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계시록

80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I)     (계19:10)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22:11

80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I)

 

 

(계19:10)

19:10 그 때에 내가 그에게 경배드리려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렸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러지 말아라, 나도 예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네 1)동료들 가운데 하나요, 너와 같은 종이다. 경배는 하나님께 드려라. 2)예수의 증언은 곧 예언의 영이다." 그, '형제들',또는 '예수께 대한 증언은

 

 

요한이 천사로부터 예언의 말을 들은 후 천사에게 엎드려 경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천사가 ‘나도 너와 같은 종이니 그렇게 하지 말라, 오직 경배는 하나님께만 드려라’라고 요한의 행동을 말립니다. 요한은 22장에서 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하는 천사 에게 똑같은 실수를 합니다.

 

(계22:8-9)

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9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여기 뿐 아니라 성경에서는 오직 경배 받으실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누차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행10:25-26)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6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그리고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쳤을 때도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했습니다. 그때 바울과 바나바가 어떻게 했습니까?

 

(행14:14-15)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 가서 소리질러

15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우리 같았으면 그냥 폼 좀 잡고 그 상황을 즐겼을 법도 한데 사도들은 한결같이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해야 한다.‘ 고 옷을 찢으면서까지 거부했습니다.

오늘날도 말씀을 전하는 목사들이나 헌금을 많이 하는 장로들이나, 오지에서 고생을 하는 선교사들이 성도들한테 경배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는 모습을 주변에서 종종 봅니다.

어떤 교회는 목사가 거의 우상처럼 숭앙되고 있습니다. 목사는 많은 성도들 중에 단지 말씀을 대언 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목사의 기도는 뭔가 더 능력이 있을 것 같고, 심지어 목사가 한번 방문만 해 주어도 주변에 있는 잡귀들이 물러가고 가정문제가 해결  된다거나 비즈니스가 잘 될 것 같은 그런 착각들을 하고 무슨 일만 있으면 하나님께 매달려 간구 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에게 안수를 받으러 찾아다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천사가 자기를 경배하고 있는 요한에게 왜 자기에게 경배를 하면 안 되는지 정확하게 지적해 줍니다. 이유인 즉은 ‘나도 너와 똑같이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예수의 증거’는 하나님의 도구로 부름을 받은 나를 통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경배 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읽어보세요.

 

(계19:10)

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한글 개역 성경에는 10절 말미에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는 구절 다음에 ‘가르’ ‘왜냐하면’이라는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그 단어를 넣고 ‘예수의 증거‘를 목적격 소유격으로 해석을 해서 다시 번역을 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너는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라 왜냐하면 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종에 불과하며 심지어 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도 오직 ‘대언의 영’ (대언의 영은 성령입니다)성령께서 하시는 것이니까 내가 경배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관이지 천사나 인간의 몫이 아닙니다. 천사나 인간은 단순히 ‘스피커’로, ‘도구’로만 쓰이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예수를 증거 하는 증인’으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러한 증인의 모습은 ‘말씀을 전하는 모습으로, 선교를 하는 모습으로, 헌금을 하고 구제를 하는 모습으로, 봉사를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동등하게 수평  선상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종”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오직 성령께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교회에서 말씀을 맡은 자들,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 뿐만 아니라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는 돈이 많은 장로, 오지에 가서 선교를 하는 선교사, 교회 일을 많이 하는 권사 님 이런 분들이 사람들로부터 상대적인 존경과 숭배를 받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경배를 그 사람들이 가로채는 ‘무서운 죄‘인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그거 좀 말이 지나치지 않습니까? 죄라뇨? 헌금 많이 하고, 오지에 나가 선교하고, 고생해서 말씀 준비하고 하는 것,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것 아닙니까?’ 이렇게 반문하실 분들이 분명 계실 것입니다. 왜 제가 그렇게 말씀을 드리는지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이 ‘동등한 하나님의 종들’이라 부르는 여러분의 동료들을 존경의 대상, 심지어 경배의 대상으로 올려놓는 이유는 성도의 신분과 성경이 말하는 ‘상급’의 개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힘들고, 어렵고, 과분한 수고를 하게 되면 하나님이 그 사람한테 더 큰상을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큰상을 받게 될 사람에 대한 동경이 경배로까지 둔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성경의 비밀을 우리 보다 더 많이 알고 있고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더 큰상을 받을 거야‘ 라고 생각을 한다거나 ’우리는 감히 상상도 못할 액수를 저 장로는 어떻게 저렇게 교회에 쾌척을 할 수 있나? 저 사람은 분명 하나님께 큰상을 받을 거야‘라는 생각을 한다거나 ’아프리카나 아마존이나 동남아 같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수년간, 길게는 수십 년간 선교를 한 선교사들은 우리가 하지 못하는 엄청난 일을 해 냈기에 하나님께 큰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그러한 일들은 다른 일보다 상대적으로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우리가 받을 ‘상급’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군데 나옵니다. 그러나 그 ‘상급’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상급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상급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성도들이 천국에 가서 자기가 성취한 업적에 근거하여 누구는 금 면류관을 받고 100 평짜리 맨션에 살게 되고, 누구는 개 털 모자 쓰고 판자 집에 살게 되는 그런 유의 상급이 아닙니다.

자세한 설명에 앞서서 제가 먼저 한 가지 확인을 하고 가겠습니다.

여러분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그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무엇을 조금이라도 보태셔야 합니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irresistible grace' '불가항력 적 은혜‘에 의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데 있어서 우리의 행위는 하나도 쓸데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에 힘입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계20:11-15)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지금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종류의 책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창세전부터 기록 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이름이 들어있는 생명책이고 또 하나는 죽은 자들의 행위들이 기록이 되어 있는 ‘책들‘입니다.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께서 두 종류의 책을 들고 계신데 한 책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생명책이고 다른 책들은 인간들의 행위들이 기록되어 있는 책들입니다. 금방 이런 생각이 드시지요? “그럼 하나님의 ‘선택과 행위‘ 이 두 가지가 다 심판의 근거가 되는 것인가?“ 이게 어떻게 조화가 가능한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걸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잘 보시면 그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은 전혀 심판과 무관하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만 불 못에 던져진다는 구절이 있지요? 그러면 그 생명책에는 어떻게 이름을 넣을 수 있습니까? 그건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로마서 9장 13절에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들이 아직 엄마 배속에 있을 때 전혀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둘 중 하나를 택하셔서 생명책에 기록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에서도 우리는 이미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해졌다고 분명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은 전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심판은 우리의 행위와 전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잘 들으세요. 왜 제가 ’무관‘이라는 단어를 쓰는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생명 책 옆에 ’행위들‘이 적힌 책들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행위들을 보시고 심판을 하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는 생명책과 심판의 불 못으로 던져질 수 있는 근거가 되는 ‘행위가 적혀 있는 책들’이 동시에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다는 것은 불 못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는 자격은 ’행위‘로는 절대 얻을 수 없다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만 불 못에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자들의 행위들이 기록된 그 책에 저 김성수의 행위는 어떤 것이 기록이 되어 있을까요?

제가 지금 저지르고 있는 모든 행위가 거기에 다 적혀 있으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전 당장 불 못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있기 때문에 저의 행위는 다 없어지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가 제 이름 뒤에 죽 열거되어 있겠지요? 그게 복음이지 않습니까? 예수의 삶을 내 삶으로 여겨 주시는 것, 그렇죠? ‘김 성수는 원수를 사랑하였고, 하나님에게 목숨을 바쳐 순종했고 고아와 과부를 사랑했으며 땅 끝까지 이르러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았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가 바로 저의 행위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 말고 다른 것이 조금이라도 섞이게 되면 우리는 그 하나님의 심판을 절대 면할 수가 없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법은 하나만 어겨도 모두 어긴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제 하루를 너무나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았다고 해 보자고요. 그래서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다른 날은 몰라도 2006년 8월 26일은 진짜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는데 그 하루만이라도 그 행위가 기록된 책에 보태주실 수 있으세요?’ 이렇게 요구했다고 해 보자고요. 만약 그 요구가 들어진다면 저는 그 하루 때문에 지옥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 정말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 지켜낼 수 있는 날이 하루라도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행위는 마음과 생각까지를 포함한 행위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대 앞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 나 상 안 줘요?’ 그런 말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성도들의 행위 난에는 모두 다 똑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 만이 적혀 있을 텐데 무엇을 근거로 상을 요구할 수 있지요?

그럼 하나님 앞에서 하나도 인정되지 않는, 오직 심판의 근거만 될 뿐인 우리의 행위가 왜 성경에서 그렇게 강하게 요구되고 있는가? 이걸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성경에서 ‘서로 사랑하라, 용서하라, 기뻐하라, 감사하라’ 등등 많은 행위의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명령이라는 것은 그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자질이 있는 사람한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훈련소에 갓 입소한 신병한테 M16 소총을 주고 ‘이거 1분 만에 분해 조립해’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은 우매한 명령입니다. 그렇죠?

우리가 어떤 명령을 내리고, 그 명령에 대한 실천을 상대방에게 요구한다면 먼저 그 상대방에게 그 명령을 실천할 수 있는 실력을 키워준 후에 명령을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그 명령에 대한 실천을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천을 전제로 한 명령은 그 명령을 받는 사람이 어떤 일정한 능력과 수준과 위치에 도달되어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명령은 내가 그 명령을 받고 그 행위를 하느냐 안 하느냐에 앞서서 누군가가 우리를 그렇게 이미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가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분명 성경은 그 38년 된 병자는 ‘자기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라고 명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가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 불가능한 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가라는 명령을 하자마자 그 불가능한 자가 그 명령을 받고 일어서서 자리를 들고 갔다는 것입니다. 분명 그 행위는 그 38년 된 병자의 자율적인 의지와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자율적인 힘이나 노력으로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던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명령을 행위로 옮겼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명령을 내리시기 전에 이미 그에게 그 명령을 행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 9절이 ‘그 병자가 나았기 때문에 일어나 걸어갔다’라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병자를 낫게 해 주신 후, 즉 ‘일어나 걸어가라’는 명령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결과는 인간이 자율적인 의지와 노력으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을 내리실 때에 이미 그 결과에 명령을 받는 자들을 집어넣고 계신 것입니다. 

에스겔서 37장으로 가면 그 의미가 더 확실해 지지요.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시켜서 골짜기에 말라 비틀어져 있는 전혀 무능력한 마른 뼈들에게 ‘마른 뼈들아 일어나서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그들이 그 명령을 수행합니까? 수행합니다. 어떻게 수행합니까? 하나님께서 그 마른 뼈들을 살리셔서 그 명령을 수행 할 수 있는 자들로 만들어 놓으심으로 그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절대 마른 뼈들의 노력이나 의지가 개입된 것이 아닙니다. 마른 뼈들은 그냥 죽어있는 무생물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 용서하라, 인내하라, 감사하라, 기뻐하라,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라.’라고 명령을 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 그 것을 이루어 내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이미 그 명령을 수행 할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들어 놓았고 그 명령을 너희의 삶 속에서 경험 적으로 발휘하면서 살도록 끌고 가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결연한 의지의 선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성경에서 접하게 될 때 ‘아,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고 반드시 그렇게 만드실 것이구나, 내 사랑하는 아버지의 뜻이 그런 것이라면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될 것이라면 나도 그 뜻을 따라 열심히 내 손발을 움직여야겠구나.’라는 진짜 노력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가운데 때로는 여전히 실패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이러한 것은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난 마른 뼈구나, 난 38년 된 병자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내 삶 속에서 문득 문득 솟아나는 사랑과 용서와 인내와 감사와 기쁨을 보면서 ‘아 예수님은 정말로 이러한 마른 뼈 속에서 생명을 창조해 가고 계시는구나.’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을 하고, 인내를 하고, 용서를 하고, 봉사를 하고, 헌신을 한 후에도 우리는 절대 자랑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자랑을 합니까?

아니 심지어 내가 언제 그런 사랑을 했는지, 내가 언제 그런 용서를 했는지, 내가 언제 그런 봉사를 했는지 기억도 못 합니다.

 

(마25:37-39)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보세요. 예수님께서 의인들에게 “너희는 이러 저러한 것들을 잘 했으니 천국으로 가라”했더니 의인들이 자기들이 한 일을 기억을 못 합니다. 오히려 “내가 언제 그랬나요?”하고 묻습니다. 왜요? 그들이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자기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실패한 기억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그 속에서 예수께서 그들을 사랑하는 자로, 용서하는 자로, 인내하는 자로, 만들어 가신 것이기 때문에 기억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4장에서 24장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씌워준 면류관을 벗어 던지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천국에서 ‘하나님 나 상 안 줘요? 이럴 수 있냐고요.

그렇다면 고린도 전서 3장에 나오는 공력에 따른 상급에 관한 이야기는 무엇인가?

 

(고전3:5-15)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 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 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고린도 교회에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 같은 파벌이 생겼습니다.

그러한 일이 생긴 것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어떤 특정인들을 특별하게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바울, 아볼로, 베드로”를 숭앙하게 되었고 파벌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왜요? 그 특별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분명 더 큰상을 받을 사람들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7절에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 그러나 심는 자나 물주는 자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전무 무용지물이다‘ 그럽니다.

그리고 8절에서 ‘심는 자나 물주는 자가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심는 자나 물주는 자는 각각의 역할로, 다른 말로 목사는 목사의 역할로 다른 일을 맡은 분은 그 일로 각 각 같은 상을 받는 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 상이 뭡니까? ‘영생’입니다.

 

(마19:29)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성도들이 받을 상급의 내용에 관한 구절입니다. 자기 이름을 위해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세상 것들을  버린 자들은 그것의 여러 배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영생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곳에 쓰인 'kai'는 그리고의 의미보다는 동격의 접속사로 해석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여기서 ‘여러 배’‘헤카톤타 플라시오나’는 ‘백 배’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백 배’라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큰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이 세상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헤아릴 수 없는 큰 복을 받게 되는 데 그게 바로 영생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받는 상은 뭐라고요? 영생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전서 3장 8절은 이런 말입니다.

목사는 목사의 일을 통해 거룩한 자로 지어져 가게 되다가 결국에는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 의사는 의사의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 해서 자신이 거룩한 자로 지어져 가다가 그 결과 그는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것이며, 식당 종업원은 친절한 봉사의 일로, 나무꾼은 나무를 열심히 패는 것으로 각각 ‘영생’이라는 상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각각의 역할이 그를 영생이라는 상으로 끌고 간다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이어서 ‘하나님의 집‘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집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9절을 보시면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지요?

바로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성도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그 집의 터를 닦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다른 이들이 집을 짓는데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금과 은과 보석과 나무와 풀과 짚’으로, 다른 말로 ‘공력’으로 집을 짓더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금과 은과 보석과 같은 든든한 것으로 집을 지어야지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집을 지으면 곧 탄다는 아기돼지 삼 형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 나오는 금과 은과 보석과 나무와 풀과 짚은 모두 ‘인간의 공력‘을 나타내는 ’타버릴 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와 대조되는 개념인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위에 인간들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세우는 어떤 것도 다 불타 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는 예수 그리스도로만 집이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집은 누구라고요? 바로 우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이 되어져 가는 그 일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나중에 심판의 날에 그 집을 불에 확 태워 버렸을 때에 ‘금과 은과 보석과 짚과 풀과 나무’는 다 타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지은 집만 타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그 집만 완전한 집이니까요. 14절에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라는 말은 너희들이 좋은 재료를 써서 열심히 지으면 그 공력에 대한 상을 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너희들의 힘으로 쌓은 그 공력이 심판의 불에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있을 수 있다면 상을 주겠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쌓은 ‘우리의 의(義)’ ‘공력(功力)’은 그게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다 타버릴 것이고 그 것은 우리에게 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그 위에다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의를 쌓는 시도를 합니다. 그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그 저주받을 인간의 공력 들은 다 태워 버리시고 없던 것으로 만들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공력이 다 타버려야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기에 15절에서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심판의 근거로밖에 쓰일 수 없는 우리의 공력을 다 태워 주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남겨 주셔야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공력이 다 타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십자가와 보혈의 공로만 살아나는 구원’ 자기가 부인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살아나는 구원, 그것이 바로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인 것입니다. 그 구원을 다른 말로 뭐라고 부른다고요? ‘상’“이라고 부른다고 했지 않습니까? 제가 증거를 대 드릴게요.

 

(고전9:18)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 것이로라

 

사도 바울이 자기가 받은 상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복음을 전할 때 내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값없이 전하는 것‘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내게 있는 권한을 오용하지 않는 것’ 즉 하나님께서 나의 공력을 다 태워 버리시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만이 드러나게 만드시는 그것을 ‘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이라는 말은 어떤 분이 이야기하는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대연각 호텔에서 팬티만 입고 탈출하던 그 여인네처럼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모든 더러운 공력이 불 태워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불 가운데서 구원을 얻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팬티만 입고 받는 구원이 아니라 팬티까지도 모두 벗겨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해결 됐지요? 이렇게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우리의 외면 적인 업적과 역할과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기도를 받으러 다닐 필요도 없고, 개업식 때 목사의 기도 안 받아도 되고, 아기가 태어났을 때 목사한테 안 데려 와도 됩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벗인데 누가 누구를 부러워하며 공경합니까?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세요.

 

여러분 피조물이 가장 영광스러울 때가 언제인지 아세요?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의 존재의 목적에 맞게 하나님의 어떤 것으로 채우실 때 피조물은 가장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성경은 ‘공중의 나는 참새를 보라 그가 농사도 짓지 않고 저축도 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먹이셔서 살리신다.’고 합니다. 참새의 존재의 목적은 그렇게 잘 먹고 잘 날아다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참새에게 먹이를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참새에게는 그 것이 가장 영광입니다.

또 성경에는 ‘들에 핀 들풀들, 백합화를 보라 그들이 길쌈을 하더냐? 옷을 짓더냐?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렇게 화려한 옷을 입히시지 않더냐?’라고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들에 핀 들풀들과 백합화의 존재의 목적은 그렇게 잘 입고 하려하게 꽃을 피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들풀들을 화려하게 입히시는 것입니다. 그게 들풀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그 백합화 보다 더 화려한 황제의 옷을 입고, 참새의 먹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라상으로 배를 채우는 솔로몬의 영광이 그보다 못하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정말 그런가요? 우리의 생각으로는 형형색색의 비단과 금실로 만든 솔로몬의 옷이 들풀의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참새가 먹는 것에 비교하여 수 백 명의 요리사가 만들었다던 솔로몬이 먹은 식탁이 더 풍성했을 것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미루어 짐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그렇게 기록을 할까요?

그건 솔로몬에게 나타나야 할 영광은 그런 종류의 영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단순히 참새나 들풀처럼 먹고 입는 것으로, 그런 외적인 것으로 존재의 목적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그런 참새의 영광이나 들풀의 영광을 너희의 영광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너희가 참새의 수준에서 들풀의 수준에서 만들어 입은 옷과 차려 먹는 밥, 그런 외적인 것은 너희의 영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솔로몬의 영광이 들풀의 영광만 못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가장 영광스러울 때는 언제입니까?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그의 안에 채우실 때 그 때 가장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여러분이 성도가 맞으시다 면 여러분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신 분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여러분의 삶이 되어 버린 모두가 동등한 영광을 가지신 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참새나 들풀처럼 먹는 거나 입는 것, 그런 외적인 조건이나 상황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이 참새와 백합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있는 교회 안에서 누가 누구를 경배하고 누가 누구 위에 군림합니까?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 혹은 그의 상황이나 조건이나 재력이나 학벌, 지식 같은 것으로 영광스러워 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존재하며 평가되어져야 하는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런데 왜 당신은 그렇게 매주 똑바로 살라고 소리는 지르는가?’ 이런 질문이 드시겠지요? 거기에 대해서 다음 주에 이어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