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에배소서

(78) 마귀를 대적하라(II) (엡6:10-14)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2:44

(78) 마귀를 대적하라(II)

(엡6:10-14)

10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계속해서 우리를 공격하는 마귀의 궤계의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하기를 마귀는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켜서 살인, 간음, 도둑질, 사기, 험담, 시기, 질투 같은 더럽고 어두운 일을 시킬 수도 있고 자연 현상까지도 영향을 미치며 심지어 하나님의 허락 하에 사람의 목숨까지도 빼앗아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도 찾아와서 의심의 마음과 공포의 마음을 불어넣기도 하고 거짓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낙심의 마음으로 때로는 교만한 마음으로 성도를 파괴하려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하고 다음 시간은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마귀의 궤계를 파 헤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에 앞서 먼저 몇 가지 확인해 두고 넘어갈 것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셨나요? 왜 그렇게 마귀들은 인간들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요? 우리가 넘어지면 마귀에게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예전에 우리나라 대통령이었던 분의 아드님이 마약 중독에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아드님에게는 연예인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외아들이 너무 외로워 하니까 대통령이 연예인 친구들을 붙여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연예인들 중에 마리화나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마리화나를 하면서 자신들이 처벌받지 않기 위해 그 대통력의 아들에게 마리화나를 가르쳤습니다. 대통령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공범으로 만들면 자기들도 무사할 줄 알았던 것이죠.

결국 그 대통력의 아들은 얼마 전까지도 마약을 끊지 못하는 마약 중독자로 청춘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그게 죄의 전염성입니다. 죄인들은, 어둠의 세력, 마귀의 세력은 자신의 어두움을 많은 다른 존재들과 함께 하고 싶어 합니다. 지옥의 동지들을 구하는 것이지요. 여담이지만 사단도 하나님이 당신이 가장 사랑하시는 인간들이 사단과 함께 타락을 해 버리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용서하실 때 자기들도 용서하실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자신의 패배나 파멸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자신의 세력을 한 명이라도 더 늘여서 끝까지 하나님과 대적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을 보면서 그게 더욱 더 선명하게 확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마귀는 끝까지 어떤 기대를 갖고 최선을 다해서 싸우고 있음을 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오직 하나님과 우리 성도들만이 세상의 결국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해서 자신의 세력으로 규합하여 하나님과 대적하고 그게 실패로 돌아갈 시에도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범으로 만들어 놓음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용서하실 때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여 자신들도 용서를 받으려고 하는 시도는 분명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입각한 지혜로운 발상이기는 합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다른 방법을 이미 강구해 놓으셨습니다. 뭐죠? 십자가지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기로 한 사람들의 죄를 대속해 버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지옥의 형벌을 다 받아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12시부터 3시까지 온 세상이 흑암으로 덮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목이 마르다”라고 말씀하셨지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도 나오지만 목마름과 흑암은 “지옥”을 상징하는 대표적 표징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성도들의 지옥을 미리 살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마귀가 우리를 미혹해서 우리가 죄를 지어도 우리는 그 지옥에 갈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법에도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지요? 어떤 사건에 대하여 일단 판결이 내리고 그 것이 확정되면 그 사건을 다시 소송으로 심리 재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미 유죄 판결을 받고 벌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벌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그 마귀의 속성을 죄인들이 그대로 답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걸 신학에서는 죄의 전염성이라고 하지요. 죄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들과 공범을 만들기 위해서 주위 사람들을 죄로 끌어들입니다. 그게 바로 마귀의 속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와 정 반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요구받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귀의 전도자가 되어서 다른 이들을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 이끄는 그 어두움 속으로 전도를 하고 있지만 우리 성도들은 그렇게 죄와 허물로 죽어가고 있는 세상 속에 들어가서 그들을 빛으로 끌고 나와야 하는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마귀의 공경에 수동적으로 대처하고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방어만 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이며 공격적으로 마귀와 싸워야 하는 존재들이란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고 선교를 할 때 마귀는 자기편을 우리 편에게 빼앗기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삶에 엄청난 공격과 미혹이 가해지겠지요. 우리가 이번 여름 선교를 떠나면서 기도로 철저하게 무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어영부영 여행가는 마음으로 떠나려 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안 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주지해야할 사항은 사단은 인간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감춘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사단이라는 인격적인 존재가 실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숨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단은 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대적은 이 ‘어두운 세상‘일 뿐이라고 인식하게 만들어 버려서 그 어두운 세상을 밝게 만들기 위한 시도와 노력들만을 유도해 냅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성취의 종교로 전락을 시켜 버립니다. 아닙니다. 기독교는 성도가 이 어두운 세상과 싸우고 도를 닦아 자신의 인격을 연마하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단순히 이 어두운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했듯이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인 존재를 부인하게 만드는 사단의 미혹’은 인간의 시야를 이 보이는 세계에만 고정을 시킴으로 해서 영적 존재이신 “성령을 부인”하는 데까지 이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영적인 전투에 무감각해 지게 되면 우리는 우리 안에 살아서 역사하고 계신 성령에 대해서도 둔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인격을 소유하고 전략과 전술과 지혜를 동원해서 우리를 파괴하려드는 마귀 사단이라는 존재와 정사와 권세와 하늘의 악한 영들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마귀의 전략과 전술과 공격의 내용을 잘 알아야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겠지요? 넋 놓고 있다가 기습을 당하면 안 되니까요.

그런데 오늘날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이러한 마귀의 세력에 대한 경고를 별로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이 있고, 그 대적들은 얼마나 큰 힘을 소유한 자들이며 거기에 지게 되면 하나님도 우리를 징계하신다고 하는 그런 부정적인 이야기는 게으른 죄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게으른 사람들은 그냥 평화롭고 낙관적인 말만 듣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 역사를 한번 보세요. 대적을 경계하는 일에 실패한 나라들이 전부 어떤 일을 겪었습니까? 선조가 왜군의 공격에 대비해서 군사를 모으고 훈련해야한다는 율곡의 10만 양병 설을 묵살해 버리고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왜군들에게 쫓겨 다니며 물고기나 잡아먹는 신세가 되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오성 이항복 대감이나 서애 유성룡 대감까지도 그 10만 양병 설을 배격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들에 대비해서 오늘의 편안함을 양보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대적의 공격에 대비하자고 외친 율곡 이이는 그 일로 유배를 당하게 되었고 결국 조선은 왜군에 의해 침략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사단이 실재한다는 것과 그의 궤계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무리들은 특별히 성도들을 전략과 전술을 가지고 밀착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하고 거기에 대해 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대적에 대한 올바른 자각과 인식이 우리에게 더 많은 열심을 요구해서 우리가 더욱 불편한 삶을 살게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대적의 실재에 대해 명확하게 확인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국가대표 농구 감독을 하시는 분이 미국의 어느 대학에 국가대표 농구팀을 이끌고 전지훈련을 떠났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대표 팀 감독님이 미국의 어떤 대학에 짐을 풀고 몇 달간 전지훈련을 하면서 그 대학 농구팀과 친선경기도 하고 했는데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답니다. 그래도 일국의 국가대표 팀인데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한 번도 못 이기는가? 그래서 그 대학 농구팀 코치에게 선수들을 어떻게 훈련을 시키는가? 물어 보셨답니다. 그 때 그 미국 대학 코치가 그 감독님을 자기 사무실로 데리고 가더랍니다. 그리고 자기네 선수들 한사람 한 사람을 찍어놓은 비디오 테잎을 보여주면서 그 선수들의 약점과 장점을 모두 다 파악해서 기록한 노트를 보여 주셨답니다.

어떤 선수는 패스를 할 때 습관적으로 팔을 5cm정도 당겼다가 패스를 하는 바람에 블로킹을 자주 당한다. 어떤 선수는 슛을 던질 때 눈을 몇 번 깜박거리고 어떤 선수는 패스를 할 때 뒤꿈치를 자주 든다. 이런 기록들 옆에 “수정”“수정”“수정” 이렇게 적혀 있더랍니다. 자기 선수들의 약점을 모두 파악해서 완전히 수정이 될 때까지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 와서 전지훈련을 하고 있던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의 약점과 장점이 정확하게 파악이 된 데이터도 이미 가지고 있더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제 아무리 국가 대표 선수들이라 할지라도 상대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나 데이터 없이, 그리고 자신들의 약점에 대한 파악 없이 그저 패스나 연습하고 슛 연습이나 하는 것으로는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에 대해 그 보다 몇 배 더 확실하고 정확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적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습니다. 속수무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몇 주간에 걸쳐서 그 마귀의 공격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시 살펴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그 대적에 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그 마귀의 존재에 대한 인식도 불분명한 상태입니다. 그건 너무나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존 번연의 ‘warfare’라는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렇게 악화된 상태에 빠지게 된 주된 원인 중의 하나는 마귀의 존재가 잊혀지고 있다는 사실임을 나는 확신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들의 탓이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태도나 사고를 심리학적 현상으로만 보려고 한다. 우리는 이 엄연한 객관적 사실, 존재성, 마귀의 실존, 적, 참조 자 및 화전 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모르면 깨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대적이 존재하며 그 세력은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 지난주에 이어서 그 마귀의 공격의 구체적 내용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마귀는 교회를 공격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부분이 엉터리 교리를 교회에 갖고 들어오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부분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다음 주에 다른 내용으로 넘어가지요. 전쟁에서 자국의 주력화기를 보통 어디다 쏟아 붓습니까? 상대방의 주력 부대를 깨는데 쓰지요? 그 귀한 주력 화기를 동사무소에 있는 방위들 공격하는 데 쓰는 바보는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귀는 주력부대를 교회로 보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이는 곳이니까요. 특히 교회 안에서도 지도자들을 집중적으로 공략을 합니다. 그 지도자가 잘 못 가게 되면 교회 전체가 잘 못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13:24-30)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분명 주인이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 거기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려 놓는 것을 그냥 허락하십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농촌에서 자라신 분들은 “피 사리”라는 것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논이나 밭에 벼하고 비슷하게 생긴 잡초가 자라나는 데 그 것을 “피”라고 부릅니다. 그 것을 정기적으로 뽑아주지 않으면 그 잡초는 번식력이 엄청나고 성장 속도가 빨라서 진짜 벼가 자라는데 치명적인 해를 끼치게 됩니다.

사단은 그런 가라지를 교회 안에 “덧 뿌려” 놓았습니다. 사단은 엄청난 숫자의 가라지를 교회의 지도자로 영적 리더로 뿌려놓고 그들에게 엉터리 교리를 가르치게 함으로써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엉뚱한 길로 가게끔 유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진짜는 어떻게 해서라도 가짜라고 우기고 엉터리 교리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가짜는 어떻게 해서든 진짜로 믿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책략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난 주일에 말리부 해변으로 소풍을 다녀오셨지요? 그 때 제일 먼저 챙기신 것이 무엇입니까? 도시락? 음료수? “지도“지요. 우리 교회를 나가서 10번 프리웨이를 타고 퍼시픽 하이웨이가 나오면 계속 직진해서 말리부 해변까지 가는 정확한 지도를 먼저 챙겨야 합니다. 그 지도가 바로 “교리“입니다. 그 지도가 엉터리이면 아무리 맛있는 도시락도 아무리 시원한 콜라도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라지 들이 틀린 이야기만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성도들에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기도 하고 성도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기적적으로 물질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저도 전도사 때 자주 아파트 렌트 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아파트 렌트 비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동차가 없어서 걸어서 학교를 통학할 때 하나님께 기도를 했더니 새 차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엽적인 것들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그 것이 마치 기독교의 핵심인 양 왜곡시켜서 기독교의 핵심을 바꾸어 버리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단의 공격 방법인 것입니다. 사단은 아주 지엽적인 것을 핵심에 놓고 기독교라는 원을 다시 그리게 함으로써 정말 중요한 핵심 적인 것들을 놓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삼박자 축복이 교리의 핵심에 오게 되면 “고난을 통한 성화와 거룩“이라는 기독교의 핵심이 원 밖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의 귀신 론처럼 ”우리의 일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마귀의 짓이고 그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난 성도들은 병도 걸리면 안 되고 눈도 나쁘면 안 되고 모든 일이 만사형통하게 되어야 한다.”는 그런 교리가 중심에 오게 되면

죽을 때까지 간질을 가지고 간, 사도 바울이나 위장병으로 고생한 디모데는 지금 지옥에 가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가라지 들을 “이단”이라고 부릅니다.

가라지들, 이단들은 열심히 우리의 의지를 발동해서 가야 할 신앙의 여정에 아주 지엽적인 것들을 핵심으로 놓게 해서 그 여정의 지름길들을 제시 해주고 마취제나 환각제를 투여해서 그 길을 고통 없이 단축시켜 줄 수 있다고 속입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우리의 손과 발을 움직여 우리가 한발 한 발 가야하는 험난하고 고단한 길입니다. “이 물만 마시면, 이 약만 먹으면, 기도만 하면, 금식만 하면“ 성경은 이런 지름길을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가라지며 이단인 것입니다.

이 이단과 비슷한 것이 “사교”라는 것입니다. 이“사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어떤 특별한 인물이나 사물에 대해 헌신하는 것을 “사교”라 합니다. 특이한 것은 그들은 이단과는 달리 성경 자체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들만의 경전을 따로 가지고 있습니다.

몰몬 교의 창시자 요셉 스미스가 유타의 계곡에서 발견했다는 황금 종이 위에 쓰인 몰몬 경 같은 것이 그런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렌 화이트가 쓴 저술이나 진술이 성경보다 더 권위가 있습니다. 통일교에도 자기들만의 경전이 따로 있지요.

이 사교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교주들에게 시선이 모아진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을 내가 줄 수 있다“가 바로 사교의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이단과 사교에 빠지게 되는 주원인은 사단이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해서 주를 알고 주를 기뻐하는 것보다 자기의 필요를 더 중요하게 인식시켜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지 않는 것, 이단과 사교가 제공하겠다는 세상 것들을 추종하게 함으로 사람들을 사망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누차 확인한 것처럼 영생은, 진짜 복은 이러합니다.

(요17:3)

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진짜 복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을 즐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단과 사교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우리의 목표지점을 정확하게 확인하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바르지 않은 교리나 왜곡된 교리로 가득 차 있고 사람들은 그러한 엉터리 교리들을 좇아 죽음을 향해 달음질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단의 궤계는 교회 안에 깊숙이 침투해 있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에 따르면 1678년에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warfare 라는 책이 이러한 사단의 공격과 도전과 궤계에 관해 기술한 이후로 지금까지 거의 300년 동안 기독교는 그 부분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마귀의 공격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급격히 사라져 버렸을까요?

종교 개혁 이후에 교회의 구원론이 너무 칭의에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의 진의를 깨닫고 당시의 로만 카톨릭의 알매니안 적 구원론을 배격하다보니까 성화까지도 칭의와 붙어 버리게 된 것입니다. 카톨릭이 인간의 행위와 공덕을 하나님의 은혜와 믹스를 시켜서 엉터리 종교를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한 분노가 성화까지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분명 성화도 우리 주님께서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가 주일날 로마서 5장을 공부하면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구원과 사심의 구원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시켜 가고 계시다는 의미에서 사심의 구원을 설명해 드렸지요? 그러니까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사역의 일부인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2장의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반드시 징계 하신다”는 말씀에서 “징계”“파이데이아”는 “자식 만들기”라고 했지요?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에 의해 “자식 만들기”의 과정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 히브리서 12장의 논증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자식 만들기의 과정을 통과시키심으로 성화 시켜 가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것은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했지요?

그렇게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인격 속에 이미 “신의 성품에로의 참여“가 진행되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 속에는 그 때까지 그가 젖어있던 옛 성품과 신의 성품과의 충돌이 일어나게 되고 끊임없는 갈등과 의심과 때로는 감격과 기쁨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것은 나의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고스란히 내가 다 겪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다른 말로 책임이라고도 부르며 의무라고도 부르는 것이며, ”내가 싸운다.”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완성해 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내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내가 겪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방해하는 세력이 마귀의 세력입니다. 싸우는 것도 내가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대신 싸워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이길 때까지 우리를 채찍질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도우시지 않으시면 절대 우리는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는 끊임없는 전투가 있게 마련입니다. 무작정 “주님 도와주십시오.”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엡4:22-27)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절부터 새 사람을 입는 방법이 나옵니다)

25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새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기도만 하면 된다.“그러나요? 새사람을 입는 과정에서 마귀가 틈을 타서 방해를 할 것이니 너희는 너희의 의지를 발동해서 그 마귀의 미혹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벧후1:3-11)

3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히브리 사람들이 잘 쓰는 예언적 과거입니다. -미래에 반드시 완성 될 것을 미리 과거로 표현하는 방법- 그리고는 우리의 목표지점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러 저러한 것을 해야 한다고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아울러 제시하고 있습니다)

5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8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10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11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이렇게 구원받은 자들은 힘써 치러내야 할 전투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 전투를 치러 내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본문 10절에서 하나님의 전투와 인간이 치러내야 할 전투를 적절하게 조화시켜 기술한 것입니다.

(엡6:10)

10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누구의 힘입니까? 하나님의 힘의 능력입니다) 강건하여지고(누가 강건해 져야하는 것입니까? 내가 강건해 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영적전투는 100% 하나님이 하시는 것임과 동시에 100% 내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성도들은 우리의 신앙의 여정동안에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성화의 과정 속에서 싸워야 할 싸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은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식의 하이퍼 칼비니스트 적인 교리가 그 마귀의 실재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빼앗아 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른 교리를 정립하는 것은 성도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도 “정신일도 하사불성“ 식의 신앙생활이 마치 올바른 신앙생활인 것처럼 오해되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란 좋은 말 같지만 일제가 한국에 심어놓은 아주 나쁜 정신입니다.

예전에 일본과 러시아가 아시아 대륙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전쟁을 했습니다. 사실 일본은 대제국 러시아의 전쟁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지게 되면 국가의 존폐위기가 오게 되기 때문에 사력을 다해서 싸웠습니다.

반면 러시아는 이겨도 좋고 져도 상관없는 그런 전쟁이었기 때문에 사력을 다해 싸우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의 전투방법은 세계에서 유명한 퇴각 전투였습니다. 미리 참호를 다 준비해 놓고 적에게 치명타를 가한 후에 안쪽으로 후퇴해 들어가는 전투 방법입니다. 그렇게 전선이 자꾸 길어지다 보면 적군의 보급로가 길어져서 적군은 많은 병력을 식량과 탄약 보급에 쏟아 부어야 하고 기간이 길어지면서 지치게 될 때 한 순간에 잡아 버리는 그런 전쟁을 말합니다.

거기에 나폴레옹이 무너졌고 히틀러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렇게 러시아가 퇴각 전투를 하고 있을 때 러시아 안에 공산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을 포기하고 내분을 수습하는데 주력을 했습니다.

그 때 일본은 표면상으로 밀고 들어가고 있었고 러시아는 퇴각 중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승리로 그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그 전쟁 후에 일본 군부에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는 아주 몹쓸 병이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그 정신이 어떤 폐단을 낳았는가 하면 “노력하지 않고 실력이 없어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이길 수 있다”는 무모함을 낳은 것입니다. 그래서 실력도 없는 것들이 걸핏하면 머리 삭발하고 머리에 띠 두르고 “혹시나“하는 기대로 무모한 도전을 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게 일제 36년 동안 우리 조선 땅에 그대로 들어와서 공부를 하던, 운동 경기를 하던 심지어 종교 생활까지 어디서든 ”정신일도 하사불성“ 이 판을 치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양궁을 하는 선수들은 활을 들고 있는 왼팔의 근력을 열심히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호흡을 고르게 유지할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하고 오른 손은 아무리 강한 바람 속에서도 진동 없이 시위를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연습은 하나도 하지 않고 정신을 통일하고 과녁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신께 기도를 드리면 어느 순간 그 과녁이 남산 만하게 크게 보이게 된다는 식으로 “정신일도 하사불성”을 써먹었습니다.

야구 감독이 실력 없는 사람을 대타로 내 보내면서 정신만 똑 바로 차리고 공을 보면 “공이 수박 만해 진다“고 사기를 치는데 그 정신일도 하사불성이 사용된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도 우리가 일상의 삶 속에서 싸워 나가야 할 것들을 40일 금식 기도를 하면, 천일 새벽기도를 하면, 헌금을 도에 지나치게 정성스럽게 하면 마치 내 삶 속에서 완성되어져야 하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일이 저절로 일어나게 될 것처럼 이 “정신일도 하사불성”의 원리가 거의 정설처럼 회자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열심히 훈련해야 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대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딤전4:7-8)

7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8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여기서 “연습하라“”귐나조“는 ”운동선수들의 훈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올림픽 선수 촌에서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훈련받는 것을 보여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새벽부터 일어나서 거의 하루 종일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정말 지옥 같은 훈련을 합니다.

우리는 경건을 그렇게 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신의 성품을 방해하는 대적이 엄청난 세력으로 공격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신의 성품이 완성이 되어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단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것을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히12:4)

4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이렇게 교리가 조금만 흐트러져도 우리는 한순간에 무너져 버리리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를 읽다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이 어린 시절 다니던 서당에 칠성이라는 머리가 나쁜 아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 칠성이가 오성과 한음에게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고 합니다. 그때 오성 이항복 어린이가 내일까지 밑 빠진 독에 물을 가득 채워 오면 그 비결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답니다. 칠성이가 밤을 새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다보니까 물이 새긴 새는데 새는 속도보다 더 부지런히 물을 부으니까 그 독이 서서히 채워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다음 날 ‘칠성이’는 오성과 한음에게 좋아라하고 달려가서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웠노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공부를 잘 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오성 이항복이 그 칠성이 더러 “가서 그와 같이 하라”고 말했답니다. 우리는 경건을 그렇게 연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거룩은 누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셨지 거룩과 경건과 신의 성품까지 완성해서 함께 넣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그 모든 것도 은혜 속에 이루어 질 것이지만 우리는 끊임없는 훈련과 연습을 통해, 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 됨을 완성시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마귀의 엄청난 공격이 가해 질 것이고 우리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난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다 해주실 거야“ 이런 마귀의 미혹에서 얼른 벗어나십시오. 그건 엉터리 교리입니다.

-height. �]%l�y �;y d-mode:char;text-align:left;">예레미야 당시 그 유대 예루살렘에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믿겨지십니까?

엘리야가 “하나님 왜 나만 남겨 놓으셨나요?”라고 한탄 한 것을 기억하세요?

마틴 루터가 전 세계에 만연해 있던 가짜 기독교와 홀로 맞섰던 것을 기억하세요?

예수 믿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좁고 협착해서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그 길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열심히 가는 것“ 그게 예수를 믿는 성령 충만한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엉뚱한 것 기대하지 마세요. 바로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에서 여러분의 거룩을 챙기십시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피차 복종하세요. 섬기십시오. 겸손하세요.

그리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지닌,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세요.

이런 시가 있습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어떠세요? 여러분은 이러한 친구를 가지셨습니까? 아니,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이러한 친구가 되어주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바로 이런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남을 위해 존재하는 분들입니다. 먼저 여러분 곁에 있는 분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그게 피차 복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원수였던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 이웃의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저 인간하고는 죽어도 친구를 할 수 없어“라고 마음에 새겨 놓은 사람들이 있으세요?

(요15:15)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우리 주님이 우리 더러 친구랍니다. 이 천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그 분이 우리 더러 친구랍니다. 우리도 그렇게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 것은 그 예수님의 친구들에게 요구되는 삶이기도 합니다.

(요15:9-14)

9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12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14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오늘 본문에는 분명 “피차 복종하라”라고 되어 있지, “너희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잘하면 된다.“라고 적혀있지 않습니다. 그게 복음의 핵심을 흔드는 일이 아니면 무조건 져 주세요.

그러나 복음 앞에서는 목숨을 걸고 싸우세요.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돌에 맞고 했습니다. 져 준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율법에 묶여 있던 베드로에게는 그의 잘못을 서슬이 퍼렇게 지적했습니다.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이10-11)

10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11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하지만 이런 경우가 아니면 그냥 져 주세요. 섬겨 주세요. 어떠세요. 예수 믿는 거 쉽지 않죠?

마지막으로 갈라디아서 5장의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갈5:13-15)

13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15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