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계시록

(90) 백보좌 심판     (계20:7-15)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22:20

(90) 백보좌 심판

 

 

(계20:7-15)

20:7 천 년이 끝나면, 사탄은 옥에서 풀려나서,

20:8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려고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을 하려고 그들을 모을 것인데, 그들의 수는 바다의 모래와 같을 것입니다.

20:9 그들은 지면으로 올라와서, 성도들의 진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도시를 둘러쌌습니다. 그러나 3)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들을 삼켜 버렸습니다.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20:10 그들을 미혹하던 악마도 불과 유황의 바다로 던져졌는데, 그 곳은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영원히, 밤낮으로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20:11 나는 크고 흰 보좌와 거기에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마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20:12 나는 또 죽은 사람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할 것 없이, 다 그 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책들을 펴놓고, 또 다른 책 하나를 펴놓았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20:13 바다가 그 속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놓고, 사망과 4)지옥도 그 속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하데스'

20:14 그리고 사망과 5)지옥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바다가 둘째 사망입니다. 그, '하데스'

20:15 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다 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지난주에 6절까지 다 마쳤습니다. 여러분이 공부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요한계시록20장 1절에서 6절까지의 내용을 잘 해석을 해야 요한 계시록 전체의 일관성을 붙들 수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간단하게 정리를 해 드리고 오늘 본문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1절부터 6절까지의 내용만 잘 정리하고 계시면 오늘 공부할 나머지 부분은 아주 쉽습니다.

그 내용이 이러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리에서 새 생명을 얻고 살아났습니다. 성경은 그 것을 첫째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살아나는 즉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왕 노릇은 제사장으로서의 왕 노릇입니다. 그 것은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낮추고 자기의 손해를 감수하여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이웃들의 유익을 위해 섬김의 삶을 사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로 사는 것, 그 것이 바로 제사장으로서의 왕 노릇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4절에 보면 천상의 성도들이 하늘나라에서도 그렇게 보좌에 앉아 계속해서 왕이요 제사장으로 영원히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하늘나라 삶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 다른 말로 십자가의 삶은 세상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를 공박하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그 성도들의 삶이 ‘세상을 심판 한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이고, 그 러한 하늘나라의 왕 노릇과 제사장 노릇이 이 땅에서 어떻게 가시적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는 고통을 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며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않아서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면서 살게 되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 역사 속에서 하늘의 왕 노릇을 하고 있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 렇게 구원받은 성도들은 성령을 받은 직후부터 그 하늘 백성의 삶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며 마귀는 이제 그 성도들의 하늘의 왕 노릇과 제사장 노릇을 절대 막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가 천년 동안 무저갱에 갇혀있는 것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에서 제외 된 성도 이외의 나머지 사람들은 그 천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절대 다른 어떠한 방법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이게 계시록 20장 1절에서 6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천년이라는 것은 시간의 개념으로 이해하지 말고 ‘상태’의 개념으로 이해를 하자고 말씀드렸지요? 인간의 제한된 수명과 대조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진 ‘영생’이라는 ‘상태’를 ‘천년’이라고 이해를 하자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의 의식 속에 있는 개념이지 천상의 묵시 세계에는 시간의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묵시세계를 그리는 장면에서 시간으로서의 천년이 등장할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자연의 현상들을 인간이 논리적으로 구분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흐른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의 변화를 인간이 느끼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천년을 ’시간‘으로 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천년이라는 것을 시간으로 보게 되면 풀리지 않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그 천년이라는 기간이 차면 사단이 잠시 풀려난다고 했는데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이지요?

대 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사단이 잠시 풀려난다는 것을 사단의 공격이 아주 거세어진 상태라고 해석을 하시기 때문에 저도 ‘사단이 잠시 풀려난다.’는 구절의 의미를 설명하라 때 ‘사단의 공격이 아주 거세어진 상태‘라고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갔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조금 가난한 해석 같아요. 그런데 ’천년‘이라는 것을 기간으로 보지 않고 ’상태‘로 이해를 하면 그 문제가 쉽게 풀립니다.

그 리고 어떤 곳에서는 ‘사단이 결박당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어떤 곳에서는 ’사단이 왕성하게 활동하며 성도들을 이기고 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도 사단이 우리를 아무리 공격을 해도 우리의 구원은 흔들릴 수 없는 것이기에 ‘사단이 결박당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사단이 여전히 공격을 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사단이 우리를 이기고 있다’라고도 표현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 해석도 제 마음에 흡족하지가 않아요.

그런데 그 ‘천년’이라는 것을 ‘기간‘이 아닌 ‘상태’로 이해를 하게 되면 그런 문제들이 해결이 됩니다.

잘 들어보세요. 여러분 십자가는 언제 선 것입니까? 분명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는 2,000년 전에 섰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시기 2,000년 전 사람인 아브라함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창세전에 택해진 모든 인간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이루어집니다.

 

(벧전1:20)

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예수님은 창세전에 미리 준비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모든 인간은 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요8:56)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은 묵시 속에서 창세전에 이미 선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2,000년 전에 역사 속에 나타난 십자가라는 구원의 사건은 묵시 속에서의 하나님의 일하심이 인간들의 수준에 맞게 사건화 되어 설명되어진 것이지 그 때를 기점으로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시간 위에 선 것입니다. 'beyond history' 그리고 그 십자가의 효력은 창세기부터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모두에게 유효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5절부터 죄인은 자기의 노력이 아닌 ‘여인의 후손’에 의해 은혜로만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복음을 계속해서 인간들에게 던지십니다. 성령에 의해 그 복음을 이해하게 된 자들은 구원을 받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유기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효력은 언제부터 나타난 것입니까? 아담 때부터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단이 결박당한 시점을 언제로 봐야 합니까? 우리가 자꾸 그 문제를 이 인간의 의식 안에 들어 있는 ‘시간’ 속에서 해결을 하려고 하니까 갈팡질팡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 을 받았습니다. 맞지요? 그러면 사단이 아브라함을 참소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아벨, 셋, 에녹, 노아, 야곱, 이삭, 모세, 라합, 다윗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단이 그들을 참소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럼 사단은 언제 결박당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 생기던 그 때 결박당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단의 결박이라는 것을 ‘참소권의 박탈’로 본다면 사단이 참소 권을 박탈당한 그 시점은 최초의 하나님의 백성이 나타난 그 때 아닙니까. 그러니까 사실 ‘천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 존재하게 된 그 시점에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시간‘이라는 것과 경험이라는 것에 너무 얽매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시적으로 골고다에 선 2,000년 전부터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를 ‘천년’이라고 설명을 해 드렸지만 엄밀히 따지면 ‘천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 생기기 시작한 그 때에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은 이 땅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겨난 그 시점에 이미 묶여버린 것입니다. 2,000년 전에 묶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천년이 찼다’라는 말을 풀어보자고요. ‘천년’이라는 것을 ‘기간‘이 아닌 ’구원이 주어진 상태’로 보게 되면 ‘천년이 찼다‘라는 말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구원이, 영생이 완성되었다‘라는 뜻이 되지요? 

오늘 본문을 헬라어로 보면 ’천년이 찼다‘라는 구절에서 ’찼다‘라고 번역이 된 ’텔레오‘라는 헬라어 단어는 어떠한 계획을 ’완성하다, 완수하다, 결론짓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천년이 완성되다‘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원대하신 작정과 예정 속에서 그 구원이 완성된 상태를 ’천년이 찼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 가시적으로 ’천년이 차게 된 시점‘은 골고다의 십자가 사건이지만 묵시 속에서는 이미 창세전에 그 천년이 찬 것이지요.

그러면 이제 천년이 찬 후에 ‘사단이 잠시 옥에서 풀려난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자고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 생겨나기 시작한 그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단은 그들을 하나님께 참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도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단은 결박당한 채 하나님의 백성들을 참소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는데 하나님은 그 결박당한 상태인 사단을 시켜 의인들을 공격하게 만드십니다.

욥기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을 받은 욥이 사단으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사단을 누가 보내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보내십니다. 그렇지요?

하나님께서 왜 의인인 욥에게 사단을 보내셨지요? 욥이 사단의 공격으로 무엇을 배웁니까? 믿음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그리고 진정한 ‘의‘가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욥기 전체의 내용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입니다. 욥이 사단의 공격으로 그 진리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의 공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의인이 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배우고, 믿음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자신들이 얻은 구원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배우며, 악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배우는 데‘ 사용되어지는 도구요 방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아담, 아벨,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받게 되는 의인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단은 활동을 왕성하게 시작합니다. 육체적 고통을 가하기도 하고 형제들에 의해 팔리게도 하고, 대적들의 공격을 당하게도 합니다. 하나님은 사단을 시켜 의인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악인들의 악인 됨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데에, 그리고 사단의 정체를 폭로시켜 심판의 근거를 준비하시는 데에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시는 곳이나 복음이 떨어지는 곳마다 악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멀쩡한 유대 땅에 아기 예수가 태어나자 세상 왕의 정체가 발각이 되지요?

거짓과 위선으로 잘 포장되어 있던 바리새인들의 정체가 폭로되기도 합니다.

그게 바로 ‘사단이 놓였다, 사단이 풀려났다’의 의미인 것입니다.

‘의인들의 성숙과 악의 실체의 폭로‘를 목적으로 허락되는 사단의 활동, 그것이 바로 사단의 놓임인 것입니다.

 

이 내용들을 잘 연결해 보세요.

‘천년’은 ‘영생‘혹은 ’구원‘이라는 상태를 나타낸다고 했지요? 그러면 그 천년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 나타났을 때 이미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시간과 경험이라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가시적인 구속사역이 완성되었던 그 때부터 예수께서 다시 오실 그 때까지를 ‘천년’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이 땅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겨난 그 때가 바로 ‘천년’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어떤 것으로도 참소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몽땅 전가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단은 결박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탄생한 의인들에게 사단을 보내셔서 믿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누구시며, 악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시간 속에서 경험을 통해 확인시키십니다. 그리고 악의 정체를 완전히 드러내 버리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것을 ‘사단이 잠시 놓였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잠시라는 표현은 영원과 대조되는 이 땅의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하던 모든 시대에 사단은 결박당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하는 모든 시대에 사단은 잠시 풀려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잠시 놓여난 사단이 여러분을 공격할 때 여러분 안에서 발견되는 ‘악’ 때문에 여러분 자신에 대해 치를 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발견되는 ‘치사함, 더러움, 격분, 위선’

이러한 것들을 대하면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열매로 맺어놓은 것들이 얼마나 더럽고 무서운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 더러운 인간들이 토해 놓은 ‘이 세상‘ 그리고 그 더러운 세상의 발자취인 ’역사‘ 자체를 분토처럼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결박당한 순간, 놓임도 함께 받는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의 묵시는 시간을 벗어나서 읽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묵시를 시간 속에서 풀려고 하면 종종 곡해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단이 잠시 놓여 자신의 정체를 확실하게 드러내게 만드시고 성도들의 성숙을 위해 성도들을 공격하는 것을 영적 전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전쟁이 요한 계시록에 여러 모양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8절을 보시면 그 놓여난 사단이 땅의 사방 백성들을 미혹해서 곡과 마곡의 전쟁을 일으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에스겔서 38장 39장을 보면서 우리가 자세하게 공부를 했으니까 넘어가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전쟁이 먼 미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전쟁은 분명 마지막 종말 때 일어 날 전쟁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때 일어날 전쟁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계속 일어나고 있는 영적 전쟁의 내용을 마지막에 한 장면으로 보여주는 전쟁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런 전쟁이 아닌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등장하는 모든 전쟁이 다 그렇습니다. 마지막 때에 가장 치열하게 치러 질 전쟁을 예시함과 동시에 그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지금 성도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치르고 있는 작은 전쟁들도 함께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반드시 도구를 필요로 합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택함에서 제외된 세상 사람들을 미혹해서 성도들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방불한 삶을 토해내는 우리 안의 오염과 부패성을 격동시켜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공격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하게 자라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잘 배우는 데에 사용되어 질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천년이 차기까지 사단이 만국을 미혹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만국’이라고 번역이 된 ‘에뜨노스’라는 단어는 ‘유대인 이외의 이방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구절을 오늘날에 적용을 시키면 ‘하나님의 백성들 이외의 세상 사람들’이라는 뜻이 되겠지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마귀가 세상 사람들을 미혹할 필요가 없지요? 어차피 다 지옥 갈 건데 무슨 미혹이 필요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타나자 다른 말로 ‘천년이 차자’ ‘영생을 얻은 자들이 생기자’ 마귀가 세상 세력을 규합해서 성도들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게 7절과 8절입니다.

 

그리고 8절에는 마귀가 구원을 얻은 성도들을 어떻게 공격할 것인지, 그 전쟁의 내용을 추론할 수 있는 단어가 나옵니다.  8절을 보시면 그렇게 마귀에게 미혹 당한 곡과 마곡의 수가 ‘바다 모래 같이 많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바다 모래‘하면 생각나는 구절이 있지요?

 

(창22:17)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보세요. 마귀는 정확하게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대적을 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을 심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부정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 하나님의 약속이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으로 성도들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자꾸 눈에 보이는 땅의 것들을 바라보게 하고, 이 땅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분명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다 모래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하셨는데 마귀는 하나님의 대적들을 바다 모래처럼 많이 모았습니다. 그러고는 그들이 진짜 복 받은 사람들인 양 속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 언약을 대적해서 이 세상을 붙들고 계십니까? 어느 쪽 편의 바다 모래입니까?

제가 대학 부 때 주일학교 교사를 했었는데 당시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아이들에게 돌아가면서 어떤 꿈을 갖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어떤 아이는 기자가 되고 싶다고 하고 어떤 아이는 커다란 집을 살 거라고 하고, 어떤 아이는 외교관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아이에게 ‘너는 꿈이 뭐야?’하고 물었더니 ‘선생님 예수 님 다시 오시면 어차피 다 불 타버릴 세상에서 꿈은 가져서 뭐하겠습니까?’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누구한테 배웠는지 참 잘 배웠지요? 우리 반이었다니까요. 제가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극단적 역사 허무주의자가 되라고 가르친 것은 아닙니다. 학생은 학생 신분에 맞게 성실하게 하나님의 맡기 신일을 수행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 성적표도 매달 확인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쳤던 것이지요.

우리는 예수를 믿게 되면 그러한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만을 소망하며 삽니다.’ 그런데 사단은 그걸 막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9절을 보시면 그 전쟁이 미래에 있을 어떤 한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20:9)

9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우리는 이 곡과 마곡의 전쟁과 아마겟돈 전쟁, 그리고 음녀와 짐승들이 멸망하는 전쟁, 그리고 바벨론이 멸망하는 전쟁 등이 모두 같은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 전쟁이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므깃도 골짜기에서 중공군 2억과 이스라엘 군대가 싸우는 전쟁입니까?

‘지면에 널리 퍼져’입니다. 성도가 있는 모든 곳에서 그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들의 결국이 어떻게 된다고 나옵니까? 불이 내려와서 그들을 삼켜 버립니다.

그러니까 마귀와 그의 세력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숙을 위해 잠시 동안 사용되다가 결국 영원한 멸망으로 던져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 장면은 구약의 다니엘서에서 이미 그림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몽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 환상을 보았는데 커다란 신상을 보았습니다. 그 신상은 머리는 정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고 종아리는 철이고 발은 얼마는 철이고 얼마는 진흙인 신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뜨인 돌 하나가 그 신상을 박살내고 그 돌이 태산이 되어 온 세상에 가득한 그런 꿈이었습니다. 그 꿈을 다니엘이 해석을 하지요. 그 신상은 세상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 메대, 바사, 헬라, 로마와 같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신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상을 뜨인 돌,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박살을 내 버리시고 세상에 가득 차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시는 것이 그 꿈의 내용이었습니다.

바벨론, 메대, 바사, 헬라, 로마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추구하고 열망하는 것들이 바로 그러한 세상의 힘 아닙니까?

그래서 그 신상의 모습이 사람 모양인 것입니다. 그 열국을 멸하시는 장면을 연출하실 때 그냥 볼링 핀처럼 죽 세워놓고 박살을 내셔도 되는데 왜 그렇게 사람모양의 신상으로 그려 놓으셨는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마귀의 미혹에 빠져 만들어 내는 역사 전체가 바로 그렇게 박살이 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신상의 환상인 것입니다. 그 그림이 오늘 요한 계시록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과 거짓 선지자와 짐승들과 그들을 추종하던 자들이 그들의 역할을 다 마치고 불과 유황 못에 들어가 세세토록 괴로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까? 정말 무조건적인 선택입니다.

그래서 감히 그 엄청난 선물 앞에서 할 말을 잃는 것입니다. 그저 감사할 뿐이고 영원한 불 못에서 건지신 그 능력의 하나님을 찬양 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분명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인간의 행위가 적혀 있는 책들이 들려 있어 그 책에 적혀 있는 행위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름 뒤에는 나의 행위는 전부 없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가 적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심판에서 제외된 것입니다.

본문 13절을 보시면 죽은 자들이 심판을 받기 위해 모두 다 부활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계20:13)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모든 죽은 자들이 전부 살아납니다. 바다에 빠져 죽은 자, 차에 치어 죽은 자, 전쟁에서 사망한 자, 불에 타 죽은 자 모든 죽은 자들이 다 살아납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그들이 이 땅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그 순간보다 억만 배 더 무서운 형벌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그 심판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은혜로, 선물로 우리는 그 심판에서 건져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 ‘이 땅에서 어떤 선한 일을 행한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장면이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요5:29)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렇지요? 여러분 자신 있으세요?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보면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되는 자들, 즉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를 힘입어 구원을 얻게 되는데 이 땅에서의 그들의 삶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더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전가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행해야 하는 선한 일은 어떤 일일까요? 단순히 사랑하고 용서하고 인내하고 구제하는 일일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절대 바리새인들을 정죄 하실 수 없으십니다. 성경이 성도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선한 일은 바리새인들도 할 수 있었던 그런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은 아닙니다. 물론 성경이 말하는 선한 일이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착한 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럼 성도들에게 나타나야 하는 선한 일은 어떤 일일까요?

 

(행10:38)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여기 보면 예수님께서 착한 일을 행하셨다고 나오지요. 이게 선한 일과 정확히 같은 단어입니다. 잘 보시면 그 착한 일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가 그 앞에 적혀 있습니다.

뭡니까? 하나님께서 성령과 능력을 부으시니까 착한 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착한 일은 성령을 받은 자들이 성령에 의해 이끌려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시지요?

 

(요15:26)

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6:7-8)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16:13)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진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 신지를 깨닫게 하시고 죄와 의와 심판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며 장래에 이 세상이 어떻게 끝이 날 것인지를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선한 일, 착한 일은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행위에 앞서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가며, 우리 인간의 장래가 어떻게 결론지어질 것인지를 깨달아 불 타 버릴 이 세상에서 눈을 돌려 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우리에게 그 엄청난 은혜의 선물을 안겨주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 분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 다른 말로 삶의 원리를 내가 죽어 하나님과 이웃이 덕을 보는 십자가의 삶으로 바꾸어 사는 것을 착한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착한 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반드시 나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냐하면 그 착한 일은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시작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 착한 일을 하게 만들어 버리시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자신을 부인하고 세상을 부인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로 지어져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빌1:6)

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보세요. 여기도 똑같은 단어가 나옵니다. 우리 속에 착한 일을 누가 시작하셨다고 합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셨기에 우리의 삶 속에서 성령을 좇아 사는 착한 일이 반드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착한 일을 우리는 ‘새 창조의 진행’‘구원의 현재시제’ 이렇게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에 의해 이끌려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가시적인 열매로 맺히는 것이 사랑, 희락, 화평, 온유, 절제, 오래 참음 같은 것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오심으로 인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그리고 장래 일에 대해, 구원에 대해 점차 깊이 알게 됨으로 ‘나에게 그렇게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자발적으로 추구하게 되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점차적으로 저 하늘로 눈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계신 곳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이 계신 곳을 오매불망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이 너무 좋은 곳이라고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너무 좋아 그 분을 오매불망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감지하며 이곳에서도 그 천국을 조금 씩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선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이 심판을 면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천국은 혹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휘황찬란한 보배로 지어져 있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예전에 여의도에 계신 어떤 목사님께서 번역을 하시고 추천을 하셔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있습니다. 내가 가본 천국이라는 책입니다. 거기에 보면 천국에 갔더니 이 세상에서 헌금도 안 하고, 봉사도 안 하고, 전도도 별로 하지 않은 사람들은 집도 없이 집단 수용소에서 생활을 하고 이 땅에서 많은 일을 한 사람들과 많은 헌금을 한 사람들은 맨션아파트에 살더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맨션은 화장실 변기가 금으로 되어 있더랍니다. 여러분, 화장실 변기가 금으로 되어 있으면 차가워서 치질에 걸립니다.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대통령 궁도 원래 변기가 금이었는데 어떻게 데울 방법이 없어서 금도금으로 바꾸었답니다. 천국이 후세인도 만들 수 있는 그런 곳이겠습니까?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그런 것을 우리가 왜 굳이 소망해야만 합니까?

그런데 그 당시 신유은사로 한국을 주름잡던 현 모 권사님이 ‘천국에 갔더니 그 여의도에 계신 목사님은 천국에 없더라.‘ 그러는 바람에 두 분 사이가 아주 험악해 졌었지요.

이게 무슨 코미디입니까? 진짜 삼층 천에 다녀온 바울은 그 곳은 사람의 말로는 도저히 표현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땅의 것들 중에 그 천국과 비교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없기 때문에 도저히 사람의 말로 설명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천국에 갔다 왔다는 사람들은 웬 말들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다 거짓말입니다.

 

천국은 나를 그 무시무시한 백 보좌 심판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곳을 오매불망 기대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알아 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행해야 하는 선한 일이 여러분에게서 나오고 있는지 확인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