 대접을 해 주고 있습니다.

 

(고후11:19-20)

19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20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이거보세요.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약한 자의 모습으로 섬기던 바울은 배신하고 기적과 이적을 동원해서 자기들에게 힘을 주겠다고 사람들에게는 따귀를 맞아도 허허 웃더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어떤 교회들의 모습과 이처럼 똑같습니까?

지난 주 수요 성경공부 때 예를 들어 드렸던 그 부산의 무당 집에서 매 맞으면서 식모살이 하고 있는 그 아줌마가 떠오르지 않으세요? 복 받기 위해 돈 4억 갖다 바치고 액 땜 한다고 식모살이 까지 하고 있는 그 아줌마, 그게 바로 오늘날 예배당에서 힘과 복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의 불쌍한 자화상인 것입니다.

 

(살후2:9-12)

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 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경은 기적을 좇는 자들을 불의를 좋아하는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힘을 좇고 힘을 쌓으려는 사람들이 가짜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기적도 일으키고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낫게 해주는 목사가 힘 있는 목사로 대접을 받고 이왕이면 사람도 많이 모으고 베스트셀러 책도 내서 인기 있는 목사가 되어야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습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성도들을 속여, 자신은 마치 다른 이들과는 완전히 다른 능력의 종처럼 행동을 합니다.

 

여러분, 기적이 있는 곳에는 항상 그 기적을 행하는 자들의 자랑이 있고, 이사가 있는 곳에는 항상 세상의 힘을 요구하는 죄인들의 탐욕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죄가 되셔서 매일 매일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계십니다.

십자가는 2,000년 전에 한번 서고, 잊혀져버린 사건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피는 역사 전체에 흘러넘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피가 어떠한 것인지 정말 안다면 우리가 그 앞에서 또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얼마 전에 신장을 팔아서 자식의 의과대학 학비를 대었던 어머니가 자식을 고소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 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의사가 된 자식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어머니에게 물려준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빼앗으려고 어머니를 정신 병원에 감금 시켜 버리고 어머니의 인감도장을 빼돌려 재산을 몽땅 자기 앞으로 돌려놓은 사건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돈보다도 자식에 대한 배신감에 가슴 아파하며 그 자식을 고소했습니다.

신장을 팔아 자기의 학비를 댄 어머니에게 어머니가 가진 전부를 내 놓으라고 어머니를 감금시키는 그 자식 속에서 오늘날 교회라고 자처하는 우리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 같지 않으세요? 여러분 제발 성경이 말씀하는 진짜 왕 노릇을 하십시오.

내가 낮아지고 내가 비워지고 내가 약해져서 하나님이 드러나고 내 이웃이 덕을 보는 그런 왕 노릇, 오늘부터 시작해 보자고요. 분명 성경은 성도들이 천년동안 그 왕 노릇을 한다고 나와 있는데 왜 그 천년이 시대인 오늘 날 그러한 왕 노릇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이렇게 힘이 듭니까? 우리가 오늘부터 시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