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마귀를 대적하라(III)
(엡6:10-13)
10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13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우리는 지금 몇 주간에 걸쳐서 마귀가 우리 성도들을 어떻게 공격하고 있는지에 관해 공부해 오고 있습니다. 오늘도 지난주에 이어서 마귀가 우리 성도들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공격하고 있는지에 관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 정, 의입니다. 인간은 지, 정, 의에 의해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천을 합니다. 마귀는 이 인간의 지, 정, 의를 효과적으로 공략함으로 해서 바른 신앙생활을 막습니다.
우리는 “지, 정, 의”의 올바른 조화 속에서 바른 것을 인식하고 바른 것을 체험하며 바른 것을 실천에 옮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 “지, 정, 의”의 불균형이 일어나게 만들어 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지, 정, 의” 중에 어느 하나에 지나치게 치중하게 만들거나 어느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다른 것들을 놓아버리게 만드는 방법을 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식과, 감정과 실천의 “지, 정, 의” 중에 지적인 문제에 편중된 사람을 생각해 보세요. 성경은 지식에 편중되는 것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고전8:1)
1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뭔가 부족한 지식, 그러니까 다른 것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편중된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편중된 지식과 사랑이 왜 대조가 되어 있는지 아세요?
사랑은 행동을 유발하는 것임에 반해서 편중된 지식은 그 행동이 결여됨으로 다른 이를 정죄 하고 비판하는 교만의 자리에 앉게 된다는 것을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13:4-7)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다 뭡니까? 사랑은 행동입니다. 사랑은 절대 그냥 머리로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식은 실천 없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지식이 행동과 동 떨어져 혼자 다니면 “너는 이래서 틀렸지, 너는 저래서 안 돼지, 이렇게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됐지”밤낮 비판밖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행동이 수반되는 사랑은 어떻습니까?
(벧전4:8)
8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행동이 수반되는 사랑은 이렇게 상대방의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그래서 행동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사랑과 행동 없이 홀로 떨어져 존재할 수 있는 지식을 대조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적 대 각성 운동이 먼저 어떻게 시작이 되었습니까? 조나단 에드워드나 조지 휫필드, 요한 웨슬리, 무디 같은 설교자에 의해 올바른 복음, 즉 지식이 전달이 됩니다. 거기서 성령께서 그 영원한 지식, 성경 말씀을 조명해 주시고 이해를 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그 깨달음이 그 마음을 휘어잡게 되고 회개를 합니다. 통회 자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통회 자복은 그를 움직이는,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어떤 지역에서 영적 대 각성 운동이 일어나게 되면 그 지역의 음란한 술집이나 유해 업소들이 하나같이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마약 상들이 마약을 불태우고 도박장 주인이 도박장을 헐고 교회를 만드는 그러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항상 “지, 정, 의“가 올바른 균형을 이루며 영적 대 각성 운동은 꽃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그 영적 대 각성 운동은 꼭 얼마 되지 않아서 흐지부지 끊어지게 됩니다. “왜 끊겼냐?”를 보면 언제나 균형을 갖추어야 할 그 세 가지가 따로 놀아서 끊어집니다. 지식의 길, 경험과 감동의 길, 그리고 실천의 길이 따로 놀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으로 “따로 따로”가 됩니다. 영적 대 각성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사람들이 성경을 공부하고자 하는 열정이 생기게 되어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그러면 사단은 꼭 그 안에서 지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킵니다. “예정론이 맞느냐 틀리느냐, 세례가 옳으냐? 침례가 옳으냐? 유아 세례를 주는 것이 옳으냐? 안 주는 것이 옳으냐? 내가 어느 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항상 이러한 논쟁들이 내가 신자로 살고, 신자로 감동하고 신자로 깨우쳐 나가는 일을 중지시켜 왔습니다. 예배 시간에도 “왜 여기는 성가대가 없지? 왜 여기는 목사가 가운을 안 입고 설교를 할까? 왜 예배 순서가 이래?” 이러한 지적인 논쟁이 정작 추구해야 할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막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의 중부에 있는 어떤 교회가 잘 성숙해 가고 있던 중에 목사가 세족식을 할 때 “오른 발부터 닦는 것이 옳으냐? 왼발부터 닦아주는 것이 옳으냐?“ 로 싸움이 붙어서 교회가 갈라지고 갈라져 나간 사람들이 바로 그 교회 앞에다가 교회를 개척했다고 합니다. 그 교회 이름이 ”RIGHT FOOT CHURCH"입니다. 실제로 그 교회가 오늘도 버젓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부 때 양수리 수양 관으로 여름 수양회를 떠났었습니다. 그 때 강사 목사님의 성함은 잊었지만 한 쪽 다리를 못 쓰시는 아주 훌륭하신 분이셨습니다. 그 분이 저에게 개혁 주의 신학이 무엇인지를 처음 접하게 해 주신 분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전해 주시는 말씀이 너무 너무 좋아서 모두들 푹 빠져 말씀 듣고 밤이면 함께 모여 기도하고 하는데 분임 토의 시간에 그 때 한창 한국 교회를 뒤흔들었던 “구원의 확신”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자기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구원받았는가를 확실하게 기억해야 한다.”는 “구원 확신 파”와 “그렇게 정확한 날짜와 시간과 장소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안 된다”는 사람들 간에 설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양파로 갈라져서 수련회 내내 싸움만 하다가 내려 온 적이 있습니다. 그 수련회는 그 “구원 확신”에 관한 싸움 때문에 망친 것이죠. 제가 거기에 제 친한 친구들을 몇 명 전도해서 올라갔었는데 그 친구들 볼 면목이 없더라고요. 그 잘난 논쟁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들을 놓쳐버린 아주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드라마 같은 데 보면 여자들이 데이트를 나가기 위해서 머리 손질을 하다가 머리 스타일이 자기 마음대로 나와 주지 않으면 그거 만지고 또 만지고 하다가 결국 약속 시간에 늦는다든지 아예 약속 장소에 안 나가고 이불 뒤집어쓰고 우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요? 사소한 것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를 미혹하는 방법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사소한 것에 집중을 시켜서 그 싸움이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것이 되게 합니다.
여러분 교회 생활하시면서 여러분이 마음에 안 드시고 성에 안 차는 일들이 분명 있으실 겁니다. 그 때 그게 정말 논쟁거리가 되는지 여러 번 재고를 하시고 공론화 시키세요. 자칫하면 사단의 계략에 넘어가서 교회가 정말 추구해야 하는 것들을 놓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지적인 습득과 그 것을 수호하기 위한 논쟁에만 치중을 하게 되면 성도는 성숙한 자리로 자랄 수 가 없습니다.
두 번째로 사단은 경험과 감정에 편중되도록 성도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이게 오늘 날 한국 교회에 제일 크게 있는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 속에서 다른 것이 배제되고 “경험과 감정”으로 편중이 되면 그냥 “내가 기쁜가, 내가 감동스러운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공부할 때나 찬양을 할 때나 기도를 할 때 마음이 뜨거워지고 기뻐지고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올바른 깨달음이나 올바른 인식이나 이해가 배제되고 무조건 “내가 기쁘고 내가 감동스러워야 한다.”는 것에 치중을 하게 되면 자꾸만 더 큰 감동과 더 큰 기쁨만을 좇게 되고 그러한 감동과 기쁨이 없는 것은 전부 가짜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한국은 부흥회가 유행이었습니다. 몇몇 유명 부흥강사가 전국을 떠 돌며 사람들을 웃기고 울려 주고 할 때입니다. 제가 중학교 때부터 그런 부흥회를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는 제가 남성 복 4중창단을 했었습니다. 그 중창단이 전국 대회에서 입상을 하고 난 뒤에 저희 동네 교회들로부터 부흥회 특 송 초청이 아주 많아졌었습니다. 그렇게 이러 저러한 이유로 저는 그런 사람의 감동을 격발시키는 부흥회에 아주 자주 참여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냥 주일 예배는 시시해서 하품이 나더라고요.
왜 우리 목사님은 그 때 그 부흥사처럼 감동을 격발시켜 주지 못할까? 왜 우리 교회 예배는 이렇게 고리타분할까? 이런 생각하느라고 예배를 못할 지경이 되어 버리더라고요.
성경은 그렇게 희열과 기쁨과 감격만으로 나를 채우려고 하는 것을 “쾌락을 좇는다.”라고 엄히 꾸짖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쾌락을 좇는 것”은 단지 세상에서의 쾌락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배당 안에서도 “나를 기쁘게 해 주고, 나를 감동시켜 주는 것”만을 원한다면 그게 바로 “쾌락을 좇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성도는 실천에만 편중되어 있어서도 안 됩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이 실천으로만 편중이 되다보면 자기가 한 일이 자기의 자랑이 되어 버립니다. 그 것 말고는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해 낸 일이 자랑스러워지고 자기만큼 실천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심판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 가지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지식에 편중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지금 너무 경험에 편중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지금 너무 감동에 편중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지금 너무 실천 위주로 되어서 교만한 자리에 가 있지는 않은가?” 잘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걸 어떻게 판별할 수 있지요? 나의 그 모든 “지, 정, 의”의 열심들이 나의 거룩에 기여를 하고 있는가를 보시면 됩니다. 그러한 나의 열심히 내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성경 지식이, 나의 체험이, 나의 봉사와 실천이 나를 교만하게 하고 있는지 아니면 나를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가고 있는지 여러분은 늘 확인 하셔야 합니다. 만일 아니라면 여러분은 마귀의 궤계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세요. 사단은 우리의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가지고도 우리를 넘어뜨리는 자입니다.
(마6:2-5)
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5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보세요. 구제와 기도는 참 좋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것이 나의 거룩이 아닌 나의 자랑을 위한 것이 된다면 그 것도 하나님의 꾸중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렇게 우리의 “지, 정, 의“의 불균형을 공격함과 동시에 세상의 철학과 과학으로 성도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골2:8-15)
8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9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11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 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지금 사도가 세상의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조심하라고 경고한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 세상의 철학과 속임수와 대조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15절을 보시면 그 십자가가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리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철학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권위에 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세상 철학은 인간을 최종 권위자로 믿는 것이고 기독교는 하나님을 최종 권위자로 믿는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철학은 ”인간의 생각으로 사물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진리이고 인간의 이해의 범주를 벗어난 것은 거짓이다“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모든 사실은 객관적 논증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철학이라는 것은 인간이 가진 이성이 모든 것을 이해하며 모든 것을 정리하며 모든 것의 위치를 선정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완전성과 능력을 그 기준으로 하는 휴머니즘을 기초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의 출발이 어디입니까? 그리스죠. 그 그리스야말로 인본주의의 극치를 달리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그리스에서는 신도 사람처럼 그립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생각해 보세요. 전부 그렇지요?
그러니까 모든 것은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하고 모든 것은 사람으로 귀결되는 것이라는 것이 철학의 기본인 것입니다. 그 사상이 형이상학으로 올라가면 그게 철학이고 그 사상이 형이 하학으로 내려오면 그게 과학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세상 철학과 과학이 성경을 바라보게 되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모두 도려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동정녀가 아이를 낳나? 어떻게 사람이 물 위를 걸어? 어떻게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나 뻥튀기가 되어서 2만 명이 먹을 수 있는 양이 되나?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 그건 다 어떤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 제자들이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그 사건들이 주려는 교훈만 잘 알아들으면 되는 거야“ 이게 바로 철학과 과학이 성경을 보는 눈인 것입니다. 그 사조가 신학에도 들어오게 되었지요? 그러한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이라 부릅니다. 클레오몬트나 프린스톤, 하바드 같은 곳에서 가르치는 신학입니다. 전부 일류 신학교지요. 똑똑하고 과학적인 두뇌를 소유한 사람들은 그러한 세상 철학과 과학으로 미혹하는 사단의 미혹에 아주 쉽게 빠질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내가 공부했던 세상 지식들이 오히려 나의 신앙에 방해가 되더라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빌3:1-9) .
1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개들을 삼가고 행악 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 할례당을 삼가라
3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4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사도 바울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세상 지식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 이유는 그 세상 지식이 “자”가 되어서 그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재려고 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게 오히려 나의 신앙을 방해 하더라“ 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혜 우리의 세상 지식은 우리의 구원과 신앙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것은 초월적인 것이요 신비스러운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고전1:20-29)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인간의 지식, 지혜는 복음을 이해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자꾸 세상의 철학과 과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계산하게 만들고 재게 만들어서 의심을 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단의 공격 방법이 신앙을 자꾸 관념화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사단은 믿음을 추상화시키고 이론화시켜서 성도의 신앙을 그냥 지적인 동의에 머물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되지 꼭 수요 예배에까지 가야해? 기도는 꼭 저렇게 소리 지르면서 해야 해? 헌금은 꼭 해야 해?” 이렇게 신앙을 그냥 관념화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와는 다르게 열심을 부리는 사람들을 맹신자라고 비아냥대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지요. 물론 어떤 면에 있어서는 맞는 말도 있습니다. 꼭 새벽 기도 안 나오셔도 됩니다. 꼭 울고불고 기도 안 하셔도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래서 난 안 해”로 결론이 난다면 그 사람은 더 불쌍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공격은 소위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우리 교회 같은 데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바르게 배웠다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수렁입니다. “뭐 저렇게 유별나게 난리를 떠나?” “좀 지적으로 고상하게 믿을 수 없나?” 아니요. 신앙생활은 좀 부산하고 수선스러워야 합니다. 저는 예수를 알고 난 뒤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던데요. 뭐라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더라고요. 생각해 보세요. 누군가 사랑하는 분이 생겼어요. 그러면 우리는 하루 종일 그 상대방을 위해 무엇을 해 주어야 그 사람이 행복할까를 생각하지 , 않습니까? “꽃을 선물할까? 반지를 선물할까? 멋진 식당을 예약할까?”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표현도 하지 않고 상대방이 사랑을 좀 표현 해달라고 하면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거야” 그런 사람은 정말 재수 없지요. 정말 사랑한다면 그렇게 무덤덤할 수가 없습니다. 별의 별 시도를 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조금 부산해 지는 것이 맞습니다. 너무 고상들 떨지 마세요.
그리고 또 사단은 우리 성도들의 무분별을 공격합니다. 많은 분들이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구별을 잘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무분별로 인해 아주 낙심을 하거나 심지어 “난 가짜인가 봐”하고 절망까지 하게 됩니다. 마귀는 그러한 무분별을 공격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지요.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 너무 감격스러워 남들처럼 기도를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에 새벽 기도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정도 잘 버텼는가 싶었는데 그 다음부터 몸이 따라 주지 않습니다. 분명 자명종을 맞춰놓고 잤는데도 일어나 보면 8시입니다.
그 때 사람들은 보통 “난 영적으로 너무 나태해”하고 절망을 합니다.
여러분 새벽에 매일같이 일어나는 것도 오랜 연습을 통해 가능해 지는 겁니다. 맨발의 기봉이가 매일 매일 10키로, 20키로, 30키로 이렇게 늘려가며 연습을 해서 결국에는 42.195km를 완주해 낸 것처럼 신앙생활도 꾸준한 연습과 훈련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오래 하고 싶어서 작정하고 앉아서 “조지 부시서부터 노무현 대통령 오사마 빈 라덴, 김정일까지 기도를 하고 아프리카, 중국, 10/40 윈도우까지” 다 기도를 해도 5분밖에 안 지났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옆에서는 중얼중얼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옆 사람들의 기도가 안 끝납니다. 그 때 보통 사람들이 절망하지요. “아무래도 난 아닌가봐”
아닙니다. 여러분 기도는 중노동입니다. 기도는 훈련과 연습이 없이 저절로 되어지는 것 아닙니다. 기도도 연습하셔야합니다. 처음에는 10분, 그 다음에는 20분, 그 다음에는 30분 이렇게 오래 앉아 있는 연습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체력이 약하신 분은 매일 새벽 그렇게 못 일어납니다. 그런 것들은 체력의 문제이고 훈련의 문제이지 “영적인 문제”가 아님에도 사람들은 그런 것을 영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절망을 합니다.
왜 여자들이 새벽기도에 많이 나오는지 아세요? 남자들은 낮에 노동을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가끔 밤에 술도 한 잔 해야 하고 얼마나 피곤합니까? 여자들은 그래도 낮에 잠깐씩이라도 졸 수 있잖아요. 그런데 “왜 나는 우리 집사람보다 신앙이 못 할까?” “난 구제불능인가 봐”그렇게 절망한다니까요.
여러분 너무 피곤하면 새벽기도 안 나오셔도 되요.
이번 중국 선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사람이 있었어요. 선교를 가려고 하는데 회사에서 절대 휴가를 안 내준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 때 상사에게 좀 더 강하게 자기 의사를 피력하지 못하고 그냥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선 것 가지고 “난 영적인 사람이 되기에는 아직 멀었어.” 이렇게 자책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아닙니다. 그건 잘하신 거예요. 그런데 사단은 거기다 대고 “너 그러고도 진짜 그리스도인이야?” 이렇게 우리를 낙담시킨다고요. 아니요. 그건 체력의 문제요, 훈련의 문제요, 환경의 문제이지 영적인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기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외향적이요, 어떤 사람은 내성적이며 어떤 사람은 적극 적이고 어떤 사람은 소극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사람은 교회의 행사나, 앞에 나서서 해야 할 일을 잘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난 왜 늘 이렇지, 난 아직 멀었나봐” 이렇게 절망하시면 안 됩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해서 그 기질까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그래도 남들은 다 잘 하는데 왜 너만 못해?”라고 질책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낙담시킵니다.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앞 장 서서 하는 일을 잘 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뒤에서 설거지하는 일에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앞에서 흘리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뒤에서 주우며 가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물건을 잘 파는 사람이 있으면 뒤에서 밤새 그 음식을 만들어 대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질의 문제이고 성격과 개성의 문제이지 영적인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속지 마세요.
이렇게 사단은 육체적이며 심리적인 문제들을 영적인 문제로 오해시켜서 자아의식 과잉에 빠지고 자기 연민에 빠지고 자기모순에 빠져서 많은 시간을 자기를 깨물다가 허송세월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성도의 문제가 영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것을 단순히 육체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으로 핑계를 대게 만드는 사단의 공격도 있습니다.
내가 기도가 안 되고 신앙생활이 정당하게 되지 않는데 그 것을 단순히 “내가 각오와 결심을 안 해서 그렇지, 언젠가 결심만 하면 금방 될 거야”라고 그냥 그 상황에 안주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태한 삶이, 기도가 뭔지 모르고 예배가 뭔지 모르고 왜 내가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영적인 무지에서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는 다 알고 있고 깨달았는데 단지 결심만 미루고 있을 뿐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의 나태는 교리의 부재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자란 누구이며, 은혜는 무엇이며, 언약이 무엇이며,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이해가 없이 결심을 강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상태에서 결심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금방 피곤해 집니다. 그럼에도 사단은 그러한 것들을 육체적인 결단이나 힘의 부족으로 오해시켜서 ”주님 제게 사랑을 주십시오. 충성을 주십시오, 기도하게 해 주십시오, 헌신을 주십시오, 능력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게 만듭니다. 사실은 영적인 무지에서 온 것임에도 ”나에게 능력만 있으면, 나에게 충성만 있으면, 난 잘 할 수 있어“라고 오해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사단은 민족성을 타고 들어와 공격을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한국 민족이 최고의 경지로 여기는 것은 “군자의 도”입니다. 군자의 도는 “자기도 잘못을 저지르면 안 되지만 남들에게 잘 못을 저지른 사람으로 오해되어도 안 된다“는 기본 토대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혹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남들에 의해 모함을 받거나 무고를 당했을 때도 우리 조상들은 ”다 내가 부덕한 탓이라“고 자기를 탓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민족성 안에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내가 누군가에게 나의 약점을 보이거나 나의 실수를 들키게 되면 나의 체면에 커다란 손상이 온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언제나 거룩한 사람 투성이입니다. 문제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집에서는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에 와서는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부부인 척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교회의 참 교제를 깨는 마귀의 공격인 것입니다. 교회는 서로의 고민이나 잘못이나 갈등이나, 실수를 언제든지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그 “군자의 도”가 그걸 막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훌륭한 사람의 기준이 그렇게 무흠하고 완벽한 것임에 반해
기독교 정신을 문화유산으로 갖고 있는 서구의 위인의 기준은 좀 다릅니다.
2차 대전 때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할 당시 연합군은 독일군의 시야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미국 공수부대를 독일 내륙 심장부에 낙하를 시킵니다. 그래서 독일군의 모든 포화를 그 쪽으로 유인합니다. 그 사이 연합군의 주력부대가 노르망디로 상륙을 하는 것이지요.
그 때 미 공수부대는 완전히 미끼로 던져진 것이기 때문에 보통 고생을 한 것이 아닙니다.
추운 날 참호를 파고 거기서 먹고 자며 몇 날 며칠을 버팁니다. 그러나 한번은 아주 위급한 상황이 닥쳤습니다. 독일군들이 그들을 완전히 포위를 하고 총알과 포탄을 비 퍼붓듯 퍼부었습니다. 미 공수 부대는 아예 고개도 못 들고 전부 참 호 속에 머리를 박고 숨어 있었답니다. 그 때 한 병사가 머리를 든 정도가 아니라 밖으로 혼자 뛰어 나가서 적의 제일 큰 주력 화기인 기관포를 격파하고 포위망을 뚫었습니다. 그래서 미 공수부대는 그 병사의 덕택에 무사히 포위망을 뚫고 나올 수 있었답니다. 우리나라의 위인전이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정석입니다. 그런데 그 미국의 위인전에 보면 그 병사가 그 뒤에 엄청난 고민을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영웅으로 치켜 주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너무 무서워서 참호 속에서 견디지 못하고 뛰어나간 것이지 사명감에 불타서 뛰어나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자신을 영웅 취급하니까 너무 부담스럽다는 것이었습니다.
동료들이 그래도 누군가 해야 했던 일이었는데 네가 했으니 너는 영웅이 맞다고 하니까 그 병사가 “왜 그게 하필 나여야 하냐?”하고 갈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서구의 영웅은 다릅니다.
김유신처럼 자기 말이 천관녀의 집으로 자신을 데리고 가자 단 칼에 그 말의 목을 베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런 영웅은 별로 없습니다. 무과를 치르다가 말에서 떨어진 뒤 아무 말 없이 버드나무 가지로 부러진 다리를 묶고 다시 말을 달렸다는 그런 이순신 같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모함을 당해서 백의종군 하면서도 아무런 불평이나 갈등 없이 묵묵히 쌀자루를 날랐다는 그런 장군은 별로 없습니다. 모두 갈등하고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실수하고 실패하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큰일을 치러내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위인인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여전히 죄에 푹 젖어 살던 옛 사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끝없이 실수하고 끝없이 갈등하고 끝없이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 씩 조금 씩 알아 가면서 그 은혜에 대한 감사가 우리를 바꿔 가는 은혜로운 체험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고후1:8-9)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여러분은 여러분의 교회에게 “나 예수 믿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자살까지 생각해 봤어” 이런 소리를 서슴없이 하실 수 있으십니까? 사도 바울은 지금 유대인의 선생이며 고린도 교회의 목회자입니다. 그런데 그 형제들에게 “형제들아 내가 예수 믿는 게 너무 힘들어서 살 소망이 다 끊어졌다”라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왜 그게 안 되지요? 사단이 우리의 체면 문화를 타고 들어와서 성도간의 친밀하고 긴밀한 교제를 막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단 마귀의 세력은 치밀하고도 빈틈없이 우리 성도들을 공격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쉴 틈 없이 우리를 공격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의 대적은 혈과 육이 아니라 마귀다,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늘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하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대적이 있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마시고 오늘도 성실하고 부지런히 그리고 치열하게 우리의 신앙생활을 경주해 나갑시다.
(엡6:10-13)
10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김성수 목사 > 에배소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81) 어떻게 대적할 것인가? (엡6:10-13) (0) | 2013.10.05 |
---|---|
(80) 마귀를 대적하라(IV) (엡6:10-12) (0) | 2013.10.05 |
(78) 마귀를 대적하라(II) (엡6:10-14) (0) | 2013.10.05 |
(77) 마귀를 대적하라(I) (엡6:10-13) (0) | 2013.10.05 |
(76) 종들아 상전들아 (엡6:5-9) (0) | 2013.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