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에배소서

(84) 전쟁의 기원 (엡6:10-13)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2:51

(84) 전쟁의 기원

(엡6:10-13)

10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성도들이 치러내야 하는 영적 전쟁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14절부터는 우리가 입어야 할 전신 갑주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 전신 갑주에 관해 공부를 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치러야 할 그 영적 전쟁은 어떻게 기인한 것이며 그 전쟁의 내용은 무엇인가에 관해 마지막으로 잘 정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정리를 하겠습니다. 창조와 타락에서부터 어린아이들에게 story telling하는 방식으로 아주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편안하게 잘 들어보세요.

여러분도 경험상 느끼셨겠지만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어떤 철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며 고통의 향연’입니다. 참 사는 게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 보아도,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들이 곁에 있어도 그 ‘인간의 고통의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 인간이 당면하고 있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연구와 시도와 그로 말미암은 해결책들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그 고통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고통의 문제는 ‘가난’에서 오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보다 더 고통스럽게 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해도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때는 학교도 그리 많지 않았었기 때문에 제가 학교까지 가려면 어린 걸음으로 적어도 50분은 걸어야 했습니다. 학교까지 가는 길이 두 길이 있었습니다. 한 쪽 길은 좀 가파르긴 하지만 산을 넘어 판자 집들이 즐비한 가난한 동네로 질러가는 길이 있었고, 다른 한 쪽 길은 평지이긴 하지만 긴 시간 가야 하는 아주 부자 동네를 지나서 가는 길이 있었습니다.

저는 학교에 등교할 때는 산길을 이용했고, 하교할 때에는 친구들과 함께 멀긴 하지만 평지인 부촌을 통과해서 집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부자 동네와 가난한 동네를 아침저녁으로 번갈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부자 동네와 아주 가난한 극빈자들의 동네를 잘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부자 동네는 전반적으로 조용합니다. 그리고 싸움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동네는 참 소란스럽습니다. 그 가난한 와중에 아이들은 어떻게 그렇게 많이 낳았는지 그 판자촌에는 길거리에 코를 질질 흘리며 이 것 저 것 주워 먹으며 기웃거리는 아이들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그 산 동네에는 당시에 5원 짜리 극빈자 국수집이 있었는데 항상 아침부터 배고픈 아비들이 줄을 지어 국수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우곤 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동네에서는 싸움도 참 많이 일어납니다. 돈이 없어 먹을거리도 변변하게 없는 사람들이 술은 어디서 그렇게 마시고 다니는지, 술을 마시면 그냥 곱게 마십니까? 술에 취하면 꼭 싸움이 일어납니다. 가난으로 말미암은 세상을 향한 원망과 복수심이 술의 힘을 빌어 폭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그 동네에는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집니다.

그 동네는 아줌마들도 어떻게 그렇게 힘이 센지 몰라요. 옷이 다 찢어지고 머리카락이 한 웅큼 씩 빠지는데도 절대 항복하지 않습니다. 분명 가난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이 고통의 근원은 아닙니다. 가난이 고통의 근원이라면 부자는 모두 행복해야 하는데 부자라고 모두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지가 고통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육을 많이 받고 교양이 있는 사람들과 교양 교육을 받지 못해서 품위라는 것과 예의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비교해 볼 때, 분명 무지도 고통의 한 원인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무지’가 인간 고통의 근원은 아닙니다. 무지가 고통의 근원이라면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고 착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르네상스와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깨달은 것이 ‘인간은 교육을 잘 해도 역시 악하구나, 교육이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구나.’라는 것을 발견한 것 아닙니까? 실제로 요즘은 많이 배운 사람들이 더 교활하게 들키지 않고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컴퓨터를 이용해서, 혹은 엄청난 전문 지식들을 이용해서 제도나 조직의 허를 파고 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제가 2년 전에 중국에 갔을 때, 그 때는 크레딧 카드로 현금 서비스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중국은 당시만 해도 컴퓨터 전산망이 허술해서 현금인출기에서 돈이 빠지면 그게 전산망에 뜨는 것이 1분에서 2분이 걸린답니다.

그 걸 알아낸 컴퓨터 전문가들이 통장에 만원을 저금해 놓고 현금 인출기에서 돈을 다 뽑은 다음 오토바이로 1분 안에 다른 현금 인출기로 가서 또 만원을 뽑는 그런 수법으로 돈을 하도 많이 뽑아가서 현금 인출기로 현금을 인출하는 것이 전면 금지 됐었습니다. 그렇게 교육을 받은 사람이 오히려 더 악하고 교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께서 교도소 선교를 가셨다가 그 곳 재소자 중에서 아주 선량한 한 청년을 만나셨답니다. 왜 저렇게 착하고 선량한 사람이 교도소에 와 있는지 의아해서 교도관에게 그 사람의 죄 목을 물으셨다가 목사님이 깜짝 놀라셨답니다. 그 청년의 죄목이 ‘집단 살해 미수’죄였답니다. 저런 어리 숙한 사람이 어떻게 집단 살해를 시도했을까 너무 궁금해서 그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그 청년이 시골서 갓 상경해서 일자리를 얻으려 다녔는데 아무도 그 무식하고 재주 없는 시골 청년을 고용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가져 온 돈도 다 써 버리고 며칠을 굶는 지경까지 가게 되었답니다. 그러다가 어느 추운 겨울에 추위라도 피할 곳을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어떤 집 대문이 열려 있더래요. 순간 너무 배가 고프고 추웠던 그 청년은 밥이라도 한 그릇 훔쳐 먹기 위해 그 집 부엌으로 살짝 들어갔답니다. 그런데 부엌하고 바로 붙어 있는 방안에서 온 식구가 함께 자고 있더래요. 그래서 혹시 자기가 밥을 먹는 동안 누가 깨기라도 할까봐 연탄아궁이에서 연탄을 꺼내 가지고 그걸 양동이에 넣고 방 앞에서 부채로 막 부쳤답니다. 연탄가스 마시고 모두 기절하라고... 그런데 추워서 꽁꽁 얼었던 몸이 따뜻하게 풀리면서 자기가 잠이 들어 버렸답니다. 자다가 깬 그 가족들이 경찰에 신고를 해서 그 청년은 잡혔고 그 청년은 변호사도 없이 검사에게 곧이곧대로 그 집 식구들 정신을 잃게 할 목적으로 연탄불을 꺼내놓고 부채로 부쳤다고 대답을 해서 ’집단 살해 미수죄‘로 장기간 복역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범죄자라고 해도 좀 귀엽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조금만 더 똑똑했다면 그렇게 바보처럼 연탄에 부채질이나 하고 있었겠습니까? 인질극을 벌이던지 다른 방도를 택했겠지요. 오히려 무지가 큰 범죄를 막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육’이라는 것도 인간 고통과 악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이 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이 고통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병이 들었을 때나 혹은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을 때 얼마나 우리 마음이 고통스럽습니까? 분명 ‘질병’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한 원인입니다. 그러나 ‘질병’도 우리 인간 고통의 근원은 아닙니다.

만일 ‘질병’이 우리 인간이 당면하고 있는 고통의 문제의 근원이라면 건강한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가난, 무지, 질병’같은 것들은 고통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는 하지만 그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그 고통의 근원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증상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독감에 걸리면 콧물이 나고, 재채기도 나고, 몸이 으슬으슬 춥고, 뼈 마디가 쑤시고 하는 증상이 나타나는 것 같은 그런 증상들인 것입니다.

그럼 ‘독감’이 콧물과 재채기와 통증의 근원인 것처럼 ‘가난과 무지와 질병’같은 고통의 증상을 수반하는 ‘인간 고통의 근원’은 뭡니까? 바로 ‘죽음’입니다. ‘사망’

모든 인간은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 있기 때문에 그렇게 고통의 증상들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히2:15)

15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그러면 모든 인간들이 이렇게 두려워하고 있는 이 ‘죽음’이라는 질병은 어떤 병원균에 의해 전해지게 되는 것입니까? 그 죽음이라는 질병의 병원균은 “죄”입니다.

그러면 ‘죽음’이 도대체 뭐 길래 우리 인간들은 부지불식간에도 그 ‘죽음’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요? 다른 짐승들처럼 단순히 숨이 끊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하나요?

우리 인간의 ‘죽음’은 다른 짐승들의 죽음과는 판이하게 다른 ‘죽음’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짐승들은 흙으로 지어졌습니다.

(창2:19)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그런데 인간도 역시 흙으로 지어졌지만 인간에게는 뭔가 다른 것을 불어 넣어주셨는데 그 것이 바로 ‘생기’입니다.

(창2:7)

7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네솨마”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그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하이 네페쉬’‘살아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제가 교회론 9번을 설교할 때도 한번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만 히브리어 ‘네페쉬’‘생명 있는 존재, 생명이 있는 짐승’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네페쉬가 생기를 불어넣으니까 ‘살아있는 네페쉬‘’하이 네페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냥 네페쉬도 짐승들처럼 숨을 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생기‘’네솨마‘가 들어가니까 살아있는 네페쉬’하이 네페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살아있음’‘생명’은 다른 짐승들처럼 단순히 육신의 살아있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생기로 인한 살아있음’이 보태져 있는 것입니다. 그 것을 다른 말로 속사람의 생명과 겉 사람의 생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는 ‘육신의 생명, 영의 생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요.

하나님은 육체의 생명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해서 영혼의 생명이 그 육체의 생명을 주장하도록 인간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짐승들의 ‘죽음’은 육체의 생명이 끊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죽음’은 단순히 육체의 숨이 끊어진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기’로 말미암게 된 ‘영혼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육체의 생명은 살아있으되 그 영혼의 생명이 사라져 버린 사람들을 가리켜 ‘죄와 허물로 죽어 있던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엡2:1-5)

1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이렇게 영혼의 생명이 끊어진 상태를 ‘사망’이라고 하고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그 영혼의 생명이 끊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사실상 걸어 다니는 시체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 지경이 되었는가?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 후에 ‘문화 명령’‘종교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문화 명령은 창세기1장 28절에 나오지요.

(창1:27-28)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다스리라’‘라다’는 황제가 제국을 통치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만물을 그렇게 황제처럼 다스릴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 명령은 창세기 2장에 나옵니다.

(창2:15-17)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다른 것은 다 먹어도 되지만 이 선악과는 먹으면 안 된다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종교 명령이라고 부르는데, 그 선악과라는 것은 ‘인간은 모든 것을 다스리는, 만물 중에서 절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이지만 그 위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만 그 특권들을 누리며 살 수 있다’라고 하는 인간의 자기 존재의 확인 도구였습니다.

그 때는 이미 천상의 존재였던 사단이 죄를 범한 상태였습니다. 죄라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 윤리적 악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을 ‘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하시는 것을 옳다고 인정하고 하나님이 그르다고 하시는 것을 그르다고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선악과’ 아래에서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스스로 선악의 판단 자가 되어 ‘순종’을 저 버린 사건이 바로 선악과의 사건인 것입니다.

(창3:22)

22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이 말이 바로 인간들이 선악을 판단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자기들이 하나님처럼 스스로 판단 자가 되어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불순종을 ‘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이라고 하는 것은 ‘죄’의 증상입니다. 인간은 그 때까지 무죄한 자였기 때문에 악이 무엇인지 몰랐던 존재였습니다.

아직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선악과의 이름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부르셨습니다. 아직 악이 들어오기 전에 그 나무 실과를 먹으면 ‘선악’을 알게 된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나무 실과를 따먹는 그 행위로 말미암아, 그 불순종의 행위로 말미암아 악이 들어오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죄요, 그 증상을 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나의 상위권위자인 하나님이 계심을 인식하고 그 분께 순종해야 하는 인간 존재의 실존을 자각시켜 주는 복된 나무인 것입니다. 인간들은 원래 만물을 다스리면서 선악과 앞에 설 때마다, ’아 나에게는 창조주가 계시지, 나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가장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거야. 나에게 이러한 복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하고 은혜를 반추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자살‘을 한 것입니다.

그러한 불순종, 즉 ’죄와 악‘의 결과는 “무트 타무트” “정녕 죽으리라”였습니다. 이 ’무트 타무트‘는 히브리어의 ’필연적 강조 용법‘입니다. ’죽고 죽으리라, 반드시 죽으리라‘입니다. 모든 인간은 바로 그 선악과 사건으로 말미암아 모두 죽게 된 것입니다.

’아니 금방 안 죽었잖아요? 아담과 하와는 그로부터 수백 년 후에 죽었는데요?‘

제가 조금 전에 인간을 ‘하이 네페쉬’‘생령’으로 만든 것이 하나님의 생기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 분께로부터 오는 모든 생명력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영적 생명이며, 그 영적 생명이 우리의 육적 생명을 주관하도록 만드셨다고 했지요? 그리고 그 영혼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우리를 ‘하이 네페쉬’로 존재하도록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생명력을 ‘바라크’‘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어주시는 그 생명력, 복을 차단시켜 버리셨습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죽음, 사망입니다.

그러면 분명 인간의 영적 생명이 육체의 생명을 주관하도록 했다고 했는데 왜 영적 생명이 죽은 상태에서 인간의 육 적 죽음이 금방 따라오지 않았는가? 거기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엄청난 선물을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사망으로 떨어져 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에게 그 생명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임을 창세기 3장 15절에서 힌트하십니다.

(창3:15)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때 이미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복음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적 죽음 상태에 떨어진 인간들에게 육 적 생명을 한시적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우리 인간은 그 육신의 생명이 붙어 있는 동안 다시 하나님의 ‘복’ ‘바라크’ ‘영적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자력으로 그 ‘복’을 회복시킬 수 있는 인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능력도 없는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택해서 ‘복의 근원’을 만들어 주심으로 해서 그 하나님의 복은 전적으로 은혜로 회복 될 것임을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어떤 선택된 자들에게 ‘믿음‘이라는 것을 선물로 주셔서 그들이 애초에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하나님께 순종하고 항복하는 귀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의 회복‘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막 오용하고 있는 복의 개념은 성경의 복의 개념과 너무나 이질적인 것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죄를 짓고 악을 알게 된 인간들은 그로 말미암아 고통 속으로 던져지게 된 것입니다.

(창3:18-19)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여기에 나오는 ‘가시와 엉겅퀴‘’다르다르 코쯔‘는 구약 내내 등장하는 ’고통의 상징‘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복이 떠나가 버린 그 때부터 ‘고통’ 속으로 내 던져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지요? ‘아니 나는 선악과 맛도 못 봤는데 왜 내가 그 할아버지와 똑같이 취급을 당해야 합니까?’ 그걸 신학에서는 대표의 원리라고 합니다.

그럼 제가 이렇게 여쭤 볼게요. ‘만일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안 따먹었다면 여러분은 선악과를 안 먹기 위해 전혀 고민한 적도 노력한 적도 없었지만 하나님의 복을 영원히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죠? 그건 정당한 것입니까?’

다른 질문을 하나 더 드릴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하는데 여러분이 그 십자가를 잠깐이라도 짊어져 보셨나요?’

‘여러분 손에 못으로 긁힌 자국이라도 있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구원을 받으셨나요?

그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대표의 원리인 것입니다.

(롬5:14-18)

14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15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16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이렇게 우리 인간은 모두 사망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죽음이라는 병의 증상들이 고통의 모양을 가지고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천적 관계를 연구하는 어떤 연구 기관에서 고양이의 새끼와 쥐의 새끼를 낳자마자 한 방에 넣어서 키우는 실험을 했었습니다. 낳자마자 한방에서 자라게 된 고양이와 쥐는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생활 패턴으로 키워졌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러면 고양이와 쥐가 서로 형제인 줄 알고 잘 지낼 것 같지 않습니까? 고양이가 어느 정도 크자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쥐를 물어 죽이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적 관계는 본능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지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의 타락으로 전적인 타락에 빠져 버린 모든 인간은 죄를 본능으로 타고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들은 사실상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먼저 인간들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했습니다. 원래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그 복을 충만하게 누리며 영원히 살 수 있었습니다. 그걸 ‘쩨다카’ 혹은 ‘짜다크’‘의로운 관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복의 통로가 막혀 버렸습니다.

두 번째로 사람 사이의 ‘의’가 깨졌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가리켜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 불렀습니다. 그 말은 ‘네가 나고 내가 너다’라는 ‘일체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자 아담과 하와는 서로에게 책임을 물었습니다.

(창3:12)

12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예전에 본 만화 중에 창세기를 내용으로 한 만화가 있었습니다. 거기서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연유를, 아담이 하와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하와가 선악과를 먹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 것을 본 아담이 ‘여보 하나님이 그 거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먹었어? 당신 없는 세상 나 혼자 무슨 재미로 살겠소, 나도 당신 따라 죽으리이다’ 그러고 선악과를 먹더라고요. 만화입니다. 아무튼 아담과 하와는 죄로 말미암아 인간들 상호간의 의로운 관계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 자식 대에 가서 바로 그 결과가 무서운 살인으로 나타나지요.

세 번째로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연과의 ‘의의 관계‘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잠깐 언급을 해 드렸지만 인간 뿐 아니라 이 우주는 서로 서로 의존적으로 지어졌습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이 상생의 관계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 ‘상생’이라는 말은 ‘오행 상생’의 준말입니다. 원래 동양 철학에서 쓰이는 말인데 ‘수에서 목이 나오고 목에서 화가 나오고 화에서 토가 나오고 토에서 금이 나온다는 조화 속의 우주의 이치’를 상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가 자라기 위해서는 태양의 빛과 비와 바람과 땅 속의 영양분이 필요합니다. 그 영양분은 다른 짐승이나 벌레의 분비물 혹은 시체의 부패, 혹은 다른 나무들의 열매나 잎이 땅에 떨어져야 생기는 것들입니다.

이 우주는 질량과 거리와 여러 가지 역학 관계에 의해 치밀한 그물처럼 얽혀 있습니다. 행성들은 서로의 인력에 의해, 혹은 질량과 거리와 회전 속도 같은 것에서 나오는 역학 관계에 의해 움직이고 유지되는 것입니다. 하루살이나 지렁이 모기나 파리, 어떤 것도 이 대 자연 속에서 빠지면 안 됩니다. 모든 우주는 그렇게 상생 관계로 지어진 것입니다. 이 우주는 그렇게 서로 서로 상대방을 위해 존재하고, 상대방에 의해 내가 존재하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서로 간의 수평적 상생 이 전에 하나님과의 수직적 ‘의의 관계’가 온전하게 유지되고 있을 때에 비로소 완벽한 상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해 버림으로 말미암아 전체의 균형이 깨져 버린 것입니다.

인간은 자연을 다스리기는커녕 자기의 유익을 위해 자연을 파괴합니다. 자연은 그러한 인간들에게 복수를 합니다. 그게 바로 자연 재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의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는 날 그 자연은 본래대로 안식의 상태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학수고대(鶴首苦待)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8:19-22)

19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네 번째로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상실했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은 후에 아주 조금 남아 있는 하나님의 기능적 형상에 의해 양심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데 육신은 그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과도 화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병이라는 것이 생기기도 하고 심지어 자신을 살해해 버리는 자살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자연, 그리고 인간들 상호간에 심지어 자기 자신과의 관계까지 모두 distort 되어버린 망가져 버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 인간은 다른 관계로부터 공급되어야 하는 ‘복’을 스스로 만들어 내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 안에는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스스로를 만족하게 만들어 줄 만한 자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자원을 남으로부터 빼앗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게 시기요, 질투요, 분열이요, 다툼이요, 전쟁인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이 착각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 안에 없는 자원은 다른 사람 안에도 없다는 것을 잊은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다른 이를 밟아 이윤을 챙겨도 고통의 문제, 만족의 문제, 행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복’을 상실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 없이 행하는 모든 일은 우리가 로마서 8장에서 읽었던 것처럼 허무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지 않아도 될 허무한 일들을 하다가 사라지고 맙니까?

중국 자금성에 가면 황제가 다니던 계단 옆에 40,000명이 들어서 옮겨다 놓았다는 거대한 바위 조각이 있습니다. 황제를 즐겁게 해 줄 그 바위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무하게 낭비를 했겠습니까? 그 황성에 들어 있는 침대, 책상, 용상 이런 것을 잘 보시면 나무를 잘라다가 못을 박아서 만든 것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다 커다란 나무를 그 모양으로 판 것입니다. 그 임금의 밥상이나 침상 하나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무하게 보냈겠습니까?

일전에 어떤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인데 그 목사님께서 중국에 가서 책꽂이가 하나 필요해서 목수를 불렀답니다. 그래서 이러 저러한 모양으로 책꽂이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을 하고 며칠이나 걸리겠습니까? 했더니 15일 걸린다고 하더래요. 그래서 무슨 책꽂이 하나 짜는데 15일이 걸리느냐고 물었더니 더 걸릴지도 모른다고 하더래요. 다음 날 그 목수가 책꽂이를 짜겠다고 집으로 왔는데 그 목사님이 졸도할 뻔했대요. 트럭에다가 커다란 통나무를 싣고 오기에, 이걸로 뭘 하려고 그러냐고 그랬더니 지금부터 책꽂이 모양으로 파 낼 거라고 그러더랍니다. 아니 이 귀한 인간이 고작 그런 허무한 일에 시간을, 자기의 생명을 허비해야겠습니까?

황제의 한 끼 식사에 사용 될 채소와 고기가 한 트럭 반 분량이었다지 않습니까? 한 사람의 식사를 위해 한 트럭 반의 재료와 1 000명의 요리사가 100가지가 넘는 반찬을 만들어 내야 했다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의 행복과 편리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도둑맞은 것입니다. 황제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자원을 빼앗으면 자신이 행복해 질 줄 알았던 것이고요. 무덤의 높이가 200미터가 넘고 저승 갈 때 심심하지 말라고 그 안에 생사람을 함께 묻어 버린 그 잔인함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건 극단적인 예이지만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그러한 힘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그 사람들처럼 남들의 자원을 빼앗아 자신의 행복을 채우는 사람들이 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소소하나마 그렇게 다른 이의 자원을 빼앗아 나의 행복을 채우려는 허무한 시도들을 하고 있고요.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이 다 허무한 데 굴복한 일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종교와 이념 같은 선행 체계와 교육과 훈련이라는 지식 체계를 동원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끊겨진 복을 대체하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노력들을 해 왔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우리 인간을 행복하게, 만족하게 만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익히 배웠습니다.

그렇게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다가 결국에는 영과 육이 모두 죽는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게 될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 부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얼마간의 인간들을 선택하셨고 그 인간들을 향한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갈 것도 아셨고, 인간들이 타락할 것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이 우주와 역사라는 무대 장치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왜 다른 이들은 구원하지 않으시는지 그건 묻지 말자고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수수께끼를 주십니다. 그건 그냥 수수께끼로 남겨 둬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수수께끼를 풀면 곧 그 수수께끼를 자기가 소유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이내 하나님께 자기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많은 부분을 비밀로 남겨 두시는 것입니다.

사단을 비롯한 타락한 천사들이 하늘에서 쫓겨 날 때 여전히 순종하고 충성했던 천사들이 이제 영원히 타락할 수 없는 천사들이 된 것처럼, 우리 인간들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했더라면 그 남아 있는 천사들처럼 영원히 타락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비밀스러운 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서 다 그 유혹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담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선택하신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예수 안에서 취급해 가시기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단의 유혹을 이기실 때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크레딧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 사단의 유혹에 안 넘어 간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사람들이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미 그들에게 덮어 씌워진 죄책은 십자가로 해결을 하셨습니다.

(신21:22-23)

22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 넣어서 저주해 버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그들은 모두 죽을죄를 지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대신하고 대표하실 수 있는 죄 없으신, 그리고 자격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께 그의 백성들의 죄를 참소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말끔하게 지워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은 자들은 죄로 말미암아 주어졌던 사망에서 그리고 그 사망의 증상인 고통의 문제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게 된 것입니다.

그럼 지금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가 여전히 받고 있는 이 고통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구원받은 우리가 지금 치르고 있는 전쟁은 또 무엇입니까?

왜 성경은 우리에게 전신 갑주를 입고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오염’ ‘macula"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이제 절대적인 죄의 지배력에서 자유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그 사람 안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게 바로 오염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이 오염을 방치하고 깨끗이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 죄의 오염은 점점 누룩처럼 퍼져서 신자들 안에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생명의 성령의 법을 약화 시켜 버립니다. 그럴 때 신자들은 불신자와 방불하게 자기 보호의 허무함 속에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롬6:15-16)

15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분명 우리 신자들은 이제 지성으로는 하나님의 생각을 좇고 정서는 하나님의 감정을 공유하며 의지로는 지성으로 알게 된 하나님의 뜻에 굴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의 오염에서 허덕이고 있으면 그의 삶은 불신자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치르는 전쟁인 것입니다. 나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와 싸우고 나는 나의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D-day designated day 는 이미 왔지만 V-day victory day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6.25 때 전쟁이 끝나고도 약 2만 5천명의 빨치산이 지리산을 비롯한 여러 산에 잠입해서 국지전을 벌이신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러한 죄의 잔당들이 우리를 여전히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그 마귀의 공격을 그냥 놔두신다고요?

우리는 그렇게 쉽게 죄에 걸려 넘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고, 죄에 걸려 넘어졌을 때의 그 고통을 곱씹으며 더 이상 이러한 죄의 유혹도 없고, 넘어짐도 없는 하나님 나라를 더욱 소망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죄의 오염을 한 겹 한 겹 벗어 가면서 거기서 얻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자유 함과 행복함과 만족함과 기쁨을 조금 씩 맛보며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더욱 굳건하게 다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공부하고 있는 요한 계시록 19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칼을 뽑아 들고 싸우시는 그 전쟁이 바로 이 전쟁인 것입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예수께서 앞장서서 싸워 주시는데 우리까지 힘을 쓸 필요가 있나?‘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 일을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싸우실 때 우리가 손을 놓고 있을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백마를 타고 돌격하셔서 칼로 도려내시는 자신들의 죄를 대하면서 처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시19:13-14)

13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 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여기서 고범 죄라고 번역이 된 ‘페솨’‘실행 죄’ ‘actual sin'을 말하는 것입니다.

청교도 신학자인 리처드 십스는 ‘양심을 거스르는 죄는 살아남은 기도의 입을 막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지 못하게 하며 영혼의 자유를 빼앗다 간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씻어내지 못하고 있는 죄는 우리를 그렇게 절망케 하고 좌절케 합니다.

John owen 목사님은 “죄와 은혜는 모두 실행하면 할수록 더욱 내적인 원리가 강화된다. 사람들이 그들의 은혜를 쓰지 않기 때문에 내재하는 죄가 증가되고 그 은혜를 사용함으로써 더 이상 내재하는 죄가 자라지 못한다. 순종의 의무에 있어서 더 많은 은혜를 사용할수록, 은혜는 더욱 강화되고 증가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들의 정욕의 열매를 많이 생산해 낼수록 그들 안에서 더 많은 정욕들이 생겨난다. 정욕은 스스로를 먹고살며, 자신의 독을 삼키며 증식한다. 사람들이 죄를 많이 지을수록 그들의 성향은 죄를 향하게 된다. 그 것은 죄의 법의 속임으로부터 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 우리 현규은 집사님께서 교회 게시판에 올려놓으신 글처럼 내 안에 두 마리의 개가 있는데, 한 마리는 은혜라는 개이고, 한 마리는 죄라는 개입니다. 그 두 마리 개는 내가 먹이를 주는 쪽은 무럭무럭 잘 자라게 되지만 먹이를 못 먹는 쪽이 점점 말라비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반드시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몰아내야 합니다. 그 모든 노력은 하나님을 위해서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물론 궁극적인 결과는 하나님께 영광으로 돌려 지겠지만, 그 모든 노력은 다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죄라는 병원균에 의해 사망이라는 병에 걸렸을 때처럼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 않으려면 그 죄라는 병원균을 우리의 순종으로, 우리의 충성으로 몰아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거듭나게 되면 얻게 되는 확실한 것이 우리의 변치 않는 신분과,

죄를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두 가지를 확실하게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대하게 될 때 ‘내가 설사 이 죄에 무너지더라도 나의 신분은 변하지 않아’라는 확신과 ‘난 이제 이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야’라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싸워서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부 예배 때도 말씀드렸지만 브라이언 채플 목사님께서 빌이라는 정신 지체아 이야기를 하셨다고 했지요?

브라이언 채플 목사님의 사모님께서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실 때 그 사모님 반에 빌이라는 정신 지체아가 있었는데 이 아이는 머리로 알고 있는 것을 실제로 시험을 보면 맞히지 못하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늘 학업이 부진했는데 한 특수 교육 전문가가 그 사모님 학교에 방문을 하셔서 그 아이를 진단한 후에 ‘이 아이는 구술시험을 보면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다 맞힐 수 있는 아이’라고 조언을 해 주셨답니다. 실제로 그 아이에게 구술시험을 보게 했더니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척척 알아맞히더랍니다. 그 빌이라는 아이는 자기가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아이라는 것을 한 번 두 번 경험하고 나서는 이내 자신이 붙어서 아주 훌륭한 성적의 학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 빌에게 사모님께서 물어 보셨답니다.

‘빌, 전에 너는 너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지?‘’저는 제가 바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지금은 제가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하고 눈물을 흘리더랍니다.

빌이라는 아이는 공부를 못 하는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기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 경험되자 그는 이내 그러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소유하셨습니다. 과거의 빌처럼 ‘나는 바보야, 나는 못 해’ 그러고 있으시면 여러분은 언제까지나 미숙아나 저능아처럼 바지에 똥오줌이나 싸는 그런 분으로 머무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여러분에게 주어진 그 능력이 어떤 것인지 아신다면 여러분은 ‘난 이제 할 수 있어요, 나에게는 능력이 있어요.’라고 감격의 탄성을 지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적은 쉬지 않고, 바로 우리의 곁에서 문지방에서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그 투쟁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신자들이 그러한 투쟁 속에서 struggle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힘을 내십시오.

마지막으로 경건한 신앙의 소유자로 널리 존경을 받았던 Jerry bridges 목사님의 "The discipline of grace" 라는 책의 한 부분을 소개해 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55세다. 지난 10 여 년 동안 나는 이따금 내 삶을 뒤돌아보며 살아 왔다. 물론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진지한 마음으로 내 삶을 돌이켜 본다. 지금까지의 내 생각과 행위와 태도를 살펴볼 때, 정말이지 매우 괴로운 일도 더러 있었다. 내면의 생각, 갈등, 두려움을 통제하려 했지만 거듭 실패했다. 나의 미성숙함을 극복하고, 자아 중심적인 태도를 버리고, 죄를 정복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성결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지만 번번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내 삶은 그야말로 투쟁의 연속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지속되는 실패와 과거에 대한 회한 때문에 최근 몇 년간은 더욱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투쟁을 하며 살고 있다” 이렇게 다들 실패를 거듭하면서, 그 실패에 괴로워하며, 그러나 투쟁을 멈추지 않는 전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열심히 싸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