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에배소서

(85) 성도들이 숙지해야 할 전쟁의 원칙 (엡6:13-17)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2:52

(85) 성도들이 숙지해야 할 전쟁의 원칙

(엡6:13-17)

13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우리는 지난주에 구속사 안에서, 우리가 치러내야 할 전쟁의 기원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이 이 ‘전신 갑주를 입으라.‘는 경고의 메시지까지 어떻게 에베소서를 전개해 왔는지 에베소서 전체의 개관을 짧게 복습하고 그 전쟁에 임하는 성도들이 승리를 위해 숙지해야 할 전쟁의 원칙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에베소서는 여러분이 2년 넘게 공부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 어느 성경보다도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에 대한 깊고 풍성한 진리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분명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 서신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대해 먼저 진술을 합니다. 지금부터 에베소서 전체를 한번 복습하는 것입니다.

(엡1:9-10)

9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 뭡니까?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은 ‘우주 만물이 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다스림을 받고 그의 생명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우주와 인간이 창조된 목적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를 만드시겠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은 하늘에서는 이미 이루어졌고,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매일 암송하는 것처럼 그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것이 바로 교회의 구원으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구원받아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단지 우리 개개인의 구원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인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오는 통치권의 개념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1장 11절부터는 성도들의 구원에 대해 묘사를 함으로써 그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는가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엡1:11-14)

11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14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죠?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그 영원하신 계획 속에서 구원을 얻게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1)그 영원하신 계획에 대해 더 깊고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2)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복이 얼마나 크고 귀한 것인지를 알아야 하며, 그 전에 (3)그리스도가 누구 신지를 온전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며 기여하는 사람이 될 수 있고, 영원하신 아들을 본받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도는 15절부터 이러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엡1:15-19)

15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리고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20절부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그리스도의 지위’에 대해 설명합니다.

(엡1:20-22)

20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그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인이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을 성취하는 과정 속에서 구원받은 당사자인 교회, 바로 우리들의 신분은 어떤 것인가‘가 23절입니다.

(엡1:23)

23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가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충만하지 않으시기로 하실 만큼 귀한 신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에베소서를 읽어 가면서 꼭 확인하고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두 가지 실상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이미 점과 흠이 없는 거룩하고 완전한 교회입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완전한 것입니다. 그 것은 교회가 완전한 생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왔고 그 생명의 충만이요 확대이기 때문에 교회는 마귀가 건드리지도 못하며 따라서 절대 실패할 수 없는 항상 거룩하고 이기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 있는 교회실상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 가운데 있는 교회는 여전히 연약함과 문제를 나타내는 흠 있는 사람들의 집단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본래 흑 암의 권세 아래 있던 죄인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흠 있는 인간들의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상 교회의 외형은 항상 문제투성이 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사적 현실 교회 역시 성령께서 이루시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케 하시는 역사’를 통해 점점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되어 마침내 역사 속에서 외형적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 될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이미 거룩한 교회’‘거룩해져 가는 교회’의 두 실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왜 제가 또 이 already, not yet 의 교리를 설명해 드리는가 하면 에베소서 1장은 ‘이미 거룩한 교회,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 있는 교회’를 보여주고 있고 2장에서는 ‘거룩해져 가는 교회, 지금 역사적 현실 가운데 있는 교회’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 있는 교회와 이 역사적 현실 속에 있는 교회가 서로 다른 교회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전자는 교회의 본질적 생명을 말한 것이고 후자는 그 생명이 실제로 역사 속에서 펼쳐져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가운데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이지요? 여러분에게는 이미 완성된 완제품의 믿음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시간 속에서 그 믿음을 객관적인 믿음으로 체득해 가야 하는 것처럼 교회의 구원도 이미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이지만 시간 속에서는 그렇게 점차 성숙해 가는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3장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안에서 구원을 받고 있는 교회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그런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밀이 1절부터 10절까지입니다.

(엡3:1-10)

1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2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4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5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6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7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8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경륜이 뭡니까? 그리스도의 비밀이 뭐예요? 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유대인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여 교회를 이루게 하심으로써 아브라함으로 인해 열방이 복을 받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신들만이 선민이라고 믿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지요.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교회가 그 하나님의 경륜, 그리스도의 비밀인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는 전 열방의 구원에 ‘대상자’임과 동시에‘전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교회를 위해 기도를 합니다.

(엡3:14-19)

14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교회는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만 부르심을 입은 것이 아니라, 다른 말로 복의 수혜자일 뿐 아니라 복의 전달자로도 부름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사도가 그 교회의 ‘충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4장에서 바울은 3장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교회가 복의 수혜자요 전달자로서 제 역할을 다 하기 위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답게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거룩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인가? 그게 4장 1절에서 3절입니다.

(엡4:1-3)

1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뭡니까? 첫 번째가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고, 두 번째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 놓으신 모든 것들, 곧 성도의 연합을 힘써 지키고, 새 사람답게 세상과 육과 마귀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이퍼 칼비니스트 같은 그런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성도의 거룩한 삶은 절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거룩한 삶은 성도가 이 땅에서 천국의 행복을 맛보는 행위이기 때문에 우리의 대적이 그 삶을 결사적으로 막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또 신자로서의 올바른 삶을 힘써 지켜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요구되는 우리의 부지런함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지런함을 자신의 구원을 확인하는 확신의 방편으로 쓰시기 때문입니다.

(벧후1:10-11)

10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조건)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더욱 힘써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면)언제든지 실족치 아니하리라

11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우리 성도들은 부지런함과 힘씀을 통해 확신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 그 확신은 우리를 실족치 않게 해 주는 것이고, 그 길을 따라 우리는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히2:1)

1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하나님께 믿음을 선물로 받습니다. 물론 그 믿음은 완성된 완성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완성된 믿음, 객관적 믿음에 의해 주관적 믿음을 우리의 삶 속에서 완성시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을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고 체득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속에서는 자라가야 하는 이중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속에서 우리가 영적으로 이미 도달해 있는 그 지점까지 부지런히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 얻은 자들의 삶 속에서 자라남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거기에 부지런함힘씀인내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에베소서 4장 15절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엡4:15)

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우리 교회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이 땅에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이 땅에서 구현해 내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사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성경이 표현을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예수를 이 땅에서 구현해 내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향해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회 안에 은사와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그 내용이 4장10절부터 14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엡4:10-15)

10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이어서 4장 17절부터는 그 ‘자라남‘의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정말 자라나고 있는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가 4장 17절부터 5장 21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엡4:17-32)

17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28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5:1-21)

1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3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4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5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6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7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8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13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14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15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19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러한 삶을 열심으로 추구하며 살아내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해 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자라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서신 서들을 보면 사도들이나 서신서의 기자들이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신자의 올바른 삶에 대해 권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가 존경하는 청교도 신학자 John owen 목사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권고는 단순히 신자의 의무를 제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은 신자에게 권고를 통해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신다. 따라서 목사의 의무는 신자들에게 끊임없는 권고와 경고를 퍼부어야 한다. 만일 강대상에서 권고가 경고의 메시지가 전해지지 않는다면 그 목사는 자신의 설교를 듣고 있는 신자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며, 그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그들의 서신 서에서 쉬지 않고 성도의 바른 삶에 대해서 권고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서로서로 신자의 올바른 삶부지런함힘씀에 대해 권고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상대방이 그 권고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간의 권고는 ‘잔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는 아주 복 된 사랑의 행위인 것입니다. 제가 어떤 신비주의 적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권고라는 작용에 결단과 행위라는 반작용이 일어나도록 하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5장 22절부터 6장 9절까지에서 바울은 여러 가지 인간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되어지고 자라나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들을 대할 때 사랑과 순종으로 받들며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는 인간을 바라볼 때 그 인간 자체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과 관련 된 그 무엇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계획을 알며, 지금 이 시간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이루어 가야 하는지를 알게 되고, 그 것을 삶으로 살아내게 되면, 우리는 ‘모든 인간은 부분적으로나마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상대방을 섬기고 존중하며 사랑과 순종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섬김과 순종이 삶의 열매로 맺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엡5:22-33)

22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 지니라

25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8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31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계속해서 부모와 자식, 종과 상전의 관계를 나열하면서 그 사이에서도 섬김과 순종과 돌봄의 삶이 나와야 함을 권고합니다.

그리고 10절부터 우리가 오랜 시간 공부하고 있는 성도의 전투에 관해 기술을 하면서 결론을 맺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신자다운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성숙, 그 자체가 바로 ‘전투‘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적들이 그 삶을 결사적으로 막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자라면 우리는 반드시 그 싸움을 통과해야 하고 그 싸움을 통해 성숙하게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싸움은 승리를 얻기 위한 공격적 투쟁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승리를 지키는 방어적 투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귀를 한시적으로 풀어 놓으심으로 해서 그 마귀로 하여금 우리를 공격하게 만드십니다. 우리는 그 전투를 통해

마귀의 손아귀에서, 마귀 적인 삶의 원리로, 마귀처럼 살던,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적나라하게 까 발려진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를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내신 하나님의 크심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마지막으로 그 싸움을 잘 싸워 낼 수 있는 무기와 갑옷에 대해 친절하게 기술을 하고 에베소서를 마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 주 간에 걸쳐서 그 싸움의 내용과 우리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숙지해야 할 원칙들을 공부했습니다. 다 기억나시나요? 프란시스 쉐퍼가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사활을 좌우하는 기본 원칙들을 잘 알고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그냥 듣고 잊어버리시면 우리가 말씀을 연구하고 나누는 의미가 전혀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잘 기억하시고 그 말씀을 삶에 잘 적용시키셔야 지요.

그 간의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면, 우리 성도들이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지켜야 할 원칙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지요. 첫째가 적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차대전 중에 영국군 사령관 몽고메리 장군은 자신의 적인 독일의 롬멜 장군의 사진을 여기 저기 많이 꽃아 두고 붙여 두었다고 합니다. 몽고메리 장군은 자신이 무찔러야 할 적을 한시도 잊지 않고 언제나 염두에 두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탄의 존재와 그의 집요하고 간교한 시험, 계략에 대해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마귀는 항상 매개체를 사용해서 사람을 공격합니다. 마귀는 아무 수단이나 과정 없이 그냥 나타나고 그냥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매개체를 통해 나타나고 그 것을 통해 사람을 시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의 표현 수단인 마귀의 매개체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합니다. 마귀가 자신의 매개체로 쓰는 것은 사람과 물질적 환경입니다.

그리고 마귀의 매개체인 ‘사람‘도 둘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하나는 바로 우리 자신 안에서 다가오는 ‘육신’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바깥에서 세상의 원리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입니다.

마귀는 우리 안에서 아주 교묘하게 자신을 나타냅니다. 마귀는 마치 자기의 생각을 우리의 생각인 양 우리 안에 집어넣고, 그 것을 추구하게 함으로써 그가 우리를 속인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조종을 받게끔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권고대로 영으로 육을 지속적으로 죽여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 부인의 삶인 것입니다. 여기서의 ‘자기’는 육적인 ‘자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육적인 삶의 방식‘이 자꾸 죽어 가는 것을 성경은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육은 우리의 참 자아가 아닙니다. 우리의 육이 밖으로 표출되는 대표적인 형식이 바로 ‘자존심’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도 여전히 이 물질 적 세상에서의 ‘나’라는 존재를 ‘나‘밖의 다른 존재들보다 더 높이 올려놓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면, 그건 지금 마귀의 궤계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점점 자아를 해체하고 부인하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의존하겠다는 항복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의 육 적 자존심을 자극해서 분열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로 성도가 누려야 할 하늘의 복을 누리지 못하고 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아무런 기쁨 없이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의 매개체인 ‘사람‘의 두 번째 모습은 ’나‘의 밖에서 다가오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마귀의 지배를 받는 자들이 일구어 놓은 거대한 인격체입니다. 마귀는 세상 사람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들이 일군 문화를 통해서 우리를 속이며 시험합니다. 그 때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우리를 무장하고 있지 않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세상을 무조건 거부하고 살아서는 안 되지요. 그러한 그릇된 사고에서 수도원 운동 같은 것들이 나온 것입니다. 세상과 담을 쌓고 고립된 채 수도를 하면 거룩한 삶이 금방 올 줄 알았던 것이죠. 그러나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세상 뿐 아니라 자아 속에 들어 있는 육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놓친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러한 금욕주의적 가르침이나 영지주의 적 가르침‘귀신의 가르침’으로 불렀습니다.

물질세계는 그 자체로서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물질이나 환경을 사용하는 사람이 그 것을 하나님이 지으신 용도에 맞지 않게 오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결혼이든, 먹고 마시는 것이든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사용될 때 신성하고 아름다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딤전4:1-5)

1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3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초대 교회 사람들 중에 인간의 성적 욕구를 죄라고 여기고 결혼을 하지 않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쿰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엣센파는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성적인 욕구가 죄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에덴은 그 말 자체가 ‘에드나’를 어원으로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pleasure'라는 뜻이지요. ’pleasure'중에서도 성적인 ‘pleasure'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적인 욕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그 것을 인간이 자신의 탐욕을 위해 쓰게 될 때 ‘죄’가 되는 것이지요. 그 정욕을 없애기 위해 실제로 스스로 거세를 한 사람들이 수도사나 스님들 중에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고 다들 후회했지만...

양귀비는 중국에서 약재로 잘 쓰이던 것이었습니다. 소화나 통증 같은 것에 아주 귀하게 쓰이던 것이었는데 인간이 자신의 쾌락을 위해 양귀비를 사용하자 그게 아편이 된 것입니다.

음악, 미술, 영화 얼마나 좋은 선물입니까? 그런데 인간들이 그 아름다운 예술을 죄를 부추기고 죄를 묘사하는 것에 쓰기 시작하면서 오늘 날 예술은 ‘외설’의 선봉인 것처럼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맥주나 와인이 식수가 귀한 중동 지방이나 유럽지방에서 식욕을 돋우고 소화를 돕는 음료로 쓰일 때는 아주 유용한 것이 되지만 쾌락을 위해 주체를 못할 만큼 마시게 되면 독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물질세계 자체는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가 그 선물들을 더러운 것들로 변질시켜 버린 것이지요.

이렇게 우리가 마귀와 싸울 때에 잊지 말아야 할 첫 번째 원칙은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잘 파악하는 것입니다. 뭐였습니까? ‘나의 자아, 그리고 세상사람, 그리고 세상의 문화, 물질적 환경’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귀와 싸워 이기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원칙의 두 번째가 이 싸움의 주도자요 대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잘 따르는 것입니다.

(히4:14-16)

14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지어다

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주님은 우리의 지휘관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대장 되신 주님께 나의 전 존재를 의뢰하며 순종하며 마귀와 싸워 나가는 것입니다. 역대 하에 보면 우리가 우리의 대적들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그 전쟁의 양상이 아주 잘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대하20:15-24)

15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16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가라 저희가 시스 고개로 말미암아 올라오리니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만나려니와

17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18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19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20이에 백성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21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22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23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산 거민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거민을 멸한 후에는 저희가 피차에 살륙하였더라

24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뿐이요 하나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

모압 사람과 암몬사람 그리고 세일 산 사람들이 남 유대를 쳐들어 왔을 때 유다 왕이었던 여호사밧과 온 유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께서 모압과 암몬을 건드리지 말라고 해서 그 냥 놔두었는데 그들이 지금 우리를 쳐들어와서 우리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 어떡합니까?‘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스가랴의 아들 선지자 야하시엘을 통해 여호사밧과 유대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전쟁은 나의 것이니 너희들은 나를 믿고, 나를 의지하여 전쟁을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보시면 유대인들의 대적이 될 모압과 암몬을 하나님이 멸하지 않으시고 놔두게 하십니다. 나중에 쓰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의 대적을 하나님이 키우시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를 알게 하고,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알게 하시며, 그러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확인케 하시기 위해 대적의 공격을 묵인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그 전투를 유도하신다고 표현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대적들이 공격해 올 때, 우리는 콧대 높았던 우리의 약함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나에게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와의 전쟁에서 나의 힘만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백 전 백패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삶에 다가오는 어떤 모양의 전쟁도 모두 내 개인의 힘으로 싸우면 안 됩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의 이야기처럼 하나님께 그 모든 전쟁들을 맡기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싸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대적들에게 패해서 고통을 겪을 때마다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 대적들이 너무 강하고 이스라엘이 상대적으로 아주 약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대적들에게 무참하게 짓밟힐 때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아닌 이웃의 강대국에게 도움을 청했었다는 것을 발견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즉 불순종과 믿음 없음이 그들을 실패하게 한 원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힘이나 다른 세상 적인 해결책으로 마귀와의 전쟁을 하려고 할 때 그가 철저하게 패배하도록 놔두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닥치는 그 전쟁을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한 마디로 ‘나’를 주님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의견과, 내 고집과, 내 힘을 포기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내 전쟁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조금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어제 전도사로 사역을 하는 제 친구가 찾아왔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지금까지 고생만 죽도록 하다가 3년 전에 결혼을 했는데, 그 상대방이 너무나 사치가 심해서 하루 16시간씩 일을 해도 자기 아내의 생활비의 삼분의 일도 못 벌었답니다. 당연히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기 시작했고

전도사 일도, 신학교도 다 그만두기를 강요했답니다. 심지어 일을 하다가 갈비뼈가 부러졌는데도 당장 내일 모래 이삿짐 날라야 하는데 다쳤다고 핀잔만 주는 그런 아내였답니다.

결혼 한지 3년이 넘었는데 집안에 남편 사진 한 장이 없답니다. 그리고는 걸핏하면 이혼을 요구하는데 이번이 다섯 번째랍니다. 그래서 이혼을 결심했노라고 제게 조언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 친구 왈‘이제 하나님은 나의 일에 전혀 간섭하시지 않으시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를 전혀 들으시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이지요.

신앙마저 흔들리게 된 것입니다. 어떠세요? 분명 영적 전투입니다.

이럴 때 그 전쟁을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까?

‘내가 하루에 three job을 뛰어서라도 아내가 요구하는 생활비를 벌어야지, 그러면 아내도 나를 사랑해 주겠지’ 혹은 ‘카운셀러를 만나서 아내의 성질을 교정해 볼까?’ 아니면 ‘저 성질 나쁜 아내를 착한 아내로 교환해 버리자, 다른 말로 이혼하고 새 장가들자’ 이런 방법들이 많이 떠오르겠지요?

바벨론이 공격해 오니까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애굽에게 도움을 청했던 이스라엘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사단이 마음먹고, 믿지 않는 아내를 통해 이 사람의 신앙을 흔들고 있는데 그런 세상 적인 방법으로 그의 공격을 멈출 수 있을까요?

다른 질문을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되는 것이 그 친구가 그 영적 전투에서 승리한 모습일까요? ‘아내가 착한 여자로 변하는 것? 수입이 지금의 세배가 되어서 아내로부터 구박을 당하지 않게 되는 것?‘ 어떤 것이 그 전쟁의 해결책입니까?

여러분, 영적 전투는 물질세계의 전투가 아닙니다. 따라서 물질세계의 현상이 해결되는 것이 영적 전투의 승리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영적 전투의 승리는 영적인 영역의 일입니다.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나는 것, 이것이 바로 영적 전투의 승리입니다.

따라서 그 상태에서 그 친구가 하나님께 그의 전쟁을 맡긴다는 것은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더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아내를 착한 아내로 교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래 참아라.‘’원수를 사랑해라‘’끝까지 순종하라‘’섬겨라‘’절제해라‘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복종시켜 버리는 것이 바로 ’전쟁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써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똑같은 상황 속에서 이 사람 속에 평안과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승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이 영적 전투는 100% 내가 싸우는 것이고 100% 하나님이 해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게 주님이 앞서 싸우시는 전쟁의 승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내가 맞서서 싸우지는 않았지만 내가 주님께 그 전쟁을 맡기고 주님께 순종하게 되면 주님은 나에게 승리자만이 느낄 수 있는 평안과 기쁨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전쟁은 주님과 나와의 전쟁이고 거기에 사단은 잠시 사용될 뿐인 것이고, 우리의 승리라는 것은 그 견딜 수 없는 상황이 해결되는 것이 아닌 그 속에서의 ‘거룩한 성품의 빚어짐‘ 이것이 바로 성도의 승리인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약4:7)

7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이렇게 우리의 영적 전쟁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순복 하고 순종할 때 주님께 맡길 때 승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원칙이 전신갑주의 착용입니다. 사실 이 전신 갑주는 우리가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무기라기보다 우리가 주님께 우리를 복종시키고 주님의 뜻에 우리를 순종시킬 수 있는 방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싸움’을 마귀와 내가 씨름을 해서 내가 삼판양승을 하는 모양으로 그리시지 마시고 육신의 삶을 더 즐기려고 하는 나를 향해 주님께서 거룩의 검을 들고 돌격하시고 마귀는 그 복된 전쟁에 사용되고 있는 소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마귀는 무서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힘으로 싸울 때만 무서운 존재이지 그 전쟁의 대상이 예수님이 되어 버리면 마귀는 그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대적이 누구인지 바로 인식하셨으면, 그 전쟁이 나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주님께 순복하여 그 전쟁을 하나님께 돌려버리세요.

그래야 내가 그 고통 속에서 탈출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승리입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예수로 말미암아, 소망으로 말미암아 평안과 기쁨이 찾아오게 되는 것.

그 길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이 땅에서 문제가 해결되고 축복이 쏟아지는 그런 가시적인 승리를 생각하시는 한 여러분은 끝까지 고통 속에 시달리시게 될 것입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우리가 그 영적 전투를 잘 치러낼 수 있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전신 갑주가 무엇인지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