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하루가 늦을 수 있습니다.
(엡6:10-12)
10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주안에서, 그리고 그 분의 힘의 능력으로 내가 강건해지는 것’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조화가 가능한지에 관해 ‘십일조’라는 예를 가지고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 율법 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그런 상태가 된 것은 아니라고 했지요? 우리는 오히려 이제, 나를 품에 안고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라는 존재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나의 재물, 시간, 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지난주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내 놓기 위해 우리 안에서 ‘열심‘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모든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지만 우리는 이 역사와 육신 속에서 주님께서 이루신 그 것을 경험하며 이루어 가는 이 복음의 이중성이 우리에게는 이해가 됩니다.
예수를 먹고 예수를 마신 그리스도인들은 그 예수를 태워 나오는 예수라는 에너지를 가지고 그 예수라는 에너지가 한정하는 ‘행위’를 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혀 자라지 않고 성숙하지 않고 변화도 없는 그런 사람들은 아마도 아직 예수를 먹고 마시지 못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을 태워서 나오는 ‘예수’라는 에너지가 한정하는 ‘행위’가 어떤 것인지 자세히 알아야겠지요? 그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이지요.
(딤후3:10-17)
10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12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13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14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바울이 디모데를 차세대 지도자로 지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아직 지도자로서의 강건함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자기 스승인 바울은 감옥에 가 있고, 주변에 있는 바울이 세운 교회마다 분쟁이 생기고, 바울을 배반하고,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디모데는 많이 흔들렸습니다. 그 때 바울이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디모데를 훈계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꼭 붙들어라‘라고 권고를 합니다.’오직 그 길만이 네가 강건해 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시면 ‘그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케 만들어 주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데 온전케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성경을 묘사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먹고 마신 자들로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배우고 자각하는 길은 오직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롬15:4-6)
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성경)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성경을 통하여)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여기서도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제시하는데 그게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님을 본받기 위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자녀로서의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하여 성경으로부터 양식을 잘 섭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라는 양식을 잘 섭취한 후에 가만히 있으면 됩니까?
우리가 음식을 먹고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 모든 것이 ‘배 둘레 햄’이 되는 것처럼 성경이라는 양식을 먹고 그 것을 에너지 화 시켜서 나의 행위로 터져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움직임’이 필요합니다.
(유20-21)
20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21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우리는 거룩한 믿음을 터로 삼아 우리 스스로를 건축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력하라는 것이죠. 물론 우리가 건축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시는 ‘성도’라는 건축물에 내가 동역 자로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히5:11-14)
11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12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13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 하는 자들이니라
히브리 사람들 중에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한 사람들은 커다란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사고방식인 유대주의와, 그들이 믿기 시작한 기독교가 서로 충돌하면서 일어나는 혼란을 겪고 있었고, 같은 유대인들인 유대주의자들로부터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민족과 동료를 배신한 자’로 매도당했습니다. 거기다가 나라를 잃고 여러 나라에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살면서 겪는 서러움과 어려움 들이 최초의 히브리서 독자인 히브리 기독교인들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 기자가 본 히브리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이제 예수를 믿고 신자가 된 세월이 오래 되어서 그들이 믿는 것이 무엇이며, 무슨 약속을 갖고 있으며, 어떻게 그것을 성취해 나가야 하는 가를 충분히 알 만큼 되었는데도 아직도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고 있어서 그들이 마땅히 이웃들에게 신약성경이 진술하고 있는 대로 빛으로 소금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여짐으로, 저들의 선행과 저들이 가진 약속과,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습들로 인하여 복음을 증거하고, 풍성하도록 나타내야 할 일들을 못하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14절에 나옵니다. 뭡니까? ‘그들이 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성장하지 않는 자들은 ‘지각의 훈련이 없고, 그로 말미암은 연단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지각의 훈련이라는 것이 뭡니까?
이 지각의 훈련이라는 것은 ‘감성적’인 것과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우리가 아주 오해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를 너무 감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야 하고, 내가 감동 받아야 하고, 내가 즐거워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목사는 엉터리 목사가 되는 것이고 나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예배는 엉터리 예배가 되지요. 지각의 훈련이라는 것은 내 기분을 따라 행동하던 과거의 습관에서 벗어나서 내 기분이, 내 감정이 따라주지 않더라도 성경에서 배운 대로 행하는 연습을 지각의 훈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일 날 목사가 설교 시간에 ‘여러분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용서하고 사랑합시다.’ 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자기에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때 자기감정을 따라 계속해서 그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것을 감성 적 혹은 감정에 입각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글쎄 그 걸 신앙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런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 기분은 영 아니지만 내가 배운 것이 진리라는 것이 확실하므로 난 내 지각을 따라 용서하고 사랑해 봐야지‘ 이것이 ’지각의 훈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기로 작정하셨고 영적으로 우리는 이미 그러한 존재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전의 악한 습관을 자꾸 떨쳐 버리고 내 새로운 존재의 신분에 맞는 삶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연단’이라고 번역이 된 ‘굼나조’는 ‘운동, 훈련’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헬라어 원문에는 그 앞에‘헥시스‘’습관‘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에 머물지 않고 잘 자라난 그리스도인은 지각을 잘 훈련해서 습관적으로 선을 행하는 연습을 통해 성숙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일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자기를 자랑하고 싶고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끼고 싶고 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6:1-8)
1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5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이렇게 사는 것이 쉽습니까?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랑을 하고 싶어 하지요? 그렇다고 그냥 자기의 기분대로 해 버리는 것이 바로 감정을 좇아 하는 교회 생활이고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토록 명확하게 금하고 있는 것을 내가 어찌 나 좋다고 어기겠는가? 숨자‘ 이리로 가는 것을 ’지각의 훈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를 한번 보세요.
(히11:24-26)
24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어떻게 모세가 ‘바로’가 될 수 있는 신분을 포기하고, 고난 받고 처참한 위치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고난에 자기를 집어넣을 수 있었습니까? 모세는, 결국 애굽이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백성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지각의 훈련입니다. 아는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만일 모세가 그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지금 당장, 자기가 살고 있는 왕실의 화려함을 놓기가 너무 힘이 들어서, 혹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 ‘아는 것과 행위’를 전혀 연결시키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당연히 모세는 이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의 대열에서 제외되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모세를 택한 이상 모세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아는 것을 근거로 행위로 옮기는 사람으로 만들어 내고야 마셨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아울러 그렇게 지각을 훈련하고 연습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히브리서 기자는 ‘모이기를 힘쓰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히10:23-25)
23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24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가 지각을 훈련하여 사랑과 선행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기 위해서는 서로 돌아보고 서로를 격려하며 더욱 열심히 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자주 하셨을 것입니다. 나 혼자는 너무나 버겁고 힘든 짐처럼 여겨졌던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의 행위들이 주안에서 형제 자매된 사람들과 함께 모여 격려 받고, 위로 받고, 힘을 얻고 나면 ‘그래 저들도 저렇게 하는데 나라고 못 하겠나’하는 마음에 훨씬 수월해 지는 것을 누구나 느껴 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모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그렇게 지각을 훈련했고 그 훈련의 결과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행위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12:1-2)
1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런데 그 믿음의 선진들의 맨 앞에 우리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만 있으면 그 십자가라는 잔이 자기에게 비켜 가기를 원하셨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왜?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 뭔지를 아셨기에 참으신 것입니다. 절대 그분이 원하는 것을 감정적으로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각의 훈련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내가 너무나 하고 싶고, 갖고 싶고, 좇고 싶은 것을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하시고 그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흔쾌히 버릴 수 있는 훈련, 그것이 바로 지각의 훈련인 것입니다.
베드로 후서 1장으로 가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 ‘지각의 훈련‘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벧후1:3-11)
3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5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8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10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 지 아니하리라
11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여기에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주안에서 그리스도의 힘의 강력으로 강건해질 수 있는지, 어떻게 구체적으로 지각의 훈련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해 잘 나와 있지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합니다. 그게 안 되면 너희는 언제든지 실족하게 된다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고야 마시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믿음이 어떻게 우리가 주안에서 그 힘의 강력으로 강건해지는 데에, 지각의 훈련을 하는 데에 유용한 과목이 될 수 있는가?
(히11:1-3)
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우리가 세상과 싸우다보면 항상 세상은 끊임없이 ‘보이는 것이 전부다’라고 공격해 들어 옵니다. ‘돈이 전부야, 힘이 전부야, 그러니까 고지로 올라가’라는 유혹을 끊임없이 퍼 붓습니다. ‘네가 정직하게 살아서 이득 본 게 뭐 있어? 네가 거룩하게 살아서 보상을 받은 게 뭐가 있어? 그냥 보이는 것을 위해 열심히 살아’라고 끊임없이 속삭이지요.
그런데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거기에 너무나 쉽게 넘어갑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고 바라는 것들을 실상으로 보는 것인데 우리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언제든지 뒷전으로 밀어버리게 만드는 사단의 계략에 속에 우리는 너무나 쉽게,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쪽으로 넘어갑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가 신앙생활을 잘 하는 아이로 성장하기를 원하세요? 아니면 학교에서 1등 하는 자녀가 되기를 원하세요? 둘 중에 하나만 택하라면 어떤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왜 가난한 사람들이 동창회에 잘 안 나가는지 아십니까? 창피해서 안 나갑니다.
지금 사단이 주무르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최고라는 시대정신이 모든 인간들을 잠식하고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물질이 없으면 사람들은 살인이나 도둑질을 했을 때와 똑같은 죄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그건 심리학 적으로도 입증이 된 것입니다.
나는 동대문 시장에서 3,000원 주고 산, 조금만 걸어도 발 다 까지는 구두신고 발목까지 오는 1,000원 짜리 스타킹 신고, 전형적인 촌스러운 아줌마 스타일처럼 그렇게 차려입고, 만원 버스에 전철 갈아타고 땀 뻘뻘 흘린 채로 동창회에 갔는데 다른 친구들은 전부 고급 승용차에 명품 옷을 걸치고 화려한 화장으로 단장을 하고 나왔다고 해 보세요. 그 사람은 이내 마치 도둑질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자괴(自愧)감을 느끼기 시작하고 곧 심한 자책감에 빠지게 됩니다. 밥이 제대로 넘어가나요, 목에서 자꾸 걸립니다.
여러분 가난한 것이 죄입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죄인중의 괴수시게요? 가난이라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세상 권세 잡은 자, 예수께서 이 세상 신이라고 부르셨던 그 사단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이라는 것과 정 반대의 시대정신, 즉 ‘보이는 것이 전부다‘라는 시대정신으로 이 세상을 꽁꽁 묶어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재물이나 업적이나 성과를 손에 넣고 있지 못할 때 ’죄책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에요. 그 촌스러운 아주머니가 지극히 정상인 것인데, 온 세상이 다 미쳐 버렸기 때문에 그 사람이 비정상이 되고 심지어 죄책감까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자들이 시집가서 아이 낳고, 그 아이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데 나이 오십 넘어서 여전히 허리가 23인치면 그거 직무유기 한 사람입니다. 정상적인 여자가 해야 할 것을 안 한 거예요. 정상적인 아낙네들은 오십 넘어서 허리 36인치 아래로 내려 갈 수가 없어요.
애들 남긴 밥 아까워서 다 먹어야지요.
동선이 그리 길지 않은 집안 일하다보면 운동 부족 되지요? 그렇다고 찜질방엘 한번 마음 놓고 갑니까? 늘 아이와 남편 생각에 변변한 자기 옷 한 벌 못 사 입고 몸매 관리 같은 것은 꿈도 못 꾸는 것이 평범한 정상적인 한국 여성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3,000원 짜리 구두에 1,000원 짜리 살색 스타킹에 만원버스가 맞는 것이지요. 그건 자기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낸 위대한 어머니의 모습이지 절대 죄책감을 느낄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죄’가 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이 믿는 예수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뿐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강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지각의 훈련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단이 아무리 시대정신, 세상 풍조로 우리를 주눅 들게 해도 보이는 것에 연연해 하지 않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당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좀 전에 읽었던 베드로 후서 1장 9절에서 눈에 보이는 이 땅의 것만 바라보는 사람들을 뭐라고 표현합니까? ‘원시치 못하는 자들‘ ‘멀리보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눈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며 자기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자들이 바로 믿음이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요즘 ‘바다이야기‘라는 오락기계 때문에 한국이 발칵 뒤집어 졌습니다. 그 기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빠찡꼬 기계 같은 것입니다. 문어, 조개, 생선 같은 바다 고기들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막 돌아가다가 멈췄을 때, 특정한 배열을 이루면 점수를 얻거나 상품을 받는 그런 오락 게임입니다. 그러니까 작은 카지노가 골목골목 마다 오락실 간판을 걸고, 들어 선 것입니다. 신문을 보니까 어떤 사람은 교회건물을 사서 십자가만 떼고 거기다가 ’바다 이야기‘라는 간판을 걸었더라고요. 그 사진을 보는데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신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맘몬이냐? 하나님이냐? 둘 중에 하나만 택하라”
그 바다 이야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물질만을 땀 흘리지 않고 얻어내기 위한 미친 세상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죄인들은 그렇게 보이는 돈에는 열심히 배팅을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상을 위해서는 절대 배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상에 배팅을 한 사람들이고요.
그러나 그 ‘바다이야기’에 살아 있는 물고기는 없습니다. 결국 인간들은 자기 눈에 보이는, 그러나 진짜 허상인 바다 이야기 같은 것을 좇다가 결국 패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그 바다이야기가 사행성 도박 게임이라는 판결이 나자 정부가 전부 폐쇄를 해 버렸지요. 그러고 나니까 그 도박장 주인들이 줄줄이 목을 매 자살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며 사는 자들이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 보이지 않는 저 천국을 소망하며 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나의 지각을 훈련하여 그 나라를 준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그 사행성 도박인 ‘바다이야기‘와 비교해서 오늘날 ‘교회 이야기‘가 뭐가 다릅니다.
바다 이야기에 살아 있는 물고기가 없듯이 교회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이 없습니다.
둘 다 돈 놓고 돈 먹기입니다. ‘나는 당신이 나주에 나에게 주겠다고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지금 내가 배팅 하는 것에 대해서만 책임을 져 주면 되’ 이게 오늘날 교회라 간판을 붙이고 있는 무리들의 모습 아닙니까? 이 세대는 믿음을 버린 지 오래 되었습니다.
조정래씨의 장편 소설 중에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벌써 육이오 전부터 남한이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져 피 비린내 나는 홍역을 치러내는 역사 소설입니다.
거기 보면 그 좌익과 우익이 갈라져 싸우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땅 따먹기’ 지주는 소작농에게 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소작농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지주들의 땅을 빼앗으려는 싸움이 좌우익의 싸움입니다. 마르크스의 막시즘이 결국 뭡니까? 쉽게 말해서 ‘가진 놈들 땅 빼앗아서 우리 배도 좀 불리자’아닙니까?
지금 중동은 왜 그렇게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까? 결국은 땅 빼앗기, 석유 빼앗기 아닌가요?
united 93라는 911 테러를 주제로 한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를 우리 둘째 녀석과 함께 보는데 둘째 아이가 ‘아버님 저 사람들이 왜 미국 비행기를 납치했어요?“라고 물었습니다.
아홉 살짜리한테 정치 이야기를 하겠어요? 경제 이야기를 하겠어요? 어떻게 설명해 줄까? 하고 한참을 생각했는데 깊이 생각해 보니까 그 사람들이 왜 싸우는지 저도 모르겠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왜 싸우지?’ 결국 자국의 이권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그 영화에서 united 93 항공기가 추락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테러범은 테러범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고 자기들이 살기 위해 테러범들을 향해 무차별 공격을 퍼붓던 미국 승객들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면서 주기도문을 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부르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응답하신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믿음이 아닌, 보이는 것을 위해 하나님을 부르는 그런 자들의 기도는 전혀 관심 없으십니다.
두 번째로 ‘믿음에 덕을’세우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덕‘이라고 번역이 된 “아레테“는 ’남자다움‘’힘‘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에 덕을 더하라는 말은 ’혼신의 힘을 기울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계신 믿음을, 힘을 내어 휘두르라는 말입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믿음은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힘을 내어 그 믿음을 행위로 옮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가 덕에 지식을 쌓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믿음’과는 다른 지식을 말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천지 만물을 지으신 것과, 나를 사랑하는 것,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이신 것, 이 모든 것은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보지 못했고 만져보지 못한 것이지만 그 것이 나에게 ’앎’으로 담겨 있게 된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덕에 지식을‘에서의 ’지식‘은 내가 가진 모든 믿음을 세상 속에서 펼치기 위해서 알아야 되는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선교를 하기 위해 놀라운 지적 적응력을 보여 준 것이 고린도서에 나옵니다.
(고전9:19-22)
19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을 얻기 위해서 모든 모양을 취했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 후서에서 말하는 ’지식‘인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내기 위해서는 물에 뛰어드는 행위도 필요하지만 그냥 뛰어들게 되면 함께 익사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 때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요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 뒤로 접근해서 목을 잡고 뒤로 끌어내지 않고 앞으로 접근을 하면 백발백중 물에 빠진 사람한테 붙잡혀서 함께 익사를 하게 되지요. 그 지혜는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만 옵니다. 기도와 성경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식, 지혜, 요령’은 힘을 발휘해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어서 거기에 ‘힘’을 보태십시오. 행위로 옮기셔야 합니다. 그러나 무작정 힘을 싣다보면 실수를 하게 마련입니다. 거기에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겸허한 마음까지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가 그 지식에 ‘절제‘를 더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절제‘‘엥크라테이아’는 ‘자기통제’를 말합니다. 무조건 ‘난 어떤 것을 안 한다’라는 금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엥크라 테이아’는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기 스스로 그 목적에 집중하는 것,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잠언에 보면 그 절제와 상극이 되는 것이 나옵니다.
(잠16:32)
32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이 절제와 상극인 것이 바로 ‘급하게 성을 내는 것‘입니다. “분노” 분노만큼 절제에 방해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떨 때 분노합니까? 분노라는 것은 ’자존심‘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지요.
나의 위상에 흠집이 갈 때 우리는 분노합니다. 그러니까 급하게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여전히 “나”라는 옛 자아가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나와 아무 상관없는 것에는 좀처럼 분노하지 않습니다. 911테러가 일어났을 때 여러분 정말 정의심에서 분노하셨습니까? 오히려 ‘몇 명이나 죽었나?‘ 하고 호기심만 발동했었지요? 그러니까 나의 옛 자아가 죽어 가면 죽어갈수록 세상의 현상이나 공격에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없으면 내가 목숨 걸고 분노해야할 현상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믿음에 ’덕‘’힘‘이 실리고 그 ’힘‘에 ’지식‘’요령‘이 실린 후에 거기에 목표를 향해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절제’가 보태지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실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 보세요. 40일 금식 후에 사단이 광야에서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고 했을 때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그 천사를 만드신 분입니다. 그 창조주 앞에서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이 기고만장해서 까불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이 ‘이게 까불어’하시면서 주변의 모든 돌들과 산들을 전부 떡으로 만들어서 마귀에게 대항하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아래에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와 봐’라는 사람들의 놀림에 분노하셔서 진짜 내려오셨으면 어떻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구원은 물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조금 전에 히브리서에서 읽었던 것처럼 ‘ 그 앞의 즐거움을 인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던 것입니다. 그게 절제입니다. 단순히 내 기분이나 감정에 따라 섣불리 행동하지 않고 어떤 목적에 집중하는 것.
여러분 권투 선수가 시합에 나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날을 굶어야 하는지 아시죠? 그리고 얼마나 많은 훈련을 해야 하는지 아시지요? 시합 전에는 침도 제대로 못 삼킵니다.
체중 늘어날까 봐,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장에 투입된 군사라고 하면서 어떻게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자고 싶은 거 다 자면서 전투를 합니까? 우리의 목표를 향해서 절제하셔야 합니다.
캠핑 가고 싶어도 주일이 끼어 있으면 좀 참고, 데이트는 성경공부 없는 날로 미루고, 정 시간이 안 되면 잠을 좀 덜 주무세요.
여섯 번째로 절제에 ‘인내’를 쌓아야 합니다. 이 말은 ‘믿음’과 ‘덕’과 ‘지식’과 ‘절제’를 쌓는 것은 한 두 번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공부하고 싶을 때만 공부했나요? 시험, 퀴즈 이런 테스트 때문에 공부하기 싫어 죽겠는데도 억지로 공부하지요? 그게 인내입니다. 공부하고 싶을 때만 공부한 사람은 모두 대학에 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음에 우러나서 공부를 하고 싶을 때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기 싫고, 짜증날 때도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요즘 한국에 ‘몸짱’ 열풍이 불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너도나도 좋은 몸매를 만들려고 난리가 났답니다. 그런데 운동을 해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스무 명이 시작하면 열아홉 명은 중도에 그만 둡니다. 하고 싶지 않을 때 한두 번 빠지다 보면 탄력이 붙질 않습니다. 그러다 그냥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힘이 들어서 하기 싫을 때도 참고 꾸준히 하다보면 어느 때부터인가 자기 몸이 변하는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신이 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바른 삶을 열심히 경주하다 보면 재미가 붙을 때가 있습니다. 인내하시면서 가셔야 합니다.
성경 읽기, 기도하기 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기 싫어도 시간을 정해 놓고 열심히 해 보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늘 창세기 5장에서 그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앉으면 20초면 할 기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더하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 실족한다.’ 라고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대로 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믿음과 덕과 지식’이 우리의 목표와 방향성에 관한 것이라면 지금 공부한 ‘절제와 인내’는 그 추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분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한 걸음씩 걸어 가야하는 것이며, 하고 싶을 때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을 때에도 애를 쓰고 집중해야 되는 참으로 길게 보고 부단한 노력을 해야 되는 인내의 싸움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 볼 ‘경건과 형제우애와 사랑’을 거기에 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경건과 형제우애와 사랑‘은 우리가 주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져서 영적 전투를 실행하는 실제적인 방법의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경건’‘유세베이아’라는 단어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자각하고 하나님 면전에 있듯이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 이 ‘경건’‘유세베이아’가 여기에 들어갔는지 눈치 빠르신 분들은 이미 아셨을 것입니다.
그 ‘경건’‘유세베이아’라는 말은 우리가 믿음과 덕, 힘과, 지식과, 절제를 인내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수행해 갈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이 그 열심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나를 증명하기 위해 그런 열심을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의 신앙의 열심은 소 요리 문답 1번의 대답처럼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영원토록 그 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타락을 했는지 우리는 우리의 자랑을 위해서 신앙을 위장할 수 있는 파렴치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자기의 성취욕 때문에 자신과 싸웁니다. ‘난 기필코 해 내고 말 거야’ 그리고 자신의 자랑을 위해 남보다 훨씬 열심을 내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힘이 들 뿐 아니라 자기처럼 열심을 부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언제든지 정죄 합니다. 그건 성경이 요구하는 열심이 아닙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열심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열심 즉, 경건에서 나온 열심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경건에 ‘형제 우애’가 바로 붙어 있는 것입니다. ‘형제 우애’는 경쟁이나 시기나 질투에서 나오는 열심은 안 된다는 것을 주지시켜 주는 단어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눈에 보이게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사랑하는 하나님과 사랑하는 관계에 있는 내 형제 자매들과 수평적인 사랑을 갖지 못한다면 난 아직 하나님과 그 분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뭔지 잘 모르고 있다는 소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제 우애에 바로 사랑이 붙어 있습니다. 마지막 과목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형제우애와 어떻게 다릅니까?
(롬12:9-21)
9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4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16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17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하나님은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가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 본 이 엄청난 것들이 모두 우리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만드시고야 마시겠다고 이렇게 호언장담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힘을 내어, 인내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절제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일에 열심을 내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피할 수 없이 꼭 가야만 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런데 고집을 부리고 그 길을 가지 않고 있으면 우리만 손해인 것이지요. 우리가 누려야 할 마땅한 하늘의 복을 계속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언젠가는 되겠지’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아직 성경을 열심히 안 보신 겁니다.
(히4:1)
1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여기서 ‘미치지 못하다‘라고 번역이 된 ’히스테레오‘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번역을 하면 ’하루가 늦다‘라는 뜻입니다. 너희들 그렇게 자꾸 미루다 보면 ’하루가 늦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민수기 14장의 내용을 모두 품고 있는 단어입니다.
민수기 13장부터 한번 볼까요?
(민13:30-33)
30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31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에 열두 정탐 군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열 명이 하나님께서 ‘그 땅을 너희에게 주겠다.’라고 약속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가나안 땅의 아낙 자손 대장부들 앞에 서면 메뚜기 같더라, 우리는 절대 그 땅을 취할 수 없다’라고 절망적인 불신앙의 보고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온 회중이 통곡을 하면서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민14:1-4)
1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그 모습을 보고 여호수아와 갈렙이 ‘너희들은 왜 두려워하느냐? 하나님께서 분명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왜 두려워하느냐?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그 땅을 주실 것이니까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자’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두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민14:6-10)
6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7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10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보시고 이스라엘을 저주하셨습니다.
(민14:26-38)
26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27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31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32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33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34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사십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하셨다 하라
35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단정코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36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으로 모세를 원망케 한 사람
37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38그 땅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
그제 서야 이스라엘이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다음날 이스라엘이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회개를 받아주지 않으셨습니다.
(민14:39-45)
39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고하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40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산꼭대기로 올라가며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의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
41모세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치 못하리라
42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43아말렉 인과 가나안 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44그들이 그래도 산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45아말렉 인과 산지에 거하는 가나안 인이 내려와 쳐서 파하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여러분 이스라엘은 단 하루가 늦음으로 광야에서 모두 죽어야 했습니다.
만일 오늘이 여러분의 그 마지막 하루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거짓말을 합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종말은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루가 늦으므로 여러분은 여호와의 안식에 못 들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부터 시작하십시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인내를, 인내에 절제를, 절제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며 그리스도의 군사다운 전투를 오늘부터 해 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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