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77 - 진짜 포도나무와 가짜 포도나무   (요15:1-6)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23

77 - 진짜 포도나무와 가짜 포도나무

 

(요15:1-6)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우리는 지난주까지 수차례에 걸쳐 14장을 함께 공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한 구원의 실체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지난 수 주 동안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함께 일하심에 관해서도 공부를 했고, 그 삼위일체 속으로 초청된 우리 성도의 신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에 관해서도 배웠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성도는 우리의 힘과 노력에 의해 계명을 지키거나, 예수님을 사랑하거나,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처소를 계획하시고 준비하시고 시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공로에 의해 말씀을 지킨 자가 된 것이고, 주님을 사랑한 자가 된 것이고, 주님 안에 거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지성소로서의 처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영적으로 완성이 된 하나님 나라가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 가시적으로 성취되어져 가고 있는 것이라 했지요?

그래서 주님은 14장 말미에서 불안해서 덜덜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세상이 줄 수없는 평안을 주노라’하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요14:27)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제자들 스스로는 절대로 평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의 상황을 아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평안을 선물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 비슷한 구절이 15장에도 나옵니다.

 

(요15:11)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절대 기쁨을 창조해내거나 성취해 낼 수 없는 존재이기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기쁨을 선물해 주셔야만 비로소 기쁠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엉뚱한 것들을 가지고 기쁨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죄인들의 현실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해 평안할 수 있고, 기쁠 수 있으며, 행복할 수 있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열심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마치 우리가 이 땅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과 의무와 책임에 열심을 다 하지 않으면 중도에 탈락을 할 수도 있는 것처럼 그렇게 보이는 애매모호한 구절이 나옵니다. 본문 2절을 보세요.

 

(요15:2)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그렇지요? 마치 과실을 맺지 않는 가지는 농부이신 아버지가 이를 제해 버리시고 과실을 맺는 가지는 과실을 더 맺게 만드신다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만일 이 구절이 그런 내용을 함의하고 있는 구절이라면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요한복음의 은혜의 메시지가 여기서 일관성을 잃게 됩니다. 일관성을 잃은 성경은 더 이상 진리일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구절은 그렇게 알미니언 주의자들의 관점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구절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과연 어떤 의미의 어절인가? 그걸 다 설명하려면 시간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제가 거기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다음 시간에 이어서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고 오늘은 거기에 대한 서론을 공부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 1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지칭하시는 말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요15:1)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여기에서 ‘나는’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에고 에이미’입니다. 그 단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밝히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하셨지요? 바로 그 단어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그 단어가 아주 많이 나옵니다. 6장에서 ‘나는 생명의 떡’이라 하셨을 때에도 그 단어가 쓰였고, 10장의 ‘나는 양의 문’이라는 어구에도 그 단어가 쓰였습니다. 11장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어구에도 그 단어가 쓰였으며 14장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어구에도 그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나는 참 포도나무’에 마지막으로 그 단어가 쓰입니다. 각각의 경우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주님은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 비교하여 자신을 나타내실 때 하나님이신 당신의 신분을 밝히는‘에고 에이미’라는 단어를 함께 쓰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참 포도나무’라는 어구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포도나무’들 중에 진짜 포도나무는 하나님이신 당신 자신뿐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참 포도나무는 하나님 자신뿐이므로 인간들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포도나무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인 척하고 있는 다른 포도나무들은 다 가짜 포도나무들이라는 이야기인데, 그 가짜 포도나무들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지금부터 잘 들으세요. 오늘 본문의 참 포도나무가 구약의 어디에서 인용이 된 것인지 제가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설교를 다 듣고 나시면 왜 주님께서 굳이 당신을 잣나무도 아니고 소나무도 아니고 포도나무라고 하셨는지 잘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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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2:21)

21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여기서 포도나무가 누구를 가리킵니까? 하나님께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은 더 나아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아담과 그 후손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그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건 아담에게도 적용이 되는 말이고 이스라엘에게도 적용이 되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이방인을 악하다고 표현을 했는데 그 말의 의미도 잘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간혹 ‘악한 이방’이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 말씀은 이방인들이 나쁜 일만 골라서 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 가던 이스라엘과는 달리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사는 이방인들의 그 모든 행위와 행동을 다 ‘악한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한 것이라는 말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관점에서의 악한 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그 모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방인들은 선행을 안 했을까요? 이방인들은 구제나 봉사를 안 했겠습니까? 그들도 그런 일들을 다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이방인들 전체를 악하다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악과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악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도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이렇게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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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21)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이방의 악이라는 것은 착한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그 포도나무가 이방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살아야 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 자신의 뜻과 야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으로 힘을 삼아 스스로 구원에 이르려 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악한 포도나무입니다. 그 모습을 에스겔이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겔17:3~11)(표준 새 번역)

3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큰 독수리 한 마리가 레바논으로 갔다. 큰 날개, 긴 깃, 알록달록한 깃털을 가진 그 독수리는 백향목 끝에 돋은 순을 땄다.

4         독수리는 그 연한 햇순을 잘라서, 상인들의 땅으로 물고 가서, 상인들의 성읍에 놓아두었다.

5         그리고 그 땅에서 난 씨앗을 가져다가, 옥토에 심었다. 시냇가에다가 버드나무를 심듯, 물이 많은 시냇가에 그 씨앗을 심었다.

6         그 씨앗은 싹이 나고, 낮게 퍼지며 자라서, 무성한 포도나무가 되었다. 그 가지들은 독수리에게로 뻗어 올라갔고, 그 뿌리는 땅에 박고 있었다. 그 씨가 포도나무가 되어, 가지를 내뻗고, 덩굴손을 뻗쳤다.

7         다른 큰 독수리 한 마리가 나타났다. 날개가 크고 깃이 많은 독수리다. 그런데 보아라, 이 포도나무가 뿌리를 그 독수리에게로 뻗고, 가지도 그 독수리에게로 뻗는 것이 아닌가! 이 포도나무는 새로 나타난 그 독수리를 보고 옥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물을 대달라고 하였다.

8         그 포도나무를 옥토, 곧 물이 많은 곳에 심은 것은,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포도나무가 되도록 한 것인데, 이 모양이 되고 말았다.'

9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그 포도나무가 무성해질  수 있겠느냐? 그 뿌리가 뽑히지 않겠느냐? 그 열매가 떨어지거나, 그 새싹이 말라 죽지 않겠느냐? 그 뿌리를 뽑아 버리는 데는, 큰 힘이나 많은 군대를 동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10       그러므로 그것을 심어 놓았지만 무성해질 수가 있겠느냐? 동쪽 열풍이 불어오면 곧 마르지 않겠느냐? 자라던 그 밭에서 말라 버리지 않겠느냐?'"

 

지금 이 그림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남 유대의 요시야가 애굽의 바로느고에게 죽고 그 아들 엘리아김이 왕이 됩니다. 그런데 바로느고가 그 엘리아 김의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꿉니다. 애굽의 왕이 유다의 왕의 이름을 바꾸어 주는 행위는 절대 복종을 강요하는 행위였습니다. 그 때 설상가상으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를 침공해 들어옵니다. 여호야김은 양수겹장의 상태에서 삼 년간 바벨론을 섬기다가 바벨론을 배반합니다. 그 때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 유다를 도와주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른 이방 민족들을 유다에 보내셔서 유다를 초토화시켜 버리십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왕하24:1~3)

1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삼년을 섬기다가  돌이켜 저를 배반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로 하신 말씀과 같이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시니

3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명하신 바로 저희를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로 인함이며

 

성경은 이렇게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하나님 앞에서 지은 모든 죄 때문에 하나님이 유다를 치시는 것이라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야김이 바벨론을 배반하고 거기에 대항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를 거부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많은 나라들로 하여금 유다를 치게 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성경은 여호야김도 그 므낫세와 똑같이 여호와 앞에서 악한 자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왕하23:37)

37       여호야김이 그 열조의 모든 행한 일을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그렇지요? 그러니까 지금 남 유다가 하나님에 의해 징치를 받고 있는 이유는 므낫세를 비롯한 유다의 왕들이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유다의 왕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대표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토록 미워하시며 증오하시는 그 악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기위해서는 므낫세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면 되겠지요? 열왕기하 21장에 가면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아버지 히스기야가 죽은 후에 히스기야가 헐어버린 우상의 산당을 다시 세우고 바알과 아세라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다시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성전 마당에 일월성신을 위한 제단을 세웠고 자기의 아들들을 우상의 제단에 불살라 바치기도 하고, 점을 치고,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무당을 신임했다는 사실이 낱낱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악행의 근본 뿌리가 뭔지 아십니까? 자기의 이름을 내고, 자신을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범죄의 다른 그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전에 확인한 이방의 악을 이스라엘의 왕들이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의 왕이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힘 삼아 산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의 악이며 그를 이은 유다의 왕들의 악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름을 내려하는 행위는 오늘날도 공히 악인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경고를 하십니다.

 

(왕하21:8~15)

8  만일 이스라엘이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종 모세의 명한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면 내가 그들의 발로 다시는 그 열조에게 준 땅에서 떠나 유리하지 않게 하리라 하셨으나

9         이 백성이 듣지 아니하였고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열방보다 더욱 심 하였더라

10       여호와께서 그 종 모든 선지자들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11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케 하였도다

12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재앙을 내리리니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13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 보던 추로 예루살렘에 베풀고 또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 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릴지라

14       내가 나의 기업에서 남은 자를 버려 그 대적의 손에 붙인즉 저희가 모든 대적에게 노략과 겁탈이 되리니

15       이는 애굽에서 나온 그 열조 때부터 오늘까지 나의 보기에 악을 행하여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니라 하셨더라

 

보세요.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는커녕 자신들의 뜻과 야망과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멸시하고 자기 자신의 꾀와 힘과 다른 우상들과 열강의 힘을 이용하려 한 하나님 앞에서의 ‘악’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이어졌던 아주 고질적인 악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것을 반드시 벌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벌이 여호야김 때에 들이닥친 것입니다. 그 때 여호야김이 죽고 그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여호야긴도 므낫세나 여호야김과 다를 바 없는 악한 자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왕하24:9)

9         여호야긴이 그 부친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그렇지요? 하나님께서 가만 놔두실 리 없습니다.

 

(왕하24:10~13)

10       그 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신복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그 성을 에워싸니라

11       그 신복들이 에워쌀 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도 그 성에 이르니

12       유다 왕 여호야긴이 그 모친과 신복과 방백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왕이 잡으니 때는 바벨론 왕 팔년이라

13       저가 여호와의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고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 기명을 다 훼파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유다가 초토화가 되었고 많은 이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 다니엘과 세 친구도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은 그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아가고 그 여호야긴의 숙부인 시드기야를 유다의 왕으로 세우고 충성을 맹세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시드기야가 그 약조를 어기고 몰래 애굽으로 가서 원군을 청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에스겔서 17장의 독수리와 포도나무의 비유를 유다에게 주신 것입니다. 한 독수리가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그 포도나무가 다른 독수리에게 뿌리와 가지를 뻗으며 물을 대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 때 그 원래 포도나무를 심었던 독수리가 그 포도나무를 가만히 놔두겠냐는 것입니다.

그 에스겔서 17장의 비유에서 원래 포도나무를 심은 독수리는 일차적으로 느브갓네살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쉬운 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그런 열매를 바라시며 당신의 땅에 심으셨는데 그 백성이 당신의 영광이 아닌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다른 힘들을 사용하여 그들의 목적지에 도달하려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악이며 하나님은 그 악을 참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과 남유다의 시드기야를 들어 비유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노는 단순히 당신의 백성들이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착한 일을 해 내지 못하는 무력함을 보이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분께 의존하여 하나님 절대 하위자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모든 존재와 그 존재들의 행위에 대해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하나님께서 하나님 이외의 다른 힘, 즉 우상까지도 동원하여 자신의 안일과 행복을 챙기려 하는 므낫세에게 경고하시며 당신의 백성들을 교만의 꼭대기에서 내려오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윗왕가의 모든 왕들이 전부 하나같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그들이 전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상에게 절을 해서라도 자신들이 원하는 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애굽이나 앗수르, 아람, 바벨론 등을 들어서 그들을 공격하게 하심으로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려 하셨는데, 그들이 생뚱맞게도 애굽으로 달려가 거기에서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하셔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포도나무들에게 가셔서 잎사귀를 마르게 하고 뿌리를 뽑아 버리겠다고 하십니다.(겔17:9)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똑같은 한탄을 쏟아내십니다.

 

(사5:1-7)

1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3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 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7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도리어 부르짖음 이었도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하나님께서 좋은 열매를 바라시며 심었던 모든 포도나무는 전부 뿌리가 뽑히고 잎사귀가 말라 비틀어져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27장에 가면 대 반전이 일어납니다.

 

(사27:2-6)

2 그 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

3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4 나는 포도원에 대하여 노함이 없나니 질려와 형극이 나를 대적하여 싸운다 하자 내가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리라

5 그리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 이니라

6 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에 채우리로다

 

갑자기 하나님께서 포도원을 노래하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포도원을 박살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 포도원에서 나오는 질려와 형극, 즉 잡초와 가시떨기를 밟아서 포도나무들을 보호하실 것이라 하십니다.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신 것입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말라비틀어지고 뿌리가 뽑혀 죽어야 할 포도나무들의 악에 대해 충분하게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패역을 보시고 반드시 다 뽑아 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포도원이 하나님의 찬양의 대상이 된 것입니까? 거기에 참 포도나무가 개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참 포도나무는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시 독수리와 포도나무의 비유가 떨어졌던 에스겔서 17장으로 가보겠습니다.

 

(겔17:22~24)

2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또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취하여 심으리라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빼어난 산에 심되

23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을 이룰 것이요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할지라

24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아까 그 독수리가 취하여 온 그 백향목 높은 가지가 등장하지요? 여기에서 백향목이라는 것은 상징적으로 다윗왕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윗왕가의 꼭대기, 높고 연한 가지는 누구를 가리키겠습니까? 연한 순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연한 가지, 꼭대기의 가장 높은 가지가 꺾여 가장 낮은 곳으로 심겨집니다. 그런데 그 가지에 무성한 열매가 맺히고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하게 될 것이랍니다.

보세요.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와 꺾여 심겨졌더니 그 자리에 열매가 맺히고 각양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더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포도나무들과는 정 반대의 모습이지요? 보잘것없는 포도나무들이 백향목 꼭대기에 올라앉기 위해 바알과 아세라, 일월성신까지 동원하여 자신들의 꿈과 소원을 이루려 하는 것이 죄인들의 실체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높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포도나무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연합이라 하고, 그것을 페리코레시스, 상호통재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과의 상호통재의 포도나무가 가득 차 있는 곳이 하나님의 포도원이며, 그 곳을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 자신들은 하나님 아니면 정말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티끌 같은 피조물임을 인정하는 이들이 그렇게 자신들을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곳을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직접 그 에스겔서 17장의 내용을 인용하셔서 하나님나라를 설명하셨던 것입니다.

 

(막4:30~32)

30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 한 알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하시면서 에스겔서 17장을 인용하여 쓰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작게 낮아진 자들의 것인데, 그렇게 가장 먼저 낮아지셨던 예수가 열방을 그 가지의 그늘에 품은 것처럼, 그렇게 작은 자로 사는 이들이 사실은 가장 큰 자들임을 역설적으로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똑같은 내용이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눅13:18~19)

18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여기보시면 하나님 나라가 채전에 심겨진 겨자씨 안 알 같다고 하지요? 채전이 뭡니까? 채소  밭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배추, 무, 파, 고구마 이런 것이 심겨져 있는 채소밭에 3미터에서 4미터가 되는 겨자나무가 심겨져 있습니다. 그 모습이 어떠하겠습니까? 그 채소밭에 심긴 겨자나무를 못 알아 볼 사람이 있을까요? 일단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는 사람이 바보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채소밭에 심겨진 겨자나무로 비유를 하신 것은 이 땅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그렇게 보잘것없이 겨자씨처럼 작아 보여도 사실은 다른 채소들과 비교도 할 수없는 위대하고 엄청난 실존체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겨자나무는 채소들과 금방 구분이 갑니다. 하늘에서는 겨자나무가 정말 큰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그 겨자나무들은 보이지도 않는 겨자씨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이 세상의 힘의 원리로 해석을 하려 하다보면 풀리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도 그 홍수 사건의 단초가 된 자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네피림, 거인, 유명한 자, 용사가 되려하는 자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악한 포도나무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포도원의 포도나무들로 만드셨는지 볼까요? 먼저 창세기 49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창49:8-9,11)

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야곱이 열 두 아들에게 유언을 합니다. 그 중 유다에게 유언을 하는데 유다의 후손에서 ‘실로’ 곧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는 암 나귀 새끼를 타고 그 옷을 포도주에 빨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 바로 ‘suffering of christ’‘그리스도의 수난’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NIV 성경을 보면 포도즙을 blood of grapes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아는 포도의 피에 자신의 옷을 빨게 될 것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내가 진짜 포도나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당신 자신의 피(포도의 피)로 자신의 옷을 빠는 이로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는 나귀 새끼를 타는 모습으로 그리고 십자가에서 다른 자들의 저주를 몸에 받고 죽으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 예수님이 어떻게 오시는지 볼까요?

 

(마21:2-5)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어딘가에 매여 있는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의 왕으로 입성을 하십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창세기 49장의 야곱의 유언에서 본 바에 의하면 그 나귀새끼가 어디에 매여 있는 나귀새끼입니까? 포도나무에 매여 있는 나귀새끼입니다. 그러니까 나귀새끼와 참 포도나무는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지요? 참 포도나무와 나귀새끼는 겸손과 낮아짐이라는 같은 메시지를 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주장과 높아짐과 교만의 대척점에서 겸손과 낮아짐의 상징으로 포도나무에 매여 있는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의 왕으로 입성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사복음서 모두에 공히 기록이 되어 있는데 거기서 등장하는 새끼나귀는 전부 매여 있는 나귀입니다.  그러니까 포도나무에 매여 있는 나귀 새끼는 나귀새끼를 탄 포도나무의 모습을 그린 것이고, 그렇게 나귀를 타고 오시는 포도나무이신 예수의 모습은 자신의 피로 자신의 옷을 붉게 적시고 물들이는, 십자가를 지는 예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약에서 찾아 읽었던 내용들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퍼부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들 포도를 맺는 악한 포도나무들을 포도주 틀에 넣고 밟아 뭉개서 피를 내십니다. 그런데 그 포도주 틀에 예수 자신이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게 예수의 옷에 들 포도들의 피가 튀는 일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피 묻은 저주의 옷은 모두다 자신이 가져가고 아버지의 백성들에게 새 하얀 세마포 옷을 입히시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사63:1-6)                            

1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2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3   만민 중에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4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5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6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이렇게 하나님에게 밟혀 멸망의 자리로 갔어야 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밟히심’에 의해 참 포도나무 화 한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우리는 그 참 포도나무에 그저 아무 공로 없이 접붙임을 받은 것뿐이란 말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 4절의 말씀입니다.

 

(요15:4)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이렇게 우리는 예수라는 참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아무 공로나 자격이 없는, 면목 없는 가지들일 뿐입니다. 우리를 더욱 면목 없게 만드는 구절을 한 군데 더 찾아보지요.

 

(계19:11~16)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이 불 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 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여기보시면 시편 2편에 나오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백마를 타고 철장으로 적들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분의 이름이 충신과 진실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누구지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피 뿌린 옷을 입고 있는 예수의 뒤에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하늘의 군대들이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앞장을 서셔서 모든 저주와 심판을 다 받아내어 온통 피가 뿌려진 옷을 입으심으로 뒤에 따라오는 당신의 군대들인 성도가 희고 깨끗한 하얀 세마포를 입게 된 것입니다. 원래는 그 피 뿌린 옷은 우리가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뿌려지는 피도 우리의 피였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제물이 되심과 동시에 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을 다 아는 사실이지요? 제사장이 제물로 제사를 드릴 때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제사장이 아무리 금실 은실로 짠 좋은 옷을 입고 있다 하더라도 제사를 드리면 그 제물의 피가 옷에 낭자하게 묻게 됩니다. 하물며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장의 모습은 어떠하겠습니까? 피로 낭자하게 되겠지요? 그렇게 구약에 나오는 제사장이 제물을 잡고 제단에 바치면서 그 옷에 피가 묻게 되는 것은 바로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 좋은 포도원이 된 것은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공로나 우리의 열심과 노력은 단 1%도 개입될 수 없는 것입니다.

 

(창49:22)(쉬운 성경)

22  요셉은 열매를 많이 맺는 포도나무와 같고 샘물가에서 자라는 풍성한 포도덩굴과 같다. 요셉은 담 위에 가지가 무성한 포도나무와 같다

     23    사람들이 그를 화살로 맹렬히 공격하고 무섭게 활을 쏘아댄다

     24  그러나 요셉의 활이 더 잘 맞고 요셉의 팔이 더 힘세다. 요셉의 힘은 야곱의 전능하신 하나님에게서 오고 그의 능력은 이스라엘의 바위이신 목자에게서 온다

 

보세요. 요셉이 어떻게 해서 열매를 맺는 좋은 포도나무가 된 것입니까? 24절에 나오지요? 요셉의 힘은 야곱의 전능하신 하나님에게서 오고 그의 능력은 이스라엘의 바위이신 목자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들 포도나무들의 참 포도나무로의 변신은 전부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참 포도나무로서의 우리의 신분을 자각하고 들 포도나무와 같이 자신의 뜻과 소원을 위해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쌓고 의존하여 행복과 만족에 도달하려 하는 모든 시도를 멈추고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순종하여 항복하는 길만이 가장 행복한 길임을 잊지 말고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는 삶을 견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 자신의 지혜와 힘을 이용하여, 그리고 이 세상의 힘을 쌓아서 인간적인 행복에 도달하는 저급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지어진 자들이 다시 그 자리로 회귀하여 변하지 않는 영원한 행복과 안식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인기 있고 힘 있는 자가 되어 들 포도나무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감추어지고 낮아져서 겨자씨처럼 보잘것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올바른 삶의 원리로 살아가는 참된 성도의 삶임을 잊지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에비앙이라는 생수를 아시지요? 그 에비앙이라는 생수는 알프스의 만년설이 빙하에서 분리되어 15년을 지하수로 흘러 내려오면서 천연 정화가 되어 세계 최고의 1급수가 된 것입니다. 알프스에서 남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인 레만 호수의 에비앙이라는 도시까지 그 물이 내려오는데 무려 15년이 걸립니다. 그것도 땅속으로 흘러서.

그런데 똑같이 알프스에서 발원하여 땅 위로 흐르는 물이 있습니다. 그 드러난 물은 생수로 쓸 수가 없습니다. 밑으로 감추어져서 바위와 모래와 미생물들을 통과하며 온갖 장애물을 다 통과해낸 그 물이야 말로 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는 1급 생수로서의 가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이 땅에서 감추시는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낮아진 자로, 겸손한 자로 살면서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자로 완성이 되면 그 때 하나님 나라로 입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드러나는 들 포도나무가 되시겠습니까? 낮아지고 겸손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참 포도나무가 되시겠습니까? 선택하십시오.

 

그렇다면 어차피 우리는 우리의 힘과 지혜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열매를 맺는 것인데 왜 주님은 과실을 맺지 않는 포도나무는 제해 버리시겠다는 무시무시한 말씀으로 겁을 주고 계시는가? 거기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계속해서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t��)SA� @� N-US" style="mso-fareast-font-family:굴림;font-family:굴림;mso-hansi-font-family:굴림;font-weight:bold;">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 시대에는 팔레스타인 지방에만 국한 되었던 복음 전파 사역이 땅 끝까지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그렇게 되었지요? 지금은 전 세계에 선교사들이 파송이 되어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믿는 자들 안에 들어가 계신 예수님의 사역에 믿는 자들을 동참시켜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니까 주님께서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한 일을 할 것이고,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 확장과 완성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님처럼 쓰여 지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게 확실하지요?

 

그런데 어떻게 그 일이 하게 된다고요? 하나님과 본체이셨으나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으로 ‘더 큰 일’을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절대 자기 자랑, 자기 증명을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자기의 소원을 이루는 종교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죽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보다 더 큰일을 하실 분들입니다. 거기에는 예수처럼 비워주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부터라도 죽읍시다. 오늘부터라도 예수보다 더 큰일을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