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계시록

(82) 지금도 싸우시는 주 (충신과 진실)     (계19:11-12)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22:13

(82) 지금도 싸우시는 주 (충신과 진실)

 

 

(계19:11-12)

19:11 나는 또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흰 말이 있었는데, '신실하신 분', '참되신 분'이라는 이름을 가지신 분이 그 위에 타고 계셨습니다. 그는 의로 심판하시고 싸우시는 분입니다.

19:12 그의 눈은 불꽃과 같고, 머리에는 많은 관을 썼는데, 그분 밖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이 그의 몸에 적혀 있었습니다.

 

 

이제 19장 후반부로 넘어갑니다. 이 부분은 해석상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한 부분입니다. 역사주의적 해석을 하는 학자들은 요한 계시록을 단순히 역사의 나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부분을 신자들과 배도 한 자들의 전쟁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과거주의 적 해석을 하시는 분들은 이 요한 계시록을 AD70년의 이스라엘의 멸망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을 하기 때문에 이 사건을 AD70년에 있었던 로마의 장군 타이터스와 이스라엘간의 전쟁으로 해석을 하기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잠시 후에 공부를 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11절에 나오는 백마 탄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과거주의 해석을 하시는 분들 중에는 AD70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재림 하셨다고 해석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신학적 논쟁을 다 잊어버리고 성경 속에서 그 부분이 어떤 내용인지 밝혀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1절을 보시면 이 환상이 ‘하늘이 열린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말이 뜻하는 바가 뭘까요? 그 말이 정말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이신다는 뜻일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 전쟁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지요? 요한은 이 땅의 사람입니다. 그러한 요한에게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대해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밝히시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늘의 일과 땅의 일, 하늘의 역사와 땅의 역사는 절대 무관하게 흘러 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즉 이 땅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현상을 주도하고 있는 하늘의 비밀이 또 한 꺼풀 벗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하늘이 열린다는 대목이 여러 번 나옵니다.

계시록 4장1절에 한번 나오고, 11장 19절에 또 한 번 나옵니다. 그리고 15장 5절에서 다시 한 번 나오고 오늘 본문에서 또 한 번 나오는 것입니다.

4장1절에서는 하늘이 열리고 일곱 인과 일곱 나팔의 환상이 나옵니다. 11장19절에서 하늘이 열리고 12장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부터 시작해서 전체 구속사가 설명됩니다.

그리고 15장5절에서는 하늘이 열리고 일곱 대접의 재앙과 음녀 바벨론의 멸망이 등장하지요?

그리고 오늘 19장11절에서 하늘이 열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전쟁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 계시록에서 ‘하늘이 열린다.’는 말이 등장할 때마다 하나님의 재  창조와 역 창조의 사역이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의 비밀이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역사와 시간과 사건들이 왜 이렇게 진행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냥 역사는 ‘우연’이 이끌어 가는 도박 같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하늘을 여시고 말씀을 통해 이렇게 인류 역사의 시작과 끝을 명확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이 우주의 역사는 코아세르베이트라는 우연에서 시작되어 발전해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하게 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하나님의 철저하고도 뚜렷한 목표와 계획 속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구가 왜 이렇게 더워지고 있는지, 왜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지, 왜 인간들의 범죄는 날이 갈수록 흉포해 지고 있는지, 왜 가정들이 풍지 박산 나고 있는지, 왜 자연 재해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지 우리는 압니다. 지금 이 우주는 죄로 인해 점점 썩어 들어가고 있고 종말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종말로 치닫고 있는 역사 속에서 하늘의 하나님께서 지금 이 땅에 대해 무언가를 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11절에 나오지요?

‘충신과 진실이라는 이름을 가지신 백마를 타신 분이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고 계십니다.’

여기서 충신이라고 번역이 된 ‘피스토스’는 ‘충성, 성실, 믿을만한 것‘ 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진실이라고 번역이 된 ‘알레띠노스’는 ‘진리’라는 뜻이지요. 그러한 이름을 가지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그 똑같은 단어가 계시록 3장 14절에 나옵니다.

 

(계3:14)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피스토스 알레띠노스)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그 이름이 성부 하나님께 쓰입니다.

 

(사65:11-17)

11       오직 나 여호와를 버리며 나의 성산을 잊고 갓에게 상을 베풀어 놓으며 므니에게 섞은 술을 가득히 붓는 너희여

12       내가 너희를 칼에 붙일 것인즉 다 구푸리고 살륙을 당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하며 내가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으며 나의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니라

13       이러므로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나의 종들은 먹을 것이로되 너희는 주릴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마실 것이로되 너희는 갈할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기뻐할 것이로되 너희는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14       보라 나의 종들은 마음이 즐거우므로 노래할 것이로되 너희는 마음이 슬프므로 울며 심령이 상하므로 통곡할 것이며

15       또 너희의 끼친 이름은 나의 택한 자의 저줏거리가 될 것이니라 주 여호와 내가 너를 죽이고 내 종들은 다른 이름으로 칭하리라

16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앞에 숨겨졌음이니라

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이 장면도 역시 오늘 본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마지막 심판의 장면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이 계속 나오는데 그 이름이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쓰인 히브리어 ‘아멘’이 70인 역에서는 ‘피스토스, 알레띠노스’로 번역이 됩니다.

지금 구약에 등장하는 종말에 관한 예언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쓰이고 있습니다. 그 말은 그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하고 진실하게 온전히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이름이 ‘피스토스, 알레띠노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을 성취하고 계신 백마를 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싸우고 계신 것은 주님이 지금 어떤 약속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계신 거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거기서 ‘싸우다’‘플레메오’가 ‘현재형’입니다. 헬라어의 현재형은 계속되는 진행의 의미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싸워오고 계셨다’는 뜻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 최후의 전쟁 때까지 끊임없이 싸우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에 잠깐 등장하셔서 적들을 멸하시고 승리를 쟁취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하는 역사 내내 싸우시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생각하실 때 예수님은 지금 무엇과 싸우고 계시겠습니까? 사단 마귀와 힘겹게 싸우고 계신가요? 오멘이나 엑소시스트 같은 영화에서처럼 사단과 마귀는 우리 주님도 버거워 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존재입니까?

 

(계20:7-10)

7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8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9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마귀와 그의 세력들이 어떻게 소멸됩니까? 밀고 밀리는 접전 속에 아쉽게 소멸됩니까?

그냥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다 태워 버립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대적이 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전부 불타버릴 존재들입니다.

그 때는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지금은 그렇게 못 하십니까? 아직은 하나님의 내공이 부족해서 그 정도는 안 되시기 때문에 그 때를 대비해서 지금 열심히 내공을 쌓고 계신 건가요? 아닙니다.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우리 주님의 싸움은 약속, 언약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어떤 언약을 지금 충성스럽게 이행하고 계신 것입니까?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라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싸움은 ‘택하심을 입은 자들의 백성 만들기 싸움’인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 주님께서 지금 싸우고 계신 것은 바로 ‘우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와 싸우고 계신 것입니다. 갑자기 당황스러우십니까? 제가 우리 주님이 지금 ‘우리’와 싸우고 계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덮어쓰게 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죄책, poena'와 ’오염, macula'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어 있으며, 그 순결했던 존재가 죄에 오염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사망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말은 우리는 이제 ‘죄책’‘poena'으로부터 자유로워 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오염 macula'는 우리가 육신을 갖고 있는 한 계속해서 진행형으로 벗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뭔가 부족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과거, 현재, 미래 이 세 시제 모두를 합쳐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은 우리는 지금 구원을 이루어 가야하고 미래에 구원의 완성을 쥐어야 합니다. 이 전체가 다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지금 그의 삶 속에서 구원을 이루어 가는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것은 사기입니다. 구원은 어떤 시제에서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 현재형의 구원이 바로 ’오염, poena'를 벗는 작업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 작업에 여전히 개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을 제가 우리와 주님과의 전쟁이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우리 뒤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미혹하는 마귀의 세력과의 전쟁이기도 하고요.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죄 책을 도말 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 더러운 똥통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통 똥에서 건져진 그 백성에게서 여전히 더러운 똥 냄새와 오물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똥통에서 나온 인간이 워낙 그 똥통에서 오래 사는 바람에 그 악취와 오물들을 여전히 즐기고 있습니다. 그럴 때 아들을 똥통에서 건져낸 아버지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억지로라도 그 아들을 물로 씻어내고 단장을 시키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일정기간 동안 그 백성들에게 자기들 몸에서 나는 더러운 냄새와 자기들 몸에 붙어 있는 더러운 오물들을 그대로 직시하도록 놔두십니다. 우리가 어떤 지경에서 건져냄을 받았는지를 잊지 말라는 하나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거기에 마귀가 잠깐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마귀는 지금 이 땅에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똥통에서 건져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전히 그 더럽고 추한 것들을 즐기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짜 신선하고 아름다운 하늘의 것을 누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기에 자주 넘어갑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  속에 이미 새로운 법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그 구수하던 냄새가 역겨워 지고 그 아름답게만 보이던 오물들이 더럽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지칠 줄 모르고 계속 미혹을 합니다. 하나님은 그 갈등 속에 개입하십니다. 그리고는 이제 그 마귀의 미혹에서 벗어나도록 우리를 채찍질하십니다. 그러나 절대 대신 싸워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손발을 움직여서 스스로 싸우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그 오염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인격적‘으로 인식하게 하시고 무력에 의해서가 아닌 ’인격적이고 자발적인 항복‘을 받아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충신과 진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백마를 타시고 여전히 죄의 오염을 즐기고 있는 ‘나’와 싸우고 계신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19장 후반부에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그 분은 반드시 승리하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그러니까 충신과 진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싸우고 계신 한 우리도 결코 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싸우고 계신데 내가 어떻게 쉽니까? 나도 예수님께 들들 볶이면서 세상과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집스러운 열정으로 우리를 향해 돌진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 지고 항복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예수께 대한 항복이 세상에 대한 이김이 됩니다. 우리는 지금 그 복된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고린도 전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전15:55-58)

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이김을 주고 계십니다. 역시 현재형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을 이기는, 죄의 오염을 이겨내는 ‘이김‘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58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이 말은 백마를 타고 우리를 이기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이 우리를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사람’으로 만들어 내고야 마신다는 것입니다. 주의 일이 뭡니까? 예수님이 지금 뭘 하고 계셔요? 주님께서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고 하셨는데 하나님 아버지는 그 분의 아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이 땅에 보내셨습니까? ‘재창조, 새 창조‘를 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이었던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고린도서는 우리도 바로 그 주님의 일을 힘써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더러 뭐 하라는 것입니까? 그 새 창조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그 새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지지요?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의 오염에서 벗어나 거룩하게 될 때, 그리고 아직도 하나님의 복음을 듣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먼저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모두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때 그 재창조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것 열심히 하다가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김’을 받고 있는 성도들의 유일한 할 일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이 땅에서 내 소원이나 내 욕심을 충족시켜 주는 종교가 아니라 이 제한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잘 성장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뚜렷한 목표지점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이 땅의 것들로 그 믿음의 생활을 막고 있는 사단의 미혹에 속아 예배당에 와서도 이 땅의 걱정하느라 정작 해야 할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 그렇게 안일하게 여전히 악취나 풍기고 있는 오염된 그 분의 백성들과 전쟁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주님의 재창조 사역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고 여전히 기름기 질질 흘리면서 이 땅의 것들만을 추구하며 여전히 다른 사람에게 피해나 주고, 악취나 풍기고 오물이나 뒤집어 쓴 모습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 맞을까요? 예수님은 지금 끊임없이 죄와 그 더러운 오염과 전쟁을 하고 계신다고 하는데, 그 전쟁과 전혀 상관없이 여전히 물질적인 성공만을 추구하며, 여전히 육신의 습관들을, 그 더러움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 맞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고 있는 가시적인 이 세상에서는 그게 정말 올바른 기독교로 여겨 질 수도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지에 올라가서 세상을 향해 호령을 하는 그 모습이 복 받은 사람의 모습인 것처럼 비춰질 수 있지요. 그러나 성경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성령 훼방 죄를 짓는 사람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12:31-32)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잘 들어보세요. 성령 훼방 죄에 대해 많이 들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오늘 확실하게 알고 가셔요.

여러분 이 이야기가 어디에 붙어 있는 이야기인지 아세요? 이 성령 훼방 죄에 관한 이야기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일으키시는 것을 보고 저것은 사단이 하는 일이라고 오히려 예수님을 귀신으로 몰아 붙였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못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이 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눈에 보이는 겉모습이 자기들이 원했던 힘 있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은 초라한 목수의 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인자와 성령이 대조되어서 등장합니다. 우리가 다니엘 서7장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인자’는 하늘에서 오시는 심판 주이십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53장에 의하면 그 심판 주는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다고 예언이 되어 있습니다.

 

(사53:1-6)                              

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왜 인자가 이렇게 오셔야 합니까? 여기서 이렇게 메시야의 고난성과 이해 불가 성을 기록해 놓은 것은 구원은 너희가 알아보고 너희의 노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 심판 주이신 ‘인자‘를 못 알아보는 것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인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성령이 오시게 되는 데 그 성령이 오신 후에는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이 그 성령에 의해 다 알려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도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의 기준을 삼아서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이 땅에 왜 오셨으며,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모르고 있다면 ’그는 영원히 어떠한 방법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성령 훼방 죄를 짓고 있는, 구원받지 못한 자’ 라는 것을 주님께서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들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를 판단해서, 내가 가난하고 못 생긴 목수의 아들이라고 해서, 내가 메시아 인 것을 부정하고 오히려 나를 귀신의 무리로 몰아세우지만 지금은 용서해 준다. 왜? 나는 너희들이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이 땅에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이 오신 후에도 너희들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를 판단하고 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너희는 선택받은 자들이 아니며,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저주 속에 있는 자들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켜 보자고요. 만일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업적이나, 환경이나, 조건 등으로 기독교를 오도하고 힘의 논리, 성공주의, 물질주의 등을 신앙의 잣대로 삼아서 이 땅에서 높은 고지에 올라가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예수를 알아보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여전히 못 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 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을 잣대로 나를 못 알아보고 나를 몰아붙이는 것은 내가 이해하겠다만 성령이 오신 후에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면 너희는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그 성령이 오신 후가 지금이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 바리새인들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신앙의 잣대로 삼고 보이지 않는 하늘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성령 훼방 죄에 걸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새 창조를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성령으로 이 땅에 오셔서 계속 그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 새 창조는 어떻게 완성이 되지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의 성숙하고 거룩한 자로 지어지고, 그들로 말미암아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택한 자들이 모두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때 그 때 하나님 나라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불 타버릴 이 땅에서 눈을 돌려 영원한 세상을 준비해야지요. 어떻게 준비합니까? 예수님께서 열심히 죄의 오염을 닦아 내시고 계신 그 현장에서 우리도 우리의 손발을 움직여 그 오염을 닦아 내야지요. 예수님께서 열심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고 계실 때 우리의 언행이 도구로 쓰여 지게끔 살아야지요.

그런데 그러한 새 창조 사역과는 아무 상관없이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들로 복의 잣대로 삼고 풍요와 발전과 진보를 유일한 목표지점으로 삼아 사는 사람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성령 훼방 죄를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성령 훼방 죄는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단순히 성령 집회를 거부하거나 성령의 은사를 무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오염된 자신을 깨끗이 닦기를 노력하며 살다 가신 분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셨습니다.

 

여러분 로마서 6장에 보면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 은혜 아래 있다는 사도의 선언이 나옵니다. 혹자는 은혜라는 것을 아주 오해하고 계십니다. ‘은혜’라는 것은 과거에 한번 단발 적으로 주어지고 만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속적이며 인격적인 거룩한 영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영향력은 계속해서 우리를 간섭하시며 우리 안에서 그 오염을 몰아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끔 ‘나 은혜 받았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은 내가 말씀을 통해, 예배를 통해 거룩으로 한 발 진일보하게 되었을 때 쓰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게 충만한 은혜 속에 거하게 될 때 ‘조다단 에드워드 목사님이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나 허드슨 테일러 같은 분들이 경험하셨던 그런 영광스러운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너무나 밝고 빛나는 그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직접 보셨다고요. 왜 우리가 그런 경험을 못 하는지 아세요? 그 은혜라는 거룩한 하나님의 인격적인 영향력은 죄와 공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더러운 생각과 더러운 행위로 나를 오염시키고 있는데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수가 있겠습니까? 천만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렇게 힘이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맛과 하늘의 멋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열심히 연습하시고 훈련하셔야 합니다. 죄를 몰아 내셔야 합니다. 아니 백마를 타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승리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연습하세요. 실패하고, 실수해도 괜찮다니 까요. 실수 없이, 실패 없이 어떻게 처음부터 성공을 합니까? 해 보고, 해 보고 또 해보는 것입니다.

1923년에 일본에 관동 대 지진이 일어나서 340만 명의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일본의 한 해 예산이 15억 엔이었을 때인데 그 때의 피해가 55억 엔이었습니다. 나라 전체의 존폐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그 때 일본 위정자들이 생각해 낸 것이 조센징들이 우물에다가 독을 넣어서 우리 일본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 한다는 루머를 퍼뜨린 것이었습니다. 삽시간에 일본 전체에 그 루머가 퍼지자 일본인들이 조선 사람들을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조선 사람들이 일본 사람 흉내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옷차림도, 말도 일본 사람과 도저히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위장을 잘 했다고 합니다. 그 때 일본 사람들이 어떻게 조선 사람들을 가려내서 죽였냐 하면, 조금 수상한 사람이 지나가면 살짝 뒤로 가서 죽 창으로 등을 쿡 찔렀답니다.

그 때 ‘아야‘ 한 사람은 모두 조선 사람이고 ’이따이‘그런 사람은 일본 사람이었답니다.

아무리 흉내를 잘 내고, 위장을 잘 하고 있어도 위급한 상황에서는 그 사람 몸에 젖어 있는 습관적인 것들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습관적으로 거룩이 튀어나올 때까지 연습하고 훈련하라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한국 남포 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을 때 3부 설교를 마치고 박영선 목사님 이하 남포 교회 교역자들과 점심 식사를 하러 갔었습니다. 그런데 남포 교회 교역자 중에 북한 특수 8군단 참모장 아드님이 계십니다. 그 분도 역시 특수 8군단 소속 장교였는데 탈북을 해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신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분이셨는데, 그 분이 자기 신학교 때 에피소드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탈북을 한 후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학교를 다니며 교회 전도사로 사역을 하고 있을 때, 자신은 이제 그 북한에서의 습관이나 급한 성격 같은 것은 다 버렸다고 생각했었답니다. 그런데 운전을 하고 가는데 어떤 사람이 갑자기 앞으로 끼어들어서 사고가 날 뻔했대요. 그 때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 ‘이 간나 새끼 죽을라고 환장했나.’였답니다. 그 목사님께서 여전히 변하지 않은 자기 모습을 보면서 많이 회개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열심히 연습하셨대요. 감정을 억제하고 표정을 연습하고...지금은 그런 상황에서 ‘간나 새끼’가 아니라 ‘할렐루야‘ 그러신답니다.

연습하는 겁니다. 훈련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향해 칼을 뽑아들고 오늘도 전쟁을 하고 계시기에 나는 오늘도 엉덩이에 불 난 사람처럼 달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일에 너무 집중해서 다른 것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저 사람 저 일에 미쳤어’ 그러지요. 여러분, 우리는 그 주님의 일에 미쳐야 합니다. 나의 거룩에 미쳐야 합니다.

잘 새겨들으세요. 거룩에 미쳐 훈련하면 우리 힘으로 그 거룩이 완성된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아시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실존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를 알게 하시며, 우리를 향한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 반드시 우리를 그렇게 이끌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다 하신 것이고, 다 하실 것이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우리의 수고가 더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이 고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단함을 안고 잠자리에 들 때면, 힘들긴 했지만 마치 계획했던 하루의 일과를 성실하게 잘 마치고 편안한 잠자리에 드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고단함은 안식을 향한 고단함이요, 참 평안을 향한 수고인 것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기 전에는 클라식 음악을 듣는 것을 참 좋아했습니다. 특히 피아노 협주곡을 많이 들었는데 쇼팽이나 리스트,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많이 들었습니다.

스카치를 한잔 들고 음반을 걸으면 끝까지 일어나질 않았습니다. 그런 거장들의 음악을 들으면 나중에는 눈물이 납니다. 물론 음악이 아름다워서 감동의 눈물이 나기도 하지만 그러한 음악을 만들어 내고 연주해 내기까지의 그들의 수고가 너무 가슴에 와 닿기 때문에 그 성실함과 그 진지함과 그 열정에 눈물이 솟는 것입니다. 손가락 인대가 끊어질 때까지 건반을 두드려 댔던 그들의 그 열심과 열정이 그런 위대한 음악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호주의 천재 피아니스트인 데이빗 헬프갓은 약관의 나이에 라흐마니노프 3번을 완벽하게 연주한 뒤에 정말 쓰러져서 신경 쇠약으로 정신 병원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어떤 것에 너무 몰두 하다보면 다른 것들을 다 놓아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라흐마니노프에 미쳐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그냥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흐지부지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아주 예수에 미쳐 버려야 합니다. 다른 것이 들어 올 틈이 없어야 합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먹어야 하하고, 입어야 하고, 살아있어야 하니까 직업이 필요한 것이고 가정도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게 여러분의 삶의 우선 이어야 하는지 제발 잘 구별하세요.

미치셔야 합니다. 제발 먹는 것, 입는 것 때문에 예수를 팔아먹는 짓은 하지 마세요.

오늘날 교인들은 성령도 돈만 많이 쳐주면 가져다 팔아먹을 거라는 존 맥아더 목사님의 말씀이 딱 맞아요.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위해 눈에 보이는 것을 버려 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충신과 진리라는 이름을 가지신 우리 주님께서 백마를 타시고 지금 공의로 심판을 행하시며 싸우고 계십니다. 그 싸움은 누구와의 싸움이라고요? 단 칼에 불타버릴 마귀와 그의 세력과의 싸움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오염으로 자리 잡고 있는 죄의 영향력을 몰아내시고 계신 것입니다. 결국 그 것이 마귀와의 전쟁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종국에 가서 그 마귀의 세력이 모두 소멸될 것이라는 것은 우리의 거룩이 완전하게 완성이 될 것이라는 신나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오늘 하실 일이 뭡니까? 예수님을 따라 열심히 나의 죄와 싸우시는 것입니다. 백마 타신 분이 오늘도 시퍼런 말씀의 칼을 들고 여러분의 오염된 삶을 향해 돌진해 오고 계십니다. 어서 항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