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계시록

(79) 가짜 신부     (계19:7-10)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22:10

(79) 가짜 신부

 

 

(계19:7-10)

19:7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어린 양의 혼인날이 이르렀다. 그의 신부는 단장을 끝냈다.

19:8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한 모시 옷을 입게 하셨다. 이 모시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다."

19:9 또 그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고 기록하여라." 그리고 또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다."

19:10 그 때에 내가 그에게 경배드리려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렸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러지 말아라, 나도 예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네 1)동료들 가운데 하나요, 너와 같은 종이다. 경배는 하나님께 드려라. 2)예수의 증언은 곧 예언의 영이다." 그, '형제들',또는 '예수께 대한 증언은'

 

 

유대인들의 혼인 관습을 보면 먼저 유대인들은 마음에 드는 신부 감을 부모가 점을 찍어 두었다가 나중에 정식 청혼을 하게 되고 그 청혼이 받아들여지면 약혼식을 합니다.

그 약혼식이 거행되고 나서 결혼식까지는 오랜 기간을 떨어져 있게 되는데 그 동안 신랑은 신부를 데려오는 값으로 신부 집에 신랑이 지불해야 하는 돈을 다 지불해야 합니다.

그 지불금이 모자랄 때는 육체적인 노동을 해서라도 다 갚아야 신부를 데려 올 수 있습니다.

그 지불금이 다 지불되면 그 때 신랑은 보무도 당당히 신부의 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려다가 자기 집에서 혼인 잔치를 치릅니다. 그런데 만일 그 정혼 기간 동안에 신부가 정혼한 신부로서 정숙치 못한 행동을 한 것이 신랑에게 알려지면 신랑은 언제든지 그 약혼을 파기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 유대인들의 혼인 관습을 구속사를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그 분의 신부 될 자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신부의 신랑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신부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신랑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으로 보내셔서 약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 신부의 몸값으로 지불되어야 할 지불금을 다 지불 하셨습니다.

그 신부의 몸값은 정확하게 율법이 요구하는 생명의 속전인 은 30냥이었습니다.

 

(출21:28-32)

28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에 맞아 죽을 것이요 그 고기는 먹지 말 것이며 임자는 형벌을 면하려니와

29       소는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임자는 그로 인하여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므로 남녀간에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죽일 것이고 임자도 죽일 것이며

30       만일 그에게 속죄금을 명하면 무릇 그 명한 것을 생명의 속으로 낼 것이요

31       아들을 받든지 딸을 받든지 이 율례 대로 그 임자에게 행할 것이며

   (이렇게 한 사람의 생명의 값으로 자식의 목숨을 대신 주어야 하는 것이 율법이 말하는 속죄금입니다. 누군가의 목숨의 대가로 대신 바쳐진 아들하면 생각나는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32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에 맞아 죽을 지니라

   (그리고 돈으로는 은 삼십 세겔을 주어야 합니다. 은 삼십 세겔 하면 생각나는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마26:15)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이렇게 은 삼십 냥은 죽어야 할 자의 목숨 값입니다. 예수님은 그 은 삼십 냥이 되셔서 신부인 우리의 목숨 값으로 지불되신 것입니다.

 

(호3:2)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은 열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3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창녀 고멜을 호세아가 은 열다섯 냥과 보리 한 호멜 반으로 삽니다. 보리 한 호멜 반은 은 열다섯 냥입니다. 그러니까 합이 은 삼 십 냥이지요. 이 호세아의 이야기는 바로 창녀와 방불한 우리 죄인들을 신부 삼으시겠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렇게 혼인 잔치를 위해 모든 것이 지불되었고 준비되었습니다.

이제 그 신부들은 마지막 혼인 잔치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신랑이 다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신부들이 신랑이 올 때까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옳은 행실’로 거룩하고 정결한 혼인 예식을 예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신부의 행실이 신랑의 기대치에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되면 그 신부는 밖으로 내 쳐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 3장3절이 ‘내가 너를 위해 모든 것을 지불했으니 너는 이제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신부가 계속해서 간음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신부라는 사람이 신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다른 남자, 즉 세상을 사랑합니다. 그냥 놔두면 그 약혼은 깨질 판입니다. 그러나 그 신랑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자기의 목숨까지 신부의 몸값으로 지불하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신부를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이 그렇게까지 해서 정혼을 한 신부를 놓치시겠습니까? 그 신랑은 반드시 그 신부를 정숙하고 순결한 신부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에 옳은 행실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필코 그 혼인은 성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한번 결심하신 것이 포기될 수 있습니까? 없지요. 

우리 하나님께서 이렇게 결심하셨다는 것을 아십니까?

 

(호2:16-20)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리라

18       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난 반드시 너와 결혼 할 거야‘라고 우리 하나님께서 결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신랑은 우리 신부들이 하나님을 반드시 사랑하게 만드실 것임을 천명하셨습니다.

 

(신30:6)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오늘 본문에 ‘신부가 혼인을 예비했다’는 구절이 있지요? 그 것은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는 마음에 자발 적으로 그 혼인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준비를 했다는 말인데 그 말은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녀였던 신부를 사랑으로 사랑에 이르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신부인 교회가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만드셨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 성도들을 기필코 신부로 만들어 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마26:26-29)

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성경에 나오는 마지막 유월절 예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지막 포도주 잔을 보류하시면서 마지막 잔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 만찬을 먹을 때는 항상 적포도주 네 잔을 마시는 것을 중심으로 진행  되었습니다. 왜 적 포도주 네 잔을 마셨는가 하면 출애굽기 6장 6절과 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네 가지 약속에 근거해서 포도주를 네 잔을 마셨습니다.

 

(출6:6-7)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1)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2)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3)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7         (4)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이 네 가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포도주를 네 잔 마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 번째 잔을 드시고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하신 후 네 번째 잔을 보류하신 채 그 잔은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겠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그게 세 번째 잔인 줄 알지요? 출애굽기에 나오는 네 가지 약속 중에 세 번째가 바로 구속, 죄 사함의 약속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따라 주신 잔은 세 번째 잔이 맞지요. 그리고 네 번째 잔을 보류하시고 그 잔은 하나님 나라에서 마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그 여호와의 유월절, 하나님의 교회가 완전하게 구원을 얻게 되는 그 날은 하늘에서 ‘반드시, 꼭, 미아 헤메라’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결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그 마지막 잔을 드는 혼인 잔치가 드디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창녀 같던 신부가 옳은 행실이라는 아름다운 세마포 옷을 입고 드디어 혼인 식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열심의 하이 라이트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이렇게 반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오늘 본문의 혼인 잔치를 보면서 ‘지금 상태 같아서는 나는 그냥 창녀처럼 버림받을 것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그 혼인 잔치에 세우시고 마실 것’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 배우고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이 모양이지만 그 날이 되면 우리는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완전히 변할 것입니다. 그 혼인 잔치를 통해 우리는 완전하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진정한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연합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3:18)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데 성경은 그 혼인잔치에 와서 땡깡을 부리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부가 아닌 사람들이 예복도 아닌 엉뚱한 옷을 입고 와서 ‘내가 진짜 신부’ 라고 억지를 부리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내가 주께 배우고 주와 함께 먹고 마셨고 주님의 이름으로 신앙생활을 했는데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제가 주님이 배고플 때 밥을 드렸고 주님이 아프실 때 병간호했고, 주님이 감옥에 가 계실 때 사식 넣어드렸던,  제가 진짜 신부입니다‘ 그렇게 우기는 자들이 있을 거라는 말이지요. 그 때 신랑이신 예수께서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을 모두 쫓아내십니다. ‘도대체 너희들이 누구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 한다’

그렇게 신랑은 모르는데 자기 혼자 ‘나는 저 사람의 신부야’하고 신부 행세를 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스토커’라고 부르지요. 그건 일종의 정신병입니다. 예배당 출입을 하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그런 정신병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정신병자들을  다 쫓아내십니다. 그 가짜들을 처리하셔야 진짜 혼인 예식이 거행 될 수 있으니까요.

챨스 스펄젼 목사님은 그들을 ‘매춘 교회’라고 부르십니다. 엄밀히 말해 그건 교회가 아니지요.

그들은 예수의 이름은 부르고 있지만 그들에게 예수는 주도 아니고 그리스도도 아닙니다. 예수는 그냥 자기들의 소원이나 들어주고 문제나 해결해 주는 그런 잡신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그렇게 세상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힘의 논리와 성공주의, 물질주의, 자연주의에 의해 굴러가는 그런 집단은 음녀 바벨론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창녀’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배당 안에 있던지 예배당밖에 있던지 그들은 모두 여전히 창녀인 음녀 바벨론인 것입니다.

그래서 19장에 혼인 잔치가 나오기 전에 17장 18장에서 금과 보석과 진주와 붉은 옷으로 세상을 미혹하는 음녀 바벨론의 멸망이 선기(先期)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 예배당 안에 들어와 있는 가짜 신부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지 히브리서로 가서 살펴보겠습니다.

 

(히6:4-6)

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이 구절은 알매니안 주의를 지지하는 교회나 신학자들이 자주 인용해서 ‘봐라, 구원받은 사람도

탈락할 수 있다‘라고 오용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이 정말 구원받은 사람도 탈락할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라면 이런 구절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요10:28)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전혀 모순이 되는 구절이 되죠? 히브리서6장의 내용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척 하다가 중도에 배도한 자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그들이 처음에는 잘 믿었다가 중도에 타락했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요일2:19)

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예배당 안에서 아무리 경건한 척하고 열심을 부려도 끝까지 그 길을 못 가고 중도에 차를 바꿔 타는 사람은 원래 처음부터 아니었는데 연극했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어떤 가면을 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히브리서 6장 4절부터 6절까지의 내용입니다.

4절부터 한번 보지요.

 

(히6:4)

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여기서 한번 비췸을 얻었다는 말의 의미가 뭘까요? 여기서 ‘비추다’라고 번역이 된 ‘프호티조’라는 단어는 ‘가르침으로 지식을 주다, 가르침으로 빛을 주다’라는 뜻입니다.

똑같은 단어가 디모데 후서에 쓰였습니다.

 

(딤후1:10)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여기서 복음으로써 드러내셨다 가 바로 ‘프호티조’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비췸을 얻었다는 말은

‘복음의 교훈으로 가르침을 받았다’라는 뜻입니다. 같은 히브리서 10장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옵니다.

(히10:26)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여기서 ‘지식을 받다‘에 쓰인 단어도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바른 복음의 내용을 배운 것만으로 우리는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똑같은 경고를 했습니다.

 

(벧후2:20-21)

20       만일 저희가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복음을 올바로 배운 사람들 중에도 가짜 신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입니다. 여기서 ‘하늘의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구원’이라는 해석도 있고 ‘성령’을 뜻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 에서 ‘맛보다’‘규오마이’는 ‘먹다’‘파고’와 대조되는 단어입니다.

 

(요6:50)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마태복음27장으로 가면 더 확실하게 그 단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27:34)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 하시더라

 

여기서도 ‘마시다‘’피노‘와 ’맛보다‘’규오마이‘가 대조되고 있음을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맛보다’‘규오마이’는 ‘먹다 혹은 마시다’와 대조가 되는 단어입니다.

음식은 먹고 마셔야 그 다음에 소화를 시키고 영양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라는 것은 하늘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지는 못하고 겉으로 냄새나 맡고 맛이나 본 상태, 즉 돌밭과 같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13:5-6)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그들은 복음을 전해 듣고 싹도 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먹지 못하고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겉으로 볼 때 그에게는 싹도 나도 변화도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 중에도 가짜 신부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성령에 참예한바 된 자들’도 가짜일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참예한’‘메토코스’는 ‘외적인 동반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후서 1장 4절의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코이노노스’와는 완전히 다른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에 참예한바 된 자’라는 구절의 의미는 성령으로 난 자들도 아니고 성령께서 그들의 속에서 역사하심으로 그들이 성령의 전이 된 적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 말은 단순히 외적으로 성령의 초자연적인 작용과 나타남 들의 유익에 참여한 적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때 그 곳이 진동했지요? 그 때 거기 있던 사람들이 모두 거듭난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니지요. 그렇지만 그 곳에 있던 사람 모두가 외적인 성령의 초자연 적인 작용을 경험을 했습니다. 예수께서 문둥병자 10명을 고쳐 주셨지만 그 중에 한 사람 만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모두 성령의 초자연적인 작용을 경험했습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신비한 외적 경험 등을 한 것이 신앙의 내용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적을 경험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중에도 얼마든지 가짜 신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 본’ 사람들 중에도 가짜 신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 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렘29:10)

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그렇게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은 자들입니다.

 

(렘15:16)

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그런데 여기도 역시 ‘맛보다, 규오마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맛만 보기 때문에 절대 자라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달게 듣기도 합니다.

 

(막6:20)

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말씀을 달게 듣는다고 해서 모두다 진짜 신부가 아닙니다.

다섯 번째로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도 역시 가짜 신부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세‘란 구약의 예언을 따라 오신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통해서 도래된 새로운 세대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오히려 죽이려 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요11:47)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이 설명을 들으시면서 혹 이런 질문이 드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성경의 수신자는 교회 아닌가? 그렇다면 굳이 가짜들을 밝혀내어 경고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어차피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도 없는데’ 맞습니다. 히브리서의 이 부분은 분명 교회에게 준 경고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는 목회 적 관점에서 쓰인 서신입니다. 히브리서는 성도를 향한 목회자의 절절한 사랑의 권고입니다. 따라서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겁을 주기도 하고 아주 달콤하게 사랑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는 이렇게 교회에게 ‘너희들도 가짜일지 모른다.’는 회개의 권고가 여러 번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교에서 개종한 히브리 사람들은 그러한 권고를 들으면서 ‘내가 지금 올바로 신앙하고 있는 가’를 깊이 돌아보았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고집불통이요 복음에 대해 무지했던 유대인들이 지금 위에 열거한 것처럼 변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엄청난 변화입니까? 기독교 진리를 전해 듣고 비췸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기적과 나타남‘들을 직접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작은 싹이 나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이 모두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히브리서의 기술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기독교에 귀의했다고 하고, 그러한 변화된 삶을 살던 사람들 중에서도 중도에 타락을 하여 아예 복음의 외인이 되어 버린 가짜 신부들이 아주 많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부분을 읽으시면서 똑같은 회개의 권고를 받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분명 우리 성도들은 그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반드시 세우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가짜 신부들과 우리의 삶이 뭔가 다른 것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게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 것을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제시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뭐였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보호를 위해 쌓아놓았던 육신의 습관들이 제거되고, 그렇게 점차 자기가 포기됨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비워지고 그렇게 자기가 비워짐으로 말미암아 내 이웃이 나 때문에 덕을 보고 하나님이 나의 비워짐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바로 옳은 행실이라고 했지요. 그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맺어 가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옳은 행실이 맺혀지기 위해서는 자꾸 우리가 포기되고 우리가 비워져야 하는데 그렇게 우리가 포기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여전히 불가능하고 추악한 인간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실은 우리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보려 애쓰는 가운데 우리에게 알아지는 것이라 했지요? 노력도 안 해보고 자기가 불가능한 존재인 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의 불가능함을 발견하게 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뒤로 숨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각이 우리를 비워 내고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는 늘 실패하고 실수만 하는 것 같았는데 어느 날 내 안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조금 비춰 집니다. 난 열심히 사랑해 본 결과 절대로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자기가 포기되니 어느 날 내 안에 사랑이라는 것이 조금 나타납니다. 난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존재인 줄 알고 포기했는데 어느 날 내 안에서 용서라는 것이 나옵니다. 그 때 우리는 놀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나를 바꿔 가시는구나, 하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 것은 분명 내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지만 그 것은 내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옳은 행실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것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옳은 행실에 대한 열망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에 대한 자각과 반성은 전혀 없고 그저 자기 자랑과 세상에서의 성공에만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그가 엄청난 체험을 하고 바른 복음을 공부하고 열심을 부린다 해도 그는 가짜 신부인 것입니다. 지금 확인하십시오. 여러분의 목표지점이 어디입니까? 여러분은 진짜 그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오매불망 기다리시며 스스로 준비하고 계신 분들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