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계시록

(85)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계19:15-16)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22:15

(85)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계19:15-16)

19:15 그의 입에서 날카로운 칼이 나오는데, 그는 그것으로 모든 민족을 치실 것입니다. 그는 친히 쇠지팡이를 가지고 모든 민족을 3)다스리실 것이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맹렬하신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실 것입니다. 또는 '돌볼'

19:16 그의 옷과 넓적다리에는 '왕들의 왕', '군주들의 군주'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종말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첫 번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었고, 두 번째 이름은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이름이었고 세 번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지막 이름, 만왕의 왕, 만주의 주에 관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15절의 내용은 우리가 이미 다 공부한 내용이기 때문에 넘어가겠습니다.

16절을 보시면 종말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만 왕의 왕, 만 주의 주’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쓰인 ‘바실류스, 큐리오스’는 ‘통치자, 다스리는 자,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지난 수요 성경 공부 때 에베소서 전체를 review 해 드렸지요. 그 때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 뭐라고 했습니까?

 

(엡1:10)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그리스도의 나라 안으로 들어와 그 안에서 통일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 가시적으로 완성이 되는 장면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은 창세전에 성자 하나님과의 언약으로부터 시작이 되었고 성자 하나님은 이 땅에 인간 예수로 오셔서 그 언약을 지켜내셨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이미 완성이 된 것입니다.

 

(엡1:20-22)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이렇게 하나님은 이미 만물을 우리 주님의 발아래 복종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내용처럼 반드시 이 시간이라는 역사 속에서도 완성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계획을 완성하시기 위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 완벽하게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미리 보여 주고 있지요?

 

(창1:26-28)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이 창세기 1장 28절을 단순히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문화 명령이라고만 알고 있지요? 그 래서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나 헤르만 도예베르트가 이 명령을 근거 삼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문화의 다양한 영역으로 뛰어들어 세상의 왜곡된 문화를 개혁하고 기독교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 그렇게 살다가 갔습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단순히 아담에게 주신 문화명령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국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미리 예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이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무산이 되었지만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이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될 것임을 성경 전체가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창3:15)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은 이미 죄라는 매개체로 하나가 되어 버린 여자와 뱀을 원수로 만들어 버리시겠다고 공언하십니다. 그 말은 둘 중의 하나는 여자의 후손을 통해 내 편으로 만드시겠다는 복된 은혜 언약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창세기 1장 28절과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창세기 3장 15절을 연결시켜 보세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들을 품에 품고 만물을 영원히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하실 거라는 것을 미리 계획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계획이 2,000년 전 십자가에서 영적으로 이미 완성이 되었고,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 계시록 19장에서 가시적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품에 안고 ‘만 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언약을 완성시키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와 함께 왕 노릇 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실패한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품에 안고 십자가 안에서 완성해 내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왕 노릇은 종말에 가서 가시적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은 지금도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와 있으며 우리는 이 역사와 시간 속에서, 이 물질 세계 속에서 이미 그 왕 노릇을 하고 있어야 함을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골1:13-15)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여기 나오지요?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미 그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라고 확언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을 우리가 성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실이 이미 믿음으로 확인된 사람들은 이 땅에서 다가오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을 미리 살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지요? 이미 나라가 옮겨졌으니까.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의 왕 노릇은 누차 설명해 드렸듯이 내가 어떤 존재 위에 군림하는, 이 땅의 아담들이 만들어 놓은 왕의 개념과 완전히 반대의 왕 노릇이라고 했지요? 어떤 것이 하늘의 왕 노릇입니까?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왕 노릇을 하다가 가셨습니까?

 

(빌2:6-11)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께서 자기를 비우시고 종의 모습으로 원수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은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일회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의 삶 자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담고 있는 내용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바로 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와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자리에 올라앉아 있는 ’나‘라는 거짓된 자아를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나‘ 이외의 다른 이들을 공격하고 통제했던 그 육적인 ’나‘를 해체시키고, 다른 이들을 위해 내가 희생하여 그 상대방을 살려내고, 그 상대방의 유익을 위한 삶을 살게 만드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유쾌한 종노릇이 바로 ’하늘 나라의 왕 노릇‘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를 비워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꿇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왕 노릇입니다. 요한복음 13장으로 가볼까요? 하늘의 왕께서 이 땅에서 어떻게 왕 노릇을 하다가 가셨는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요13:4-5,13-15)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 모습이 바로 히브리 종의 모습, 이러한 일은 노예의 일 중에서도 아주 치욕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같은 히브리 노예들에게는 이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이 말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우리가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로 그렇게 원수의 발까지도 성심 성의껏 닦아주시는, 다른 이를 섬기는 종의 모습이 바로 하늘의 왕이 담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직접 그러한 하늘 왕의 모습을 본보기로 보여주시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분의 나라에 들어가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 할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너희도 바로 이 종의 삶을 살아야 하며, 반드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누누이 말씀하셨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라는 말씀을 실제 그림으로 보여주신 사건이 바로 종의 모습을 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아니 원수인 유다의 발까지도 씻기신 사건인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곧 자기(自己) 부인(否認)인 것입니다. 내가 낮아져서 다른 이들이 유익을 보는 것입니다. 그 것을 이해한 사도들은 그 주님의 말씀대로 다른 이들을 섬기는 종으로서의 삶을 열심히 살아 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내용을 자신들의 삶으로 살아낸 것입니다.

 

(고후4:5)

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그렇지요? 이렇게 예수께서 나의 주인,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을 한다는 말은, 곧 그 예수를 위해 내가 다른 이들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라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종’이 되는 연습을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종, 내 이웃을 섬기는 내 이웃의 종‘ 말입니다. ‘종’이 뭡니까? 자기주장을 꺾고 주인의 말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바로 ‘종‘아닙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롬1:1)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빌1:1)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약1:1)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유1:1)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보세요. 모든 사도들이 전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둘로스 예수 크리스토’ 이 땅에서 나의 주장, 나의 고집, 나의 힘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내 자아가 죽고 새로운 자아, 예수에게 다스림을 받는,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늘나라 삶의 원리에 순종하는, 그 새로운 피조물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 바로 신앙인들의 삶인 것입니다.

 

고대시대의 노예들은 모두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일반 백성이나 귀족, 왕족들이었습니다.

그렇게 귀하게 살던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자기 나라에서 살던 ‘습관, 성격, 자유민의 정신‘이런 것들을 박살 내 버리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전문적으로 노예를 길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둘라 고게오‘였습니다. 그 단어가 고린도 전서에 나옵니다.

 

(고전9:27)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여기서 ‘쳐서 복종하게 하다’라는 단어가 바로 ‘둘라 고게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 위해 ‘둘라 고게오’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부자가 되거나 가난하게 되는 것, 병에 걸리거나 병이 낫는 것, 유명해 지거나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이런 것은 신앙생활과 전혀 함수 관계가 없는 것들입니다. 신앙생활의 열매는 ‘여러분의 육이, 그 거짓 자아가 얼마나 죽었느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변해있는가가 바로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사랑과 화평과 온유와 절제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이 다 뭡니까? 모두 다 하나님과 내 이웃을 섬기는 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입으로 자기 안에서는 그러한 열매가 분명히 나타났다고 수차례 언급하고 있습니다.

 

(갈6:17)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여기서 ‘예수의 흔적’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원문은 ‘스티그마타 투 큐리오 예수’입니다.

‘나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라는 뜻입니다.

로마시대 이전, 그러니까 헬라나 그 이전의 폴리스 시대 때는 노예들의 인권이 상당히 보장이 되었었습니다. 여러분이 ‘노예‘ 하면 무조건 사탕수수 밭이나 목화밭에서 죽어라고 일만 하는 쿤타킨테를 떠올리시는데 당시 고대 시대의 노예는 그렇게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음악 하는 사람들, 미술 하는 사람들, 연극인, 이런 예술 하는 사람들과 의사, 상담 가, 가정교사’ 이런 사람들이 모두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인권을 존중해 주었는가 하면 당시 헬라의 어떤 주인이 쓴 일기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 집 노예들이 너무 말을 듣지 않는다. 밭을 좀 갈라고 매일같이 잔소리를 해도 전혀 듣지를 않는다. 어제도 나 혼자 밭을 갈았다. 오늘도 우리 노예들은 놀고 나 혼자 밭 갈러 나간다.’ 얼마나 속이 터졌겠어요?

그런데 로마시대로 접어들면서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가 확립이 되고 노예는 그 막강한 제국을 떠받치는 중요한 노동력이 되었기 때문에 노예들을 귀족들과 확실하게 구분시켜서 노예들에게는 주인의 소유를 표시하는 문신을 새겼습니다. 바로 그 문신이 ‘스티그마’입니다. 그러니까 ‘스티그마타 투 큐리오 예수‘라는 말은 내 몸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인의 소유된 그 분의 종‘이라는 흔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몸에 있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흔적, 다른 말로 인두로 지진 듯이 확연한 문신’이 무엇일까요?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령의 열매’이고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온유와 절제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들이 그에게 ‘인두로 지진 흔적’처럼 확연하게 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고백처럼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매일 매일 죽었습니다. ‘난 매일 죽노라’

그의 옛 자아가 매일같이 죽고 그의 안에 뚫고 들어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누가 봐도 확연하게 그의 삶 속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 내 이웃의 유익과 성장을 위해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을 신학에서는 ‘기독자의 자유’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전에는 마귀의 손  아귀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진심으로 나 이외의 존재, 즉 하나님과 내 이웃을 위해 살 수 없는 존재였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어서 자유롭게 나 이외의 존재를 섬기며, 그들의 유익을 위해 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바로 ‘기독자의 자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 그렇게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시고 가셨는데 왜 그러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 이렇게 드뭅니까?

오늘날의 기독교는 오히려 이 육적인 ‘나’를 펄펄 뛰며 살아나게 만들어 주는 이상한 잡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온통 ‘나’뿐입니다. ‘나의 구원, 나의 행복, 나의 감격, 나의 부유함, 나의 유명세, 내 병의 치유’ 여기에 어디 아무 대가없이 나를 죽여 다른 이의 유익을 추구하는 종의 모습과 섬김의 모습이 있습니까?

교회는 바로 그 기독자의 자유를 훈련하고 연습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내가 옛 자아의 성품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건’ 이러한 것들을 경험케 하시면서 나를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미국의 제 2차 영적 대 각성 운동 때 훌륭한 설교자였던 제임스 브라운 목사님은 자타가 공인하는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얼마나 술을 많이 마셨는지 젊은 나이에 대 소변을 못 가리는 처지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도 그렇게 망가진 자기의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어느 날 자살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 날도 어김없이 술에 몹시 취해서 자살할 장소를 물색하던 중에 어떤 교회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침 문이 열려있고 몇 사람이 옹기종기 앉아서 찬송을 하고 있었답니다. 이 술주정뱅이는 너무나 힘이 들어서 그 교회에 들어가서 조금 쉬다가 갈 양으로 맨 뒷자리에 가서 앉았답니다.

그 분은 오랜 세월 대 소변도 못 가리고 거리에서 부랑자로 살았기 때문에 몸에서는 아주 고약한 악취까지 풍기고 있었고 거기다가 지독한 술 냄새까지 뱉어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내 그 작은 예배당 안은 그 사람의 악취로 가득 차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 곁에 앉아있던 어떤 남자 분이 그 사람 손을 꼭 잡아 주었답니다. 예배가 끝날 때까지 그 남자 분은 이 악취 풍기는 술주정뱅이의 손을 꼭 붙들고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하고, 말씀을 들었답니다. 예배가 끝나자 강대상에서 설교를 하던 목사님이 내려와서 그 악취 나는 술주정뱅이를 꼭 안아 주었답니다.

제임스 브라운 목사님께서 그 때 일을 이렇게 회고 하셨습니다.

‘만일 내가 그 예배당에 들어가 앉았을 때 내 곁에 앉아있던 그 남자가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코를 막고 다른 자리로 옮겨갔더라면 난 그 길로 그 예배당을 뛰쳐나와 어딘가 외진 골목을 찾아 자살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계속해서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그 더러운 ’나‘를 위해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았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뭡니까? 교회는 여러분이 사랑해 주고 섬겨주어야 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인 내가 내 이웃의 종이 되어 진정한 섬김의 도를 훈련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교회 안에서 험담과 분열과 시기와 질투가 난무합니까?

험담과 분열과 시기와 질투는 아직도 내 안에 그 옛 자아인 ‘나’가 시퍼렇게 살아서 내가 욕하고 험담하는 사람들을 내 아래로 몰아넣고 짓밟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밟아서 내가 높아지려는 아주 악질적인 아담들의 고질병인 것입니다.

 

교회는 내가 죽어서 다른 이들이 유익을 보는 천국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열심히 그들의 진가를 발휘해 내는 곳입니다. 다른 이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스티그마타 투 큐리오 예수’ ‘예수의 흔적’을 드러내는 연습을 하는 곳이 교회 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경을 많이 아는 것도 자랑이 되고, 돈이 많은 것도 자랑이 되고, 봉사를 많이 한 것도 자랑이 되고, 선교를 갔다 온 것이 자랑이 됩니까?

 

우리는 설사 다른 사람의 흠을 보게 된다 하더라도 그들의 흠을 바라보며 내 속에는 혹시 저러한 흠이 없는가를 살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도 저러한 흠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을 텐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렇게 거룩한 일에 힘을 쓰는 성도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가.‘라고 감사의 고백을 하며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수의 심장으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 요 몇 주간 계속해서 술을 드시고 오시는 분이 계십니다. 알콜 중독이세요. 여기서 그 분 이름 아는 분계십니까? 왜 지금껏 그 분 이름을 모르세요?

‘나는 그런 알콜 중독자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교회에 술을 마시고 와?‘

혹시 그런 생각들을 하고 계시지는 않으세요? 여러분 진짜 자신 있으세요?

여러분은 다른 어떤 중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우신 가요? 정말 여러분은 어떤 것에도 중독되어져 있지 않으세요? 혹시 돈에 중독되어 있지 않으세요? 먹 거리에 중독되어 있지 않으십니까? 커피에 중독되어 있지 않으세요? 남 욕하는 데 중독되어 있지 않으십니까? 우리 주님은 형제를 향해 ‘라가’라 하는 자를 ‘살인자’라고 말씀하셨는데, 알콜에 중독되어 있는 것과 그렇게 남 욕하는 데 중독되어 있는 사람과 누가 더 나쁜 인간입니까? 걸핏하면 남 험담이나 하고 욕이나 하는 사람은 성경에 의하면 살인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가리켜 ‘당신은 중독자야, 패배자야, 와서 밥이나 축내는 골칫덩어리야’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라 하는 곳이 언젠 가부터 자기 공동체에 이익이 안 되는 것들을 쓰레기 취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과 긍휼과 온유는 자기와 비슷한 수준의,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자기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것들은 전부 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건 기독교 아닙니다. 그건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호혜(互惠) 성’이라는 것입니다.

경제학자 Robert Frank와 Vernon smith가 ‘최종제안 흥정게임’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을 공개적으로 택하고 A라는 사람에게 1,000불을 줍니다. 그리고 B라는 사람과 흥정해서 그에게 줄만큼 주고 나머지는 A더러 가지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A와 B가 흥정을 해서 정확하게 500불씩 나누어 가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게임 규칙을 조금 바꾸어서 A와B가 서로 신분 확인을 할 수 없게 하고 익명성을 보장해 주자 A는 B에게 한 푼도 안 주더라는 것이지요.

인간은 자기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리고 앞으로도 전혀 이익관계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 확인이 되면 다른 이들에게 전혀 이타적인 행위를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Vernon smith는 인간이란 선천적으로 공평 관념을 존중하거나 선행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미래에 돌아 올 좋은 평판과 이익을 위해 저축을 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그의 논문에서 밝혔습니다. 신학이 몰래 감춰둔 것을 경제학자가 밝혀 낸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 바구니를 돌리거나 헌금 자 명단을 주보에 기재를 하면 헌금이 많이 나오지만 우리교회처럼 입구에 헌금 통을 두고 익명성을 보장해 주면 헌금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나에게 유익이 되면 삼키고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뱉어버리는 그런 세상 사람들하고는 달라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호혜(互惠)성’으로 움직입니까?

‘비록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이라면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기쁘게 가겠습니다. 비록 아무개 집사가 지금은 꼴도 보기 싫은 원수지만, 그리고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지만 우리 주님께서 나를 그 분의 종으로 삼으시고 내 이웃의 종이 되라 하셨기에 겉옷을 벗고 수건을 두르고 그의 발을 닦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종의 고백을 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왜? 우리 주님이 만왕의 왕이시고 만 주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

명심하시고 바로 오늘부터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종의 자리로 자리를 옮기십시오.

그들이 진정 하늘의 왕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고 그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