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에배소서

(82) 어떻게 대적할 것인가?(II) (엡6:10-13)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2:49

(82) 어떻게 대적할 것인가?(II)

(엡6:10-13)

10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우리는 지난주에 10절 말씀을 통해 ‘주안에서 그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는 것’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잠깐 정리를 해 보자면,

우리가 마귀의 궤계에 맞서서 싸우기 위해서는 ‘강건함’을 입어야 하는데

‘강건함‘’주안에서‘ 또 ’주님의 힘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것이라 했습니다.

먼저 ‘주안에서’라 함은 우리는 결코 홀로 사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머리에 붙어 있는 교회의 지체로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나의 사랑하는 지체와 나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신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께 피해가 되는 실수나 실패를 경계함으로 강건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주안에서’라 함은 결국 우리의 머리이신 전능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싸움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면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고 있다는 진리 앞에 강건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다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내 아버지가 나를 위해, 나를 대신해 싸우고 계신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우리 아버지를 도와 그 대적의 뒤통수를 향해 돌진을 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주안에서 그의 능력으로 강건함을 입는 것’ 이라 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그의 힘의 강력’으로 강건해 지기 위해 바르게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에 관해 조금 더 보충을 하고 ‘그분의 힘을 의지하는 것’‘우리가 강건해짐으로 우리가 이루어야 할 것’을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를 ‘십일조’라는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우리 주님의 힘의 강력’으로 우리가 강건해 지기 위해 바르게 인식하고 있어야 할 부분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10절의 그 말씀‘그의 힘의 강력으로 강건해 지라’는 말은 풀어보면 우리의 힘, 에너지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힘이라는 뜻입니다.

나의 힘의 에너지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에너지원은 어떻게 공급받습니까? 먹는 것으로 공급을 받지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싸우는 전투에서의 우리의 힘과 에너지가 되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 하지요? 그래서 성경은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떡을 먹고 그 분의 피를 마신 자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에너지 원, 힘의 원천은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어떤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가가 그 사람의 일을 한정한다는 것을 아세요?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휘발유가 에너지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달리는 말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휘발유보다는 홍당무가 에너지로 필요하지요. 그런데 과수원을 하는 사람이 과수원에서 열매를 얻기 위해서 필요한 에너지는, 힘은 비료와 퇴비입니다. 이렇게 그가 어떤 에너지를 갖고 있는가가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한정합니다. 비료를 갖고 자동차를 움직일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먹었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에너지로 소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서 나와야 하는 일은 어떤 일이겠습니까? 그 에너지에 걸 맞는 운동이, 행위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뭘까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에너지를 가진 자에게서는 그에 걸 맞는, 그 에너지가 한정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게 시기입니까? 질투입니까? 경쟁입니까? 살인입니까? 간음인가요? 험담인가요? 예수라는 에너지를 가지고 어떻게 마귀의 것들이 나옵니까? 그건 자동차에다가 비료를 쏟아 부으면서 ‘자동차야 달려라’하고 억지를 부리는 것보다 더 우스운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을 먹고 마신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에너지로, 힘의 근원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맞다 면 우리 안에서는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이 인정하시는 일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뭡니까? 그 일은 우리가 수차례 공부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다른 이웃과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삶, 그게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에너지를 힘으로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에너지, 힘을 갖고 있는 사람은 고난을 고난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그들을 결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그 고난을 바라보지 않으며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넘어뜨리려는 마귀의 공격에 절대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강합니다. 그들이 울 때는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에 동참하여 그리스도가 우실 일에만 함께 동참해서 웁니다. 왜? 예수라는 에너지에서, 예수라는 힘에서 그들의 행위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들 안에서 예수가 불타고 예수가 불 태워짐으로 말미암아 예수라는 결실이, 행위가 나오는 것입니다.


(고후11:23-29)

23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죽도록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가고 굶기를 밥 먹듯 하고 한 사도 바울이 그런 것을 두려워했다는 대목이 있습니까? 바울이 그러한 고난의 시간들을 죽 열거하면서 자기가 진짜 눌리는 일, 고통스러운 일은 어떤 일이었다고 고백을 합니까? ‘교회를 위한 염려’였습니다.‘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이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강하게 된 자의 삶인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만 노심초사하는 진짜 강한 자의 삶인 것입니다.


(요4:31-34)

31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32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의 양식이 뭐였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양식은 자신이 아버지를 위해 행하신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은 바로 아버지를 그 분의 힘의 근원으로, 에너지로 갖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와야 하는 당연한 일이라는 의미에서 ‘나의 양식은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 속에서 그 삶이 나온 것입니다. 그 행위가 우리 속에서도 나와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요6:57)

57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먹고 아버지를 위한 일을 토해 내며 사셨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에너지에서 나오는 그러한 ‘걸 맞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지금 부지런히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걸 아는 자들이 힘을 내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의지해서 열심히 거룩을 분투하는 것입니다. 그게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 진”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힘으로 강력으로 자리하고 계신 그 분이 어떤 분이신 지를 잘 배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뜻이 어떤 것인 지를 잘 분별하고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 안에서 엉뚱한 것이 나올 때 ‘아 이것은 사단 마귀가 나를 미혹하는 것이구나.’하고 식별해서 잘라낼 수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 그 분투는 행복한 분투입니다. 왜냐하면 그 싸움을 싸우다 보면 그 싸움의 한 복판에서 문득 이 전쟁은 나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제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싸워주시는 싸움이라는 것을 반드시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의 분투가 내 사랑하는 형제자매들과 우리 주님께 유익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기쁨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나의 싸움을 대신 싸우고 계시다는 확신이 들 때 우리는 그 아버지의 넓은 등 뒤에서 행복한 싸움을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저희 아버님이 저를 위해 싸워 주실 때 뒤에서 찌그러진 냄비로 그 놈 뒤통수를 치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우리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혹시 내가 실패해도 우리 아버지는 저놈을 끝까지 패서 죽여 버리실 거야“ 이런 확신이 우리 속에서 기쁨과 행복을 토해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 , 예수 그리스도라는 에너지로 인한 한정된 열매가 맺혀야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명심하세요. 우리 속에서 하나님은 지금 예수라는 열매를 열심히 맺고 계십니다.

우리는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바로 그 행복한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 무시무시한 사단의 세력과 싸우면서 어떻게 아직 이렇게 멀쩡하게 지내고 있습니까? 우리 아버지가 막아 주시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가 결정타들은 다 막아 주시고 우리의 성숙을 위한 작은 싸움들에만 우리를 투입시키셨다가 힘에 달리면 뒤로 빼 주셨다가 또 다시 원기를 회복시켜 전장으로 투입시키시고 하는 그 은혜의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주안에서 그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 진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럼 이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주안에서, 그의 힘의 강력으로 싸운다는 것’‘그 것들로 강건해져서 우리가 싸워야 하는 싸움’은 어떻게 조화가 가능한지를 한번 보겠습니다.

물론 이번 주일 설교에서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어 드리겠습니다만 그 설교를 잘 이해하시기 위해서는 오늘 이 설명을 잘 새겨 두셔야 합니다.


제가 하나님께서 구약 내내 우리에게 요구하셨던 십일조의 의미와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십일조의 의미를 비교해서 그 둘을 조화시켜 보겠습니다.

여러분 십일조가 뭡니까?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를 하라고 시키셨지요? 하나님이 하늘나라 재정이 부족하셔서 그렇게 시키신 것입니까?


십일조에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십일조는 약속의 땅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일조를 명령하신 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 난 후였습니다.


(레27:30)

30땅의 십분 일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의 땅에서 나는 소산과 가축의 십분의 일을 꼭 하나님께 바치도록 했습니다. 그 것은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신 그 약속의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 는 의도에서 십일조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 땅과 그 땅에서 나는 소산은 하나님의 전투를 통해 너희에게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는 걸 기억하라’ 는 하나님의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 바로 십일조 인 것입니다.

신명기에 가면 그 십일조가 어떤 것인지 조금 더 계시가 점진됩니다.


(신14:22-23)

22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23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여기 보시면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권속들과 함께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그 용도가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단순히 레위 인들의 생활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을 다시 하나님께 바침으로 그 모든 것들이 은혜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 것을 자신과 권속들이 나누어 먹으며 잔치를 벌이는 것이 바로 십일조 인 것입니다. 그런데 23절을 보시면 십일조를 먹으라고 하시면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라는 것은 ‘우 양의 처음 난 것‘’맏물‘ ’맏이‘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말하는 ‘맏물‘이 무조건 처음 난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민18:12-13)

12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13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그 땅 처음 익은 모든 열매는 네 것이니 네 집에 정결한 자마다 먹을 것이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레위 인들과 제사장들의 분깃에 관해서 설명하시는 구절입니다.

아시다시피 레위 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십일조로 그 분깃을 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분깃을 “첫 소산”이라고 표현을 하시면서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이라고 부연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바쳤던 것은 단순히 제일 처음 익은 곡식과 제일 처음 태어난 짐승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렇게 ’가장 좋은 것‘도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것이라면 ’그 뒤의 별로 안 좋은 것들은 말할 것도 없이 모두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 고백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맏물’은 단순히 첫 번째 태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맏물이 속해 있는 전체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허락하시는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좋은 어떤 복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럼 ’맏물’하면 대표적으로 생각나는 게 뭐가 있지요? ‘출애굽, 유월절‘

그러니까 이 십일조는 유월절과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에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이스라엘의 장자를 모두 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에게 ‘내가 너희 장자들을 살려 주었으니 처음 난 것은 사람이건 짐승이건 모두 나에게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민3:13)

13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27:26)

26오직 생축의 첫 새끼는 여호와께 돌릴 첫 새끼라 우 양을 물론하고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구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이렇게 십일조에는 유월절 어린양에 의해 살아난 ‘처음 난 것‘’맏이‘ 들의 ’대신’ 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바쳐질 ‘맏물’에 대한 명령은 이미 출애굽기에서부터 주어졌던 것입니다.


(출13:11-15)

11여호와께서 너와 네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인도하시고 그 땅을 네게 주시거든 (약속의 땅에서)

12너는 무릇 초태생과 네게 있는 생축의 초태생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초태생 중 수컷은 곧 ‘장자’를 의미)

13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하나님께서 나귀는 그냥 안 받으시겠답니다. 나귀는 어린 양으로 대신 바치라고 하십니다. 만일 그 나귀를 대신할 어린 양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만일 나귀 대신 바쳐질 어린양이 없으면 나귀는 목이 꺽여 죽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 이게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 잘 아시겠지요? 우리 죄인들은 우리를 대속 하신 어린양이 없었다면 모두 목이 꺽여 줄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너의 아들중 모든 장자 된 자는 다 대속할지니라(인간의 모든 장자들도 다 대속 하라고 하십니다)

14장래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찜이냐 하거든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곧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실새

15그 때에 바로가 강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낳은 것을 사람의 장자로부터 생축의 처음 낳은 것까지 다 죽이신 고로 초태생의 수컷은 다 여호와께 희생으로 드리고 우리 장자는 다 대속하나니


이렇게 맏물은 어떤 것을 대표하며 대신하는 ‘대속’의 효능이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가 바로 그 것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시는 계속 점진됩니다. 이 개념이 히브리서까지 어떻게 이어지는지 잘 보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장자들 대신에 한 지파를 선택하셔서 전체 이스라엘 지파를 대표해서 장자로 삼으셨습니다. 그게 레위 지파입니다. 레위 지파는 하나님께 전체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바쳐진 대속 물이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 기업을 받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야곱의 12아들 중 요셉의 두 아들이 각각 한 지파씩을 이루었기 때문에 원래 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지파를 포함하면 13지파임에도 불구하고 레위 지파는 약속의 땅에서 지파로서의 이름을 상실해 버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12지파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레위 지파는 나머지 12지파를 대신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희생 제물로 바쳐진 것입니다.


(민3:40-41)

40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남자를 일개월 이상으로 다 계수하여 그 명수를 기록하라

41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에(장자들 대신에, 장자는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레위인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신하고 대표하는 사람)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난 것의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그러니까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해서 하나님께 바쳐진 대속 물 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의 장자로 여기시고 그들을 애굽에서 건지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겠다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약속을 어떻게 이루실 것인지를 레위 인들을 이스라엘의 장자로 삼으셔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는 것으로, 모형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한 대속 물이 하나님께 바쳐짐으로 나머지가 전부 복을 받게 되는 원리,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그림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출4:22)

22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분명 이스라엘 전체를 장자라고 부르시지요? 레위 지파만이 아닙니다. 레위 지파는 그 전체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있는 장자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레위 지파 속에는, 처음 난 것은 전부 하나님의 것이라는 ‘장자’의 개념과 어떤 무리를 대표하여 대속 하는 ‘맏물’의 개념이 겹쳐있는 것입니다.

아까 그 장자와 맏물의 개념이 십일조의 내용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레위 지파는 전체 이스라엘 민족의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를 할게요.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명령하신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복을 받은 이스라엘이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실한 신앙고백으로 십일조가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십일조가 하나님께 드려졌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아보고, 인정하며, 순종하는 그 것을 기뻐하시며 이스라엘에게 복을 부어주시는 그러한 복의 순환을 십일조가 담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레위 지파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은혜로 복을 주셨으며, 또 주실 것이라는 것의 표징으로 하나님 앞에 드려진 지파인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지파가 제사를 잘 지내면 이스라엘 전체가 약속의 땅에서 복을 받게 되는 것이고 레위 지파가 제사를 잘 못 드리고 하나님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하면 이스라엘 전체가 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라는 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대속의 제물임과 동시에 자신이 대표하고 있는 사람들의 죄를 대속 하는,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의 역할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 안에 그 두 가지 내용이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가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앙 고백인 것처럼 레위 인들이 하나님께 구별되어 바쳐진 것 또한 그 레위 인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온 이스라엘이 복을 받게 된다는 구속사 전체가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일조는 단순히 물질적인 어떤 소득을 하나님께 떼어서 바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아주 중요한 ‘십일조의 정신’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보세요.


(신14:24-29)

24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무릇 네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우양이나 포도주나 독주등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27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28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이렇게 십일조는 단순히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것이 다시 그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또 다시 받아서 먹으며 즐기는 것입니다.

단순히 바치는 것이 목적이라면 ‘성전이 아무리 멀어도 끝까지 끌고 와야 한다.‘ 그래야 맞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성전이 너무 멀면 그 십일조를 팔아서 너희가 제일 먹고 싶은 것을 사라, 그리고 그 것을 권속들과 함께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즐기는 데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십일조를 나에게 주신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이라고 정의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허락하시는 것이 ‘이 땅의 물질’뿐이라는 이 세상의 시대정신이 낳은 악마적인 발상인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이 단순히 물질 뿐입니까?

이 십일조가 담고 있는 것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를 하시려면 최초의 십일조가 드려졌던 창세기로 가 보셔야 합니다.


(창14:14-20)

14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 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자 삼백 십 팔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16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

17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 장이었더라

19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최초의 십일조가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소알 왕 이렇게 다섯 나라 왕의 연합군이 엘람왕, 고임왕, 시날왕, 엘라살왕 이렇게 네 왕의 연합군과 전쟁을 했습니다. 그 와중에 소돔에 살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집에서 키우던 사병 318명을 데리고 그 네 나라 국가 연합군 수 만 명을 무찌르고 롯을 구해옵니다. 그 전쟁은 상식적으로 어느 모로 보나 아브라함이 이길 수 있었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쟁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긴 전쟁이라는 사실을 아브라함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살렘왕 멜기세덱이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성경은 그 사람을 살렘 왕 즉 ‘샬롬 왕’‘평강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그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떡과 포도주, 제사장, 축복 언뜻 떠오르는 분이 있지요? 그 멜기세덱이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그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의 그러한 행위는 ‘이 모든 것은 당신 덕택입니다‘ 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 말은 ’이 전쟁은 당신이 이기게 해 준 것입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소유의 10분의 1을 멜기세덱에게 바친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그건 조금 있다가 시편에서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본문을 보면 그 멜기세덱 왕은 왕이면서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원래 왕은 힘을 가지고 전쟁을 치르고 정치를 하는 사람이고 제사장은 뒤에서 그 왕의 승리를 위해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살렘왕 멜기세덱은 왕이면서 제사장입니다.

그 말은 그 살렘 왕 멜기세덱은 제사장의 일, 즉 제사를 지내는 것 자체로 왕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힘으로 전쟁을 하고 다스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제물을 바쳐 제사를 지내는 것 자체로 승리를 이끌어 내고 왕국을 다스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거기에 대한 답이 시편 110편에 나와 있습니다.


(시110:1-4)(다윗의 시)

1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2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3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4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5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보세요. 여기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데리고 전쟁을 하십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전쟁의 승리는 주의 우편에 계신 주님,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전쟁이며 그 분이 반드시 열 왕을 쳐서 파하고 승리하신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 하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전쟁을 당신이 맡아서, 열 왕을 쳐서 파해 버리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기의 멜기세덱과 같은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창세기의 멜기세덱은 ‘십자가라는 제사’‘영원한 승리’를 만들어 내시는 왕이요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것이지요.

그 장면을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 7장에서 인용합니다. 그 구절을 보시면 그 의미가 조금 더 확실해 질 것입니다.


(히7:1-10)

1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자라

2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압호모오이오, 같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5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6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8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10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여기 보면 멜기세덱, 아브라함, 레위지파, 십일조 지금까지 공부한 모든 내용이 다 들어 있습니다. 먼저 레위 지파와 아브라함의 관계를 보세요.

5절을 보시면 레위의 아들들, 즉 레위 지파 제사장들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에 그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허리‘라는 것은 쉬운 말로 ’배‘라는 뜻입니다.


(창35:11)(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예언하시는 장면입니다)

11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이렇게 ‘허리’라는 말은 시간차를 두고 세상에 나오지만 본질이 하나인 것들을 가리킬 때 쓰던 단어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앞에 있을 때에 그 레위를 배에 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레위 지파가 하는 일은 그 때 멜기세덱 앞에서 아브라함이 했던 그 일과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도 레위 지파처럼 제사장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위에 멜기세덱이라는 하나님의 제사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 레위가 그 안에서 함께 십일조를 바쳤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레위에게 바친 십일조는 누구의 십일조가 포함 된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십일조가 포함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림을 잘 그려 보세요. 멜기세덱이라는 하나님의 제사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께 복을 받고 십일조를 드린 제사장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그 아래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던 제사장 레위 지파가 있습니다. 그들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다른 말로 복을 받은 자로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에게 십일조를 바친 이스라엘이 있지요? 그들도 역시 복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십일조를 드린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라인에 서 있는 아브라함, 레위, 이스라엘 모두가 멜기세덱으로부터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멜기세덱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제사장은 십일조를 받으면 그 것을 역시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형식상으로는 대 제사장인 아론이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 것을 ‘내가 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시편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그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분이었습니다. 이제 그림이 확실해 졌지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을 흘려보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그의 허리에 있는 레위, 그리고 그 레위가 대표하고 있는 ‘믿음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복을 부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신앙 고백으로 바치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십일조는 내가 받은 모든 것, 내가 받은 모든 복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라는 신앙고백임과 그 자체가 전체를 대표하는 대속 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도 레위가 드렸던 십일조와 제사도, 아브라함이 드렸던 십일조도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부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 바쳐지는 대속 물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진짜 참 복을 받게 된 것이고 이제는 십일조가 아니라 진짜 참 복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재물로 드려진 복된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신 새로운 저는 하나님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의 십일조 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십일조도, 레위 지파도, 제사장도 다 없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복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멜기세덱에서 십일조까지를 죽 그려보면 거기에 뭐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까? ‘복’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일조는 ‘복의 계통도’인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있던 십일조를 레위 지파에게 내게 함으로 해서 구원이라는 복이 어떤 모양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인가를 힌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심지어 구약시대 사람들도 자기의 유익을 따라 그 중요한 십일조를 눈속임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에 보면 레위 지파 사람들이 개인 집으로 흩어져서 ‘무당 노릇’을 해 주고 밥벌이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십일조가 안 들어오니까, 들어 와도 저는 것, 흠 있는 것, 약해 빠진 것 이런 것들만 들어오니까 레위 사람들이 먹고살기가 힘들어 졌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통탄 하셨겠습니까?


그래서 말라기에서 구약을 닫으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십일조를 하라고 한 것은 하늘의 복을 부어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낼 것을 상징하는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라고 한 것이었는데 너희는 그것조차도 눈속임으로 하는구나, 너희가 정말 그 십일조의 정신을 잘 알고 십일조를 한다면 내가 너희에게 부어줄 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데 너희는 그 것조차 하지 않는단 말이냐“ 하고 통탄하신 것입니다.


(말3:8-10)

8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9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게 바로 그 말인 것입니다. 너희는 그 십일조의 정신을 알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소득을 바치는 것으로만 십일조를 오해하고 있기에 저는 것, 흠 있는 것, 쓸모없는 것들을 가져다 바쳐놓고 ‘내 할 일 다 했다.’고 하는데 ‘그거 정말 착각이다‘ ’그거 내가 원하는 십일조 아니다‘’그래서 내가 진정한 십일조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낼 수밖에 없다‘하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세계라‘하시면서 ’마태복음‘을 여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도 같은 내용입니다.


(마23:23-24)

2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십일조로, 제물로 드려지기 전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약속의 땅인 팔레스타인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십일조의 정신을 여전히 잃어버리고 형식적인 십일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24절에 보면 소경된 인도자들이 즉 다른 말로 가짜 목사들이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를 삼키려는 마음에 -하루살이는 살이 없지요.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낙타는 살점이 있잖아요. -십일조의 정신이 무엇인지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십일조 해야 복 받는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사람들이 곡식이나 짐승만 던져놓고 자기 할 일 다 한 것처럼 세상에 나가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자기 의를 의지하고 죄 속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 하고 똑 같지요? 그런 썩어 빠진 정신이 형식적인 십일조를 낳은 것입니다. “십일조 하면 복 받는다” 그런데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의’‘인’(mercy 자비)‘신’(faith 믿음) 이랍니다. 다 뭡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주어지는 것들이지요? 너희들은 십일조가 뭔지 정말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십일조가 완성되지 않았고 여전히 가나안 땅에 머물고 있으므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히7:26)

27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히10:3-10)

3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8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율법은 다 완성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이 된 율법에 또 다시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갈4:4-5,10-11)

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0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여러분이 오늘날에도 그러한 율법에 얽매이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 또 양을 잡는 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뭔가 부족한 것입니까? 율법에는 여자가 남자 옷 입으면 벌 받는다고 나와 있습니다. 왜 제사는 안 지내세요? 여자가 멘스를 해도 부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지금 하나도 안 지키잖아요.

그런데 왜 유독 십일조만 고집하나요? 목사들의 입장에선 교회의 재정의 최고 효자가 십일조이기 때문이고 신자의 입장에서는 십일조 하면 하나님께서 섭섭지 않게 보답해 주실 것이라는 헛된 기대 때문인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 모든 구약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헌금이고 뭐고 하나도 안 해도 되는 것인가?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은

십일조가 아니라 여러분의 생명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영생을 복으로 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영생의 십일조를 드리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여러분의 목숨까지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순종의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물로, 십일조로 사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러분의 전부를 원하십니다. ‘너는 내 것이라’


그래서 이제 내가 사는 모든 삶이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고 내가 가는 모든 곳에 나의 전부가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돈과 시간과 힘을 헛된 곳에 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필요로 할 때는 나의 모든 것을 내 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왜? 십자가에서 이 땅의 것과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때 사도들이 십일조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한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십일조가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 앞에 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교회는 전 재산을 교회에 다 내 놓고 필요한 만큼 나누어 썼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요?


(고후8:1-5)

1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2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자신을 주께 드린 사람은 인색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옛 사람을 못 박은 사람들은 이 세상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행함의 조화인 것입니다. 이제 ‘그분의 힘을 의지하는 것’과 ‘우리가 강건해짐으로 우리가 이루어야 할 것’을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가 조금 선명해 지셨습니까?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반드시 십자가 안에서의 그러한 행함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일날 결론을 맺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