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계시록

(84)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계19:13)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22:14

(84)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계19:13)

19:13 그는 피로 물든 옷을 입으셨고,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요 몇 주간 우리는 종말의 장, 요한 계시록 19장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충신과 진실, 자기밖에 아는 이가 없는 이름에 관해 공부를 했지요? 오늘은 세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종말에 심판 주로 등장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 한 구절에 창세기에서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전체 성경의 내용이 다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쓰인 소유격은 동격 소유격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곧 말씀’이라고 해석을 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곧 말씀’이 같은 의미가 되는지는 이 설교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아시게 될 것입니다. 출발해 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구절은 이 요한계시록의 기자인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에도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요1:1)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지금 요한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면서 ‘그 분은 태초부터 계셨고 그 분은 말씀이시며 또한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는 ’로고스‘입니다. 그 ’로고스‘라는 단어는 헬라 철학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당시의 초대 교회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었습니다. 헬라 철학의 대표적인 사상이 이원론이지요. 이원론이라는 것은 현상과 원형을 분리하는 사상입니다.

이 땅에 나타나는 현상과 물질들은 ‘이데아’라는 실체의 투영일 뿐이라는 사상이지요.

그 ‘이데아’라는 실체는 순수하고 순결한 영적 세계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인간‘ 자체도 그러한 이원론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영혼이라는 이데아의 것이 육신이라는 물질 안에 갇혀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헬라철학은 인간의 육신을 빨리 벗어 버려야 할 더러운 것으로 취급했고, 인간이 참 행복을 위해 전력을 다해 추구해야 할 것은, 어서 이 육신을 벗고 영혼의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들이 독배를 마시고 죽으면서도 그렇게 의연하게 껄껄껄 웃으면서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그러한 이데아와 지상의 현상을 총 망라한 ‘우주의 질서를 만들고 운행하는 힘과 그 힘의 의지‘를 ‘로고스’라 불렀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단어를 끌어다가 창조주이신 예수님을 묘사한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로고스’ ‘말씀’이라는 단어 속에서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미지를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우주의 질서를 만드시고, 그 모든 것들을 합리적으로 운행하시는 분’으로 금방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사도는 그렇게 당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로고스’ ‘말씀’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차용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후에 ‘그러나 그 분이 너희가 알고 있는 그 로고스는 아니다’라고 바로 헬라 철학을 깨부숩니다.

 

(요1: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헬라 철학에 의하면 ‘로고스와 물질(육신)’은 완전히 상극인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라고 헬라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엉뚱한 논지를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당시 헬라 철학을 통해 당시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던 ‘로고스’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내용을 차용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기원에 대해 강하게 어필을 한 후에 그러나 내가 말하고 있는 그 분은 헬라 철학에서의 그 ‘로고스’는 아니고, 그 분은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는 것을 설명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 ‘로고스’라는 단어를 그가 기록한 책마다 쓰고 있습니다.

 

(요일1:1)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렇게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즐겨 쓰는 ‘로고스’라는 단어가 그가 기록한 또 다른 책인 요한 계시록의 ‘종말의 부분’에 마지막으로 차용되어 쓰여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과 요한 일서 에서는 ‘태초에 계신 말씀’이고 요한 계시록에서는 ‘마지막 때의 말씀‘입니다. 그 말은 그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 마지막까지 계시더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그러한 구절들을 보면서 이 우주의 시작과 끝은 그 말씀에 의해 시작되고 그 말씀에 의해 종결이 되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냥 ’태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다, 그리고 종말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다‘ 그러면 되지 왜 굳이 ’말씀’ ‘로고스’라는 말을 투입시켰는가? 궁금하지요?

그 ‘로고스’ ‘말씀’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 머릿속에 들어 있던 생각이 언어의 형태로 표현 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로고스‘’말씀‘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좀 전에 읽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리고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라는 요한복음 1장 1절의 말씀과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구절을 한번 비교해 보자고요.

 

(요1:1)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창1:1)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두 구절에 공통적으로 들어 간 단어들이 있지요? ‘태초, 하나님’

그런데 창세기 1장 3절에 보시면 그 태초에 계신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면서 창조를 시작하십니다.

여기서 ‘가라사대’라고 번역이 된 ‘아마르’ 라는 단어는 ‘말씀하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에도 ‘태초, 하나님’ 그리고 ‘말씀‘이 나옵니다. 만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국어사전의 개념을 가지고 그 창세기의 구절을 푼다면 그 ’말씀’은 ‘언어’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단순한 언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어떤 언어로 ‘빛이 있으라.’를 외치셨을까요? ‘한국어? 영어? 히브리어? 헬라어?’ 아님 어떤 사람들이 하늘의 언어라고 주장하는 ‘방언?’ 어떤 언어로 말씀하셨을까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있어서 ‘말씀’이라는 것은 단순히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곧 그 것이 현실이 되어 나올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면 모든 것이 그대로 됐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나님이 말씀하시되’라는 말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의 확실성‘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니까요.

요한은 그의 책에서 ‘로고스’ ‘말씀’이라는 단어를 써서 창세기의 그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두 들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시다‘라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창세전부터 알고 계셨고, 그 뜻을 수행하고 계시며, 반드시 그 뜻대로 종결하실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로고스’에 나타난 그러한 내용을 가지고 창세기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죽 연결시켜 보세요.

요약을 하면 이런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셔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인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새롭게 만들어 내실 새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시작이었으며, 그러한 새 창조는 결국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계획의 진행이었고, 그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반드시 완성되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계획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구절의 의미인 것입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계획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그 계획을 이루어 내실 수 있는 전진 전능한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계획하셨다는 것은 이루어진 것이지요? 왜? 그 분은 절대 허튼 것을 계획하실 리가 없고 절대 실패하실 수 없으신 분이니까.

그런데 태초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하셨고 이 역사의 종말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은 태초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어떤 일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심히 이루고 계시며, 종국에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하실 것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전체 우주의 역사는 이미 창세전에 계획되어졌고, 결정되어졌으며, 그 확정된 결과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 맞습니까?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품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하고 계셨으니까요?

그게 바로 신학에서 말하는 ‘decree’'작정‘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뜻, 계획’이라고 불러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작정 중에 도덕성을 가진 존재에 대한 작정을 특별히 ‘예정’‘predestination'이라고 부릅니다.

도덕성을 가진 존재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인간, 천사, 인간이신 예수‘ 그것을 특별히 예정이라고 하지요. 여러분이 예정론을 참 어렵게 생각하시는데요.

 

여러분이 예정론을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정론을 ‘전망 적 관점’으로 정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망 적 관점‘이라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1년 뒤의 나의 삶과 5년 뒤의 나의 삶, 그리고 10년 뒤의 나의 삶이 이미 다 정해져 있다’라고 ‘숙명론 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불공평하심에 대한 불평과 이미 숙명적으로 정해진 운명에 대한 나태함’같은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미 다 정해져 있다면 내가 굳이 열심히 노력할 필요가 뭐가 있어?’ 뭐 이런 질문이 생기지 않으세요?

그러나 성경에서 ‘예정’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는 항상 ‘역망 적 관점’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도 바울을 예로 들어 간단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에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내가 그 때 다메섹 도상에서 우리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정말 큰 일 날 뻔했어.’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깨닫게 되자 자기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게 된 것은 우연(偶然)이 아니라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이미 택정함을 입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갈1:15)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런데 그 후에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깨닫게 되자 ‘하나님께서 이리 저리 보시다가 모태에 있는 나를 발견하시고 저 녀석을 써야겠다.’ 라고 택정 하신 정도가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나를 택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엡1:4-5)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알수록, 그 분이 얼마나 크신 분이신 지 알면 알수록,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아, 하나님은 임기응변이나 우연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철저한 계획 속에서 그 확정된 결과를 향해 일을 해 나가시는 분이시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래의 ‘나’를 궁금해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돌아보며, ‘지금 나의 나 된 것은 그냥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해 놓으신 것을 철저한 간섭하심으로 이렇게 이루어 내신 것이구나.‘ 이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역망 적 관점의 예정‘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미래를 어떻게 예정해 놓으셨는지 궁금하세요?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미래를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예정해 놓으셨습니다. 그거 말고 다른 뭐가 궁금하신 가요? ‘내가 얼마나 부자가 될 것인가? 내가 언제 죽게 될 것인가? 하나님이 그런 것까지 다 예정해 놓으셨을까?‘ 내가 언제 죽던 얼마간의 재산을 소유하게 되건 나의 확정된 미래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거 말고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으세요?

저도 참 저의 미래를 궁금함 속에 조바심을 내며 기대했던 사람이었습니다.‘86년도에 군 제대를 하고 지금부터 10년 뒤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 년 뒤인 96년에 저는 신학교 학생이 되어있었습니다.

그 때에도 10년 뒤의 저의 모습에 대해 참 궁금했었습니다. 정말 내가 목회자가 되어 있을까? 아니면 중도에 그만 두고 다른 일을 하고 있을까? 그 10 년 뒤인 2006년

저는 지금 이렇게 서머나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어 있습니다. 제가 과거에 궁금했던 미래, 그리고 막연하게나마 추측해 보았던 미래와는 완전히 다른 오늘입니다.

하나님은 저의 기대와 추측과는 아무 상관없이 저의 확정된 미래로 이렇게 끌고 가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이미 확정된 미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저는 이렇게 매일 매일 좀 더 성숙된 하나님의 자녀로의 예정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역망 적 관점의 예정 관‘입니다. 그러니까 출발점과 도착지점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계획이 되어져 있다는 것을 우리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예정 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역망 적 관점의 예정 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 방종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나는 절대 우연히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고, 우연하게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이미 나를 택하셨고 그 때부터 나의 백성 됨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붙드시고 나의 길을 조명하시며 지금도 그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끌고 가고 계시며 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예수 그리스도는 기필코 종국에는 나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실 거라는 ’역망 적 예정 관‘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더욱 분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확실한 목표지점을 향해 우리를 그렇게 열심히 이끌고 있는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 한다는 사실 앞에 온전히 항복하며 나를 그 분께 의뢰하고 의존하게 되는 것이고, 그 의존은 순종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길을 잃었습니다. 집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험한 산길을 지나가야 하는데 이미 날이 저물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저씨가 손전등을 들고 그 산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그 아저씨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그 아저씨를 의지하고 그 산을 넘기로 했습니다.

그 아이는 그 아저씨에게 자신을 의존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그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 아저씨에게 나의 안전을 맡겨 놓고서 그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것은 언어도단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하심과 그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능력 앞에서 항복하고 ‘하나님 어차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그 정하신 목표 지점으로 이끌어 가실 것을 제가 알았으니 하나님께 제 인생을 맡기겠습니다.‘ 해놓고 그 분이 시키시는 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합2:3)

3            이 묵시(하나님의 말씀)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여기서 묵시라고 번역이 된 ‘하존’은 ‘계시’‘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정한 때가 있고 결코 거짓되지 않으며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힘으로 도망 갈 수도 없고, 그 묵시의 진로를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께 나의 인생을 맡기고 그 축복된 미래를 향해 열심히 순종하며 분투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확정되고 예정된 목표지점을 향해 우리를 지금도 이끌고 계시다는 것을 성경 여러 곳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 목표 지점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요14:1-3)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우리를 위한 거처를 마련하러 가신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그 처소는 우리의 처소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처소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배한다고 하시는가?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안식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피곤해서 쉬셨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하에 잘 지어지고 움직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그 안식을 ‘하나님의 거처 삼으심’'하나님의 처소 삼으심‘으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은 인간들을 에덴에서 쫓아 내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안식은 깨져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영원히 깨지지 않는 안식의 처소를 마련하시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새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출발이 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단순한 국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내는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은 바로 우리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당신께서 거하실 처소를 준비하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말이 되지요.

출애굽기에 보면 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는 이유가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출15:13,17) 

13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는 것은 그들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라고 13절에 나오지요? 그런데 17 절에 보면 바로 그 일이 ‘이스라엘 백성을 주님의 처소’를 삼기 위함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영원한 처소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처소로 삼는 다는 말과 동의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시고 신명기로 가보겠습니다.

 

(신33:27)

27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지금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는 이유를 하나님이 마련하신 처소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하셨는데 신명기에서는 바로 그 처소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출애굽기 15장 17절로 가면 그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처소 삼는 일이라고 합니다. 머릿속으로 그림을 잘 그려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처소가 되시고 우리가 또 하나님의 처소가 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처소를 주기 위함이라 해놓고 그 처소가 바로 하나님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 분의 처소로 삼으시겠다고 하세요. 그 말은 하나님은 우리를 그 삼위 일체 하나님 속으로 끌어넣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91:9)

9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표준 새 번역) 

   네가 주님을 네 피난처로 삼았으니, 가장 높으신 분을 너의 처소로 삼았으니,

(시132:13)

13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표준 새 번역) 

   주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그 곳을 당신의 처소로 삼으시기를 원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도 동일한 말씀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로 성숙시켜 가시며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자로 만들어 내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목표 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 것이 작정되어지고 예정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목표지점은 다윗의 언약으로 이어집니다. 다윗 언약으로 가서 확인도장을 찍고 가겠습니다.

 

(삼하7:5-7)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6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7         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다윗이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내가 언제 사람이 만든 곳에 거하는 것을 보았느냐?’라고 하시면서 다윗의 성전 건축을 막으십니다. ‘나는 인간들로부터 무엇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8절부터 다윗에게 언약을 하십니다.

 

(삼하7:8-9)

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9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하나님께서 다윗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그의 행위와 전혀 상관없이 복된 약속을 마구 쏟아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다윗에게, 아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줄 복은 ‘너희들의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내가 너희들에게 베푸는 것’이라는 ‘은혜의 언약’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공의의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에게 그냥 복을 주실 수는 없지요? 그래서 그들의 죄를 어떻게 처리하실 지를 사무엘하 11장과 12장에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삼하 11장에서는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이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12장에는 죄 없는 다윗과 밧세바의 아기가 죽습니다. 그렇게 죄가 해결되고 그 죽은 아이 대신에 솔로몬이 다윗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은 성취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어떤 복을 주시려고 하는 것인가?

계속해서 사무엘 하7장의 다윗 언약을 보세요.

 

(삼하7:11-13)

11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1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이루시겠다고 하시지요? 여기서 ‘집’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바이트’는 ‘가문, 가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다윗에게 약속하시는 것은 다윗의 후손으로 말미암는 한 가문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 ‘가문’을 다윗을 위하여 이루시겠다는 것은 다윗을 그 안에 넣어 주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12절과 13절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다윗에게 ‘내가 사람이 만든 집에 거하는 것을 봤느냐?’라고 하셨으면서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왜 다윗이 지은 성전은 안 받으시겠다고 하시고 다윗의 후손에게는 성전을 짓게 하시겠다고 하십니까? 단순히 다윗이 죄를 많이 지었고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솔로몬도 말년에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골라서 한 사람입니다.

죄로 따지자면 솔로몬도 다윗 못지않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성전도 안 받으십니다.

그러면 그게 무슨 뜻인가?

 

여기에는 이중적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 다윗의 후손은 ‘솔로몬과 예수 그리스도’를 이중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대로 성전을 짓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곧 파괴되고 맙니다. 다시 말해 솔로몬의 성전은 ‘하나님은 인간이 지은 것에 거하시지 않으신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다른 말로 파괴되기 위해 건축이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지으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지 인간이 지어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는 은혜의 언약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공력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모두 불 타버릴 것이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 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솔로몬의 성전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증거 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여호와의 처소, 여호와께서 거하실 참 성전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지어질 것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지어질 참 성전이 무엇입니까? 바로 위에서 언급하시고 있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지으시는 ‘집’ 다시 말해 ‘다윗의 가문’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는 것이지요. 바로 여러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백성 안에 거하시겠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을 처소로 제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요14:20-24)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것이 바로 확정적으로 예정된 성도의 미래입니다)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루시고자 작정하시고 예정하신 확정된 목표 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삼위 하나님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여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 분은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약속’

 

정리를 하지요.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 다른 말로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고 있고 성취되었고 성취될 것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처소가 되고 하나님이 우리의 처소가 되는 것’을 확정된 목표 지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삼위 하나님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세전부터 계획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미 결정은 났고 우리는 그 결정된 목표 지점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삶을 돌아보세요. 내가 내 계획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현실을 지나 더욱 성숙한 내일로 우리를 인도해 나가실 것이고 결국에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세우시고 마실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이미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확실하게 알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를 온전히 의뢰하고 의존해야 합니다. 그 분께 우리를 의존한다는 것은 그 분께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지요? 여러분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 무엇을 다짐하셔야 하겠습니까? 어차피 나의 목표지점은 정해졌고 예수님은 종말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실 것이니 어서 항복하고 그 올바른 대열로 들어가야지요. 여러분의 하루하루를 정말 소중히 쓰셔야 지요. 여러분이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는 오늘이라는 시간은 어제 죽어간 그 수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내일’입니다.

그렇게 귀한 날들을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자녀다운 아름다운 시간으로 채워내십시오.

 

역사적으로 세계를 한 번씩 들었다 놓았던 정복자들이 어떻게 소수의 병력으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는지 아세요?

알렉산더는 불과 30,000명의 군대로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나폴레옹, 징기스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소수의 병력으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따르는 부하들이 ‘우리 대장은 절대 허튼 계획을 세우시는 분도 아니고 그가 세운 계획은 반드시 성취해 내시는 능력 있는 분’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나약한 한 인간에 대한 신뢰’도 목숨을 거는 분투를 낳게 합니다. 하물며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그 분이 어떤 계획을 세우셨으며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진정 알고 있다면 당연히 우리의 대적과 목숨을 건 전투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오늘을 귀하게 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