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74 - 성령의 오심과 계명지킴과 사랑의 문제   (요14:12~24)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21

74 - 성령의 오심과 계명지킴과 사랑의 문제

 

(요14:12~24)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 이니라

 

 

우리는 지난주에 본문 15절과 21절의 예수 사랑과 계명지킴의 내용을 샌드위치 빵으로 보고 그 사이에 기록되어 있는 성령의 오심이라는 샌드위치 속을 공부하면서 성도의 예수 사랑과 계명지킴은 성령 강림에 의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임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성령의 오심과 그로 말미암게 되는 예수 사랑과 이웃사랑, 그리고 계명지킴의 연관성에 대해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에는 샌드위치 빵에 대해 공부를 했다면 오늘은 샌드위치의 속에 대해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 18절을 보시면 주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시는 이유가 나옵니다.

 

(요14:18)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왜 성령을 보내시는 겁니까?이제 주님이 하늘로 승귀를 하시게 되면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고아’의 상태가 되기 때문에 그들을 고아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신 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구성하고 있는 한자의 ‘고’(孤)는 ‘외롭다’ 혹은 ‘홀로이다’라는 뜻입니다. ‘아’(兒)는 ‘어린이’ 라는 뜻을 가지지만, ‘사람’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전적으로 말하자면, 고아는 부모 없는 어린이를 가리키지만, 넓게 보자면 홀로 사는 사람들, 혹은 외로운 사람들을 다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르파노스’는 부모를 잃은 자녀뿐 아니라 자녀를 잃은 부모에게도 쓰이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헬라어에서의 고아는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지칭하는 말일 뿐만 아니라 의지할 곳을 잃은 모든 이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자식에게 부모가 있다는 사실, 혹은 부모에게 자식이 있다는 사실은, 마치 풀밭에 내다놓은 염소가 줄에 매어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줄이 없으면 그 염소는 제 마음대로 다니다가 길을 잃고 맙니다. 그 줄이 너무 바짝 매어 있으면 행동반경이 너무 좁아 구속을 받습니다. 적당한 길이로 매어 있는 염소의 목줄은 염소의 ‘자유’를 보장하는 동시에 ‘안전’을 보장해 줍니다. 그렇듯, 사랑의 줄로 서로 매어 있는 부모와 자식의 줄은 서로에게 자유와 안전을 보장해 주는 아주 든든한 안전 줄입니다. 이것은 스승과 제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스승은 든든한 안전과 자유를 보장해 주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스승이 이제 곧 하늘로 떠나게 됩니다. 그 현실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마치 염소의 목에 걸려 있던 줄이 끊어지고, 허허 벌판에 홀로 내버려진 것과 같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부모와 자식과 스승의 자리에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고아와 같이 버려지게 될 제자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겠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세상이 볼 수 없는 모습으로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19절에서 "조금 있으면, 세상이 나를 보지 못할 것 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얼마 후에 예수님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인식이 되고 인지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요14:19)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렇지요? 그런데 주님은 그 성령을 보혜사(保惠師)라 부르십니다.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도우시는 스승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보혜사는 ‘또 다른 보혜사’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오신 보혜사가 계셨던 것이지요? 그게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서 보혜사의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께서 승귀하시면 또 다른 보혜사, 즉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영으로서의 보혜사가 내려오셔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거하시며 그들을 도우실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보혜사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과 전혀 다른 분이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과 뜻을 가지신 분이신데 오시는 모습이 다르다는 의미에서 ‘또 다른’이라는 형용사가 붙은 것입니다. 정리를 하면 예수가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하시려했던 일을 똑같이 이루시기 위해 오시는 분이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뭐 다른 것 하러 오신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26절로 가면 좀 더 분명해 집니다.

 

(요:14:26)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보혜사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을 가르치셔서 예수님께서 생전에 말씀하신 모든 것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숙식을 같이 하며 하늘의 비밀과 구원의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통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당신이 직접 하나님 백성들의 눈과 귀를 여시고 예수께서 하신 일과 그 분의 가르침에 대해 밝히 알리시는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을 올바로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은 우리를 진리이신 예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시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결코 입에 거품을 물고 펄펄 뛰면서 신비한 환상이나 기적을 보여주러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닌 것입니다.

 

(요16:7-8, 12-13)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은 예수가 그렇게 살다 가신 것처럼 자의로 말하지 않으시고 오직 듣는 것만 말씀하시며, 이 가시적 세상의 현상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장래일, 즉 영원한 세상에 관한 일에 관해 알려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시는데, 진리가 뭡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잊지 마세요. 진리는 곧 예수입니다. 그 말은 이 세상의 참된 가치는 예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참 된 생명에 이르는 길도 예수밖에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예수 이외의 다른 것들을 의지하여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수만이 진리이며, 예수만이 생명에 이르는 길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 성령이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성령의 오심은 그렇게 예수의 지상사역의 재현인 것이며, 예수의 지상사역에 비해 범위 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더 크게 확장된 사역이고 하늘에서 이미 완성되었다는 의미에서의 더 큰 사역인 것입니다.

이어지는 14절을 보시면 더 확실하게 이해를 하실 수 있습니다.

 

(요16:14)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3절에서 보혜사 성령이 자의로 말하지 않고 들은 것만을 말씀하신다고 하셨는데, 누구에게 무엇을 듣는다는 말씀입니까? ‘내 것’이라는 말을 잘 새겨서 보세요. 내 것이 누구 것입니까? 예수님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성도들을 가르치고 깨우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사역을 그대로 이 땅에서 재현하시고 이해시키시는 역할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성령을 받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요14:17)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절대 성령을 받지 못한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창세전에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백성들에게만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분명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사람과 성령을 받을 수 없는 세상이 구별되어 존재한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예수에 의해 하나님의 처소가 되도록 작정된 사람들 이외에는 절대로 성령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금방 이런 질문이 드실 겁니다. 왜 세상은 성령을 받지도 못하고 이해도 할 수 없을까? 성령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일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을 진리로 이끌고,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가르치시며,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의 진의를 올바로 이해시키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사역은 모두 십자가로 결론이 나고, 진리로 가는 길도 예수의 십자가로만 말미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배우기 위해서는 이 세상이 쏟아놓은 문명의 열매가 어떤 것인지를 경험해야 하고,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배워야 하며, 심판의 무시무시함이 어떠한 것인지를 맛을 보아야 합니다. 즉 성령이 함께 하시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몸으로 체험하며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네들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를 절대 포기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의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며 십자가의 원리로 이 땅을 살아간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세상에게 배척을 받지 절대 영접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성령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도는 하나님의 정지작업으로 그 삶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당신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처소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그들의 마음을 거처로 삼아 들어오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예수와 십자가라는 절대 진리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렇게 우리를 한시도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의 성숙과 완성을 도우십니다.

18절을 보시면 다시 오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에 쓰인 동사의 시제가 직설법 현재형입니다.

 

(요14:18)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여기에서 ‘오리라’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동사 ‘엘코마이’가 직설법 현재형입니다. 헬라어의 직설법 현재형은 계속적이며 반복적인 것을 묘사할 때 쓰인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는 것은 먼 미래에 있을 재림의 상황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상징적으로 예시되고 시작된, 그러한 형태로 늘 오신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성령이 ‘왔다 갔다’를 반복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 함께 계셔서 우리와 늘 교통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육신적으로 보면 고아와 같이 내버려진 상태에 있지만, 영적으로는 늘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늘',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늘 다시 오신다는 말은 우리와 늘 함께 계신다는 말을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율법을 지키는 자들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로 만들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 강림의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가 가셨지요? 거기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길 원하시는 분들은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성령 편’을 잘 참조하세요.

 

그렇게 성령의 오심에 의해 계명을 지킨 자가 되고, 예수를 사랑한 자가 된 성도들은 이 땅에서도 계명을 지키는 자로, 예수를 사랑하는 자로 성숙이 되어져 가게 됩니다. 그게 성령이 하시는 일이니까요.

그렇다면 성령을 받아 이 세상에서 계명을 지키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된 자들이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표가 나게 되는 걸까요? 로마서로 가면 그렇게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표가 나게 되는지에 관해 잘 나와 있습니다.

 

(롬13:8~10)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이니라

 

보세요. 율법, 즉 계명을 지키는 이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다른 말로 성령을 받은 이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 땅에서 표가 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웃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은 율법의 지향점이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완성이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율법은 규칙들과 법칙들, 개별적 권면들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요, 인생의 문제로 접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규칙과 법규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결과 되는 삶의 질이 중요한 것입니다. 율법은 항상 전체성과 종합성(completeness), 그리고 인격적 요소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 즉 계명은 소극적인 도덕 주의자를 양산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과 인격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는 어절의 진의 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자로의 성숙과 완성이 율법과 계명의 궁극적 지향점인 것입니다.

 

(갈5:6)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 이니라

 

그렇다면 우리 성도는 모두 이 땅에서 계명을 지키고,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로 지어져 가야 한다는 얘기인데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볼 때 정말 그렇게 변해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분명 ‘나를 사랑하는 자들은 계명을 지키고,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이웃을 사랑 한다’고 하셨는데 우리에게 정말 그러한 성숙이 눈에 띄게 일어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잘 안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로 그 딜레마에서 빠져 나와야지요?

잘 보세요. 주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레위기 19장 18절을 그대로 인용하신 것입니다.

 

(레19:18)

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건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율법입니다. 주님이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도 한 번 읽어 볼까요?

 

(마19:16~19)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 이니라

 

예수님께서 그 레위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열심히 사랑해서 천국가면 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로마서 5장으로 가면 조금 의아한 내용이 나옵니다.

 

(롬5:20)

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의 범죄를 더욱 지적하고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율법은 우리의 사랑 없음을 폭로하기 위한 몽학 선생이었던 것이지 우리가 그 명령을 좇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닌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고 우리의 범죄를 폭로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그 율법을 이루실까요?

 

(롬8:3-4)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율법은 누가 지킨 것이다? 예수님이 지켜서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의 최종 완성이 사랑으로 귀결되는 것이고, 그 율법을 예수가 다 지켜서 우리에게 전가를 시켜 주신 것이라면 우리는 지금 이웃을 사랑한 자가 된 것입니까? 아니면 또 다른 사랑을 해야 하는 자들입니까?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은 십자가 안에서 다 충족이 되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구원에 우리가 보탤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엡2:8~9)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갈6:14~15)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 하니라

15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이렇게 우리가 우리의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원형으로서의 그 사랑의 흉내는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이 ‘에로스, 필레오’라는 단어로 표현을 합니다. 그게 인간이 본성적으로 겨우 내 놓을 수 있는 사랑의 종류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은 ‘아가파오’의 사랑입니다. 아가파오라는 단어는 고대 헬라어 문헌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단어입니다. 오직 성경에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 말은 그 아가파오의 사랑은 인간의 본성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사랑임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이외에 그 어떤 문헌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던 그 아가파오라는 단어가 성경에서는 너무나 일반적이며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 ‘아가파오’라는 단어를 서른 번이나 썼습니다. 아가파오는 인간 세상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굳이 설명을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바로 아가파오라는 단어에 함의 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유익은 전혀 고려치 않고 자신의 상함과 손해를 감수하며 자신 이외의 다른 존재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사랑, 아가페’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그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섬기는 척 하는 그런 사랑 말고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이 성경이 요구하는 ‘아가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세상에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그 사랑의 내용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장황하게 설명을 해 놓은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아가페의 사랑은 이 세상에 개념 정리가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고전13:4~7)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게 아가파오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도대체 누가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 ‘아가파오’의 사랑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단 말입니다. 그 사랑을 예수가 십자가에서 해 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의 것으로 전가시켜 주셨단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아니 그것을 믿게 해 주시기 위해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실을 믿는 것이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새로운 피조물로 완성이 된 자들입니다.

 

(고후5:17)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기에서 ‘되었도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 ‘게노넨’이 직설법 완료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계명을 지킨 새 것이 된 것이고, 예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렇지요? 물론 영적인 면에서요.

제가 확실하게 증거를 대 드리겠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아가파오’의 사랑이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며, 하나님과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거기에 대한 구체적 묘사가 빌립보서 2장 5절에 나옵니다.

 

(빌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게 ‘아가파오’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 마음을 품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고린도 전서 2장으로 가면 아주 기쁜 진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고전2:16)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우리 성도들에게 그 ‘아가파오’의 마음이 이미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christ)이라는 위대한 교리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가 영으로 처소를 삼아 거하시고, 우리를 계명 지킨 자, 예수를 사랑한 자로 여겨주십니다. 그리고 그 일이 어떻게 완성이 된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경험하게 하시고 가르치시고 이해를 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이해하고 깨닫게 될 때 우리 안에서 동일한 예수의 사랑, ‘아가파오’의 사랑이 격발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폭로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율법은 몽학선생이니까요. 우리에게 왜 예수와 십자가가 필요했는가를 알게 해주는 몽학 선생이 율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도 그러한 ‘아가파오’의 사랑을 쉽게 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으로 귀결되는 율법에 의해 우리의 실체가 낱낱이 폭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정이 그러한데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인간의 옷을 입히시고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당신의 백성들의 ‘사랑 없음’을 못 박아 죽여 버리시고 예수가 해 낸 ‘아가파오’의 사랑을 그 죽은 자들에게 전가시켜 다시 살려 내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너희가 율법을 다 지킨 자들이고 나와 이웃을 목숨 바쳐 사랑한 자들이다’라고 선언을 해 버리셨습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 사실을 인생을 통하여 뼈저리게 배우고 경험한 사람들 속에서 자기부인이 일어나게 되고 그러한 자기부인을 통해 그 속에 새 생명으로 살고 계신 예수의 ‘아가파오’의 사랑이 조금씩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항상 무언가를 요구할 때에는 복음의 교리를 먼저 설명한 후에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가 3장까지에서 교리를 설명하고 4장부터 행동강령을 이야기하지요? 로마서는 어때요? 11장까지 은혜의 복음을 설명한 후에 12장부터 ‘그러므로’라는 접속사 뒤로 우리의 실천 강령을 기술합니다. 성경이 항상 그런 구조를 견지하는 것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그런 삶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일4:10~13)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시키시고 그 사랑을 이해하는 만큼 성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잘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요일4:19)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은혜의 복음을 먼저 배우고 그 복음의 이해와 더불어 예수께서 행하셨다는 바로 그 사랑을 해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무언가 구원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신인 협동의 차원에서의 율법주의도 문제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므로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무 율법주의도 큰 문제입니다. 피아니스트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피아니스트 들 중에는 기계적으로 한 음도 틀리지 않고 현란한 기교를 동원하여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예술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 기술만이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술에는 당사자의 혼이 담겨야 합니다. 기계적인 기술은 로봇들이 훨씬 뛰어납니다. 요즘에는 컴퓨터 소프트웨어들이 발달을 해서 리듬과 코드와 장르를 적어 넣으면 스스로 편곡을 해서 반주를 만들어 주는 그런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리듬, 박자 모두 정확합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앨범을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렇지요? 예술에는 예술가의 혼이 빠지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게 율법주의의 맹점입니다. 율법주의는 개별적인 법규를 지켜서 소극적 도덕주의자는 될 수 있어도 사랑이라는 혼이 담긴 삶을 성취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예술가가 음표나 박자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연주를 해도 안 됩니다. 프리 재즈에도 악보가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막 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율법의 혼을 성취한 사람이 개별적 율법의 세목을 무시해도 안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렇게 원리에 대한 성실함도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고 그 기계적인 기술에서 머물지 않고 그 속에서 지향되어지고 열매 맺혀야 하는 풍성한 결론도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주의에 묶여도 안 되지만 하나님의 요구를 완전히 무시해 버려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원리에 충실하려 노력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잘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것이 함의하는 사랑의 핵심 내용, 즉 사랑의 지향점이 어디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8절을 다시 보세요.

 

(롬13:8)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우리 성도는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인데 그 사랑의 빚이라는 단어 ‘옵헤일로’라는 단어가 로마서 1장에서 나왔던 단어입니다.

 

(롬1:11~15)

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로마 교회를 포함한 모든 자들에게 빚을 진 자라고 소개를 합니다. 여기에서 ‘빚을 지다’가 ‘옵헤일로’입니다. 그런데 무엇에 빚을 졌다는 것입니까? 복음에 빚을 졌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빚을 진 것과 복음에 빚을 진 것을 같은 단어 ‘옵헤일로’를 써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사랑을 빚진 자로서(채무자) 반드시 사랑을 내 놓아야 하는 자들임과 동시에 복음에 빚을 진 자들로서 복음도 반드시 내 놓아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에 빚을 진 것과 복음에 빚을 진 것은 같은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해야 할 ‘아가파오’의 사랑과 ‘복음’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을 간단히 줄여서 말하면 ‘아가파오’의 사랑은 항상 ‘복음’과 ‘구원’을 목적으로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사랑은 항상 복음을 통한 상대방의 구원으로 귀결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에게 요구되는 ‘아가파오’라는 사랑의 정체인 것입니다.

 

사랑은 무조건 용납해 주고, 무조건 용서해 주며, 무조건 포용해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조금 부담스러워 하거나, 아니면 거북하게 여기거나, 아니면 강력하게 거부할 지라도 그에게 복음을 이해시키고 예수를 소개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느라 가족들과의 관계가 소원해 졌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그들을 죽도록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러한 손해와 불이익을 감수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우리 안에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유익과 편안함을 위해 식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이웃들과 아무 잡음 없이 지내고 나는 것이 좋은데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의 구원에 우리의 사랑을 쓰고 계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여러분 안에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이 사랑하는 분들이 꼭 예수를 믿고 여러분과 함께 영생을 살았으면 좋겠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열렬한 아가파오의 사랑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과 가족을 열렬히 아가파오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바로 계명을 지키고 율법을 지키는 일이고 그 일은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에서 오게 된 것입니다.

그 모든 일들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끝

우�u %� 0L� �� 죽고 우리는 장갑이 되었습니다. 그 장갑 안에 예수라는 손가락이 들어와 우리를 사는 것입니다.

 

(갈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더 큰 일’은 어떤 일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의 일이 어떤 것인지 자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것과 비교하여 더 큰 일이라는 뜻이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에 도구로 쓰이는 삶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에 참으로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사역 지는 팔레스타인 땅에 국한이 되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생애 기간 동안에 복음을 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한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주님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심겨지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통하여 보혜사 성령께서 오셨고 성령을 받은 믿는 자들이 예수님의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 볼까요?

 

(행2:37~41)

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

 

베드로가 한 번에 삼천 명을 회심시켰습니다.

 

(행4:1-4)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道) 전함을 싫어하여

3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행21:20)

20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어떠세요? 믿는 자들이 예수님이 삼년 반 공생애 기간 동안 하신 일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하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도 더 광범위해졌습니다.

 

(마28:18~20)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행1:8)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 시대에는 팔레스타인 지방에만 국한 되었던 복음 전파 사역이 땅 끝까지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그렇게 되었지요? 지금은 전 세계에 선교사들이 파송이 되어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믿는 자들 안에 들어가 계신 예수님의 사역에 믿는 자들을 동참시켜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니까 주님께서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한 일을 할 것이고,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 확장과 완성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님처럼 쓰여 지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게 확실하지요?

 

그런데 어떻게 그 일이 하게 된다고요? 하나님과 본체이셨으나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으로 ‘더 큰 일’을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절대 자기 자랑, 자기 증명을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자기의 소원을 이루는 종교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죽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보다 더 큰일을 하실 분들입니다. 거기에는 예수처럼 비워주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부터라도 죽읍시다. 오늘부터라도 예수보다 더 큰일을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