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에배소서

(80) 마귀를 대적하라(IV) (엡6:10-12)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2:46

(80) 마귀를 대적하라(IV)

(엡6:10-12)

10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우리는 지금 몇 주간에 걸쳐서 마귀가 우리 성도들을 어떻게 공격하고 있는지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마귀의 공격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한 가지 확실하게 해 둘 것은 ‘마귀가 우리를 공격해서 얻는 유익이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우리는 마귀의 공격을 통해 어떤 손해를 보게 되는가?’입니다.

구원이 상실됩니까? 아니지요? 마귀는 우리 성도들을 공격해서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감격과 기쁨을 빼앗고 자녀로서 가져야 될 자신감을 빼앗음으로써 마땅히 맺어야 할 열매를 못 맺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궤계를 잘 분별해서 대처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늘 불안하고 외롭고 슬프고 낙심하며 살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죄책감에 대해서 공부를 해 볼까합니다.

저는 마귀가 우리 성도들을 제일 많이 공격하는 부분이 바로 이 죄책감의 부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성도라는 사람들이 그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성도로서의 기쁨을 누리기는커녕 낙심하게 되고 근심하게 되고 심지어 자폭할 지경까지 떨어지게 되는 것을 저는 자주 봅니다.

여러분 중에도 분명 지금 여러분이 짓고 있는 죄 때문에, 혹은 과거에 저지른 죄 때문에 극심한 죄책감에 낙심하고 절망해서 ‘난 구원받은 사람이 아닌지도 몰라’ 라는 의심 속에 헤매고 있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특히 제가 놀란 것이 어떤 분들이 제 설교를 오해 하셔서 “난 왜 우리 목사가 저렇게 강조하는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할까“하고 더욱 더 죄책감에 시달리고 계시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건 제 설교를 완전히 오해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마귀의 장난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이 부분을 확실하게 설명하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에 오늘 설교를 준비한 것이니까 혹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잘 들어주세요.

출발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롬3:10-18)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게 바로 우리의 정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악인들을 의롭다 하실 수가 없습니다.

(잠17:15)

15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의인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합니다.

(시7:8)

8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그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의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전혀 짓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당당함이 아닙니다.

(시51:1-10)

1(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2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4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7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9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10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지금 다윗이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과 자신이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자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저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저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세요.” 사이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합니까? “제가 잘못했으니까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라는 내용이 들어가야지요? 그런데 다윗은 이 시에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과 “그러니 무조건 나를 깨끗하게 해 주세요”라는 요구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용서받을 방법이 없다는 것”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라는 약속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1절의 말씀처럼 주의 인자와 자비와 긍휼에만 호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구원의 이야기를 아주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 준 곳이 바로 출애굽기 14장입니다.

(출14:13-16,21)

13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1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16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21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홍해 바닷가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은 믹돌 사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진퇴양난의 저주 속으로 몰아넣으신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모세를 시켜 홍해를 가르시는데 밤새도록 동풍을 불게 하십니다. 성경에서 동풍은 저주의 바람입니다. 더럽고 추한 것들을 다 날려버리고 부수어 버리는 바람입니다.

(렘18:17)

17내가 그들을 그 원수 앞에서 흩기를 동풍으로 함 같이 할 것이며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겔17:10)

10볼 지어다 그것이 심겼으나 번성하겠느냐 동풍이 부딪힐 때에 아주 마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자라던 두둑에서 마르리라 하셨다 하라

그런데 이스라엘의 구원의 장면에 동풍이 부는 것입니다. 그 동풍은 저주의 바람, 심판의 바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은 전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저주의 바람으로 모두 몰살시켜 버리셔야 합니다.

실제로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 군대는 그 저주의 바람에 몰살당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저주의 바람 속에서 살아났습니다. 어떻게 살아나게 된 것입니까?

(고전10:1-2)

1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이스라엘이 그 저주의 바람으로 갈라진 홍해를 건넌 것을 그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표현을 합니다. 세례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죄인인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태어나는 것을 세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도 그 홍해 바다에서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새 사람으로 탄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세례를 누구 안에서 받았습니까?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를 상징하는 모세에게 속해서 죽었고 모세에게 속해서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모두를 모세 안에다 넣고 죽이시고 모세 안에 있는 그들을 새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를 벌하십니다. 죽여 버리십니다. 그런데 그 저주의 바람이 부는 무시무시한 심판의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품어 안고 대신해서 죽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새 창조라고 합니다.

창세기의 첫 창조도 똑같은 방식으로 일어났습니다.

흑암과 공허와 혼돈(混沌) 속에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신이라고 번역이 된 “르와흐“는 “바람, 호흡”이라는 뜻입니다. 홍해 앞의 상황과 똑같죠?

더럽고 불가능한 죄인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흑암과 공허와 혼돈(混沌) 속에 저주의 동풍이 부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더러운 흑암과 공허와 혼돈(混沌)이 물러가고 빛과 하늘과 바다로 틀이 잡혔던 것처럼 구원은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의 새 창조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공로나 노력이나 헌신이나 회개가 선행되지 않습니다. 그냥 전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나도 같이 죽어야 하는 그 저주의 동풍이 부는 홍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뽑아내어 품에 안고 대신 죽어 주신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너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나중에 또 죄 지으면 그 땐 정말 버린다.” 이런 협박이 없습니다. 구원은 거기에 우리가 무엇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만 말미암은 것입니다.

(요일1:9-10)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렇게 오직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가 모두 공짜로 하나님의 의에 의해 해결되었다는 뜻입니다. 맞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데도 “너희는 이미 죄에 대해 죽었다”라고 과거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들이 앞으로 어떻게 사는지는 구원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새 옷을 입었다, 새 사람을 입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롬6:6-7)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성경은 우리의 옛 사람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다고 말합니다.

(골3:9-10)

9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은 것이 과거 시제입니다. 우리는 이미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엡2:5-9)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잘 생각해 보세요. 이 에베소서의 말씀처럼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주어진 것이 구원입니다. 그 구원에는 구원의 현재 시제인 성화와 구원의 미래 시제인 영화까지도 다 포함 된 것이지요?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성화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은 설사 그들이 지금 여전히 죄를 짓고 있다 하더라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죄를 씻어내고 잘라내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완성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제가 그토록 외치는 거룩한 삶도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한 이야기와 정 반대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시지요? 아닙니다. 잘 들어보세요.

(요17:19)

19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고전1:30)

30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거룩은 우리가 열심히 연마해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자신이 거룩이시고 그 분이 이미 나의 거룩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우리의 거룩함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셔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빌2:12)

12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말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보면서 ‘혹시 난 구원받은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거룩하게 살려고 힘쓰라는 말이 아닙니다. 만일 그게 그런 뜻이라면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은 둘이 완전히 상반된 교리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요일4:18)

18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 하였느니라

보세요. 여기서는 두려워하는 자는 구원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도 바울 자신이 한 말과도 모순이 됩니다.

(딤후1:7)

7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면 사도 바울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사도 바울이 그 똑같은 단어를 고린도서에서 쓴 적이 있습니다.

(고전2:3)

3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은 나의 재주나 나의 능력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는 구절입니다.

그러니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우리 성도들이 ’구원은 그 어떤 부분도 우리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바로 그 마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열심히 나의 거룩을 이루어 내야지‘가 아니라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이구나‘가 ’두렵고 떨림’인 것입니다.

(벧전1:2)

2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보세요. 순종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까? 성경은 순종까지도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과거시제, 현재시제, 미래시제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시켜서 아무 능력 없고 아무 가능성 없는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맏아들, 장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장자는 아버지와 동격입니다. 동격일 뿐 아니라 아버지의 모든 유산을 물려받는 상속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맏아들이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이시고 그 모든 것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과 그 분의 계획 모두를 상속받으신 하나님의 장자이십니다. 상속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아버지의 것을 모두 물려받는 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삼는다는 합일의 의미도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즉 십자가가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장자로서 그 수난과 죽으심까지도 다 순종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게 진정한 장자입니다. 그게 진정한 상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장자의 명분을 지키지 못하고 팔아 버린 에서를 끝까지 장자의 명분을 지키신 예수님과 비교해서 ‘악의 상징’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또 한 번 장자로 나십니다. 이제 인간이 되셔서 또 한 번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십니다.

(골1:18)

18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여기서 ‘먼저 나신 자‘라고 번역이 된 ’프로토토코스‘는 ’첫 아이, 처음 태어난 아이’즉 ‘맏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인간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 나셔서 맏아들로 태어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5:5)

5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이 구절을 가지고 혹자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분이라고 우기지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떤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맏아들로 태어나셨음을 가리키는 것이지 예수님의 피조 이야기가 아닙니다. 조금 전에 제가 말씀 드리기를 맏아들은 아버지의 것을 모두 물려받는 상속자의 의미가 있다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첫 번째 창조 때 예수 그리스도께 그 모든 만물을 주시고 다스리게 하셨듯이 하나님은 두 번째 창조, 즉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택하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 새 창조물들을 상속하시기 위해 그 분을 다시 맏아들로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호칭, “맏아들“은 새 창조의 후사로서의 호칭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새 창조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새 창조의 시행자로, 상속자로 세우셨습니다. 그것을 ”오늘 날,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택하셔서 상속자인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들을 아버지께 받아서 새롭게 창조해 내신 것입니다.

(요6:39)

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17:6)

6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를 상속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새롭게 창조 하셨습니다. 그것은 첫 창조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히1:2)

2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표준 새 번역)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시켜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그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자신의 맏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창조하게 만드신 것처럼 새 창조 때도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맏아들을 세우시고(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시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상속하시고 그 맏아들을 통하여 그들을 새 창조물들로 창조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새롭게 창조된 우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공동 상속자라고 부릅니다.

(롬8:17)

17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그렇게 새롭게 창조된 우리는 예수님과 공동 상속자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장자로 취급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히12:22-23)

22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그러니까 우리 장자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지니고 계신 거룩과 영광을 상속받아 지니게 된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은혜로 구원을 받고, 예수님과 공동상속자가 된 사람들이 죄를 짓습니까?

우리의 옛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그 옛 사람이 저질렀던 짓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와 상관이 있는 사람들인가요? 이걸 잘 구별하셔야 그 쓸데없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구원받은 사람들이 짓는 죄는, 죄가 아니라 “육신의 습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나가는 행위나 생각들은 죄의 모양을 띠고 있지만 “죄”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습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거룩한 자가 되었지만 그 육신의 습관이 우리 안에 새롭게 창조된 새 사람의 광채를 막아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육신의 습관을 자꾸 제어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새 사람의 삶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육신의 습관을 떨어내는 것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자꾸 그 육신의 습관에 젖어서 그 매력에 푹 빠지곤 합니다. 성경은 거기서 빠져 나와 우리가 받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을 제시합니다.

(빌1:27-28)

27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어떻게?)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한 성령으로 굳게 서는 것으로, 원인 절)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쉬나들레오, 함께 씨름하다)

28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성경은 우리가 육신의 습관에 자꾸 빠지지 않고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 성령으로 굳세서는 것”을 제시합니다. “한 성령으로 굳게 서는 것“은 사도 바울이 우리가 좀 전에 함께 읽었던 출애굽기 14장에서 인용 해다가 쓴 구절입니다.

(출14:13)

13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사도 바울은 우리가 복음에 합당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죄책감에 자신을 자폭시키는 것도 아닌 출애굽 사건이 상징하는 구원을 이해하는 길밖에 없음을 피력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인이 죽어야 하는 성령의 바람, 저주의 바람인 동풍이 부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속하게 하셔서, 즉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넣으셔서 건져내신 그 은혜의 사건을 이해하고 올바로 인식하는 것만이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구원에 있어서는 도저히 어떤 근거나 조건도 갖다 댈 수 없는 그런 자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새롭게 창조해 주셨다는 그 복음이 이해되는 자들은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고 거기에 합당한 삶을 경주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장 28절에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이라는 구절이 붙어있는 것입니다.

대적들이 우리를 미혹하고 꾀어 다시금 육신의 습관에 젖게 하고 때로는 극심한 고통 속에 던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저주의 동풍 속에서 굳게 서서 지켜 본 그 구원의 드라마에 의하면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죽이셨고, 그런데 그 저주의 칼을 예수가 대신 맞아 주셨고 나는 새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나는 때때로 나를 넘어뜨리는 이 육신의 습관을 지켜보면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책감에 빠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내 속에서 나타날 때, “이래서 하나님은 나를 죽이실 수밖에 없었구나, 그런데 그 죽음의 동풍을 우리 예수가 맞아 주셨구나.“ ”이게 웬 은혜인가?“”그래 난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목숨을 지불하고 건져내신 엄청난 자구나,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지“ 하고 우리는 우리 안에 거룩으로 이미 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조금씩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해 드리겠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거룩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그 속에 거룩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습관이라는 것이 자꾸 성도들의 삶 속에서 삐죽 삐죽 올라옵니다. 사탄은 그 육신의 습관이 올라올 때 “봐 네가 진짜 구원받았다면 이렇게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단 말이야? 넌 구원받은 사람 아니야” 라고 속삭여서 성도를 죄책감에 빠지게 만듭니다. 사단은 그렇게 해서 성도의 성숙을 막고 성도가 누려야 할 기쁨을 빼앗아 가 버립니다.

그 때 우리 성도들은 “이건 죄가 아니라 육신의 습관일 뿐이야, 이미 나의 모든 죄는 예수 안에서 다 해결되었다. 어떻게 여전히 이런 더러운 육신의 습관 속에 젖어 있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었는가?”하고 오히려 홍해 바닷가에 굳게 서서 저주의 동풍 속에서 일어났던 구원의 드라마를 바라보았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러한 실패와 좌절 속에서, 이런 추악한 죄인을 그렇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고 그 은혜와 사랑의 깊이를 깨달은 만큼 육신의 습관을 제어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거룩한 삶의 광채를 밖으로 조금씩 더 밝게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의 상태를 “ABLE NOT TO SIN”"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거룩하게 살도록 노력하라”고 외치는 것은 “여러분의 노력으로 거룩을 완성해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은 분들이 맞다 면 여러분은 육신의 습관에 의해 자주 실패하고 실수를 하게 될 것이고 그러한 여러분의 실패와 실수가 여러분을 다시 동풍이 부는 홍해 바닷가로 인도할 것이고 거기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더 깊이 깨닫게 될 것이고 그 감사가 여러분의 육신의 습관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갈 것이기 때문에 제가 ”노력하라, 성실하라, 진지해 져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노력을 해야 자신이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인지 깨달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노력한 만큼 여러분은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역설을 잘 이해해 주십시오.

노력한 만큼 여러분이 여러분의 거룩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노력한 만큼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실망하게 될 것이고 그 때마다 여러분은 홍해 바닷가에 서게 될 것이고 구원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며 그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거룩을 조금 씩 조금씩 더 밝게 꺼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은 죄가 생각날 때, 혹은 지금 죄를 지으면서 여러분은 죄책감으로 가셔서는 안 되고 오히려 은혜의 바다 홍해로 가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기뻐하세요. 그래서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그렇습니다. 죄를 짓고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특권입니다.

saving private ryan 이라는 영화가 있었죠. 탐 행크스가 주연한 아주 훌륭한 영화입니다.

네 형제를 2차 대전에 내 보낸 미국의 한 시골 마을의 아주머니의 세 아들이 동시에 전사를 합니다. 그런데 막내아들도 공수부대의 일원으로 독일 시내 한 복판에 던져져 있습니다. 미군 사령부에서 그 막내아들을 살려서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탐 행크스의 부대에 하달합니다. 중대장인 탐 행크스와 그의 부대원들은 그 라이언 일병을 구출하기 위해 독일 시내로 진입합니다. 진입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대원들이 죽습니다.

결국 모든 부대원과 탐 행크스까지 다 전사하고 그 라이언 일병은 살아남습니다.

그 때 탐 행크스가 다리 위에서 그 라이언 일병에게 유언을 합니다.

“라이언 넌 꼭 살아서 훌륭한 삶을 살아다오” 그리고 죽습니다.

나중에 그 라이언 일병이 할아버지가 되어서 탐 행크스의 무덤에 와서 오열을 하며 말합니다. “난 중대장님의 유언대로 한 평생 훌륭한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아내에게 묻습니다. “내가 정말 훌륭한 삶을 살았소?” 아내가 말합니다. “네 당신은 참 훌륭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라이언 일병은 자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중대장과 동료 전우들의 사랑을 실감했기 때문에 자기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의 유언대로 한 평생 열심히 산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 우리의 실패와 실수로 낙담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이런 보잘것없는 나를 위해 목숨을 끊어가며 구속의 전쟁을 펼쳐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십시오. 그리고 진정 그게 감사하거든 그 분이 우리에게 어떤 유언을 하셨는지 기억하십시오.

정말 우리가 홍해 바다에서의 그 구원의 이야기를 실감하고 믿고 있다면 그 라이언 일병이 살아 낸 훌륭한 삶을 우리도 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