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목사/요한복음

73 - 어떻게 예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요14:12~24)

은바리라이프 2013. 10. 3. 22:20

73 - 어떻게 예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요14:12~24)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 이니라

 

우리는 지난주에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하게 된다고 하는, 예수님이 하신일보다 더 큰 일에 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성육신하셔서 수난과 고난을 통과하시며 결국에는 십자가까지 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 성도들도 똑같이 그러한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된다고 하신 것이었고, 주님의 십자가 공생애가 지역적, 범위적 제한 속에서 행해진 사역임과 대조하여 이제 주님이 하늘에 올라가셔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오셔서 성도 안에서 하실 일은 범 세계 적이며 범 인류 적으로 확장이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더 큰 일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라 했지요? 뿐만 아니라 그 더 큰일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보내시던 구약 시대와는 달리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완성된 하늘의 것을 가지고 하는 사역이기에 더 큰일인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늘의 풍요와 하늘의 복이 이 세상의 가시적인 힘들로 주어진 게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욥이나 다윗과 솔로몬 같은 사람들이 그 엄청난 풍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복을 받은 자들이 얼마나 엄청난 풍요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렇게 구약은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것으로 영적인 것을 상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상징으로서의 풍요나 복이 사라지게 되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요셉도 그랬고 욥도 그랬습니다. 예수님도 구약을 살다가 가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들로 하늘의 풍요를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성육신 하여 오셔서 하늘의 복을 병 고침과 기적과 먹 거리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늘의 비밀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풍요와 하늘의 복이 완성이 되었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인들의 마음속에 한꺼번에 부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로는 이 세상의 물질이나 힘으로 하늘의 풍요를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뚫고 들어와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시적이며 경험적인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기뻐하며 찬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요셉이 감옥에서 억울함을 토로했다면 신약의 사도들은 감옥에서 찬양을 불렀던 것이 그 예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더 큰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완성된 것을 누리는 차원에서의 일.

그렇게 범위적, 장소적 큰일임과 동시에 한 번에 완성이 된 구원이 성도의 도구됨으로 인해 다른 성도들에게 부어지는 그 큰일, 그것이 우리에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큰일은 성도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성도의 내부에서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성도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큰일은 성도가 믿음으로 자기를 부인하게 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자의든 타의든 살게 되면서 그에 의해, 죽었던 생명들이 살아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이 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성도의 내부에서 성도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그 안에 사시는 새 사람 예수가 밖으로 조금씩 살아나오게 되는 그런 모습으로도 하나님의 큰일은 성취가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오심으로 우리 가운데서 살아 역사하심으로 일어나게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도 살펴보았지만 그 큰일은 예수님이 하늘로 떠나가심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라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하늘로 승귀하신 후에 성령(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내려오심으로 일어나는 일임을 고지하기 위해 12절 말미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라는 어구가 이유와 원인을 나타내는 어구로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보다 더 큰일을 할 것인데, 그 이유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성령이 내려오심으로 그 분이 그 더 큰일을 주관하여 시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그 더 큰 일 또한 예수께서 성령의 모습으로 행하시는 일이지 우리가 행하는 일은 아닌 것입니다. 본문 12절과 13절, 14절을 함께 읽어보면 그 것이 좀 더 분명하게 와 닿습니다.

 

(요14:12-14)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12절의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다’와 ‘이보다 더 큰 것도 할 것이다’에서 쓰인 ‘하다’라는 동사가 전부 헬라어 ‘포이에오’입니다. 그리고 13절과 14절의 ‘내가 시행하리니’에 쓰인 동사도 ‘포이에오’입니다. 그러니까 13절과 14절에서 예수님께서 시행하시겠다고 하시는 일과 12절에서 예수님이 하신일과 성도가 하게 될 일, 그리고 더 큰 일은 같은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전부 예수가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의 일을 성도의 기도를 통하여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도 ‘더 큰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더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기도’와 함께 필연적으로 필요한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 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의 강림’인 것입니다.

제가 거기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자세하게 다루어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본문에 여러 가지 중요한 내용이 많이 들어가 있는데 하나하나 씩 차근차근 해결해 가보자고요.

먼저 기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13절과 14절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 성도가 하게 될 더 큰일과 연결을 시켜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 들어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가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하게 될 더 큰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맞지요? 그 더 큰일을 위해 예수의 이름으로 구해야 하는 것이고 그 구하는 모든 것을 예수님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들어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더 큰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닌, 목숨까지도 내어 놓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기도는 간단히 말해 ‘살기 위해’하는 기도가 아니라 ‘죽기 위해’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나를 죽이는 것, 즉 ‘자아’라는 감옥에서 탈출을 하는 것이 ‘더 큰일’인데 그 일에 필요한 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면 모두 다 들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기도의 목적은 ‘나를 죽이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기도의 본질은 ‘나를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2007년 한국 기독교 부흥 100주년 기념 대회의 주제가 ‘하나님 살려 주세요’였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회개할 테니 살려 주세요’라는 모토로 상암 경기장에서 수십만 명이 모여서 집회를 했습니다. 여러분, 그 것이 옳은 요구입니까? 성도의 회개가 살려고 하는 회개가 맞나요? 성도의 회개는 더 확실히 죽는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죽여주세요, 더 확실히 죽여주세요.’였어야지요.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을 죽이고 부인하고자 하는 기도를 다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믿는 자들이 모두 행해야 하는 예수님이 하신일보다 큰일이니까요.

 ‘너희가 부인되는, 너희의 옛 사람이 죽고 나의 뜻이 성취가 되는 데에 필요한 기도는 뭐든지 다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이란 말입니다. 왜 그 더 큰일과 기도가 붙어있는지 아시겠지요?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다 들어주시겠다는 기도는 ‘내 이름으로’라는 어구에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라는 것이 ‘그의 이름’으로 제한을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 어구에서의 ‘무엇이든지’는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어구에 의해 제한을 받지 않으면 그 ‘무엇이든지’ 안에 들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기도의 내용은 ‘예수의 이름으로 구해지는 무엇이든지’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이러합니다.

그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무엇이든지’가 의미하는 것은 첫째로, 그 요구가 나의 요구가 아닌 예수님의 요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내 입에서 나오는 요구이기는 하지만 그 요구는 예수님의 심중에서 나오는 요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뉴저지의 케직이란 곳이 있는데 그 곳에 ‘자비의 부락’(Colony of mercy)라는 알코올 중독자들의 처소가 있습니다. 그 부락의 창설자는 윌리엄 로우라는 분인데 그 분의 아들과 손자까지 그 곳에 함께 살면서 알코올 중독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갱생의 길을 마련해 주는 그런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 일가의 명성은 뉴저지 전체에 퍼져서 누구나가 존경을 하는 그런 일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락에 들어와 있던 어떤 알코올 중독자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 하며 그 부락을 탈출해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술집으로 들어가서 ‘윌리엄 로우 부락에서 왔는데 지금 돈이 없으니 윌리엄 로우의 이름으로 술 한 병만 주쇼’하고 요구를 했다고 합니다. 그 때 술 집 주인이 그에게 한 말이 아주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무얼 원한다고요?’, ‘술이요’, ‘누구의 이름으로?’, ‘윌리엄 로우의 이름으로’, ‘이것보세요. 당신이 말하는 그 윌리엄 로우가 자비의 부락을 만드신 그 분을 말하는 것입니까?’, ‘네’, ‘ 그 분이 하는 일은 당신과 같은 부랑자를 데려다가 사람 만드는 일인데 당신이 지금 그 분의 이름으로 나에게 와서 술을 달라고 하는 것이요? 그 분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내 술 집 손님들이 될 수 없습니다.’ 윌리엄 로우의 이름으로는 술을 요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구해야 하는 ‘무엇이든지’는 그렇게 우리가 원하는 ‘무엇이든지’가 아니라 예수가 원하는 ‘무엇이든지’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단 한 가지 사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는 자들에게서 이루어지는 다스림과 통치의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구하시는 ‘무엇이든지’는 바로 우리가 부인되고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는 자로 지어지게 되는 것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당신의 이름을 주며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는 윤허를 받을 만큼 그 분과 친밀한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어떤, 돌아다니며 마술을 하는 이들이 바울과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려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때 귀신이 그들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바울도 알고 예수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하고 그들을 올라타서 두들겨 패고 옷까지 홀랑 벗겨 버렸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누구의 이름으로 어떤 것을 구한다는 것은 친밀한 관계성을 내재하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의 인감도장을 마음대로 쓸 수 있을 만큼 그 분과 친밀한 관계성을 확립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지 않고 그 분의 이름을 마음대로 대면서 자신의 요구를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참 어려운 것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기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 하는데 그 분이 인감 도장을 빌려줄 만한 친밀한 관계성이 전제되지 않은 많은 이들이 무턱대고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내 놓으며 예수의 가짜 인감도장을 마구 찍어대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 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인감도장을 예수님의 아버지인 하나님께 갖다 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근사하게 예수의 이름을 불러댄다 할지라도 그 아버지가 ‘그건 내 아들 인감도장이 아닌데’하시면 거기서 끝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와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이들이 예수의 마음과 의중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게 말이 됩니까? 그 예수의 의중은 뭐라고요?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을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 있는 예수와 친밀한 이들의 기도의 범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의 성숙’의 범주 안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보냄을 받은 자가 어떤 이름을 대는 것은 그 보내신 분의 요구에 나도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는 뜻이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뜻에 내가 적극적으로 동참하겠다는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그러합니다.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니까요. 그 예수의 뜻에 열심히 동참하고자 하는 이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열심히 구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완성, 나의 옛사람의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한다는 것은 첫째로, 그 요구가 나의 요구가 아닌 예수님의 요구여야 하는 것이고, 둘째로 나와 예수와의 친밀한 관계성이 전제 되어야 하는 것이고, 세 번째로 나에게 예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열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응답으로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무엇을 해 주십시오’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에서 출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의 이름으로 구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확인되며, 더 깊어지는 데에 쓰이는 것이지 하나님이 내게 굴복하여 내 손아귀에 놀아나는 방법은 결단코 아닌 것입니다. 그건 기도에 의도된 핵심이 아닙니다.

 

기도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께 맡김’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맡김으로서 하나님의 결정 사항에 따르겠다고 하는 것이 기도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어떤 행위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 분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신자의 모든 삶이 다 기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때때로 그 삶이 살아지지 않을 때 우리는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무엇을 이루어 달라는 요구이기 이전에 그와는 정 반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는 나를 고쳐 주소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을 다시보세요. 예수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응답하시겠다고 하시고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14:13)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시행하시겠다고 하시면서 그 이유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밝히십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의 영광과 결부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분을 맞추어 주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기도가 응답이 된다는 말입니다.

 

랄프 카이퍼(Ralph L. Keiper)라는 훌륭한 성경 강해 자가 있습니다. 그 분은 눈이 아주 나빠서 남들이 100피트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것을 10피트 거리에서도 보지 못하는 그런 시각 장애자였습니다. 거기다가 가까운 것도 잘 보이지 않아 이래저래 어려서부터 그 고통이 말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 십 년간을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를 했는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이렇게 물으시더랍니다. ‘카이퍼야, 너는 사람의 최고 된 덕목이 무어라고 생각하니?’ 카이퍼 목사님은 즉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소 요리 문답 1번으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다시 마음속에 하나님의 물음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길 원하니?’ 카이퍼가 대답했습니다. ‘네 그럼요’ 하나님이 물으셨습니다. ‘네가 만일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너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과 네 시력을 완벽하게 되찾는 일 둘 중에 어떤 일을 선택하겠느냐?’ 그 때 카이퍼 목사님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목사님은 무릎을 꿇고 ‘물론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제 시력이 어떠하다 할지라도 그 것과 하나님의 영광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하고 대답을 하셨답니다.

그 때 다시 한 번 마음속에 하나님의 물음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나의 영광을 위해 너의 시력을 그렇게 놔두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니?’

그 이후로 랄프 카이퍼 목사님은 한 번도 자신의 시력에 대해 불평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분에게는 시력을 안 고쳐 주신 것이 응답이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영광에 필요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 분은 또 다시 시력을 고쳐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떠셨나요?

 

(요17:4)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보세요.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수난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겟세마네 기도에서 여러 번 확인한 것처럼 예수님은 할 수만 있다면 그 잔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로 기도를 마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그 독배를 아들이 마시고 죽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힘들겠지만 나를 위해 죽어라’로 응답이 된 것입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우리는 사탕을 달라고 조르고 하나님은 쓰디쓴 치약과 칫솔을 주시는 것이 올바른 기도의 응답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도구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우리가 기도하여 간절히 구해야 하는 것은 성령의 온전한 사역, 한마디로 성령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이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시어 우리를 계명을 지키는 자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로, 더 큰일을 하는 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눅11:9~13)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 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분명하지요? 그렇다고 제가 지금 우리가 필요한 것을 전혀 구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자녀가 아버지께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 왜 나쁩니까? 그러나 오직 그것만이 기도의 핵심의도가 아니란 것을 명심하시라는 말입니다.

 

정리를 하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하게 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큰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더 큰일은 예수의 일이 그러하였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이 죽는 일입니다. 주님은 그 더 큰일을 언급하신 후에 갑자기 기도에 관해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거기에서 ‘시행하다’ ‘포이에오’가 ‘내가 한 일’의 ‘하다’의 ‘포이에오’와 같은 단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 즉 십자가를 지는 삶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시행하시겠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도해서 십자가 지는 거고, 기도해서 자기부인의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뒤에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어구를 붙여 놓으심으로 말미암아 기도의 삶과 더 큰일의 삶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뜻을 포기하는 것임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많이 다르지요? 기도는 우리의 뜻을 관철시켜 하나님을 굴복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주님은 기도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뜻을 접는 것으로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하는 더 큰일 또한 우리가 뭐 대단한 업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큰일’이나 ‘기도’나 둘 다 우리의 옛사람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최종 목표나 더 큰일의 내용은 ‘나’라는 우상을 사랑하던 자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이 이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요14:15)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이것이 또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더 큰일과 기도에 대해 말씀을 하시던 주님께서 갑자기 ‘나를 사랑하면 계명을 지킬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더 큰일과 기도와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계명을 지키는 것이 다 같은 목적지를 가진 것임을 알 수 있지요?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15절의 주님 사랑, 계명지킴이라는 내용과 21절의 내용이 같은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주의 깊게 보세요.

 

(요14:21)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렇지요? 이렇게 양쪽에 같은 내용이 나오면 금방 생각나는 히브리 사람들의 문학기법이 뭡니까? 샌드위치 기법입니다. 가운데에 있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양 쪽에 빵을 대고 설명을 한다든지 양쪽의 빵을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하기 위해 알기 쉬운 샌드위치 속을 하나 넣어서 상호 설명을 하는 그런 구조입니다. 요한이 그 15절과 21절을 샌드위치의 빵으로 놓고 그 사이에 샌드위치 속으로 어떤 내용이 들어가 있는지 볼까요?

 

(요14:16-20)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보시다시피 샌드위치 속으로 성령 강림의 이야기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 다른 말로 더 큰일을 하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응답 받는 것은 성령이 오시는 일로 말미암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더 큰일을 하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모든 것을 응답받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성령이 이미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계명을 지키고 있나요? 다른 말로 바꾸어 볼까요? 나 자신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까? 계명을 다른 한 단어로 바꾸면 나 아닌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정말 우리가 나 아닌 다른 존재, 예수님이든 이웃이든 나보다 더 사랑하고 있습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지요? 그런데 주님은 분명 우리에게 더 큰일을 하게 될 것이고,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모든 것을 응답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이거든요. 따라서 우리는 완벽하게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는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고 있어야 맞습니다. 우리가 믿는 자들이 맞다면요. 그런데 자신이 없지요? 그 딜레마의 해결은 성경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본문 23절을 보세요.

 

(요14:23)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15절에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지킨다’라고 하셨는데 지금 읽은 23절에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예수님의 말을 지키는 것은 같은 의미인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을 지킨다는 것은 그 예수님의 말이 우리 안에 있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그런데 말은 곧 예수님입니다.

 

(요1: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성령으로 우리 안에 와 계시지요? 본문 20절을 보세요.

 

(요14:20)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렇지요? 잘 따라오세요. 지금 우리가 계명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를 추적하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을 지킨다는 것이고, 예수님의 말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다는 말인데, 그 예수님의 말이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어요. 한군데만 더 보고 결론을 맺어보자고요.

15장으로 가면 아주 재미있는, 결정타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요15:7)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더 큰일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의 응답이 결국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기부인과 순종의 삶’에 대한 모든 간구는 다 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어구의 조건으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어구가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20절을 보면 성도가 더 큰일을 할 수 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린 모든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조건으로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내 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라는 어구와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라는 어구는 정확하게 같은 말인 것이지요? 그런데 ‘말’과 ‘계명’이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내 말이 너희 안에’와 ‘내 계명이 너희 안에’라는 어구도 정확하게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예수가 이미 와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말이 거하고 있다는 말이 되고, 그 말은 다른 말로 우리 안에 예수님의 계명이 이미 들어와 있다는 말인 것이지요?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렘31:31~33)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 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말씀이신, 계명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는 그 새 언약의 현실이 이미 우리 안에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 스스로 일을 한다고 합니다.

 

(히4:12)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의지를 발동하여 지켜낸다는 말이기에 앞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열심으로 우리를 계명을 지킨 자로, 예수님을 사랑한 자로 만들어 내셨고 그렇게 완성하시고야 마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계명지킴이 우리 것이 된 것이고,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승귀 이후 성령의 오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계명지킴, 예수님 사랑’이라는 양쪽의 빵 속에 성령의 오심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내용을 한 구절로 요약을 한 구절이 요한 일서에 나옵니다.

 

(요일3:24)

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여기보시면 주 안에 거하고, 주가 그 안에 거하는 자는 계명을 지키는 자라 명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 예수를 모시고 있는 모든 자들은 계명을 지키는 자가 맞지요? 이 14장의 첫 구절이 어떻게 시작이 되었어요?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구절로부터 시작이 되어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만드실 처소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예수가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 안에 들어가게 만들어 우리를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하나님 백성으로 완성시키시겠다는 그런 말씀이라는 것이 더 확실해 졌지요?

아울러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를 사랑하는 자가 맞습니까? 따라서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모든 이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인 것이고, 그들 안에 예수가 거하는 것이며, 그들은 곧 예수를 사랑하는 자들이고, 예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확정된 결론을 향하여 이 세상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오롯이 순종하는 자들로 지어져 가야 하는 것이 성도이기에 성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는 자들이고, 그 기도는 자기 부인과 십자가로 지향이 되는 것이며, 그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령의 오심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는 이들이 바로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이미 완성이 되고, 결정이 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큰 일입니다. 구약 시대 때에는 율법을 지키고 회개를 해야 구원에 이를 수 있었지만 신약 때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완성된 현실을 그대로 전가 받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제화 하여 경험하며 살게 되는 것이기에 더 큰 일인 것입니다. 실패할 수 없고 중도에 포기 될 수 없는 일, 그렇기에 더 큰일입니다.

더 큰일, 기도, 계명을 지키는 일, 예수를 사랑하는 일, 성령이 오심 이 모든 소재들이 하나로 연결이 되셨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이미 계명을 지킨 자들이 되었고, 이미 예수를 사랑하는 자가 되었고 이미 더 큰일을 이룬 자가 되었고, 모든 기도의 응답을 다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진정 알게 되었다면,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되었다면 그 사랑을 아는 만큼 우리에게서 나와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요일4:19)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이 여러분을 극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여러분이 그 배우자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렇게 우리가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그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적용을 해 보세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정말 죽을 죄인이라는 것과 정말 부끄러운 존재임이 폭로가 되었을 때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세요? ‘이런 나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죽이셨다니 그 사랑이 얼마나 큰가?’그 때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지?’ 하고 고민하지 마세요. 우리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될 때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할 때 내가 그 상대방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성경에 풍성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잘 배우세요. 그리고 인생 속에서 경험하세요. 그렇게 조금씩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다보면 그 하나님이 사랑하라 주신 이웃까지도 내 사랑의 범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는 안 돼요.

 

(요일5:1)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 하느니라

(요일4:21)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 지니라

 

여러분 자신에게 많이 실망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시고 그러한 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이웃까지도 사랑하게 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고� �#��0L� �� 상함을 입고, 하면서 다른 영혼들을 살려내는 삶을 살아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음을 깨닫고 경험하며, 그리하여 다시는 자신만을 위해 살다가 그 무서운 십자가의 길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경험적 결단을 하며, 믿음으로 죽은 자의 삶을 살다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고후5:14~15)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제 우리 옛 자아는 죽고 우리는 장갑이 되었습니다. 그 장갑 안에 예수라는 손가락이 들어와 우리를 사는 것입니다.

 

(갈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더 큰 일’은 어떤 일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의 일이 어떤 것인지 자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것과 비교하여 더 큰 일이라는 뜻이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에 도구로 쓰이는 삶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에 참으로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사역 지는 팔레스타인 땅에 국한이 되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생애 기간 동안에 복음을 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한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주님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심겨지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통하여 보혜사 성령께서 오셨고 성령을 받은 믿는 자들이 예수님의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 볼까요?

 

(행2:37~41)

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

 

베드로가 한 번에 삼천 명을 회심시켰습니다.

 

(행4:1-4)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道) 전함을 싫어하여

3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행21:20)

20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어떠세요? 믿는 자들이 예수님이 삼년 반 공생애 기간 동안 하신 일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하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도 더 광범위해졌습니다.

 

(마28:18~20)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행1:8)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 시대에는 팔레스타인 지방에만 국한 되었던 복음 전파 사역이 땅 끝까지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그렇게 되었지요? 지금은 전 세계에 선교사들이 파송이 되어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믿는 자들 안에 들어가 계신 예수님의 사역에 믿는 자들을 동참시켜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니까 주님께서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한 일을 할 것이고,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 확장과 완성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님처럼 쓰여 지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게 확실하지요?

 

그런데 어떻게 그 일이 하게 된다고요? 하나님과 본체이셨으나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으로 ‘더 큰 일’을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절대 자기 자랑, 자기 증명을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자기의 소원을 이루는 종교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죽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보다 더 큰일을 하실 분들입니다. 거기에는 예수처럼 비워주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부터라도 죽읍시다. 오늘부터라도 예수보다 더 큰일을 하십시다.