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계시록

(83)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이름     (계19:11-12)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22:14

(83)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이름

 

 

(계19:11-12)

19:11 나는 또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흰 말이 있었는데, '신실하신 분', '참되신 분'이라는 이름을 가지신 분이 그 위에 타고 계셨습니다. 그는 의로 심판하시고 싸우시는 분입니다.

19:12 그의 눈은 불꽃과 같고, 머리에는 많은 관을 썼는데, 그분 밖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이 그의 몸에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요한 계시록 19장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요한 계시록 19장은 천상의 찬송과 어린양의 혼인 잔치 그리고 11절 이하의 최후의 심판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러니까 이 19장은 최종적인 역사의 종말과 혼인 잔치로 비유되는 언약의 완성을 그리고 있는 부분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11절 12절을 중심으로 그 확실한 언약의 완성 지점을 향해 가고 있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요한 계시록을 공부하면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며 이 우주의 역사는 그 언약의 성취를 향해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제한된 시각으로 볼 때 지금 우주는 거대한 cosmic struggle로 진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것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창세전에 택하신 자신의 자녀들과 영원히 사시고자 하는 우리 주님의 작정과 예정과 섭리 속에 움직여지고 있는 것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목표를 위해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셨고 그 우주를 경륜해 가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우주를 공부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우주는 마치 거대한 생물체처럼 서로 유기적으로 묶여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질량과 거리, 만유인력 이러한 여러 가지 역학 관계에 의해 이 우주는 서로 서로 의존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태양이 지금의 자리에서 1m라도 움직이면 그 역학 관계는 모두 깨어지고 맙니다. 행성이 하나라도 그 궤도를 이탈하며 전체 우주가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태양은 지금 그 자리에 그 질량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들도 정확한 거리를, 정확한 각도로 돌아야 만 이 우주는 질서 속에서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그렇게 살아있는 것처럼 섬세하고 치밀한 역학 관계에 의해 누군가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 우주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고 있는 이 지구를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 그렇게 유기적으로 하나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우리를 흥분케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면서 따뜻한 태양의 빛과 서늘한 그늘을 적절한 시간동안 골고루 받아,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그 거대한 우주를 인력으로, 거리로, 질량으로, 수많은 역학 관계로 지금 붙들고 계신 것입니다. 이 역사 속에 오고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온 우주는 그 하나님의 백성들을 품고 있는 지구의 생존을 위해 그렇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할 수 있도록 마치 성실하고 훌륭한 기술자가 24시간 지키며 조종하고 있는 움직이는 기계처럼 인간들의 생존을 위해 열심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지구는 48km 두께의 지표면과 3200km의 멘틀, 그리고 외부 코어와 내부 코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부 코어는 아주 단단한 금속으로 되어 있고 외부 코어는 수천 도의 액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외부 코어가 아주 빠른 속도로 회전을 하고 있어요. 거기서 자기장이 발생합니다. 그 자기장이 지구를 감싸고 있는데 그 자기장이 태양풍과 우주로부터의 방사능 진입을 막아 주고 있습니다. 만일에 그 외부 코어가 회전을 멈추면 이 지구는 태양풍을 정면으로 맞아 곧 숯덩이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새들은 마치 자석처럼 그 자기장에 의해 길을 찾습니다. 철새들은 그 머릿속에 철이 들어 있어서 수백, 수천km나 되는 거리를 자기장을 따라 이동하는 것입니다. 새들이 기억력이 좋아서 그 길을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지구는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생물체처럼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열심히 일을 하며 우리 인간들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모든 것들이 그냥 우연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이 세밀하고 치밀하기까지 한 우주가 빅뱅에 의해 저절로 우연에 의해 탄생했으며 우연히 움직이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그 믿음이 오히려 신기합니다. 이 우주는 알면 알수록 어떤 창조자가 완벽한 설계도를 가지고 완벽한 계획 속에서 만들어 내었고, 운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합니다. 그 창조자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떤 목적을 위해 이 우주를 창조하셨고 그 목적이 완성될 때까지 열심히 그 우주를 운행하며 붙들고 계신 것입니다. 그 목적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살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 우주가 인간의 생존을 위해 그렇게 바삐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온 우주에 하나님의 손길이 그렇게 충만하게 섭리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그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부속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가시적 세계관에 의해 이 세상을 하나님과 마귀의 대결구도로 보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러한 생각은 어서 빨리 버리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표를 위해 마귀를 잠시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분만이 승리자이며 그 분만이 유일한 왕이십니다.

그래서 12절에 우리 주님이 ‘많은 면류관’을 쓰고 계신 장면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면류관은 승리의 상징입니다. 여기서 면류관이라고 변역이 된 ‘디아데마타’는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인 ‘스테파노스’와는 달리 왕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 공부한 12장과 13장에서 용과 짐승도 일곱 면류관과 열 면류관을 쓰고 있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일곱 개 열 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많은’ 면류관을 쓰고 계십니다. 거기서 ‘많은’이라고 번역이 된 ‘폴루스’는 ‘어떤 것과 비교하여 그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은 잠시 세상 권세를 쥐고 있는 세상 왕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짜 만 왕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이 가시적인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세상 왕이 잠시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건 진짜 승리가 아닌 것입니다. 승리는 오직 주의 것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를, 그 분이 이미 승리하셨으며, 지금 승리를 하고 계시고, 언젠가 완전한 가시적인 승리를 이끌어내실 것이라는 것을 그 ‘많은 면류관’이라는 말이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완성되고야 말 하나님의 목적이 뭡니까? 도대체 어떤 목적이기에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쉬지 않으시고 열심히 일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사62:1-5)

1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2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3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4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마치 계시록 19장을 요약해 놓은 것 같지 않으세요? 면류관, 혼인 잔치, 새 이름.

우리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위해, 쉬지 않고 지금도 열심히 우주와 역사를 경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많은 면류관의 주인답게 반드시 승리하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열심을 알고 있는 우리가 지금 우리의 인생 속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 계시록 19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네 가지로 표기가 됩니다.

첫 번째 이름이 ‘충신과 진실’이고 두 번째 이름이 우리가 오늘 공부할 12절에 있는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13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이고 네 번째가 16절에 나오는 ‘만 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는 이름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우리 주님의 이름인 ‘충신과 진실’에 관해 공부했습니다. 우리는 그 충신과 진실이라는 이름 속에서 성부 하나님의 언약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을 통해 신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분문 12절에 보면 조금 이상한 이름이 나옵니다. 그 분의 이름은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이 계시록 19장에서만 네 가지의 주의 이름을 보았습니다.

‘충신과 진실, 하나님의 말씀, 만왕의 왕, 만주의 주’ 그런데 뜬금없이 그 분의 이름은 자기밖에 아는 이가 없다고 합니다. 벌써 다 말해 주고서 그 분의 이름은 자기밖에 아는 이가 없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단순히 호칭의 개념이 아닌 그 존재의 내용이라고 했지요?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노아 모두 다 그 이름의 내용을 삶으로 살다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이름을 자기밖에 아는 이가 없다, 이름이 비밀이다‘라는 말은 그 존재의 내용이나 그 존재가 하는 일이 외부에 밝혀지지 않았다는 말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조금 이해하기 쉽게 예를 하나 들어 드리겠습니다.

 

(출6:3-7)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여호와’로 알리지 않으셨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정말 그 족장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몰랐을까요?

 

(창4:26)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미 셋의 아들 에노스 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나오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족장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몰랐다고 합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이미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르고 그 하나님이 전능한 하나님인 줄은 알았지만, 그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가진 구속사 안에서의 특성, 즉  언약과 사랑의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이 담고 계신 내용은 출애굽기에 가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그들과 함께 홍해를 건너심으로써 비로소 그들에게 경험되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전까지는 ’여호와의 이름이 비밀이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비슷한 예를 하나 더 들어드릴게요.

 

(계17:5)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여기 보시면 많은 물위에 앉은 그 음녀의 이름이 ‘비밀’이라고 나오지요? 그렇게 비밀이라고 말해놓고 바로 그 이름을 이야기해줘요. 그 이름은 ‘큰 바벨론이고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 라고 말해 줍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비밀이라는 것은 그 이름을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 그 이름이 담고 있는 그 존재의 내용을 우리가 모른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요한 계시록 19장에만도 이미 주님의 여러 가지 이름이 밝혀져 있습니다. ‘충신과 진실, 하나님의 말씀,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우리는 이 이름들을 통해서, 이 이름들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내용으로 담고 계신 것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아직 비밀인 이름이 있다는 것은 우리는 절대 우리 주님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 우주의 역사와 종말은 우리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감히 상상하거나 추측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중에 ‘자기밖에 아는 이가 없고’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은 주님이 경륜해 가시는 역사의 불가해성과 은혜의 우발 성을 나타내는 구절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건방지게 추측하거나 상상하거나, 보좌를 흔들 생각하지 말고 애시 당초 항복하고 순종하라‘라는 충고의 메시지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건방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 짤막한 이성으로 마치 하나님을 다 이해한 사람처럼 행동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소설이나, 만화나, 영화에 나오는 그런 인간과 비교해서 다른 것이라고는 힘만 센, 마징가 Z같은 하나님을 그려놓고선 ‘이게 하나님이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에 대해 너무 모르니까, 그 분이 발하시는 죄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큰 것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밀’이라는 이름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성으로는 미처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존재이시며 그러한 분이 쏟아 놓으시는 이 역사의 내용도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 분의 이름은 ‘비밀’이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미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이 제한된 시간 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밝혀 주셨습니다.

이 천지는 어떻게 창조가 되었는지, 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택해졌는지, 왜 예수는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오셨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 분은 왜 죽으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부활하셨으며 그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예전에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던,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비밀인  많은 것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하늘의 비밀은 아주 일부분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언제 오실 지,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는 그 곳에서 무엇을 하며 살게 될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막연히 추측만 할뿐이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이 산적해 있는 이 역사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이나, 기대나, 욕망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목표를 향해 하나님의 방법으로 달리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가시적인 역사조차도 예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이름 중의 하나가 ‘자기밖에 아는 이가 없고’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일과 그 일을 이루시는 방법과 또 하나님 언약의 완성의 시기가 우리의 힘이나 노력, 염원과 전혀 관계가 없고, 우리가 감히 추측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만의 영역이라면 그 ‘자기밖에 아는 이가 없는 이름’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도저히 불가해한, 그리고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는 지혜와 능력으로 그 분의 언약을 이루고 계신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항복, 충성, 순종이지요. 그 분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충성의 내용이 뭡니까? 선교? 예배당 건축? 헌금? 구제? 봉사? 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2차 적인 것들입니다. 1차 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뭡니까? 그 1차 적인 일을 통해 2차 적인 것들이 열매로 맺히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1차 적으로 먼저 해야 할 것을 주님은 성경을 통해 명확하게 제시해 놓으셨습니다. ‘너희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은 주 너의 하나님과 그 분이 보내신 그 분의 아들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의 그 믿음이 너희를 하나님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자로 성숙시켜 갈 거야, 그러니 나를 알아라, 힘써 나를 알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우리가 순종하며 1차 적으로 이 땅에서 해 나가야 할 일인 것입니다. (제가 지금 요한복음, 마태복음, 호세아서를 이 한 문장에 다 넣은 것입니다) 믿음, 거룩에로의 성숙, 하나님에 관한 지식.

우리는 그 비밀이신 하나님 앞에서 두 손 두발 다 들고 항복하며 저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유일한 할 일인 것입니다. 나에게 허락 될 그 영생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던져 순종하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라는 사람들은, 솔직히 그 생명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들이 없습니다.

우리의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생존의 문제에만 꽁꽁 묶여 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 여러분의 생존이나 생계에 도움을 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생존의 문제에 도움을 주시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아, 그래도 인간에게 생존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으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생존의 문제는, 여러분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영생)을 얻기 위해 필요한 시간 동안,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환경일 뿐이지, 그 생존의 문제가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라고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말은 너희가 너희의 생존에 집중을 하게 되면 생명의 문제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존의 문제가 아닌 생명의 문제에 집중을 하게 되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사건이나 상황, 환경, 조건 등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처한 그 상황이, 그 조건이 자기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데 있어서 가장 최선의 상황이며 조건이기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외부적인 조건이나 환경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도 바울처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내가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 일체 비결을 배웠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생명에 집중하는 사람이며 그 사람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시도를 합니다. ‘내가 이만큼 헌신하고, 내가 이만큼 헌금하고, 내가 이만큼 봉사했으니 나에게 이 땅에서 보상을 해 달라‘ 는 거래 관계 속으로 하나님을 끌어내립니다.

여러분,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라는 것은 조물주가 주는 것만 먹고, 조물주가 주는 것만 입고, 조물주가 살아있으라고 할 때까지만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그 비밀이라는 이름을 갖고 계신 하나님께서 어떤 이유가 있으시니까 이런 상황을 허락 하셨겠지‘ 하고 그 분이 주신 모든 것에 만족하며 순종하며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어떤 것 때문에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화려한 보석으로 꾸며진 천국도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천국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 드리고 있으시다면 여러분은 아직 복음을 모르는 분이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는 여러분이 기대하는 천국의 모양이 있으실 겁니다. 그런데 만일 천국에 갔는데 여러분이 기대하는 그런 곳이 아니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것에 관심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나’에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기대했던 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을 만나고 싶어서 그 분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라면 초막이나 궁궐이나 아무 상관없습니다.’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열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주인이 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타락한 인간들은 언제 어디서나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천국에서도 자기가 주인공일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그 예수님의 나라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모아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땅에서 왜 나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에 관해 배우고 경험하고 체득하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 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만나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집중시킵니다. 자기가 원하는 생존의 도구들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졸라대는 신앙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내 던지고 오직 그 분께만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를 아시지요? 우리 주님께서 ‘천국은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간 열 처녀다’라고 천국을 소개하십니다. ’천국은 금 대문, 보석 기둥, 비단 지붕으로 만들어진 그런 아름다운 곳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천국은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간 열 처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천국이라는 것은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비유를 보면서 종종 오해하는 것이 신랑을 기다리던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자다가 봉변을 당했고, 슬기로운 처녀 다섯은 졸림에도 불구하고 눈을 부릅뜨고 신랑을 기다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25:5)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어떠세요? 정말 다섯은 자고 다섯은 깨어 있었나요? 아니오. 열 명 다 잤습니다. 그럼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는 어디에서 갈리는 것입니까? 슬기로운 처녀는 등불과 기름을 함께 가져갔고, 어리석은 처녀는 등불만을 가지고 갔다는 것입니다.

기름을 안 가져 간 것이 왜 어리석은 행동입니까? 만일 신랑이 일찍 왔다면 그 무거운 기름을  가져간 처녀들이 오히려 어리석은 처녀들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왜 주님은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처녀들보고 어리석은 처녀들이라고 하십니까?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처녀들은 기회주의 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어리석은 처녀들은 ‘만일 기름을 준비했는데 신랑이 일찍 오면 그 기름은 무용지물이 되고 마니까, 다른 말로 내가 손해 보게 되니까, 내가 그 무거운 것을 날라야 하고 또 쓰지도 못할 기름을 사야 하니까, 나중에 부족하면 그 때 가서 준비하고 지금은 나 편한 대로 살자‘라는 아주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세상 적인 사고방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은, 모두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을 주님은 ’어리석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이렇게 소홀한지 아세요? 그 것은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리를 듣긴 들었지만 언제 오실지 모르니까,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하고 지금은 나의 생존에 유익이 되는, 현재 나에게 시급한 세상일을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기회주의 적인 발상이지요.

지금 내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지금 당장 나에게 유익 되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거기다가 지금 생각에는, 예수님은 나의 인생 동안에는 절대 안 오실 것 같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동기부여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세상일을 열심히 하면 당장 나에게 유익이 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사업, 공부, 여행, 오락, 음주 가무‘ 이 모든 것들이 ’현재의 나‘에게 행복과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들입니다.  거기에 반해 ’기도, 예배, 설교, 신자다운 삶’ 이런 것들이 지금 당장 나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다주나요? 아니오. 그 처녀들에게 기름이 무거운 짐이 되었던 것처럼, 그런 것들은 유익을 가져다주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조금만 있다가 하지 뭐, 벌써부터 준비하는 것은 나에게 손해야‘ 이게 바로 어리석은 다섯 처녀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나중에 열심을 내어 해도 되는 것이지만 돈은 지금 못 벌면 안 되는데, 예배는 나중에 드려도 되지만 이번 주에 안 놀러 가면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이 한 조각 날아가 버리는데, 그러니까 나중에도 할 수 있는 것은 그 때가서 하고 지금 당장 나를 행복하게 해 주고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하자’이게 어리석은 처녀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어떻습니까? 합리적인 세상 관점으로 볼 때에는 참 미련한 여자들이지요? 신랑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그 무거운 기름통을 들고 갑니다. 나중에 모자라면 얼른 가서 사오면 되는데 미련하게 처음부터 그 무거운 기름통을 들고 갑니다. 지금 들고 갑니다.

그 여자들은 ‘주님이 언제오시든 나의 삶의 모든 관심은 그 주님밖에 없어, 혹시 기름이 떨어져서 주님이 나를 못 찾으면 안 되니까 기름을 충분히 준비해 두자’ 하고 그의 모든 관심을 신랑을 기다리는 것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왜? 그 기름통과 등불이 주님이 나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좌표이기 때문에 그 처녀들에게는 온통 그 등불에 관심이 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오직 신랑밖에 없습니다. 그 슬기로운 처녀들은 이 세상 누구보다 그 신랑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의 평판이나 유익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신랑을 만나야 하겠다는 열망만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 어떤 것보다 그 사랑하는 신랑을 기다리는 일이 가장 행복한 것이기에 처음부터 기름을 잔뜩 준비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런 그림을 그려보세요. 그 신랑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삶이 그 신랑이 오는 그날까지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부가 종국에 그 신랑을 만나게 되는 날에 맛보게 되는 행복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 현재의 날들도 역시 그날의 행복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어떤 것에도 한 눈 팔지 않고 기쁨으로 신랑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그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다림 속에서 이미 신랑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오지는 안았지만 ‘온다.‘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벌써 좋아 죽겠는 것입니다. 저희 아이들이 일 년에 한 번씩 한국에 계신 할아버님 댁에 갑니다. 저희 아버님은 우리 아이들이 한국에 간다는 소식을 듣는 그 날부터 잠을 설치신답니다. 너무 좋아서. 아이들은 아직 안 왔지만 그 아이들은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왔을 때처럼 가슴이 설레고, 그 설레는 가슴은 아이들이 오는 날까지 지속된다는 것이지요. 슬기로운 처녀들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지금 일어난 일로 앞당겨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그 기다림 자체가 행복이며 기쁨인 것입니다. 혹자들이 예수 님 십자가 곁에 달렸다가 막판 뒤집기로 구원을 받은 강도를 부러워합니다. 여러분도 그러십니까?

그럼 제가 이런 질문을 드려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그 강도와 죽도록 매 맞고 배신당하고 순교 당한 사도 바울하고 누가 더 낫습니까? 사도 바울이 훨씬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 그 분과 교제하며, 또 그 분을 기다리며 사는 그 삶이 바로 천국이고 행복이며 신자의 기쁨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꾸 기독교를 세상 적인 나의 유익을 얻어내는 무당종교로만 생각하니까, 사도 바울은 불행한 사람이고 강도는 땡잡은 사람이라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달란트의 비유도 바로 이러한 합리적인 세상 사고방식으로 기독교를 해석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인 것입니다. 이 달란트의 비유는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열심히 교회에 헌신 봉사해서 주님께 칭찬 받는 사람이 되자‘라는 내용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주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이 없을 때에도 똑같이 열심히 일을 해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남겼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 달란트를 묻어 두었습니다. 종들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 이익이 자기에게로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은 주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자기에게 이익이 떨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주인이 있을 때처럼 최선을 다해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이 떠나자 주인의 일은 묻어 두고 자기의 편안함과 유익을 위해 일을 했습니다. 주인은 그 종들에게 ‘주인이 없는데도 주인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 사람이 누구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누가 얼마나 많이 남겼는가를 계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주님이 아직 오시지 않으셨음에도 주님이 오신 것처럼, 주님의 일을 내 일로 여기고, 마치 주님이 내 곁에 계신 것처럼 열심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비유인 것입니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본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신랑이 오시지 않았음에도 신랑이 오실 그 때와 시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매시간을 신랑이 오신 것처럼 준비하는 여자들이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자격을 받게 되는 것처럼

주님이 아직 오시지 않았지만 매일 매일을 주님이 계신 것처럼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이 바로 천국에 합당한 사람들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천국에 가실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근거를 어디다 두고 계십니까?

교회를 다닌다는 것 때문입니까?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고 구제를 잘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럼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증거는 뭡니까? ‘나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요.’

혹시 그 확신이 자기 최면이나 오래 쌓아 온 자기 고집은 아닙니까?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나는 천국 갈 수 있다’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들처럼 주인이 안 계신데도, 아직 신랑이 오시지 않으셨는데도 주인이 함께 계신 것처럼, 신랑이 오신 것처럼 오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바로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천국은 언젠가, 장차 내가 들어가게 될 어떤 공간 적인 곳으로만 여기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미리 지금부터 주님과 함께 천국에 있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착하고 충성된 종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 드렸듯이 여러분은 예수에, 신앙생활에 미치셔야 합니다.

그리고 신랑이신 예수, 나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기고 가신 그 예수가 진짜 내 안에 계심을 믿으시고 천국 백성답게, 신랑을 만난 신부처럼, 주인을 만난 종들처럼 그렇게 오늘을 준비하며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비밀이라는 이름을 가지신 그 상상 할 수도 없이 엄청난 우리 주님께 항복하고 그 분께 순종하며, 그 분께 충성하며 사는 천국 백성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오늘을 준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