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계시록

(78) 성도들의 옳은 행실     (계19:7-8)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22:10

(78) 성도들의 옳은 행실

 

 

(계19:7-8)

19:7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어린 양의 혼인날이 이르렀다. 그의 신부는 단장을 끝냈다.

19:8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한 모시 옷을 입게 하셨다. 이 모시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다."

 

우리는 지난주에 성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심판을 찬양할 수 있는지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종말에 있을 악에 대한 심판이 바로 지금 현재에도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 성도의 거룩을 위해 매일 매일 나타나고 있음에도 우리가 그 심판을 찬양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그 심판이 우리의 거룩을 완전히 드러내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임을 알기에 우리는 때로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그 속에서, 찬양을 할 수 있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고집스럽게 우리를 거룩으로 이끌고 가십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어차피 하나님이 다 하실 텐데 뭐’ 하면서 손 발 다 내려놓고 가만히 있어도 되나요? 거기에 대한 확실한 답이 오늘 본문 7절 8절에 나와 있습니다.

먼저 7절을 보세요.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지금 이 장면은 마지막 날에 어린양의 혼인기약이 이르러 드디어 혼인 잔치가 거행 될 찰나입니다. 그런데 그 아내가 ‘그 혼인 잔치를 예비했다’라고 나오지요? 신부가 스스로 예비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교회가 이 땅에서 힘써 종말을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8절을 보시면 그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하나님께서 입혀 주셨다’라는 말이 나옵니다.(given to her) 그리고 그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랍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7절과 8절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요? 그리고 ‘성도들의 옳은 행실’‘디 카이오마타 톤 하기온’ 은 소유격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헬라어의 소유격은 여러 가지 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주격, 소유격, 목적격으로 다 쓰일 수 있는 게 헬라어의 소유격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성도들이 한 옳은 행실’이라고 번역을 해도 되고, ‘성도들에게 주어진 옳은 행실’이라고 번역을 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도 하지만 성도들이 준비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사61:10)

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여기도 보시면 하나님께서 신부에게 구원의 옷, 의의 겉옷을 입히신다는 내용과 함께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 한다’는 내용이 함께 나옵니다. 신부가 준비하는 자기 보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합을 해 보면 ‘성도들의 옳은 행실, 다른 말로 신부가 혼인 잔치를 준비하는 것’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해 주시는 것이기도 하지만 신부 스스로가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을 절대 빈둥빈둥 백수처럼 놔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들의 손발을 움직여 거룩을 드러내도록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쪽에서 보면 내가 다 견뎌야 하고, 내가 다 감수해야 하고, 내가 다 겪어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는 자신이 스스로 예배하고 자기 보물로 단장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목표를 세우시고 그 자녀들을 그 목표 지점까지 어르고 달래시며, 우리의 노력과 의지와 선택을 격발시켜서 끌고 가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분명 구원은 믿음으로, 선물로, 은혜로 받습니다. 우리의 옳은 행실이 조건이나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롬3:23-24,27-28)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그렇죠?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구원은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는 바울의 논증의 증인으로 채택된 사람이 바로 다음 장인 4장에 등장합니다.

 

(롬4:1-5)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바울은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구원의 증거로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야고보서에서는 ‘행위가 없으면 가짜다’라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약2:14-24)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이 야고보서와 로마서는 언뜻 보면 서로 모순되어 보이지만 바로 우리가 오늘 공부하는 계시록 19장 7절과 8절만 잘 이해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구절입니다.

보시다 시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사도 바울이 예로 든 믿음의 사람도 아브라함이고 반드시 행위가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야고보 사도가 예로 든 행위의 사람도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 팔고 있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 가셔서 믿음을 선물하시고 구원을 하신 칭의의 관점에서 로마서에 아브라함을 등장시킨 것이고

야고보 사도는 그렇게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냥 갈대아 우르에 두지 않으시고 거기서 뽑아 내셔서 100세에 낳은 아들을 하나님께 서슴없이 바치는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내신 성화의 관점에서 야고보서에 아브라함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은 구원을 받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께 항복하는 자리로, 그 분의 뜻에 전적으로 자신의 삶을 맡기는 자리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발을 움직여 가게 만드신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양의 신부에게 ‘신랑이 세마포 옷을 입혔다’라고도 이야기하고 그 ‘신부가 혼인잔치를 예비했다’ 라고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비하고 하나님께서 입히시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 뭡니까?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거룩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그 거룩한 삶이 뭡니까?

착하게 사는 것입니까? 세상일보다 교회 일을 더 열심히 하는 것입니까? 구제 사업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까? 뭐가 옳은 행실입니까? 뭐가 거룩한 삶입니까?

분명 거룩한 삶, 옳은 행실은 전에 우리가 아담의 후손으로,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 저지르던, 더러운 것들을 끊어 내고 그와 정 반대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롬8:12-13)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몸의 행실을 죽이고 옳은 행실로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몸의 행실을 반드시 끊어내시고 옳은 행실로 살게 하시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볼 때마다 결심하지요. ‘그래, 끊어내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몸의 행실을 끊어내자, 그리고 옳은 행실로 살자’ 좋습니다. 아주 거룩한 결단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많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우리는 우리가 끊어 내야 할 ‘죄’의 목록을 로마서 1장에 국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롬1:28-32)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 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 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우리는 흔히 이 같은 것들만 하지 않으면 괜찮은 것으로 생각하고 그런 것을 하지 않는 도덕적 윤리적인 바른 생활을 우리가 준비해야 할 ‘옳은 행실, 거룩’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리나 창녀 같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관대하시고 겉으로 드러나는 죄를 짓지 않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훌륭한 삶을 살아내고 있던 바리새인들에게는 ‘독사의 자식, 회칠한 무덤’이라는 매우 혹독한 정 죄를 하셨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준비해야 할 옳은 행실, 거룩은 단순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깨끗한 삶만을 의미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럼 그 삶이 도대체 어떤 삶입니까?

먼저 우리가 끊어내야 할 몸의 행실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 지점인 ‘거룩, 옳은 행실’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읽었던 로마서 8장13절의 ‘몸의 행실’은 헬라어로 ‘프락시스 투 소마토스’입니다. 직역을 하면 ‘practice of body’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한 뜻은 ‘몸의 습관, 혹은 지금까지 우리 육신이 훈련하고 연습하여 습득해 온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육신의 습관은 어떻게 우리에게 형성될까요?

모든 인간은 의식주의 해결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 것은 단순히 생계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의식주에 대한 욕구뿐만이 아니라 보다 깊고 강하며 영구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그 것이 바로 ‘사랑, 용납, 자기 가치 감, 안전감, 소속감’같은 것들입니다. 이 것들은 모두 인간의 본능과 같은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창조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의존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하나님의 자녀라는 소속감과 에덴의 왕으로서 제사장으로서의 자기 가치감을 흠뻑 누리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인간은 그 모든 것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 버리심으로 인간들은 사랑과 안전감과 소속감과 자기 가치감을 몽땅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고 힘을 키워야 했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 이외의 남들은 모두 다 경계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채우고 싶은 정당한 욕구를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그렇게 누군가가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기만을 원하지 남의 욕구를 채워 줄 수 없는 죄인이 되어 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지고지순한 사랑이라고 평가되는 부모의 사랑도 자식의 그 욕구를 다 채워주지 못합니다. 그 부모도 역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채워져야 할 정당한 욕구가 채워지지 못할 때 인간은 ‘거절 감 혹은 거부감’ ‘rejection’을 무의식에 쌓게 됩니다. 그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아픈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상처 혹은 수치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상처와 수치를 스스로 극복하려는 방식을 육신의 습관, 몸의 행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육신의 습관, 몸의 행실은 ‘거짓말, 무관심, 교만, 무시, 분노, 반항, 이기적인 행동, 험담, 다툼, 복수, 살인, 파괴, 우울증, 알콜 중독, 마약 중독, 일중독, 스포츠 중독’등으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고 지켜야 하기 때문에 자기 보호의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죄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 보호의 행위가 정반대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신학에서는 ‘성공 형 육신’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좋아 보이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스스로 자기 보호를 하기 위해 앞서 열거한 폭력적이고 파괴적이고 중독 적인 일들을 하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위적인 사랑과 존경을 받기 위해 작위적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다른 이들에게 존경받기 위해 겸손하기도 하고 유머러스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 되려 하고 일도 열심히 합니다. 또 목숨 걸고 공부를 해서 학벌을 쌓으려 하고, 재산을 많이 모아 성공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그래서 사회나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뭐가 나쁘냐고 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 보호에서 나온 행위들, 타인으로부터 존경받지 못할까봐, 타인으로부터 사랑과 인정과 용납을 못 받을까봐 하는 행위들은 겉으로는 아무리 멋있어 보여도 죄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 보호의 벽이거든요. 그러한 자기 보호의 벽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절대로 남을 사랑한다든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적으로 볼 때 아무리 훌륭한 일을 많이 하고 아무리 예의 바른 행동을 하고 아무리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바른 삶을 산다고 해도 그 것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고 네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 모든 것은 자기 보호, 즉 로마서에서 우리가 끊어 버리지 않으면 절대 천국 못 간다고 한 ‘몸의 행실, 육신의 습관’인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도 참 바르고 깨끗하고 부지런하게 사는데 이상하게 재수 없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렇게 자기 보호를 위해 겸손을 가장하고 청렴을 가장하고 열심을 가장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힘들어합니다.

그것도 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끊어내 버려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겠지요?

그러면 우리의 삶에 나타나야 하는 진짜 옳은 행실은 무엇입니까?

나의 옛 사람, 나만 생각하고, 나만 보호하고, 나만 감싸려던 그 자기 보호의 자아가 깨지는 삶, 그리고 나는 자꾸 감추어지고 숨겨지고 때로는 조롱 받고 때로는 무시당해도 나로 말미암아 내 이웃과 나의 하나님이 이익을 보는 그런 삶이 바로 우리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며, 거룩인 것입니다.

그게 뭡니까? 그게 바로 십자가잖아요. 우리의 삶 속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마16:24)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자기 십자가’가 뭡니까? ‘원수 같은 남편, 원수 같은 아내, 원수 같은 자식, 원수 같은 시어머니, 고통스러운 질병’ 보통 이렇게 버리고, 부수고 싶지만 끝까지 짊어지고 가야할 짐을 십자가라고 알고 계시죠?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고 오라는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뭘 상징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죄가 저주를 받아 죽는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모든 죄가 죽고 우리가 새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보호를 위해 육신의 습관으로 행하던 것들을 하나하나 끊어내는 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삶인 것입니다. 십자가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뭡니까? ‘고난’이지요? 그래서 그렇게 자기 몸의 행실을 죽여 가는 삶을 성경이 ‘십자가 혹은 고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고난’이라는 말을 확실하게 정리를 하고 계셔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도들의 고난은 단순히 여러분이 ‘핍박받고, 병들고, 감옥에 가고, 자식이 속을 썩이고, 사업이 망하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국어사전에 나오는 내용이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고난은 다른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고난은 반드시 십자가여야 합니다. ‘나의 몸의 행실이 죽는 것’ 다른 말로 나만을 사랑하던 삶에서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사랑하라 하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바꾸어 가는 것. 그것을 성경은 고난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나서 핍박받고, 병들고, 감옥에 가고, 자식이 속을 썩이고, 사업이 망했을 때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여러분의 몸의 행실이 여전히 살아 꿈틀거린다면 여러분은 성경이 말하는 고난을 통과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일제(日帝)시대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감옥에 가서 죽도록 두들겨 맞은 목사님이 ‘네 이놈들 나가서 보자, 반드시 복수 할 테다.‘ 이런 마음을 갖고 순교하셨다면 그건 고난도 아니고 순교도 아니고 개죽음인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와 반대로 늘 남들 등이나 치고 사기나 쳐서 잘 먹고 잘 살던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예배당에 앉아서 말씀을 듣다가 느닷없이 ‘난 아무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고, 이렇게 추악한 인간인데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허락하셨구나. 이제 정말 하나님의 그 사랑에 먹칠하는 삶을 살지 말아야지’ 하며 통곡하며 회개하고 하루하루 그렇게 살고 있다면 그게 바로 고난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바르게살기 위해 내 방식대로 나의 유익을 취하던 그 몸의 행실을 끊어내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것을 고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라는 것은 외적인 상황과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억울한 상황, 가난한 상황, 어려운 상황을 고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요, 자기 보호를 위해, 남에게 존경받고 사랑 받기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우리 인간의 사랑에 대한 욕구는 엄청난 거예요. 그러나 그러한 몸부림이 내 이웃을 사랑하고, 아니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결과 되어지지 못한다면 그 삶은 고난의 삶도 아니고 신앙의 삶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하신 회칠한 무덤의 삶인 것입니다.

고난이 뭔지 십자가가 뭔지 잘 아시겠습니까?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여러분이 구원받으신 분이 맞다 면 여러분의 삶 속에는 반드시 그 십자가가, 그 옛 육신의 습관을 죽여 가는 고난이 나타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분명 ‘내 신부는 내가 새 옷으로 갈아입히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골1:24)

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뭔 줄 아세요? 그 단어‘휘스테레마타 톤 뜰립손’을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의 부족한 부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내 육체에 채우노라‘에서 ’채우노라‘’안타나 플레로오‘는 ’완성시키다, 채워 넣다‘라는 뜻입니다. 그럼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십자가로는 부족해서 우리가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넣어 그 고난을 완성해야 한다는 말이 되나요?

아닙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어떤 것이 똑같이 다른 곳에 편만 하게 전해질 때 ‘플레로오, 혹은 안타나 플레로오’라는 단어를 써서 마치 부족한 것이 채워져서 완성되어지는 것처럼 표현을 했습니다. 이어지는 25절에도 똑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골1:25)

25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기 ‘하나님의 말씀을 이룬다.’에서 ‘이루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플레로오’입니다. 이 단어 역시 ‘채우다, 완성시키다’라는 뜻입니다. 역시 24절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뭔가 부족해서 자신이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울 것이라는 뉘앙스가 풍기지요? 똑같은 단어가 로마서 15장 19절에서는 어떻게 쓰이는지 보세요.

 

(롬15:19)

19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여기서 ‘편만하게 전하였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플레로오‘입니다.

그러니까 골로새서 1장 24절과 25절은 동일한 의미의 단어인 ‘안타나 플레로오’와 ‘플레로오’라는 단어를 써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들인 성도들에게 필연적으로 전해지고 나타나게 될 것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사도 바울의 몸에 채워졌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성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난인 십자가가 자기의 삶에 나타나고 있다는 고백이고 그 십자가의 삶, 고난의 삶이 그리스도의 교회인 자기를 완성시켜가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 고난이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라는 구절의 진의를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당연히 여러분의 삶에는 십자가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게 ‘나를 위해, 나를 중심으로’ 살던 삶에서 돌이켜서 나의 육신의 습관을 죽이고, 또 우리 성도들이 내 이웃을 위하고 나의 하나님을 위하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로 사는 것이 바로 성도들의 옳은 행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옳은 행실을 그 신부에게 입히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 신부들도 혼인잔치를 예비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분명 그 옳은 행실의 반대 것인 ‘몸의 행실’을 죽이지 않으면 너희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소원을 주시고 행하게 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더 이상 무시하고 묵살하지 마시고 오늘부터 시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