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계시록

(86)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II)     (계19:16)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22:16

(86)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II)

 

 

(계19:16)

19:16 그의 옷과 넓적다리에는 '왕들의 왕', '군주들의 군주'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종말에 나타난 ‘만 왕의 왕, 만주의 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네 번째 이름을 공부하면서 우리 기독교는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며 그 기독교 안에 들어와 있는 성도들의 삶은 어디로 귀결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이용해서 내 소원을 이루고, 내 문제의 해결을 하는 종교가 아니라 만왕의 왕이시고 만 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가는 것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스티그마타 투 큐리오 예수’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된 자로서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하며, 종국에는 ‘둘로스 크리스투’ 예수님의 뜻에 완전히 항복하는 예수의 종으로 완성이 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기독교를 가리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는 것’이라고 표현을 하셨지요?

그러니까 결국 기독교는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앉아 자기 스스로 힘을 쌓아 자신을 보호하고 자기 이외의 것들을 통제하려 하는, 다른 말로 자기만 사랑하는 죄 된 본성을(꾸삐띠다스) 깨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까리따스)의 사람으로 지어져 가는 것’이라고 정의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내 옛 사람이 죽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러한 신앙생활의 본질을 출애굽 광야에서 보여주셨지요?

애굽에서 나온 옛 사람 60만이 광야에서 다 죽고 새로운 세대인 은혜의 세대60만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그림을 구약에서 보여주심으로 우리 성도들이 이 광야 인생길에서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이 땅에서 예수를 통해 무엇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 이 땅에서 예수처럼, 예수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서 죽은 한편 강도를 보면서 기독교의 본질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한편 강도는 분명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가 어떤 존재에게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그 시점에서는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저 그 강도와 함께 하릴없이 죽으셔야만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강도는 현실적으로 자기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그 분께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건 것입니다. 우리는 그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지금 현실 속에서는 나의 소원과 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지라도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 줄 알기에 그냥 ’예수와 함께 죽는 자’ 우리는 그 사람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그렇게 죽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1)먼저 우리가 공부한 바대로, 그렇게 원수를 위해 죽어주는 삶이 바로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를 연습하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2)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것은 그렇게 죽는 삶 자체가 세상의 죄를 고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 자체로 세상의 악함을 고발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또한 세상의 악함을 고발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죽는 모습으로 살다가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그 심판의 근거를 더욱 확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핍박하고 멸시하고 죽여 버린 그 피의 값을 이제 내가 찾겠다.‘라는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를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제공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우리는 우리의 존재로 말미암아 악을 더욱 악답게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이 공존하는 곳에서는 늘 죄인들의 공격과 의인들의 피 흘림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삶이 전부 그 것을 보여주는 삶이었습니다.

 

(마23:35)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아벨이 누구입니까? 타락한 아담의 첫째 아들인 가인의 동생입니다. 아벨의 죽음은 타락한 인간을 대표하는 가인의 죄 성을 낱낱이 고발하는 죽음이었습니다.

사가랴는 누구입니까? 유다의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입니다. 역대하에 보면 요아스 왕 때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유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려고 선지자들을 보내십니다. 그런데도 유다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사가랴가 유다 방백들 앞에서 ‘너희들은 왜 회개하지 않느냐? 너희들이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가 너희를 버리셨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요아스 왕을 비롯해서 유다 백성들이 사가랴를 돌로 때려 죽였습니다. 이렇게 사가랴도 당시 유다 왕 요아스와 유다 백성들이 얼마나 패역한 지를 증명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그렇게 아벨에서부터 사가랴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의 죄 됨을 고발하며 의로운 피를 흘렸습니다. 그 의로운 피를 근거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여러분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악한 자들의 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고난 받고, 낮아지고, 군림의 자리가 아닌 섬김의 자리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삶이고  하나님은 그 삶을 승리의 삶이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데 어떻게 오늘날의 기독교는 ‘복이나 받고, 병이나 고치고, 내가 종교적 열심을 부리면 거기에 대한 반대급부로 고지에 올라가게 해 주는’ 그러한 만사형통의 종교가 되어 버렸는가? 한 마디로 우리에게 대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한 계시록 13장의 ‘용과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 그리고 666’을 공부할 때 이미 살펴보았지만 사단은 삼위 하나님을 그대로 흉내 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함을 받은 자들까지 미혹하려 한다는 것을 확인했지 않습니까?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종교학자의 말처럼 오늘날의 기독교가 어떻게 이렇게

비빔밥 종교가 되어버렸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처음에 전적인 하나님 의존적으로 창조되어진 인간이 ‘난 더 이상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가 아닌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라고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fire시켜 버렸습니다.

그 후로 인간들은 인간의 영혼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생명력인 ‘복‘’바라크‘을 상실해 버렸고

채워지지 않는 그 ‘복’의 자리를 스스로 채우려는 시도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이들의 자원을 빼앗아 그 공허함을 채우려고 시도했고, 교육과 훈련과 수도를 통해서 그 공허함을 메꿔 보려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원래 독립적인 존재가 아닌 하나님 의존적인 존재로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누군가에게 의존하려는 종교심이라는 것이 본능적으로 잠재해 있습니다.

죄인의 표상으로 불리 우는 가인이 제사를 드린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렇게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겠다는 인간의 교만과 종교심이 혼합되어 만들어 진 것이 바로 ‘샤머니즘’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중심인 ‘나’가 가슴 한 쪽의 텅 비어 있는 곳을 채우고 행복하게 살아야겠는데 ‘나’자신에게는 그러한 것을 충족시켜 줄 힘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인간은 알지 못하는 어떤 힘 있는 존재의 힘을 빌려 자신의 보호와 자신의 행복을 채우려는 시도들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행복을 도와줄 힘 있는 존재와 자신 사이에서 중재를 해 줄 어떤 존재가 필요했습니다. 그게 바로 ‘샤먼’입니다. 우리말로는 ‘무당’이라고 하지요. 그 샤먼은 직접 신과 접촉을 하고 교류를 해서 신의 뜻을 전달하기도 하고, 인간의 정성을 신에게 전달하기도 하며, 신의 도움을 빌어 병을 낫게도 하고 예언을 하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샤머니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대시대나 시베리아, 아프리카의 오지 같은 곳에만 있던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중심인 '나‘가 어떤 중재자의 도움을 받아, 어떤 힘 있는 존재로부터 복을 얻어내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이 ‘샤머니즘’은 타락한 모든 인간의 내면(內面) 속에 잠재해 있는 죄의 뿌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무식하고 잔인한 밀림 속의 부족들에게도 모두 ‘종교’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샤머니즘’에서는 자기가 도움을 청하고 있는 ‘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사실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힘센 신을 달래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고 ‘복’만 받아내면 그만입니다. 오로지 현세의 ‘복’이 목적인 것이지요. 그 샤머니즘은 인류의 죄가 존재하는 한 인간에게서 떠나지 않고 존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샤머니즘은 인간의 모든 종교를 먹어 버립니다.

 

그렇게 모든 인류가 본능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샤머니즘 속으로 불교가 들어왔습니다. 원래 불교는 ‘무아(無我)와 몰아(沒我)’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깨닫고 해탈을 하는 종교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들은 단지 ‘illusion'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자신의 육신을 비롯한 이 땅의 것들에서 자유롭게 되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게 깨달음을 얻은 자들을 불교에서는 ’부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교가 샤머니즘과 섞이게 됩니다. 왜? 샤머니즘‘은 인간 죄악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복에 대한 추구는 하나님께서 다시 부어주시기 전에는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고등종교가 들어와도 인간 내면에 여전히 뿌리깊이 존재하고 있는 ’샤머니즘‘위에 얹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가 샤머니즘과 섞이게 되면 ‘몰아와 무아,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깨달음을 추구해야 하는 절에서 중이 점을 쳐줍니다. 나중에 커서 잘 살라고 이름도 지어줍니다.

복 받는 방법으로 연등도 팔아먹습니다. 복 받는 방법으로 절간의 기와도 팔아먹습니다.

절에 소원을 들어주는 ‘칠월성군, 북두칠성’을 모신 ‘칠성당’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대웅전이나 명부전은 한산한데 유독 사업이나 자식들에 대한 소원을 비는 ‘삼성각’에만 사람들이 바글바글합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불교는 이 땅의 것들이 모두 ‘illusion' 불교 용어로 ’황‘’헛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훌훌 털어 버리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불교는 석가모니의 불력을 빌어 ’나‘가 색에 속한 것들을 풍성히 얻어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잡탕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날의 불교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닙니다. ‘색(色) = 모든 것’이 오늘날의 불교가 되었습니다. 아닙니까? 그래서 고승들이 죽으면 제자들이 나무젓가락 들고 ’사리‘를 찾는 것입니다. 스승은 ’모든 것이 황이다’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 정진하다가 갔는데 제자들은 그 ‘없음’을 추구하던 사람의 몸속에서 ‘있음’을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교에 ‘찬불가’가 있다는 것 아세요? 우리 기독교에 ‘찬송가’가 있듯이 불교에도 ‘찬불가’가 있습니다. ‘찬송가’라는 것은 전적인 타력 종교인 기독교에서 ‘완전히 타락하고 무기력한 ’나‘를 도와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찬송가‘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수도를 해서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전적인 자력 종교인 불교에 부처님께 감사를 드리는 ‘찬불가’가 있습니다. 부처는 앞으로 나올 많은 부처의 본보기일 뿐이지 다른 이들이 부처가 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불교에서 ‘고마우신 부처님, 복 주시는 부처님’이라는 찬불가를 부릅니다. 이건 완전히 코미디죠. 불교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불교를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의 목적은 부처가 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 현세에서의 복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휴암 스님이라는 분이 ‘한국 불교의 세 얼굴‘이란 책에서 “이 복에 환장한 불교인들아, 너희 스승은 너희들이 구하는 왕궁을 버리고 진리를 찾아 고행의 길을 갔는데 너희는 지금 그 스승에게서 무엇을 구하고 있느냐? 오늘의 이 병든 복 사상에 저항하다가 설사 불교 신자가 천 삼백 만에서 백 삼십 명으로 줄어들지라도 이 타락한 불교의 기복주의는 깨어져야 한다. 이 복에 환장한 불교인들아” 라는 글을 썼겠습니까?

이것은 불교의 무당 화를 안타깝게 호소하고 있는 글입니다. 그 분은 그의 글에서 ‘내 조국 이 대한민국에 과연 불교가 존재하기는 하는가?’라고 안타까운 결론을 맺으셨습니다.

불교의 외면적 형태는 남아있습니다. 예불도 하고 수도도 하고 보시도 하는데 정작 진짜 불교는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샤머니즘 위에 유교가 들어와 얹혔을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유교의 핵심은 ‘군사부 일체’같은 ‘상하 질서’ ‘예의(禮義)’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의로 섬겨야 하는 분이 돌아가시면 ‘제사’를 지내어 그 대상이 죽은 뒤에도 ‘예의’를 표하는 것이 유교입니다.

그런데 이 유교가 샤머니즘에 얹히면서 ‘제사’가 마치 죽은 조상의 도움으로 ‘액운’을 면하게 해주고 ‘복’을 받게 해주는 의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는 이유가 ’제사를 안 지내면 조상의 귀신이 삐져서 복을 안 줄까봐’입니다. 아닙니다. 유교의 제사는 죽은 조상이 주는 복과는 아무 상관없이 후손으로서 조상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 제사입니다. 그런데 유교가 샤머니즘과 섞이면서 제사도 ‘복‘을 받는 하나의 방법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왜 조선의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순교자가 그렇게 많이 나왔는지 아세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제사’를 거부해서 식구들이 내쳤기 때문입니다. ‘저 놈이 예수 믿고 제사를 안 지내면 나까지 조상들에게 봉변 당할까봐’ 일가 종친들이 고발한 것입니다.

급기야는 유학을 공부한 선비들이 조상의 복을 더 많이 받기 위해 ‘묘 자리 ’ ‘명당자리’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명당자리’를 써야 후손이 복을 받고 그 후손 중에 큰 사람이 나온다는 것이지요. 명당을 써서 조상의 묘를 이장하면 복을 후손이 복을 받는다는 집념은 조상의 시신이 훼손이 되건 말건 자신들의 복을 위해 조상의 시신을 이리저리 굴립니다. 거기에 어디 충효와 예절이 있습니까? 이건 원래의 유교가 아닙니다. 유교 역시 잡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역시 제사도 지내고 예절도 갖추고 하는 유교의 외면적 형태는 남아있는데 진짜 유교는 ‘사라진지 오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라고 하는 것들이 전부 ‘샤머니즘’에 먹혀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샤머니즘에 기독교가 얹히게 되면 어떤 것이 되는가?

역시 모양은 기독교처럼 변하는데 내용은 여전히 ‘샤머니즘’에 머무르는 엉터리 무당 잡교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몇 가지 들어 드리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첨단의 전자 장치로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의 진수식 때 꼭 고사를 지냅니다. 첨단 과학의 결정체 앞에서 돼지 머리에 절하고 돼지 코에 돈을 꽃아 액운을 막고 복을 비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업을 시작할 때, 영화를 찍을 때 어김없이 고사를 지냅니다. 젊은 사람이 제 명을 채우지 못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 항상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합니다. 원혼을 달래는 것이지요.

이 모든 것들이 다 ‘샤머니즘’의 내용들입니다.

 

그럼 한번 보자고요.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적어도 집안에서 고사를 지내거나 ‘굿’은 안 합니다. 왜냐하면 그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지탄을 받아 마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대신에 목사를 불러다가 ‘예배’를 드립니다.

솔직히 터놓고 이야기 해 보자고요. 사업을 시작할 때 혹은 이사를 갔을 때 왜 목사를 불러다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혹시 그 예배를 통해 마귀가 주는 액운을 막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얻기 위해서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돼지 머리나 무당’이 목사로 바뀌고 ‘고사’나 ‘굿’이라는 이름이 예배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것 이외에 뭐가 다릅니까?

우리가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이 땅에서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나에게 맡기시는 것이므로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동참 하겠습니다.‘ 라는 고백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업이 망하고 흥하고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이 사업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업이 시작될 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업이 망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사업이 망함으로써 ‘내가 낮아지고, 이 땅의 것들이 무상함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더욱 의존하는 존재가 되었다면’ 거기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인식이 있다면 망했을 때 더욱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지요?

저는 지금까지 사업 망해서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영광은 전혀 개의치 않고

오직 ‘나의 유익’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있는 학생 중에 시험 보기 전에 기도하는 사람들 있지요? 하지 말라는 것 아닙니다. 당연히 기도해야지요. 학업이라는 것은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이니까요. 그 학업이라는 사명을 통해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이 학업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 주십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저 좀 도와주세요. 잠자느라고 공부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지금부터 찍겠습니다. 하나님 이 연필에 성령을 부어주셔서 찍는 대로 맞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면 그건 정한 수 떠놓고 칠성당에서 만사형통을 기원하는 사람과 뭐가 다릅니까? 그런데 대부분 그런 의도로 기도하지요? 내 능력보다 더 잘 보게 해달라고.

 

겉은 기독교 적인데 속은 여전히 샤머니즘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 중에 이런 것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일을 거룩하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일날에는 자장면이라도 사먹으면 큰 일 나는 줄 알아요. 어떤 분은 우리 교회 청년들이 주일 날 볼링 치러 가는 걸 목사가 묵인했다고 교회를 나가신 분들도 있습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킬 때에 행했던 것들을 우리가 이 시대에도 그대로 행해야 하는 것처럼 사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좋습니다. 이왕이면 하루만이라도 거룩하게 구별되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딱 그 날만 그렇게 유난을 떨고 나머지 날은 엉터리로 사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그 것도 바로 샤머니즘에서 나온 것입니다.

무당이 굿을 할 때 그 집 식구들이 목욕을 하지 않고 오거나 혹여 라도 딴 생각을 품으면 무당이 곧 ‘부정 탔다’고 외칩니다.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만큼은 목욕재개하고 허튼 생각 품지 말고 오직 천지신명께 정성을 다해 빌어야 하는데 어떻게 오늘 목욕도 안 하고 천지신명 앞에 서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굿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날은 자기가 복을 비는 신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 굿하는 당일 날 만큼은 목욕재개하고 정갈한 생각과 행동을 해야 액운이 막아지고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게 샤머니즘의 내용입니다. 샤머니즘에는 ’샤먼‘이 굿을 하는, 샤먼이 의식을 행하는 그 시간과 공간이 다른 시간과 공간과 구별된 곳이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때는 몰라도 적어도 샤먼이 집례 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그 공간과 시간 속에서는 정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샤머니즘이 기독교와 합쳐지면서 예배당이 성전으로 둔갑해서 ‘거룩한 장소’화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강대상에 절대 신을 신고 올라갈 수 없습니다. 거기는 거룩한 장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의식이 행해지는 주일날은 자장면도 안 사먹고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왜? 그 의식이 행해지는 시간과 공간이 부정을 타게 되면 ‘나’에게 액운이 생기고 ‘복’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기복사상에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예배당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그냥 여느‘집’입니다. 주일이라는 것은 그냥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날을 정해 모이는 여느‘날’인 것입니다. 주일은 구약의 안식일과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주일’이라는 말이 나옵니까? 요한 계시록 1장 10절에 나오는 ‘주의 날’은 ‘심판의 날’이지 오늘날의 주일을 가리키는 게 아니지요? 그렇다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도 없습니다. 성경은 ‘어느 한 날이 거룩한 날이니까 그 날은 꼭 모여라‘라고 이야기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어떤 한 날 뿐 아니라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10:25)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어떤 사람들과 같이, 모이는 일을 그만두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

(행2:46-47)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어떠한 한 날의 거룩은 예수 님 오시기 전에 국한되는 것입니다. 안식일, 유월절, 초막절, 칠칠절, 대 속죄일 등의 절기와 안식일은 모두가 쉬어야 하는 거룩한 날이었습니다. 이 날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은 도로 쳐 죽임을 당했습니다.

제가 예전에 수요 성경공부 시간에 이 구약의 안식일이 창세기 1장에서부터 어떻게 이어져 온 것인지 자세하게 설명해 드렸지요? 안식일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으로 있으면서 아무리 땀 흘려도 얻을 수 없었던 안식,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는 창조 이후의 안식, 그 안식을 하나님 혼자 이루어 내셨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해 그 안식일이라는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절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절기라는 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질 참된 안식의 징표였기 때문에 그날은 거룩하게 구별해서 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것은 ‘나’ 하나님이 홀로 이루어 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이지요. 참 안식,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의 열심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으로 주어지는 것이니 너희는 그날 일을 하지 말고 쉬라는 것이 안식일이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참 안식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공개적으로 확언을 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안식일이라는 것은 없어진 것입니다. 안식일로 예표 되던 그 참 안식이 실제로 우리 인간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이루어졌으니까요.

 

(골2:16-17)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갈4:9-11)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이렇게 우리가 지금도 어떤 날을 거룩하다하고 지키고 있다면 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날의 거룩은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일하신 결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자기들이 공통적으로 쉬는 어느 한날을 정해서 자신들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고 찬양하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제가 가끔 ‘거룩한 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성도들이 합의해서 구별시켜 모이는 날(separate) 의 의미로 말씀드리는 것이지 이 ‘날’에 거룩함을 부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주일 날 교회 안 오는 것이나 수요 일날 교회에 안 오는 것이나 금요일 날 교회 안 오는 것이나 다 똑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가 모이는 날은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처럼 다른 일로 분주하셔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 날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의 신분에 감사하며, 다른 모든 날들도 오늘처럼 하나님께 예배가 되는 삶,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함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주일 날 왜 볼링을 하면 안 됩니까? 그러면 다른 날도 볼링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정말 주일날 장사하면 하나님이 노하십니까? 성도간의 교제를 위해 자장면 사 먹으면 안 됩니까? 다른 교인들을 섬기겠다고 일주일 내내 열심히 반찬 만들어서 주일 날 싼값에 제공하는 주 바라기 팀들이 지금 뭐 잘못하고 있습니까? 이게 다 무당 굿 할 때 준비되어진 샤머니즘 적 요소들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 교회가 합의해서 일요일 한 날은 우리가 우리 육신을 위한 분주함을 멈추고 성도간의 교제나 영적인 일에 힘을 써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부득이하게 그 날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나, 예배당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거룩한 주일을 범한 죄인’취급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요일이나 금요일, 새벽예배에 못 오는 당신도 똑같이 정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내가 주일에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주일에 빠지지 않고 교회에 올 수 있다면 그러한 상황과 환경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이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을 무턱대고 죄인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어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사람은 마귀다‘라고 쓰여 있습니까?

여러분이 종교 의식을 행하는 날과 장소를 거룩하게 생각하고 다른 날과 다른 장소에서는 전혀 거룩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면 여러분은 지금 무당 ‘굿‘하고 있는 거와 진배없는 것입니다.

 

(사1:10-17)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제물이 잘못된 것 아닙니다. 아주 훌륭한 제물을 준비했습니다. 제사도 아주 자주 드렸습니다. ‘무수한 제물’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왜 하나님이 나무라시지요? 참 제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에게서 동반되어 나와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사는 아주 잘 드렸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예배당에 와서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하는 종교행위는 아주 잘 하는데 그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종교행위라면 반드시 동반되어 나와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나오지 않는 것을 하나님은 이렇게 나무라십니다)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그냥 하나님께 보이려고 하는 종교 행위들이 있다는 것이죠. 주일 날 교회 안 가면 괜히 재수 없을까봐, 아니면 복 받기 위해 하나님께 눈도장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들 예배 받는 것도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번드르르한 어떤 한 날의 종교 행위를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특권을 받은 자로서의 삶을 우려내지 못하면 너희는 모두 ‘고사’지내고 있는 거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우려내야 할 그 삶이 뭡니까?‘ 악행을 버리고 남을 위해 나의 손해를 감수하며 사는 것’ 그게 참 기독교입니다.

우리는 오직 성경대로, 오직 성경만을 지표 삼아 살기로 한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날 성도라는 사람들이 성경이 아닌 관습이나 소문, 습관, 경험들을 기준 삼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요. 이건 정말 큰 일 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버젓이 기독교적인 것인 양 자리 잡고 있는 것들을 몇 가지만 예로 들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이교에는 항상 남신과 여신이 함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바알과 아세라가 짝을 이루듯이 항상 이교에는 여신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한 사람들이 뭔가 허전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의당 있어야 할 여신의 자리가 너무 허한 나머지 그 여신의 자리에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떡하니 채워 넣어 버렸습니다. 그게 바로 ‘mariology’ ‘성모신학’ '마리아 숭배 사상‘입니다. 성경 어디에 마리아를 숭배하라는 요구가 있습니까? 그런데 이교 사상이 기독교에 들어와서 기독교화 되어버린 것입니다. 유럽의 커다란 성당의 부조 물 들을 보면 이교의 우상들의 모양을 조금 바꾸어서 그대로 세워놓은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풍요를 허락해 주던 이교의 신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혹은 개인이나 집단의 경험이 기독교화 되어버린 예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머리가 아파서 진통제를 열심히 먹었습니다. 그런데도 낫지가 않았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하다가 머리맡에 성경책이 있어서 성경책을 베고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두통이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만일 그런 일이 두세 번 연거푸 일어나게 되면 그 사람은 그러한 경험을 통해 ‘두통에는 성경책 베고 자는 것이 최고’라는 것의 전도사가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어떤 개인의 경험이 와전되어서 그것이 마치 기독교의 진리인 것처럼 되어 버린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종교 개혁이전까지는 교회에서 성찬식을 할 때 항상 무릎을 꿇고 성찬 떡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천주교회에서는 무릎을 꿇고 성찬 떡을 받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성찬은 성찬 상을 둘러앉아, 혹은 둘러서서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게 정말 예수님의 몸과 피라면 내가 이렇게 멀뚱히 서서 받으면 은혜가 덜 할 거야. 무릎 꿇고 앉아서 경건하게 받자’하고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무릎을 꿇고 성찬 떡을 받아보니 서서 받을 때 보다 훨씬 감동이 커졌습니다. 아무래도 그럴 것 아닙니까? 그 것을 본 다른 사람들이 하나 둘씩 따라 하기 시작했고 ‘어떤 교회가 성찬 떡을 받을 때 전체가 무릎을 꿇고 받는데 참 은혜롭더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 교회 저 교회가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전체 교회가 전부 성찬 떡을 받을 때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하면서 ’성찬 떡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우상숭배다’라고 하면서 개신교에서는 그냥 앉아서 혹은 서서 성찬을 나누지요. 이렇게 어떤 개인의 경험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둔갑한 예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것도 있지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을 맞으면서 그냥 부활절을 맞기가 너무 밍밍해서 부활절 하루 전부터 세서 예수님의 광야 40일을 흉내 내서

40일간을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너무 감격스러운 부활절을 맞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 경험을 전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것이 전체 교회에 퍼져서 부활 절 전 40일은 돼지고기도 먹지 말고 경건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이 진리 화 되어 버렸습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루터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부활절 전 40일 동안 돼지고기를 먹어도 됩니까? 안 됩니까? 당신은 오직 성경만이 우리 신앙생활의 지표가 되어야 한다고 했으니 성경에 근거한 답을 주십시오.‘ 루터가 뭐라고 했겠습니까? ’마음껏 먹으라.‘

루터는 그 일로 파문을 당했습니다. 당시에 파문이라는 것은 ‘out law' 아무나 죽여도 된다는 살인 허가였습니다. 루터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것을 목숨을 걸고 폐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루터와 칼빈이 목숨을 걸고 없애 버린 것을 한국 교회가 ’사순절‘이라고 해서 다시 만들어 버렸습니다. 부활절 전 40일 동안 금식하고 정진하는 기간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사순절‘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루터와 칼빈이 성경에 없는 것을 목숨 걸고 없애버렸는데 후배들이 다시 주워 다가 조립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지키고 있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가 정말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 맞나요?

그 날은 로마의 태양신 미투라의 축일이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태양신을 섬기던 로마 사람들이 12월25일을 태양신의 날로 정해놓고 잔치를 벌이던 날이 바로 12월 25일입니다.

그런데 콘스탄틴 황제 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자 그네들이 잔치를 벌이던 12월 25일을 예수님이 태어난 날로 삼고 잔치를 계속했던 것이 12월 25일 크리스마스의 유래입니다. 왜 성경에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 기록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어떤 날만을 축하하는 자들이 아니라 1년 365일을 예수님이 오신 의미를 되새기며 묵상하며 살아야 하기에 예수님의 탄생일을 표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이 막아놓은 부분은 우리가 굳이 추측해서 우겨가며 지키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자꾸 기독교의 본질을 옆으로 밀어놓고 비 본질 적인 것에 몰두하도록 교회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오직 십자가 앞에서 내가 자꾸 낮아지고, 부인되고 해체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기꺼이 기쁘게 섬길 수 있는 자로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본질에서 벗어나 ‘내 감격, 내 자랑, 내 열심, 내 열매’를 추구하게 함으로 해서 자꾸 기독교를 관념화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체험도 하고, 감동도 받고, 열심을 부리기도 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비기독교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공동묘지에 가면 무섭습니까? 안 무섭습니까? 왜 무섭지요? 성경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죽어서 영원이라는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고 나와 있습니다. 창세전에 택해진 한 무리는 영원하신 하나님 곁으로 가게 되고

나머지는 지옥으로 들어가게 되어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냥 구천을 떠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원한을 품은 귀신, 처녀 귀신, 총각 귀, 동자 귀신이 구천을 떠돌다가 심신이 허약한 사람을 괴롭힐 수 있나요? 그런데 우리는 왜 무서워하죠? 성경의 내용이 관념으로 떠돌 뿐 나와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말 지옥을 믿으시나요?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의 가족이 아직 예수를 믿지 않고 있는데 그렇게 한가하실 수 있나요? 정말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오늘 날 기독교는 지옥조차도 관념으로만 동동 떠다닙니다.

아이들 입시 때 아무렇지도 않게 미역국 끓여 주시는 엄마가 몇 명이나 됩니까?

이왕이면 찹쌀떡이나 엿 먹이고 싶지요? 철썩 붙게...

누가 빨간 색으로 자기 이름 쓰면 기분 나쁩니까? 안 나쁩니까?

아직도 아이들이 문지방에 올라서면 재수 없다고 혼내는 분들 계시지요?

왜 교회의 엘리베이터도 4층이 F로 표기되어 있지요?

 

사단은 인간의 죄의 뿌리인 ‘샤머니즘’적 종교심에 껍질만 기독교로 바꾸어 버린 엉터리 기독교를 만들어서 진짜 기독교의 주위를 포위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속은 무당종교인데 겉모양만 기독교인 척하는 가짜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사람들을 미혹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십자가 앞에서의 자기 부인과 자아의 해체를 추구하고 경험하기는커녕 여전히 이 세상의 중심에 ‘자기 자신’을 올려놓고 자기의 행복과 자기의 자랑과 자기의 높아짐, 재수에 예수를 이용하는 거짓 기독교가 참 기독교처럼 둔갑을 해 버린 것입니다. 거기에도 예배가 있고 찬양이 있습니다. 봉사가 있고 헌신이 있습니다. 감격도 있고 눈물도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없습니다. 낮아짐이 없습니다. 섬김이 없습니다. 세상을 향한 죽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펄펄 살아서 자랑과 교만과 거들먹거림이 흘러넘칩니다. 그건 가짜 교회인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훈련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스티그마타 투 큐리오 예수, 둘로스 투 크리스토’ 예수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만 주의 주이십니다. 절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아니며 이 땅에서도 여러분이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왕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며 살라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설사 그 삶이 조금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살라 하시면 살아내겠다는 옹골찬 답을 하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