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계시록

(81)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II)     (계19:10)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22:12

(81)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II)

 

 

(계19:10)

19:10 그 때에 내가 그에게 경배드리려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렸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러지 말아라, 나도 예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네 1)동료들 가운데 하나요, 너와 같은 종이다. 경배는 하나님께 드려라. 2)예수의 증언은 곧 예언의 영이다." 그, '형제들',또는 '예수께 대한 증언은

 

 

우리는 지난주에 어떻게 교회 안에서 직분 자들이나 재력이 있는 사람들, 혹은 과분한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버금가는 존경과 대우를 받을 수 있는가에 관해 간단하게 살펴  보았습니다. 그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우리 신분에 대한 자각의 결여이고, 두 번째가 상급에 관한 오해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기신 ‘은사나 상황, 역할’등을 통해 그 속에서 우리에게 똑같은 상, 영생을 주시기 위해 지금도 일을 하고 계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공로로만 구원을 받게 되는 우리는 절대 하나님 앞에서 차별적인 상을 요구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러한 차별적인 상급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은혜의 복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무지의 소치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만 주어지는 것이 구원이라면 왜 사도들은 그들의 서신 서에서 그렇게 구구 절절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라, 방탕한 삶을 살지 말아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귀신들의 믿음이다’라고 목소리 높여 외쳤을까요?

그리고 왜 저는 거의 매 주일마다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인다운 삶,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에 대해 목에 핏대를 세우며 강요를 할까요?

먼저 여러분이 확인해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들이나 제가 여러분에게 요구하고 있는 삶은 단순히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깨끗한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뒤에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것이 그러한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바른 삶이라면 우리는 바리새인들을 절대 정죄 할 수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잘못한 게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 잘 섬겨 보겠다고 목숨 걸고 율법 지킨 것 외에 그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지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 사두개인 들을 가리켜 ‘독사의 자식,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도 자주 말씀하시니까 그냥 ‘그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인 가보다‘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치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쟁의 대상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지요? 예수님은 인간들의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바른 삶과 싸우다 가신 것입니다.

안식일 잘 지키고 있는 사람들한테 시비 거시고, 금식하고 기도하는 사람들한테 시비 거시고, 윤리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간음한 여자 재판하는 사람들한테 시비 거시다가 결국 그들에게 맞아 죽은 꼴이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잘 섬기고 올바르게 살고자 열심히 노력했던 그 사람들이 뭘 그렇게 잘 못했기에 예수님은 사사건건 그들에게 시비를 거시고 그들을 저주하셨을까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은 단순히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치 도덕적인 삶과 윤리적인 삶이 마지막 종말을 준비하는 삶인 것처럼 이율배반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눅21:34)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스스로 조심하며 방탕함과 술 취함에 빠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했던 바리새인들과는 전쟁을 선포하시고 제자들에게는 술 취함과 방탕함을 경고하십니다. 이걸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주님은 비록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의 모양은 같아 보이더라도 주님을 알지 못하고 은혜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아담 적 육신들이 만들어 내는 ‘자기 공로, 자기 자랑, 자기 의’의 발현으로 나오는 도덕적 행위들은 심판의 대상으로 던지시고, 십자가의 의미와 은혜의 복음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복음을 근거로 하여 그러한 도덕법들을 다시 요구  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명령을 내리시는 것은 우리를 그 명령을 실천할 수 있는 자로 이미 만들어 놓으셨다는 반증이라는 아주 기쁜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들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실 때는 단순하게 어떤 행위를 제한적이며 법적인 차원에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받은 자들의 신분이 담고 있는 내용을 그 백성들에게 알려 주시는 after service의 차원에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삼성 냉장고를 하나 구입하셨습니다. 그 냉장고를 살 때 삼성 측에서 여러분에게 ‘저희는 after service가 철저합니다. 그 냉장고가 고장 나지 않도록 저희가 늘 그 상태를 체크하고 문제점이 있으면 고쳐 놓겠습니다. 당신은 그 냉장고를 영원히 새 것인 상태로 쓰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약속을 했다고 해 보세요. 그런데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세 달이 갔는데도 삼성 측에서 전혀 들여다보지도 않고 연락도 없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삼성측이 물건 팔아먹으려고 거짓말 한 거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명령을 하시고 억제조항을 계속 나열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새롭게 만드신 걸작품은 그런 고장이나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점검해 주시고 닦아주시고 조여 주시는 'after service'인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내 명령을 지켜서 ‘냉장고’를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되어 작동 중인 냉장고는 어떻게 해야 냉장고답게 쓸 수 있는지, 그리고 고장 나지 않게 쓸 수 있는지 after service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가 조금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누가 복음 19장에 보면 므나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기 위해 먼 길을 떠나면서 종들 10명을 불러 한 므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명령하기를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고 했습니다. 종들은 그 주인의 명령에 따라 그 돈으로 장사를 했습니다. 얼마 후 그 주인이 왕위를 받아서 돌아왔을 때 그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긴 사람은 열 고을을 주었고,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남긴 사람은 다섯 고을을 주었고 주인의 명령을 어기고 한 므나를 그냥 묻어 두었던 종은 밖으로 내 쳐졌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비유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잘 발휘해서 열심을 내어 업적을 쌓으면 쌓은 만큼 하나님이 그에 상응하는 상을 주신다.’라고 곡해를 합니다. 아닙니다. 그 므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입니다. 그 비유가 어떻게 시작이 됩니까?

 

(눅19:11)

11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여기에 왜 주님께서 그 비유를 말씀하셨는지 이유가 나오지요? 제자들이 조바심과 초조함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곧 이루어질 이 땅의 지상 천국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설명해 주신 것이 바로 이 므나의 비유인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왕위를 받으러 떠나는 귀인이 누구입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종들에게 므나를 똑같이 한 개씩 주시고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므나로 무언가를 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므나는 떠나신 주인과 남아 있는 종들을 연결해 주는 유일한 접촉점인 것입니다. 주인은 내 곁에 없지만, 보이지 않는 그 주인과 내가 상관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 주인이 남긴 므나로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으로 그 주인과 나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지요. 그 주인은 지금 내 곁에 없지만 내가 그 주인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난 여전히 그 주인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그 주인의 종’이라는 관계가 성립되는 겁니다. 그 차원에서 우리에게 명령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주인이 주고 간 므나는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 뭡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그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순종하는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내가 왕위를 받아서 다시 오마‘ 하고 떠나신,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분의 명령에 순종하며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가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삶으로 해서 나는 지금도 그 분과 관계있는, 그 분의 통치를 받고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상이 뭐라고 했습니까? “영생”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백성에게서는 순종이 나오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똑같이 한 므나를 받았는데 순종이 나오지 않은 사람은 밖으로 내쳐졌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순종이 동반되지 않는 사람은 가짜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열 므나를 남긴 사람은 열 고을을 주고 다섯 므나를 남긴 사람은 다섯 고을을 주었느냐?

그건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으로 잘 살아낸 만큼 천국에서 차등적인 상급을 주시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해서 열심히 살아 낸 만큼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쁨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참고 열심히 살아 내면 하나님이 그에 상응하는 상을 주신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살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순종이라는 것 자체에서 천국의 맛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오는 기쁨과 안식을 맛보게 되면 우리는 하지 말라고 해도 더 열심을 내고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하라, 하지 마라‘의 명령을 통해서 우리의 신분을 계속해서 자각시켜 주시는 것이고 그러한 명령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천국의 맛을 보여주시는 것이고 그러한 명령들을 통해서 우리의 열심까지 격발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그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의 열심을 격발 시킬 수밖에 없는지에 관해 사도 바울을 예로 들어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빌3:12-15)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잘 보시면 사도 바울이 12절에서는 ‘난 온전히 이룬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고 15절을 에서는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이라고 자신을 온전히 이룬 사람으로 표현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잘 아는 already ... not yet의 교리를 아주 확실하게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모순처럼 보이는 ‘난 온전히 이룬 사람이다’ 와 ‘난 온전히 이룬 사람이 아니다’가 ‘어떻게 한 paragraph 안에서 조화가 되는가?‘ 그 모순을 해결하는 열쇠가 바로 그 paragraph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12절 후반부에서 그는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라고 말하는데 그 말은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되었으므로 난 그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예수께 잡힌바 되자 그에게서 열심이 나오게 되는데 그 열심은 뒤에 있는 것들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좇아가는 열심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6절을 보시면 12절과 14절에 쓰인 ‘좇아가노라’와 똑같은 단어가 나옵니다.

 

(빌3:6)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에서의 ‘핍박하고’‘디오코’라는 단어와 조금 전에 읽었던 ‘앞에 있는 것을 좇아가노라‘에서의 ‘좇아가노라’가 같은 단어입니다. 바울은 똑같은 ‘디오코’라는 단어를 써서 지금 두 가지를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둘 다 열심을 내어 좇아가는 것인데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열심은 그게 교회의 핍박으로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 분께 잡힌 후의 열심은 앞에 것을 좇아가는 열심으로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전자의 열심이 바리새인들의 열심이고 후자의 열심이 성도의 열심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뒤에 있는 것들이 뭐길래 그 뒤에 있는 것들에서 나오는 열심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결과를 가져오는가? 이 뒤에 있는 것들 (헬라어로는 '오피소')에 관해 예수님께서도 똑같은 단어를 써서 언급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눅9:59-62)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좇겠다고 하는 사람이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하자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아주 매몰찬 말씀을 하십니다. 가족하고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다는 데 왜 그걸 못하게 하십니까?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구약의 열왕기 서에서 인용을 하신 것입니다.

 

(왕상19:19-21)

19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 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20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21       엘리사가 저를 떠나 돌아가서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더라

 

여기서는 엘리사가 엘리야를 좇겠다고 하면서 가족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하자 엘리야가 허락합니다. 누가 복음과는 반대의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뒤로 돌아가서 무엇을 하고 옵니까? 소를 잡고 쟁기를 불태워서 그 것을 백성들에게 먹이고 엘리야를 좇습니다. 고대 시대에 소와 쟁기는 ‘그 사람의 삶의 근거, 그 사람의 생존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 자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 자기를 상징하는 소를 태워서 죽인 것입니다. 그게 뭘 상징하는 것입니까?

‘구약의 제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상징하는 제물을 태우고 따라야 하는 ’제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구약의 제사나 율법은 인간의 행위, 다른 말로 하늘에 닿으려는 인간 측에서의 열심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인간의 행위, 제사나 율법으로는 절대 구원을 얻을 수 없다’ 는 것이 구약의 결론입니다. 구약은 ‘그래서 예수가 필요하다’라는 당위성을 도출해 내기 위한 책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예수님을 좇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엘리사가 뒤로 돌아가서 한 일을 허락지 않으셨을까요? 이제는 제물이 죽는 것이 아니라 참 제물이신 예수께서 죽으실 것이기 때문에 ‘너도 죽을 필요 없고 너를 상징하는 제사도 필요 없다’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내가 죽을 거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는 구약, 즉 우리의 행위가 필요 없어졌다는 은혜의 복음을 우리는 그 장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인용해서 쓰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뒤에 있는 것, 구약 적인 것들, 나의 행위를 의지하는 것들, 내가 나를 붙잡고 내 안에서 쏟아 내놓았던 열심들, 이런 것들은 다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똑같은 열심으로 좇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잊어버리겠다고 하는 그 뒤에 있는 것들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서두에서 이렇게 기술합니다.

 

(빌3:4-7)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바울이 잊어버리겠다고 한 것이 뭡니까? 바로 육체를 신뢰하던 것, 내게 유익하던 것들이었습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뭡니까? 5,6절에 나오지요? ‘혈연, 가문, 학벌, 율법적인 면에서의 의로운 행위들‘ 다른 말로 인간 쪽에서 인간적인 노력으로 달성해 낼 수 있는 업적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는 것, 내게 유익하던 것’이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열심으로 얻어내었던 것들, 혹은 그 것들을 얻어내기 위해 쏟아내었던 열심 그 자체를 바울은 잊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왜? 이제 난 온전해 졌으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분의 공로로 온전해 졌으니까?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닙니다.

 

그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는 동시에 앞에 있는 것을 열심히 좇아간다고 말합니다. ‘앞에 있는 것‘에서의 ’앞에‘’엠프로스덴‘은 시간적인 의미보다는 장소적 의미가 더 강한 단어입니다. 그리고 ’앞에 있는 것‘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는 그 구절은 ’지금 내 앞에 있는 것들을 계속해서 열심히 잡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미래의 어느 날 잡을 것이 아니라 ’지금 장소 적으로 내 앞에 있는 것들을 잡고 또 잡고 또 잡고 계속해서 열심히 잡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복수인 것입니다.

 

정리를 해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 잡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전에, 자신을 붙들고 자신의 의지와 노력을 발휘해서 하나님의 환심을 사보겠다는 열심을 다 버렸습니다. 그게 구약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나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구나.‘ 로 간 것이 아니라 ’그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붙들고,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나를 잡고 계속 달리고 계시기에 나도 그 예수 그리스도를 열심히 좇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스데반을 죽일 때, 내가 교회를 핍박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그 것을 다 보고 계셨으면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나를 붙잡고 달리고 계신데 내가 어찌 망연히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있겠는가?’ 이게 바로 성도의 자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어떠한 열심으로 끌고 가고 계신지를 분명히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기 전보다 더한 열심이 (디오코) 그에게서 격발 되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여러분 거룩을 향해 정진합시다. 훈련합시다. 노력 합시다’라고 외치는 것은 여러분에게 그 거룩을 연습해서 만들어 내시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미 영적으로 온전해지셨습니다. 그러나 그 온전함을 우리는 우리의 육신과 시간 속에서 경험해 나가야 합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명령을 듣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명령을 통해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어떠한 존재로 화하게 될 것인지를 배우고 익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반드시 그러한 존재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인간의 생애와 역사 속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예전에 일본 장교 중 한 사람이 전쟁이 끝난 지도 모르고 20여 년이 넘게 정글에 숨어서 살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전쟁이 끝났는데 전쟁이 끝난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수 십 년을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와 행복을 자신의 무지 때문에 다 놓쳐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어떠한 신분으로 변했는지 제발 알고 그 신분에 맞게 살아라.' 그게 성경에 나오는 ‘하라’의 명령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거기에 어울리는, 거기에 걸 맞는 삶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엉뚱한 삶 사시지 마시고 그 삶을 사세요. 그래야 여러분은 이 땅에 침노해 들어와 있는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 속에서 나오는 자유 함을 아십니까? 거기에서 맛보게 되는 그 기쁨을 아세요? 그게 바로 상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며 산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기쁨이 영원히 지속되는 곳이 바로 천국이니까요. 그게 이미 이 땅에 침투해 있는 영생입니다.

분명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의 에녹과 엘리야는 하나님께 들려 하늘나라로 옮겨졌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에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침투한 것입니다. 이 복된 소식에 감격스럽지 않으세요?

 

(마11:12)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여기서 ‘침노를 당한다.‘라고 번역이 된 ‘비아조’를 개역 성경에서는 수동태로 번역을 했지만 이 헬라어 시제는 수동태와 능동태 두 가지 모두 번역이 가능한 시제입니다. 이 구절은 능동태로의 번역이 훨씬 문맥에 맞는 구절입니다. 정말 천국은 침노하는 자에게 침노를 당합니까? 열심히 노력하는 자에게 천국의 문이 열리나요? 아니지요? 이 구절은

‘천국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침노하여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빼앗는다.‘라는 구절인 것입니다. 그 증거가 변화 산 사건입니다. 분명 그 산은 이 땅에 속한 산이었는데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가 천국의 옷을 입고 나타난 것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그 천국의 사람들을 보고 너무나 황홀해서 ‘우리 내려가지 말고 여기다 초막 셋을 짓고 살자‘고 말을 했을 정도로 그 모습은 아름다웠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으로, 다른 말로 천국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을 걸어 다니셨던 것을 아십니까? 이 땅의 음식을 잡수시기도 했다는 것을 아세요?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초월이 이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으로 침투해 들어 온 것입니다. 헤겔이 ’영원이 제한된 시간 속으로 침투해 있다‘라고 말을 했지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정확하게 본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이 제한된 시간 속에서 저 초월의 천국을 경험할 수 있다고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믿음으로 수행하는 그 속에서 여러분은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고 저 초월의 천국에 끈을 댈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전히 육신의 습관을 좇아 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자체가 고통이요, 괴로움이요, 사망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너희들 옛 습관을 좇아 살면 안 돼’라고 반복해서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삿2:2-3)

2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죄 자체가 우리를 옭아매는 올무가 되고 우리의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려야 하는 행복과 기쁨과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똑바로 살아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롬8:13)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여기서 바울이 말한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는 말씀은 영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죄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신앙 활 속에서 일어나는 죽음과 방불한 ‘힘없음’‘무기력함’ ‘자포자기’‘불안함’‘두려움’ 등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면서 기쁨을, 안식을, 평안을 수호하는 것입니다.

가끔은 실패해도 상관없습니다. 실수해도 본전입니다. 우리는 원래 그런 인간들이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자꾸 내 자아가 해체되고 내가 포기되고 비워지면서 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맺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이 조금씩 나타나게 될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 주님의 열심을 보면서 내가 또 열심히 그 주님의 열심을 좇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뒤엣것은 잊어버리고 앞엣것을 좇아가노라”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하려고 했던 의로운 행위들과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의로운 삶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바리새 적인 의로운 행위는 ‘내가 열심히 탑을 쌓아 하나님께로 올라가 보겠다는 자기 의’인 것이고 우리가 열심을 내어 행하는 의로운 행위는 나의 신분을 자각하고 나에게 그 엄청난 은혜를 허락하신 분과 내가 관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접촉점으로서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열심 속에서 우리에게 천국의 맛까지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영생의 맛을 직접 본 사람이 그 맛을 더 보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겠습니까?

더 열심을 내겠지요. 더 열심히 사랑하고 더 열심히 용서하고 더 열심히 인내하고 더 열심히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겠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나의 공력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서 이루어 가고 계신 ‘하나님의 열심‘의 산물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기에 우리는 그러한 열심과 투쟁 속에서도 전혀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적인 열심으로 도덕적, 윤리적 깨끗한 삶과 종교 행위와 봉사와 헌신을 내 놓는 사람들은 어딜 가나 자랑이 앞서는 것이 당연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로 인식하고 그 은혜에 근거해서 열심을 부리는 사람들에게서는 자랑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맞다 면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그 열심을 끌어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겉으로 나타나는 업적이나 현상으로 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한다거나 겉으로 나타나는 열심만으로 어떤 사람을 나와 차등 있는 상급을 받을 사람으로 숭앙하는 것은  잘 못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직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만 경배하세요. 여러분이 지금 판단의 잣대로 쓰고 계신 것은 다 눈에 보이는 것들 아닙니까? 그건 다 불 타 버릴 것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 앞에서 평등한 형제요 자매들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