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에배소서

(81) 어떻게 대적할 것인가? (엡6:10-13)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2:46

(81) 어떻게 대적할 것인가?

(엡6:10-13)

10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우리는 몇 주간에 걸쳐서 마귀가 우리를 어떻게 미혹하는지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오늘은 그러한 마귀의 공격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관해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10절을 보시면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이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 지는 것”이라고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 사도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는 권고의 구절과 병행시켜 10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신 갑주를 입는다는 것과 주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지라‘ 는 구절은 같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주안에서”라는 구절이,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마귀를 대적하는데 있어서 “주안에서” 싸우라는 것은 우리가 마귀를 대적해서 싸우는 것이 내 개인적인 싸움의 차원이 아니라 ‘주님의 몸‘이라는 전체로서의 싸움이라는 것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마귀와의 싸움은 지금은 나 혼자의 싸움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전체 교회의 구속의 완성의 측면에서 허락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겪는 마귀와의 싸움은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우리는 ’주안에서‘라는 구절에서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배운 교회 론에 입각해서 생각해 보면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유기체입니다. 그래서 나의 패배와 나의 실수는 나에게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교회가 무엇인지 알고 ‘주안에서’ 싸워야 하는 ‘대적들과의 싸움’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다면 절대 쉽게 포기하거나 좌절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나의 천국 형제, 자매들이 정말 소중하다는 것을 바로 인식하고 있다면 그리고 나의 실수와 나의 패배가 그 사랑하는 분들에게도 폐가 된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새로운 각오로 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괴물이라는 영화에 보면 송강호가 그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송강호는 괴력을 발휘합니다.

아마 그게 자기 혼자만의 싸움이었다면 그는 쉽게 포기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 싸움에는 자기의 딸과 가족들의 안위가 걸려 있거든요. 자기가 지면 딸의 목숨도 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가족들까지도 위험해 지거든요. 그러니까 그러한 괴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잡힌 연쇄 살인범의 기사를 읽다보니까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겠더라고요. 원래 그 사람은 혼자서 그렇게 연쇄 살인을 계획했던 것이 아니었답니다. 교도소 동기하고 둘이 같이 모의를 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범행을 막 시작하려고 할 때 돌아섰답니다. 그 돌아선 이유가 어린 자기 아들들 때문이었답니다.

자기가 또 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면 이제 자기 아이들이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인데 그 아이들이 아빠 없는 아이라고 놀림을 당하게 될 것이 너무 가슴이 아프더래요.

그리고 혹시 자기가 교도소에 가 있는 범죄자라는 것을 자기 아이들 친구들이 알게 되면 그 아이들이 얼마나 괴로울까를 생각하니 도저히 범행을 하지 못하겠더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범행 직전에 돌아섰고,

이번에 잡힌 그 범인도 역시 가족이 있었고 아이들이 있었지만 자기로 말미암아 가족들에게 어떤 피해가 가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수 십 명의 부녀자들과 노인네들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천국 가족인 교회를 바로 인식하는 것과 내가 그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이라는 것을 바로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게다가 교회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어떤 한 지체가 잘 성숙하게 되면 상승작용이 생깁니다.

다니엘에게는 풀무 불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세 친구가 있었기에 다니엘이이 다니엘이 된 것입니다. 그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는 다니엘이라는 걸출한 친구가 있었기에 그들이 풀무 불을 견딘 것입니다. 에스더에게는 모르드개가 있었고 바울에게는 실라와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 상승작용을 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가 우리 지체들에게 피해만 주고 있다면 그러고도 전혀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면 어찌 우리가 복음을 바로 이해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바로 ‘주안에서’ 마귀를 대적하라는 구절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마귀와 대적해서 싸우시면서 자부심을 가지시란 말이에요. 여러분의 그 분투가 하나님의 전체 교회에 상승작용을 가져다준다는 엄청난 유익을 생각하시면서 잘 참으시란 말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엄청난 고생들을 한 것, 성경을 통해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바울 같은 그러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끊임없는 마귀의 공격에 노출이 되었습니다. 그들도 아주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막아 주시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그들이 겪는 고통이 전체 교회에 득이 되었습니까? 해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그러한 마귀의 공격으로 인한 고난까지도 선용하셔서 교회의 성숙과 양육에 사용하고 계심을 아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바울이 가는 곳마다 두들겨 맞고, 자기가 세운 교회에서 배척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그 몸에 사단의 가시라는 질병을 갖고 있었던 것이 때론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격려와 위로가 되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저 사람은 저런 상황 속에서도 저렇게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사는구나, 난 내가 제일 힘들고 어려운 사람인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힘을 내자’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곤경에 처한 사도 바울을 시기해서 더 많은 열심을 부리는 사람들도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겪는 마귀의 공격을 전체 교회 안에서 다시 이해를 해 보면 나의 고난은 나 혼자만의 고난이 아니고 나의 눈물도 나 혼자만의 눈물이 아닌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1장이 그 이야기를 이렇게 요약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고후1:4-10)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사도 바울은 자신과 동료들이 아시아에서 받은 고난은 다른 교회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혹독한 고난을 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러한 고난을 겪고 난 후에 ‘내가 또 이러한 고난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건지실 것이라는 걸’ 배우게 되었습니다. 더 강해 진 것입니다. 그 것을 고린도 교회 형제자매들에게 편지로 써서 ‘너희들도 그러한 고난이 오게 되면 하나님을 의지해서 잘 이겨내라’는 권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싸우는 그 싸움은 우리만의 외로운 싸움이 아닙니다. 전체 교회 안에서 여러분의 싸움을 다시 바라보세요.

나의 분투가 다른 교회 지체들에게 상승작용을 일으켜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여러분을 강건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안에서’의 싸움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교훈은 이 싸움은 결국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그 싸움은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주와 함께 싸우는 싸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와 함께 싸워 주시는 우리 주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 주님께서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끄시고야 말 것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히12:1-2)

1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는 스스로 온전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온전케 만드신다고 하십니다. 이 구절은 앞의 11장을 받아서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11장에 어떤 내용이 나옵니까? 믿음의 조상들이 죽 열거되지요. 그 11장의 내용을 받아 ‘그렇게 열심히 마귀와 대적하며 싸워낸 구름같이 많은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그러니 그들을 본받아 우리도 열심히 경주하자‘’그런데 그 구름같이 많은 허다한 증인들이 어떻게 싸웠는지 아니? 바로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봄으로 싸워 이긴 거야‘라고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부끄러움과 고통을 개의치 않으시고 참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그 예수가 우리를 마귀의 공격에 그대로 당하게 만드시겠느냐? 왜? 그 분은 우리의 머리니까, 우리의 머리는 우리가 지옥에 가면 함께 지옥에 가셔야 하는 운명 공동체로 묶여 있기 때문에 그 분은 우리의 싸움에 개입하셔서 그 전쟁을 반드시 승리로 이끌어 내실 거야” 이 확신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피 흘리기까지 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긴 싸움이기 때문에 신이 나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로 다음 3절이 이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히12:3-4)

3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4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롬8:26-35)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휘페렌 팅카노, 스테낙모스’라는 이 단어들은 성령께서 신음까지 내시면서 우리를 위해 중보를 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여러분 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질 수 있나요)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러니까 모든 것은 선용되어서 선으로 수렴이 되는 것입니다)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쉼몰프호스, 같은 모양)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반드시 일어나게 될 예변적 과거)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3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여러분들에게 바로 이런 배짱이 있냐 말입니다. ‘난 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주안에서 싸우고 있다’

(엡1:17-19)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지금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힘이 우리를 끌고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라고 사도 바울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6:26-30)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께서 화려하게 입히시고 배불리 먹이십니다.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게 누구입니까? “너희 아버지“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하늘의 새와 들의 백합화도 돌보신다면 자녀인 우리는 어떠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빌립보서 1장 6절에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반드시 완성하실 것이라고’확신에 찬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확신이 있는 사람들, 지금 내 안에서 나보다 더 열심히 신음을 내며 기도하고 계시고 나를 완성시키시기 위해 싸우고 계신 우리 주님이 계시다는 것이 확인 된 사람들이, ‘그럼 잘 싸워보세요‘ 하고 뒷짐 지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저하고 제 아버님하고 고모님 댁엘 간 적이 있었습니다. 마땅히 주차할 곳이 없어서 아버님을 먼저 내려드리고 동네 골목으로 들어가서 주차할 곳을 찾다가 그만 어떤 집 앞에 있는 다 찌그러진 냄비를 밟았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나이도 어린 사람이 좋은 차를 타고 가니까 한 몫을 잡으려고 그랬는지 차 앞을 가로막고 섰습니다. 제가 내려서 ‘죄송하다’고 인사를 했고 냄비 값을 물어주겠다고 했는데도 막무가내로 ‘정신적 피해 보상’을 하라고 멱살을 잡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한 대 때려 주려고 했는데 저만치서 아버님이 오셨습니다.

주차하러 간 아들이 오지 않으니까 찾으러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파자마 바지와 런닝 셔츠 차림의 어떤 건달 같은 놈이 아들의 멱살을 잡고 금방 잡아먹을 듯이 하고 있으니까 쏜살같이 달려오셔서 ‘이유 불문’으로 그 사람을 밀쳐 내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그 사람이 우리 아버님한테 달려가서 멱살을 잡고 대들었습니다. 이제 저와 그 남자의 싸움에서 우리 아버지와 그 남자의 싸움이 된 것입니다. 그 때 저희 아버님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이놈이 지금 어디다 손을 대, 이아들이 어떤 아들인데’ 그 때 제가 ‘이제 우리 아버지가 해결해 주시겠지’하고 마음 편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쫓아가서 찌그러진 냄비로 뒤통수를 갈겨 주었죠.

그런 것입니다. 내 아버지가 내 안에서 거룩을 향한 나의 실패와 실수를 나보다 더 슬퍼하시고 고통스러워하시며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패만 하는 아들을 위해 홀로 싸우고 계십니다. 그 걸 아는 우리가 뒷짐 지고 가만있을 수 있다고요? 그걸 아는 우리가 잠 하나도 못 이기며 그런 게으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도 그 천부가 내 아버지가 아닌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날 사랑하셔서 내 대적들과 혈투를 벌이고 계시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싸우시는 싸움은 여러분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하는 우리의 아버지이며 신랑이며 벗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인하고 다시 한 번 새로운 승리와 자신을 찾으라는 것이 ‘주안에서 싸우라’는 구절이 주는 또 하나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자들은 강건해 질 수밖에 없지요. 그들은 그 강건함을 가지고 나가서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주님께 맡기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서도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in his mighty power”라는 구절이 있지요. 언뜻 보면 ‘우리가 강건해 질 수 있는 힘의 근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힘이다‘라는 의미로 보이지요? 맞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힘의 능력만을 의지하라는 말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게 바로 하이퍼 칼비니스트들의 주장입니다. 만일 그 구절이 말하는 것이 그런 뜻이라면 왜 굳이 우리가 강건해 져야 합니까? 예수님이 다 싸워주시고 우리는 싸우지도 않을 거면서 왜 우리가 굳이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까?

분명 본문 10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의지하라”는 내용이지만 그 힘을 의지해서 우리가 강건해 져야 한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할 몫이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주님께 맡긴다, 주님께 의탁한다.“라고 하는 것은 ”주님 내 대신 싸워 주세요, 저는 그냥 낮잠이나 잘게요“가 아니라 이 싸움의 원리와 힘과 지혜와 방법과 모든 것이 내가 갖고 있는 인간의 생래적인 재주와 능력과 지식과 방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 즉 십자가의 원리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 ‘주께 맡긴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앞서 공부한 에베소서4장에 그 구별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엡4:17-32)

17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28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우리가 이방인이었을 때(민족적 구별이 아님)구원받기 전에는 어떤 공격이나 상황에 대처할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의 습관이나 우리의 방법으로 반응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기 전의 이방인들은 당연히 나를 보호하고 나를 높이기 위해 남을 밟아 버리고, 핑계를 대고, 험담을 하고, 상대를 밟아 버리는 것으로 반응을 하게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인, 덕을 세우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를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함같이 하는 것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께 맡기라’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 맡기라’는 말은 어떤 일에 반응을 할 때 세상의 방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방법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드릴게요.

우리 첫째 아이가 공부를 잘 합니다. 그리고 동생들 공부를 차근차근 잘 도와줍니다.

얼마 전에 우리 둘째 아이가 산수 숙제를 가지고 끙끙거리고 있기에 제가 ‘형님한테 부탁해’ 그랬더니 이 녀석이 숙제를 통째로 형한테 맡겨버리고 저는 놀고 있었습니다. 제가 ‘형님한테 부탁해, 형님한테 맡겨’라고 이야기를 한 것은 ‘너는 실력이 부족해서 네 방법으로는 안 되니까 형님으로부터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을 배워서 네가 풀어봐‘라고 이야기를 한 것이지 형한테 아예 숙제 전체를 맡기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과 원리와 능력을 배워 마귀의 공격에 맞서 우리가 싸우는 것이지 ’예수님한테 맡기고 낮잠이나 자고 있으면 예수님이 무조건 다 싸워주신다’ 는 이야기는 언어도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맞는 자로 만드시는 것을 목적으로 우주를 운행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사건과 상황이 동원되는 것이고요. 그런데 하나님이 손수 그 걸 다 해결해 주시면 우리는 무엇으로 성숙해 지며, 무엇으로 십자가의 필연성을 배웁니까?

왜 하나님이 우리를 시켜 전도를 하시죠? 왜 우리에게 구제를 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며 시간도 절약될 텐데 왜 굳이 우리를 그 일에 부르십니까? 우리가 전도해서 성공한 예가 몇 건이나 됩니까?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카네이션을 하셔서 이 땅에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창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성육신 하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새 창조입니다.(우리의 구원)

그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들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보내셨다고 하십니다. 거룩한 자들을 세상으로 다시 보내신 데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라고 보내셨겠습니까? 새 창조의 사역에 우리를 동참시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새 창조는 어떤 것을 의미하지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완성되어져 가는 것이 바로 새 창조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성숙되어져야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니까요. 그 길에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그걸 전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걸 선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전도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전도자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지어져 가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선교를 가서 사랑하는 연습을 하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전도라든지, 헌금이라든지, 구제라든지 그러한 일련의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십자가와 보혈의 필연성을 더욱 더 깊이 깨닫게 되고 거룩으로의 진보를 이루게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는 것이지 하나님의 손이 부족해서 우리의 도움을 요청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전신갑주까지 입혀서 우리를 마귀와의 전선으로 내 모시는 것은 그 전투가 우리의 거룩에 유익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귀가 무서워서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 사장님이 자기 아들을 막장으로 몰아서 시멘트 포대를 나르는 노동부터 시키는 것은 그 아이가 없으면 그 시멘트를 나를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장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군말 없이 시멘트도 나르는 그런 성실한 아들을 보고 싶어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영적 전투의 한복판으로 내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도울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춰 놓으시고 우리 더러 싸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때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때론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때론 피투성이가 되어서 죽음 직전까지 몰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아들이 시멘트 포대를 나르다가 몇 개 떨어뜨려서 못쓰게 만들었다고 그 아들 쫓아낼 아버지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열심을 부리는 그 아들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에4:13-14)

13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14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모르드개가 왕비인 에스더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해 달라고 왕에게 부탁을 해 달라는 전갈을 하닥을 통해 보냈습니다. 그 때 에스더가 ‘내가 허락 없이 왕에게 나가게 되면 나도 죽을 것입니다‘ 라고 거절을 했습니다. 그 때 모르드개가

‘네가 안 해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때를 위해 너를 왕비를 만들었는지 누가 아느냐? 라고 이야기를 하지요. 그 말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풀어내기 위해서 에스더의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에스더의 자녀 됨을 위해 에스더를 그 일에 동참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 두고 어슬렁거리며 놀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마귀의 궤계에 맞서서 싸우기 위해서는 ‘강건함’을 입어야 하는데

‘강건함‘은 ’주안에서‘’주님의 힘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안에서’라 함은 우리는 결코 홀로 사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머리에 붙어 있는 교회의 지체로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나의 사랑하는 지체와 나의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께 피해가 되는 실수와 실패를 경계함으로 강건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주안에서’라 함은 결국 우리의 머리이신 전능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싸움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면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고 있다는 진리 앞에 강건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다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내 아버지가 나를 위해, 나를 대신해 싸우고 계신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우리 아버지를 도와 그 대적의 뒤통수를 향해 돌진을 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주안에서 그의 능력으로 강건함을 입는 것’입니다.

��럼F)��x�� `| ��분의 구원을 확인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탄은 그러한 것들을 살살 줘서 복음을 무당 짓거리처럼 아주 저급한 것으로 변질 시켜버리는 수단으로 많이 씁니다.

(7)일곱 번째로 우리가 가장 헛갈리기 쉬운 것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개인적인 삶이나 생활 방식이 변화 된 것을 가지고 구원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흥회에 다녀와서 담배를 끊었다든지, 일 년에 서너 번 가던 교회를 매주 가게 되었다든지 이런 생활 방식이 변화된 것을 가지고 자신의 구원의 근거로 삼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여러분,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짜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만큼 삶이 변한 분 계셔요?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기도 할 때 함께 기도했고 전도할 때 함께 전도했고 기적을 일으킬 때 함께 기적을 일으키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던 자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현장에도 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마귀”라고 부르셨고 “멸망의 자식”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 교에 빠진 사람들이 얼마나 그들의 삶이 변하는지 잘 아시죠?

그러면 그 분들도 구원의 확신을 가져도 되는 것입니까?

신문이나 잡지 같은 걸 보면 다이어트 식품이나 변비 약 광고 같은 데에, 그 약으로 효과를 본 사람들의 간증이 여러 편 실리지요? 예전에 제가 어떤 변비 약 광고에서 봤는데 그 사람은 그 변비약을 알게 된 후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전까지는 늘 맥이 없고 밥 맛도 없고 생활도 우울하고 해서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짜증을 부리고 폐쇄적인 삶을 살았는데 그 변비약을 누가 소개해 줘서 그 것을 먹고 변비를 해결 한 후 생활이 활기가 있어지고 모든 게 기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친절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간증을 한 걸 보았습니다. 이렇게 심지어 변비약도 한 사람의 생활 방식을 바꿀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활의 변화, 그 것도 구원 확신의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다음 주에 이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