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에배소서

(75) 자녀들아, 부모들아 (엡6:1-4)

은바리라이프 2013. 10. 5. 12:40

(75) 자녀들아, 부모들아

(엡6:1-4)

1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3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우리는 지난주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부“에 대한 정의를 성경을 통해 공부했습니다.

결혼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자기들끼리만 한 편이 되어서 자기들만의 행복을 추구하며 탐욕스럽게 살라고 천국에는 있지도 않은 결혼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가 어떻게 살게 될 것인지를 미리 맛볼 수 있는 천국의 연장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 많은 실패와 좌절과 다툼과 아픔을 통과하며 그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이 땅에서 훈련하고 연습하는 영적 훈련소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가정에서 남편에게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는 연습을 통해 자신의 거룩을 빚어 가는 것이며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우리 주님께서 원수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던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훈련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워 가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일들을 열심히 해 나가다가

혹 실패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거기서 나의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정확하게 인식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 더욱 더 매달리게 되는 것이며 간혹 그 복종과 사랑이 성공적으로 나타나게 될 때 “아, 천국은 이런 것이구나.”하고 우리는 천국의 비밀을 조금 씩 벗겨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결혼에 적극적으로 관여를 하십니다.

(막10:6-9)

6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그 둘이 한 몸이 될 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 할지니라 하시더라

모든 결혼은 누가 짝 지어 주신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짝 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복음을 정말 정확히 알고 계시며 결혼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닫고 계신 분들이 맞다 면 결혼은 신중에 신중을 더해야 하고, 고민에 고민을 더 해야 하고 목숨 걸고 기도해야 하는 일생일대의 중대한 것이라는 걸 인식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 결혼을 했으면 하나님의 뜻이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그 결혼을 통해 하나님께서 목적하고 계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순교하는 마음으로 그 가정을 지켜내는 것이 올바른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 생활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모든 동화의 끝이 왕자와 공주가 결혼하는 것으로 끝나는 이유도 거기 있는 것입니다. 그 결혼 이후의 삶을 계속해서 동화에 옮기면 그 동화는 금방 공포 소설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힘든 훈련 뒤에 용사가 탄생하듯이 가정에서의 그 거룩의 훈련은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필연적이며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만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감사하며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점차 그 가정 속에서 아귀다툼을 하는 횟수보다 복종과 사랑을 실천하며 천국을 경험하는 횟수가 많아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목적을 가지시고 부부관계, 부모 자식 관계, 종들과 상전과의 관계에 일반 법칙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며 남편은 아내를 목숨 걸고 사랑해야 하고 자식은 부모를 공경해야 하며 부모는 자식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종들은 상전을 그리스도 모시듯 모셔야 하고 상전들은 종들을 형제처럼 대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정해 놓은 일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반 법칙을 어기고 아내가 자식들 보는 앞에서 남편을 업신여기고 남편의 권위를 무시하고 멸시했을 때 그 자식들은 절대 권위에 대한 기대나 소망을 잃어버리게 되고 권위 자체에 대한 인식을 상실해 버리게 됨으로 사회는 총체적인 권위 상실의 시대로 심화되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그게 바로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 다원주의 그리고 뉴 에이지를 낳게 한 인류 재앙의 뿌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그 저주가 오늘 날 이러한 사회로까지 발전한 것입니다.

철학 사조의 변천사를 보면 인간의 역사가 어떻게 저주의 역사로 흘러가게 되는지 명확하게 그려집니다. 원래 인간들의 철학은 절대자와 절대 권위 그리고 초월 적인 것을 찾는 인간들의 자연스러운 욕구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에 이르러 “우리 인간들의 이성으로는 절대,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것을 감지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 이후 인간들은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것을 포기하고 상대적인 발전과 진보에 주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보다 나은 문화, 지금보다 나은 경제, 지금보다 나은 사회, 지금보다 나은 정치” 그 것은 헤겔의 변증법 “정반합”에 이르러 더욱 더 확고하게 굳혀지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던 인간들은 어느 지점에 이르러 한계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보다 나은 것을 향해 가긴 가는데 거기가 어디냐“는 질문이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간들이 절대적인 것과 초월 적인 목적지를 상실하고 보다 나은 것을 향해 뛰다보니 마치 연자 맷돌을 돌리는 소가 그렇듯이 목적지 없는 달음질을 하는 것처럼 허무함을 느낀 것입니다. 그 때 등장한 것이 실존주의 철학입니다. 개인이 가치나 의미라는 것의 기준과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실존주의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각기 다른 저마다 선의 기준과 가치의 기준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내가 옳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내가 선하다 하는 것이 선한 것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나의 소신을 따라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해 누군가가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신의 소신을 무시하는 그 배타적인 자를 향해 칼을 뽑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그 배타적인 자의 자리에 기독교가 있는 것입니다. 절대 권위를 상실한 사람들, 유일한 목표지를 상실한 사람들은 서로 서로 자기들이 주장하는 선과 가치를 인정해 주며 손에 손을 잡고 가고 있는데 그 중에 어떤 한 무리가 “너희들은 다 틀렸고 우리만 옳다”라고 절대 자기들과 섞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편협하다, 무례하다, 속이 좁다, 외골수다“ 이런 손가락질을 당하면서 그 칼을 다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없는 성도의 삶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반대 편 사람들은 모두, 절대 권위를 상실한 채 한 편으로 묶여 있습니다. 그것이 종교 다원주의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이고 뉴 에이지인 것입니다.

그게 다 어디서 출발한 것이라고요? 가정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가정에서의 일반 법칙이 깨어짐으로 절대 권위에 대한 기대와 인식이 사라지고 자기 자신이 선과 가치의 기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그 가정 안에서의 일반법칙은 소중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오늘은 그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 법칙 속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먼저 자식에게 “너희들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그게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밝히십니다.

(엡6:1)

1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여기서 “옳으니라”라고 번역이 된 “디카이오스”본질적으로 옳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긋나기 전의 “창조질서, 자연 질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린 새가 알에서 나오게 되면 그 어미 새가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 날라주고 그 새끼들을 뱀이나 독수리로부터 보호하지요? 그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혹시 알에서 방금 깨어난 새끼들이 엄마 새를 보호하고 먹여 살리는 새들도 있나요? 없습니다.

항상 어미는 자식을 양육하고 보호해야 하고 새끼는 그 어미의 뜻을 잘 따라야, 잘 자라게 되는 것이 바로 창조 질서, 자연 질서인 것입니다. 그것처럼 자녀가 부모에게 복종하는 것은 당연한 창조 질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옳다(디카이오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10절에 있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구절에서 “의인”“디카이오스”입니다. 그러니까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타락하여 distort 된 세상에서 나와, 이제 의인이 된 자들에게서 반드시 나와야 하는 삶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타락한 세상, 영원히 하나님께 저주받을 세상의 구체적인 내용에 어떤 것이 들어 있는지 보시면 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롬1:28-32)

28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보세요. 여기 무시무시한 불의, 추악, 탐욕, 시기, 분쟁, 살인 이러한 죄의 목록 중에 “부모를 거역하는 자”가 들어 있습니다. 그렇지요? 배교의 시대, 큰 불경건의 시대, 불신앙의 시대에 죄인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될 목록 중에 “부모를 거역하는 것“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즘 아이들이 어른들 무서운 줄 모르고 버르장머리가 없어진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것입니다.

(딤후3:1-5)

1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2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말세 때 하나님의 대적들의 모양을 열거하면서 “너는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라고 강력하게 권고하는 내용 안에 “부모를 거역하는 자”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삶 속에서 반드시 나와야 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아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디카이오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순종하라“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휘파쿠오“”~의 아래에서 주의 깊게 듣고 따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2절에 나오는 ”공경하라“”티마오“”사상의 통제, 사상의 지배”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아래에서 그 분들이 하시는 말씀을 잘 듣고 부모로부터 사상의 통제와 지배까지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전적인 순종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 안에서 “왜 우리가 부모에게 순종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지금 본 것처럼 그것은 하나님의 자연 질서, 창조질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면 일반 법칙을 세우시기를 새끼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며 그 부모로부터 양육을 받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마15:4)

4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딤전5:4)

4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만한 것이니라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거듭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서 부모님을 공경하고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부모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주신 분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님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가정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자녀를 다스리는 역할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분들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그들의 부모님을 하나님과 하나로 여겼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하나님의 복을 가로챘을 때 에서가 이삭에게 와서 “하나님의 축복을 제게도 나눠 달라고”부탁을 합니다. 그냥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면 안 됩니까? 왜 꼭 육신의 아버지에게 와서 하나님의 복을 구합니까? 성도의 가정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의 대리인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해서 인간들에게 주시면서 꼭 육신의 부모님을 통해서만 주십니다. 이웃집 아저씨가 여러분에게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 나라의 대통령도 그건 못 줍니다. 반드시 여러분의 생명은 여러분의 부모님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이 지구상에 있는 수십 억 명의 부모들 중에서 여러분의 부모님을 골라서 여러분을 태어나게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모에게 생명 전달의 대행자로 만드셔서 우리 부모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육신의 부모님께 최선을 다해 순종하셨습니다.

(눅2:41-52)

41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예수께서 열 두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43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48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께서 12살 되시던 해에 유월절 절기를 지키시기 위해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성전에서 유대인 선생들(랍비들)과 성경 토론을 하시는데 부모들은 그 아들이 자기들을 좇아오는 줄 알고 하루 길을 갔습니다. 하루 길을 가다보니 아들이 없어져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와 보니 아들이 성전에 앉아서 유대인 랍비들하고 성경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부모님들이 예수님을 혼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길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 몰랐나이까?”하고 그 분이 이미 메시아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답을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부모님을 따라 나사렛으로 내려가셔서 부모님을 순종하며 받드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의 부모가 갖는 권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고 그 부모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분명 그 일이 그 분을 좇아 일어나게 될, 우리 성도들에게 유익이기에 그 삶을 미리 사심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바로 교회의 삶입니다. 그 삶은 교회에게 전가된 삶인 동시에 교회가 살아 내야할 삶인 것입니다. 이건 정말 쉽지 않은 말이지만 우리 교인들은 이 정도는 이미 다 알아 들으시리라 믿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객관적 관점이 죄들이 모두 멸해졌지만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주관적 관점에서의 죄와 여전히 싸워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과 동시에 우리가 추구하여 살아내야 할 삶이기도 한 것입니다. 잘 알아들으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 분의 삶을 전가시켜 주셨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그런 기독교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홍해를 건너고 광야 40년의 시험의 삶을 산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을 실패한 이스라엘, 즉 교회의 삶을 다시 완성시키시는 삶을 이 땅에서 살다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완성된 삶을 교회에게 덧 입혀 주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애굽에서부터 출발하셔서 골고다에서 생을 마치십니다. 그리고 참 가나안인 하늘나라로 입성하셨습니다. 그 삶이 우리에게 전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출애굽을 하셨는가? 예수님이 헤롯의 칼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하셨다가 그 애굽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셨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그 사실을 가리켜 호세아서를 인용해서 “내가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씀을 이루려 한 것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마2:14-15)

14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호11:1)

1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분명하지요? 예수님은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의 삶을 하루하루 성공적으로 살아서 우리 교회에게 덧 입혀주고 가신 것입니다.

그럼 우리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출애굽을 한 적이 있나요?

(창13:1)

1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 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을 때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갔다가 아내 사라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애굽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옵니다.

그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최초로 받았던 야곱은 출애굽을 한 적이 있나요?

야곱이 얍복 강을 건너기 전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씨름을 하시죠? 그런데 야곱이 얼마나 지독한지 절대 지지 않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환도 뼈를 치심으로 야곱을 죽이시고 새 사람을 만들어 얍복 강을 건너게 하십니다. 출애굽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했던 것처럼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될 영적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새사람 60만과 여호수아도 역시 그들의 삶 속에서 출애굽을 경험합니다.

(수4:22-23)

22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23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그들이 요단 강을 마른땅처럼 건넌 것이 곧 뭐라는 것입니까? 출애굽 때 홍해를 건넌 것과 동일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교회를 상징하던 인물들, 민족들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처럼 출애굽의 삶을 삽니다.

그리고 출애굽 한 그들은 모두 광야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광야 40일을 사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교회가 광야에서 실패한, 그리고 실패할 모든 삶을 완전하게 완성 시키셔서 우리에게 전가 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 삶을 전가 받은 자들은 반드시 그 분의 삶을 추구하게 되어 있으며 실패하더라도 계속해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의 삶에 나타내기를 힘쓰게 됩니다.

다윗의 삶을 보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게 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시22:1-18)

1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6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14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6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41:9)

9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이게 누구의 삶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똑같이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갔던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사도행전을 공부하고 있는데 누가가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쓰여 졌던 단어들을 그대로 가져다가 쓰는 것을 봅니다.

그들이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 예수께서 육신의 부모님에게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당연히 우리 육신의 부모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님들이 정말 예수님께 부당한 일을 한 번도 안 시키셨을까요?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모든 일을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아이가 꼭 해야 할 것만을 시키며 애지중지 키우셨을까요? 아닐 겁니다. 아마 불합리한 일도 많이 겪으셨을 것이고 억지스런 일도 많이 당하셨을 겁니다. 아까 누가 복음에서 보셨잖아요. 아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하루를 걸어가는 부모가 제대로 된 부모입니까? 적어도 밥 먹을 때는 돌아 봤어야지요. 그런데 주님은 “그 부모에게 순종 하셨다”고 합니다. 그 “순종하다“”휘포탓소“는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복종의 의미가 아닙니다. 고린도 전서에 바로 그 단어가 나오는데 한번 볼까요.

(고전15:28)

28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여기에 나오는 “피조물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그 절대적인 복종”에 쓰인 단어가 바로 “휘포탓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님에게 피조물이 하나님께 복종을 하듯 그런 절대적인 복종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순종과 공경이 바로 그 것입니다.

그럼 부모님의 뜻에는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가? 아니면 어디까지 복종해야 하며 어떤 것을 거절할 수 있는가?

그 복종에는 몇 가지 예외 사항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그 일반 법칙을 가지고 그 일반 법칙을 주신 분을 거역하게 할 때 자녀는 부모를 거역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에게 주신 “복종”이라는 일반 법칙을 악용해서 그 일반 법칙을 주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막을 때 자녀는 공손하게 그 요구를 거절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지 말라고 부모가 강요할 때 여러분은 그 요구를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 일반 법칙을 주신 분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들을 강요받을 때 여러분은 그 요구를 정중히 거절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죄를 조장한다거나 부모가 자녀를 강압적으로 성폭행을 한다거나 할 때 자녀는 복종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그 이외의 모든 것에 여러분은 부모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부모가 예수를 믿지 않는 분이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일반 법칙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에베소서 강해에 보면 그 분은 자신에게 주례를 부탁하러 오는 청년 커플들에게 “만일 부모가 결혼식에 꼭 술을 내서 하객들을 대접하고 싶어 하시면 꼭 그렇게 하라”고 권한답니다. “저희 교회 친구들도 많이 참석하는데 어떻게 술을 마시게 합니까?”라고 그 들이 반문하면 “당신 친구들 앞에서의 면목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종의 대상으로 당신 위에 세우신 부모님을 거역하는 죄를 짓지 마시오.”하고 정중하게 타이르신 답니다. 오늘 공부하는 내용이 부모를 무슨 씹다 버린 껌 취급도 안 하는 요즘 세대에는 다소 불편한 내용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우리가 회복해내야 하는 너무나 소중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어줍지 않은 종교적인 행위를 한답시고 너희들이 너희의 삶 속에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다면 그런 거 다 필요 없다“라고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23:23)

2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너희들 무슨 십일조 한답시고 까불고들 있는데 너희들이 마땅히 너희의 삶 속에서 우려내야 할 인, 의, 예, 신, 효 이런 것들은 다 어디 갔느냐?” 하고 호되게 꾸짖으시는 장면입니다.

(막7:10-13)

10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11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13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 하느니라 하시고

너희가 부모님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난 하나님께 다 드리는 바람에 부모 공경할 것이 없어” 이런 짓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종교 행위 한답시고 부모에게 해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훌륭한 신앙인이라면 부모를 무시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결혼식에 술 좀 내면 어때요? 부모님 뜻대로 술을 내면서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세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도 꼭 예수 믿게 해 주세요“ 왜 그건 못 합니까?

아니 그러지는 못 할망정 “하나님 어디서 저런 부모님을 제게 주셔 가지고 이렇게 망신을 당하게 하십니까?” 이건 마땅한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어디에서도 “믿는 부모에게만 순종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냥 “자녀들아 네 부모에게 순종하고 네 부모를 공경해라”입니다. “내가 그 일반 법칙으로 너희의 삶을 이끌어 갈 거야“입니다. 그 명령에는 부모의 성품, 지식수준, 교양수준, 신앙의 유무 이런 것 조건으로 달지 않으셨습니다. 무조건입니다.

만일 신앙이 없는 부모님께서 신앙인으로서 부담이 되는 일을 자주 시키실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되고 죄를 짓는 일이 아닌 이상 그 말씀에 순종해야합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구원을 위해 목숨 걸고 달려들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부모의 신앙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으면서 그 신앙 없는 부모의 명령에만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싸움밖에 안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너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라도, 그게 네 부모일지라도 반드시 얻어내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네가 아무리 갖고 싶어도 네가 그 것을 가짐으로 다른 이가 아픔을 겪어야 한다면 눈물을 머금고 포기 해 주어라” 이게 신앙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부모님이 여러분이 죽고 못 사는 애인을 절대 인정 안 하시고 결혼을 반대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그 결혼하시면 안 됩니다. 그건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대적하고 나서는 죄입니다. 정 포기하지 못하겠으면 양 쪽 부모님들이 흡족하게 허락하실 때까지 기다리셔야 합니다. 죽자 사자 기도하시면서 기다리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일반 법칙에 의해 하나님 나라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너무나 쉽게 자기의 욕심을 따라 그 법칙들을 무시하고 깨 버리기 때문에 이 세상이 이 모양인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 중에서 구별되고 구원받은 우리만이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갖고 싶은 것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포기하는 모습을 좀 보여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는 예수대로 믿고 자기가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려서라도 꼭 하고야 마는 것이 그리스도인 입니까?

(고전10:23-24)

23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24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다른 이들이 아파하건 말건 무조건 얻어내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라면 이런 구절들은 다 찢어 버려야 하겠네요?

중국의 전무후무한 대 석학이신 오경웅 박사는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십니다.

그 분이 이미 중국 최고의 석학의 자리에 올랐을 때 역시 그리스도인이신 그 분의 아버지께서

초등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어떤 여자를 데리고 오셔서 결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오경웅 박사는 두 말 않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 부부가 결혼 한지 20년 째 되는 날 주위에 있는 지인들이 오경웅 박사께 물었답니다.

“박사님처럼 박식하신 분이 글도 모르는 저런 무학의 아내와 사시면서 불편하거나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그 때 오경웅 박사께서 하신 말이 ”하나님은 나에게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아버지를 주셨소. 그리고 그 아버지의 말씀에 복종하라고 하셨고 그 복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소. 나는 그대로 따랐고 지금 나는 이렇게 행복하게 복을 받고 살고 있소. 눈에 보이는 아버지에게도 복종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복종한단 말이오.“

오경웅 박사는 성경에 근거해서 그 분의 아버지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섬겼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을 아버지를 통해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기보다는 내가 내 앞날을 계산해서 오히려 하나님을 타이르려고 합니다. 그럴 거면 말씀은 왜 공부합니까? 어차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거면서.

이런 사람들 있지요? “부모가 내게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내 인생에 간섭이야?”

여러분 히브리어 “바라크” “복“”네페쉬“라는 ”존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바라크”“복”은 이 네페쉬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하나님으로부터 그 네페쉬 속에 부어지는 생명력을 “복”“바라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복은 바로 “존재하고 있는 나”입니다. 그걸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부모를 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저 천국을 갈 수 있게 된 것입니까?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어떻게 믿게 된 것이죠? 내가 이성을 가진 존재로 “네페쉬”로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나를 그렇게 복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까지 나를 태어나게 해 주시고 먹여 주고 입혀주고 양육 시켜 주신 분들이 바로 부모님이십니다.

비록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데 질적이며 양적인 만족까지 주시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지금 나는 이렇게 살아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이렇게 먹고 입는 것의 다소, 빈부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사람들이 되지 않았습니까? 천국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게 다 우리 부모로부터 출발된 것입니다. 그런데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냐?” 이렇게 항의하는 사람들은 사람도 아니죠. 그런 사람은 입을 한 대 때려 주세요.

(롬13:1-7)

1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2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4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6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7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여기서 위에 있는 권세는 로마를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가 기독교인들에게 뭐 해 준 게 있어서 하나님이 로마의 권세에 복종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로마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로마의 권세에 복종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아니죠?

당시 로마의 권세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권세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 자녀들아 그 권세에 복종하라“ 고 하십니다. 심지어 그들에게 돈까지 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로마가 기독교인들에게 세금을 받아서 더 강성해 지고 부유해 지면 어떡하나”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단지 관심이 있으신 것은 기독교인들이 그 사악한 로마에 복종하면서 그들의 거룩과 하나님의 자녀 됨을 빚어 가는 데에만 관심이 있으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당시 권세를 갖고 있던 로마에 복종하는 것에서 그들의 거룩을 빚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로마에 복종하면서 그들의 시선을 이 땅에서 하늘로 자꾸 옮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노예들에게 “얘들아 노예제도는 잘 못된 거야. 내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단다. 그런데 노예 제도가 웬 말이냐? 너희는 절대 주인에게 복종하지 말고 일어나서 싸워라” 그러셨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노예들아 너희 주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하셨습니다. 노예들은 노예의 자리에서 악랄한 그들의 상전에게 복종함으로써 그들의 거룩을 챙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들아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부모님이 믿지 않는 분이십니까? 혹시 여러분의 부모님이 상식이 결여되신 분들이세요? 여러분의 생각에 그 분들이 로마보다, 고대시대 노예 상들보다 더 악랄하고 못 되 보이세요? 아니지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그 로마에도, 노예 상들에게도 복종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님의 뜻에 복종하셔야 합니다.

설사 그 뜻을 좇느라 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여러분을 그리스도인답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설사 부모님의 뜻을 좇느라 내가 교회 친구들에게 개망신을 당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여러분을 거룩하게 빚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목적지가 어디인가에 따라 복종할 수 있느냐와 없느냐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오로지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을 신앙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부모와 끝까지 싸워서라도, 아니 도망가서라도 결혼 하셔야지요. 그렇지만 여러분이 나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내 신앙의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을 내 신앙의 목표로 삼고 있다면 부모에게 순종하셔야 합니다. 왜 나만은 절대 손해 보지 않으려 하고, 나만은 절대 눈물 흘리지 않으려고 하고 나만은 절대 순교하지 않으려 합니까? 부모님의 권위에 복종하십시오. 혹시 부모님 말 듣고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이랑 결혼했다가 여러분이 이혼을 하셔도 괜찮습니다. “난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했어요.”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것이고 하나님은 여러분의 이혼을 통해서도 여러분의 거룩을 챙기실 것입니다. 거룩이고 나발이고 “나는 무조건 행복해야 해”라는 망상에서 벗어나세요.

그럼 이제 부모들에게로 시선을 돌려보자고요. 여기는 지금 자식이면서 부모이신 분들이 많으시니까 오늘은 양쪽으로 다 찔리게 생겼습니다. 본문 4절로 가겠습니다.

(엡6:4)

4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부모들은 자녀들을 노엽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잠언에 보면 사뭇 다른 내용이 나옵니다.

(잠13:24)

24매를 아끼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은 훈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잠22:15)

15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22:13-14)

13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14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한 쪽에서는 죽지 않을 만큼 패라고 하시고 한 쪽에서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세계 교육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미국식 교육과 유럽식 교육, 특히 영국식 교육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전 세계가 미국식 교육 방법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빅토리아 여왕 때까지만 해도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교육은 엄격하기 그지없는 교육이었습니다.

챨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샬로트 브론테의 제인 에어 같은 소설을 보면 당시 영국 학교가 얼마나 엄하게 학생들을 가르쳤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체벌을 거의 해병대 훈련소만큼 하는 것 같더라고요. 아이들은 의무적으로 구구단을 외워야 했고 기계적으로 알파벳을 암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 구절을 암송해야 했습니다. 만일 선생님의 요구 수준에 미달 된 학생들은 가차 없이 처벌을 받았습니다. 작은 의자에 올라가서 몇 시간이고 서 있어야 하고, 밥도 안 줍니다. 제인 에어에서는 제인 에어의 친구가 비오는 날 제인 에어하고 같이 벌을 받다가 폐렴에 걸려서 죽지요)영국에서는 그러한 교육 방식을 가리켜 3R 교육방식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권위적인 교육 방식이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그 때 혜성처럼 등장한 사람이 마리아 몬테소리라는 여자였습니다. 마리아 몬테소리 박사는 그 때까지의 권위적이며 주입식인 교육 방식에서 벗어나 피교육자가 교육의 내용과 결론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방법을 교육에 도입했습니다. 그래서 체벌보다는 설득을, 명령보다는 이해를 시켜서 학생들이 자발 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 바로 몬테소리 교육법입니다. 이 교육방법은 피아제나 프로이트 같은 심리학자들의 심리학 이론의 지지를 얻어서 전 세계의 교육을 삽시간에 흔들어 버렸습니다. 학교에서 체벌이 없어졌고 강압적인 명령이 없어졌습니다.

심지어 아이들이 잘 못을 저지르면 “다 잘 못 가르친 내 탓이다”라며 선생님이 스스로 밥을 굶는 다든지 체벌을 받는 일이 미담으로 전해지곤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게 cashier 들이 더하기 빼기를 잘 못합니다.

돈 한번 거슬러 주는데 하 세월입니다. 25불짜리 물건을 사고 100불을 내면 26부터 세기 시작해서 100까지 셉니다. 대학생들이 맞춤법을 잘 모릅니다.

이 교육방법은 이론으로는 손색이 없는 교육 방식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놓친 게 있습니다.

이 이론은 인간 본성은 본질 적으로 선하고 인간은 스스로 선을 찾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서만 가능한 이론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인간은 그렇게 자발적으로 선을 추구하는 존재가 못 됩니다. 선생님이 자기 대신 체벌을 받으면 선생님의 은혜에 감읍해서 “다시는 그런 잘 못을 안 저지르리라“ 다짐하는 그런 장면은 영화에서나 나오지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좀 체로 볼 수 없는 장면입니다.

체벌을 가하지 않고 아이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그들의 잠재되어 있는 선을 부추겨 주면 아이들이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사람들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은 점점 버릇이 없어집니다. 어른들을 봐도 인사 제대로 하는 녀석들이 별로 없습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 교회의 어떤 집사님께서 진짜로 아이들이 잘 못을 저지르면 아이들을 체벌하는 대신 자기가 저녁밥을 굶는 벌을 받았답니다. “다 아빠 잘못이야” 어떤 결과가 있었을까요? 그러다 굶어 죽을 뻔했답니다. 아이들은 절대 아버지를 동정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달콤한 죄를 끊어버릴 실력이 없습니다.

성경은 그 때 “아이들에게 채찍을 들어라“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왜요?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죄를 보실 때 그렇게 채찍을 드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히12:5-8)

5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은 자녀들의 죄를 보시면 채찍으로 징계하셔서라도 바로 고쳐 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육신의 부모들도 아이들에게 채찍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 보시면 더 명확하게 확인이 됩니다.

(히12:9-11)

9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육체의 아버지들도 자녀를 징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육체의 아버지의 징계 속에서 그 분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0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리고 그 징계는 즐거운 것이 아니고 슬픈 것이지만 그 징계를 통과한 자만이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들은 자녀들을 징계하며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징계에 꼭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자녀들을 노엽게 만들지 않는 징계”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고도 이 비슷한 명령이 골로새서에도 나옵니다.

(골3:21)

21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이 말은 절대 아이들을 체벌하지 말라는 구절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이들이 잘 못했을 때 아빠에게 매를 맞으면 그 아이들이 전부 격노합니까? 여러분 어려서 아빠에게 매 맞으면 격노하셨습니까? 이 말씀은 아이들을 체벌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아이들을 감정 적으로 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체벌과 징계에는 절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딤후1:7)

7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능력을 주셨는데 그 능력은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으로 자제되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근신”이라고 번역이 된

“소프로니 스모스”“훈련되어, 절제되고 자제된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감정을 자제하고 절제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그 단어 안에는 “훈련”이라는 의미가 함께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훈련하셔야 합니다. 참는 연습을 하셔야 합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부모들이 자녀들을 징계하거나 체벌할 때에 자제되지 못한 흥분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징계하거나 체벌을 하게 되면 자녀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자녀를 격노케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저지른 잘 못에 대한 해명이나 이유를 들으려 하지도 않고 흥분해서 손부터 올라간다든지 때리다 보니까 더 흥분해서 작은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체벌을 가한다든지 하면 아이들이 힘이 없어 맞고는 있지만 그 마음속에 노를 쌓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제하는 마음이 없이 흥분한 상태로 자녀를 징계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징계의 일관성이 없어지게 됩니다. 똑같은 잘 못을 저질렀는데도 엄마가 기분 좋은 날은 벌을 안 받고 엄마가 기분 나쁜 날은 엄청 두들겨 맞고 그러면 아이들에게 불안감이 쌓이게 되고 그들의 행실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을 상실해 버리게 됩니다. 어떤 날은 이 일이 굉장히 큰 잘 못인 것 같았는데 어떤 날은 웃으면서 넘어가기도 하고 그러면 아이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 일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녀를 징계할 때는 일관성을 가지고 변덕스럽지 않은 징계를 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를 징계할 때는 반드시 합리적인 방법으로 징계를 하셔야 합니다. 흥분을 해서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면 그 잘못에 대한 아이들의 설명도 듣기 전에 자칫 억울한 누명을 씌우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흥분해서 아이를 징계하기 전에 자녀가 자신의 잘 못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전에 우리 첫째 녀석과 둘째 녀석이 유년 부 방에 있는 휴지통에다가 오줌을 싼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둘째 녀석을 제 사무실로 데리고 가서 “엎드려뻗쳐”를 시켜놓고 엉덩이를 몇 대 때려 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아이가 이야기하기를 제가 예배에 들어가고 나서 자기들끼리 유년 부 방에서 게임을 하면서 놀고 있는데 너무 소변이 마려워서 아래 층 남자 화장실로 내려갔더니 카페 문이 잠겨 있더랍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다른 화장실을 찾을 수 없어서 형이랑 trash can에다가 소변을 보았대요. 그런데 조금 있다가 이번에는 다시 대변이 마려워서 휴지를 깔고 대변을 보고 그걸 trash can에다가 넣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 엄마가 옆에 있다가 “그럼 엄마한테 와서 화장실 문을 열어 달라고 해야지 왜 휴지통에다가 오줌을 싸냐고”하니까 “엄마가 예배 때는 절대 예배당에 들어오지 말라고 해서 못 들어갔다”고 하면서 막 울더라고요. 제가 아이한테 정중하게 사과했습니다. 아빠가 사정도 물어보지 않고 무조건 엉덩이를 때려서 미안하다고.

이렇게 부모가 자기 분에 못 이겨서 합리성과 자제력을 잃어버리고 아이들에게 매를 대게 되면 아이들은 적대감정과 분노를 무의식 속에 쌓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 아이들이 “나는 무시당하고 있다“거나 ”나는 부모님 앞에서 완전히 굴욕을 당하고 있다“거나”나는 사람 앞에서 창피를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벌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게 “아이들을 노하게 하지 말라”는 구절의 뜻입니다.

그리고 아울러서 그 근신과 함께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이 뭐였지요? “사랑”이렀습니다. 징계에는 그 근신과 함께 “사랑”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벌을 받으면서도 “우리 부모가 나의 잘못 때문에 많이 슬퍼하고 있구나, 정말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게끔 사랑을 수반한 징계를 가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우리의 장난감도 아니고 우리의 물건도 아닙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하나님의 자녀 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걸 늘 놓칩니다.

하나님께서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시험의 내용 중에 중요한 한 국면

"내 자식 이삭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께 보여 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모리아”라는 단어의 의미가 “보여주다”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그 자녀를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내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내 자식을 비롯한 나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은 우리가 바로 그와 동일한 고백을 해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 자녀는 “내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 자녀가 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그 자녀에게 집착하게 되고 우리의 감정을 절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녀를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대신 이루어 주는 대리 만족의 수단으로밖에 쓸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는 우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 주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 진짜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양육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 진짜 아버지가 그 자녀를 어떻게 키워 주기를 원하십니까?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엡6:4)

4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여기서 “교양”“파이데이아”는 히브리서12장에 나오는 “징계”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교양“”파이데이아“라는 것은 아이를 사람답게 만들기 위해 가하는 징계를 포함한 모든 교육을 말하는 것이고 “훈계”“누데시아”는 말과 행동으로 자녀에게 경고하고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교양과 훈계가 “주의 교양과 훈계입니다” 바로 말씀으로 아이들을 양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6:4-9)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 자녀들을 말씀으로 가르치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을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 하십니다. 그 말씀은 자녀들에게 말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손목에 매고’ (어떤 일을 행할 때도 주의 말씀에 입각해서 행하라) ‘미간에 붙이고’ (생각하고 사고하는 것도 주의 말씀에 입각해서 하라)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 (집안에서나 집을 나설 때, 그리고 밖에서 집으로 돌아 올 때 항상 그 말씀대로 행하며 살아야 하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라) 는 것입니다.

그렇게 먼저 아이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고 말씀으로 훈계를 할 때 아이들은 격노하지 않고 징계를 달게 받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 자녀에게 세상의 힘을 더 소중한 것으로 가르치십니까? 아니면 우리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가르치십니까? 아이들이 학교에 하루 안 가면 난리를 치면서 교회에 안 가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시지는 않으십니까?

제가 대학교 때 중등부 교사를 했었는데 가끔 아이들이 안 올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그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아이가 교회 가기 싫대요.”“중간고사 시험이에요” “아빠 생신이어서...”

그건 부모가 은연중에 아이들에게 신앙생활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신앙 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아이로 만들어야지, 세상의 힘을, 돈을 두려워하는 아이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나1:2-6)

2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3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 발의 티끌이로다

4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우시며 모든 강을 말리우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이우는도다

5그로 인하여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의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솟아 오르는도다

6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

왜 성경이 이렇게 간혹 하나님을 두려운 공포의 대상으로 그리고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크시며 그 분이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신 지를 절대 잊지 말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자녀들을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자들로 키워 내십시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본인이 아이들의 힘과 방패막이가 되어주려 하지 마십시오. 과잉보호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말씀에 근거하여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설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서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그 아이의 무덤까지 따라가서 그 아이의 뒷수발을 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런 아이들이 결혼해서 꼭 문제를 일으킵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서도 엄마의 보호 속에 있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 외식을 해도 식당 하나 자기가 선택하지 못하고 엄마한테 물어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거 정말 잘 못 키운 자녀입니다. 어느 순간이 되면 그 아이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게 해 주시고 자기가 잘 못 판단한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지게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자식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특히 시어머니들 아들하고 며느리 사이에서 주무시는 분들도 계시다고 하시는데 이제 그만 그 아들을 떠나보내십시오. 집착하지 마세요.

지금까지 우리는 남편과 아내, 그리고 부모와 자식들이 어떻게 성령 충만한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명심하실 것이 있습니다. 이 성경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이 이렇게 성경 말씀대로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목술 걸고 사랑해 주고,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를 노하게 하지 않으면서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게 되면 정말 행복한 가정이 될 것이다“ 가 아닙니다.

“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면 언젠가 남편이 감동을 하게 되고 그 남편도 나처럼 예수를 잘 믿게 될 것이다“”내가 내 아내를 목숨 걸고 사랑해 주면 자기도 사람인데 언젠가는 변하겠지“라는 것은 기계적이며 수리적인 결과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해서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더니 거기 있는 사람들이 돌을 내려놓고 스데반이 믿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듯이

여러분이 최선을 다해 순종하고 사랑하고 양육했는데도 전혀 변함없이 계속 여러분을 고통스럽게 하는 가족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 순종하고 사랑하고 양육해야 하는가? 네, 맞습니다. 우리는 그래도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순종하고 사랑하고 양육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나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순종하고 사랑하고 양육하면서 우리의 거룩을 다듬어 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 가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열심히 여러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열심히 충실하게 수행해 나가도록 하십시오.

�mRbl�y �;y PAN>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주신 유일한 계명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서로 복종하라 그래야 너희가 내 제자다“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셨기에 우리는 주님이 자기 몸을 원수를 위해 주시면서 본을 보여 주신 그 사랑의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40일 금식 기도하고 매주 철야 기도하고 집 팔아서 헌금하고 하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자기를 숨기고 겸손하게 피차 복종하는 삶”입니다. 성경에 40일 금식하라는 명령은 없어도 “피차 복종하라”는 명령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절대 종교 행위로 여러분을 자랑하려고 하지 마세요.

(갈6:12-14)

12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13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우리는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참아 주면서 서로 복종하며 다른 이를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삶, 그 삶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21절에서 “복종의 기본 정신”에 대해 논한 후에 22절부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내용을 다룹니다. 바울은 6장 9절까지 긴 부분을 할애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피차 복종하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 지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아내와 남편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아내들아 남편들에게 복종하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

두 번째로 “자녀들아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세 번째로 “종들아 상전들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상전들아 종들을 의롭게 대하라”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의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성령 충만‘과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성령 충만이 얼마나 다릅니까?

성경이 말하는 성령 충만한 삶이 뭡니까? 거품 물고 쓰러지는 것입니까? 이빨이 금니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성령 충만 입니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성령 충만한 삶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주님의 뜻을 분별하여, 주님의 뜻에 맞게, 세월을 아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예배자의 삶을 사는 것”을 ‘성령 충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의 삶은 가정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저 아래 쪽에 있는 큰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강사로 오신 분이 특기가 은 이빨을 금이빨로 변하게 하는 신통력입니다. 그 일련의 집회를 보고 어떤 교인 하나가 지난 주에 일간지에다가 하단 전면을 사서 담임 목사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내용인 즉은 “이게 정말 기독교인가?” “담임 목사님도 그 집회에 묵인 내지는 동의하시는 것인가?”를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용기 있는 분이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여러분 눈앞에서 정말 은 이빨이 금이빨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 보자고요. 그게 오늘 날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성령 충만의 현상이 맞습니까?

그렇게 해서 정말 누군가가 그 기적을 보고 “정말 예수는 있는 거야”하고 예수를 믿었다고 쳐보자고요. 그 사람은 평생 어떤 예수를 믿을 것 같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언제든지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이루어 주시는 예수, 은을 금으로 만들어 주듯이 나에게 늘 이 세상의 좋은 것을 주시는 예수” 그런 예수를 기대하며 신앙할 것입니다. 그게 정말 바른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까? 여러분, 사람들이 예배당 안에서 기적을 구하는 것은 그 기적을 나에게 적용시켜서 나의 이 땅에서의 삶을 기적처럼 형통하게 바꾸어 주십사 하는 기복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비주의와 기복주의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기독교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의 삶을 나그네로 지나가면서 고난과 환난을 통과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훈련하며 연습하는 보다 역동 적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죄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들이 그 구원을 선물한 어떤 신을 이용해서 그 신의 힘을 기적처럼 받아서 이 땅에서도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그런 무당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이 육체를 벗고 다른 새로운 육체를 입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는 사랑만이 넘쳐 나고 누구를 봐도 즐겁고 미움이 없습니다.

내 마음속에는 시기도 없고 질투도 없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그가 잘 되었으면 좋겠고 그의 유익을 위해 내가 기쁘게 수고를 마지않습니다. 그리고 내 주변에도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나의 뜻에 순종해 주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그런 곳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너무 좋겠지요? 거기가 초가삼간인들 어떻습니까? 판자 집이면 어떻습니까? 바로 그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천국 시민의 성품을 연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조금씩 자기의 삶 속에 나타나게 되면서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천국을 미리 맛보게 되는 것이지요.

거기에 왜 기적이 필요합니까? 왜 은 이빨이 금이빨로 변하는 신통 술이 필요합니까?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마술사 시몬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술사 시몬은 신통력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마술을 부려 사람들로부터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자라고 칭송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행8:9-11)

9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사람들이 그 신기한 마술사 시몬의 마술을 보고 어떻게 했다고 나오지요? 저희가 그 “마술을 청종했다“”프로세코“는 ”마음을 두다, 마음을 빼앗기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시몬의 마술을 보고는 그 시몬의 마술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8장에서 빌립도 역시 기적을 행합니다. 사람들이 그 빌립의 기적을 보고는 어떻게 했는지 보세요.

(행8:5-6)

5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빌립의 기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을 좇게 만드는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초대 교회 때 사도들이나 전도자들에게 나타난 기적은 그 때 당시 정경이 완성되어 있지도 않았고 가짜 메시야와 거짓 선지자들이 판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오면 나타나게 되는 기적들이 그들과 함께 했던 것이었습니다. 정경이 완성되고 교회가 설립이 되면서 더 이상 기적은 필요 없게 되었고 이제 살아서 운동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우리 골수를 쪼개며 우리에게 하늘의 비밀을 알려 주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오늘 날 기적이 있는 곳에 말씀이 함께 풍성하게 선포되는 곳 보셨나요? 오늘 날 일어나는 기적들은 대부분 마술사 시몬의 기적과 다를 바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절대 성령 충만의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주님의 뜻을 분별하여, 주님의 뜻에 맞게, 세월을 아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예배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삶의 가장 중요한 시작이 바로 가정이고요. 엉터리 신앙에 시간 허비하지 마세요.

(고전15:1-2)

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분명 헛된 믿음이 있다는 말이지요? 여러분이 그 헛된 믿음의 당사자라면 어떡하시겠습니까?

큰 일 나는 겁니다. 바로 믿고 천국 가자고요.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천국 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렘5:1-2)

1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 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성을 사하리라

2그들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하나님께서 목숨 걸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던 유대 예루살렘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이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마.“

예레미야 당시 그 유대 예루살렘에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믿겨지십니까?

엘리야가 “하나님 왜 나만 남겨 놓으셨나요?”라고 한탄 한 것을 기억하세요?

마틴 루터가 전 세계에 만연해 있던 가짜 기독교와 홀로 맞섰던 것을 기억하세요?

예수 믿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좁고 협착해서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그 길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열심히 가는 것“ 그게 예수를 믿는 성령 충만한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엉뚱한 것 기대하지 마세요. 바로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에서 여러분의 거룩을 챙기십시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피차 복종하세요. 섬기십시오. 겸손하세요.

그리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지닌,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세요.

이런 시가 있습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어떠세요? 여러분은 이러한 친구를 가지셨습니까? 아니,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이러한 친구가 되어주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바로 이런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남을 위해 존재하는 분들입니다. 먼저 여러분 곁에 있는 분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그게 피차 복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원수였던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 이웃의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저 인간하고는 죽어도 친구를 할 수 없어“라고 마음에 새겨 놓은 사람들이 있으세요?

(요15:15)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우리 주님이 우리 더러 친구랍니다. 이 천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그 분이 우리 더러 친구랍니다. 우리도 그렇게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 것은 그 예수님의 친구들에게 요구되는 삶이기도 합니다.

(요15:9-14)

9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12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14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오늘 본문에는 분명 “피차 복종하라”라고 되어 있지, “너희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잘하면 된다.“라고 적혀있지 않습니다. 그게 복음의 핵심을 흔드는 일이 아니면 무조건 져 주세요.

그러나 복음 앞에서는 목숨을 걸고 싸우세요.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돌에 맞고 했습니다. 져 준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율법에 묶여 있던 베드로에게는 그의 잘못을 서슬이 퍼렇게 지적했습니다.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이10-11)

10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11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하지만 이런 경우가 아니면 그냥 져 주세요. 섬겨 주세요. 어떠세요. 예수 믿는 거 쉽지 않죠?

마지막으로 갈라디아서 5장의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갈5:13-15)

13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15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